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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창 12:10-20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창 12:10-20 /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잠시 동안 애굽에서 살려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11) 아브람 일행이 애굽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여보, 사래 나 좀봐요. 당신은 정말 아리따운 여인이오 바로 그러한 점이 내 마음에 걸리오. 12) 애굽 사람들이 이렇게 아리따운 당신을 보고 `이 사람이 이 여인의 남편이지' 하고는 나를 죽이고 당신만 살려둘지 모를 일이오. 13) 그러니 여보! 애굽 사람들을 만나거든 당신이 내 누이라고 말하면 좋겠소. 그래야 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게 아니오? 또 나한테도 잘 대해 줄테고 말이오.' 14) 아브람 일행이 애굽 땅으로 들어갔을 때 애굽 사람들 사이에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무척 아리따운 여인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아브람이 걱정하던 대로였다. 15) 바로의 신하들도 사래를 보고는 참 아리따운 여인이라고 입을 모으고는 바로에게 보고하였다. 결국 사래는 왕궁으로 불려 들어갔다. 16) 사래 덕분에 아브람은 바로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바로는 아브람에게 양떼와 소 떼와 암나귀와 수나귀와 낙타 그리고 남녀 노예들을 선물로 주었다. 17) 하지만 바로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불러들였다는 이유로 여호와께서는 바로와 그 왕실에 벌을 내려 심한 병을 앓게 하셨다. 18) 그러자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아니, 네가 내게 어쩌자고 이렇게 한단 말이냐? 저 여인이 네 아내란 말을 왜 하지 않았느냐? 19) 저 여인이 네 누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내가 저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려 한 것이 아니냐? 네 아내가 여기 있다. 어서 데리고 나가거라.' 20) 바로는 자기 군인들에게 명령을 내려 아브람을 그 아내와 함께 그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 나가게 하였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갔으나 그곳에서 어려운 위기를 겪게 됩니다. 당시의 기근은 지금보다 더 절박한 상황이었고, 아브람은 자신을 따르는 모두를 지켜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다(10-13) 아브람의 고향은 큰 강과 그 주변에 비옥한 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풍요로운 곡식을 내어주었기 때문에 가나안에서의 기근은 그에게 큰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브람은 연약했고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며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가며 나름대로 계획을 세웁니다.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습니다. 애굽에서도 이방인인 아브람은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대비책이 고작 아내 사래에게 누이라 하라는 당부였습니다. 삶의 위기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 비신앙적인 태도는 행위의 결과에만 집착합니다. 아브람에겐 아직도 하나님은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래의 일로 재앙을 내리시다(14-17) 아브람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래에 반한 애굽 사람들은 아브람을 후하게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어리석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지라도 그를 구원하시고 바로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 큰 민족을 이루실 계획을 세우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구별된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당장 나의 앞에 위기와 어려움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람이 수치를 당하다(18-20) 하나님이 바로의 집을 치시자 바로는 아브람과 사래를 즉시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이긴 하지만 아브람의 승리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아내 사래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한 걸음 더 깊이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우리의 연약함은 연단을 통한 성숙함을 이루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겸손하게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는 신앙의 자세가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적용: 오늘 당신의 계획에 앞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삶 속에 여러 가지 환난이 다가옵니다. 그럴 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시험과 환난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항복하여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주여 이제 저의 지식과 총명, 지혜, 인생도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서 맡아 주시옵소서.”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고난을 이기고자 애쓰기 보다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면 그때 성령께서 당신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 설 교 >
아브람의 믿음의 여명기(3)
이동아목사 / 창 12:10-13:1-4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거쳐 가나안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러 하나님과 세번째 교통하여 약속의 땅을 확인하고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으로 부르며 신앙에 입문했습니다. 벧엘과 아이사이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 주님과 교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부터 교회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과 쓰레기 더미의 사이에서 아브람의 믿음이 발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직도 연약한 믿음을 소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전적인 은혜로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게 된 아브람은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아주신 사랑에 감복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 이름을 부르면서 주권에 항복하기로 결심합니다. 돌이켜 보니 은혜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뿌리내린 흔들림이 없는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은 아브람이 현재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말씀을 풀어 나갈 것입니다.
아브람의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시련을 통하여 검증되어야 하며 연단 된 믿음 이여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아브람에게 믿음의 행동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막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한지 얼마 안된 사람이 모든 삶과 행동을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환경과 상황을 통하여 시련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게 하신 다는 사실입니다.
환경을 통하여 연단 하시는 하나님
(창12:7-9)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壇)을 쌓고(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帳幕)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 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壇)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9) 점점 남방으로옮겨갔더라"
장막은 교제나 하나님과 교통을 상징하는 곳인데 제단을 떠나 육신의 욕망을 따라 옮겨가고 있는 아브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아직은 믿음의 범칙을 적용하기보다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여 가는 모습니다.
이렇다고 믿음이 없어서 남방으로 내려갔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숙한 신앙에서는 환경에 영향으로 우리의 거주지를 옮겨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교회 근처로 집을 사고 얻어 단을 중심으로 장막을 중심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요 자신을 풍성하게 하는 법칙을 아브람이 깨달아 믿음의 비밀을 가질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통산 적으로 세 번 나타나셔서 교통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기록된 말씀을 대하고 말씀으로 주님과 교통하면서도 신앙을 지탱하기가 쉽지가 않는데 가나안 땅에 이르러 막 하나님의 임재를 알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 신앙에 입문한 아브람이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애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시련과 실패들은 제단과 장막을 떠나 하나님과 교제에서 멀리 떠나 있을 때 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주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와 주님이 인도하심과 또 역사 하심과 능력에 힘입어 문제를 직면하고 환경과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믿음의 법칙인데 아브람은 벌써 세겜의 단과 장막을 벗어나 더 이상 예배와 기도와 제단이 없는 남방까지 옮겨갔다고 말씀합니다. 아직은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일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지 못한 때입니다. 그 영적인 삶의 중요성을 아는 저와 여러분은 어떤 문제가 있어도 어떠한 시련이라도 신앙제일주의 예배 제일주의 사명 제일주의로 모든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적 진리를 깨닫고 체험하도록 하나님은 환경을 사용하십니다. 형통한 날엔 기뻐하고 곤 고한 날엔 주님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자신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브람은 기근을 만났습니다. (창12:10) "그 땅에 기근(饑饉)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寓居)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람은 우선 살기 위하여는 애굽으로 내려가기고 결심하고 온 가족을 설득하여 문제를 피하여 애급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애급으로 내려갔다는 것은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볼 수있는 체험이 부족합니다. 그러기에 아브람에게는 신앙의 체험이 요청됩니다. (벧전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31:1-3)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은 말을 의뢰(依賴)하 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仰慕)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 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 어나사 악행 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 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함께 멸망하리라"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의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왜 아브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기근으로 애굽으로 내려 갈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아브람에는 그러한 믿음을 실행할 만한 사건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이것이 아브람의 믿음이 현주소였습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아브람은 기근이 심하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를 동원하고 자신을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약속을 믿고 시련과 고통을 직면하여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안목이 부족한 아브람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이 우선인 것입니다. 기다리고 인내하는 그 믿음이 없습니다. 아브람은 당면한 생계의 문제가 있고 기근이 심하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상관없이 움직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인도하심을 무시하였습니다. 그것이 아브람의 불 신앙이나 불순종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브람이 말씀을 붙들도록 인도하십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 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하란에서도 여호와가 영광가운데 나타셔서 말씀하심으로 떠났고 하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있었고 여호와의 말씀을 쫒아 움직였다는 사실을 볼 때 애굽으로 움직이는 사건은 전혀 주님의 교통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위기 대처 능력을 교훈 하실 목적으로 기근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기근 앞에서 직접 교통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계시의 말씀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현실을 피하여 움직일 때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하십니다. 아브람이 처한 상황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기근이라는 믿음의 시련을 피하여 은혜의 우산을 벗어나자 아브람으로 상상할 수 없는 연약함과 약점이 그대로 노출되고 맙니다. 시련의 용광로를 통하여 처리되지 못한 자아들이 우리 속에서 솟구치게 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약함 무능함 부적절함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신의 한계를 노출시키십니다.
(창12:11-13)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 대는 살리리니(13)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의 자기 중심성입니다.
아브람은 자기 신변을 염려하여 아내를 이용합니다. 미모가 뛰어난 아내 사래더러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내가 안전하고 내 목숨을 보존하도록 해 달라고 아내에게 간청합니다
요새 같으면 이런 남편은 이혼 감입니다. 당시에 애굽사람들은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고 사래는 피부도 곱고 아리따운 미모를 지닌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그렇지요 자기 아내에게 어떤 피해가 온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인간적인 꾀를 부리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나셔서 갈대아 우르에서 주님과 교동함과 여기까지 그를 불러내시면서 하란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15년만의 침묵을 깨고 교통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의 집요하신 설득과 찾아오심과 열심을 통하여 아브람의 자아가 깨어지고 주권을 주님께 다 내어 드린 줄 알았는데 세겜에서 고백과 예배와 찬양의 삶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브람은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인간이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과 조금도 틀림이 없는 거듭나지 못한 옛 성품이 살아 남아 자존심이 있고 내 삶을 지배하던 내 속에 자기가 아직도 내 삶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상황 앞에서 두려움입니다.
기근에 대하여도 두려워서 피하여 왔지만 더 큰 두려움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습니까?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갖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아직도 아브람은 하나님을 온전한 사랑과 은혜 가운데 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아브람은 더 이상 단을 쌓지 않습니다. 장막에서 주님과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 자연히 당한 상황 상황은 두려움과 염려가 몰려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불의한 재물을 얻게 됩니다.
(창12:15-16)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厚待)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 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아브람은 아내를 성상납한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자신의 신변만 생각한 것이 결국은 아내가 바로의 후궁으로 간택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아내라는 말을 숨기고 누이라고 했기에 대신들이 미모에 반하여 그대로 바로의 궁중에 취하여 들인 것입니다. 여기에 상당한 화대를 받습니다. 양과 염소 노비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어 어려운 기근 속에서 기대이상으로 물질이 풍요로워졌습니다. 복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아내를 후궁으로 상납하고 얻은 불의한 재물인 것입니다. 이것은 받아서도 안되고 하나님의 택하신 복의 근원이 될 아브람이 이런 추한 꼴을 당하여서 어찌합니까?
여기에 아브람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사래의 태를 통하여 약속된 구속의 역사가 여기서 무산될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아브람의 힘으로 재주로 방법과 수단으로 손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가진 인간의 한계입니다. 약점입니다.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옛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바로에게 공개적으로 망신당합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입술을 통하여 아브람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으로부터 책망 받고 잘못을 지적 당하는 일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창12:18-19)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 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 바로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고 불 신앙으로 오는 결과에 대하여 자신의 약한 부분을 바로로 하여금 지적 받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기에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사건을 통해서 아브람을 굴복시키십니다.
(창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緣故)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災殃) 을 내리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람의 불 신앙으로 비롯된 사래의 성스캔달을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아브람의 잘못을 지적하시거나 진노하시지 않고 바로를 벌하십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아브람이 여기서 깨어집니다. 기적과 표적은 바로 그 뜻이 있고 주시는 메세지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와 궁전에 재앙을 내렸습니다. 얻어 맞아야할 아브람은 보아주고 바로가 얻어맞습니다. 묵사발이 되고 맙니다.
그 당시 무서운 재앙은 대개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기근과 온역. 보아하니 기근은 아니고 풍요한 동네니까 온역이었다고 보여지는데 다른 말로 전염병입니다. 전문가들은 특별히 전염성이 강한 피부병이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 이제 바로의 입장에서 생각을 합시다. 아 모처럼 예쁜 첩하나 두어서 기분 좋았는데 갑자기 온몸에 피부병이 나면서 궁전의 모든 사람들이 다 끙끙 앓고 있단 말입니다. 도대체 왜 이럴까? 이게 무슨 일이냐 해서 궁내의 박수와 술객들에게 묻습니다. 왜 이러한 재앙이 있는 것이냐? 점괘가 나왔습니다. 새로 취한 그 여자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 남의 아내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섬기는 신이 노한 것입니다. 바로는 두손을 버쩍 들고 맙니다. 하나님이 손보십니다.
아브람이 주님과 의논하지 않고 행한 선택이요 자신의 이기심으로 거짓말을 했고 아내의 마음에 못질을 했으며 바로 왕에게 피해를 준 아브람의 죄는 절 대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 맞아야할 아브람은 두고 바로가 재앙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때리는 것보다 축복으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내가 맞아야 할 진노와 매를 옆에 사람들이 당합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단을 떠나 장막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실컷 하나님께 얻어맞고 다리를 저는 사람 목이 비틀어진 사람 늑골이 부러진 사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자국이 없는 우리 옆에 바로를 보게 하십니다. 그래도 못 깨달으면 매를 대실 것입니다. 고집을 부리면 더 크게 손을 대시며 끝내는 바로처럼 굴복시키고 말 것입니다.
아브람의 사건을 통해서 깨닫는 진리는 저와 여러분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죄없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끝없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는 것입니다.
(시 103:10-14)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處置)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 셨으니(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 다(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 기시나니(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塵土)임을 기억(記憶)하심이로다"
또한 가지 바로를 손대신 하나님의 의도는 아브람과 약속한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창12: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단순히 축복을 받는 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브람의 씨를 통해서 메시아를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이 메시아의 약속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어둠의 세력, 사탄은 백방으로 방해공작을 하였습니다.
아브람으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사라를 팔게 합니다. 바로가 막대한 돈을 주고 사라를 사서 자기 아내로 삼으려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라 사이에 태어나는 씨를 통해 메시아를 보내시려고 했기 때문에 이를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사탄의 방해들을 물리치시고,사라를 바로의 그 막강한 권세로부터 빼 내어 오십니다. 그리하여 아브람과 약속하신 바를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보 여 주십니다. 성경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아야합니다. 왜 아브람이 사라를 팔아먹으려 했으며, 헤롯이 베들레헴에 2살 아래의 유아들을 무참하게 죽였습니까? 왜 종교지도자들이 로마 권력과 손잡고 예수를 십자가에 꽝꽝 못박아 죽였습니까? 그 뒤에 어둠의 세력, 즉 메시아가 탄생하여 인류를 구원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사탄의 책략이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약속하신 바를 기어이 이루셨습니다.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창12:19-20)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 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 더라"
재앙을 경험한 바로는 아브람과 아내와 모든 소유를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케 하심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창13:1-4)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2) 아브람에게 육축(六畜)과 은금(銀金)이 풍부(豊富)하였더라(3)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 에 이르니(4)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벧엘과 아이사이에 세겜땅 모레 상수리나무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을 다시 찬양하게 됩니다. 이제는 믿음의 비밀을 얻습니다. (시37:23-24)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주님에 대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내에게 못된 일을 했던 잘못에도 불구하고 찬송과 기도를 잃어버리고 살았던 애굽의 어두운 밤중에도 변함 없이 아브람을 놓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를 그 환난에서 건져내신 하나님 회초리보다 후한 대접으로 무릎을 꿇어 항복케 하시는 하나님을 아브람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회복케 하십니다. 수치와 부끄러움 책망 회개를 안고 다시 돌아옵니다. 애굽의 시간은 허비와 낭비의 시간이요 손해와 피해를 보는 시간이었음을 회개하였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나의 부패함을 깨닫는 순간 전능하신 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한순간도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아브람은 깨달았습니다. 믿음의 눈이 떠가고 잇는 것입니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確信)하노라"
아브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이 오늘 저와 여러분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고 영생을 베푸셔서 이루시고자 하는 약속을 끝까지 이루시고야 말 것이며 우리의 약한 부분들 자신만만 자만했던 모든 이기심과 불 신앙을 깨뜨리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단을 쌓고 주앞에 항복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 시키시고야 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애굽에서의 삶의 시간을 줄이고 세겜으로 돌아와 첫사랑을 회복하고 예배가 회복이 되고 기도가 회복이 되어 사명의 자리로 헌신의 자리로 돌이키실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넘어지는 인간의 단점들과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들
창세기 12:10-20 / 이한배목사(부천광림교회)
ㅇ 질 문 - 이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는 누구일까요 ?
I. 서 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지만, 믿는 이들의 조상도 됩니다.(롬 4:11)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넘어짐은 신앙인들의 넘어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넘어짐을 통하여 우리의 넘어지는 단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는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듣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남으로 신앙의 길을 간 것과 같이, 신앙의 길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안전하고 익숙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전하고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향하여 가면,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처음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하나님은 함께 하셔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신앙의 길은 새로운 길을 떠나는 것이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입니다.
신앙의 길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가는 길이라 좋은 것도 있지만, 더 좋은 것은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이 복된 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가시는데도 신앙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는 넘어지는 단점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천국에 가는 길이요,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이기 때문에 넘어짐이 없는 길이 아니라, 그 길에도 넘어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이 가는 길입니다.
신앙인의 길은 새로운 곳을 향하여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는 길이며, 거기에도 넘어짐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인간의 단점과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신앙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영생과 천국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붙잡고, 우리의 익숙한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천국을 향하여 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는 신앙의 길에 있는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신앙인의 단점들과 넘어진 우리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은 믿는 자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II. 본 론
1. 넘어지는 단점들 - 두려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에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이 없는 애굽에 우거(寓居 - sojourn)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애굽에 가까이 오자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들이 당신을 빼앗으려고 나를 죽일 것이다. 그러니 내 아내라고 하지 말고 내 누이라고 하라. 그러면 당신 때문에 애굽 사람들이 나를 살려 줄 것이고, 나는 안전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사라를 보고는 소문을 내어서 애굽에 소문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왕의 신하들을 통하여 바로 왕에게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로 왕은 사라를 자기의 아내로 삼겠다고 궁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대신에 “아브라함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아브라함은 큰 재산은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내 사라를 빼앗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팔아먹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아브라함도 중요하지만 사라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라는 그냥 보통 아내가 아닙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같이 특별한 아내입니다.
우리는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아브라함이 그의 몸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반드시 사라를 통하여 낳은 아들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고 합니다.(창 17:21)
사라는 이렇게 중요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사라를 빼앗겼으니 아브라함의 삶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라를 빼앗은 자가 다른 사람들이라면 다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에게 빼앗겼으니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겠습니까 ?
어디에 가서 하소연을 해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완전히 넘어진 것입니다.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넘어진 것입니다.
사라를 빼앗긴 것은 그냥 아내를 빼앗긴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사라를 빼앗긴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빼앗긴 것입니다.
자기의 미래를 다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왜 이렇게 넘어졌는가를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요 ?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아리땁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빼앗기 위하여 자기를 죽일까바 두려웠습니다.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버렸습니다.
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로 아브라함은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 지 도 ***
하란까지는 아버지 데라와 같이 갔습니다.
그 후로는 조카 롯을 의지하면 혼자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두려웠습니다.
신앙의 길은 이렇게 항상 낯선 곳을 지나는 것입니다.
② 아리따운 아내와 같이 다녀야만 했습니다.
이 아리따운 아내 때문에 아브라함은 더욱더 위험했습니다.
신앙의 길은 가장 귀한 여생을 갖고 가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내어주는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절대로 내어주어서는 안 될 자를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두려움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심한 스트레스는 심장에 변화를 일으켜 죽게 할 수 있다고 Drs. Marilyn S. Cebelin of Cleveland 박사와 Charles S. Hirshch of Cincinnati박사가 말을 했다. 이 두 박사는 최근 입은 상처만 가지고는 죽지 않는데, 심한 폭행 후에 사람이 죽은 경우를 15개나 확인을 했다. 이 15개의 사례 중에 11개가, 피할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된 짐승들에게 일어나는 반응과 비슷한 소위 국소근원섬유퇴행(myofibrillar degeneration)이라는 심장 세포가 죽는 현상을 보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이렇게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넘어지는 이유도 이 두려움 때문입니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신앙의 길을 가는 자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절대로 빼앗기지 말아야할 것들을 많이 빼앗깁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님도 버립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로 죽음을 이기게 해 주시는 예수님까지 버리는 우를 범합니다.
이것이 연약 인간,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2. 다시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은혜들 - 임마누엘
이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음을 이기게 해 주시는 예수님까지도 버리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두려움 때문에 넘어지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렇게 부족하여서 넘어져서 완전히 망하게 되었으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 사라로 더불어 아들, 이삭을 낳고, 그 이삭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 이였습니다.
어떻게 바로 왕에게 빼앗긴 아내를 다시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도로 찾았으며, 그 사라로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로 바로 왕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바로 왕은 그 일이 자기가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은 일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느냐고 책망을 하고는 사라를 돌려주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바로 왕의 집에 큰 재앙이 내린 것이 바로 사라를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바로 왕이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큰 재앙을 내렸어도 바로 왕이 깨닫지 못하면 사라는 돌려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① 바로 왕의 집에 큰 재앙이 내린 것과 ② 그것을 사라를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바로 왕이 깨달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개입하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넘어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신앙의 길을 가느라고 두려운 분들이 분명하게 깨달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가야할 곳을 지시하시고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가는 길에 계속 함께 하시면서 그의 가는 길을 지시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두려움으로 넘어질 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분명하게 깨달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낯선 곳으로 가는 위험한 길입니다.
악한 원수 마귀 사단들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이 길을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보고 그런 길을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고 믿어야만 우리는 신앙의 길을 승리하며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이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잘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빼앗기는 일이 두 번 더 성경에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①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 때문에 자기가 죽을까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또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입니다.(창 20)
②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아내 리브가 때문에 자기가 죽을까바 그랄 왕 아비메렉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입니다.(창 26:1-11)
이렇게 비슷한 이야기가 세 번 나오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구구합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이, 그들의 신앙의 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얼마나 잘 못 믿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앙의 길을 가는 자들과 함께 하심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① 형 에서가 죽이려고 해서 밧단 아람으로 도망가는 야곱에게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형이 죽이려고 해서 도망을 가는 야곱은 아무도 없는 들에서 밤에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야곱은 가는 길을 몰랐습니다.
처음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② 모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는 길은 오금을 펼 수 없는 길입니다.
앞에는 자기들보다 더 강한 가나안 일곱 족속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 곳으로 쳐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수 1:5)
③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떠나면서, 순교의 길을 가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할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길을 가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성공적으로 가려면 우리는 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은혜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임마누엘의 은혜를 잘 모르고 믿지 못하는 것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은혜는 이와 같습니다.
초기 미국 인디언들은 젊은 아들들을 훈련시키는 독특한 풍습을 갖고 있었다. 아들들은 사냥 하는 법, 정찰하는 법, 고기 잡는 기술을 배운 후 13살 생일이 되는 날 밤에 최종 시험을 치르게 된다. 그는 빽빽한 숲속에 들어가서 홀로 온 밤을 보내야 한다. 그때까지 그는 가족과 부족의 보호에서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날 밤에는 눈가리개를 하고 동네로부터 수 마일을 떨어진 곳으로 간다.
그가 눈가리개를 풀었을 때, 그는 빽빽한 나무들 가운데 있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나무 가지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 때마다 그는 짐승이 자기를 덮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때가 되면 영원할 것 같은 무서운 밤이 지나고 동이 터온다. 그리고 첫 햇빛이 숲속에 비치게 된다. 소년은 주위에 있는 꽃들, 나무들, 그리고 숲속에 나 있는 길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활과 화살로 무장을 하고 몇 미터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는 놀라게 된다. 그는 그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짐승이 아들에게 덤벼들면 언제든지 물리치려고 무장을 하고 어둠속에서 밤새도록 아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무장을 하고 , 우리에게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III. 결 론
그러면 내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있는지를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
아브라함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난 후에 온전해 진 것을 신약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했습니다.(롬 4:18-22)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자들은, 말 같지도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 같지 않은 말씀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
2.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인내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히 6:13-15; 11:8-16)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어떤 상황에서도 길이 참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얼마만큼 참았는가 ?
3.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약 2:21ff)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자들은 말 같지도 않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 순종하고 있나 ?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히 알아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인내하고,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창세기 12:10~20 / 이수영목사
창세기가 전하는 인류의 역사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역사와 그 이후의 역사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민족이 없는 인류 전체의 역사라고 한다면,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민족의 역사입니다.
창세기가 전하는 아브라함 이전의 역사의 마지막 사건은 바벨 탑 사건입니다. 이 사건 서술의 초점은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거슬려 흩어지지 않으려 한 데 맞추어져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흩어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일로 끝납니다(창11:6~9).
이와 대비되어 택하심을 받은 민족의 역사는 떠나가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아브라함(창12:1~4)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자기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불행을 초래한 역사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그 자신뿐 아니라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11:31~32에 보면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합니다. “갈대아인의 우르”는 오늘날의 이라크 남부 지방의 페르시아만 가까이 있던 옛 도시로 여겨집니다. “하란”은 오늘날 터키의 동남부 지방에 가까운 시리아 북부에 있었던 도시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그의 식구들을 데리고 갈데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가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의 이라크를 북서쪽으로 횡단하고 시리아로 건너가는 머나먼 길을 이동해갔던 것입니다. 그 거리의 절반 이상 되는 거리를 하란에서 다시 남서쪽으로 내려와야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란에 정착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한 일의 재판을 봅니다. 창11:2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도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다고 합니다.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은 데라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다시 나타납니다. 창12:1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버지 데라가 정착한 땅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집과 친척과 고향마저도 버릴 수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떠나라는 명령만 내리시지 않고 그 명령에 순종하면 놀라운 복을 베푸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행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12:4~5).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런 질문도 대꾸도 불평도 없이 그냥 순종하여 칠십오세의 나이에 자기 가솔들을 이끌고 안정된 삶의 터 하란을 떠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며 많은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입니다. 복을 잃는 역사는 불순종과 함께 시작되었고, 복을 받는 역사는 순종과 함께 다시 시작됨을 우리는 분명히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희생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인간적인 욕구나 기존의 성취나 안정된 삶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훗날 아브라함은 나이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창22:2) 하나님의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에도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종에는 그 희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복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번제로 잡으려는 순간 그를 막으시며 이삭을 살려주셨을 뿐 아니라(창22:10~12) 그에게 큰 복 주심의 약속을 재확인해주셨습니다(창22:17~18).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런 위대한 믿음과 순종의 사람 아브라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입니다(본문 10절). 아브라함은 먹을 것을 찾아 이집트로 내려가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로 내려가면서 아브라함에게는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아내 사라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이집트의 남자들이 그녀를 가만 내버려둘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그녀를 탐낼 것이고, 그래서 자기가 남편인 것을 알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뺐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남편인 사실을 감추어야 죽기를 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류하고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하시는 말씀을 듣고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난 때가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창12:4). 사라가 아브라함보다 10년 젊었으므로(창17:17) 이때 사라는 적어도 65세였을 것입니다. 그런 사라를 보고 심히 아름답다 했다면 그녀의 미모와 건강은 정말 뛰어났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본문 11-13절).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인 것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사라는 아브라함의 배 다른 열 살 아래의 누이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남녀 사이의 결혼이 흠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전적인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라는 또한 아브라함의 아내이기도 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라는 말 그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지만 그렇게 말함으로써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닌 것처럼 보이려 한 것은 정직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정직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비겁하고 치졸한 짓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여차하면 자기 아내를 남의 여자가 되도록 넘겨줄 생각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에게도 이런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이르자 아니나 다를까 사라의 미모는 뭇 이집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본문 14절). 이집트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점잖았던 것 같습니다. 사라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당연히 바로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고관들은 바로 앞에서 그녀의 미모를 칭찬했고, 바로는 곧바로 사라를 자기의 궁으로 데려오게 한 것입니다(본문 15절).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자기의 아내라는 사실은 감추고 자기의 누이라고만 말했으며 그래서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사라를 아내로 삼는 대신 아브라함을 후대하며 그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주었습니다(본문 16절). 그런데 아브라함은 탈이 없었지만 바로에게는 그 일로 말미암아 큰 재앙이 임했습니다(본문 17절). 하나님께서 가만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실 여자였습니다. 그 귀한 몸을 이방 남자가 차지하게 내버려주실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지키시기 위해서 즉시 행동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에 무슨 큰 재앙을 내리셨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 바로가 사라에게 손도 못 대게 하셨을 뿐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일을 당하고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 같습니다. 혼비백산한 바로는 즉시 사태를 원상복귀시켰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불러 따져 물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본문 18~19절) 아브라함은 바로의 이 원망 섞인 추궁에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비겁함, 치졸함, 거짓됨을 다 인정한 것입니다. 화도 나고 어이없기도 했겠지만 바로는 서둘러 아브라함 부부와의 일을 청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본문 19절) 했으며 그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아브라함과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게 했습니다(본문 20절). 이렇게 아브라함과 사라는 위기를 모면했고 모든 스토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라함은 그의 도덕성과 남편으로서, 남자로서 명예와 체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살겠다고 비겁하게 아내를 남의 손에 넘긴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로 하여금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첫째는,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지고 하나님께 그토록 순종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온몸에 받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도 초라하리만큼 약해지고 치졸해지고 비굴해질 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진실을 감추었습니다. 그것은 달리 살아남을 방도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이해한다 쳐도 아내를 포기한 사실은 용서받기 힘든 일입니다. 그는 사실상 아내를 버린 것입니다. 아내의 사랑, 순결, 명예, 인격, 자존심과 자기가 생명을 맞바꾼 것입니다. 아내가 이방사내들로부터 치욕을 당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용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더 큰 잘못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에게 큰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에게 부르짖으며 보호해주시고 지혜를 주실 것을 간구하지 않고 아주 졸렬한 인간적 꾀를 부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뜻대로 완전히 성공할 수 없는 어리석고 얄팍한 꾀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즉각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주목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사라를 지켜주신 것입니다. 못난 아브라함이지만 말없이 그를 보호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가 처한 위기상황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책망도 비난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변함없이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록 못나고 연약한 우리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처럼 존귀하게 높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미 숱하게 연약하고 치졸하고 비굴한 모습을 반복해 보이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말없이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며 우리도 모르게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여겨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이심을 믿는 우리에게 모든 죄의 용서와 구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으심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생과 하나님나라의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영원히 지키실 하나님이십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 하루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신앙적 타협의 대가
피영민목사 / 창세기 12:10~20
서론
세상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타협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대화를 통해 자신도 50보 양보하고 남에게도 50보 양보를 받아내는 사람은 무슨 일을 맡겨도 다 잘해낼 것입니다. 반대로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융통성이 부족하고 완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타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타협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될 존재인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창세기 12장 7절에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가나안 땅은 아브람에게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이 아브람 시대에 다 이루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자식도 없는 상황에서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손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금방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금방 실현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에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 11:9).
그런데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람에게 큰 시련이 닥쳤습니다. 이 시련에서 아브람은 타협을 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의 환난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고 위대한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Ⅰ. 아브람은 왜 신앙적 타협을 했는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극심한 기근이 왔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창 12:10). 태양은 뜨겁고 비가 오지 않아 땅이 갈라지고 곡식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뭄으로 고통받고 기근으로 인해 굶주렸습니다. 가나안 땅에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심판을 내리신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지배하고 있었던 가나안 족속들은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부패했고 저주받은 족속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근의 고통은 가나안 족속만 겪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과 그의 가족들도 함께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도 때로는 하나님이 세상에 내리시는 심판을 함께 겪으며 고통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람의 가족들이 아브람에게 불평하는 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었으면 이런 어려움은 겪지 않았을 것인데 왜 이런 곳으로 끌고 왔느냐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은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명과 안전에 대해 큰 책임감을 느끼고 대책을 강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에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애굽에서 아주 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KJV 성경을 보면 “and Abram went down into Egypt to sojourn there”이라고 나와 있는데 여기서 ‘sojourn’ 잠깐 머무르는 것을 뜻합니다. 기근이 있을 동안만 잠시 우거하려고 내려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브람의 행동이 큰 불신앙의 행동이었다고 극심하게 깎아내리는데 사실 아브람의 입장에서는 약간 타협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창세기 12장 9절에 보면 아브람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남방에 있을 때 기근이 온 것입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애굽인데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나안 땅에 머무르면서 굶으시겠습니까? 조금만 더 내려가서 밥이라도 얻어먹으시겠습니까? 저라도 애굽으로 내려가 가족들에게 밥을 줄 것입니다. 아브람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가서 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 것 같아서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도 사실상 사래가 이복누이였기 때문에 완벽한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신앙적인 타협을 하긴 했지만 그렇게 악평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산길을 가다 보면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들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른 길과 잘못된 길이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참 가다 보면 완전히 다른 길임을 알게 되고 길을 잃어 밤에 추위를 만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람은 그 정도의 타협이 얼마나 큰 대가와 위험을 가져오는지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온 것은 가나안 족속에게나 아브람에게나 동일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과 가나안 족속은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야 했습니다. 아브람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왔고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족속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호소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피난처가 없었고 아브람은 피난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 살면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지만 불신자들은 살다가 어려움이 와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므로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왔을 때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도움을 요청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기근이 왔을 때 아브람이 제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만약 아브람이 기도했다면 하나님이 잠깐 애굽에 내려가 있으라고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아 시절에 헤롯왕의 핍박을 피해 잠시 애굽으로 피난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혹은 가나안 땅에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고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도 기근 가운데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기도 없이 하게 되면 실패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과 불신자의 삶의 차이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청년들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청년들이여 그대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대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대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어떤 분은 성경 읽는다고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고 하시는데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떡도 나오고 밥도 나오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Ⅱ. 아브람의 신앙적 타협이 가져온 결과는 무엇인가?
애굽에 내려온 아브람은 자기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애굽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부도덕하고 불신앙의 나라인지 애굽에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당시 65세가 넘었음에도 아리따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도 결혼의 언약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를 빼앗기 위해서는 남편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사래를 아내라고 했다가는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누이라고 반쪽짜리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결국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와 목숨의 위협을 당하고 거짓말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거짓말을 사소한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거짓말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근래에는 전화금융사기라는 신종 사기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기 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가족 관계부터 목소리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도 사기꾼들이 막내아들 승준이가 죽게 됐다며 목소리가 똑같은 아이를 시켜 전화한 것입니다. 제 아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거기에 넘어가 그들이 요구하는 돈을 보내려고 했는데 계좌번호랑 비밀번호를 몰라서 기다리는 사이 학교에 전화해보니까 학교에서 공부 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기꾼들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거짓말하는 자들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똑같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짓말도 큰 죄인 것을 알고 조심해야겠습니다.
아브람이 한번 발을 잘못 디디니까 자기 목숨도 위험해지고 평소에 하지 않던 거짓말도 하게 되면서 점점 더 잘못된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바로 왕의 첩이 될 뻔했습니다.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창 12:15). 아브람은 아내인 사래를 누이라고 속여 바로 왕에게 첩으로 제공한 대가를 받았습니다. 아내를 팔아 큰 제물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창 12:16). 여러분의 아내를 빼앗기고 10억을 얻는다면 좋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그런 물질이 아내를 빼앗긴 사람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아브람도 바로의 궁으로 들어간 아내를 생각하면 한순간도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영적인 행복을 희생시켜 물질적인 부유를 얻었다고 해서 만족해하면 안 되겠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고 나가서 돈을 번다거나 등산을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여기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영혼을 해쳤다는 뜻입니다. 자기 영혼을 해쳐서 온 천하를 얻어도 아무런 만족과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영혼을 해치고서 얻은 제물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귀에게 영혼을 팔아 인기와 돈을 얻었다고 한들 그것이 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노래하는 가수들을 보면 마귀에게 자기 영혼을 팔아서 인기와 돈을 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인기와 돈은 결국은 독이 되어서 자기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아브람도 기도하지 않고 잠깐 애굽에 내려간 신앙적 타협 때문에 결국 자기 목숨이 위험해지고 아내를 팔아 돈을 받은 사람으로 오명을 쓸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Ⅲ. 하나님은 아브람을 어떻게 이 위기에서 건져주셨는가?
사래가 바로의 궁에 들어가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큰 위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이 사래를 보호하시기 위한 방법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나라든지 왕들은 여인을 금방 취하지 않습니다. 에스더서를 봐도 에스더가 금방 왕비가 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교육도 받고 정결의 시간도 가지고 단장도 한 다음에 왕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건져주실 시간이 충분했던 것입니다. 만약 일반 애굽인 중에서 힘 있는 자가 사래를 취했다면 이런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왕으로 하여금 사래를 취하게 하셔서 다른 사람들이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창 12:17). 하나님이 바로 왕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렸습니다. 무슨 재앙인지는 모르지만 이 재앙을 통해 사래를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바로 왕이 깨닫습니다. 그리고 남편인 아브람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아브람을 불러서 꾸짖습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창 12:18). 왕을 속인 죄는 이 정도로 끝나는 죄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당장 목이 달아나야 마땅한데 아브람은 몇 마디 책망을 듣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의 입장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의 타협을 하게 되면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만약 아브람이 죽고 사래가 바로 왕의 첩이 되었다면 아브람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두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가장 적당한 때에 합당한 방법으로 개입하셔서 아브람의 생명도 보존하시고 사래도 지켜주셨으며 부요도 누리게 하셨습니다. 바로 왕은 아브람을 책망하고 사래를 돌려주면서 재물을 다시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부자가 되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창 13:1~2). 아브람이 실수했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아브람에게 복이 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실수해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아브람의 신앙도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13:3~4). 신앙도 회복되고 가정도 회복되고 물질은 덤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이 경험은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람을 인도하셨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셨고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 되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아브람은 어떻게 됐겠습니까?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이 죽고 거기서 성경이 끝났을 것입니다. 성경이 얇아져서 좋긴 하겠지만 구원을 주는 책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 론
잠언 3장 5~7절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대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잠 3:5~7). 우리 성도들은 여호와를 의뢰하고 인정하고 경외해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의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은 어렵습니다. 아브람이 순종해서 가나안 땅에 왔지만 거기서도 기근이 왔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산다고 해서 모든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불순종과 타협의 길은 더욱 고달프고 위험한 길인 것입니다.
제가 보는 신문에 대한민국 그리스도인 중에 가나안 교인들이 많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가나안 교인은 어떤 교인을 말하는 것인가 궁금해서 봤더니 교회를 안 나가는 교인을 가나안 교인이라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안 나가’를 거꾸로 해서 ‘가나안’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지만 교회는 안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를 안 나가느냐? 목사가 허물이 많고 교회에서 자꾸 돈 내라고 하니까 교회를 안 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나오지 않고 세상으로 가면 행복해집니까? 가나안 땅에 기근이 왔다고 해서 애굽으로 가면 행복해지냐는 것입니다. 순종의 길이 고달프다고 해서 불순종의 길로 가면 행복해집니까? 예수님을 믿긴 믿어도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결국 영혼이 고달파져서 교회를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하지만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복음도 모르고 교회를 잠시 다니다가 나간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뵙지 않으면 영혼에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람은 8~19절까지 모두 11절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만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애굽에 내려가서 실수했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용서해주셨고 그 실수를 완전히 회복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이 도와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만날 나의 큰 도움이십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이용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브람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신앙에 조금이라도 타협한 것이 있거나 뒤로 물러선 것이 있다면 즉각적으로 돌이키셔서 하나님이 구원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근이 있을 때에
전종태목사 / 창세기 12:10-20절
<여는 말>
할렐루야!
서로 인사합시다!
“잘 나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일 아침에는 <기근이 있을 때에>라는 제목으로 오늘의 본문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많은 은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늘 범사에 형통하고 만사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반적인 생각이 다 맞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을 통해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말씀을 좇아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축복의 말씀도 약속해주셨습니다.
히 6:13-15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받았으며 그 하나님을 위해 날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비록 그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늘 함께하심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경건한 삶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모범적이요 이상적인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이삭과 야곱과 요셉같은 믿음의 조상들은 예외없이 두 가지 축복을 다 받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저와 여러분도 이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그랄왕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찾아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노라”고 하면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라고 인정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복을 주시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아브라함에게도 심한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이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크게 낙심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하던 아브라함에게 이런 시련이 온 것을 보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일수도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형편이 IMF 때와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어렵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왜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지 실망이 되고 낙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특별히 믿는 사람들이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5:13에서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잘되다가도 어느 날 풍랑이 일고 어려움이 생기면 이는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사인(sign)인줄 아시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습니다.
이런 사인(sign)이 여러 가지 시험으로 환난으로 풍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말씀하시려고 하시는 때이므로 추진하던 일을 잠시 멈추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시렵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말씀해주세요.”라고 간절히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인이 나타날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그 후에 더 큰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기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응답받았다는 말은 더 더욱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지 않고 우선 먹고살기 위해 무작정 애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이처럼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고 판단한 것은 아브라함의 큰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런 실수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기도해보지 않고 무조건 다른 사람들 말만 믿고 이리 저리 집을 옮기고 쉽게 일터를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은 무슨 유행처럼 좀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 신앙생활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이민을 결정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단은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을 보면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많고 영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얼마나 힘든 고난 속에 사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님 모시고 사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를 당하게 되면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응답을 받을 때까지 충분히 기도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 종교와 기독교가 여러 가지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만 그중에 세상 종교는 사람의 수공물로 눈에 보이도록 그들의 신을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세상 종교는 사람들의 눈에 신의 형체가 확실히 들어오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죽은 신입니다.
그래서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전지전능하십니다.
인격을 가지고 계시며,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충분히 기도하면 꿈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합니다.
또 성경을 읽는 가운데 말씀을 주실 때도 있으며, 직접 음성을 들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충분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좇아가는 것이 믿음의 행위요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기근을 만난 아브라함은 충분한 기도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도응답도 받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믿음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사람이 믿음을 따라 살지 않고 이런 일들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다보면, 믿음이 약해질 뿐만 아니라 가졌던 믿음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정직하지 못한 방법을 시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매우 연약해져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복누이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자신의 아내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기 아내를 빼앗고 혹 자신도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이런 거짓말을 꾸미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남의 여자를 빼앗기 위해 아내가 보는 앞에서 남편을 죽이고 여자를 데려가는 경우가 흔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까봐 두려움에 떤 것입니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도 두려움이 찾아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자신의 믿음이 약해졌다고 판단하시고 속히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또 이 세상을 두려워해서도 안됩니다.
두려움은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29:25절을 보면,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하면 평소에 말을 잘하던 사람도 말을 잘 못하게 됩니다.
또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연주자가 연주하기에 앞서 두려움이 엄습하면 아무리 완벽하게 곡을 준비했어도 피아노를 칠 때 실수를 많이 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많으면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병이 많이 생깁니다.
이처럼 두려움이 주는 해독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국에 경제공황이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취임연설을 하면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는 유명한 말을 선포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이 두려움을 빼고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절망하게 되고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어린 세 자녀와 동반 자살한 젊은 여인이 방송에 보도되어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그 이유가 3천만 원의 빚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은 돈 이전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불안과 걱정 근심이 그를 자포자기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두려움 때문에 비열한 짓을 했습니다.
과연 그의 생각했던 대로 아내를 애굽왕 바로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주며 후대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오직 먹고살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왔고, 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로 소개했으며, 그러다가 애굽왕에게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이때 그의 마음은 대단히 착잡하고 암담했을 것입니다.
사라 또한 자신의 남편 아브라함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자신의 목숨 때문에 아내를 포기하고 남에게 주는 비겁한 남자를 한평생 남편으로 믿고 살았으니 참으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믿음이 약해지면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을 좇아 살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하고 믿음으로 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업에 부도가 나든지 물질에 극한 어려움을 당하면, 혹 하나님께서 나를 떠난 것은 아닌가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너희를 떠나지 않겠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히 13:5).
그러므로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은 죄로 하나님께서 바로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다행히 바로가 아브라함을 불러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창 12:18~19)고 말하고 사라를 돌려보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좋을 때만 지켜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연약할 때에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 왕으로부터 책망과 수치를 당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믿음으로 바로 살아야 하나 믿음이 부족하여 거짓말도 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다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듣고 욕을 먹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왜 기근을 주셨을까요?
1.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입니다.
평안할 때 만사가 잘 될 때는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모릅니다.
믿음이 얼마나 뿌리가 깊고 견고한지는 태풍이 불어와야 알 수 있습니다.
비로소 환난과 시험 때가 되어봐야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생기고 풍랑이 일면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자신의 믿음을 보여줄 좋은 기회가 왔구나 생각하시고 고난의 때를 기도하며 잘 이기시기 바랍니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어떤 집사님이 부도가 났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교회를 나가지 않던 회사 사원 중에 한 사람이 부도가 난 직후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예전에는 사장이 아무리 자신에게 전도를 해도 전혀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회사가 부도난 후 사장이 취한 태도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낙심하거나 도망하거나 술에 잔뜩 취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기독교에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환난과 풍랑과 어려움 당할 때, 만사를 제쳐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자세인줄 믿습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낙심하고 실망하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응답받을 때까지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하다보면 응답받게 되고, 그 말씀대로 행하다 보면 하나님의 때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이삭 때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어려움이 왔을 때 이삭과 같은 신앙의 모범적인 자세로 환난을 이기고 더 큰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심을 체험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평안할 때는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셔도 그것을 깨닫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러나 환난과 시련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여주시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먼저 광야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큰 뜻과 목적이 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습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시고 날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구체적으로 체험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체험하면 믿음이 쑥쑥 자라납니다.
과연 그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전지전능하시며, 절대주권이 그 하나님께 있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것을 고난 가운데 분명히 체험하게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 몹시 가난하게 자라났습니다.
학교에 다니며 납부금을 낼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일을 생각해볼 때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필요를 따라 공급해주셨으며, 점점 더 좋은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면 그 어려운 고난의 시간들이 나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해주었고 체험적인 신앙으로 무장시켜주는 축복이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굳건하게 확실히 자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물질 축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영과 육이 아울러 큰 복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습니다(롬 8:28).
오늘날과 같이 어려움이 많은 이때에 날마다 믿음을 붙잡고 항상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련이 닥쳐올 때
곽창대목사 / 창 12:10-13:4
주님을 믿는 신자들이 재난을 당합니다. 이전보다 더 주님을 의뢰하고 열심히 살고 있는데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사업이 힘들어집니다. 가정에 우환이 닥칩니다. 치명적인 병에 걸립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계실 거야! 믿음을 연단하시려고 하시는 거야!” 머리로는 이해하고 수긍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고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질 않을 때 하나님을 향해 원망이 생깁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정말 절 사랑하십니까? 하나님, 살아계십니까?”
주위 사람들 보기에도 민망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주눅이 듭니다. “저들은 예수 안 믿어도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한데 나는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마음이 산란해지고 한숨과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신앙의 회의가 일어납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지만 실제로는 그리하기가 아주 힘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어 달리기보다는 우리의 상식과 경험을 의지하는 쪽으로 나아가기가 쉽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그랬습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아브람은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환경적으로 볼 때 갈대아인의 우르나 하란보다 나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 땅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반응은 써늘했습니다. 자기를 도와줄 친척이나 친구가 없는 그 땅에서 아브람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람이 밟고 있는 그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아브람은 새 힘을 얻었습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 이후로 아브람은 계속되는 여행 도중에 자주자주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아브람의 가족들이 가나안 남방에까지 내려갔을 때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기근을 만난 것입니다(10절). 점점 기근이 심해졌습니다. 양식이 바닥나고 있습니다. 가축들은 물론 식솔들까지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더 이상 양식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것도 엄청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복이 넘쳐서 모든 민족들에게로 흘러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 닥친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가나안은 축복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임신하지 못하는 아내와 기근으로 황폐한 땅만이 덩그렇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식솔들과 가축들이 불어났기 때문에 기근의 때에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아주 힘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한 가지 동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에도 기근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축복의 땅이라고 해서 부족함이나 시련이나 재난에서 제외된 곳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의 삶에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드는 것,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도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 시련의 바람이 불어 닥치는 것, 이상한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신자나 불신자 구별 없이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이런저런 고통을 경험하며 사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정도를 비교할 때 경중의 차이가 나지만 그 차이가 별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실존적인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야말로 최고의 고통이요 전부인 것처럼 느끼는 것,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인생은 고통 속에서 사는 존재라고 해야 옳습니다. 고통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람 잘 날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여기 앉아있는 저와 여러분들도 현재 고통거리를 안고 있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아도 고통이 없었던 때는 별 없었습니다.
우리가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신자는 불신자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야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고통의 때에 우리 신자들도 불신자와 별 다르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아브람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극심한 기근을 만난 아브람이 취한 행동이 무엇이었습니까? 12:10절입니다. 식구들과 가축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유는 그 당시 애굽 땅에만 양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 가운데서도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내려가는 무리들이 꽤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람 일행도 생존을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길 외에는 양식을 구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 자체를 잘못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10절을 보면 영원히 살려고 애굽에 내려간 것이 아니었음을 말씀합니다. “거류하다”는 뜻은 잠시 머문다는 뜻입니다. 기근의 때가 지나면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려고 내려간 것입니다.
문제는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한 결정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결정을 넘어서 신앙적인 결정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양식 때문에 할 수 없이 애굽으로 내려가지만 거기서도 하나님만을 의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경배하겠습니다. 애굽 땅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겠습니다.”라는 신앙적인 결단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맥을 볼 때, 아브람의 애굽 행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의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했다고 평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믿음의 차원이 상당히 결여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신자와 불신자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신자인 우리도 결정을 내릴 때 세상 사람들처럼 합리적인 판단, 경험적인 판단, 상식적인 판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무슨 결정이든지 거기에 반드시 믿음이 개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결정의 최종적인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추측하는 것이 옳은 것은 이어지는 행동에서 즉시 그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12:11-13입니다.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아브람의 마음에 불안이 생겼습니다. 그 불안이 점점 커져서 드디어는 자신이 살해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생겼습니다.
아브람에게 생긴 불안과 두려움의 일차적인 원인은 아내의 미모 때문이었습니다(12:11). 지나가는 말이지만, 미모의 아내를 둔 남자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내의 미모 때문에 심각한 위기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자 청년들이 자매들의 미모에 끌리는 것,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미모의 아내를 얻기 위해 반드시 구비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믿음입니다. 그것도 믿음이 상당히 커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미모의 아내와 성공적으로 살려면 남자에게 반드시 큰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얼굴과 몸매만 보고 결혼하면 평생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당시 6-70세쯤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래가 127세까지 살았으니까 그 나이면 중년입니다. 하지만 출산의 경험이 없었기에 몸매가 고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 사람과 셈계 사람은 피부색깔이 다릅니다. 애굽 여인들은 피부가 까맣습니다. 그러나 사래가 속한 셈계의 여인은 갈색입니다. 거기다가 사래는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처녀와 다를 바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애굽 사람들이 셈계 여인을 보면 가만히 안 둔다는 것입니다.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여인을 빼앗기가 일쑤라는 것입니다. 양식 때문에 할 수 없이 내려가는 길이지만 아브람에게 큰 염려가 생겼습니다. 아내 때문에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고민 고민하다가 묘책이 떠올랐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사래에게 관심을 가지고 물어오면 누이라고 둘러대자고 아브람과 사래가 합의했습니다.
실제로 사래는 아브람의 이복동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짜박이 거짓말은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지만 실상은 거짓말입니다. 사래의 지금 신분이 아브람의 이복동생이 아니라 아내였습니다. 그것보다 더 분명하고 중요한 신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숨겼으므로 분명히 거짓입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분명 죄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우리가 무엇을 결정할 때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염려와 불안이 생기고 이어서 두려움이 찾아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말까지 지어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앙이 빚어낸 결과들입니다. 믿음의 결여에서 생겨난 일그러진 모습들입니다.
사실 미지의 땅으로 들어설 때나 어려움이 예상되는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갖가지 염려와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럴수록 우리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급하심과 보호하심을 의뢰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신령한 지혜와 용기를 주셔서 난관을 헤쳐 나가게 하십니다.
다시 아브람의 얘기로 돌아갑시다. 아브람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사래의 아름다움에 혹했습니다(12:14). 그 소문이 애굽의 왕실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사래를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후궁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당시 근동지역에서 최고의 권력자였던 바로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후궁으로 간택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결혼한 여인이 아니라면 더더욱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졸지에 아내를 빼앗겨버렸습니다. 그 대가로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12:16). 사람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놓였습니다. 여기서 아브람은 자신의 지혜와 힘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절감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많음을 아브람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내를 빼앗긴 마당에 산해진미의 음식이나, 왕으로부터 받은 큰 선물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기쁨과 행복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아브람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몇 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태를 수습하셨습니다. 12:17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재앙의 원인이 후궁으로 삼기 위해 데리고 온 사래 때문인 것을 바로가 알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은 아브람을 급히 불러서 책망합니다(12:18-19). 그리고는 사래를 돌려줍니다(12:19 하반절). 12:20은 아브람 일행이 애굽에 우거하는 동안 안전하게 거하도록 바로가 친히 명령을 내렸음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13:1-2은 아브람의 애굽 생활의 요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크게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하나님이라면 아브람의 소행이 괘씸해서 그의 재산을 다 몰수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육축과 은금이 더 불어나게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불어난 가축과 재산은 아브람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결국 아브람의 애굽 생활은 그의 믿음이 연단되는 기회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에서 배워야 할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시련을 만날 때 우리의 믿음의 수준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형통할 때에는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견고한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친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련입니다. 특히 그 시험에서 실패했을 때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깨닫고 겸손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자신의 경험과 상식을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달려가 호소합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 믿음이 있다고 인정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눅 18:8)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원통한 일을 당할 때, 시련이 계속될 때, 끝까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자가 믿음 있는 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먼저 기도부터 합니다.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전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더 실감나게 경험했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주시는구나!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은 인간의 생각과 수준을 훨씬 초월하는구나!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만 아니라 여기 애굽에도 계시는구나! 언제 어디서라도 늘 함께 하시는구나!” 이처럼 아르바람의 믿음이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큰 고통이 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곤경 속에 빠져있다고 느낍니까? 그러면 아브람의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아브람의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시험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장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도 오늘 본문에서 얻어야 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성도 여러분, 현재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는 아닙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시작하도록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전과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본심은 고통과 실패가 아닙니다. 회복과 연단과 성숙과 평안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입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그 착한 일을 결국 이루십니다!
성도 여러분, 아브람처럼 실패했습니까? 다시 시작하십시오! 지금 넘어졌습니까? 다시 일어나십시오! 회복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다시 일어나 주님께 경배하십시오!
13:3-4을 보면 아브람이 벧엘에서 다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렸습니다(13:3-4). 애굽에서의 경험이야말로 아브람에게 값진 교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돌아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진보입니다. 여러분들도 실패를 딛고 일어나 다시 시작하십시오! 그 시작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의 실패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의 수준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살면 반드시 문제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믿음을 따라 생각하고 행하는 대신에 세상 사람들의 수준 정도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인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대신에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고집대로 말하고 행동할 때 아브람처럼 그 어떤 것으로도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낭패를 당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이 바로에게서 “왜 네가 거짓말했느냐?”고 책망을 받았듯이 우리도 책망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불신자에게서 책망을 받으면 자기만 책망 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을 때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결론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궁극적인 복은 믿음입니다. 그것도 정금 같이 단련된 믿음입니다.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만이 우리의 인도자요, 공급자요, 보호자라는 확신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오늘 본문의 적절한 주석으로 삼을 수 있는 두 구절을 소개합니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벧전 1:6-7)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여러 가지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함으로써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 정금 같이 단련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 찬송 374장
요약
주님을 믿어도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고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질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상식과 경험을 의지하는 쪽으로 가기가 쉽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임신하지 못하는 아내와 황폐한 땅만이 덩그렇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도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에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고통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근을 만난 아브람은 식구들과 가축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서 그곳에 잠시 머물렀습니다(12:10). 그 길 외에는 양식을 구할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결정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차원이 결여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결정을 내릴 때 합리적인 판단, 상식적인 판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모든 결정의 최종적인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증거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마음에 불안이 생긴 것입니다(12:11~13). 자신이 살해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생겼습니다. 두려움의 일차적인 원인은 아내의 미모 때문이었습니다(12:11). 당시 애굽 사람들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여인을 빼앗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애굽 사람들이 사래에게 관심을 가지고 물어오면 누이라고 둘러대자고 사래와 합의했습니다. 실제로 사래는 아브람의 이복동생이었지만 당시에는 아브람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숨겼으므로 분명히 거짓이고, 하나님 앞에서 죄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을 결정할 때 신앙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염려와 불안이 생기고 이어서 두려움이 찾아 듭니다. 그러면 거짓말까지 하게 됩니다. 이것이 불신앙이 빚어낸 결과들, 믿음의 결여에서 생겨난 일그러진 모습들입니다. 여러분, 살면서 갖가지 염려와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럴수록 우리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급하심과 보호하심을 의뢰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신령한 지혜와 용기를 주셔서 난관을 헤쳐 나가게 하십니다.
아브람의 예상대로였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사래를 후궁으로 삼기 위해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12:14~15). 아브람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심으로 그 사태를 수습하셨습니다(12:17). 그 재앙의 원인이 사래 때문임을 알게 된 애굽 왕은 아브람을 급히 불러서 책망한 후에 사래를 돌려줍니다(12:18~19). 이후 하나님은 아브람을 크게 축복하십니다(13:1~2). 결국 아브람의 애굽 생활은 그의 믿음이 연단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에서 배워야 할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시련을 만날 때 우리의 믿음의 수준이 드러납니다. 시험에서 실패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깨닫고 겸손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께로 달려가 호소합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 믿음이 있다고 인정하십니다(눅 18:8).
둘째, 시련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아브람은 이전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더 실감나게 경험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곤경 속에 빠져있다고 느끼신다면 아브람의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아브람의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믿음의 시험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장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도록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본심은 실패가 아니라 회복과 연단과 성숙과 평안입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귀환하여 감사의 제사를 올림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합니다(13:3~4). 아브람처럼 실패했다면 아브람처럼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우리의 실패를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면 아브람처럼 그 어떤 것으로도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나아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실패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분명히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궁극적인 복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만이 우리의 인도자요, 공급자요, 보호자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약 1:12; 벧전 1:6~7). 여러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함으로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장에서의 나눔
1. 시련을 만나면 여러분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시나요?
2. 아브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유익은 무엇인가요?
3. 어떻게 하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나요?
애굽에서 만난 위기
이준원목사(콜럼버스교회) / 창세기 12장 10~20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적으로 풍성함과 충만함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하고 얼마 못 되어 정 반대로 바닥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이상하다 여기면서 불안함도 느낍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얼마 전만 해도 이렇게 좋았는데 지금은 밑바닥을 치니 어떻게 된 건가?’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새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을 때, 특히 영적으로 충만할 때 어떤 어려움이 온다면, 그 어려움은 우리를 위한 믿음의 시험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주시는 믿음의 테스트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시기 전의 원래 이름이 아브람이었습니다. 12장 앞부분에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냥 떠나서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 본문을 보면 아브람은 아주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고 즉시 떠났습니다. 자기 아버지와 친척들을 다 놓아두고 그냥 떠났습니다. 사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도 먼 타국으로 이사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 당시에 이렇게 떠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지금 있는 곳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자기가 그 동안 누리고 있던 모든 것, 즉 편안함과 안락함과 안전 등을 다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가나안에 도착한 후에 거기서 그를 반겨주며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거칠고 적대적이었으며 그를 경계했습니다. 창세기를 죽 읽어보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아주 경계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아브람은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은 부르심을 받기 이전보다 좋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집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 새로운 땅으로 이사를 왔지만, 그곳은 그가 기대하던 아름다운 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줄 땅으로 가라.’ 하셨으면 당연히 ‘그곳은 지금 사는 곳보다 훨씬 더 좋은 땅인가 보다.’라고 생각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그곳은 오히려 아주 거칠고 황량한 땅이었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헷갈리기 시작할 만합니다.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왜 하나님은 이런 땅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처음 도착한 세겜에서 하나님이 ‘바로 여기다’ 하셨을 때 일단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7-8).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곳은 약속의 땅처럼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상황에 따라 점점 남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9).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바로 앞까지의 이야기입니다.
1.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다 (10절)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깨닫는 첫 번째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났다고 해서, 또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엄청난 약속을 받았다고 해서, 곧 탄탄대로만 걷거나 만사형통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으로 오면서 어땠겠습니까? 분명히 많은 기대를 품고 왔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그 자세한 이야기는 성경이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브람은 온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창조주께서 자기에게 오셔서 부르시고 ‘내가 너를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게 해주겠다. 내가 이제 네게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 하셨을 때, ‘야, 이제 대단한 인생이 되겠구나.’ 하고 기대하며 왔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땅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집안 출신이었는데, 이제 살아 계신 하나님, 유일한 참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서, 이제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들뜬 마음으로 이 약속의 땅을 향해 피곤한 줄도 모르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땅에 도착해 보니까 그가 만나게 된 것은 축복과 풍성함이 아니라 아주 혹독한 기근이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0절)
이때 기근(흉년)이 든 것은 지금의 기근과는 다릅니다. 지금은 기근이 들어도 식량을 미리 비축해놓고, 요즘 먹거리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당시는 기근이 들었다 하면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심한 기근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전에 풍요로운 도시였던 갈대아 우르 출신인데, 나중에 하란으로 갔고 거기서도 기근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는 더욱 헷갈리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이전에 좋은 것들을 다 떠나왔고, 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7) 하고 확인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떠나라고 해서 떠났고, 가니까 여기라고 하셔서 예배도 드렸다면, 각본상(?) 다음 순서는 뭐가 되어야 합니까? 당연히 이 약속의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성공과 번영을 누리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성공이 아니라 혹독한 가뭄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아니, 왜 기근이 드는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겁니까?
그래서 이때 아브람은 하나님께 이렇게 외쳤을 지도 모릅니다. ‘주님, 제가 주님께 순종해서 아버지 집을 떠나 이곳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먼 길을 왔는데 고작 주시는 것이 이 기근입니까? 축복의 땅인 줄 알고 왔는데 기근이라뇨? 약속이 틀립니다.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복을 받을 줄 알고 그와 함께 따라온 사람들이 뭐라고 불평을 늘어놓았겠습니까? ‘그러게 이 땅으로 간다고 하셨을 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그 하나님에게 순종한 결과라는 말입니까?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습니까? 기껏 왔더니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아브람 일행이 여행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그의 아내 사래가 있고, 동생이 죽어서 그의 아들인 조카 롯을 데려왔습니다. 또 그와 함께 한 많은 사람들과 낙타들과 짐승들의 행렬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당연히 물과 식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제 심한 기근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큰일입니다. 이제 꼼짝없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해주시고 바로 여기라고 하신 그 땅에 와서 죽게 된 것입니다. 그냥 하란에 있었으면 이렇게 죽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께 순종해서 왔더니 죽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실 이것은 아브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려 하는데,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잘하며 살려고 하는데, 복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엄청나게 나쁘고 힘든 일들이 생깁니다. 왜 그런지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도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아주 심한 기근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보겠다고 결단하며 나아갈 때는 어떻습니까? ‘아, 이제 내가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잘 섬기고, 기도와 말씀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열심히 하니까, 하나님이 뭔가 좋은 것을 주시겠지?’ 하고 기대합니다. 그런 기대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기대와 정 반대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삶을 맡기며 살려고 하는데도 아주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잘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당하기도 하고, 사업이 실패하기도 하고, 이번과 같은 전염병이 돌아서 그것 때문에 직장에서 쉬라고 하기도 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자녀가 잘될 줄 알았는데 실패하는 등의 일이 생깁니다.
이런 어려움들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아니, 하나님이 잘해주실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되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며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버리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안 되겠다. 위험하다. 이제는 내가 알아서 그냥 내 방식대로 살아야겠다.’ 하는 마음이 듭니다.
바로 그것이 아브람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이곳까지 왔는데 오히려 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그래서 그가 기근을 피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애굽까지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게 어려운 상황이 올 때, 특히 우리가 믿음생활을 잘하고 하나님을 잘 따르는데도 어려움이 올 때, 슬쩍 타협하면서 다시 옛날 방식으로 내가 알아서 하는 식으로 가면, 지금 당하는 기근보다 더 큰 어려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에게 삶의 어려운 문제들이 닥치는지 우리가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따르며 순종하는 경우에도 어려운 일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올 때 ‘왜 이런 일이 내게 왔는가?’하며 실망하고 낙심하고 분노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우리가 그때 할 일이 뭔가 하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주님이 여기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가? 이것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비록 힘들지만, 우리가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언제입니까? 바로 어려움을 통해서입니다. 풍요롭고 잘 먹고 잘 살 때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너무 연약해서, 잘되면 성장하는 게 아니라 타락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 때 신앙생활을 잘하던 사람이 풍요로워지고 돈 잘 벌고 성공하면 믿음을 떠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 반대는 제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나님을 잘 따르는데도 어려움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믿음의 시련입니다. 그런 어려움을 통해 우리를 빚으셔서 더 귀하게 사용하려고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은 더 정교하고 단단하게 다듬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심한 기근을 만나게 된 아브람은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합니다(10). 그러나 이때 아브람은 애굽으로 가는 대신 사실은 하나님께 여쭤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 여기가 맞습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러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이 이곳이 맞는다면,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면 분명히 나를 굶어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하며 나아갔어야 했습니다.
그때 만약 한 종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람 주인님, 이제 하루 분 식량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것마저 없어지면 더 이상은 먹을 게 없습니다. 짐승들과 우리들 모두 다 굶어죽게 될 겁니다.’
그럴 때 아브람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겠습니까? ‘그것을 다 주어서 먹도록 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공급해주실 것이네.’ 바로 이런 믿음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배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냥 자기 생각과 판단 아래 약속의 땅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아브람이 가진 정말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기근으로 인해 굶어죽는 것으로부터 가족과 함께 한 사람들과 가축들을 구하겠다는 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그게 왜 문제이겠습니까.
그의 진짜 문제는 그가 자기를 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과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상황을 보고 자신의 판단과 생각에 의해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그의 진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결정을 한 것이 그의 진짜 문제입니다.
우리도 아브람처럼 어떤 문제에 닥쳤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자기 생각에 옳게 보이는 결정을 내릴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내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까?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특히 환경은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변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변하는 환경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변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환경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오히려 더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당장은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심한 기근이 있더라도, 절망할 만한 상황이더라도, 앞길이 다 막힌 것 같더라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붙들고 따라가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2. 애굽에서 더 큰 어려움을 만나다 (11~16절)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알고 따라갔으면 좋겠지만,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나아가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브람이 잘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면 특히 불안함이 찾아옵니다. 아브람이 위기에 닥쳐서 타협하고 애굽으로 갔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1-12절)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기 판단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했을 때,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문제를 가져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애굽에 가까이 갈수록 그의 불안함이 점점 더 커집니다. 마음이 불안해지면 어떤 현상이 생깁니까? 평범한 일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보통 일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이전에는 자기 아내 사래가 아름답고 예쁜 여인인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불안한 가운데 자기 아내를 보니까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다른 남자들이 사래를 탐낼 것 같다. 그리고 아내를 데려가기 위해서 나를 죽일 것 같다.’라는 불길한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이 연구해보니까, 사람이 염려할 때 그 중 90% 이상은 이미 과거에 끝났거나 미래에 전혀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미 과거에 끝난 것을 계속 후회하고 또 미래에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해 염려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브람이 꼭 그렇습니다. 지금 쓸 데 없는 일로 걱정하고 있습니다. 실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마음속으로부터 미리 걱정하고 미리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자기 혼자 막 상상을 하는 겁니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미래에 분명히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가고, 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미래가 불안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일을 진행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이 잘 풀린 게 아니라 마음에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혹시 일이 잘 풀려도 마음은 불안합니다. ‘이러다가 또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더 안 좋은 것은, 바로 그 불안 때문에 비정상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멀쩡하다 갑자기 자기 안전에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점점 더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엉뚱한 수단과 방법을 찾게 됩니다.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3절)
이것은 물론 사실에 근거한 생각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의 이복누이였습니다(20:12). 그래서 이것은 아주 그럴 듯한 생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지금은 분명히 자기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자기 아내이지 무슨 누이입니까?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믿기는 믿는데 비슷하게(비스무레하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믿지 못하고 적당히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십니까? ‘믿음을 가지는 것은 좋은데 너무 빠지진 말아야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믿어야지.’ 그런데 적당히 믿고 비슷하게 믿으면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아무리 아브람이 핑계를 대더라도 거짓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판단으로 애굽으로 내려온 것도 잘못이지만, 이제 거기에 거짓말까지 더해서 사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까지도 그 거짓말에 관련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아브람 일행이 지금 애굽으로 들어오자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더 복잡하게 꼬입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사래에 대해 바로에게 보고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4-15절)
물론 사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가 75세였고 아내 사래는 65세였습니다. 물론 그 당시는 지금보다 더 오래 살았지만, 그래도 그 정도 나이가 되었으면 아주 젊은 여인처럼 예쁘지는 않았을 텐데 너무 예쁘기 때문에 걱정을 했다는 겁니다.
사실 사래는 미모가 뛰어난 여성이기도 했지만,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더 눈길을 끌었다는 말입니다. 역사의 기록에도, 이집트 남자들은 이집트 여자들보다도 외국 여자들을 더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바로 그런 것 때문에, 실제로 자기 아내가 예쁘기도 했지만 이제는 노년에 들어가는 나이인데도 예뻐서 불안했다는 것은, 사실 외국 여자였기 때문에 불안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마음이 불안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더 안 좋았습니다. 애굽에 오기 전에는 ‘사래가 나를 보호해줄 방편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던 사래를 아예 바로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자기를 막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빼앗겨 버렸습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누가 와서 ‘안녕하세요?’ 할 때마다 괜히 자꾸 ‘이 사람은 내 누이입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괜히 누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안물안궁’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십니까?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먼저 ‘내 누이입니다. 내 누이입니다.’라고 떠들고 다니니까, 바로의 신하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왕의 후처가 되어야 한다고 추천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지금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습니다.
이때 아브람이 겪었을 충격과 두려움을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아브람은 사래 때문에 바로 왕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받게 됩니다.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16절)
여기 보면 양과 소와 노비들과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습니다. 나중에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 하갈도 이때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이때 ‘야, 내가 아내는 잃었지만, 대신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았으니 이게 웬 횡재인가? 이걸로 가서 다른 여자를 알아봐야지.’라고 생각하며 너무 행복해 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불행하고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는 심히 괴로웠습니다. 이전에 불안하고 걱정했던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두려움이 그를 덮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것을 직면하고 뚫기보다 피하는 길을 택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떠나 애굽으로 왔을 때, 아브람의 믿음은 완전히 밑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8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인생의 가장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갔을 때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근이 왔더라도 하나님께서 ‘이곳이 바로 그 땅이다.’라고 하셨으면 거기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그가 굶어 죽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그냥 버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내려갔다가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이 개입하시다 (17~20절)
이제 아브람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브람은 이때 ‘아, 내가 괜히 아내를 누이라고 했다가 이제는 아내를 빼앗기게 되었다.’ 하고 괴로워하며 울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십니다. 아브람이 인생의 비참한 실패를 경험하고 있을 그때,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게 아니라 바로 그의 곁에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7절)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온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전혀 안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아브람과 동행하시면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바로가 사래를 자기 궁으로 데리고 들어왔을 때 하나님이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여기서 그게 어떤 재앙이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때 개입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특히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 아브람이 믿음 없는 사람처럼 살 때 다른 사람들에게 저주가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18-20절)
여기 보면,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막 야단을 칩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집에 어떤 재앙을 내리셨는지,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인 것을 바로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여기서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여기서 핵심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은 아브람이고 이집트 왕 바로(파라오)는 결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또 거기 있었기 때문에 바로와 그 집에 해가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3절)
아브람을 축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미 축복과 저주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믿음으로 행동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니까 실제로 저주가 임하는데, 그 저주가 잘못한 아브람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멀쩡한 다른 사람들, 이집트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람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복을 주는 복의 근원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으로 살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순종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면 우리 주변 사람들, 우리 주변에 있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을 때, 그 저주가 혹시 나에게 임하지 않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이 임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안 좋은 일들이 많습니까? 혹시 우리가 제대로 살지 않음으로 인해 이 사회가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주변의 이웃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습니까?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우리가 제대로 못 살아서 벌어졌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 외에 작아 보이는 일에도,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함으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둘째로,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아브람이 그의 불순종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의 순종을 깨고 못 했는데, 하나님은 지켜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아브람은 깨고 하나님은 지키십니다. 아브람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아브람이 자신의 판단으로 애굽으로 내려갔고, 쓸 데 없는 불안과 초조 가운데 거짓말을 해서 위기를 자초했을 때,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을 보시며 ‘얘도 이젠 안 되겠다. 내가 다른 사람을 써야겠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를 끝까지 붙들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만, 원래부터 믿음이 엄청나게 좋은 사람이라 하나님이 부르신 게 아니라, 부르셔서 만들어가신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이 다 그렇습니다. 원래 좋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셔서 빚어나가신 사람들, 그런데 그것을 잘 견디고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아브람을 붙드시고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람이 착한 사람이거나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 때문입니다. 앞으로 사래의 몸을 통해서 이삭이 태어나는데, 사실은 멀리 보면 사래의 몸을 통해 태어날 그 아이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메시야)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실수도, 바로의 권력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적당히 살고, 대충 살고, 신앙생활도 대충 하는데도, 아무 문제도 없고 잘 살고 있다면, 이렇게 코로나바이러스가 도는 사태에도 건강하고 안전하게 잘 지내고 있다면, ‘내가 괜찮은 사람인가보다. 내가 잘나서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착각입니다.
오히려 정확히 계산해서 잘한 것에는 복을 주시고 잘못한 것에는 벌을 주신다면, 우리 인생은 벌써 끝이 났어도 몇 번은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우리는 멀쩡히 잘 살고 있습니까? 그것도 이런 바이러스 사태 가운데도 안전하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나서 붙들어주시는 게 아닙니다.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주십니다. 자녀는 아무리 잘못해도 부모님이 잘 돌봐주지 않습니까?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고 나온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지키시기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우리가 초점을 맞출 것은 주변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또 의지해야 할 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생각이 아니라, 오직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변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이 세상의 모든 것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특히 이런 위급한 상황에 꼭 인도해주십니다. 우리의 실수와 잘못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 개입하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바로 그것이 복의 근원으로 살기로 결단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입니다. 우리의 불성실과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도 때로는 유혹에 넘어가고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불순종의 길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그런 것이지, 우리가 영원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좋아서 일이 잘 풀리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끌어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완전히 휩쓸려 망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주신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결정을 내릴 것이 많은데,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삶을 살든지 하나님은 분명히 신실하게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우리가 악용해서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안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대가가 뭔가 하면, 아무리 일이 잘 풀려도 마음의 불안함입니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 임하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야단을 맞고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올 때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나?’가 아니라, ‘아, 내가 지금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영적 도약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셨구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번엔 또 어떤 놀라운 일들을 행하려고 하십니까? 제가 깨닫게 해주십시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편안하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너무 쉽거나 편안하면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들려주셔서 우리의 영적 근육을 키워주기 원하십니다.
왜 선물을 많이 주셔도 우리가 별로 들고 가지 못합니까? 하나님이 복을 안 주시는 게 아닙니다. 엄청나게 주시는데, 그것을 들고 갈 영적 근육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약하니까 다 들고 갈 수가 없습니다. 엄청나게 선물을 주셨는데 못 들고 갑니다.
그래서 영적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근육은 이런 어려운 일들을 믿음으로 극복할 때 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움이 저주가 아니라 복이 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바로 이 신실하신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며 매일 쏟아 부어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충만하게 맛보는 가운데, 복의 근원으로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최정인목사 / 창세기 12:10-20
서론: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산상수훈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 주님은 세상 속에 있는 우리의 정체를 네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산 위에 있는 동네, 켜서 등잔대 위에 놓인 등불입니다. 여기서 소금, 빛, 동네, 그리고 등불은 모두 우리의 착한 행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우리 주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사람은 그 자신들만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구원하려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람 생애의 초기에 있었던 유명한 일화를 다룹니다. 그는 비겁하게도 세상의 권력자 앞에서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하므로 심각한 부끄럼을 당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 사이에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아브람 부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은 상당한 혼선을 빚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 부부를 통하여 후손을 주려 하셨는데, 아브람은 자기 아내 사래를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자기 누이라고 속여 그녀를 파라오의 아내로 주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 과정에서 파라오로부터 막대한 재산까지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12장 10절부터 20절까지의 본문을 통하여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눕니다.
1.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10-13).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이제 10절을 봅시다. 이 시점에 아브람은 남방 즉 네게브에 머물렀습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아브람의 삶은 말씀, 제단, 장막의 세 가지로 특징지어졌습니다. 그는 말씀을 따라 장막을 이동하며 가는 곳마다 다시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아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방으로 이동한 것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렇게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시점에 바로 그곳에서 기근을 만났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기근은 사람과 가축과 동식물이 모두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거대한 재앙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기상이변으로 인하여 기근을 포함한 온갖 기후 재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근을 당한 아브람의 선택은 이집트였습니다. 이집트라는 말은 이집트 종교의 신화에 나오는 창조신 “타(Ptah)의 영혼”이라는 말에서 기원했습니다. 이집트라는 헬라어 단어 “아이굽토스”(Αἴγυπτος, Aiguptos)는 신약성경부터 나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집트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전부 “미쯔라임”(מִצְרַיִם, Mitsrayim)입니다. 상당히 낯선 이름처럼 느껴지죠?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를 기술한 내용을 읽으면 이 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창세기 10:6을 찾아 읽어 봅시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함의 이 네 아들이 이 네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스라임은 그들이 사는 나라를 의미했고, 그 나라는 나일강 유역의 북서 아프리카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12:10에서 아브람은 기근을 피해 미쯔라임으로 가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아브람에게 속한 사람이 1000여 명에 달했고, 그들이 기르는 가축까지 포함해서 그들에게 음식과 물 그리고 거주지와 목초지를 제공해 주는 상당한 지역이 필요했습니다.
아브람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가려고 했던 것은 이집트라는 나라는 나일강의 주기적 범람으로 오는 농업의 풍부한 결실에 의지해서 풍요한 삶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선택은 피치 못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집트행을 결정했는지는 상당한 의문이 듭니다. 우리는 이렇게 합리적 선택, 어쩔 수 없는 선택,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선택 등의 여러 가지 경우에서 때때로 상당한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모든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행할까요? 이 아브람의 경우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고비의 순간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까요?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이제 11절을 봅시다. 이제 아브람 부족은 이집트 접경에 도달했습니다. 그동안 아브람은 많이 고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가진 고민의 원인은 자기 아내 사래가 미녀라는 사실에 근거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가 미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제 눈에 안경” 식의 주관적 느낌에 지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5절에 나오는 대로 사래는 실제로 미녀였습니다. 아브람과 그의 부족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는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주전 2092년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약 2년 정도 머문 후, 이집트로 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 해는 주전 2090년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에 도착한 때, 그의 나이가 75세, 아내 사래의 나이는 10살 적어서 65세입니다. 제가 오늘날의 나이와 비교하여 이해한다면 아브람은 40세 정도라고 했던 것 기억하시죠? 그래서 오늘날의 나이로 이 둘이 이집트에 도착할 때는 아브람은 41세, 사래는 33세 정도였다고 이해할 수 있죠. 오늘날에도 결혼하여 서른 살이 넘어도 상당히 아름다운 여인이 많이 있습니다. 예쁜 아내와 사는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고민을 아브람도 어쩔 수 없이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자기 아내 사래에게 그녀의 미모에 대하여 말을 꺼냅니다.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2절을 봅시다. 아브람의 관심사는 아내 사래로 인하여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사래의 미모로 인하여 자신은 죽임을 당하고 사래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염려였습니다. 이러한 아브람의 염려가 합리적인 추론일까요, 아니면 쓸모없는 기우였을까요?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3절을 봅시다. 아브람은 그 상황에서 아주 엉뚱한 제안을 합니다.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아브람과 사래가 서로 결혼하기 전에 그들은 서로 배가 다른 남매였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아내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데라는 아내가 두 명 이상이었고 아브람과 사래는 서로 배가 다른 형제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1촌인 남매 사이에서 0촌인 부부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람의 제안 혹은 요구는 0촌인 부부 사이를 1촌인 남매 사이로 이집트 사람들에게 말하자는 것입니다. 아브람 부부와 롯 부부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는 이 상황에서 아브람의 이러한 생각은 한편으로 이해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용납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에 내려가도 자기 아내를 떳떳하게 자기 아내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사래도 아브람을 자기 남편이라고 얘기했어야 합니다.
아브람은 사래에게 그렇게 제안하거나 요구하는 근거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라고 제시합니다. 자기 아내를 지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아내의 미모에 의지해서 자기 생명을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는 것은 이미 아내를 빼앗긴 후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어떠한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브람은 아내를 빼앗기면, 새로운 아내를 얻을 생각이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아주 무대책입니다. 그는 아주 부끄러운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사래의 선택지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아내입니다. 진실을 말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시다.” 아마 사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답이었을 것이지만, 그녀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람도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2.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14-16).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이제 14절을 봅시다. 아브람 일행은 나일강 유역으로 난 길을 따라 상류 지역으로 수도인 헤라클레오폴리스까지 갔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제10왕조의 시기였습니다. 이 왕조는 2130년부터 2040년까지 약 90년 정도 지속했습니다. 이집트는 기원전 31세기부터 그 유명한 주전 1세기 클레오파트라의 시기까지 약 3000년 동안 33 왕조 정도의 왕조 역사가 있습니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들 가운데 이집트의 제4왕조 시대 파라오 쿠푸왕이 20년의 공사 후 완공한 것이 쿠푸 왕의 피라미드입니다. 그때가 주전 2560년경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근교에 있는 이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보면서 아브람 일행이 계속 남하했을 때는 이미 그 피라미드가 세워진 후 470년 정도 흐른 후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집트의 문명이 얼마나 오래된 것임을 다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시대가 지금부터 4000년 전 정도로 정말 오래되기는 했지만, 이처럼 그 시대의 문명은 오늘날 우리의 눈에도 경이롭습니다.
아브람 일행을 만난 이집트 사람들은 아브람이 걱정했던 대로 강압적으로 그의 아내 혹은 누이 사래를 빼앗아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의 이동 속도보다 먼저 사래의 미모에 관한 소식이 온 이집트에 퍼졌습니다. 과연 사래는 당대 최고의 미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 들인지라
15절을 봅시다. 아브람 일행이 헤라클레오폴리스에 도착하자, 사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파라오의 고관들이 그녀를 직접 보기 위해 아브람을 찾아왔습니다. 아브람은 그들에게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사래도 역시 같은 대답을 합니다. 파라오의 신하들이 아브람을 찾아온 이유는 아브람의 여동생 사래를 파라오에게 후궁으로 바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사래는 파라오의 신하들을 따라 파라오의 후궁이 되기 위해 파라오의 궁전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아내를 누이라고 말함으로 자신의 생명을 지켰지만, 아내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당대 이집트의 절대권력자는 막대한 권력과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 이집트 제10왕조의 파라오가 누구인지는 역사적으로 아직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그 파라오는 사래를 보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후대합니다. 이제 파라오와 아브람은 처남과 매부 사이가 되었습니다. 파라오는 사래를 후궁으로 얻은 값으로 아브람에게 양, 소, 노비, 암수 나귀 등 막대한 재산을 주었습니다. 아브람은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요? 아니며 이렇게 될 것을 계산했을까요? 도대체 아브람은 어쩔 셈이었던가요? 그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나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보이 될지라”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런 약속을 받았기에 아브람이 그렇게 세상 사람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그 결과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의 값으로 막대한 재산을 얻은 것일까요? 아브람의 이러한 행동은 결단코 지혜롭지도 않고, 순결하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가운데 우리는 마치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들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뱀처럼 지혜로운 양, 비둘기처럼 순결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와 순결은 항상 우리에게 함께 있어야 합니다.
3.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7-20).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이제 17절을 봅시다. 아브람은 진창에 뒹굴고 있는데, 하나님은 하늘에서 급히 그의 상황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꾸짖거나 심판하는 대신,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잘못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는데, 재앙은 세상 자녀가 받은 것입니다. 실로 이러한 상황이 아브람이 받아야 하는 고통이고,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8절을 봅시다. 파라오는 다시 아브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는 아브람에게 준엄한 꾸지람의 말을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아무리 막강한 권력자라 해도, 이미 그 시대에도 다른 사람의 아내를 존중해야 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만일 사래가 미혼이라면, 바로와 사래의 결합은 그들의 문화에서도 충분히 용납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형식이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래는 아브람의 아내였고, 파라오는 아브람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얻고 그 값을 아브람에게 치른 것입니다. 파라오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큰 재앙을 당한 후,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급히 상황을 정상적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파라오는 아브람을 질책하고, 아브람은 꾸지람과 부끄럼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의 자녀에게 윤리적으로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는 경우는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합니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우리도 언제나 이러한 상황을 만들고, 하나님의 강압적인 개입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개입하신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19절에서 파라오는 명확하게 문제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문제의 원인은 아브람에게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했기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파라오는 아브람의 누이를 자기 아내로 삼은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취한 여인이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내였던 것입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잘 보면, 파라오는 사래를 아내로 얻기는 했지만, 동침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개입하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찔했던 순간이었습니까? 우리도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면, 이런 아찔한 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보 같은 결정이나 실수를 저지르는 나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대하셔서 살려주시는 상황을 때론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람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 부부를 순결하게 지키시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씨로 큰 민족을 이룬다고 약속하셨을 때,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브람과 사라 사이에 씨를 주신다는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창세기 21장에 이르러서야,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고 난 후가 되어서야,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고 사라가 90세가 되어서 임신의 가능성이 거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이삭이 태어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실로 하나님과 아브람 부부 사이의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삭을 주시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가 이렇게 아브람과 사래 부부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내용을 채워지는 것입니다.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이제 20절을 봅시다. 파라오는 신하들을 명령하여 아브람에게 사래가 정확하게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아브람에게 주었던 짐승과 종들을 반환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파라오는 그의 넉넉함을 보여주었고, 아브람은 이 부끄러운 과정에서 부끄러운 재산을 얻음으로써 더욱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결론: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
만일 우리의 작은 잘못을 포함하여 모든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즉각 매번 심판하신다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하심을 보여주시며 우리도 온전하게 자라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개입하셔서 우리를 곤란한 상황 가운데서 건져내어 주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지혜롭고 순결하게 생각하고, 기도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제 집사님이 우리를 위하여 반주해 주시는 동안, 이 한 주간도 이렇게 온전하신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며 우리의 발걸음이 온전하기를 위하여 다 함께 기도합시다.
약속의 땅에 기근이 올 때
창 12장 10~20절 / 윤태성목사
들어가는 말)
위기를 기회로 바꾼 기업이 있어서 소개를 합니다. 지난 1일 삼성전자가 창립 된지 40주년이 되는 때입니다. 현재는 삼성전자가 얼마나 대단한가하면 일본의 소니와 미쯔비시 산요 파나소닉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대단한 회사들입니까 이런 회사 7개 보다 더 많은 영업흑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성 전자는 반도체는 잘 만들지만, 다른 제품은 여전히 싸구려로 인식되던 회사였습니다. 세계시장에서는 여전히 소니를 중심으로 한 일본기업이 아날로그 시장을 석권하고 기술 격차는 점점 벌어집니다. 그때 경영의 위기의식을 느낀 이건희 전 회장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경영진을 소집한 뒤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바꿔 바꿔 어떻게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저는 여기서 이건희 회장의 통찰력을 느낍니다.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 무서운 줄은 압니다. 만약에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고 자식이고 뭐고 다 바꿔라 이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틀림없이 실패했을 겁니다. 여러분! 다 바꿔도 자기부인은 못 바꿉니다. 여자가 얼마나 힘이 세는가하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도 누가 먹게 합니까? 남편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했으면 남자가 선악과를 먹었겠습니까? 내가 이것먹고 죽으나 잔소리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순교하는 마음으로 먹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도 여자의 근성을 알았기에 욥의 자식과 재산은 다 바꾸고 두 배로 해도 욥의 부인은 그대로 두셨겠습니까? 남성 여러분 부인이 바가지를 안 긁으면, 감사하게 생각하시고 바가지를 긁으면 내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대들거나 싸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가정이 행복합니다.
바꾸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위기의식을 느끼자. 이제는 모방이 아니라 창조를 통해서만 세계적인 회사가 될 수 있다. 성경의 이야기로 ‘자기를 부인하라’ 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꾼다는 것은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세상의 육적인 것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9절에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어려운 순간에 뒤로 물러가면 멸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드리는 아브라함도 뒤로 물러갔다 실수하고 낭패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목처럼 “약속의 땅의 기근이 올 때” 우리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큰 위기 뒤에 큰 용기를 알게 된다.” 성경에 보시면 아브라함에게 위기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나안땅에 왔지만 그에게 어려운 일이 발생합니다. 10절에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여기서 '그 땅'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지시를 하셨으면 당연히 그 땅은 기름지고, 농사도 잘 되고, 풍년이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날 때에 우리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약속의 땅에도 얼려운 일이 생기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것이 맞는가 이런 회의가 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른 기근이 아브람에게 닥쳐오게 하십니까? 그것은 아브람의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근의 때에 당신의 믿음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복의 근원, 믿음의 큰 그릇으로 빚으시기 위해기근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때 “Mr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때 아브람은 기도의 단을 쌓아야 했습니다. 그는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뿐만 아니라,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도 여호와께 단을 쌓고, 하나님께 묻고 기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 이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 기근을 어떻게 이겨내야 합니까?” 이렇게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에게 살 길을 보여주시고, 기근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베풀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급한 나머지 양식이 풍족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아마도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애굽은 부자 나라니까 애굽으로 가서 잠시 기근을 피하자!”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행동이었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내려 갔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비겁한 짓을 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어려움의 때에 육적인 방법을 선택을 하면 잠시는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영이 죽게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룻기에 보면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에 가뭄이 듭니다. 이때 나오미의 가족이 유대 땅을 떠나서 모압 지경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자식들은 모압 여인에게 장가를 가고 잠시 잘살게 되지만 후일에 그 가정에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아들인 말룐과 기룐이 죽게 되는 비극이 발생을합니다. 그때 나오미가 깨닫습니다.“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들어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나를 마라 괴로움이라 칭하라” 결국 하나님의 징계임을 깨닫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그 가족이 다시 구원을 받게 되고 가문이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키우시기 위해서 때로 믿음의 시련을 주십니다. 이때 우리가 힘들다고 고난을 피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고난이 힘들다고 인간적으로 고난을 피하고자 하면 예기치 못한 더 큰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때에 인간적인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ex) 얼마 전에 감리교에서 신학을 하신분의 전도사님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처음에 자기의 이름을 걸고 시작한 송강호 철판 복음밥이 대박을 터트리게 됩니다. 많은 프렌차이즈점을 거느리고 정신 없이 성장을 합니다. 여러분 시기적으로 사업이 호황을 누리며 상승곡선을 타면 무섭게 올라가지만 한번 유행이나 시류를 잘못 타면 위험한 것이 또한 사업입니다. IMF가 오면서 외식산업이 불황을 겪게 되고 어려운 때를 맞이합니다. 그때 고향 선배 목사님에게 전화가 옵니다. 교회가 건축을 하다가 어려우니 헌금을 좀해라 자기도 어려운 때 헌금을 해달라는 말이 얼마나 야속하겠습니까 그래서 통장을 보니 1500만원이 남아있더랍니다. 그 당시 1500만원이면 많은 돈은 아니지만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종자돈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골프를 치다가 ‘그 돈을 교회에 헌금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고 그 돈을 헌금을 합니다. 이제는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돈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마음이 그렇게 편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조금 시간이 흘러갔는데 자신이 입주해있는 상가건물이 매각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분 마음에 웬지 모르게 그 건물을 내가 매입을 하면 잘 할 수 있겠다 생각이듭니다. 그래서 관리책임자를 만나려고 했는데 도무지 만나주질 않았는데 나중에 우연히 책임자르 만나게 되었는데 그 책임자가 자기의 중학교 동창입니다. 서로 깜짝 놀란 것이 오랫 동안 같은 상가에 있었는데 동창이라는 것은 서로 몰랐던 입니다. 그제서야 그 친구가 이렇게 이렇게 해라 길을 알려주어서 인수하는 작업이 수월해집니다. 이제 은행융자가 필요한데 돈이 없으니 건물의 가치가 이렇게 높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랫동안 건물을 보면서 이렇게 하면 좋겠다 생각한 구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행 직원을 만나서 식사를 하는데 편안하게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이렇게 하면 건물이 가치가 높다 말하니까 이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말을 합니다, 사실은 자기 위의 상사가 이 건물에 입주해 있던 은행의 지점장 출신이라 이 건물을 잘 아는 분인데 한마디로 ‘들어볼 것도 없다’ 그래서 별생각을 안 하고 왔는데 이분의 이야기가 건물의 출입구를 다른 곳으로 내고 파티션으로 나누면 건물이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건물을 관리 하는데만 신경을 썼지만 이분은 건물을 사용해서 잘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행의 담보를 통해서 30억에 건물을 인수하고 형질 변경을 했는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것이 자산 가치가 엄청나게 뛰게 됩니다. 그 후에 자기의 고향선배의 교회 빛1억5천을 갚고 지금은 신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선교사역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님의 시험이 있는데 편한할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때 위기라고 말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종자돈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구약에도 엘리야 선지자가 가뭄의 때에 먹을 것이 없어서 먹고 죽으려고한 가난한 과부의 떡을 요구할 때 그 여인이 순종을 합니다. 떡을 만들어서 선지자를 대접하고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 시험을 통과한 사르밧 과부는 3년의 가뭄에도 기름병과 밀가루 통이 마르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들께도 하나님께서 어려운 순간에 믿음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7장 23절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내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어려운 순간에도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께서 우링에게 힘과 능력을 주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ex)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때 애정표현으로 남자다 여자의 손을 잡습니다. 그것은 내가 당신을 지켜주겠다는 의미입니다. 포옹을 합니다. 그것은 내 마음을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입을 맞춥니다. 그것은 내가 당신의 먹을 것을 책임져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요즘처럼 아무하고나 입을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남자가 결혼해서 남편이 된다는 것은 아내를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의 안전을 위해 아내에게 누이라고 하자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리따운 아내를 의지해 자기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졸장부가 되고 맙니다. 내려가는 신앙이 되어 사람을 의지하면 이와 같이 수치스러운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아내를 빼앗기는 큰 수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기근에 양식 좀 얻으려고 했다가 사랑하는 아내까지 빼앗기고 아브람은 큰 낭패를 보았습니다. 차라리 기근에 굶어 죽는 편이 낫지, 사랑하는 마누라를 빼앗겼으니 그 체면과 자존심이 얼마나 구겨졌겠습니까? 그는 여관방에서 배게를 집어 던지며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이 못난 자식아, 마누라 하나도 못 지키고 너도 남자냐” 이때 아브람이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브람은 그때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힘든 기근을 만났다 해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나게 되면 안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물가에 심긴 나무같이 복이 임하심을 빋으시길 바랍니다. 그의 가는 길이 형통하게 됩니다. 물가에 심긴 나무는 가뭄에도 걱정할 필요 없이 빛이 청정하고 열매를 탐스럽게 맺습니다.
ex) 미국의 허버트 목사님이라는 분이계십니다. 이분은 프린스톤 대학을 나와서 의기양양하게 12년간 목회를 하는데 목회가 죽을 맛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목회를 그만 두어야하겠다. 하루는 자기가 나온 프린스톤대학에서 목회계속과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목회 계속과정을 들어야 겠다 생각을 합니다. 그때에 강사로 오신 “로버트 윌리엄” 교수가 여러분들은 목회를 하면서 Small God 작은 하나님 을 믿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 보세요 하나님께 집중하세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하늘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 보시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 강연에 눈이 번쩍 뜨이고 그 이후에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목회를 합니다. 목회가 성공하고 교회가 평안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도와 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나의 길을 지켜 주시는 분입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기차를 타고 빗속을 이동할 때 입니다. 그런데 그 철길은 비가 많이 와서 철길이 끓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기관사가 운전을 하는데 커다란 그림자가 멈춰 세우라고 저 앞에서 손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관사가 철도를 세우고 밖으로 나와서 무슨 일인가 살펴봅니다. 그랬더니 철길이 끓어져있습니다. 만약기차가 서지 않았다면 그대로 전복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없는데 그 철차의 앞에 철길에서 나방으로 살아난 이야기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다. 작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잇습니다. ♫ 한걸음 한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성도가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고 생각을 할 때 우리에게는 아무런 드려움이 없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당장 감옥에서 죽게 될 순간에도 평안을 누리며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릴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직 믿음이 어린 아브람을 불쌍히 여기사 밤에 바로에게 나타나서 감히 사라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물질을 주어서 아브람과 사라를 돌려 보내도록 바로를 압박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로 아브람은 큰 위기로부터 탈출을 하고, 많은 소유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람은 또 느꼈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족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 보호하시는구나”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천하의 바로보다 더 높고 더 강하신 분이구나” 이것은 아브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실제적으로 깨닫게 해 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또 다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보호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큰 실수를 했던 것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또 앞으로는 절대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문제를 극복하고자 결단을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이 시대에 복의 근원으로 쓰시고자 하실 때에 반드시 훈련을 주시고, 연단을 하십니다. 이때 우리가 쉽게 고난을 피할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고난을 잘 감당하여서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흉년을 만난 아브라함
창 12장 10~20절 / 김영규목사
흉년을 만난 아브라함
제가 처음 교회에 나온 것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믿음생활의 진도가 빨랐습니다. 교회 생활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믿은 지 3개월이 지나서 주일학교 보조 교사로 교회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6개월쯤 지나서는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1년이 못 되어 저녁 예배, 새벽기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년이 지날 때는 교회와 집만 왔다 갔다 하면서 수도사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면 질문 하나 드릴까요? 제 병이 나았을까요? 악화되었을까요? 교과서대로 한다면 나아야 되는데 낫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악화됐어요. 신앙의 딜레마입니다. 이럴 때에 계속 그대로 믿어야 되는지, 아니면 내가 뭘 잘 못 믿은 것인지?
본문의 아브라함 스토리가 바로 그런 얘깁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에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창12:7) 그런데 그 땅에서 살려고 하니까 바로 흉년이 들었어요. 보통 흉년이 아닙니다. 거의 굶어죽을 지경의 흉년입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10) 아브라함이 뭘 잘 못 한 겁니까? 아니면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잘 한 일일까요? 아니면 잘못된 처신일까요?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가서 어떻게 됐나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접했나요? 하나님은 왜 이런 흉년을 주셨을까요?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서 받은 시험
흉년을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의도는 시험과 연단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감으로 큰 시험을 당합니다. 이 연단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행로에서 첫 번째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갑자기 믿음의 용사를 만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수많은 시험과 연단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으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본문의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첫 번째로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신앙을 떠나지 말라는 겁니다. 육신의 흉년을 잘못 풀면 더 큰 영적 흉년을 만납니다. 다 같이 한 번 따라 해 봅시다. “육신의 흉년을 잘 못 풀면 더 나쁜 영적 흉년을 만난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흉년을 잘 풀어야 됩니다. 육신의 흉년이 뭡니까? 배고픈 양식 문제입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돈 버는 문제입니다. 직업적인 일입니다. 직장과 사업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흉년을 어떻게 풀었습니까?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그런 길을 선택합니다. 가나안 땅에는 양식이 없고 애굽에는 양식이 많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흉년은 아브라함의 잘못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머무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당하는 천재지변입니다. 보편적인 불경기입니다. 그래서 해결책도 보편적입니다. 아브라함도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대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불신앙의 땅입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요, 믿음의 땅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약속의 땅에 머무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양식 문제 때문에 애굽에 갔더니 더 큰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아내를 빼앗길까 봐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잠깐이나마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그 결과로 아브라함은 재산을 얻었습니다. 거짓과 불륜, 그 대가로 얻는 재산! 누가 봐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어울리지 않는 상황입니다.
오늘 우리도 문제 만났다고 교회를 떠나면 안 됩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겁니다. 교회라는 소속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 안의 신앙을 말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떠날 때에 믿음도 잠시 떠났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생활은 세상으로!”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문제가 된 것은 육신적으로 가나안 땅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가나안 땅, 즉 믿음을 떠난 것이 문제입니다. 육신적인 애굽 땅은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잠깐 애굽에 내려가셨습니다. 야곱 집안은 단체로 애굽에 이민을 갔습니다. 무려 400년 동안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애굽 땅과 같은 불신앙의 땅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흉년 때문에 애굽에 내려간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진짜 더 큰 문제는 아브라함이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대신, 애굽의 거짓말과 불륜을 선택한 겁니다. 오늘날 육신적으로는 교회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양식과 의식주는 불신앙적 방법에 의존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몸은 교회에 있는데 마음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믿음의 시험 제1호는 양식의 시험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가장 많은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양식 문제를 너무 쉽게 불신앙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돈 버는 문제를 쉽게 다루지 마세요. 잘못하면 영적 흉년을 만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성경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돈벌이가 있습니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18) 요즘 신문에 보면 자식 공부시키려고 몸을 파는 여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노래방 도우미를 하는 가정 주부들, 부도덕한 방법으로 자식 잘 되기를 바랍니까? 어떻게 돈을 벌든지 돈만 벌면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바르고 정직한 방법으로 돈 버는 것을 원하십니다.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장구하리라”(신25:15)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1:1)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20:10)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 돈을 벌지 마세요. 그렇게 하면 더 악한 영적 흉년을 맞게 됩니다. 가정이 깨집니다. 자녀들이 빗나갑니다. 부부관계가 깨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집니다. 육신의 풍요로움이 오히려 불행이 됩니다. 지금 그런 단계를 거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잘 이기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부족함을 드러내심
흉년을 주신 하나님의 두 번째 의도는 인간의 연약성을 깨우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흉년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인물인가를 철저하게 보여주십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의 아브라함은 꽤 괜찮은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대단한 결심을 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위대한 인물은 아닙니다. 흉년을 만나니까 온갖 추잡한 모습이 다 드러납니다. 이런 사람이 믿음의 조상인가? 선민의 조상이 될 수 있는가? 오늘 아브라함을 보면서 자신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대단한 믿음의 사람 같지만 곤경에 처하면 흉악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보통 때는 잘 몰라요. 돈 떨어지고, 생활이 곤란해질 때 본색이 드러납니다. 건강할 때는 잘 모릅니다. 병들고 쇠약해지면 본색이 드러납니다. 과연 나의 본색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아브라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그의 허약한 마음입니다. 그는 애굽에 내려가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만일 누가 내 아내를 가로채려고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하나?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착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 구절에 보면 정말 애굽 사람들이 사라를 보고 아리땁다고 했습니다. 바로 왕이 후궁으로 들일만큼 예뻤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자기 아내를 예쁘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다 그렇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예쁜 아내 때문에 내 목숨이 위태하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입니다. 실제로 누가 아브라함을 죽이겠다고 위협한 적은 없습니다. 아내를 내놓으라고 협박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위험하다고 느낀 것뿐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잠28:1) 솔로몬이 말한 악인은 불신자입니다. 불신앙은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반면에 믿음은 사람을 담대케 만듭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6,7,9) 누가 아내를 달라고 했습니까? 너를 죽이겠다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미리 얼어서 설설 기고 있습니다. 허약한 마음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인간의 마음은 허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비겁함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아내를 지켜줘야 될 남편이 오히려 아내를 이용해먹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 사람들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했습니다. 실제 상황은 이복누이 겸 아내입니다. 아내라고 대답해도 되고 누이라고 대답해도 됩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실을 다 말하지도 않았다!” 누가 물어볼 때에 아내라고 해야 됩니까? 누이라고 해야 됩니까? 당연히 결혼을 했으니 아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물어보는 자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결혼한 여자냐, 아니냐? 그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아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편리한 대로 어떤 때는 아내이고, 어떤 때는 누이라고 합니다. 이런 약삭빠른 처신이 어디 있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대단한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 이런 비겁한 처신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없어서 비겁한 처신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사람의 뒷전에 숨어서 다른 사람의 덕을 보려고 하지 않나요? 내 목숨 살리려고 남의 삶을 망치지는 않습니까?
셋째로, 불륜과 부도덕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복 누이와 결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라가 하란의 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카딸과 결혼을 한 겁니다. 근친혼은 당시 중동지방의 관습이요, 우리나라 역사에도 종종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아내를 아무 거리낌 없이 남에게 내어준 일입니다. 그것도 자기 목숨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아내를 내 준 덕분에 많은 재산을 얻었습니다. 아마 사라의 오라비 자격으로 지참금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부도덕한 사람입니다.
흉년을 주신 목적이 뭘까요? 아브라함의 허약한 모습을 철저히 보여주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초기에 결코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자기를 죽일까봐 겁먹고 설설 기는 사람, 자기 목숨 때문에 아내를 남에게 내주는 비겁한 사람, 불륜과 부도덕의 대가로 재산을 얻은 파렴치한 사람! 그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희망이 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셨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현재의 형편에 낙심 마세요. 내 자신이 비겁한 사람으로 느껴집니까? 내가 남 모르는 부도덕과 불륜의 사람으로 깨달아지십니까? 주님께 기대를 걸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는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부족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여인, 부모 없는 문둥병자, 귀신들린 막달라 마리아,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들, 뇌물로 욕먹는 세관 직원... 예수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면면입니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부르셔서 믿음의 가문을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개입
흉년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개입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철저히 개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간섭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으로 아브라함이 얻은 축복이 뭡니까?
첫째로, 아브라함의 가정이 지켜졌습니다. 여러분은 본문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제가 가장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부부관계입니다. 우선 사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자기 아내를 비겁하게 남에게 내준 남편을 어떻게 다시 믿고 의지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살다가 힘들어지면 또 언제 남에게 내어줄지 모르는 남편 아닙니까? 사라는 잠시나마 바로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기왕에 왕의 여자가 되었으면 차라리 호의호식 하면서 그냥 사는 게 백 번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신기하게 사라는 다시 아브라함의 아내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가정이 깨지지 않고 지켜졌을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서 사라를 찾아 아브라함에게 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몸만 돌려주신 게 아니고 마음도 돌려주셨습니다. 사라의 마음이 바로 왕에게 가지 않고 아브라함을 향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큰 일 날 뻔했습니다. 사라의 마음이 토라져서 “아브라함 당신같은 남편 하고는 더 이상 못 살겠소!” 하고 떠나면 어쩔 뻔 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라의 마음을 찾아주신 것이 사라의 몸을 찾아 주신 것보다 더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고, 우리 부부를 지켜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즘 은퇴 증후군을 앓고 있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일본에도 그렇다고 합니다. 은퇴한 가장들이 집에 있으면서 부부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황혼 이혼이 늘어납니다. 여러분 가정이 지켜지는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환경이 달라졌다고 문제가 되면 제대로 된 부부관계가 아닙니다. 환경이 달라져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제대로 된 관계입니다. 바로 그런 힘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남편이 허물이 있다고 다 이혼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부족하다고 다 이혼하지는 않아요. 허물이 있어도 아브라함처럼, 사라처럼 사랑하는 부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오늘 그런 선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이 지켜졌습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소행대로 한다면 믿음을 벌써 날아갔습니다. 마음 약해서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입니다. 육신의 목숨이 아까워서 아내를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불륜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사울이,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현재는 부족합니다. 믿음이 없어요. 남부끄럽습니다. 소행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내 믿음을 지켜갈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낙심치 마세요. 믿음은 내 힘으로 지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으로 지켜집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내 모습으로도 충분히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빌빌하는 신자를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조상을 만들어주시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비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커졌습니까?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 외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정도로 믿음이 커졌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자마자 흉년을 만났습니다. 흉년을 주신 것은 시험과 연단을 위함입니다. 특히 양식의 흉년이 그렇습니다. 돈 떨어졌다고 믿음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흉년 중에 자신의 부족함을 보세요.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허물 많은 사람인지? 하나님은 흉년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가정을 지켜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한 단계 높아졌습니다. 흉년 중에 성장하여 필경 믿음의 조상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편법을 조심하세요
창 12: 10-20; 16: 1-16 / 김흥규목사
본문은 두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아브람 부부가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갔다가 낭패를 당한 이야기입니다. 혹시라도 바로가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인 것을 알아차릴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에 누이 동생이라고 속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만이 탄로가 나서 아브람과 사래가 이집트에서 쫓겨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여종 하갈을 아브람과 동침시켜 일어난 갈등입니다. 몸종 신분에 아브람의 아이를 잉태하자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멸시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거꾸로 사래가 하갈을 핍박해서 쫓아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몇 가지 비슷한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두 이야기 모두 불신앙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이집트 이야기는 아브람이 불신앙의 주인공으로, 하갈 이야기는 사래가 불신앙의 주인공으로 부각됩니다. 이 두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아브람과 사래는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을 바라보고 과감히 떠나가는 결단의 사람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바라는 소망이나 인내심이 전혀 엿보이지 않습니다.
둘째로, 아브람과 사래는 두려움 때문에 편법을 씁니다. 하나님이 땅을 주시고 자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이집트 이야기에서는 기근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네겝 땅에 기근이 들자 양식이 풍족한 이집트로 갔는데 아브람은 사래 때문에 자신의 안위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순간적인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하갈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신 아들이 더디 나오자 조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종을 아브람에게 주어서 후사를 이으려고 했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 저지른 편법이었습니다.
셋째로, 두 이야기 모두 삼각구도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입니다. 이집트 이야기는 사래를 사이에 두고 아브람과 바로가 대결합니다. 하갈 이야기는 아브람을 사이에 두고 사래와 하갈이 경쟁합니다. 그런데 이 삼각관계는 한 쪽의 물러섬으로 끝납니다. 이집트 이야기는 사래를 자신의 궁전으로 불러들인 바로가 재앙을 당하자 사래를 포기하고 물러섭니다. 하갈 이야기는 사래의 학대를 받은 하갈이 아브람 집에서 도망쳐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불신앙적인 태도를 취했더니 엉뚱한 사람들이 재앙을 입습니다. 창 12: 3에서 본 것처럼 아브람은 다른 사람에게 복을 베풀 권세뿐만 아니라 저주를 내릴 권세까지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1. 자신의 목숨이 두려워 거짓말을 한 아브람(12: 10-20)
본문에 나타난 아브람의 모습은 바로 앞에 나오는 신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대단히 불신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75세에 본토 친척 아비집을 두 눈 딱 감고 떠나는 아브람은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에 보여준 아브람의 모습은 자신의 안전이나 챙기기에 급급한 소인배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안전만 보장될 수 있다면 자기의 아내까지도 팔아넘길 수 있는 비루한 모습을 보입니다. 신앙의 길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연단과 시련을 통과하면서 조금씩 다듬어져갈 뿐입니다.
네겝 땅에 기근이 왔습니다. 위기가 닥친 것이지요. 그래서 양식을 찾아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이집트는 불신앙의 세상이지만 모든 것이 풍요한 제국입니다. 비록 인본주의적이기는 하지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양식을 비롯한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 땅 '이집트',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다 떨어져 빈털터리가 된 '아브람.' 이 둘을 비교해보십시오! 적수공권(赤手空拳), 맨주먹으로 풍요의 땅 이집트에 들어간 아브람은 그러나, 이집트 제국도 그 앞에 맥을 못 추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땅과 자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 그 약속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빈손 들고 일시적으로 이집트에 내려간다고 할지라도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까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약속 하나만 믿음으로 붙들면 풍요의 제국 이집트 그 이상의 축복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지요.
우리 역시 위기가 닥칠 때 이집트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였던 아브람이 그만 휘청거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안위 문제에 걱정을 합니다.
11-13절을 보세요.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는 아내 사래에게 말하였다.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
아마 사래는 미모가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사래의 나이 65세 정도 되었을 텐데 사래 때문에 아브람이 자신의 안전을 염려할 정도가 되었다면 사래가 어느 정도 용모를 자랑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래를 아브람의 누이로 속이기로 했는데 단지 목숨만 보전하려한 것이 아니고 이득까지 계산했습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람이 자기 아내를 팔아서라도 자기 한 목숨 건지고 대접까지 받겠다는 발상이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4절을 보면 과연 이집트 사람들이 사래의 미모에 반했습니다. 바로의 대신들이 아리따운 사래를 자기 앞에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니 바로의 마음이 동했습니다. 사래를 자기 궁전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아브람의 아내인 사래가 바로의 첩으로 전락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브람의 기대대로 사래를 바로의 궁전에 들여보낸 대신에 두 가지 이득을 다 얻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안위가 보장되었습니다. 16절에 보면 그 대가로 아브람은 양 떼와 소 떼와 암나귀와 수나귀와 남녀종과 낙타까지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거양득은 자기가 살기 위해 아내까지 포기한 파렴치한 방법으로 주어진, 부끄러운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신앙의 사람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한 끝에 순전히 인간적인 두려움 하나 때문에 주어진, 순간적인 이득이기에 위태하기 짝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찰나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본문의 구조를 잘 보세요. 문제, 즉 기근 발생→아브람 편법 사용→하나님의 개입→아브람의 추방.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브람이 잘못했는데 엉뚱하게도 바로와 그 집안이 화를 입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사람이 세상과 야합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릴 경우 세상이 재앙을 입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거꾸로 신앙의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바로 처신할 경우 세상이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불신앙의 문제가 신자 개인에게만 축복/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꾸짖습니다. 왜 진작 사래를 자기 아내라고 당당히 밝히지 않았느냐고 힐문합니다. 결국 바로는 사래를 아브람에게 인계합니다. 20절을 보면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얻은 재산을 모두 거두어서 사래와 함께 이집트에서 추방당합니다. 먹을 것 때문에 이집트로 들어갔다가 까딱했으면 아내를 잃을 뻔 했는데 아내도 도로 찾고 재산까지 얻어서 이집트를 나오게 됩니다. 아브람은 불신앙 속에서 편법을 썼지만 잃은 것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불신앙'과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날카롭게 대조됩니다. 아브람은 비겁하고 졸렬했으나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2. 약속의 아들을 믿지 못해 하갈을 아브람에 준 사래(16: 1-16)
이집트 이야기가 주변 세계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의 안위를 염려한 것이라면, 하갈 이야기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을 보여줍니다. 본문 바로 앞 15장에서도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람에게 자손의 축복을 주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브람의 신임받는 종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이 아니라 아브람의 몸에서 직접 태어날 아들이 아브람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지요(15: 4). 그래도 아브람이 못 미더워 할까봐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 하늘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별들과 같이 무수한 자손의 축복을 주신다고 재차 약속하셨습니다.
사래가 이 언약을 믿지 못했습니다. 주신다는 아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초조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2절을 보세요.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것은 사래만이 아니었습니다. '묵시적 동조'라는 말도 있듯이 아브람 역시 사래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하갈 사건은 사래가 계획을 세워서 아브람이 가담한 부부 공모 사건이었습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했더니 덜컥 아이가 들어섰습니다. 그 때부터 하갈이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주인 사래를 깔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일을 저질러 놓고서는 그 책임을 아브람에게 떠맡기는 사래의 모습입니다. 5절을 보세요.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받는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나의 종을 당신 품에 안겨 주었더니, 그 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래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아브람 역시 대단히 무책임하고 모호한 태도를 보입니다. 6절에 보면 하갈이 사래의 종이니 사래 맘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확실히 하갈 사건은 사래가 적극적으로 주모하고 아브람이 묵시적으로 동조한 불신앙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인간적인 조급함 때문에 편법을 썼더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집트 사건과 마찬가지로 가정에 풍파가 찾아왔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의 씨를 잉태한 하갈을 내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약속의 아들이 아닙니다. 약속의 아들은 장차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 태어날 이삭입니다. 이스마엘이야말로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보다 인간적인 성급함 때문에 얻은 시험이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이스마엘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이 중요합니다. 12절을 보세요.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족과 대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스마엘은 창 21장을 보면 나중에 이삭이 태어나자 어머니 하갈과 함께 아브람의 집에서 추방당했습니다. 흔히 이삭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고 이스마엘은 아랍인들, 즉 무슬림들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 사람들이 철천지원수가 되어 전쟁이 그치지 않는 것도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갈 사건에서 찾게 됩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조금만 더 진득하게 참고 기다렸더라면 가문의 비극은 물론이고 장차 일어날 민족간의 분쟁까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약속의 아들을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한 결과가 오늘날 엄청난 민족간의 비극을 초래한 뿌리가 된 것이지요.
3. 두려움과 편법을 넘어서
본문 말씀에서 아브람과 사래가 보여준 모습은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 순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인 우리를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하더라도 눈동자처럼 지켜주신다고 믿으면서도 여러 가지 두려움과 걱정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예전에는 아들이 군에 갈 때 할 수 있으면 고생 안 시키려고 온갖 편법과 빽을 쓰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혹시라도 군에 가서 고생할까봐 여기저기 줄을 대서 좀 좋은 곳으로 빼볼려고 편법을 쓸 때가 있습니다. 입시 부정과 같은 편법도 마찬가지이지요. 좀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정도가 아닌 편법을 동원할 때가 있습니다. 모두 두려움 때문입니다. 위험에 대한 두려움, 가문의 명예에 대한 두려움, 계획했던 일들이 좌절될까 하는 두려움,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수단을 부립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과 사래가 그랬으니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편법이라도 좋으니 먼저 나부터 살고보자 하는 이중의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아브람이 비록 이집트에 들어가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아브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약속의 하나님을 믿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더 염려했던 것입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을 믿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금방 아들을 얻지 못하자 나이는 먹어 점점 늙어지지 상속자의 문제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편법을 쓴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좋으신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면 여러분은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하든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근을 만나 이집트로 가더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기다렸던 이삭이 더디 나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실수
창 12장 10~20절 / 지용수목사
오래 전에 화면을 통해 악어가 멧돼지를 잡아먹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악어가 물속에 숨어 있다가 물을 마시러 온 멧돼지를 탁 쳐서 물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멧돼지가 빠져 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니 악어가 멧돼지를 이리 메어치고 저리 메어쳐서 결국 잡아먹었습니다. 멧돼지가 헤엄도 잘 치고 길이도 1.5m나 될 정도로 컸지만 악어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물 밖에서라면 악어가 멧돼지에게 잡아먹혔을 것입니다. 악어는 물을 떠나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힘이 납니다. 주님의 은혜 밖으로 나오면 초라하게 됩니다. 삼손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는 혼자서 천 명을 이겼지만 은혜 밖으로 나오니 눈이 뽑혔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듯이 우리는 은혜 안에서 살아야 됩니다.
지난번에 뉴 키즈 온 더 블록이라는 미국 가수 그룹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오빠부대가 김포공항에 몰려와 큰 혼잡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경찰들이 오빠부대의 접근을 아무리 막아도 오빠부대가 막무가내로 밀려와 법석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 가수가 모자를 떨어뜨리자 두 여학생이 목숨을 걸다시피 달려가 그것을 동시에 꽉 붙잡고는 절대로 놓지 않았습니다. 경찰들이 달래도 두 여학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모자를 꽉 붙잡고 있어서 할 수 없이 그 모자를 둘로 잘라 두 여학생에게 한쪽씩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쓸데없는 것에 그렇게 매달리는 여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웃지만, 사실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돈돈돈” 하며 돈에 매달리지만 돈도 딱지에 불과합니다. 어릴 때는 딱지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딱지치기를 해서 많이 따면 부자가 된 기분으로 기뻐하고 딱지를 잃으면 울면서 돌아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우리 교회를 딱지로 가득 채운들 그것 가지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 세상을 떠날 때 돈은 딱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헛된 것을 붙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재산보다 아버지의 축복을 붙잡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의 복을 붙잡아서 영원히 빛나는, 위대한 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일 예배 시간에 한 주간의 삶이 결정 나는 것입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에 아무리 열심히 산다 해도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일에 예배를 잘 드리고 주일에 복을 받으면 월, 화, 수, 목, 금, 토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예배에 승리하면 인생에 승리하고,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한다.”
예배를 잘 드리면 가정생활도, 직장생활도 성공합니다. 그러니 예배 시간에 우리의 한 주간이 달렸다 생각하고 마음 써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땅을 잡거나 자기 아버지의 회사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복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 좇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어려움이 거듭거듭 밀려왔습니다. 인생은 강 건너 강이고 산 넘어 산이라고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생활은 굉장히 험악했습니다. 가나안에 가도, 세겜에 가도, 벧엘에 가도 냉대만 당했습니다. 그래서 벧엘의 산에서도 오래 살지 못하고 남방으로, 남방으로 내려가다 넓은 초원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자리를 잡으려고 텐트를 쳤는데 이번에는 무서운 기근이 닥쳐왔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은 목축업자입니다. 그런데 가뭄으로 풀이 비틀어질 지경이 되었으니 어떻게 살겠습니까? 우물에 물이 가득 있다한들 그 넓은 초장에 어떻게 물을 퍼다 나르겠습니까? 말씀을 좇아 왔는데 기근을 만났습니다. 복을 받으려고 왔는데 저주 같은 현실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실수를 합니다.
말씀을 따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으니 말씀을 제쳐놓고 형편과 상황에 따라 사는 길을 찾습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나일강 물이 있어 흉년이 없는, 기근을 모르는 애굽 땅에 가서 우거해야겠다.’
우거한다는 말은 몇 십 년 동안 산다는 것이 아니라 기근이 해소될 때까지 살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 국경에 이르렀을 때 덜컥 겁이 났습니다. 애굽의 귀족들은 미인을 보면 그 남편을 죽이고 빼앗아 취한다는 정보를, 아주 뛰어난 절세미인은 왕이 취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내가 얼마나 예뻤는지 본문 14절에 보면 심히 아리따운 여자(she was a very beautiful woman. 뛰어난 미인, 탁월한 미인)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아내가 빼어난 미인이면 걱정이 많은 것입니다. 아내를 친정에 보내도 불안하고, 출장을 가 있어도 불안합니다.
‘내 아내 때문에 내가 죽겠구나.’라고 고민하던 아브라함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 때문에 내가 죽을 수 있으니 애굽 사람들에게 나를 당신의 남편이라 하지 말고 오라비라 하시오. 애굽에 가서는 나를 부를 때 ‘오라버니’라고 하시오. 그게 당신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는 길이오.”
그들이 애굽 국경선을 넘자마자 남자들이 사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사라를 취하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보기에도 왕이나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심히 아름다운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왕궁에 보고되었습니다. 신하들이 직접 와서 사라를 보니 자기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얼굴이 검은데 사라의 얼굴은 희면서도 붉었으니 빼어나게 아름답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사라를 취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왕의 아내가 되는 것은 하루 저녁에 그냥 왕에게 가면 되는 것이 아니고 며칠간 몸을 정결하게 한 후 향품을 바르고 왕의 아내로서의 교양도 갖추어야 하니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날을 잡아 엄숙한 의식을 행해야 합니다. 사라를 보자마자 반한 왕이 그를 품을 날만 기다리면서 기분이 너무 좋아 처남이 될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아내를 빼앗겼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다가 받는 충격 중에서 가장 큰 충격은 배우자를 잃는 것입니다.
제가 스위스에 잠시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두 주간은 대학들과 교회들을 돌아보고, 두 주간은 그 지역의 목사님과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그때 학교에 가서 강의도 하고 주일에는 설교도 했는데 그 기간 중에 한 중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를 떠났는데도 땅에 묻힌 그 부인 곁을 떠나지 못하고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를 맞으며 끝까지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그 부인의 남편이었습니다. 제가 묵었던 곳에서 창을 열면 그 묘지가 보였는데 세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남편이 거기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꿩병아리처럼 붙어살던 아내가 떠나가니 막막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열 효자보다 한 악처가 낫습니다.
따라 합시다.
“열 효자보다 한 악처가 더 낫다.”
한 악처가 열 효자보다 낫다면 좋은 아내는 효자 스물보다, 서른보다 더 낫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부부간에 함께 길이길이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장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번 부흥회를 인도하신 강사 목사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9988234’하시기를 축원합니다. ‘9988234‘는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이틀 동안 누워 있다 삼일 째에 죽는다는 말이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부가 함께 건강하게 길이길이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죽어서 헤어져도 마음이 아픈데 살아 있는 아내를 뺏겼으니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다시 아내를 빼앗아 올 힘도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거짓말하다가 이렇게 되었구나.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상황 따라 살다가 이렇게 되었구나.’하며 후회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궁궐에서 왕이 새 아내를 맞이하는 의식을 마친 후 큰 잔치를 베풀고 왕과 사라가 함께 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왕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재앙은 여러 주석을 종합해 보면 왕과 왕의 가족과 왕의 신하들에게 무서운 병이 임한 것으로 의견이 모아집니다. 왕을 비롯해서 왕의 가족과 신하들까지 갑자기 열이 나고 병이 생기니 잔치가 무슨 소용이고 예쁜 여자가 무슨 소용입니까?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왕에게 깨달음을 주신 것입니다.
‘네가 취한 여자는 아브라함의 누이가 아니라 그의 아내다. 네가 그 여자 때문에 죽게 되었으니 어서 그 여자를 돌려보내라.’
잠언 21장 1절에 말씀하십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할렐루야!
김정일 씨 마음도, 우리나라 대통령의 마음도, 미국 부시 대통령의 마음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바꾸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과 사람들만 보면 불안합니다. 그래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 주실 줄 믿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런데 지금 백두산이 중국의 산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사라가 바로의 씨를 받게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애굽(이집트) 왕의 공칭입니다. 러시아 황제를 ‘짜르’라 하고, 로마 황제를 ‘가이사’라 하고 블레셋 왕을 ‘아비멜렉’이라 하듯이 이집트 왕을 ‘바로’라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런 바로의 씨를 받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막으신 줄 믿습니다.
바로가 급히 아브라함을 불러 호되고 날카롭게 꾸중합니다.
“네가 어찌 나를 이렇게 대우했느냐? 어찌 그 여자를 네 아내라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네 아내를 취하고 재앙을 받았느니라.”
그리고는 어서 사라를 데려 가라 합니다. 바로가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천하의 절세미인을 아내로 얻은 것이 너무 좋아서 처남인 줄 알고 아브라함에게 양떼와 소떼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까지 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내를 찾았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씨구 좋구나! 얼싸 좋구나!” 하면서 사라를 데리고 쏜살같이 그 자리를 떠나 애굽 국경을 넘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만일 왕의 병이 진정되면 다시 사라를 부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하나님의 간섭이 없었으면 아브라함이 사라를 찾아올 길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셨기 때문에 사라를 찾을 수 있었고 애굽에서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으셨으면 자유가 없는 애굽의 노예로 그곳에서 그냥 살았을 텐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모세를 보내심으로 그들이 출애굽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 출애굽이 됩니다. 오늘 여러분을 얽어맨 것이 많아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도 여러분에게 무거운 짐이나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 여러분을 얽어매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풀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 가도 세겜에서, 가나안에서, 벧엘에서, 남방에서 기근을 만난 것처럼,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고 기도해도 거듭거듭 안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면 잘 되고 형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아무리 순종해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나아가도 삼일간 물이 없고 비록 물을 만나도 쓴 물이라 마시지 못하여 고통을 당한 것처럼(나중에 하나님께서 그 쓴 물을 치료하셔서 마시게 하셨지만),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가도 고통을 당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매우 조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저는 목회하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하나님께서 시간을 주신다면 ‘행복에 겨운 목회의 길’이라는 책을 펴내어 세상의 모든 목회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프게 짓누르는 짐을 지고 고통스럽게 목회하는 목사님들이 많이 계시는데 저는 이렇게 행복하고 기쁘게 목회를 합니다. 그러나 저도 전체를 보니 이렇게 행복하지, 때로는 이해하지 못할 상황 앞에서 아기처럼 운 때도 있었고, 아무리 기도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 몸부림친 때도 있었고, 믿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휘청거린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체를 보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따라 합시다.
“신앙생활은 전체를 보자. 크게 보자.”
신앙생활은 천국까지 포함해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잣집 앞에 있던 나사로를 생각해 봅시다. 그의 삶을 이 땅에서의 일생으로만 보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나 천국까지 보면 부잣집 주인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나사로입니다. 할렐루야! 전체로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을 전체로 보면 복이 넘치는 사람, 영광스러운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출발한 후 기근과 고난과 냉대를 당하며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을 받을 때 그 고난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믿고 그 고난의 터널을 잘 지나가야 합니다.
전도서 7장 14절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When times are good, be happy; but when times are bad, consider;)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잘 되는 사람이라고 계속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잘못될지 모릅니다. 안 되는 사람이 언제 잘 될지 모릅니다. 우리의 앞날을 우리는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래서 잘 되는 사람도 겸손해야 되고 안 되는 사람도 희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후”하고 부시면 그날로 망하고, 아무리 안 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면 그날로 됩니다. 그래서 잘 될 때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내가 죄 지은 것이 없는지.’ 사업이 풀리지 않으면 ‘내가 까불지 않았는지, 난 체하지 않았는지.’ 내 몸에 병이 왔으면 ‘부모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마음으로 시어머님을 미워하지는 않았는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생각나면 고치라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편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할렐루야!
고난 당하기 전에는 성경에 관심 없이 살았어도 감옥에 들어가면 성경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 군 장성이 교회 집사님이었지만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오해를 받아 감옥에 들어가 4개월간 있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성경을 읽기 시작해서 몇 십 번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사람, 성령 충만한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집사님이 “내가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망했을 텐데, 감옥에 들어가서 내가 새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감옥에서 나를 살려 주셨다.”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고칠 것이 없는데 고난이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의 훈련을 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따라 합시다.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라.”
제 친척 중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개인병원을 개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병원을 개업한 지 3년쯤 되었을 때 의료사고가 났습니다. 한 부인이 수술을 받았는데 사망을 한 것입니다. 그 부인의 집안에는 검사를 비롯해 법조인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 보상금으로 20억인가 30억을 요구했습니다. 병원을 개업한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의사가 어디에서 그 많은 돈을 구하겠습니까? 그러니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 도와 주세요. 하나님, 도와 주세요.”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때까지는 건성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새벽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일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3년이 지나서야 그 일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그 의사가 새벽기도의 사람이 되고 그 교회의 일등 일꾼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새벽기도를 하고 중등부 교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 의료 사고가 없었다면 새벽기도 할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고가 나니 살려 달라고 기도하다 기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병원도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사람을 아름답게 빚어 나가십니다. 고난을 통해 기도하게 하시고 더 아름답게 다듬어 주시는 것입니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를 불렀던 이종용 목사님의 코너스톤 교회에서 제가 집회로 섬길 때 한 사업가 집사님께서 제게 식사 대접을 하셨습니다. 그때 그 집사님께서 “목사님, 저는 골프광입니다. 그러나 주일에는 절대로 골프를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분이 한국에 나오셨을 때 친구들이 모였는데 주일에 골프를 하자고 했습니다.
“안 돼. 나는 집사야. 주일에는 할 수 없어.”
“교회는 미국에서나 가. 우리가 이렇게 모처럼 만났으니 골프나 치자. 교회에 한 번 안 가면 어떠냐?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냐? 하나님께서도 이번에는 교회에 안 가도 봐 주실 거다. 선하신 하나님 아니냐? 한 번만 교회에 빠져라.”
친구들이 자꾸 조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주일 예배를 빼먹고 아침부터 골프장에 가서 골프를 했습니다. 조금 흐린 날씨를 보며 처음에는 ‘주일에 골프 치다 벼락을 맞으며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이 되었는데 그날 따라 공이 더 잘 맞았습니다. 그런데 넷째 홀인가 다섯 째 홀에 갔을 때 공을 치니 공이 바로 가지 않고 확 휘어 연못에 떨어졌습니다. 마침 연못이 얼어붙어 있었고, 연못 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골프채로 꺼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골프채로 꽁꽁 쳐보아도 얼음이 깨지지 않았습니다. 새 공이라 아까운 마음에 살금살금 연못으로 들어갔는데 얼음이 우지직하고 깨지는 바람에 집사님이 연못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깊은 바다에 빠지면 수영을 해서 나올 수도 있지만 얼음 구멍에 빠지면 나오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집사님이 물에서 나오려고 올라오니 얼음에 부딪치고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니 또 얼음에 부딪칩니다. 조금 지나니 숨쉬기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때는 1초가 몇 만 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을 범하다가 이렇게 죽는구나.’
그래도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올라와 보았더니 마침 얼음 구멍이 있는 자리여서 살았답니다. 그 후로는 집사님이 주일 성수의 챔피언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일에 골프 치러 갔다가 죽을 뻔했기 때문에 주일에는 골프 ‘골’자도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하나님께서 집사님을 사랑하신 증거인 줄로 믿습니다. 만일 그날 집사님이 골프를 칠 때 끝까지 형통했으면 ‘주일을 범해도 괜찮네.’ 하다가 교회를 떠나 골프만 치다 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집사님이 그 어려움을 통해 주일을 반듯하게 지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고 그 뜻을 잘 파악해서 기도해야 할 때는 기도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계획에 닿으면 그때부터 고난은 끝이 나고 밝은 빛이 비치고 밝은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되는 것입니다. 다.
그 다음에 주시는 교훈은 아무리 숨 막히는 어려운 때라도 형편에 따라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오직 주의 뜻을 따라, 말씀을 따라”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그러다 잘 안 되니 형편을 따라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이것은 그냥 실수(mistake)가 아니라 과오(fault)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잃어버릴 뻔도 하고, 이방인에게 책망을 받기도 하고……, 가슴 조이는 일이 많았습니다. 생에 오점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연필 끝에 지우개가 있는 것은 누구나 실수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해도 되는 실수가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실수가 있습니다. 해도 되는 실수는 오히려 웃음을 주기도 합니다.
한 번은 제가 찬송가 518장 「거룩하기 원합니다」라는 찬송을 부르고 싶어서 “518장을 부릅시다.”라고 했는데 반주하는 집사님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반주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집사님이 “목사님, 818장이 없는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모든 교인들이 웃었습니다. 저는 518장이라 말한 줄 알았는데 저도 모르게 818장이라고 했나 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삭개오에 대한 설교를 하시면서 실수를 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길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키가 작은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찾아오셨습니다.”
교인들이 킥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서야 목사님께서 삭개오를 니고데모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목사님께서는 당황하지 않고 설교를 계속하셨습니다.
“그때 삭개오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에게 ‘이 사람아, 내려와. 거기는 내 자리야.’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실수는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성탄절 발표회 때 아이들이 너무 잘 하면 오히려 재미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실수할 때 더 재미있고 즐겁지 않습니까?
LA의 한 장로님이 토요일에 밤새도록 조선 사극 비디오를 보고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주보를 보니 기도 순서에 자기 이름이 있습니다.
‘아이고, 어떻게 하나?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밤새도록 비디오를 보느라 잠도 자지 못한 장로님이 주보를 보고 깜짝 놀라 강단으로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횡설수설하다가 “오, 하나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온 교인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이것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이런 실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해서는 안 되는 실수가 있습니다. 이브가 따먹어서는 안 될 선악과를 따먹고 망했습니다. 삼손이 범해서는 안 될 여자를 범하고 눈이 뽑혔습니다. 아간이 취해서는 안 될 물질을 취하고 돌에 맞아죽었습니다.
전에, 차기 서울 시장으로 유력시 되던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반드시 서울 시장은 할 거다.’라는 여론이 팽배했습니다. 그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사람이 여자 관리를 잘 못하여 스캔들 때문에 미국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작은 실수는 해도 됩니다. 그러나 인생을 망치는 큰 실수는 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잃어버리고 한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갈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아내를 찾았지만 말입니다.
우리 앞에도 유혹은 항상 있습니다. 시험도 항상 있습니다. 그때마다 형편에 따라, 감정에 따라 결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두 남자 중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는 성경에 없습니다. 이 아파트를 살까, 저 아파트를 살까 하는 것도 성경에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주여, 어떻게 할까요?’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저희 집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오래 전, 제 아내가 작은 사업을 시작했는데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사업이 잘 안 되었습니다. 계속 적자였습니다. 할 수 없이 사업체를 정리하기로 했더니 다른 사업을 잘 하고 있는 오 사장이라는 분이 찾아와서 저희가 원하는 조건대로 사업체를 인수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사업체를 넘기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분이 가신 다음에 제가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2년간 고생했던 일을 이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얘야, 생각해 보아라. 그 사람은 사업에 베테랑이다. 경력도 많고 노하우도 많고 지금 하는 사업도 잘 되고 있다. 그런 사람이 왜 네 사업체를 맡으려 하겠니? 네 사업에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그렇게 했겠니? 생각을 좀 해 보아라.’
제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주님, 이미 약속했는데 어떻게 하지요?”
‘파기해라.’
제가 오 사장님을 찾아갔습니다.
“오 사장님, 죄송합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약속했잖아요.”
“죄송합니다. 약속했지만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계속했는데 그러고도 1년간 사업이 안 되었습니다. 그 후로 서서히 사업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얼마 있지 않아 그 지역에 소문날 정도로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힘으로 교회 하나를 지어드린 다음 저희 집도 짓고 집안을 살렸습니다. 제가 목사고시에 합격한 다음 그 잘 되는 사업을 접었습니다만, 그때 그 지역 세무서에 소득세를 두 번째로 많이 낼 정도로 사업에 성공했습니다. 지금까지 그 사업을 했으면 제가 지금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녔을지도 모릅니다.
말씀에 있는 것은 말씀대로, 말씀에 없는 것은 성령의 지도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습니다.
스티븐 지라드는 어느 회사의 사원이었습니다. 한 번은 토요일 퇴근 시간에 사장이 사원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내일은 배가 입항해서 우리 회사의 짐을 하역해야 하니 주일이지만 내일은 다 출근을 해야 합니다.”
모든 사원들이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스티븐은 “사장님, 저는 안 됩니다. 저는 내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팀워크가 깨지게 되니 사장이 그를 해고시켰습니다.
얼마 후 그 사장의 친구인 모 은행장이 사장을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내가 은행 지점 하나를 오픈했는데 그 지점을 맡길 사람이 필요해. 자네에게는 사람이 많잖아. 믿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내게 보내주게.”
“글쎄……. 아! 기억나는 사람이 있어. 믿을 만한 사람이 있어. 스티븐, 스티븐이면 돼.”
그래서 스티븐이 그 은행의 책임자가 되고, 마침내는 필라델피아의 최고 재벌이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복된 길, 생명의 길, 번영하는 길입니다. 또 하나는 초라하게 되는 길, 부끄럽게 되는 길, 망하는 길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 하나님”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실수하지 않고 영원히 복된 길로 달려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라
창 12장 10~20절 / 이상호목사
지난번 어느 영성훈련에 참가하여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국의 실존했던 켐브리지 대학출신 두 육상영웅 해롤드 에이브러햄과 에릭 리들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으로서 두 사람의 극적인 삶의 대비를 통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미인과 영국신사들이 나오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올림픽의 꽃'인 100m달리기 결승전 경기가 주일로 잡혔습니다. 강력한 우승후보인 영국의 에릭 리들 선수는 출전 포기를 선언했습니다. 이유는 "주일은 경기를 하지 않고 예배드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일 성수를 위한 에릭리의 결단에 온갖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영국인들은 '조국을 배반한 자' '옹졸한 신앙인'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며칠 후 에릭 리들은 중거리 400m달리기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중거리는 자신의 주종목이 아니었습니다. 에릭리는 처음부터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습니다. 관중들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렇게 달리다가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릭리는 예상을 뒤엎고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기자들이 우승 소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처음 200m는 내가 뛰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이 직접 달리셨습니다" 영국인들은 에릭리의 용기와 투철한 신앙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에릭리는 주일성수를 통해 '금메달'과 '영광'을 동시에 얻었습니다. (물론 100m에서는 동료 해롤드가 금메달을 따냄으로서 영국에 두 개의 금메달을 안겨주었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 부부가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갔다가 낭패를 당한 이야기입니다. 혹시라도 바로가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인 것을 알아차릴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에 누이 동생이라고 속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만이 탄로가 나서 아브람과 사래가 이집트에서 쫓겨납니다. 불신앙과 편법과 거짓말이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인간적인 방법이 나오려고 합니다. 주일날 달리기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될까? 하면서 세상과 타협을 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방법으로 할 것인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할 것인가 갈등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적인 방법은 결과가 비참하지만 믿음의 방법은 결과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믿음의 방법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적인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방법을 쓰느냐가 중요하며 그 결과가 큰 차이로 나타납니다. 즉 신앙생활의 목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의 방법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신앙생활 할 때 겪게 되는 비참함을 보면서 믿음의 방법으로 사는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인간적인 방법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지 않을 때 인간적인 방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 인간적인 방법이 발동합니다. 아브람의 인간적인 방법을 보십시오. 10절에 기근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아브람은 그렇게 잘 부르던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먼저 물어보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남방 기근이 없는 기름진 땅으로 옮깁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잘 부르고 의지했던 아브람이 오히려 큰 기근이 있을 때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자기 방법으로 이사를 합니다. 왜 믿음의 사람이 이렇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소홀히 하고 철저히 믿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원래 아브람은 움직일 때마다, 이사할 때마다, 어디를 갈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4절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그랬습니다. 7절에 가나안 세겜 땅에 정착해서도 하나님께 먼저 단을 쌓았습니다. 8절에 다시 벧엘에 옮겨 거할 때도 하나님께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10절에 기근이 있을 때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습니까? "하나님 왜 기근이 있나요? 나를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 난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왜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우리의 삶에 기근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쉽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우리는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해결 방법은 비극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의 방법으로 살 때 그것이 살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에게 한 교우가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나는 지금의 이 고통과 문제, 여러 가지 쌓여있는 걱정에서 어떻게 헤어나야 할 지 정말 앞이 캄캄할 뿐입니다" 그러자 웨슬레 목사는 창가에서 저 멀리 소 한 마리가 고개를 들고 돌담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가리키며 그 교우에게 물었습니다. "형제님, 저 소가 왜 저렇게 고개를 들고 돌담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는지 알겠습니까?" "글쎄요, 왜 그럴까요?" 그러자 웨슬레 목사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 소는 돌담을 뚫고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고개를 쳐들고 담 위로 보는 것입니다. 저 소처럼 형제님도 앞에 막힌 걱정과 문제의 담 그 너머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담의 앞뿐만이 아니라 너머, 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힘이 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방법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인간적인 방법을 찾는 데 쏟는 정렬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의 방법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문제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법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법은 고난의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힘든 여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삶에 고난과 역경과 문제가 있을 때 오직 믿음의 방법으로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 때 하나님의 사명을 잊어버립니다.
아브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7절을 보면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약속했습니다. 믿음이 식어지고 인간적인 방법이 나올 때 하나님이 주신 뜻과 사명을 잃어버립니다. 약속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믿음의 방법으로 살 때 하나님의 사명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푸로레스코 목사가 공산당에게 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자 공산당들은 목사를 회유시키기 위하여 비인도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그의 11살 짜리 아들을 그의 앞에서 발가벗기고 거꾸로 매달아 끓는 물을 코에 부어넣는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고문을 가하였습니다. 푸로레스코 목사는 자기가 고문을 당하는 것은 견딜 수 있는데 아들이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은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고문을 당하던 11살 짜리 아들이 외쳤습니다.
“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나는 배신자가 된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모시고 싶지 않아요.” 푸로레스코 목사는 아들의 이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힘을 내어 끝까지 공산당에게 항거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할 때 믿음의 방법으로 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믿음의 방법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방법은 편한 방법을 먼저 찾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사명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믿음의 방법은 눈물도 있습니다. 아픔도 있습니다. 기근을 이겨나가야 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져주심을 믿습니다.
셋째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 때 염려와 두려움이 생깁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기 시작할 대 나타나는 것이 염려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 때 축복도 염려거리가 됩니다. 아브람의 아내가 미인의 복을 받았습니다. 이 때가 65세인데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의 축복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다보니 염려로 변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염려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티코를 타고 다녀도 믿음으로 살면 감사입니다. 그러나 그랜저를 타고 다녀도 인간적으로 사고가 날 걱정만 하면 염려가 됩니다. 자식도 하나님이 책임진다는 믿음으로 키우면 감사지만 인간적인 방법으로 생각만 하고 걱정만 하면 자식도 염려거리입니다. 믿음의 방법으로 살면서 모든 상황을 감사의 조건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 때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져준다는 믿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생깁니다. 애굽에 내려갔는데 신변에 위협을 느낍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아브람은 인간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아내가 아름답기 때문에 애굽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취할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믿음의 방법으로 살 때 담대함입니다. 믿음의 방법으로 살 때 사명을 찾고, 염려가 변하여 감사의 조건이 되고 두려움이 변하여 담대한 인생이 됩니다.
찬송가 384장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사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어려운일 당할 때도 족한 은혜주시네" 이 노래는 화니 크로스비라는 맹인 여인이 쓴 노래입니다. 화니 크로스비는 6개월 때 가정부의 잘못으로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기도해주고 신앙으로 키웁니다. 크로스비는 성인이 되어서 자기의 눈을 멀게 한 가정부의 이야기를 듣고 항상 원망스러웠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생각하니 늘 가정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으며, 내가 볼 수 없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믿음의 방법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크로스비에게는 육의 눈은 볼 수 없지만 영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허락해 주신다고 해도 나는 안 받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터인데 세상에서 더렵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또 "나는 내 눈을 멀게 한 그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녀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가 쓴 시가 2000편이 넘습니다. 그중에 우리 찬송가에 12편이 있습니다. 288장을 보면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인간적인 방법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방법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면 모든 것이 염려와 불평꺼리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방법으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조건입니다.
믿음의 방법은 조금 진도가 늦을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고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선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은 순간적으로는 빠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입니다.
믿음의 방법은 우리에게 더욱 힘든 생활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감사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은 우리에게 평안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고통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철저히 믿는 방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법은 우리의 인생의 영원한 살 길임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아브라함의 실수
창 12장 10~20절 / 임덕순목사
아브람이 가나안땅에 와서 얼마를 살다가 흉년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땅에 가까스로 도착했는데, 가 보니 그곳은 비어있는 땅이 아니었으며 우상숭배로 어지럽혀진 땅이었고, 주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신 자식은 아직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땅에서 얼마간 참고 버텼습니다. / 그런데 이번에는 설상가상으로 그 가나안땅에 흉년이 들어서 양들을 먹일 풀을 찾기 힘들어졌고 자기들이 먹을 양식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고난을 피하기 위해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이라는 나라는 나일강물이 해마다 범람하여 농사가 잘 되었고 초장이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소유를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간 것 보다는 하란에서 모은 소유들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냥 가나안에서 남아 있으려면 많은 양 무리와 그 양을 치는 목동들은 포기해야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물질을 버릴 수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애굽으로 내려 갈 때, 그의 믿음은 밑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으며 그의 마음속에는 염려가 가득했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서는 믿음의 조상으로서는 저지를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 사래는 나이가 65세 넘었지만 여전히 미인인지라, 애굽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매지간이라 하자고 약속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꾀가 신앙을 덮어버린 경우인데,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믿음이 약해지면 자기 꾀와 정치적인 수단으로 살려고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조상인 아브람에게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내려갈 때 가장 염려했던 일은, 거기서 신앙에 손해를 볼까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아내가 너무 예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염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사라의 미모는 금새 애굽땅에 소문이 났고, 애굽의 왕은 사라를 아브람의 여동생인줄알고 후궁으로 데려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왕은 아브라함이 자기 처남인줄 알고 많은 선물들을 보냈고 신분 보장을 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얻고자 했던 것들을 다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애굽에 내려간 이유가 물질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인데 물질을 더 많이 얻었으니 그것도 괜찮고, 애굽에서 누가 해칠까 했는데 왕의 처남이 되었으니 누가 건드리겠습니까?
믿음 없이 인간적 수단으로 살아도 성공할 것 같아 보이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게 성공한 것입니까? 아브람의 마음에 진정한 평안과 안정이 있었을까요? 아마 그는 왕이 보낸 짐승들을 축구공 차듯이 발길로 차면서, 첫날밤부터 안절부절, 죽고 싶은 심정이고 후회막급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앞에서 살지 않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써서 얻는 유익들이 다 이와 같습니다. 얻은 것 같은데 빈손이요, 안전한 것 같지만 불안하고, 성취한 것 같으나 후회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무엇을 이룬 결과가 항상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찍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진작부터 가나안에서 살으라고 보내셨습니다.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그 땅에 흉년을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애굽으로 내려가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안 하시면 하나님께 무슨 대책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는 애굽에 내려가서 그렇게 모욕을 당하고 괴롭게 살면서 물질을 보존하느니, 차라리 재산을 포기하고 가나안에 머물며 믿음과 명예를 보존했어야 옳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마, 그가 물질을 잃게 되는 환경을 만나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보려고 가나안에 흉년이 들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흉년에도 물질을 포기하고 믿음과 명예를 택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가나안땅에 흉년을 보내신 것은, 아브람을 가난케 하고 굶겨 죽이려는 뜻이 아니라 연단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요,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보기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아브람의 후손이요, 믿는 사람을 아브람에게 하셨던 것과 동일하게 취급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동일한 축복을 약속하셨고, 동일한 보호와 연단을 실시하시며, 동일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어려움 당할 때에, 두려워하며 물질 지키려 하지 말고 명예와 신앙을 지키려고 해야 옳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난 시련중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원하시며 하나님께 다가와서 품에 안기는 것을 원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제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인간적인 수단을 쓰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하나님앞에 다가와서 그 품에 안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는 그런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마음은 그때나 똑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습니까? 그 힘든 일이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두렵습니까? 그럴지라도 주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아니 그럴수록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분 외에는 우리들의 죄를 사하고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닥쳐올 형벌과 고난을 제거해 해 주실 이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잘못하면 부모에게 매를 맞습니다. 그런데 그때, 도망가면 문제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 앞에 다가가서 울며불며 용서를 비는 것만이 문제를 푸는 길입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작정하고 돌아서면 부모는 더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핑계를 대거나 도망을 치면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시간만 연장되며 형벌이 더 커질 뿐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잘못해서 자초한 고난도 있고, 우리에게 잘못이 없고 말씀을 잘 순종했음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때문에 닥치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의 고난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꾀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고는 찾아갈 곳이 없고 해결할 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어려운 문제의 갈림길에 설 때 마다, 믿음의 원칙을 붙잡고 하나님 품으로 갑시다. 그것이 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련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만 있고 해결책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완벽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가지고 갈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애굽이 아니라 하나님 품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곁으로 갑시다. 그것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그것이 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에서 흉년을 만났을 때, 그런 환경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나안의 억센 원주민, 불신사회, 흉년, 이런 것들이 그의 마음속에 잠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 땅이 과연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맞을까? 내가 과연 이 땅에서 버텨 낼 수가 있을까?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지금 이 흉년은 피하고 봐야 할 것 아닌가? 잠시, 흉년만 피하고 오면, 양들도 살리고 자신도 평안할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고, 그의 사랑을 믿고 있지만, 이런 형편에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떠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주 자기를 합리화 합니다. 지금은 주일을 못 지키지만, 사업을 성공해야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 아닌가? 부도덕한 직업이지만 돈이 잘 벌리니 많이 벌어서 선교헌금 많이 하면 될것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도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은 없습니까? 그것은 자기 합리화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브람은 애굽에 가서 어떤 결과를 얻었습니까? 굉장한 손해를 보았습니다.
애굽에 내려간 뒤의 아브라함의 모습을 봅시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뒤에 물질로는 유익을 얻은 것 같습니다. 양도 지켰고 더 얻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얼마나 불안하고 후회스럽고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을까요?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는 말은 한 구절도 없습니다. 물질위주의 삶은 신앙을 뒷전에 밀어 놓는 것으로 시작하고, 타락으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에서 살 때는 가난했으나 하나님께 제단 쌓았고 마음이 평화롭고 자유로웠으며, 부부가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애굽에 간 뒤에는 아내도 빼앗기고, 평안도 빼앗기고, 희망도 빼앗기고 물질 외에는 얻은 것이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그게 무슨 꼴입니까? 물질 때문에 신앙을 뒷전에 내던진 것이 수치요,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선물을 받고 남의 아내로 넘겨준 행위가 어찌 우리 신앙의 조상이 한 행위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날 밤, 하나님은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려서 애굽왕이 사래를 범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조치를 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아브람은 영영 아내를 빼앗길 뻔 했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약속의 자식을 얻을 수도 없고, 약속의 땅마저도 얻을 수 없게 될 뻔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가 아니었다면, 아브라함은 아내와 자식과 가나안과 하나님을 전부 잃을 뻔 하였습니다. 다행히 아내를 도로 찾았고 신앙도 도로 찾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모든 것을 잃을 뻔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람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성실성 때문이지 그의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은혜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우리가 불의하고 불완전함에도 구원받습니다. 믿었다고 하는 우리의 심리 때문이 아니고, 우리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을 잃으면, 정치적인 수단과 불신앙적인 행위를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질을 위하여, 편리를 위하여 애굽에 가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로, 불신자가 사는 방법으로 가지 마십시오, 가나안에 남아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신자가 사는 방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결국 다시 신앙 길로 돌아오게 되어 있고 그때는 허비한 세월을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좁지만 귀한 길, 험하지만 평화로운 길,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생명 길을 벗어나지 맙시다. 우리가 그렇게 작정하고 말씀을 기준삼아 살아간다면, 시련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들이 매일 체험하는 생생한 하나님 체험이 되고, 능력 있는 신앙을 생산하는 기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가나안에 가라 하시고, 거기서 역경을 만나게 하신 것은, 그 역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기회,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시어, 약속하신 축복을 앞당기려는 계획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꼭 이루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값싸게, 쉽게 주시지 않고, 감당할 만한 연단을 한 다음에 주시는 분입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의 영웅이 되었는데, 그도 한때는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컨페더레이션 컵 이라는 축구대회를 눈앞에 두고도 히딩크는 한국 선수들에게 기초체력훈련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에 5:0 패를 했고, 다음에 체코와 친선게임에서 5:0패를 했습니다. 신문과 방송의 비난이 이어졌고, 일부 선수들도 훈련이 너무 힘든지라 반발도 했다 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목표는 컨페더레이션 컵이 아니라 월드컵이라면서 여전히 체력훈련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훈련은 오늘의 한국축구를 세계의 축구 강국들을 줄줄이 무너뜨리는 실력으로 가꾸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앞을 내다보는 사람도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이 어찌, 자기 백성들을 그냥 칭찬과 보호만으로 인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연단을 통해서 당신의 택한 백성을 강하고 온전하게 기르시는 분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성령은 그 발걸음을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로 건너갔더니, 마게도냐에서 바울을 기다린 것은 빌립보 감옥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에서 전도하던 첫날에 붙잡혀 감옥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게도냐로 가라 하셔서 순종해서 갔더니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선교에 치명적인 손해를 보게 된 것 같았고, 하나님이 큰 실수를 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어느 것 하나도 뜻 없이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기에, 억울하게 매 맞고 갇힌 그 깜깜한 지하 감옥에서 자기들을 그리로 인도하신 뜻이 깊으신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나는 이 억울한 고난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고백이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감옥에 갇히는 사건을 통하여 그곳 빌립보에 교회를 세우는 기회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밤에 감옥안에서 기적을 일으키셨고, 간수가 그 기적을 보고 바울 앞에서 예수를 믿고 회개하여 그 집에서 빌립보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신 것은,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려고 가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방법으로 복음의 기지를 만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대개 이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앞이 깜깜한 환경에도 여전히 감사하며,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중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만, 그것은 그때에 하셨다고 믿는 신앙이고 오늘은 다르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를 믿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람은 이 일에서는 바울만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흉년을 만나게 한 것은 깊은 뜻이 계셨을 것입니다. 그가 만약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에서 믿는 사람답게 흉년을 견뎌내느라고 힘썼더라면, 그 사건 역시, 하나님의 놀랍고 큰일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입니다. 참 신자란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경험하는 재미로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어야 산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롬8:31-39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신앙의 길에서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겹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고난을 통해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시는 섭리의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그 어떤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손해되지 않는다. 어떤 질병이나 실패나 다른 그 무엇이라도 결국은 나를 유익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시련이며, 그것을 통하여 받게 될,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은혜가 있다” 라고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 물질을 지키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말고, 오히려 고난과 연단에도 숨겨진 은혜가 있다고 믿고 찬송했던 바울같은 믿음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는 길이며, 그것이 우리의 능력의 비결입니다.
아브라함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고 바울 사도 같은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