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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는 것>
엄정화의 ‘몰라’란 노래는 자신의 마음이 왜 그렇게 자꾸 변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언제나 나만을 위해 나를 아껴준 그대에게.
충격이 클 거야,
내게 실망을 하면 배신감도 느끼겠지.
하지만 내 맘이 이미 변해버린 건,
나도 잘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알 수가 없어.
나를 사랑해줬는데 왜 내가 흔들리는지,
그대가 싫어진 것도 아닌데.
정말 난 몰라 알 수가 없어.
도대체 사랑이 어떤 거길래?
나만을 아껴주었던 그대를 왜 내가 떠나는 건지,
나도 모르겠어.
일찍이 이태리의 문인 빠삐니는 “오늘날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원효 대사는 목이 말라 해골에 담긴 빗물을 마신 이후 크게 깨달아 “모든 것은 마음 안에 있다(一切唯心造)”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어서
마음이 변하면 몸이나 생각으로 아무리 그 마음을 되돌려놓으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흐르는 물이 있다면 그 물이 시작되는 곳이 마음입니다.
위에게 처음부터 오염된 물이 나온다면 하류에서 아무리 깨끗하게 해 봐야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변해버리면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우리 인간이 죽는 것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회개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그리고 그 회개란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면
내가 행동하기 이전에 행동이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알기 전에는 나만 알았다면
신앙을 가진 이후에는 불쌍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옛날 바닷가에 어떤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바닷가에 나가기만 하면 날아와서 어깨나 손위에 앉곤 했습니다.
그는 그 해오라기 얘기를 아내에게 했습니다.
아내는 그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잡아 올 마음을 먹고 이튿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해오라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변하면 행위와 상관없이 사람 자체가 변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가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면
회개는 행위 이전에 마음의 변화가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태인 제자 한 사람이 랍비에게 찾아와 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 서로 도우며 살려고 노력하는데, 저는 왜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걸까요?”
랍비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엄마가 자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차 한 대가 한가롭게 달려가고 있군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벽에 걸린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제 모습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창이나 거울 모두 유리로 만들어졌지만 유리에는 칠을 하게 되면 자신의 모습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지.”
자기만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회개가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영을 지니라고 하시는 말씀 안에는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하느님이 아닌 우리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성령을 주시려고 우리 앞에서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옛 마음과 옛 영을 버리고 그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우리 안에 넣는 일은
하느님이 해 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노력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체로키 인디언이 노인이 손자에게 삶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그는 손자에게 말했습니다.
“너무 끔찍한 싸움이어서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과도 같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인데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교만, 분개, 자기연민, 죄의식, 열등감, 거짓, 허영, 잘난 체하고 자신의 거짓자아를 나타낸단다.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이놈은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친절, 선의, 고요함, 겸손함, 동정심, 관대함, 진실, 연,민 신뢰를 나타낸단다.
이 같은 싸움이 네 안에서도 일어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도 일어난단다.”
손자는 잠시 동안 그 말을 생각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체로키 노인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마음은 곧 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했다는 말은 원하는 것이 변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원하는 것이 변하는 것을 회개라고 하고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합니다.
돈을 좋아했던 탕자는 이제 아버지의 뜻만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을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죽음을 원치 않으십니다.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라져버릴 이 세상 것을 원하는 마음을 버리고
주님만을 원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 나중에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왜 하느님의 뜻만을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명절날에 꽤 많은 분들이 제게 과일이나 명절 음식을 보내주십니다.
아마도 혼자 명절을 보내는 것이 안쓰러우셔서 그렇겠지요.
너무나 감사한 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양이 저 혼자 소비하기에는 너무 많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올 초의 설 명절 때에도 너무 많은 선물을 받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기 위해 과일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실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글쎄 상자 맨 위에 보이는 부분은 빛깔이나 크기가 너무나 좋은데 반해,
바로 밑에는 크기도 작고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 과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절 하루 장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윗줄과 아랫줄의 너무나도 큰 차이로 인해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최고의 상품인 윗줄만을 보고서 그 과일 가게를 좋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다 나쁜 상품일 수도 있는데 좋은 상품이 절반이나 되니까 훌륭한 집이라고 말할까요?
아마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상품이 있는 아랫줄만을 생각하면서 속여 파는 집으로 그 과일 가게를 나쁘게 볼 것이고 이제 더 이상 이용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일 상자의 모습이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과일 상자의 윗부분은 우리가 현재 받는 외적인 평판이고,
보이지 않는 과일 상자의 아랫부분은 보이지 않는 우리의 성품이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외적인 평판은 좋지만, 실제의 성품이 좋지 않다면 어떨까요?
사실 외적인 평판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품은 바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드러지게 되어 오래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성품이 사람들의 모든 판단을 뛰어넘어서 이제까지의 평판에 관계없이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평판에 신경을 써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성품에 신경 써야 할까요?
사람들이 어린이들은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지요.
사실 당시에는 어린이의 존재를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바쁜 예수님께 이런 어린이들까지 데리고 오느냐는 것이지요.
바로 그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품들을 보신 것입니다.
만약 당시의 어른들처럼 단순히 외적인 부분만을 봤다면 거절을 하셨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순박함, 단순함,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자기가 입은 해를 잘 잊는 것 등등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성품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품을 계속해서 키워나갈 수 있도록 머리에 손을 얹으십니다.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본성상 가지고 있는 성품을 계속해서 키워나가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은 어떤가요?
혹시 성품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 외적으로 보이는 평판에만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인천교구 갑곶성지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손이 아름답다>
구역미사에 가면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합니다.
어른들 ‘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하면서 특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봉헌 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 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봐야 합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는 3~5살박이 미카엘라, 젬마, 새랑이도 참석합니다.
모임을 갖는 동안 말썽 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헤어질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에 모으고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면 십자고상을 가리키고 성모상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을 줄도 압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금방 따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기도의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어미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 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의 단순함과 의존성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른의 아버지’이기 도합니다.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 (시편 131,2)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설교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마르 10,14).
(이 말은 제자들에게 화를 내셨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크게 잘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셨습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라는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어린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말씀이지만,
뜻으로는 어린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작고 낮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즉 ‘작은 이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서 연상되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힘없는 사람들, 즉 ‘작은 이들’을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작은 이들’에게 안식과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제자들은 ‘작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 즉 ‘작은 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는 뜻인데,
이 말씀에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나를 만날 권리가 있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권리를 빼앗으면 안 됩니다.)
‘작은 이들’에게 그 권리가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작은 이들’을 부르셨고, 그들에게 그 권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리코에서 눈먼 사람 둘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마태 20,30).
(이것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안수기도를 청한 일과 비슷합니다.)
그때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두 사람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마태 20,31).
(이것은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은 일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을 부르셨고,
그들의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마태 20,32-34).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은 일과 사람들이 눈먼 사람 둘을 꾸짖은 일은
모두 ‘예수님을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한 일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위한다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 일을 도와드려야 합니다.
마르코복음 2장에 있는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을 방해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부족과 무관심으로 ‘예수님의 일’에 걸림돌이 된 경우입니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마르 2,1-4)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그 네 사람은 사람들 벽에 막혀서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조금씩만 비켜주었다면 병자가 지나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자,
그 병자는 들것을 가지고 사람들 가운데를 지나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2).
따라서 처음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지나갈 수 없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사랑이 부족했음과 무관심을 나타낼 뿐입니다.
지붕에 구멍을 내고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리는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것을 도와주지는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의 가옥은 지붕에 구멍을 내는 것이 쉬운 구조였다고는 하지만,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지붕의 구멍에서 달아 내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로는 복음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않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성전 정화 사건’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성전은 가난한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사제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라고 강변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을 모두 쫓아내셨습니다(마태 21,12).
성전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마르 11,17).
‘모든 민족들’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이 성전을 차지해서 ‘작은 이들’은 들어가기가 어렵다면,
그곳이 바로 ‘강도들의 소굴’입니다.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 의탁하여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임>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이들을 꾸짖습니다(19,13).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니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손을 얹어주십니다(9,14-15).
여기서 제자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관점의 근본적인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귀찮게 하는 것으로 보고 어린이들의 접근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대자를 데리고 온 것도 아니었고 어떤 재화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축복을 빌어달라는 것뿐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하신 것을 보면
어린이는 나이에 상관없이 힘없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이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주님의 생명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처신은 사회적 약자들이 하느님과 관계 맺는 것을 막은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지닌 지위나 재물, 세상의 지식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며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료 인간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참으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어린이 같은 순수함을 회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함은 거짓말 할 줄 모르는 순진무구함, 무죄함 또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그분과 함께 있고자 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이런 영적 순수함을 지닌 가난한 이들은
어린이처럼 전적으로 남에게 종속되고 온전히 의존합니다.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되어야겠지요.
하늘나라는 오직 하느님께 집중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기준을 주님께 두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시선을 가지런히 하여 영으로 단순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그분의 축복 안에 머물 수 없을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개방성과 수용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시고,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 안에 머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으신 것이지요.
우리도 하느님 안에서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소외시키지 말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존귀한 존재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고요히 주님 앞에 자신을 두고,
혹시라도 마음의 문을 닫고 제한적으로만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며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다른 이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지는 않는지 살피며,
주님의 축복을 청하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悔改)와 동심(童心) -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동심(童心)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니 깊이 들여다 보면 나이만 먹었지 동심을 지닌 어린이들입니다.
하여 누구나 동심을 그리워하며, 동요(童謠)를 부르기도 하고, 동화(童話)를 읽기도 하며, 동안(童顔)의 얼굴이라 말하면 좋아합니다.
얼마 전 해바라기를 보며 써놓은 동요를 나눕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동요입니다.
-
“밤새 꼬박 깨어/밤을 새웠구나
해바라기
떠오르는 해님/기다리노라.”
-
사실 신앙이 깊은 동심의 마음에 동안의 얼굴을 지닌 이들을 보면 나이에 상관없이 어린이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여 우리 바오로 수사님을 일명 천진도사(天眞道士)라 부르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예수님은 특히 어린이들을 사랑하셨고
어린이들과 같은 동심의 사람들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여기셨음이 분명합니다.
아마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그대로 동심에 동안의 얼굴을 지니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 즉 동심의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개방성, 단순성, 천진성, 신뢰성, 유연성, 신축성, 수용성입니다.
끊임없는 배움의 평생학인(平生學人)이요, 말그대로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어린이같은 사람들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여 닮아갈 때 이런 동심의 회복입니다.
어제 읽었던 ‘찹쌀떡 시절’이란 감동적 실화의 수필 한 대목입니다.
“내게는 참쌀떡과 친근한 시절이 있었다.
찹살떡을 쉽게 먹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가정의 경제형편이 어려워 찹쌀떡을 팔아야 했던 때였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올라가던 그 해 겨울,
신문 배달만으로는 학교 공부에 필요한 참고서와 학용품을 충당할 수 없었기에 나는 찹쌀떡 장사로 나서야 했다.”
바로 춘천에 살고 있는 저와 같은 '소'띠 나이의 침술사 형제님의 수필입니다.
구교우 집안에서 어렸을 적부터 부모로부터 조과 만과에 철저한 신앙생활을 익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생업에 충실하면서도 다재다능한 분이라
문화원에 1주 2회 민요강사로 나가며, 한 달 한 번 병원환자들을 위문차 방문하여 민요를 불러주고,
겨울철에는 요양원 등 시설을 자주 방문하여 민요를 불러주며 봉사활동에 전념한다 했습니다.
침을 맞은 후 민요를 청했고 기꺼이 형제님은 즉흥적으로 민요를 노래했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다음에 또 오세요.”
정말 흥겨운 구성진 가락에 저절로 심신도 치유되는 기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복을 드렸고, 형제님은 저를 역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바로 이런 침술사 형제님 같은 분이 어린이와 같은 분입니다.
침과 더불어 이런 믿음과 환대의 분위기가 전인적 치유를 가능케 해줌을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동심을 회복하여 동심을 사는 첩경의 지름길입니다.
바로 에제키엘 예언자가 답을 줍니다.
오늘 에제키엘 1독서의 후반부는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나는 저마다 걸어 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에제18,30-32.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아 후반부 말씀을 그대로 전부 인용했습니다.
우리가 살 길은 단 하나, 끊임없는 회개뿐입니다.
회개할 때 마음의 순수에 동심의 회복이요, 저절로 치유되는 심신의 질병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자들에게 결코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과거는 불문에 붙이십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맑고 향기로운 삶, 기쁨과 평화, 온유와 겸손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동심을 회복시켜 주시고,
심신의 아픔을 치유해 주시며,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 주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2)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어린이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시는 데 어린이들이 방해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막지 말라고 이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우리는 많이 보고 듣고 배울수록 겸손해져야만 합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에 만족하다 보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만심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알고,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한 자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스스로 하느님마저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수가 없게 되지요.
그렇게 신심 깊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습니까?
어린이들처럼 아무런 개인적 욕심이나 이기심에 얽매이지 않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 뜻을 실천하려 할 때만
우리는 하느님을 뵈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유다인들 가운데 내려오는 격언이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들만이 지혜로운 랍비들보다 하느님께 가까울 수 있다.”
인간의 오만함을 꾸짖는 내용이지요.
우리 역시 늘 순수함과 겸손한 자세를 잃지 말고,
주님의 뜻을 옳게 깨우치며 이를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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