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제주의 봄 들판에는 유채꽃과 고사리의 향연
4월에는 이른바 고사리마라고 하여 비가 자주 내린다. 겨우내 누렇던 들녘이 봄비에 젖는다. 따뜻한 양지쪽부터 파릇파릇 봄나물이 고개를 내민다. 쑥이나 냉이, 달래, 두릅 등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봄나물들이 우리의 입맛을 유혹한다. 그 중에서도 4월 제주의 들판을 뒤덮는 것은 고사리이다. 4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주말이나 휴일에는 제주의 중산간은 고사리를 꺾는 인파로 뒤덮인다.
햇살이 따스한 들녘에서 방금 땅 속에서 솟아오른 연하고 통통한 갈색 빛의 고사리를 똑똑 끊는 재미는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양지쪽의 볕고사리보다 그늘지거나 가시자왈 속에서 크고 살찐 놈을 찾아 손을 가시에 찔리며 꺾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고사리는 피를 맑게 하고 머리를 깨끗하게 해 주는 칼슘과 칼륨 등 무기질 성분이 풍부하여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노폐물을 배출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건강식품이라고 한다. 항간에는 정력에 좋지 않다는 속설이 있으나 이는 스님들이 많이 먹는 식품으로 잘 못 알려진 편견이라고 봐야 옳다. 또한 고사리는 예로부터 신성한 음식으로 알려져 제사상에는 꼭 올리는 풍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고사리 꺾는 계절에는 매년 실종사고 등 이런저런 사고가 잇따라 주의를 요한다. 4월에는 안개가 자주 끼고, 고사리가 많은 곳자왈 지대가 광활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기 쉽다. 고사리를 꺾는 일에 몰두하여 가다 보면 방향을 헤아리지 못하여 곤란을 겪는 일이 흔하다. 고사리 채취를 나설 때에는 호루라기와 휴대폰을 꼭 지참하도록 권하고 싶다. 처음에 고사리 채취 장소를 잘 살피고 길을 잃었을 때를 가정하여 오름이나 주변 환경을 잘 보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 고사리의 유혹 속에 힘들게 오른 따라비오름
오늘은 솔직히 비 맞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출발했다. 밤에는 꽤 많은 비가 내렸고 아침에도 안개가 자욱한 속에 가랑비가 줄기차게 내려 날이 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천불구 강행 방침을 익히 알고 있을 터인데 그래도 미심쩍은지 몇몇 친구가 ”정말 갈 꺼니?“ 하고 전화로 물어온다. 그 만큼 좋지 않은 날씨다.
그러나 차가 비자림로에서 정석비행장 쪽으로 접어드니 시야가 훨씬 밝아진다. 길 양쪽에 심어놓은 유채꽃이 활짝 피어 노란 띠를 길게 펼쳐 놓은 듯하다. 쭉 벋은 곧은 도로에 한 없이 이어지는 노란 꽃물결이 차를 따라 움직인다. 마치 우리를 환영하는 인파처럼.
우리가 안개 속에서 한 5분쯤 지체하는 통에 모이는 장소인 정석비행장 주차장에는 친구들이 모두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이다. 감기로 한 달 정도 참석을 못했던 남산이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 특유의 여유를 보였다. 운공과 은하수가 솔로로 참석하여 고정 솔로인 김립과 선달에 더하여 유난히 솔로 많은 날이다. 우리의 완산은 오늘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 그의 건강을 걱정하여 하루 빨리 완쾌하여 합류하기를 빌었다.
떠들썩하게 인사하며 이야기하는 사이에 하늘은 거짓말같이 개고 큰사슴이의 웅장한 모습이 뚜렷하다. 우리들 사이에 장난처럼 회자하던 목요일에 대한 믿음이 다시 살아난다. 우리가 금년 첫 산행으로 눈 쌓인 바농오름에서 올린 산신제가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유채꽃이 곱게 핀 꽃길을 조금 더 달려 따라비오름의 넓적한 등이 보이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목장지대 안으로 접어들었다. 아침 일찍 나와서 고사리를 한 부대씩 꺾어 내려오는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고사리가 많은 가보다. 우리 여학생들의 눈이 반짝이다. 오늘 고사리의 유혹에 통제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아니나 다를까 들판에 다다르자 비에 축축한 대지를 뚫고 나온 살찐 고사리들이 지천으로 보인다. 모두들 비닐봉지를 준비하고 고사리 꺾기에 몰두하여 도통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오름까지의 거리는 한 참 정도 되건만 이렇게 간다면 몇 시간이 걸릴지 걱정이다. 호루라기를 불고 독려해 보지만 우의 독경.
중간에 작지만 상록수림이 우거진 아름다운 내를 건너고 겨우 오름 기슭에 도착한 것은 한 시간이 훨씬 지난 후였다. 고사리에는 관심이 없는 김립과 남산이 거꾸로 외롭다. 일찍 도착하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학생들이 고사리에 탐닉하는 동안 남학생들은 술추렴에 들어갔다. 요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선달표 매실주에 오늘 처음으로 선 보인 은하수표 독세기를 안주 삼아 옛날 사범학교 때 추억을 곱씹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아직 오름에는 오르기도 전인데 말이다.
따라비 오름은 100미터가 조금 넘는 중간 높이의 오름이지만 등쪽이라 할 수 있는 남쪽 등성이는 60도에 가까운 경사도로 상당히 가파르다. 앞장이 오름을 돌아 동쪽 능선으로 오를 것을 권했지만 고사리 때문에 통제가 어려워 훤히 보이는 남쪽 등성이를 택했다. 동쪽으로는 소나무가 있으나 가운데로는 나무 하나 없는 밋밋한 비탈을 기다시피하며 오르기 시작했다. 자칫 구르기라도 하면 오름 기슭까지 굴러갈 판이다. 숨이 턱에 차서 헐떡대지만 조금 전에 마신 매실주가 에너지 구실을 하여 거의 쉬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 오름 할아버지의 예사롭지 않은 멋과 아름다움
따라비는 땅 할아버지라는 뜻이란다. 오름들을 가족처럼 생각했던 우리 조상들의 생각이 담긴 이름이다. 따라비 오름 바로 왼쪽에는 새끼오름이 있고 오른쪽에는 장자(큰아들)오름과 모지(어미와 아들)오름이 자리한다. 조금 떨어져서 용눈이 오름 앞에 손지오름이 있다. 이렇게 따라비오름은 오름 중에 으뜸인 할아버지라는 얘기다. 그래서 이 오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름 동호회 중에는 이 오름을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매년 여기서 산신제를 지내고 안전 산행을 기원하는 모임도 여럿 있다.
할아버지의 위용을 갖추어서 일까? 오름의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가운데 오목한 원형 굼부리가 있는데 작은 봉우리를 건너 다시 조그마한 원형 굼부리가 이웃하고, 다시 커다란 봉우리를 휘돌아 깊은 말굽형 굼부리가 형성된다. 가운데에 볼록한 봉우리가 자리해 복합적인 오름 모양을 갖추었다. 나무가 우거졌다면 이런 아기자기한 모양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앞장에 설명에 의하면 가을에는 억새로 뒤덮여 장관을 이룬다고 하니 가을에도 꼭 한 번 더 오고 싶은 오름이다.
우리는 앞장을 따라 능선과 봉우리를 타고 넘으며 따라비를 한 바퀴 돌아 내려왔다. 오름에 부는 바람이 아직도 차고 세찼으나 우리는 오름의 멋과 아름다움에 잔뜩 취하여 비틀거리며 봉우리를 오르내렸다.
들판에 내리자 고사리가 또 우리를 유혹한다. 고사리는 정말 많은 곳이다. 고사리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선달도 감탄할 정도이니 말해 무엇 하리. 그런데 어쩌나, 고사리에 정신이 팔려 뿔뿔이 흩어져 내려오는 도중에 작은 실종 사건이 발생하였다.
올라 갈 때와 비슷하게 고사리를 꺾으며 내려오느라고 시간이 꽤 걸렸다. 시간은 오후 3시가 가까워 다들 배가 고프고 기진맥진하여 귀가를 서두르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일행 중 한 분의 당황한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고사리를 꺾다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고 길도 못 찾겠단다. 우선 안심시키고 상록수가 우거진 냇가로 오시도록 한 후 그 분의 남편과 더불어 찾으러 나섰다. 다행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부인을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전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휴대폰을 가지도록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휴대폰이 없었다면 길을 잃은 분이나 나머지 일행이나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성읍리 운공 사촌네 식당에 가서 늦은 점심으로 허기를 달랬다. 오늘도 좋은 오름에 고사리 한 두 봉지씩을 덤으로 받고 즐거운 산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돌아오는 길이 감회로 뿌듯하다.
(2006. 4. 13)
첫댓글 이 날 10시 전후, 서부산업도로는 안개때문에 큰 교통사고가 생겼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