한 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 손현숙
비 오는 날 빨간 구두를 신는다
골목을 기웃거리는데
창문마다 작은 쇠종을 매달았다
소리 속에서 소리가 이어졌다, 끊어졌다,
세상에서 이름을 찾다가
세상 밖으로 미끄러진 아이는
어디 가서 저를 찾아와야 하나
굽이 닳아서 발목까지 사라지는 꿈,
따뜻하고 말랑한 구름을 입에 물고
이 없는 잇몸으로 오물거리는,
여기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뱃바닥으로 기어서 달빛까지
닿으면 길이 끝나는 걸까
누가 나를 부르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팔목을 저으면서 따라오는
빨간 구두는 언젠가 만났던 얼굴이다
오늘은 종일 비가 오고
그 비를 다 걷고 나서야
쇠종처럼 흔들리는 내가 보인다
- 『멀어도 걷는 사람』, 리토피아, 2023.
감상 – 카렌이란 친구는 단정해 보이는 검은 구두 대신에 빨간 구두를 고르고, 교회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빨간 구두를 신는다. 자신을 길러준 양모의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빨간 구두를 신은 채 무도회에서 춤을 춘다. 나중에 빨간 구두가 발에서 벗겨지지 않고 춤도 멈출 수 없게 된 지경에 이르러서야 발목을 자르게 된다. 안데르센 동화 속 ‘빨간 구두’ 이야기다.
인간의 욕망을 경계한 내용으로 읽히지만 거꾸로 그 욕망을 높게 사는 입장도 있다. 주위 관습이나 남의 눈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최대한 표현하려는 몸짓으로 읽는 시각이다. 이때의 욕망은 자아실현의 매개이자 동력이 되는 셈이니 이전의 부정적 인식을 깨는 효과도 있고, 각각의 욕망 분출과 부딪침으로 세상을 얼마간 소란스럽게 만드는 면도 있다.
위 시에서 시인의 분신인 화자는 지금 골목에 와 있다. 현재의 골목은 과거의 시간을 품고 있다. 과거의 빨간 구두와 현재의 빨간 구두가 시공간을 종횡하며 골목에서 조우하거나 지나친다. 한때 골목은 아이의 세상이었지만 어느 때고 아이는 빨간 구두의 스텝으로 골목 밖 더 큰 세상으로 나갈 꿈을 간직했을 것이고, 이제 어른이 된 아이는 빗속에 다시 골목을 찾는다.
골목은 그새 늙었을까. “이 없는 잇몸으로 오물거리는,/ 여기”로 표현된 골목은 이가 나지 않은 신생과 이가 다 빠진 노후가 함께 있다. 어떻게든 “여기를 어떻게 빠져나갈까”를 궁리하던 빨간 구두는 과거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현재진행형으로도 존재한다. 아직 가보지 못한 시간 속으로 춤추며 가는 빨간 구두의 뒷모습도 연상된다.
빗속에서도 빨간 구두의 스텝은 우아하다. 한편으론 골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자 하는 마음이 춤을 추는 듯하고, 또 한편으론 몸의 뿌리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골목을 자꾸 기웃거리는 마음이 노는 듯도 하다.
그런즉, 이 시는 쇠종 안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마음이 빚은 쓸쓸하고 이름다운 종소리 아니면 그런 종소리를 담은 시 한 편의 결실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또 지나가더라도, 비가 오고 비가 그치고 또 골목이 더 늙어가더라도 빨간 구두의 스텝은 언제든 발랄할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