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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六堂) 최남선은 그의 기행문 ‘교남홍조(嶠南鴻爪)’에서
“우리 삼면이 바다가 둘린 대한국민(大韓國民), 장차 이 바다로써 활동하는 무대를 삼으려 하는 신대한(新大韓) 소년은 공부도 바다에 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고, 유희도 바다에 구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고 하면서 소년이 해야 할 공부나 유희를 모두 ‘바다’에서 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최남선이 의미하는 ‘바다’는 어떠한 것일까?
바다는 가장 완비한 형식을 가진 백과사휘(百科事彙, Encyclopaedia)라.
그 속에는 과학도 있고 이학(理學)도 있고 문학도 있고 연극도 있을 뿐 아니라 물 하나로 말하여도 짠물도 있고 단물도 있으며 더운물도 있고 찬물도 있으면 산골 물도 있고 들 물도 있으며 동대륙 물도 있고 서대륙 물도 있어, 한번 떠들어 보면 없는 것이 없으며, 바다는 가장 진실한 재료로 이른 수양 비결이라.
자강불식(自彊不息)의 정신,
독립자존(獨立自存)의 기상,
청탁병탄(淸濁並呑)의 도량,
심활(深濶)한 흉차(胸次),
원대한 경륜(經綸),
홍원(弘遠)한 규모,
노동 역작(勞動力作),
향상 정진, 불편불비(不偏不比),
불교불오(不驕不傲), 용감 활발,
호장 쾌락(豪壯快樂) 등
온갖 덕성을 다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행(事行)에 나타내니
바다는
입으로 말하는 자가 아니라, 일로 말하는 자요,
말로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몸으로 가르치는 자라
한 번 대하여 보면 큰 감화를 받지 아닐 이 없으리라. 이에 알괘라, 바다는 학술가, 수양가 할 것 없이 다 보아야 할지로다.
여기에서 최남선은 바다를 “가장 완비한 형식을 가진 백과사휘” 즉 모든 학문을 다 아우르는 ‘백과사전’에 비유하고 있다.
또한 바다는 “수양의 비결”이기도 하며, “자강불식의 정신”이나 “독립자존의 기상”을 포함한 서구의 근대 과학과 근대정신(近代精神)에의 “향상 정진”, “용감 활발”, “호장 쾌락” 등의 온갖 덕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바다는 학술가나 수양가를 구분하지 말고 다 경험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남선이
“큰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넓은 것을 보고자 하는 자,
기운찬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끈기 있는 것을 보고자 하는 자는
가서 시원한 바다를 보아라.”
고 권하는 이유는
바다가 “응당 너희들이 평일에 바라던 바보다 이상”을 줄 것이며, “크게 너희들의 협애(狹隘)한 소견과 미소(微小)한 기우(氣宇)를 깨우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
1. 계몽과 근대화 욕망으로서의 여행
근대적 의미의 ‘여행’을 권하다, 계몽과 지리학
최남선은
‘쾌소년세계주유시보(快少年世界周遊時報)’에서
“여행은 진정한 지식의 대근원”이라고 하고,
‘여행하는 인간’ 즉, 탐험가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등 여행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조선을 짊어지고 나아갈 소년들에게 ‘여행’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도록 당부하고 있다.
다만 얼마 동안 쇠강(衰降)하였던 여행성(旅行誠)을 갱기(更起)케 하야 그저 우리 소년만이라도 좀 활발하고 좀 쾌활하여 능히 남아사방(男兒四方)의 지(志)를 디딜 만한 사람되기를 권하고자 함이라. 나는 별로 여행의 덕을 송(頌)하지도 아니할 것이오 여행의 이(利)를 설하지도 아니하오리다.
그러나 나보다 삐콘스필드가 “여행은 진정한 지식의 대근원이라.” 한 말 한마디를 전하오리다.
바라노니 소년이여
울적한 일이 있을 리도 없거니와 있으면 여행으로 풀고,
환희한 일이 있거든 여행으로 늘이고,
더욱 공부의 여가로써 여행에 허비하기를 마음 두시오.
여러분에게 진정한 지식을 줄 뿐 아니라 온갖 보배로운 것을 다 드리리이다.
경부 철도 노래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1908년 자신이 창간한 잡지 『소년』 창간호부터 여행에 주목하고 이를 권하고 있음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최남선이 ‘여행’을 강조한 이유는 소년들을 계몽하고 교육시켜서 조선의 근대화를 고취시키는 데 여행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에 ‘흥국민(興國民)’으로 활약하였던 조선 민족이 오늘날 쇠약해진 이유도 “여행의 감퇴”와 “모험과 경난(經難)을 싫어함”에 있다고 보았다.
조선 사람들은
“미친놈이나 금강산 들어간다.”, “팔도강산 다 돌아다니고 말 못할 난봉일세.”,
“자식 글은 가르치고 싶어도 구경 다니는 꼴 보기 싫어 그만 두겠다.”
라고 하며 여행을 천시하고 있는데, 그 결과 조선이 오늘날처럼 쇠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지식”과 “온갖 보배로운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수양과 산행’에서도
‘여행’을 “인생 수양에 갖가지로 요긴한 효익(效益)을 구비한 것”으로 말하면서, 여행 하나로 “풍부한 경험과 박대한 지식과 구비한 훈련을 얻어 낼 수 있으니 이만한 훈련이 다시 어디 있겠냐.”며 ‘여행’의 유익함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최남선은 경부선 철도 노선을 중심으로 명승고적을 노래한 ‘경부 철도가(京釜鐵道歌)’나,
세계 각국의 사정과 문화를 노래한 ‘세계 일주가(世界一周歌)’,
백두산, 두만강을 출발하여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산맥, 하천, 평야 등의 자연 풍경과 유적지 등을 노래한 ‘조선 유람가(朝鮮遊覽歌)’와 ‘조선 유람 별곡(朝鮮遊覽別曲)’등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가(唱歌)도 많이 창작하였다.
그러면 최남선은 왜 ‘여행’에 이토록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을까?
그 배경으로 근대 지리학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지리학은 19세기에 와서 증기선, 철도, 비행기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과 과학적 조사 방법의 발전, 식민지 를 효과적으로 경영하기 위한 필요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즉, 지리학은 제국(帝國)을 경영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였고, 여행의 권유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 근대 사회로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였다.
인간 활동의 모든 현상을 지역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인 지리학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소개되고 중요성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근대 계몽기에 이르러서이다.
구한말 개화기에 지리에 관한 글을 쓴 사람은 많았지만, 대부분 비전문가로 단편적인 활동에 그쳤던 점에 비해 최남선은 지속적으로 지리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지리학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은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고등 사범부에 입학하여 전공으로 역사 지리과(歷史地理科)를 선택하였다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지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최남선의 태도는 자신이 창간한 잡지 『소년』의 지면 대부분을 지리에 관한 글로 채운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봉길이 지리 공부’, ‘해상 대한사(海上大韓史)’, ‘우리가 뇌생(賴生)하는 지구성(地球星)’ 등을 연재하여 지도, 해상, 지구 등 천문과 지리에 대한 지식을 소개하였고, 『로빈슨 표류기』나 『거인국 표류기(걸리버 여행기)』 등의 모 험심을 길러 주는 외국의 여행 소설도 번역하여 실었다.
최남선이 지리학을 소개한 목적은 교육을 통해 근대적 세계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국난(國難)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 ‘세계적 지식’이 필요함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최남선은 지리학이야말로 애국 계몽 운동(愛國啓蒙運動)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세계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여행’은 “풍부한 경험과 박대한 지식과 구비한 훈련”을 얻을 수 있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훌륭한 기회이며, 이 여행을 통해 ‘나’는 비로소 타자, 즉 근대화된 서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얻게 되는 타자 인식은 자아 인식을 유도하고, 조선의 근대화 열망에 자극을 주는 중요한 기회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최남선이 여행을 권면한 까닭은 결국 조선 사회의 계몽과 근대를 향한 교육적 필요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최남선의 지리적 교양과 국가 의식은 그의 문학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최남선은 『소년』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싣고 있는데, 이 시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최초의 신체시라는 점에서 한국 근대시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이 작품은 모두 6연(聯)에 각 연이 7행(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형식 면에서도 삼사조(三四調)가 기본이던 옛 시의 형식을 깨트리고 칠오조(七五調) 내지 삼사오조(三四五調)의 새로운 형식으로 창작되었다. 다음은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첫머리이다.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린다, 부슨다, 문허 버린다
태산(泰山)갓흔 놉흔뫼, 딥턔갓흔 바위ㅅ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디 하면서
린다, 부슨다, 문허 바린다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이 시는 ‘바다’를 의인화하여 세상과 소년들을 향해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바다’의 남성적 어조와 의성어의 사용은 바다 스스로가 지닌 큰 힘의 위용을 나타내며, 기존의 권력과 권위를 차례로 부정한다.
바다가 파괴하고자 하는 것들은 ‘태산 같은 높은 메, 집채 같은 바윗돌’,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력을 부리던 자’, ‘좁쌀 같은 작은 섬 손 뼘만 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등으로 표현되며, ‘바다’의 위력 앞에 선 이들은 한갓 힘없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부정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늘’과 ‘소년’, 이 둘뿐이다. ‘하늘’은 바다의 분신, 즉 바다와 같은 존재를 의미하며,484) ‘소년’은 ‘바다’와 뜻을 함께하여 새로운 조선 사회를 건설해 나갈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창간한 최초의 잡지의 이름을 『소년』이라고 붙인 점이나, 창간호에 소년의 훈도(訓導)를 창간 목적으로 하면서 “우리 대한을 소년의 나라로 하라”고 한 점을 보아도 그가 ‘소년’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년』 창간호를 보면 그가 기대하는 소년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금(今)에 아제국(我帝國)은 우리 소년의 지력(智力)을 자(資)하야 아국(我國) 역사에 대광채(大光彩)를 첨(添)하고 세계 문화에 대공헌(大貢獻)을 위(爲)코뎌 하나니 그 임(任)은 중(重)하고 그 책(責)은 대(大)한디라. 본지(本誌)는 차책임(此責任)을 극당(克當)할 만한 활동적 진취적 발명적 대국민을 양성하기 위하야 출래(出來)한 명성(明星)이라. 신대한(新大韓)의 소년은 수예(須曳)라도 가리(可離)치 못할 디라.
최남선이 생각하고 있던 ‘소년’이란 조선 역사에 광채를 발하고 나아가 세계 문화에 공헌할 책임을 가진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을 계몽하고 선도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대양을 지휘하난 자는 무역을 지휘하고 세계의 무역을 지휘하난 자는 세계의 재보(財寶)를 지휘하나니 세계의 재화를 지휘함은 곳 세계 총체를 지휘함이오.”라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세계를 지휘할 주체 역시 다름 아닌 소년인 것이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주제는 서구 문물의 도래와 더불어 소년의 시대적 각성 및 개화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 주체가 ‘바다’라는 점이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뿐이 아니라 그의 초기 작품은 ‘바다’에 많이 집중되고 있는 만큼, ‘바다’의 이미지 또한 매우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다.
그는 ‘교남홍조(嶠南鴻爪)’에서, “우리 삼면이 바다가 둘린 대한 국민(大韓國民)-
장차 이 바다로써 활동하는 무대를 삼으려 하는 신대한(新大韓) 소년은 공부도 바다에 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고, 유희도 바다에 구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소년이 해야 할 공부나 유희를 모두 ‘바다’에서 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최남선이 의미하는 ‘바다’는 어떠한 것일까?
바다는 가장 완비한 형식을 가진 백과사휘(百科事彙, Encyclopaedia)라. 그 속에는 과학도 있고 이학(理學)도 있고 문학도 있고 연극도 있을 뿐 아니라 물 하나로 말하여도 짠물도 있고 단물도 있으며 더운물도 있고 찬물도 있으면 산골 물도 있고 들 물도 있으며 동대륙 물도 있고 서대륙 물도 있어, 한번 떠들어 보면 없는 것이 없으며, 바다는 가장 진실한 재료로 이른 수양 비결이라. 자강불식(自彊不息)의 정신, 독립자존(獨立自存)의 기상, 청탁병탄(淸濁並呑)의 도량, 심활(深濶)한 흉차(胸次), 원대한 경륜(經綸), 홍원(弘遠)한 규모, 노동 역작(勞動力作), 향상 정진, 불편불비(不偏不比), 불교불오(不驕不傲), 용감 활발, 호장 쾌락(豪壯快樂) 등 온갖 덕성을 다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행(事行)에 나타내니 바다는 입으로 말하는 자가 아니라, 일로 말하는 자요, 말로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몸으로 가르치는 자라 한 번 대하여 보면 큰 감화를 받지 아닐 이 없으리라. 이에 알괘라, 바다는 학술가, 수양가 할 것 없이 다 보아야 할지로다.
여기에서 최남선은 바다를 “가장 완비한 형식을 가진 백과사휘” 즉 모든 학문을 다 아우르는 ‘백과사전’에 비유하고 있다.
또한 바다는 “수양의 비결”이기도 하며, “자강불식의 정신”이나 “독립자존의 기상”을 포함한 서구의 근대 과학과 근대정신(近代精神)에의 “향상 정진”, “용감 활발”, “호장 쾌락” 등의 온갖 덕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바다는 학술가나 수양가를 구분하지 말고 다 경험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남선이 “큰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넓은 것을 보고자 하는 자, 기운찬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끈기 있는 것을 보고자 하는 자는 가서 시원한 바다를 보아라.”고 권하는 이유는 바다가 “응당 너희들이 평일에 바라던 바보다 이상”을 줄 것이며, “크게 너희들의 협애(狹隘)한 소견과 미소(微小)한 기우(氣宇)를 깨우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최남선에게 ‘바다’는 좁은 울타리를 지키며 낡은 인습을 반추(反芻)하는 일과 반대되는 공간을 뜻하였으며, “하늘과 같이 넓게 트인 공간”이었다. 또한 ‘바다’나 ‘하늘’이 갖는 공간은 물리적인 넓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통하는 길을 의미하였고, 나아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즉, 최남선에게 있어서 ‘바다’는 우리 겨레의 새 국면 타개를 위해서 든든한 활동 무대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최남선은 미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소년들에게 조선뿐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도 통용될 만한 기대와 이상을 부여하고, 그를 위해 소년들을 교도하고 계몽하려 하였다. 과거의 좁은 세계관을 타파하고 그 이상을 세계로 향하여 진정한 지식과 보배로운 가치를 얻는 데 필요한 것은 세계 지리를 바탕으로 한 ‘여행’이었던 것이다.
■ 왜목마을 바다
일출과 일몰을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 너무나 유명한 곳입니다.
노적봉에 걸린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노랗게 떠오르는 장면은 장관 중의 장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네>도 흉내 못 낼 이곳을 <자연의 미술관>이라 말한답니다.
해돋이를 보고 해가 질 무렵이면 야트막한 석문산에 올라 해넘이를 볼 수 있죠.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1.2Km의 수변 데크를 걸어보고, 백사장 입구의 칠월 칠석에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오작교에서 행복한 한때를 남기는 사진을 찍어도 멋진 작품이 되는 곳입니다.
매년 8월 경 요트문화축제(해양레저스포츠체험, 요트체험, 워터슬라이드)와 12월 31일부터 1월 1일까지 왜목 해돋이 축제가 열리기도 합니다.
찬바람이 불면 속이 꽉 찬 제철 굴과 게, 그리고 대하를 먹을 수도 있습니다.
<꿈꾸는 팬션>
<서해연가>
<하늘빛바다>
<메종드라메르>
<썬라이즈>
<해돋이>
라는 간판이 해 뜨고 해지고 낭만이 있는 왜목마을임을 말해줍니다.
장고항의 노적봉을 배경으로 배 한 척이 떠 있는 왜목마을 바다입니다.
주소: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 이용 시 : 송악IC-석문방조제ㅡ왜목마을(34KM)
경부고속도로 : 안성jC-서평택-송악IC-석문방조제-왜목마을
(대전에서) 면천IC-시도1호-당진시내(지방도615호)-왜목마을
용무치항
왜목마을에서 장고항 쪽으로 2~3분 정도 바다를 끼고 달리면 용무치항이 나옵니다.
장고항과 왜목마을 사이에 있는 항구인데 왜목마을 갈 때 늘 그냥 지나치던 항구였고 바다였지요.
작고 한적해 오히려 아름다운 곳, 용무치항 입니다.
해는 구름 속에 숨었고 이렇게 흐린 날의 낮게 깔린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바다도 좋습니다.
선착장은 매우 길고 완만합니다. 작지만 바다로 향한 선착장 끝에 차 한 대가 위태로이 서 있고 갈매기들은 일제히 장고항 쪽을 바라보고 있네요. 비상을 준비하는 갈매기들인가 봅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아주 가까이서 솟구치는 파도를 볼 수 있는, 작지만 역동적인 항구, 바다입니다.
주소 : 당진시 석문면 용무치길 17-18
장고항
<장고항 실치마을>이라는 입간판을 보고 벌써부터 입맛을 다시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하지만 봄철까지 기다려야 입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실치회는 3월 말에서 4월 초 전국에서 유일하게 맛볼 수 있는 장고항의 특산품이고, 초고추장과 채소로 새콤달콤하게 무치는 간재미회도 장고항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포구지만 봄철엔 북적북적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장고항은 장고(長鼓)처럼 경관이 아름다워 이름 붙여졌다고 합니다. 장고항의 노적봉은 아름다운 일출의 배경이 되어 멋진 해돋이 작품을 기다리는 진사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지요.
그러기에 장고항은 맛과 멋이 있는 항구이며 바다입니다.
장고항을 찾아간 날, 덤프트럭이 바다를 향하여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장고항 건설공사라고 합니다. 2021년 공사가 끝나면 장고항은 접안시설과 등대, 부잔교가 있는 어업인의 소득증대와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는 항구로 발돋움할 것입니다.
주소: 당진시 석문면 석문방조제로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송악IC-석문방조제-장고항포구
(대전에서) 면천IC-시도1호-당진시내(지방도615호)-석문삼봉(지방도647)-장고항포구
안섬포구
석문 쪽에서 왜목마을과 용무치, 장고항의 바다를 보고 <당진9경>중 제4경<제방질주>의 석문방조제 제방을 달리면 따라오는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려도 그 시원한 직선에 가슴이 후련해집니다.
그리고 닿는 곳은 안섬포구!
바닷물이 들어와 만조가 되면 섬으로 변한다 해서 내도(內島)라고 했다가 <안섬>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빨간 등대를 배경으로 TV 드라마 <갯마을>을 추억해 보는 것도 좋겠네요.
안섬포구에서는 35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안섬 풍어제가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첫 번째 진일(辰日)에 열립니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굿을 올리는 것인데 때를 맞추면 당굿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을철 갯벌낙지로 유명한 안섬포구, 주인이 직접 잡아와 넣어준 싱싱한 해물을 넣은 칼국수가 겨울 바다를 찾는 맛을 더해줍니다.
흰 거품을 던지고 도망가는 파도의 합창을 들으며 빨간 등대의 신호에 귀 기울여보고 싶으면 안섬포구의 바다가 딱입니다.
주소:당진시 송악읍 안섬포구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송악IC-안섬포구
(대전에서) 면천IC-순성(지방도619호)-송악-안섬포구
면천IC-당진(시도1호)-송악(국도34호)-안섬포구
한진포구
한진포구는 서해안고속도로로 송악 IC를 빠져나와 10분이면 다다를 수 있는 곳입니다.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국제무역항이었고 인천으로 가는 배가 다니기도 했다죠.
넓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7.3km, 6차선의 서해대교(당진 2경)의 주탑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이 장관입니다. <당진9경> 중<제2경>인 <서해대교>에 불이 들어오는 밤의 포구 모습도 장관이고요.
해풍을 맞고 있는, 널어놓은 물메기와 우럭이 이 한진포구에 각종 활어회를 맛볼 수 있는 맛있는 횟집이 많음을 증명합니다.
만조 때면 드러나는 바다 한가운데서 캐는 5월의 바지락 축제를 추천하고 바다를 보고 나서 상록수의 심훈을 찾아 <필경사>가는 코스를 추천합니다.
하루의 작업을 마치고 쉬고 있는 바다에 떠 있는 배는 이미 갈매기 차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주소 : 당진시 송악읍 한진포구길 23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송악IC-38번 국도-고대, 부곡공단방면(약 3KM)-한진포구
(대전에서) 면천IC-순성(지방도 619호)-송악-한진포구
면천IC-당진(시1호)-송악(국도34호)-한진포구
매산해안공원 앞 바다
서해대교의 수려한 경관과 일출,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매산해안공원 앞. 이곳에서 바다를 보며 맷돌포와 음섬포구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신평면의 음섬포구와 맷돌포 포구를 잇는 해안공원 앞 바다는 썰물이 되어 그 속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많은 갯벌을 잃기도 했지만 그래도 바다는 이런 모습으로 그 안에 많은 생명이 있음을, 부단히도 정화작용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음섬포구
매산해안공원이 시작되는 매산리 음섬포구의 포인트 존에서 서해대교의 야경 감상은 어떤가요?
음섬은 <과거 한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이 섬에 표류하게 되었는데, 기진맥진했던 그가 이 섬의 샘에서 나온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려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섬으로 <음세미><음도><하후리>라고도 한답니다.
펼쳐놓은 그물들이 갯마을의 정취를 더해줍니다.
새로이 단장한 전망대에서 물이 빠진 갯벌 속의 그 무엇을 찾아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떼들의 모습에 홀려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맷돌포
<맷돌포>는 떠 있는 배들이 물이 들어올 땐 뱃머리가 왼쪽으로 돌아가고, 물이 빠질 때는 오른쪽으로 돌아가 그 모습이 맷돌 같다 해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합니다.
맷돌포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서해대교가 오른쪽을 바라보면 삽교호가 보이네요.
물이 빠진 갯벌에 반짝이는 햇빛이 아름다운 바다입니다.
심심한 듯 마실 나와 졸졸 따라오는 강아지들과 함께 왼쪽에는 푸른 바다, 오른쪽에는 억새가 한들거리는 생태관찰 데크를 따라 걷는 길이 즐거운 맷돌포입니다.
매산해안공원이 끝나는 맷돌포구 갯벌에서는 생태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송악IC-맷돌포.음섬포구(매산해안공원)
(대전에서) 면천IC-당진(시도1호)-송악(국도34호)-삽교호(국도38호)-맷돌포.음섬포구(매산해안공원)
맛과 멋, 휴식이 있는 당진 바다!
당진의 겨울 바다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푸른 물결처럼 힘찬 기운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갈매기와 함께 하는 휴식, 뜨끈한 칼국수와 싱싱한 회가 맛있고, 거기에 낭만까지 더한 당진의 겨울 바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