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 시간 장거리 운전끝에 찾은 영사관.
넓지 않은 주차장에 빈틈이 없다.
주변 이면 도로에 1시간 무료주차가 가능하다는 깨알 같은 글씨의 안내 표시.
주변 도로를 몇 차례 빙빙돌며 기웃거리고 겨우 주차를 했다.
눈과 빙판길에서 빈자리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민원인들의 불편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인가.
남의 나라 도심 한복판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마주하고 뭉클했던 마음이 그만 푸석푸석해진다.
한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하라는 서류 신청서 양식을 받아들고는
얼버무리게 되어 귀불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자 이름을 써넣는 것도 낯설었지만
예상치 못한 주민등록번호라는 말이 당혹스러워 허둥 된다.
마침 필요할 것이라 생각되는 서류를 모두 챙겨서 준비했기에
오래된 구 여권 속에서 주민등록번호를 찾을 수 있었고,
도장 찍는 공란에는 사인도 가능하다는 말에
이곳의 연금 신청을 위해 필요하다는 한국의 서류 신청서를 작성했다.
영사관을 나설 때까지,
혼란스럽고 허전하고 씁스럼키도 하고
어쩌면 애잔하기까지 해서 허허로웠던
이 묵직함은 도대체 어떤 연유인가?
손에 익지 않았던 아내의 자동차를 가지고 왔기 때문일까,
매해 갈수록 망설여지는 고속도로에서의 장거리 운전 탓일까,
단순한 반복 업무의 종사자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창구 직원의 무성의한 불친절 때문일까,
좁은 주차장에서 느꼈던 영사관의 무신경이 불편했기 때문인가?
.
꼭 집어 내 보일 수 있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몇 달 동안 미적거리며 미루었던 연금 신청 서류작성은 세월을 거슬러 보겠다는 욕심이었는지 모르겠다.
주민등록번호를 찾기 위해 펼쳐 보았던 구 여권속의 젊은 나의 모습이 몹시 낯설게 보여
그만 울컥해진 심사가
영사관을 나설 때까지 내내 허전하고 또한 묵직해져 심산한 하루다.
아랫글은 몇 달 전에 연금 신청 이야기를 듣고 심란해 하던 아내에게 쓴 글이다.
( 비켜 앉은자리 )
심한 독감이 내게 두 번이나 찾아와 가족들에게 까지 옮겨 덤으로 고생을 시켰으니,
올겨울은 몹시 길다.
독한 약을 서너 병이나 비웠는데도 좀체 차도가 없어
아내는 병원을 찾았고 내친김에 이런저런 검사를 몰아서 했다고 한다.
패밀리 닥터는,
당신 얼굴 본지가 오래 되었다며 나의 안부를 물었다는데,
"아이고, 창피하고 답답해라"
의사가 뭐가 아쉬워 코빼기도 안 보이는 당신 같은 사람 걱정을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될 소리냐며,
제발 병원에 가라는 말을 겨우내 들었다.
쇠 심줄같이 질긴 심보,
무덤에 가서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아내의 핀잔을,
챙기는 배려로 여기기가 쉽지 않음은 이 겨울이 마냥 길어서 인가 ?
감기라 우습게 여겼다 간,
급성폐렴으로 번지면 큰일 난다는데.
병원에 가는 건 정말 내키지 않다.
그리고 선 이곳저곳이 편치 않다며,
듣는 사람이 피곤할 끙끙 앓는 소리를 달고 지낸다.
어제는 또 눈이 내려 걱정을 했는데,
잠깐 햇빛이 보이길래 다행이라 여겼던 것도 이내,
변덕스러운 날씨는 곤두박질친 기온에 거칠게 바람까지 불어,
퇴근 녘에는 미쳐 소금을 뿌리지 못한 도로가 얼어붙어 유리 위를 운전하는 것 같아
식겁을 하고선,
아내가 심란해 할,
"허 참, 매해 갈수록 겨울나기가 쉽지 않네"
라는 말을 기어코 하고야 말았다.
두 어달 전에 배달된 서류.
노령연금 신청을 위한 서류를 준비하라는 메일이다.
내키진 않지만, 마냥 미룰 수 없으니 큰맘 먹고선 차근차근 살펴본다.
이십 년여 년 전 최초 입국 당시의 스탬프가 찍힌 랜딩 퍼밋도 필요하다고 쓰여있다.
충분치 않은 금액치곤 서류작성이 까다로워,
빌어먹을 슬그머니 심사가 꼬이는데,
이젠,
짐짓 모른 체 하던 아내에게 이야길 그만 해야겠다.
"일 그만하고, 내년 부터는 이것 가지고 살아야 한다니 가능하겠소 ?"
혹 모르니,
내게 무슨 일 생기면 홀로된 배우자에게도 수당이 있다고 꾹꾹 잊지 않게 이야기를 했다.
"어머나, 과부 수당이란 말이네"
깔깔 재밌게 웃던 아내.
슬그머니 화장실로 사라졌다.
오늘,
노령연금을 위한 서류를 준비한다는 말이 뭘 그렇게 서운할 일일까,
아마 잠깐 눈빛이 흔들리는 듯 했다.
언제나 쇠 심줄 같이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이라 여겼음이리라.
깃털에 목을 묻은 채 덱 위에 웅크린 작은 새 한 쌍.
차가운 날씨 탓인지 미동도 하지 않더니 이젠 서로 목을 비비고 있다.
개울 바로 뒤편의 아늑한 숲을 두고선,
무슨 까닭으로,
덱 위에서 찬바람을 온몸으로 저렇게 받아내고 있을까 라는 걱정은,
갑자기 부는 바람에 우수수 날리는 깃털이 위태로워 보여서다.
사진을 담아보려 창문을 살며시 열어본다.
놀라지는 않은 듯 우두커니 올려보나 싶더니,
어허,
그 녀석들 민망하게 짧은 짝짓기를 하더니 푸르르 날아갔고,
덱 위에는 아내가 싫어하는 배설물을 잔뜩 뿌려놓았다.
긴 계절이 물러가고 있다.
나의 시간도 조금씩 비켜 가는 것인가 !
그래,
너희는 계절 따라 알을 품고,
그래서 새 생명을 키울 테지.
내 집 뒤뜰엔 갓 부화한 어린 새끼들을 이내 몰고 올 것이고.
부인,
나의 아내여.
그렇게 마냥 서운해 하지 마시요.
조금 비켜 앉는다고,
나는,
또 우리,
당신과 나,
그렇게 나쁠 것 같진 않구려 ...
다가올 봄엔,
우리가 조금 비켜서 물러나 앉은자리,
우리집 뒤뜰엔,
갓 부화한 어린 생명들이 가득 할 것 같지 않소 ?
첫댓글
오래된 구여권의 사진이
참말로 푸근하요ㅎ
글 쓰는거 봐선 까다롭게 생긴 줄ㅋㅋ
근디 노령연금도 여유가 있는 인한테는 안된다고 들었는디???
뭔소릴 또,
내가 젊을때부터 워낙 인정없게 생겼단 말 못이 박히도록 들어다요.
젊었을때 사진 확대 해보구려, 얼마나 인정머리 없게 생겼는가.
이제 나이 좀 들었으니 나이 심술은 오죽 하겠소.
이나라 정부에서 보기엔 내가 여유가 많이 없어 보이는 모양이지요
@판 돌
주민번호 우짜길래
울 노령연금두 타는가 했드만ㅋ
내년에 내두 탈랑가 말랑가ㅠ
@들꽃이야기 허참,
내가 한국의 노령연금을 우찌 탄다는 말이요, 국적도 없어진지 오래되었시요.
요게서 연금을 탈려면, 한국의 서류가 필요하답니다.
난 판돌님의 글을읽으면서
왜 짠해지는걸까요
잘나가던 한국회사 때리치고 이민가서 잘살아보겠다고 살아온세월 남는건 나이와 주름뿐 갠히 지난세월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짠 해지능교?
그러게요 내도 짠하요.
어느새 세월이 연금 타 묵으라고 하는데, 심란해요~ 연금타면 파싹 쭈그러 질텐디~
관청에 가서 기분 좋은 일이 드믈지요 왜 그렇게 딱딱하고 사무적인지
그리고 보험금 신청하러 가면 또 그렇게 서운하게 하고 꼬챙이같은 질문 하고 ..
저는 제가 너무 기대가 커서 그 런가 하고 늘 자신을 탓하지요 판돌님 오랜만입니다
나이들면 모든 일이 심드렁하고 섭하고
귀찮고 허무합니다 다 그렇게 늙어 갈 일만남았네요
건강을 빌어 봅니다
갑장님의 말씀, 하나도 틀린게 없구만요.
심란코 섭하고 .
에효, 나 오늘 많이 심란혀 ~
노령연금은 눈 뻔쩍 와!기다림에 희열!!
좋으시겠어요~ㅎ
나이듦에 세월에 얹혀가는 건 당연지사
허지만 연금에 위한에 안도감
오늘도 가정내 판돌님도 건안하세요^^()
ㅎㅎ 고맙습니다.
세월에 얹혀가는 건 당연하다는 말씀에 위안 얻습니다. 땡큐~
삭제된 댓글 입니다.
후후, 그런가요?
나이들면 여유로워 보여야 할텐데..
저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불평,심술,질긴 고집,어구팅이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만 늘어가는 것 같기도 하구.
쿨하다면 차겁다는 말이 아닝교?
내가 차갑고 인정머리 없다는 말은 많이 듣긴해요 ㅎㅎ 땡큐~
빙판길 위에 차를 올려 놓는다는 것 자체가
긴장되는 일인데 고생 하셨습니다
이제 겨울이 봄에게 주권을 넘겨주고 있으니
초목도 무성해 지고
새들도 둥지를 품고~
새생명들이 여기저기서 환호하겠네요.
글이 서정적이라
읽기가 참 부드러웠습니다.
감사드려요 판돌님~
보통 사월까지 작년의 눈이 쌓여있긴 해요.징글징글 허지요.
푸념의 글이 거칠게 보이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아직 한참이라 생각했는데,
어제 영사관 들린후론, 아주 여어엉 팍 쭈그러지는 기분이라요,
요번주까지 마무리 지어야 할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고마워요~
이 곳은 관청이 많이 부드러워져서
감정노동자 못잖게 친절합니다.
그들의 극친절을 바라보면서 나름의 생각을 해보곤 하지요.
공무원되기가 하늘의 별따기니
민원에 민감해질 수밖에.
주민등록번호를 잊고 사셨다니
타국생활에 실감이 납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데요.
본적지 주소도 생각이 않나고..
그러니 내 기분이 어땠겠능교.
너무 신경쓰지 않고 막 살아왔다는 생각이 팍 들었시요.
그래서 오늘은 큰맘먹고 병원 예약도 했답니다.
살아간 얘기네요
노령년금을 타시는군요
저2에 인생 ᆢ
화이팅 하십시요
파이팅은 싸우자는 이야긴데요.
그래요,
처져서 심란해 하기보단, 우리 함께 힘좀 내기로 해요, 고마워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에고, 또 제글이 어수선하게 만들었습니다.실수를 했네요.
근디. 늘숲님과 저랑 별차이 없을것 같은디
노년이란 섭한 말씀을 허실까요 ~ 70도 안되었디~ ㅎㅎ 고마워요
연금 많이 타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노후대책 확실하니까요
ㅎㅎ 맞는 말씀입니다.
근데 얼마 되지않아 근심스러요. 고맙심다.
저희 형님도 몇년후면 연금 타겠군요
79년도에 가셨으니 벌써 40년 되었네요
70까지는 현역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재택근무가 많아서 편리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