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의사님의 충고
딸아이 건강 문제로 동네 한의원을 찾았다. 이웃임을 아셔서 딸아이를 위해 각별한 배려를 담은 자상한 진료를 베푸시는듯했다.
오늘 한 책을 읽다가 그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의사선생님은 딸아이더러 방학에 시간이 나면 꼭 대화 스피치 학원에 꾸준히 다녀보라고 하셨다. 그것은 어찌 보면 몸을 위한 충고도 마음을 위한 충고도 아닌 듯싶지만 그렇다고 전혀 그것과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잘 표현해 내는 능력을 길러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생활에 활력이 생기고 없어졌던 자신감도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하셨을 때는 좋은 충고이긴 하되 진료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싶었다.
오늘 내가 읽고 있는 책, <흔들리지 않는 고전교육의 뿌리를 찾아서/꿈을 이루는 사람들(刊)>에서 고대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의 책 내용을 부분 인용한 곳을 읽다가 보니 그 의사선생님의 충고가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인다. 책에 인용된 부분을 옮겨와 보면 이렇다.
“「글을 많이 쓰고 끊임없이 읽고, 긴 세월을 공부한들 말하는 것에는 아직도 처음 느낌처럼 어렵기만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평상시 대화의 한 마디조차도 소흘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어디서 말하든 상황에 알맞게 최대한 우수하게 해야 한다」”
말하기도 글쓰기처럼 지식의 힘을 가졌다고 해서 그냥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정기간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한때 나도 꽤나 달변이었다. 달변이 지나쳐 가슴이 허전해지기도 했다. 독서의 힘은 입술에 열정을 가져왔었다. 당시에는 말하기의 관록만큼이 내면의 고요함도 충만한 그런 조화의 인격을 갖출 성숙함이 없는 나이였다. 말하기에 힘이 넘친 날에는 유독 마음에 일어나는 공허감이 힘들었다. 나는 자연스레 내 입술의 힘을 죽여 나갈 수밖에 없었다.
관계를 줄이면 말수도 준다. 긴 시간 나는 말수를 줄이는 대신 글쓰기를 좀 더 즐겼다. 결혼을 하고 나의 말수는 늘어나야 하는데 더욱 줄어 버렸다. 말보다는 글이 좋고 생각의 웅얼거림에 그치고 말 때가 많다보니 어느새 나는 눌변가가 되어 버렸다. 말이 준만큼 나는 사람과의 관계마저 잃었다. 수다는 사람을 몰고 오지만 묵언은 방해받지 않는 자유를 안으로 누릴 뿐이다. 다소 내 자신 벙어리 같다는 생각도 든다. 눌변가의 내면은 풍성할지 모르나 열매 맺지 못하는 석녀처럼 말의 꽃이 피어나질 못한다. 눌변의 벽에 갇힌 시든 꽃과도 같았다.
관계의 소통이 막히고 대화의 장을 자주 펼치지 않으니 속은 번열하고 있으나 피어나는 자기표현의 열망은 일어나지 못한다. 과학문명의 이기 속에 탐닉하여 들어가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누구나 그런 편이다. 말로 하는 소통에 약하다. 모두 기계와 혼자 논다. 자아에 갇혀 그 많은 생각과 말들은 자기 안으로만 퍼부으니 자신의 속도 편하지 못하다. 객관의 판단력은 흐려지고 주관의 옹벽만 높이 쌓는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도 언어 장벽에 갇혀 외로움만 늘어갈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친구란 바로 수다로 소통하는 사이인데, 그 수선스러운 수다를 받아줄 친구하나 사귀질 못했으니 얼마나 을씨년스러우랴.
말하기 훈련은 다름아닌 친구를 찾아가는 훈련이다. 내 안에 그 많은 생각의 작용들을 혼자 피어나지 못할 씨로 품고 있지 말라는 것이다. 씨는 발아되어야 건강한 씨다. 말이라는 생각의 씨도 너와 나의 소통이라는 꽃으로 피어나야 생명성을 지닌다. 내 안의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혼자 삭이지 말고 말로 내어 놓을 필요가 있다. 말로 내어 놓음으로써 치유된다.
나눔은 꼭 물질의 나눔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극히 저급한 것이다. 말의 나눔, 즉 대화는 그 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더 큰 생각의 확장으로 나아간다. 말을 나눌 수 있을 때 나의 삶의 영역은 나라는 벽을 넘어 우리라는 영역으로 확장되어 나아간다. 말은 소통을 낳는다. 말은 관계를 열어간다. 말은 소유의 벽을 넘어 나눔의 장을 연다.
말하기는 곧 세상을 따뜻하고 풍성하게 하는 생명의 몸짓이다. 나만 내세우는 달변가의 가슴은 공허할 수 있지만 가슴을 열어 나눔과 소통으로 가는 대화라는 말하기는 오히려 닫혀서 병이 난 가슴을 치유한다. 생명으로 자라나 관계와 소통의 풍요를 가져 오는 것이 바로 이 대화라는 말하기이다.
의사선생님은 우리 안에 고여 썩어 가는 말의 정체됨 털고 대화술을 익혀서라도 나를 우리 안에 털어 자유하게 살라고 하신 것이다. 말하기에는 정녕 그런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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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흔들리지 않는 고전 교육의 뿌리를 찾아서」의 부록에는 도로시 L. 세이어스의 논평 「잃어버린 배움의 도구 The Lost Tools of Learning」가 기재되어 있다. 지금 글의 연장 선상에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고 보기에, 여기 그 일부를 옮겨와 본다.
45...레슬리 폴이 쓴 『산울타리 The Living Hedge』에는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데, 여러 소년들이 몇 날을 즐겁게 논쟁하는 이야기이다. 소년들의 논제는 마을에 내린 유별난 소나기였다. 소나기는 마을의 거리 절반에만 집중적으로 내렸고, 나머지 절반에는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소년들은 이 사건을 두고 그날 ‘마을에 비가 내렸다?’ ‘마을 창공에 비가 내렸다?’ ‘마을 안에만 비가 내렸다?’ 가운데 어느 말이 옳은지를 따졌다. 비가 되려면 물방울이 몇 개나 있어야 하는가? 논쟁은 계속돼서 정지와 운동, 잠과 깸, 존재(est)와 비존재(non est), 시간을 무한소로 쪼개는 문제로까지 확대됐다. 이 이야기는 논쟁을 통해 사용하는 낱말의 뜻을 명확히 하고 진술을 정확히 해야 할 이유를 자연스럽고도 적절하게 갈망하게 되며 추리력 또한 자연발생적으로 발달하는 사례로서 감탄을 자아낸다. 모든 사건은 ‘시장이 반찬’이듯 좋은 변증 재료가 될 수 있다.(201-202쪽에서)
첫댓글 언젠가 누군가가 "말하고 나면 더 공허하니 되도록 말을 아끼겠다"는 글을 올린 것을 읽으면서 적절한 댓글을 달고 싶었는데..'공허할 수 있지만 가슴을 열어 나눔과 소통로 가는 대화라는 말하기는 오히려 닫혀서 병이 난 가슴을 치유한다'라는 표현이 있었군요. 넘 멋지네요. 정말 잘 말하고 잘 들어 참다운 대화를 통해 풍요로운 삶이 되길 소망해 보네요.
-수다는 사람을 몰고 오지만 묵언은 방해받지 않는 자유를 안으로 누릴 뿐이다. 송인숙1- 최근 제 상황과 맞물려 많이 공감이 되는 부분이길래 메모해뒀어요..ㅎㅎ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저는 '대화'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런 맛을 아주 잘 누리진 못해요.ㅎㅎ
잘 읽었어요. 공감가는 글이에요. 저는 말로서의 표현도 서툴고, 글로서의 표현도 서툴고, 어찌해야 하나요? ㅠ.ㅠ
저도 서툴러요. 그냥 마음이 흐르는대로 통하는대로 편안하게 접근하시면 어떨까요?
정말 공감이 되는 글입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의사님..몸과 마음의 공존을 아시는 분이신것 같아요.맞아요..사람도 만나고 적절한 대화도 함으로써 활력과 에너지를 얻지만 대인관계도 적고 나누는 대화도 적으면 마음도 닫이고 세상사가 귀찮고 무료해지거든요.타인들과 나누고 싶은데 이 놈의 말솜씨는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고 나면 할말 없어지는 병..여럿이 모여 수다떠는거 보면 신기하고 부럽습니당
제가 말이 많이 없어서 그런 주제로 이번주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벌써 올리셨군요. 공감이 많이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