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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보면 이런 저런 점들도 많이 있겠지만, 누가 뭐라해도 중세의 이미지를 쥐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병과는 기병들이며, 그 중에서도 기사라고 불리는 중무장한 기병들이 그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데이비드 핸슨 같은 경우, 서구의 보병 백병전 전통을 강조하기 위해 중세에서도 전군의 1/10만이 기사였고 대부분이 보병이었음을 보이며 여전히 보병 백병전의 전통은 군대의 주력으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주장을 펼쳤고 존 키건 역시 기병돌격을 팔랑크스 차징과 유사한 의미로, 서구의 군사적 전통이 전해져 내려왔다고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이 점을 통해 중세 전쟁사에서 보병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는 있을지언정 결정적인 순간에 전황을 바꾸고, 가장 강력한 정예 부대로서 전투의 추를 기울이는 존재가 기사들임을 부정하기는 또 어려울 것이다. 판타지에서야 기사들은 존내 개인 실력만 믿고 칼 한 자루 달랑 쥐고 80kg이 넘는 갑옷을 입고 깽판을 부리다가 어디선가 날아왔는지도 모를 이세계 난입 고딩들이나 이세계 난입 동방무사들의 삼류양아치들이 쓴다는 삼재검법에도 “세사엥 이런 검술이!”라고 절규하며 유린당하는 존재들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 기사들의 전투는 또 그와 달랐다. 이 장에서는 기사들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프랑크 왕국의 기병을 통해 기사들의 시대가 어떻게 도래하게 되었는지를 짚어보도록 하자.
(카롤링거 왕조, 샤를마뉴 대제의 원정)
프랑크 제국은 메로빙거 왕조를 이루면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간지포쓰의 클로비스는 모 애니메이션의 B제국 3황자와는 다르게 아주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였다. 그는 프랑크족 군대를 이끌고 기병 위주였을 서고트족의 군대를 수차례에 걸쳐 격파하고, 부르고뉴인의 지원을 얻어 왕국의 영역을 크게 넓혔다. 물론 클로비스 이후의 메로빙거 국왕들은 대개 권력이 약하거나, 아니면 어딘가 멍청한 인물로 그려지거나, 비잔티움 뺨치는 무시무시한 음모와 왕좌 갈아 치우기의 연속이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에서 매우 막강한 국가였음은 사실이다. 이 프랑크 왕국의 군대에 관한 기록은 역설적이게도 비잔티움쪽에 남아있다. 전 편에 나왔던 이것이 명장이다의 견본을 보여주던 벨리사리우스를 기억하시는감? 이 벨리사리우스의 서기였던 인물이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로, 오늘날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을 따라가는데는 이 인간의 기록이 꽤나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사람은 프랑크족에 관해서도 기록을 남겼는데 대충 정리하면 이와 같다.
“말 탄 인간들은 지도자 몇 명이고 대부분은 땅개로 뛰어다님. 갑옷은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모르겠고, 대개 벌거벗거나 가죽, 린넨 등등으로 무장. 투구? 그게 뭐임? 방패는 있는디 창 든 인간은 눈 씻고 봐도 없더라. 그래도 꼴에 칼에 방패, 도끼 한 자루씩은 들고 있던데, 궁수 하향 패치 때문에 그런지 이제 궁수노기는 접어서 활 든 인간 없음. 아놔 이거 무슨 한국 사극도 아니고 무장이 왜들 이래?”
...물론 창이야 예전 파트에서 앙공에 대해 설명했고, 지금은 고고학적으로 당시 프랑크 무덤에서 화살촉이 다수 발견됨에 따라 활도 썼던 것으로 추정되나 비잔티움같이 중요한 무기까지는 아니고, 색슨족처럼 전투 전에 적을 끌어내거나 아니면 가볍게 전초전정도로 치룬 것 같다. 말은 당시 프랑크 지역에서 크게 사육되었던 것 같으나 설사 그렇다 해도 전투는 말에서 내려서 치렀다. 이 약점이 제대로 찔린 것이 바로 2장에서 프랑크인이 나르세스에게 떡실신당한 바로 그 전투다. 메로빙거 왕조가 481-751년이고, 나르세스가 프랑크족을 캐바른 때가 554년이니 메로빙거 왕조의 군대는 그 정도로 봐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추정하건데, 이 군대 역시 색슨족 테인처럼 지도자나 고위층 휘하의 엘리트 프로페셔널 간지 좔좔 군대와 일반인 및 하위 계층에서 징집당한 후줄근 좔좔한 군대의 복합체를 이뤘을 것이다. 이러한 군대는 카롤링거 왕조의 시대에 들어 좀 더 극적인 변화를 맡게 된다.
카롤링거 왕조가 성립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인 ‘샤를 마르텔’이 이끈 투르-푸아티에 전투(732)일 것이다.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한 이 전투는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한 번쯤 들어본 적 있는 전투일 것인데 프랑크 왕국이 이슬람군대를 대파한 것으로 유럽 문명이 수호되었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소리들을 들어 왔을 것이다. 이 전투는 이후 유럽 역사가들에게도 두고두고 울궈 먹는 대상이 되어 뭐 세계에서 가장 결정적인 15가지 전투라느니 하는 것에도 들어가곤 한다. 그러나 요즘에 투르-푸아티에 전투를 바라보는 눈은 ‘뭐 그다지...’ 정도랄까. 당시 이슬람 군대의 규모도 2만이 채 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프랑크 인도 대충 그 정도나 이슬람군의 1/2정도 되지 않을까 추정되곤 한다. 이슬람의 공격도 ‘유럽인 여러분, 모두 죽어주세요 데헷★’같은 무시무시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너 돈 있냐?’ 수준의 약탈 원정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는 프랑크인이 이슬람 군대를 격파하면서 이슬람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투르-푸아티에 전투. 샤를 마르텔씨의 쇠도끼가 울부짖는 중)
투르 전투 당시 프랑크군의 대부분은 중무장한 보병으로, 샤를이 잘 훈련시킨 정예 부대였다. 이들은 창과 방패, 검, 도끼등으로 무장하고, 팔랑크스와 유사한 단단한 대열을 짠 부대였다. 반면 이슬람군은 대부분 기병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당시 이베리아 반도 군대의 주력은 기병보다는 보병이었고, 아마 투르 전투에 참가한 군대도 기병 부대는 분명히 존재했겠지만, 우리가 예상하는 것처럼 대부분이 기병이었던 듯싶지는 않다. 이들은 창과 방패, 검, 간단한 갑옷을 입었거나 입지 않은 부대였으며, 투사무기는 활보다는 여러 자루의 투창에 의존했다. 그러나 프랑크의 고정된 보병대열은 나르세스가 증명했듯 기병의 투사 무기와 측후방 공세에는 취약했다. 샤를은 이 점을 숙지하고 군대를 투르와 푸아티에 중간 지점의 고지대 숲 안에 대기시켰다. 이슬람 군을 지휘하는 압둘 라흐만은 이 지점에서 샤를의 군대와 맞부닥쳤다. 급작스러운 적의 등장에 이슬람군은 전진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샤를 역시 고정된 방어적 보병대열을 만들어 놓은 채 가만히 있었다. 뭐, 상대 진영에 시즈탱크가 자리박고 있으면 어느 쪽이든 들이밀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고 가끔가다 무승부가 나는 것처럼 이번에도 양쪽은 7일 동안 가벼운 전투만 펼쳤다.
(9-10C의 프랑크 보병들. 갑옷은 입지 않고 투구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결국 승부는 겨울이 슬금슬금 다가올 기미가 보이자 추위에 익숙지 않은 이슬람군이 먼저 움직이면서 시작되었다. 이슬람군의 공세는 여러 차례 이어졌으나 프랑크군은 ‘단단한 얼음처럼’ 그 벽을 허물어트리지 않았고, 일부 프랑크군대가 이슬람군의 본진으로 우회하여 약탈을 개시하고 압둘 라흐만이 전사하자 이슬람 군대의 전체적인 패주가 시작되었다. 이 때 프랑크군은 대부분이 보병이었기 때문에 기병인 이슬람군을 추격하지 못해 이를 계기로 프랑크군이 본격적으로 기병으로 전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병 중심의 국가도 상당수는 승마 보병을 운영했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이 추정은 그다지 신뢰도가 높지 못하다. 그러나 투르-푸아티에 전투 이후에 기병의 비중이 늘어나게 되는 것은 사실이며, 이 군대는 후에 샤를마뉴를 따라 여러 전역에서 활약을 펼치게 된다.
그렇다면 왜 기병의 비중이 늘어나는가? 뽀대 나서? 기동력 있어서? 아니면 등자의 전래로 새로운 충격전술(couched lance)이 가능해져서?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론이 있다. 특히 린 화이트는 그의 전서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에서 등자의 전래와 그에 따른 충격전술이 가능해진 것이 유럽의 ‘봉건제'를 성립시킬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일단 그럼 등자가 뭐냐고부터 함 살펴보자. 보통 말 안장을 보면, 거기서 줄이 하나 늘어져 있고 그 끝에 가운데가 빈 사다리꼴 모양의 쇠테가 둘러쳐진 것을 알 수 있다. 요 간단한 녀석이 바로 등자라는 놈이다. 별거 아닌거 같지? 그런데 말 위에서는 다르다. 땅과는 달리 지지대도 없이 말 위에서 흔들리는 몸을 고정시키고 무기를 휘두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등자는 말 위에 임시로 발을 받칠 지지대를 제공해 주는 녀석이다. 말 위에서 취할 수 있는 자세도 보다 안정적이 되고 더 많은 충격에도 말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말하자면, 사다리 위에서 곡예를 펼치는 놈은 대단한 놈이지만 계단 위에서 발광하는 녀석은 정신 이상한 놈 취급 받는 것처럼, 등자의 등장으로 예전에는 일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기마 전투가 다양한 사람들을 훨씬 더 짧은 훈련 기간으로 기마 전투원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9C 마자르 기병의 등자. 프랑크 왕국도 9C 이후에 점차적으로 등자 사용이 확대되었다)
다른 결정적인 등자의 효과는 바로 [카우치드 랜스(couched lance)]라는 돌격 자세다. 그 이전 시대의 기병 돌격은 양 손으로 창을 쥐고 적을 들이 받는 식이다. 이는 중앙아시아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사르마티아 기병이 주로 사용했고, 그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삼실총 벽화에서 양손으로 창을 쥐고 결투를 벌이는 개마무사(cataphract)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카우치드 랜스는 창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팔을 굽혀 손바닥이 위로 가도록 창을 쥔다. 이 자세는 몸의 체중을 전부 실어 적에게 들이받음으로서 훨씬 강력한 충격력과, 창의 고정점을 확보해주면서 더욱 정확한 일격을 날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변화가 기병전투의 효율을 극도로 높여주었고, 따라서 기마 전투원들의 수가 늘어났다는 것이 린 화이트의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카우치드 랜스는 9세기 서유럽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는 비잔티움으로 전파되고, 계속해서 퍼져나가면서 이러한 자세를 아시아 몽골군 전투도에도 볼 수 있다.
(삼실총 벽화. 두 손으로 창을 잡고 싸우는 고구려 개마무사를 확인 가능하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직접 실험을 통해 카우치드 랜스의 자세를 취하는데는 등자보다는 몸이 쏠리지 않도록 앞쪽이 툭 튀어나온 높은 안장이 훨씬 결정적이라는 의견이 그것이며, 등자 없이도 카우치드 랜스를 성공시킨 사례도 있으며, 전투 중에 창이 부러지지 않는다면 등자가 있어도 말에서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다. 또한 등자는 창을 들고 돌격하는 랜스 차징보다는 그 이후 짧은 무기를 들고 부딪치는 전투(melee)에서 더 위력을 발휘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애초에 등자란 놈이 탄생은 기병의 전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 타고 오랜 시간을 이동해야 할 때 피로를 줄여주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또한 기사의 등장도 등자라는 도구보다는 그 전부터 꾸준히 계속되어온 농업 생산력의 증가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다시 말하자면, 프랑크 군대에는 항상 승마 보병이 있었다. 농업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말과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더 늘어나고, 따라서 예전같으면 그럭저럭 먹고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 잉여 생산력이 생겨 말도 사고 갑옷도 사고하면서 특정 계급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말 위에 타고 싸우는 인원의 수가 증가하면서, 이들이 기사로 발전했다는 주장이다. 등자와 앞쪽이 높은 안장은 기사 계급의 성립에 결정적이라기보다는, 기사 계급이 성립한 뒤 말 등 위에서 싸우도록 만들어준 도구라는 것. 다시 말해 이것이 원인이고 저것은 부차적이라는 주장이다. 심지어 린 화이트의 주장인 9C 이후의 카우치드 랜스의 등장 여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유명한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따르면 노르만 기사들은 고전적인 방식대로 한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창을 쥐고 있거나, 양손으로 창을 잡고 있지 카우치드 랜스의 자세로 싸우지 않는다. 물론 린 화이트는 이것이 카우치드 랜스가 후까시가 나지 않아서 이런 예전 고전적인 방식의 전투 양식에 따라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이외에도 여러 그림에서 기병들은 카우치드 랜스의 자세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혹자는 카우치드 랜스는 비잔티움인들도 알고 있었고, 본격적으로 이들이 널리 사용된 계기는 예전에 짚어본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중장기병 클리바노포로스와 그들의 쐐기꼴 대열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아니면 그 이전부터 비잔티움과 이슬람 세계는 카우치드 랜스 스타일을 적용했다고 하기도 한다.
(9-10C의 프랑크 기병대의 전투. 창을 머리 위에서 한 손으로 들고 싸우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논란의 사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롤링거 시대에 중무장한 기병들이 본격적으로 유럽 전장을 잡아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시대의 기병들은 무질서하고 훈련이 제대로 안된 자쿠들은 강력한 랜스 차징으로 쓸어버리길 즐겨했지만, 반대로 적이 고지대나 험준한 지형에서 버티고 있거나, 혹은 잘 조직된 상태로 정돈된 보병 대열을 갖추고 있는 경우에는 섣불리 돌격하지 않고 근접해서 투창을 던지거나, 혹은 말에서 내려 적과 교전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기마 전투보다 하마 전투한 사례가 많은 적도 있다.
궁기병과의 싸움에서는, 비잔티움 황제 레오 6세와 그가 쓴 전술서적인 ‘탁티카’에 따르면 ‘닥돌’ 그 자체다. 급작스럽고 적이 예상하지 못한 적당한 시점에서 급작스럽게 터져나온 기병 돌격은 물론 궁기병에게도-비잔티움 식이든, 혹은 아바르같은 유목민족 식이든- 공포 그 자체다. 혹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경우, 대열이 허물어지고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다. 그럼 당연히 이후는 병사들은 지휘관의 통제에서 벗어나고-당시에 무전기나 전화가 있는게 아니니까- 전투 속행이 힘들어진다. 뭐, 사람들이야 궁기병들이 저 석양 너머로 웃으며 달려가면 감히 기사들이 어떻게 쫓을까...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먹음직스러운 것들은 바로 그 궁기병들의 본진에 있는 가축, 보물, 그리고 여자들이다. 대오가 무너진 이상 날고 기는 군대라도 강력한 군사들로부터 본진을 지키는 것은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제대로 붙자니, 갑옷과 무기가 부담스럽다. 물론 판타지에서는 ‘갑옷따윈 장식일 뿐이에연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몰라연’이라고 말하지만 갑옷이 실제로 크게 움직임을 제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령 움직임이 가볍다고 할지라도 무기가 안 박히는데(이는 한국 사극의 가장 큰 폐해로, 그냥 스쳐 지나가는 칼질을 갑옷 위에 때려도 사람들이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나간다. 그러나 실제로는 날카롭게 만든 그로스메서로 체인 메일을 제대로 후려갈겼는데도-전투 중에 이꼴로 무게 중심을 전부 실어 후려치면 죽기 딱 좋다- 씨알도 안먹히는 동영상을 본적 있다) 사상자가 어느 쪽이 많을지는 뻔할 뻔자 아니겠는가(이를 부정하는 사람으로 대표적인 작자가 바로 투멘타이다.)
(1-스케일 흉갑을 입은 카롤링거 왕조의 기병
2-마갑을 입힌 브르타뉴인 기병
3-프랑크 왕국 보병 징집병)
특히 아르수프 전투(1191)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아르수프 전투에서 이슬람의 위대한 지도자 살라딘은 경기병을 위주로 사자심왕 리처드와 그의 군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묵묵히 행군하던 기사들은 살라딘의 경기병들의 압박이 피크에 달하고 이들이 지나치게 접근했을 때, 순식간에 대열을 허물고 적을 향해 차징을 걸었다. 이 전투로 살라딘은 7,000명이 넘는 병력손실을 입고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포기할 생각도 해야 했다. 물론 리처드 같은 경우가 매일 있는 것은 아니어서, 멋대로 뛰쳐나온 중기병도 많다. 훌륭한 궁기병 지휘관들에게는 멋대로 뛰쳐나온 이들은 제대로 낚인 먹이다. 적의 차징 범위에서만 노련하게 벗어나면 기사들도 대열이 흐트러지거나 혹은 달아나는 적을 쫓는다. 이 때 다른 부대가 덮쳐서 옆구리를 후벼 파고 뒤를 아프게 해주면 좋은 남자들이 아닌 이상에야 아파서 눈물을 뚝뚝 흘릴 수밖에. 레오 6세도 이 점을 추천한다. 서구 기사들과 싸울 때는 달아나라. 그러면 이들은 보초부대도 안 세우고 따라올 것이다. 적당한 시점에서 군사를 돌려 반격하라. 그럼 대열이 흐트러진 이들은 안드로메다 관광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릴 것이다.
그래도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프랑크 기병들은 아직 우리가 생각하는 완전한 기사의 형태는 아니다. 예를 들면 그 유명한 샤를마뉴 대제의 시대에 기사들이 등자를 썼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9C 말의 소집대장에 보면 기병들은 반드시 갑옷을 지참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10C 초에는 호버크든 비르니든 갑옷을 지참하지 못하는 기사는 그 지위를 박탈당하게 되어 있다. 이 시대에는 여전히 보병들은 군사력의 상당부분을 차지했고(이들은 훈련받고, 예상보다 잘 무장했고, 원거리 원정에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샤를마뉴 역시 이러한 군대를 바탕으로 수적 우세로 적을 밀어 붙이기를 즐겨했다. 이러한 것이 9C부터 변하기 시작해 보병의 비율이 줄어들게 된다. 이는 기병의 전투력이 서서히 증가하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지만-등자는 9C 이후 점진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보다는 샤를마뉴의 정책 및 그의 제국의 한계와도 관련 있다.
(10C의 동프랑크 보병과 기병, 그리고 마자르인 경기병대)
샤를마뉴는 철저한 귀족 세력의 옹호자였다. 따라서 그는 왕국의 자유민보다 귀족들을 주력군으로 삼았다. 그는 수적 우세도 충분히 활용했지만, 내전의 경우에는 자유민보다는 귀족군에 의지했다. 그러다보니 소수의, 잘 무장한, 압도적인 전투력을 가진 군사계급이 필요로 했고 이것이 초기 기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는 샤를마뉴와 그의 아들 루이의 사후 프랑크 왕국은 셋으로 분할됐고, 체계적인 체제와 훈련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보병부대의 소집 및 관리가 부실해졌다. 여기에 바이킹의 침입으로 지방은 엉망이 되어가고, 이 언제 해안으로 밀고 들어올지 모를 부대를 잡기 위해서는 기동력 있고 강력한 군대가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군대에서 기병의 숫자가 계속 증가하게 된다. 여기에 본격적으로 마자르인과의 교전이 시작되면서 이들의 영향으로 기병 전술에도 이제 강력한 승마 전투 위주로 변화가 오게 된다.
하지만 카롤링거 시대의 농업 생산량으로는 군사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샤를마뉴가 택한 방법은 바로 약탈이었다. ‘없으면 뺏어라’는 고래로 소위 영웅이라는 작자들이 자주 써먹는 짓거리가 아니던가. 모 버섯 낚시꾼에 따르면 이럴 때 왕이 반응하는 가짓수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앞 장에서 살펴본 모 브리튼의 국(여)왕님은 “빵이 없다고? 성배를 찾으러 갑시다”라고 말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골든 플레이트로 떡칠한 자만심 만땅의 국왕님은 “빵이 없다고? 그럴 리가 있나”라고 반응한다고 하지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식은 역시 마케도니아 출신 밀리터리 오타쿠 근육질의 국왕님의 반응이다-“빵이 없다구? 뺏어먹으면 되잖아”(가끔 이에 못지않은 찌질이들의 사례로는 “빵(쌀)이 없다고? 과자(고기)를 먹으면 되잖아” 등이 있다) 샤를마뉴도 이 명제에 충실한 영웅답게 주위에 수많은 나라들을 쥐어 패고 노략질하고 다녔다. 그의 영토 확장에는 이러한 영웅답지 못한 이면이 있는 법이다. 특히 아바르족 같은 경우는 거의 종족 자체가 절멸되어 버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물론 실패 사례도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라고사 원정이다. 도시를 우려 빼려던 샤를마뉴의 시도는 실패했고, 황제는 주위를 노략질해서 보잘 것 없는 성과물을 가지고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이 때 피레네 산맥의 바스크인들이 샤를마뉴 군대의 후위를 급습하여 격파하고 샤를마뉴의 유명한 기사 롤랑을 살해한 것은 유명한 무훈시 ‘롤랑의 노래’로 유명하다.
(778년, 바스크인과의 전투 중에 전사하는 롤랑...멍청하게 창따위를 쓰니까 당하는거다! 듀랜달을 꺼내!!!)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러한 계급은 게르만족의 족장, 혹은 유력자-가신단의 성격을 띈 것이었다. 샤를마뉴같은 칼이쓰마 넘치는 지휘관의 경우라면 몰라도,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군대는 장기간의 원정에는 걸맞지 않았다. 자주 이용하는 레오 6세의 탁티카에 따르면, 당시 프랑크나 롬바르드 군대는 비잔티움인들의 ‘연대’, 즉 공적이고 국가적인 통솔에 따라 구분된 부대가 아니라, 혈연관계나 가신, 맹약에 따라 이뤄진 집단이라고 평하고 있다. 좀 극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국군 1사단 1대대와 양은이파 정도의 차이로 생각하면 될 듯싶다. 물론 이는 양 집단의 전투의 질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통솔과 명령체계의 차이다. 따라서 군대 내에서 지들이 윗대가리라거나, 혹은 지들 몫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분쟁이 벌어질 수 밖에 없고, 이를 노린 레오의 가장 좋은 프랑크 대처법은 다음과 같다- ‘요새 안에 짱박혀 있으세염ㅋㅋ 그러면 지들끼리 싸우거든여 그 때 적당히 안티 빨고 디스펠 걸고 돈 가지고 뒷공작해서 타락 찔러주시고염 ㅋ 그럼 투닥거리다가 돌아가염 그 때 흡혈빨고 피검들고 크리티컬 날리시면 되여’
물론 레오 6세는 그 앞에 프랑크와 롬바르드 기병들의 가공한 돌파력을 언급하면서 최대한 전투는 피하라고 조언한다. 위의 그 유인작전도 그 전투 이후에 행하는 것으로 위의 것보다는 좀 떨어진다. 원정 중에 식량은 대개 자기 것을 지참하지만, 이 시대에 원정지로의 약탈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점도 프랑크족의 장기 원정을 힘들게 만들었다. 혹은 앞 장의 색슨족 테인과 유사하게, 이들도 언제까지고 자기 논밭 버려두고 싸우기는 어려웠으므로 싸우는 기간에도 한정이 있었던 듯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술대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50-100명 단위의 기병 부대인 쿠네이(cunei), 그리고 쿠네이 몇 개가 모여서 만든 스카라(scara)는 프랑크의 기병부대의 대표적인 편제였다.
전투에 들어가는 이들의 무장은 대개 창과 방패, 체인 메일, 검등이 주요 무기다. 흔히들 이들의 무기에 대해 흔히 저지르는 오류는 이 당시 루트를 타고 행해지던 다른 세계의 영향을 무시하는 것이다. 프랑크 기병들의 무기는 많은 영향을 받았고, 특히 갑옷 같은 경우 이슬람과 비잔티움의 것을 교역이든 약탈이든 얻어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대 군사들의 창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이 바로 십자창(十字槍)이다. 린 화이트의 경우 십자창이야 말로 카우치드 랜스가 유럽 군사사에 적용된 대표적인 증거 중 하나로 본다. 창날 밑에 달린 가로로 뻗은 창날들은, 창으로 적을 찔렀을 때 창날이 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게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그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십자창은 4C 게르만 보병 무기에서 유래했다. 다시 말하자면, 창날 밑에 수평으로 달린 곁가지들은 창을 너무 깊게 꽂히지 못하게 하는 용도보다 이리저리 휘둘러 적을 찌르고 베고 찍고 할 수 있는 일종의 폴암계 무기와 유사한 다용도 무기였다.
(8C 이후에 유행한 십자창)
유명한 프랑키스카는 이 때쯤 되면 추방되었고 보조 무기로는 이 무지막지한 도끼 대신에 색스(seax)같은 단검류가 애용되었다. 물론 가장 비싼 무기는 역시 검이다. 패턴 웰디드 방식으로, 즉 가운데 부분과 검날 부분을 다른 재질의 철로 제작된 검은 색슨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매우 비쌌다. 이들의 검은 기존의 스파다보다는 길쭉한 형상을 띄게 되며, 이베리아의 아랍인들도 이 검을 자주 사오곤 했다. 방패는 아직 원형 방패가 대세이다. 카이트 실드가 도입되려면 아직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하는데, 재미있게도 카이트 실드의 기원은 9C 비잔티움이라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11C에선 오히려 비잔티움이 노르만식의 보다 길쭉하고 날렵한 카이트 실드를 도입하게 된다.
갑옷은 체인 메일이 많다. 초기의 팔의 상완부와 상반신만 덮는 가벼운 비르니에서, 후기로 갈수록 보다 길고 넓은 부위의 방어를 커버하는 호버크는 물론, 비잔티움이나 아랍의 영향을 크게 받거나 아예 거기서 만들어진 라멜러, 스케일 흉갑도 발견된다-특히 이탈리아에서 비잔티움 클리바니온의 영향이 강하다- 갑옷은 남부 유럽이 북부 유럽보다 더 나은 무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투구는 여러 종류와 함께-대개 스팽갠헬름이라는 조립식 투구- 원피스 헬멧, 즉 철을 한 덩어리로 만든 투구가 보이는데, 이 투구의 기원도 문제에 있다. 혹자는 당시 삽화에서 골리앗을 비롯한 악한 전사들이 이 투구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슬람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이런 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사람, 즉 샤를마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자, 저 강철의 연금...흠흠, 강철의 국왕을 보라! 철의 투구는 금관으로 장식되어 있도다. 팔은 굳센 쇠로 덮여 있으며, 드넓은 가슴은 비르니로 보호 되며, 왼손에는 철창을, 오른손은 꺾이지 않을 검을 들고 있노라. 허벅지조차 사슬갑옷으로 수호되노라-비록 다른 전사들은 말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쓰지는 않지만. 다리 역시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강철 정강이받이가 덮였으며 그의 방패는 어떠한 색깔이나 장식도 없이 강철이 입혀져 있노라.”
아마 가슴을 보호하는 철갑은 사슬 갑옷일테고, 팔을 덮는 뱀브레이스나 정강이받이는 사슬 갑옷과는 분리된, 아바르 무장의 영향을 크게 받는 철제 스플린트 아머일 가능성이 높다. 혹자들이 재미있을만한 점을 들려주자면, Men-at-arms에 묘사된 이 철제 스플린트 아머는 고구려의 개마무사의 그것과 유사하다! 만세! 위대한 고구려의 문명은 프랑크까지 퍼져 있었슴미다!!--같은 소리는 캐구라고, 애초에 아바르는 유연과 관계있다. 유연은 북중국하고 떡 붙어 한 때 북조, 남조, 고구려와 함께 동북아 4강을 형성했던 강력한 유목국가다. 당연히 중국이나 한반도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영향력을 주고 받은거지. 위에서 말했잖아. 당시 프랑크 왕국은 여러 나라랑 영향력을 주고 받았고 이런 식으로 중국식 갑옷 형태가 유럽에도 나타나는 거지. 사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직접적인 영향은 비잔티움이나 하자르인에게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겔겔겔. 문제는 여기부터인데, 이렇게 무장하면 총합 44솔리디를 필요로 했다. 당시 소 한 마리가 1~3솔리디였고, 짐말이 3솔리디였으니 정말 기사 하나 완전무장 시키려면 소가 2,30마리는 필요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위 기록이 과장이라 할지라도 당시 서유럽 기사의 중무장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위에서 보듯 상당수 기병들은 상반신만 덮는 비르니를 착용했으리라 추정 가능하다.
(8-9세기 프랑크 기병의 무장. 패턴 웰디드로 제작한 검, 원형방패, 철제 스플린트 팔보호대, 좀 더 길어진 사슬갑옷이 확인 가능하다)
활은 로마식 만곡궁에서 단순 직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보병의 비중이 감소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듯 보인다. 이외에 슬링도 보병들이 자주 쓰는 무기였다. 서구 기사들이 등자를 제대로 사용하는 시기는 9C에 점진적으로 이뤄지는데, 이는 마자르인과의 교류와 관계있다. 삽화로는 놀랍게도 기마 궁수도 발견되는데-아바르나 마자르 계일지는 확실지는 않다-, 설사 존재했더라도 마자르 궁기병처럼 비잔티움-이란식 궁기병일 확률이 높다.
(궁기병의 모습. 등자도 확인 가능하다. 진짜 프랑크인 부대인지, 용병인지, 아니면 적군인지는 불확실)
얘네들하고 아시아식 궁기병하고 차이가 뭐냐고? 비잔티움이나 이란의 궁기병은 활을 쏠 때 말을 멈추거나, 아니면 조금 속도를 늦춰가면서 활의 위력과 정확도에 좀 더 노림수를 거는 편이고, 투르크계 궁기병은 말을 전력으로 달리게 하면서 기동력을 통해 이리저리 뛰어가며 화살을 날려 적을 괴롭히는 것을 선호한다. 무장도 비잔티움이나 페르시아 궁기병은 철제나 가죽제 흉갑을 입고 여차하면 백병전에 뛰어들 수 있고, 투르크계는 갑옷을 벳기고 기동력에 목숨 거는 궁기병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는 전장이나 전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궁기병 본연의 형태라면 투르크쪽이 우리가 생각하는 유목민 궁기병과 유사하다. 그러나 궁기병은 몰라도, 유럽 기사들은 마자르인에게서 앞쪽이 불룩 튀어나온 안장을 도입할 수 있었다.
(아바르인 부대. 중국 및 중앙아시아 유목민 기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마갑의 사용 여부는 아무래도 불투명하지만, 쓰지 않았다는 쪽의 의견이 많다. 대충 그 증거로 보이는 ‘회색의 말’은 철제 갑주를 입힌게 아니라 말 그대로 회색말이라는 의견이 많다. 퍼레이드에서 실크로 만든 마의를 입혔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 비싼 센티널 러너...아니 비단을 말 보호용으로 썼을 리는 만무하다. 만약 당시 서구 기병이 마갑을 썼다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카롤링거의 기사들이 아니라 브르타뉴 기병일 확률이 높다. 브르타뉴 기병은 옛 로마 스타일대로, 갑옷은 그다지 걸치지 않고 여러 자루의 투창을 들고 적진을 향해 스커미쉬 작전을 행하기를 즐겨하는 기병들이었다.
전략적으로 샤를마뉴 시대까지 프랑크 왕국은 팽창주의적 정책과 그에 비롯된 전략을 좋아했다. 당연히 유지비용 문제와 약탈, 그리고 나라의 힘을 밖으로 떨치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샤를마뉴는 대륙의 색슨족, 덴마크인, 아바르, 롬바르드, 브르타뉴, 스페인까지 원정을 펼쳤다. 대개는 당연히 약탈이 뒤따랐지만 2~3개월 정도의 단기 원정이 대부분이었고, 겨울은 기피 대상이었다. 식량 문제도 그렇고, 여차하면 특히 동물들이 돌림병이 돌아 픽픽 쓰러지면 약탈한 물건이나 식량 운반, 그리고 가축의 비용도 대기 뻑뻑해졌다. 샤를마뉴는 야간 행군을 즐겨했지만, 당시 프랑크인들에게 밤은 두려운 시간이었다. 전장까지 행군해 가는 동안에도 프랑크인은 규율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지만, 밤에 알콜에 취해 뒤따라 다니는 상인에게 갑옷이나 방패를 팔아버리는 인간이라거나, 더 나쁘게도 주먹다짐을 일으켜 진영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기숙사에서 이러면 퇴사라도 시키면 되지만, 군대에서 이 꼴 되면 수뇌부들 머리 아픈 건 더더욱 장난이 아닐 것이다. 보통 하루에 기병이 행군하는 거리는 3~40km 정도고, 24시간에 걸쳐 100km를 행군한 사례도 있지만 이 상태로 전투했다간 자빠져 뒤지기 딱 좋을 것이다.
전술적으로 프랑크 기병들은 랜스 차징을 선호했다. 그러나 차징이 만능은 아니다. 782년 색슨족과의 전투에서, 프랑크 기병들은 색슨족의 방패벽에 차지를 감행했다가 뼈아픈 실패를 맛보았다. 색슨족은 대열을 허물어트리지 않았고, 돌격한지 얼마 안 되어 프랑크 기병은 포위되어 거의 대부분이 전사했다. 이런 경우, 프랑크 기병들은 대개 말에서 내려 전투했다. 그리고 8-9C 들어 프랑크인들은 비잔티움, 이베리아의 아랍인, 마자르인, 브르타뉴인의 군사전술을 도입했다. 842년 웜스에서 펼쳐진 모의 전투에서 프랑크 기병 연대는 다양한 전술 훈련을 행하도록 훈련받았고, 잘 훈련된 1급 기병들은 비잔티움 기병 전술처럼 측면, 후위 공격에 대해 능숙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듯 보인다. 이런게 말은 쉽지만, 그게 쉽지 않다.
(물론 파이크만큼은 아니지만, 당시의 보병 쉴드월로도 기병 차징은 저지될 수 있었다)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베르네유 전투에서, 프랑스-이탈리아 기병은 잉글랜드 장궁병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러나 이들은 패잔병을 쫓아 석양을 바라보며 달려버렸고, 그 틈을 타 잉글랜드 중앙군 본대는 측면이 노출됬음에도 불구하고 용맹히 전진하여 프랑스군 중앙을 캐발라버렸다. 결국 전투는 프랑스의 참패로 끝났다. 적 측면을 적절한 시간에 타격하려면, 일단 눈앞에서 달아나는 전공 및 전리품 덩어리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언제 재집결해 우리편에게 다시 이빨을 들이밀줄 모르니 적절한 시점까지 이들을 추격해 쉽게 재집결하지 못하도록 묵사발을 내줘야 한다. 설령 장군이 그 시점을 잘 잡아서 아무리 돌아오라고 요청해도 그대로 무시하고 달려버리는 놈들도 있고, 그 혼란 와중에서 아군을 따라잡아 명령을 전달하는 일도 쉽지 않다. 유명한 칸나이 전투(BC 216)에서 한니발의 기병이 겨우 적을 3번 쫓아내고 그 때마다 방향을 돌려 로마군 측면을 타격한 별것 아닌거 같은 것에 대해서도 ‘역시 한니발은 명장이다’라고 평가 받는 것을 보면 전투라는게 쉽지 않다는게 대충 짐작이 가지 않는가?
물론 이럼에도 특히 동프랑크 기병들은 비잔티움이나 마자르인에 비해 규율이나 전술 운영력은 떨어졌다. 동프랑크 국왕 헨리는 기동력에서 훨씬 앞서는 마자르인과 싸우기 위해 마자르인의 기병 전술을 도입하면서 강력한 규율과 팀플레이를 강조했고,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특히 동프랑크인은 소수 정예의 완전소중 중무장한 부대인 acies(전열 line of battle)를 운영했고, 한방 싸움에서 이들을 통해 마자르인의 전열을 부숴버리길 기대했다. 이탈리아는 한방 싸움보단 보다 효과적이고 노련한 방식으로 마자르인의 침입을 극복했다. 이들은 비잔티움의 기병들이 이슬람 경기병을 잡는 것과 유사하게, 이들이 약탈물을 가득 싣고 돌아가는 길-즉 기동성이 떨어졌을 때-에 기습을 걸거나, 혹은 역으로 계략에 능한 마자르 경기병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낚은 뒤, 중기병 및 보병과의 근접전으로 끌어들여 격파하는 방식을 자주 썼다.
(마자르인과 싸우는 동프랑크 국왕 헨리와 기병대)
물론 기사들도 랜스 차징은 자주 썼고, 효과를 본 일도 많다. 일례로 바이킹들을 상대로 할 때, 프랑크인들은 화살을 날려 바이킹의 방패벽에 타격을 준 뒤, 보병들이 전진해 교전하고, 마지막으로 적이 흔들리자 기병 차징을 걸어 바이킹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이 때 대다수의 기병은(보병 1만명, 기병 6천명이 있었다고 한다) 전장까지는 말을 타고 가고 싸울 때는 말에서 내렸던 듯싶다. 그럼에도 일부의 잘 무장한 기병은 가장 결정적인 전력으로서 최후의 일격을 날릴 강력한 이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프랑크군은 비잔티움과 유사한 중앙이 후퇴하고 양익이 돌출된 대열(refused center)로 적의 측면을 강타해 승리를 거둔 사례도 있다. 인공적으로 기병이 활동하기 어렵게 만드는 방식도 쓰였는데, 브르타뉴인들은 땅바닥에 구덩이를 마구 파서 프랑크 기병들을 낚았다. 프랑크 기병들은 좋다고 달려오다가 말다리가 푹 꺼지는 불안한 느낌을 받더니 이후 브르타뉴 인들의 역습에 큰 피해를 입었고 지휘관인 풀크 백작도 말에서 떨어졌다가 간신히 갑옷 덕분에 살아났다. 물론 전투는 이후 풀크 백작이 군대를 재정비해 이긴 줄 알고 있던 브르타뉴 인들에게 공격을 가해 쫓아내면서 프랑크인에게 승리를 거뒀다.
(말에서 내린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크 군대. 십자창과 원형 방패에 주목하시라)
이상을 통해 기사의 시대의 서막을 연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기병에 대해 간략히 짚어 보았다. 이들은 규율이나 전술 운영에서는 그들의 많은 적 기병들에 비해 뒤떨어졌을지도 몰라도, 누구보다도 용맹스럽고 강건한 전사들이었다. 프랑크 기사들이 말에서 내렸을 때 대열은 탁티카에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 묘사된 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바로 이
모습이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기사들의 모습, 그 원형이 될 테니까.
“만약 그들의 기병 전술이 압박 받고 지장이 생긴다면, 그들은 말에서 내려 하나의 단단한 대열을 형성한다. 그들은 수가 적더라도 압도적인 기병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결코 전투에서 달아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강력한 보병들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북방에서 내려온 난폭하지만 용맹스러운 바다의 전사들을 다음 장에서 짚어보도록 하자.
첫댓글 토탈워 카페의 게이볼그님 글이 아니던가?
맞습니다.
ㅇㅅㅇ... 읽느라 진이다빠진..헉헉헉...
중세'에' 시작? 중세 '의' 시작 이라고 해야되는거 아님?
전 고칠 생각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