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산실, 커피하우스의 진화
‘한숨도 쉬지 않는 인생은, 주막에 들르지 않는 긴 여행만큼이나, 피곤하다’는 어느 현자의 말이 있다. 그렇다. 무거운 짐을 진 채 사막을 쉬지 않고 횡단하는 낙타의 행렬을 보는 것처럼 피곤한 풍경은 없다. 낙타들에겐 오아시스가 필요하듯, 여행자들에게는 쉬어갈 주막이 필요하다. 초여름 해 질 무렵 삼강주막 들마루에 앉아 마지막 주모 할머니의 슬픈 얘기를 들었다. 아주 멀지 않은 옛날, 소금 배가 낙동강 굽은 줄기를 따라 들어오면 나루터엔 북적되는 장터가 열린다. 저녁노을쯤엔 방금 막 노를 내려놓은 뱃사공들과 문경새재를 넘어온 보부상들이 회화나무 아래 주막에 들러 막걸리 한 사발로 힘겨운 하루를 보내며, 세상 물정을 나누었다.
한편 영국에는 ‘펍’(Pub, Public House)이라고 불리는 선술집 또는 주막이 곳곳에 있어, 서민들에게 동네 사랑방 노릇을 하고 있다. 이러한 펍은 2천 년 전 이태리의 ‘와인 바’와 같은 기능을 현지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영국은 로마의 침략으로 로마군이 주둔했던 지역에는 로마 가도가 뚫리고 로마 도시가 형성되었다. 그곳에는 로마 군인들이 즐길 수 있는 포도주와 음식을 판매하는 ‘와인 바’인 선술집(tavern)이 유행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에는 에일(ale)과 맥주(lager beer)가 물 대신의 주된 음료수였는데, 이는 맥주의 양조 과정이 물을 마시는 것보다 위생상 안전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에 커피와 차가 1600년 중반에 들어왔으나 가격이 턱없이 높아서 부자들과 유명 인사들의 기호품으로 그쳤다. 따라서 영국 서민들에게 ‘펍’이란 단순히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는 곳 이상의 장소로서, 교제와 소통을 통해 지역공동체 주민들이 일상을 공유하는 특이한 사회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런던에는 남성 회원들만 허용되는 ‘신사전용 클럽’(Gentlemen’s Club)이 있었다. 오크나무와 가죽으로 장식된 고풍스러운 의자, 정장과 넥타이로 상징되는 이러한 클럽들은 오래 전부터 상류계급의 안식처였다. 대영제국의 전성기에는 일류대학 졸업생들의 평가가 그들의 지적능력 못지않게, 어떤 클럽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기도 할 만큼, 엘리트남성들에게는 클럽활동이 그들의 경력관리에 중요한 코스가 되었다. 이러한 클럽에는 여자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단 남자회원이 초대하는 경우는 예외로 인정되었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따랐다. 한 예로 1831년에 문을 연 ‘개릭 클럽’(Garrick)의 경우에는 여자들은 뒤쪽 계단으로 들어와야 하고, 저녁 9시 전에는 칵테일 바 접근이 금지될 뿐 아니라, 식사는 영국의 작가인 앨런 알렉산더 밀른의 동화주인공 ‘곰돌이 푸’(Winnie the Pooh)의 이름이 붙은 방에서 하도록 안내받았다. 영어단어 푸(pooh, poo)는 ‘응가’를 뜻하는 말로 ‘푸 룸’(Poo room)이란 ‘화장실’이란 뜻이다. 그리하여 ‘여자들은 화장실에서 식사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농담을 하며 남자들은 여성폄하를 즐겼다. 밀른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수필 ‘아카시아 길’을 쓴 작가인데, 그는 이 클럽의 귀중한 회원이었다. 남자들은, 이 클럽을 자기들의 두 번째 집으로 여길 만큼 애착을 가졌고,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즐겼다. 이들이 식사를 할 때에는 포도주를 반주로 즐기고, 입가심으로 포르트 와인과 커피를 마신 다음 시가를 피우며, 고담준론으로 매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제는 남자들에게 이런 신선놀음은 끝이 났다. 2010년 10월 영국의회는 평등법(Equality Act)을 제정하여 남녀차별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이 법을 반대하는 남성전용 클럽 지지자들은 남녀를 구별하는 것이 영국의 예절과 훌륭한 매너를 지키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여성에게 엄격한 제한을 가하는 이유는 클럽이 매춘장소로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흔히 남성 회원들이 자기 부인을 데리고 오는 대신 불륜 상대를 데리고 올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이제 17세기 런던의 커피하우스 풍경을 돌아보자. 17세기의 유럽은 15-6세기의 ‘발견의 시대/대항해의 시대’를 거쳐 무역과 식민지를 경영하게 되었고, 그중에서 네덜란드, 프랑스와 영국은 제국을 형성하는 등 유럽은 팽창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후발주자였던 런던은 해외무역의 성장과 함께 번영을 누리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에는 암스테르담을 제치고 유럽의 무역중심지가 되었다. 런던의 이러한 성장과 번영은 인구의 증가로 나타났으며, 테임즈 강변은 해외로부터 밀려드는 새로운 문물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이곳에는 온갖 상인과 중개인들이 서로 만나 무역 계약을 하고 해상보험에 가입하였다. 이러한 장소를 제공한 것이 런던의 커피하우스였다. 문제는 커피를 대부분 남자들이 마셨고 여자들은 남자들이 모이는 커피하우스 출입에서 배제되었다. 그 당시 영국인들의 고질적 음주행위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여자들은 커피가 음주를 촉진시키는 원흉으로 생각하여, 남자들에게 커피를 마시지 못하도록 하는 청원서를 정부에 제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즉 남자들이 커피로 인해 게을러질 뿐 아니라 정력이 떨어져 남성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이에 대해, 남자들은 커피로 인해 오히려 발기가 활성화되고 사정의 양도 많아졌다고 반박하였다. 이러한 코미디 같은 청원 이외에도 커피하우스의 고난은 정부에 대한 비판세력들의 아지트가 되었다는 이유였다. 이에 드디어 찰스 2세는 방탕한 대화와 거짓 뉴스 유포를 막기 위해 영국 내에서 커피하우스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커피 업자들의 반발이 너무 심해 십여 일 만에 폐쇄 명령을 거두어들였다.
이처럼 커피하우스는 대학생에서 무역 상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지식과 정보를 주고받는 활발한 토론 장소이자, 비즈니스 장소가 되었다. 그중에서 몇몇 유명한 커피하우스는 보험회사로, 증권거래소로 그리고 해운거래소로 진화하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상인들이 자기 회사사무실을 소유하지 못하였고, 매스 미디어의 부재로 인해 커피하우스가 정보와 루머의 일차 생산지가 되었다. 1688년 에드워드 로이즈가 테임즈 강변 타워 스트리트에 로이즈커피하우스를 열었다. 이 커피하우스는 부두에 가까워서 모든 무역과 해운업자들의 집합장소가 되어, 이들 간에 어떤 배가 출항해서 무사히 귀항할 수 있는지를 내기한 것으로부터 해상보험이 시작되었다. 그 후 로이즈는 1696년, 선박의 출항과 귀항, 항해조건에 관한 정보 등을 작성한 ‘로이즈 리스트’를 발간하였으며, 이외에도 그는 주식시세, 해외시장, 런던브리지 만조시간, 선박사고와 침몰 등의 정보까지도 확대하여 발행하였다. 정부도 이 리스트를 참조하여 최근의 해상전투뉴스를 발행할 정도였다. 이 커피하우스의 한 편에는 선박 경매가 이루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해상보험의 인수계약도 체결되었으며, 이는 오늘날 세계최대 해상보험회사의 전신이 되었다.
한편 1680년에 조나탄 마일즈가 개점한 ‘조나탄 커피하우스’는 증권거래소를 탄생시켰다. 그 당시 런던에서 상장되어 거래되는 회사는 100여 개에 달하였다. 이 회사들의 주가는 국제적인 정보의 루트에 의해 변동되었다. 즉 수천의 선박에 관한 화물 분실, 대량운송, 선원의 질병, 선박 수리지연 등의 정보가 주식시세를 좌우하였다. 이 커피하우스는 청소년들을 고용, 부두에 보내어 그곳에서 모든 선박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수집된 정보는 커피하우스의 벽에 게시하여 주식투자에 활용하도록 하였으며, 이러한 정보를 뉴스로 발행하였다. 이곳의 단골 고객인 존 카스탱은 이 정보를 기초로 하여 주식가격을 스스로 제시하여 개인이 거래소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곧 런던 주식시장의 전신이 되었다. 이외에도 버지니아커피하우스와 발틱커피하우스는 해운거래소의 전신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흥행하던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19세기 후반부터 활기를 잃고 시들해져, 더 이상의 정부 비판이나 신문과 같은 정보의 원천이 되지 못하였다. 이제 커피하우스는 서민들이 신문을 읽는 휴식처로 변했다.
이제 이 나라는. 이미 커피 향에 취한 커피공화국이 되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우리 고유의커피 문화가 없다는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커피하우스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없을까? 단지 스타벅스 흉내만 내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커피공화국의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초동 골목길 조그만 카페에 씌어 진 말이 매우 인상적이다.
“Life is too short to drink bad coff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