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19~21 / 예수님의 가족
(눅 8:19)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눅 8:20)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눅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예수님 가까이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어머니와 동생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족들을 특별 대우하여 가까이 두지 않으시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가까이 두셨습니다. 가족들도 예수님 가까이 가려면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을 말씀 안에서 평등하게 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징기스칸의 리더십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에 몽골족들은 부족장 주위에는 가족이나 친족들이 텐트를 치게 하였습니다. 그들을 신뢰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주었습니다. 당시는 부족장이 가족이나 친족 외에는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자신의 주위에 가족을 두지 않았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을 두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징키스칸에게 모여 들었습니다. 징기스칸이 전쟁에서 졌는데도 오히려 적군의 군사들이 징기스칸의 리더십 아래 모여들었습니다. 징기스칸은 죽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가져야 하오”
그런데 예수님은 징기스칸보다 1100년 전에 평등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평등 의식으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기회를 얻었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징기스칸 옆에는 능력 있는 사람을 두었지만, 예수님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두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고자 하면 누구나 예수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위에는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이 능력이 없는 사람도 예수님 주위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가족들과 주위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요, 동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족은 말씀대로 행하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에 혈연보다 더 큰 가치를 두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흑인이나 백인이나 황인종이나 가족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면 양반이나 상민이나 백정이나 다 가족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세계 만민이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면 세계 만민이 다 가족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때 당시에 상당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세 가지 면에서 충격을 주셨습니다.
첫째, 말씀 안에서 평등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족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도 예수님 가까이 가서 한 자리씩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동생들이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능력을 행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들도 한자리씩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족들도 말씀대로 행해야 나의 진정한 가족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친과 아우들도 형님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가족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동생 야고보를 위해서 특별히 나타나 보여주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마가 다락방의 120명 성도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도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할례 문제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마지막 결론을 낸 사람이 야고보입니다. 성경 야고보서를 쓴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족 전도나 가족을 동역자로 얻는 비밀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둘째는 말씀 안에서 평등하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 것도 예수님이 가족처럼 그들을 소중히 대우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평등 의식은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 행하는 것 사이에는 많은 거리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것은 1860년대입니다. 링컨은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며 미국 정부가 백인과 흑인으로 나누어지면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이 영원히 지속되기 위해서는 백인과 흑인이 평등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으로 많은 희생을 내면서도, 미국에 흑인을 해방하고 흑백이 평등하다는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런 평등사상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링컨은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링컨이 암살당한 100년이 지났지만, 미국에는 백인과 흑인의 평등이 없었습니다.
흑인들이 백인 식당에서 식사할 수 없고 흑인들이 백인과 함께 버스를 탈 수 없었습니다. 흑인들이 여행을 가서 모텔에 들어가려고 해도 방을 주지 않았습니다.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예배드릴 수 없었습니다. 흑인들이 갈 수 없고 백인들만 사용할 수 있는 장소가 많았습니다.
그때 마틴 루터킹 목사가 나와서 워싱턴의 수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꿈을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의해서 평가받는 날을 소망하는 그의 꿈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 꿈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마틴 루터킹도 암살해 죽였습니다.
루터킹이 죽은 지 또 50년이 흘렀습니다. 2020년이 된 지금도 미국에서는 흑인에 대한 불평등이 있습니다. 흑인 범죄자를 목 졸라 죽인 것으로 미국에는 많은 시위가 있고 이 시위는 전 세계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경찰이 흑인을 총으로 쏴서 죽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불평등이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혀 있는지 보게 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양반과 상민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양반집 어린아이가 늙은 상민에게 반말을 하는 시대였습니다.
양반은 상민과 겸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백정은 상민보다 더 낮은 계급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오면서 백정이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양반이 상민과 겸상을 하고 양반이 상민 장로에게 절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당시에 엄청난 충격이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듣고 수원에서 서울까지 걸어가서 예배를 드리는 상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일부 기독교인들이 권력과 부를 얻으면서 기득권층이 되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갑질하고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버릇없다고 무시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차별하고 나이 든 사람이 어린 사람을 차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기득권층에 붙어서 욕을 얻어먹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회개하고 평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합니다.
셋째, 교회는 말씀 안에서 가족 공동체라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모신 가족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가족들입니다. 가족은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저는 아내가 아프면 저도 마음이 아픕니다. 자녀들이 잘되면 나도 기쁩니다. 그렇습니다. 가족 공동체는 같이 아파하고 같이 기뻐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혈연의 가족 공동체보다 더 아름다운 가족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가족을 위해서 서로를 사랑하고 희생할 때 우리 교회는 상대방도 살고, 나도 살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만 진정한 가족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교회가 아름다운 가족 공동체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공부하고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나누고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함께 식사하는 식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서 아름다운 가족 공동체를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