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咸興差使)
[다 함/일어날 흥/어긋날 차.사신 사]
[뜻]
심부름꾼이 가서 소식이 없거나 더디 오다. 감감 무소식.
[내용]
함흥차사를 보내고 태조가 답한 일을 한국사 학자 이덕일과 이회근의
연구를 바탕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398년 태조 이성계가 정종에게 양위한 뒤 함흥으로 갔다.
1400년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다.
태종이 아버지 이성계를 모셔오려고 성석린을 차사로 보내었다.
1401년 4월 태조가 성석린의 청을 받아들여 한양으로 환궁한다.
1401년 11월 태조가 다시 한양을 떠난다.
태종이 왕사(王師) 무학대사를 차사로 함흥에 보내고, 태조는 환궁을 약속한다.
태조가 환궁하지 않고 소요산에 머문다.
1402년 1월 성석린을 다시 보내 환궁을 청하지만, 성석린은 혼자 돌아온다.
1402년 조사의의 난이 발생한다.
1402년 12월 태조가 환궁한다.
차사와 이성계의 반응
성석린, 무학대사가 환궁에 큰 역할을 했고, 태종 2년 11월 3일
환관 김완(金完)을 보내 문안케 하였다. 같은 달 7일에 예문관
대제학 이직(李稷)을 보내 문안케 하고, 청원군 심종(沈淙)과
예문관 제학 유창(劉敞)을 보내 시위하게 하였다(이들 가운데
태조 이성계에게 죽은 사람은 없다).
《태종실록》에서는 이성계가 성석린의 요청을 받아들여 태종 1년(1401년)
4월에 환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해 11월에 다시 한양을
떠나자, 다음해 1월 다시 성석린을 보내어 환궁을 요청한다.
이때 태조는 부처를 모시기 위해 돌아갈 수 없다고 거절하자 종친과
함께 환궁을 요청하던 성석린은 “염불하고 불경을 읽는 일이 어찌 꼭
소요산(消遙山)이라야만 하겠습니까?”라고 따지자, 이에 태조가
“그대들의 뜻은 이미 알고 있으나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 라고 본심을 밝힌다.
두 아들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방원에게 죽은 방번과 방석을 말하고,
한 사람의 사위란 역시 방원에게 죽은 경순공주의 부마 이제(李濟)이다.
성석린은 그대로 빈손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태상왕께서 빨리
돌아오실지, 늦게 돌아오실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라고 보고한다.
이후에도 성석린은 두 차례나 차사로 태조에게 갔으나 살아 돌아왔다.
무학대사와 함흥차사
무학이 함흥에 가니 태조가 “그대도 나를 달래러 왔구나”라고 말했다.
무학이 웃으면서, “전하께서 빈도와 서로 안 지가 수십 년인데 제 마음을
모르십니까? 저는 특별히 전하를 위로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무학이 그 뒤로 함흥 본궁에 머물면서 태조와 환담하는데 태종의 단점만
말하였고, 이에 태조가 그를 믿게 되었다. 수십일 뒤에 무학이 밤중에
태조에게 청하자 태조가 환궁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태조가 소요산에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자, 태종이 성석린을 그곳에 보내었다.

첫댓글 태조가 많은 차사들을 죽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과 다른가 봅니다.
그나저나 태종의 그때 심정은 얼마나 기가 차고
삶이 덧없다 느꼈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