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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악비(岳飛)의 아들 악림(岳霖)은 난감한 일에 부닥쳤다. 절동제형(浙東提刑)을 맡자마자, 그는 기녀 한명을 심문해야 했다.
그녀의 이름은 엄예(嚴蘂)이고, 태주(台州) 관기(官妓)의 행수(行首, 花魁, 즉 으뜸기생을 가리킴)였다. 미모와 재주를 겸비했고, 사(詞)도 잘 지었다.
전에 엄에는 태주를 순행하는 주희(朱熹)에 의해 감옥에 갇혔고, 고문을 했다. 이유는 그녀와 태주지주(台州知州) 당중우(唐仲友)간에 부정당한 관계가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악림이 태주에 도착한 후, 엄예는 그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비통한 마음으로 사를 한 수 읊는다:
불시애풍진(不是愛風塵), 풍진을 좋아해서가 아니고
사피전연오(似被前緣誤). 전세의 인연이 잘못된 것일 터
화락화개자유시(花落花開自有時) 꽃이 지고, 꽃이 피는 것은 모두 때가 있으며
총뢰동군주(總賴東君主) 동군주에 달렸다.
거야종수거(去也終須去) 가는 거야 결국 가야만 하고
주야여하주(住也如何住) 머무는 건 또 어떻게 머물 것인가
약득산화삽만두(若得山花揷滿頭) 만일 메꽃을 머리에 가득 꽂고 있으면
막문노귀처(莫問奴歸處) 어디로 갈 것인지 묻지를 마세요
이 사 <복산자(卜算子)>의 작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지만, 악립은 이 연약한 여자의 호소를 듣고는 아마도 감동한 것같다. 그 후에 조사를 거쳐 증거가 부족하여 엄예를 무죄석방한다.
악림은 사건기록은 내려놓고 마치 큰 짐을 벗은 것같았다. 그는 아마도 옛날에 부친이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 쓴 후 일가족이 여기저기 떠돌던 때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주희와 당중우라는 두 관리의 시비은원에 장탄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악림은 아마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태주사건이 그후 800여년간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오고, 지금까지도 결과가 나오지 않게 될 줄은.
1
주희화상
남송 순희8년(1181년) 절동(절강동부)은 큰 가뭄이 든다.
재상 왕회(王淮)는 주청을 올려 주희를 "제거절동상평차염공사(提擧浙東常平茶鹽公事)"로 추천하여, 절동으로 가서 재해구호를 하도록 한다.
주희는 그 유명한 '주성인(朱聖人)'이다. 그와 이정(二程)등 사상가들이 정주이학(程朱理學)을 열었고, 후세에 미친 영향이 아주 컸다. 명청시기에 이르러,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注)>는 과거시험준비에 필수적인 교과서가 된다. 그의 사상은 관방철학으로 떠받들어진다.
다만, 주희가 살아있을 때, 그의 학설은 단지 송나라때 여러 학파중의 일파에 불과했다. 따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욕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많은 경우에 주희는 그저 우국우민의 조정관리일 뿐이었다.
주희는 절동으로 가면서 재해장면에 가슴이 아팠다. 지방관리들의 실직에 대하여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포화를 태주지주인 당중우에게 겨냥한다.
다음 해, 주희는 연이어 6개의 상소를 올려, 당중우의 일련의 불법행위를 탄핵한다. 거기에는 그가 태주관기 엄예와 부정당한 관계에 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고이래로 문인들은 풍류를 좋아한다. 송나라때 관리들도 술을 마시고 기녀를 데리고 노는 기풍이 있었다. 예를 들어, 북송의 대문호 구양수(歐陽修)는 집안에 가기(歌妓), 8,9명을 두었다. 그리고, 소식(蘇軾)의 서체를 잘 모방하는 마반(馬盼)이라는 기녀가 있었는데, 소식이 좋아하여, 몸값이 폭등한다.
다만, 관기는 가기(家妓)와 달랐다.
가기는 개인소유이고, 문을 걸어닫고나면 다른 사람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관기는 기악사(妓樂司)에서 관리한다. 지방관청에서 여는 연회에 문예공연을 하고, 술을 따르며, 일반적으로 시침하지는 않는다.
남송의 주밀(周密)이 쓴 <제동야어(齊東野語)>에는 당중우와 엄예가 만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엄예는 자가 유방(幼芳)이며, 태주관기이다. 금슬가무, 사죽서화에 모두 정통했다. 그리고 시사를 잘 지었고, 고금을 통하여, "색예관일시(色藝冠一時)"했던 재녀였다. 아쉽게도 풍진에 흘러들었고, 신분이 미천했다.
당중기가 태주에 관리로 갔다. 그는 엄예의 예명을 이미 듣고 있었으며, 여러번 연회를 열었는데, 엄예를 곁에 앉혔다. 한번은 정원에 붉고 흰 복숭아꽃이 활짝 피어있는 것을 보고 엄예에게 그 자리에서 사를 지어 읊으라고 한다.
엄예는 기민하여 금방 <여몽령(如夢令)>을 한 수 짓는다:
도시이화불시(道是梨花不是) 배꽃이라고 하려니 그것도 아니고
도시행화불시(道是杏花不是) 살구꽃이라고 하려니 그것도 아니다
백백여홍홍(白白與紅紅) 꽃잎이 하얗고, 붉으니
별시동풍정미(別是東風情味) 남다른 봄날의 풍미가 있다.
증기(曾記), 증기(曾記) 기억하라. 기억하라.
인재무릉미취(人在武陵微醉) 무릉도원의 어부도 이 꽃에 취했다는 것을.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지 않는데, 사람이 스스로 취한다(酒不醉人人自醉)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중우는 이때부터 엄예에 푹 빠진다. 여러번 그녀에게 비단을 하사했고, 관계도 애매했다.
나중에, 주희가 당중우를 탄핵하면서 올린 상소문에 이렇게 적었다: "중우는 영기(營妓) 엄예를 좋아하여, 그녀를 끼고 갔다" "엄예는 약간 예쁘기로 유명했고, 중우는 그녀와 놀아났다."
이는 당중우와 엄예의 관계가 간단한 교류가 아니라, '선을 넘은' 것이라는 혐의를 제기한 것이다. 두 사람간에 이미 동거관계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심각한 작풍(作風)문제이다.
송나라때, 관기에 대한 관리는 아주 엄격했다. 적지 않은 관리들이 관기와 놀아나다가 죄를 받은 사례가 있다. 그리고 당중우는 엄예와 관계가 발생한 후, 기악사의 동의를 받지 않고, 사적으로 그녀를 낙적(落籍, 기적에서 빼내는 것)해주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간다. 이는 규정에 위반하는 일이다.
당중우의 죄상을 까발리기 위해, 주희는 엄예를 감옥에 가둔다. 그리고 장형을 가하며, 그녀에게 당중우와의 부정당한 관계를 실토하도록 압박한다.
엄예가 옥중에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두 가지 기록이 있다.
주희가 당중우를 탄핵하는 제4차상소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엄예 본인의 진술을 이미 받았다고. 당중우, 엄예 두 사람은 확실히 '선은 넘은' 사실이 있다고.
다만 홍매(洪邁)의 <이견지(夷堅誌)>와 주밀의 <제동야어>등 송나라때 문인들의 기록을 보면, 엄예는 혹형을 받으면서도 실토하지 않았고, 죽어라 자신과 당중우 지부간에 부정당한 관계가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옥졸이 그녀에게 좋은 말로 설득했다: "너는 왜 일찌감치 인정하지 않고, 이런 고초를 겪는 것이냐."
엄예는 굳게 말했다: "나는 천한 여자이니, 내가 설사 당대인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죽을 죄가 아니다. 그러나 어찌 거짓말로 사대부를 모함할 수 있겠는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고할 수는 없다."
세상사람들은 이 글을 보고 엄예를 대의늠름하고 은혜를 보답하는 협녀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하여 더더욱 주희가 당중우를 탄핵한 동기를 의심하게 된다.
2
주희와 마찬가지로 당중우도 관리라는 신분외에 학자의 신분도 있었다.
당중우는 자가 여정(與正)이며, 평생 저술을 많이 했다. <육경해(六經解)>, <제사정의(諸史精義)>, <열재문집(悅齋文集)>등이 있다. 그는 실용주의의 경세지학을 추구했다. 사상적으로 "삼소촉학(三蘇蜀學)"을 따랐다. 절강 금화(金華)출신이고 그는 남송 "절학(浙學)"의 대표자였다.
주희는 "이정낙학(二程洛學)"을 따랐고, 항상 복건(福建)에서 강학을 했다. 그는 "민학(閩學)"의 대표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남송이래, 주희와 당중우의 악연에 대하여는 한 가지 원인으로 분석했다: 학술지쟁(學術之爭)
이 견해에 따르면, 주희는 당중우를 무너뜨리고, 절학을 억누르기 위하여 전후로 6번이나 상소를 올려 당중우에게 촉한최세(促限催稅), 위법교민(違法攪民), 탐오음학(貪汚淫虐), 투도관전(偸盜官錢)등의 죄를 뒤집어 씌웄다. 심지어 여색을 밝혔다는 내용까지 추가하여 당중우와 엄예간의 부정당한 관계가 있다는 죄까지 고하고, 엄예를 감옥에 집어넣고 엄히 추궁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학술분쟁이 연유로 조정에서 이 사건을 처리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재상 왕회는 비록 주희를 '제거절동'으로 발탁했지만, 그는 당중우와 같은 고향사람이고, 친척관계가 있었다. 자연히 당중우를 편들었다.
당시의 황제인 송효종(宋孝宗)이 왕회에게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지 물어보자, 왕회는 가볍게 대답한다: "이 수재는 한가로운 일에 힘을 쓰고 있군요."
왕회는 주희와 당중우의 학술연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희는 정학(程學)이고, 당중우는 소학(蘇學)입니다." 송효종은 소식의 글을 좋아하던 사람이다. 그래서 당중우에게 좀더 호감을 느낀다.
그리하여 송효종은 완곡하게 주희에게 이른다: "절동의 일은 짐이 잘 알아들었다."
조정은 당중우를 가볍게 처리하고, 주희를 전보보내어 지방관리로 임명한다. 이를 통해 이 사건을 가라앉히려는 것이었다. 그후 명장 악비의 아들인 악림이 명을 받고 이 사건을 다시 심리하고, 엄예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고, "종량(從良, 양민으로 만들어주다)"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한다.
송나라사람들의 글에 따르면, 주희, 당중우가 싸우게된 또 다른 원인은 누군가 가운데서 도발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두 사람 모두와 가까운 친구인 진량(陳亮)이라고 한다.
남송 주밀의 <제동야어>에 따르면, 진량은 태주에서 좋아하는 기녀가 있었다. 여러번 당중우에게 그녀를 '낙적'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당중우는 바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기녀를 찾아서 물어본다: "너는 정말 진관인(陳官人)을 따라가겠는가?"
그 기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당중우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배고픔과 추위를 견뎌야 된다."
당시 진량은 아직 공명을 얻지 못하여 생활이 쪼들렸다. 그 기녀는 당중우의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꾼다.
그후 진량이 그 기녀를 만난다. 그런데 그 기녀의 태도가 예전같지 않고, 데면데면했다.
진량은 자신이 당중우에게 당했다고 여긴다. 주희가 태주로 올 때, 앞장서서 주희에게 고발한다. 당중우가 암중으로 주희는 글도 제대로 모르는데, 감사의 직을 맡고 있다고 조롱했다면서.
주희는 그의 말을 믿었고, 태주에서 조사할 때 당중우의 약점을 잡는다. 그래서 6번이나 상소를 올린 것이다. 당중우가 관리로수 부정부패할 뿐아니라, 사생활도 난잡했다고.
이상의 이야기는 송나라때 사람들의 글에 나오는 것이다. 그냥 듣고 넘기면 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진량이 나쁜 사람이 되었다. 진량(진동보)는 유명한 신파(辛派) 사인(詞人)이다. 사풍이 호방하고 사람됨이 소광(疎狂)했으며, 그런 감정문제로 사방에 말을 뿌리고 다니는 소인의 유형이 아니다.
3
남송의 홍매의 <이견지>와 주밀의 <제동야어>등 문인의 글에 따르면, 태주사건의 원인은 주희와 당중우간의 개인적인 은원때문이다. 주희는 당중우를 고발하면서 온갓 수법을 다 썼고, 심지어 연약한 여자에게 혹형까지 가했다.
최초로 태주사건을 기록한 사람은 홍매이다. 그는 주희, 당중우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주희보다는 나이가 7살 많았다. 그래서 그의 말은 신뢰도가 높다.
홍매의 <이견지>에는 이 사건에 대하여 단지 수백자를 남긴다. 주희는 당중우가 엄예과 부정당한 관계일 것이라고 의심하여, 엄예를 하옥하고 심문했으며, 나중에 악림이 조사하여 엄예가 억울하다고 하는 진술을 듣고 그녀를 석방했다는 것이다.
홍매가 기록한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교적 객관적이며, 주희가 개인적인 이유로 보복하려 했다는혐의는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홍매는 주희와의 관계도 별로였다.
왜냐하면, 홍매가 일찌기 '금송의화"를 주장한 투항파 재상 탕사퇴(湯思退)의 문하이기 때문이다. 주희는 주전파에 속했고, 악비의 후손들과 관계가 밀접했다. 자주 홍매는 주화파, 반전파로 소인과 결탁했다고 비난하면서, 그는 간사하고 험악한 소인이니 군왕의 곁에서 일을 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이렇게 보면 홍매가 주희에 관한 이런 이야기를 남긴 것은 아마도 일부러 그렇게 한 것같이 보인다.
이야기의 주인공중 한명은 조정의 명을 받은 관리 주희이고, 한명은 풍진여자 엄예이다. 둘을 비교하면, 많은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약한 엄예에게 기울기 마련이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주희의 학설은 송나라때 독보적인 지위에 있지 않았다.
송녕종의 경원당금(慶元黨禁)떄(1196년), 주희는 "위학괴수(僞學魁首)"로 비난받고, 이 태주사건이 다시 들춰진다.
정적들은 주희가 불효어친(不孝於親), 불경어군(不敬於君)등 6가지 죄를 저질렀다고 나열하며, 주희가 한때 비구니 2명을 끌어들여 첩으로 삼은 적이 있다고 하고, 집안의 큰며느리는 남편도 없는데 임신을 했고, 자제는 다른 사람집안의 소를 도살한 적이 있다고 비난했다.
당시, 주희에 관한 나쁜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았다. 가장 먼저 태주사건을 기록한 <이견지>도 이때 쓰여졌다.
비록 이 일의 진위는 고증이 필요하지만, 주희는 사람들에게 인신공격을 당했고, 더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당중우를 탄핵한 것은 사적인 은원때문이라는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주밀의 <제동야어>에 이르러, 태조사건의 이야기는 더욱 상세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여러 장면이 덧붙여진다.
다만, <제동야어>가 만들어진 때는 태주사건으로부터 이미 7,80년이 지난 후였다. 주밀도 말했다. 자신이 수집한 자료는 모두 태주의 고향사람들에게 들은 것이라고.
민간의 하층문인들과 백성들은 이들 송나라떄의 글의 영향을 받아, 당중우와 엄예를 동정했다.
명나라떄에 이르러 소설가 능몽초(凌濛初)는 이야기를 정리하여, 태주사건을 오락성이 풍부한 소설로 만든다: <경감안대유쟁한기(硬勘案大儒爭閑氣), 감수형협녀저방명(甘受刑俠女著芳名)>
명나라때는 정주이학을 관방철학으로 떠받들었고, 주희의 지위는 제고된다. 그런데 능몽초는 과거에 실패한 하층문인이니, 자연히 주희에게 그다지 호감이 없었다. 하물며, 정주이학은 명청시기에 이미 통치자에 의해 변질되어 단지 통치자들이 선비들을 통제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사회에는 가짜도학에 대한 혐오가 만연했다.
능몽초는 이를 기화로 송나라사람의 필기에서 이 이야기를 발굴하여 소설로 써서 주희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를 마음이 좁은 가짜군자로 묘사한 것이다. 자신의 사적인 분풀이를 위하여 연약한 여자에게 혹형을 가하면서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녀 엄예는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고, 감옥 속에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굴복하지 않았으며, 지기 당중우의 명성을 지켜주었다. 그렇게 그녀의 협녀이미지를 선양한다.
성인과 기녀의 강력한 반전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백성들이 즐겨 이야기하는 거리가 된다.
이제 주희는 태주사건에서 이미지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고, 마치 그가 당초 사적인 분풀이를 위하여 일을 조장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다만 필기소설은 그저 길거리에서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고 믿을만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시정의 백성들은 학자가 아니다. 그들은 소설의 이야기의 진위를 밝힐 수가 없다. 그저 재미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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