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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패커, 「청교도 사상(Among God's Giants)」, CLC, 2001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 나무(둘레가 18미터, 키가 108미터, 수백년 천년 이상)는 나로 하여금 영국의 청교도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우리 시대에 새롭게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한 또 하나의 거인족이다. 1550년에서 1700년 사이에 그들은 꿋꿋한 삶을 살았다. 위대한 청교도들의 성숙된 경건함과 연단된 꿋꿋함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영적 능력을 능가하는 하나의 횃불로 우리 앞에 비취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지나간 세대의 풍요가 우리 모두를 난쟁이와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 상황에서 청교도 거인들의 교훈과 모범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우리에게 청교도가 필요한 이유
1. 성숙한 그리스도인
청교도들은 원칙적인 사람들이고 헌신적이고 단호하고 훈련적인 사람들이며, 가정의 미덕에 있어 특히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나 어떤 중요한 일을 말할 때 말씀에 의존하였다.
청교도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그들의 성숙때문이다. 성숙은 지혜와 선의와 쾌활과 창조성의 복합이다. 우리는 영적 난장이라면 그들은 거인들이다. 그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영혼들이었다. 맑은 머리의 열정과 따뜻한 가슴의 동정이 결합되어 있었다.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며 조직적인 그들은 위대한 신자들이었고, 위대한 소망자들이었고, 위대한 행위자들이었고, 위대한 고난자들이었다. 영국에서는 권력자들에게서 고난을 당했고, 뉴잉글랜드에서는 자연으로부터 고난을 당했다. 그 고난이 그들의 성숙을 이루었다.
우리의 풍요와 안일과 사치는 성숙을 이루지 못한다. 이 영적 전투가 전형적인 청교도를 만들었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대장이며, 그의 무기는 기도와 눈물이었다. 십자가는 그의 군기이며, 그의 문장은 “고난받는 자가 승리한다”였다.
청교도들은 대개 모든 공적 전투에서 졌다. 영국에서는 영국교회를 원하는 만큼 변화시키지 못했고, 소수파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대서양을 건너가서는 뉴잉글랜드에 새 예루살렘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처음 50년 동안 청교도의 작은 이민들은 겨우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속적인 압박과 좌절들 아래에서 청교도들이 계속 즐겁고, 평화롭고, 인내하고 소망에 차 있음으로 쟁취한 도덕적 승리와 영적 승리는 히브리서 11장의 제 일석을 차지한 신자들의 명예와 자리 중의 높은 영광의 자리를 그들에게 주었다.
휘트필드는 말했다. “시련 아래 있을 때 성직자들은 가장 훌륭하게 저술하고 설교한다. 그리스도와 영광의 왕이 그 때에 그들에게 거하시는 것이다. 청교도들을 그처럼 찬란하게 비추이는 빛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이유였던 것이다. 1662년의 검은 바돌로매 법령에 의해 쫓김을 당하여 헛간과 밭과 도로와 울타리에서도 설교할 수 없는 자리로 내몰림을 당하였으나, 그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권위있는 사람들처럼 저술하고 설교했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저술로 말했다. 바로 이때에 독특한 감동을 주는 열정이 그들을 따랐다”
그들의 감동을 주는 열정은 계속되고 있고, 그 권위도 계속 느껴지며, 성숙한 지혜는 여전히 놀라움을 주고 있다. 이 문헌의 역사를 통해 청교도들은 그들이 알고 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성숙으로 나아가도록 오늘날의 우리를 도울 수 있다.
2. 일상생활의 통합
1) 그들의 일상 생활의 통합에 우리를 위한 교훈이 있다. 그들은 사람을 전체로 보았기 때문에 묵상을 행동과 통합하였고, 예배를 일과 통합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자기사랑과 통합하였고, 개인의 정체성을 사회의 정체성과 통합하였고, 넓은 범위의 관계적인 책임들을 철저하게 양심적이고 주도면밀한 방법으로 관계적 책임들과 통합하였다.
2) 그들의 영적 경험의 특성에 우리를 위한 교훈이 있다. 청교도의 하나님과의 교제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고 성경이 가장 중요했다. 성경 진리의 전체 범위를 스스로에게 적용시키기 위해 광범위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묵상을 했다. 묵상 가운데 자기 심령을 탐색하고 도전하고,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감정을 분발시키고, 하나님의 약속들로 자신을 격려하고자 했다. 이 이성적이고 단호하고 열정적인 경건은 강박됨이 없이 신중하였고, 율법주의에 빠짐이 없이 율법 지향적이었고, 수치스러운 방종의 경향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표현하였다. 성경은 변할 수 없는 거룩한 법칙이었다. 그들은 타락한 인간 심령의 부정직성과 기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변치 않는 마음가짐으로 겸손과 자기 불신을 교화하였고 영적으로 보이지 않는 흠들과 숨어있는 마음 속의 악들을 찾기 위하여 정규적으로 자신을 검사했다. 그러면서도 병적으로 되지 않았고, 성경에 의한 자기성찰이었다.
3) 효과적인 활동에 대한 그들의 열정에 우리를 위한 교훈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타인들에게 맡기는 게으르고 수동적인 사람의 나태가 없었다. 그들은 조금도 자기 자신에게 의지함이 없이 개혁 운동에 참여하는 순수한 개혁 정신을 소유한 행동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자신들이 행한 일에 있어 옳다고 생각되는 일은 무엇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일꾼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갖고 있는 능력들을 사용하시되 자신들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시기를 열심히 기도하는 은사의 사람들이었다.
교회나 국가에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 모두는 죄에서 거룩함으로 변화가 요구되는 곳에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을 위해 효과적인 동인이 되기를 갈망했다. 크롬웰과 그의 군대는 전투에 앞서 길고 강력한 기도를 드렸고, 설교자들은 강단으로 감히 나아가기에 앞서 길고 강력한 기도를 드렸고, 평신도들은 모든 중요한 문제, 즉 결혼, 사업 거래, 중요한 구매 등 무엇이나를 처리하기에 앞서 길고 강력한 기도를 드렸다.
4) 가정의 안정을 위한 그들의 프로그램에 우리를 위한 교훈이 있다. 청교도의 결혼 윤리는 당장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배우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친구로 견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 배우자를 찾음으로 후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데로 나아갔다. 청교도의 자녀 양육 원리는 그들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로 자녀들을 훈련시키고, 자녀들의 육체와 영혼을 함께 돌보며, 근실하고 경건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성인의 삶을 위해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청교도의 가정생활 윤리는 질서와 예의와 가정 예배를 유지함이 기초가 되었다. 친절과 인내와 언행일치와 격려의 태도는 가정에서 필수의 덕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가정을 요새로 삼아 모든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정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는 가장 큰 칭송을 받을 만하다. 청교도들은 가정에서의 어려움과 실망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어려움과 실망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풀이 꺾이거나 마음이 상하지 않는 성숙의 모범을 보였다. 게리, “그는 자신의 가정을 교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자기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중생하도록 하기 위해 힘썼다.”
5) 청교도의 인간 가치 의식에 배워야 할 교훈들이 있다. 그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도덕적 문제들과 영원과 인간 영혼이 중대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다. 인간 개개인들에 대한 경이감을 그들은 예민하게 느꼈다. 죄는 아무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 중세기의 영향을 받아 비록 그들이 분명히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언제나 존경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친구로 만들어진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가치관은 강력하였는데, 특별히 인간의 아름답고 고귀한 거룩성에 대한 의식이 강했다.
6) 청교도의 교회 갱신에 대한 이상에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박스터의 <개혁된 목사>는 칼빈주의를 유세하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자와 교사와 교리 문답자와 직무의 귀감으로서 그 자신이 ‘부흥된’ ‘갱신된’ 사람이다. 개혁의 본질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풍부한 이해, 하나님을 향한 애정의 분발, 헌신에 대한 열심의 증가 그리고 자신의 소명과 개인적인 삶에 있어 확고한 기독교적 목적과, 더 많은 사랑과 기쁨이었다. 이와 조화하여 교회를 위한 이상은 곧 ‘개혁된’ 성직자를 통해 각 회중의 모든 것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선구자인 리차드 그린햄은 1570년에서 1590년까지 캠브리지 부근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자신의 양떼가 일터로 흩어지기 전에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월, 화, 수, 금요일에 새벽 설교를 했다. 주일에 두 번 설교를 했고, 매주일 저녁과 목요일 아침에 교구의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하였다. 그는 아침에는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병자들을 심방하거나, 또는 쟁기를 잡고 일하는 이웃들과 협의하기 위해 밭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너무 열렬했고 비상한 노력을 하였으므로 모든 그의 와이셔츠는 물에 흠뻑 담근 것같이 땀으로 젖곤 했다. 그는 강단에서 내려오자 마자 다시 올라갈 정도로 과로를 했다.
그는 보기 드문 목회 상담자였다. 그는 괴로워하는 양심들을 위로하고 안도하게 해주는 큰 경험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원근 도처에서 영적 고통과 유혹들로 번민하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이 신령한 의사의 명성은 널리 퍼져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부름을 받았다. 주님께서 그의 수고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뻐하셨으므로 그의 지식과 경험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위로의 회복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경건함과 통찰력과, 복음적인 메시지와 근면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회는 사실상 열매가 없었다. 그는 그의 후임자에게 ‘나는 한 가정 외에는 아무에게도 나의 목회로 이루어진 유익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린햄은 푸른 초장을 갖고 있었으나 양떼는 야위어 있었다.’
리차드 그린햄은 수많은 다음 세대의 목회자들을 훈련시켰다. 성직 수임 후보자들이 사실상 견습생으로 그의 집에서 생활하며 그와 함께 공부했다. 지역의 목회자들과 먼 곳으로부터의 방문자들이 항상 그와 점심식사를 했다. 이렇게 그린햄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봉사와 목회 사역에 많은 경건하고 학식있는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양성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요, 수단이었다.”고 홀란드는 말한다.
그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대학에 계속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캠브리지의 장로교 선동자들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했다. 그들의 방침은 “기초를 세우기 전에 지붕을 덮는 것과 같다.” “자신을 개혁할 줄도 모르는 자들이 교회를 개혁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떤 자들은 교회 기율에 바빠서 자신의 사적인 타락을 보지 못한다.“. 캠브리지에서의 그의 모든 영향력은 인격적인 신앙과 교회의 평화를 조장하고 죄와 교회의 분립을 막는 데 기울어졌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평화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나 심지어 자신이 공감하는 견해들까지도 유감으로 생각하고 반대하였다. 그가 요청한 모든 것은 자기 양심에 순종하고 자기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유였다. 그는 영적 암흑으로부터 지역을 인도해낼 청교도 목회자들의 새세대의 전형이었다
리차드 페어클로프는 1647년에서 1662년까지 한 촌락에서 목회했다. 그의 친구인 존 하우이가 그의 장례식 설교에서, ‘그에게는 항상 많은 성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병든 사람들을 심방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책임 안에 있는 모든 가정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개인적으로 그리고 따로따로 대화를 나눔으로 그들 영혼의 현재 상태를 알기 위해 노력하였고 게다가 또 교훈과 책망과 권고와 훈육과 격려 가운데 자신을 적절하게 그들에게 사용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힘들어하지 않고 즐겁게 그리고 철저하게 행했다. 그의 마음 전체는 자신의 일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해 동안 매일 그는 새벽 세 시에, 또는 더 일찍 일어나 다른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이것은 그가 진실로 기뻐하는 일이었다)’
이 생활 방식은 그린햄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였으나 이제 추수기가 이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리차드 박스터의 사역이다. 그는 1641년부터 1660년까지 키더민스터에서 사역하였다. 키더민스터는 성인 2천명 정도의 촌락인데 그들 대부분이 그의 목회에 의해 회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들을 “대부분 무지하고 교양없고 술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로-- 그들은 생명있는 진실한 설교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목회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내가 그곳에 처음에 왔을 때에는 한 거리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정은 한 가정이었으나 내가 그곳을 떠날 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가정은 여러 거리에 몇 가정밖에 안되었다. 내가 개인 면담과 그들을 교리문답하는 일을 시작했을 때 마을 전체에서 오기를 거절한 가족은 매우 적었다(박스터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지 않거나 표면상으로 경건한 삶에 대해 진지한 약속을 하지 않고 나와 헤어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 박스터가 말하는 바는 <개혁된 목사>(the Reformed Pastor, 참된 목자)에서 그가 묘사하고 추천하는 실행이며 또한 우리가 하우이에게서 들었고 페어클로프도 따랐던 실행으로, 곧 개인적인 영적 교제를 위해 조직적으로 가족들을 면담하는 것이다. 박스터는 한 주에 이틀을 할애하여 매일 7,8가정 비율로 이런 방법으로 가족들과 만나 매년 교구의 8백 가정들과 모두 관계를 가졌다. ‘나는 먼저 그들이 교리문답의 내용을 암송하는 것을 듣는다(그가 사용한 교리문답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었다)’. 그 다음에는 그 의미에 대해 구두시험을 보고, 마지막으로는 가능한 한 모든 마음을 끌 수 있는 이유와 열심을 가지고 책임있는 사랑과 실천을 그들에게 강권한다. 나는 한 가족에 약 한 시간을 사용했다. 그 실행의 가치에 대한 그의 간증은 강조적이다. ‘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흑암의 왕국을 분쇄하는 가장 바른 진로를 전혀 택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한 나의 모든 공적 설교보다 더 뚜렷한 성공의 표적들을 알고 있다.’ ‘진실한 경건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겸손한 정신과 태도의 소유자들이었다.’
이제 공백 기간이 지나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추수 때가 온 것이었다. 나의 마지막 논평은 이것이 바로 부흥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과거에 목회자들이 중요한 역할들과 거룩한 삶을 담당하며 영혼들의 유익을 목타게 구했고, 완전히 자신을 헌신하고 자신들의 시간과 힘과 재산을 바치며 고통이나 희생을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곳에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경건으로 돌아왔다.
청교도주의는 부흥운동이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휘필드는 1767년에 썼다. ‘지난 30여년 동안 나는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보다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이 부흥하면 할수록 더 많은 훌륭한 과거의 청교도 저술들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620년대에 앤트림에서 있었던 부흥만큼 극적인 사건은 청교도의 영국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에 열광적인 제임스 글랜디닝은 복음을 설교하는 법도 알지 못하고 율법을 설교하여 로버트 블래어와 그 밖의 사람들이 그를 대신하여 설교를 했는데 로버트 플래밍은 이 일을 ‘복음의 밝고 뜨거운 태양의 명멸’이라고 칭했다.
또한 청교도의 영국에는 1631년 월요일 커크 오 쇼츠에 있었던 일같이 압도적인 사건도 없었다. 그때에 수줍은 존 리빙스턴은 그 전에나 그 후에 두 번 다시 설교를 하지 않았는데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설교를 했고 그 설교 후에 500명이 그의 설교에 수반된 능력에 의해 회심을 했다거나 또는 자신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변화했다고 간증했다.
1620년대 언제쯤인가 유명한 존 로저스가 청중들에게 성경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질타했던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입장으로 말했다. “그래, 나는 너희에게 오랫동안 나의 성경을 맡겼다. 그런데 그 성경이 아무아무 집들에서 먼지와 거미줄에 완전히 덮혀 있다. 너희는 성경을 듣는 것에 관심이 없다. 너희가 내 성경을 그렇게 사용하느냐? 좋다. 너는 내 성경을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의자에서 성경을 집어들고 마치 그것을 그들에게서 가져가 버리는 것같이 보이게 했다. 그러나 곧 그는 역을 바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역할을 취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극히 진지하게 소리지르며 간청했다. “주여,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셔도 좋지만 당신의 성경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지 마소서, 우리 자녀를 죽이시고 우리 집을 불태우시고 우리 재산을 멸하소서. 그러나 우리에게서 당신의 성경만은 남겨두시고 당신의 성경은 가져가지 마소서.” 그 다음에 그는 다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역할을 취했다. “너희가 그렇게 말하느냐? 좋다. 잠시 동안만 너희를 시험해 보도록 하겠다. 자. 너희를 위한 성경이 여기 있다. 나는 너희가 어떻게 그것을 사용하는지 볼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더 말하고 더 실행하고 더욱 그에 따라 사는지 볼 것이다.
이 말은 그곳에 있었던 토마스 구드윈이 존 하우이에게 이야기해 준 것이다. 그는 교회에 가득한 사람들이 눈물에 젖었고 구드윈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며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는 밖으로 나갔을 때 말에 올라탈 힘이 없어 15분 동안 말 목에 매달려 있었다. 그처럼 비범한 영감이 그에게 임했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대체적으로 임하여 성경에 대한 태만을 고치도록 충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청교도의 부흥은 비교적 조용하고 질서적인 역사였던 것 같다. 예외가 있다면 부흥이 절정에 달했던 1640년대와 1650년동안 지나치게 끓어올랐던 광신을 들 수 있다.
다른 반 세기 이상에 걸쳐 캠브리지는 그린햄 형의 많은 영적 의원들을 만들어냈다. 최초의 그들의 양성소는 그리스도의 대학이었다. 로렌스 체덜턴은 캠브리지의 재학생 시절에 신교도가 되었고 1584년 임마누엘 대학의 초대 교장이 되기 전에 20년의 가장 좋은 기간 동안 캠브리지에서 특별 연구원으로 있었다. 채덜턴은 50년 동안 성 클레멘트 교회에서 한 주에 한 번 ‘강의’(설교)를 했다. 그리고 82세에 설교를 그만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40명의 성직자들에게서 설교를 그만두지 말기를 간청받으며 자신들이 그의 사역의 덕택으로 회심을 하였다고 증거하는 서신들을 받았다. 풀러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채덜턴은 언젠가 두 시간 동안 설교를 한 것에 대해 사과의 말을 하자 청중들이 “하나님을 위해 계속해 주십시오, 계속해 주십시오”라는 눈물의 외침을 들었다고 한다.
1574년부터 웨드스필드에서 목회를 한 ‘또 한 명의 그린햄’, 리차드 로저스와 윌리암 구쥐와 존 프레스턴의 선도자이며 아쉬비델라 주크에서 40년 동안 설교했던 아더 힐더샘도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었다. 재학생 시절에 회심하여 1584년 특별 연구원이 된 채덜턴의 제자 윌리암 퍼킨스도 그러했다. 퍼킨스가 1602년 사망했을 때 뒤를 이어 성 안드레 대교회에서 매주 강의했던 또 한 명의 그리스도의 사람 폴 베이네스는 리차드 십스를 설교로 회심하게 했고, 리차드 십스는 존 코턴을 설교로 회심시켰고, 존 코턴은 존 프레스턴을 설교로 회심시켰다. 굳윈이 1613년에 20세의 나이로 그리스도의 대학에 왔을 때 청교도로 칭해지는 여섯 명의 특별 연구원 교수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교장인 메인브릿지가 한 회개에 대한 설교는 곧 굳윈 자신을 회심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채덜턴, 로저스, 힐더샘, 퍼킨스, 구쥐, 베이네스, 십스, 코턴, 프레스턴 그리고 굳윈 모두는 ‘애정깊고 실제적인’ 목회자와 복음 전도자들 중에 모범적인 역할을 하는 지위를 얻었다. 이렇게 캠브리지 운동은 항상 영적 깊이를 유지하며 또한 숫적인 힘을 모으면서 진행되었다.
놀라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슬픈 사실은 이 존경할 만한 인물들에게서 본을 받은 젊은이들이 목회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몇몇 캠브리지 대학생이 1586년 의회에 낸 탄원은 이 문제에 있어 행동을 요구한다.
현재 우리 대학에는 이 땅의 대부분에 있어 해결되어야 하는 공통 과제인 무지한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위해 충분한 은사를 갖춘 유능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 중에 공정하고 동등한 조건으로 이 직무에 부름을 받는 자는 거의 없다. 무식한 목회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 쓰레기인 자들은 수천의 영혼들의 파멸과 하나님의 교회의 수치와 학문의 완전한 멸망을 오히려 좋아한다. 우리 자신이 책임을 맡는 어떤 수단들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성직 임명자들의 탐욕이 이처럼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성직 매매, 거짓 서약, 나아가 거의 명백한 동냥의 방법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따라서 일꾼이 크게 부족한 가운데 우리는 하루 종일 시장에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우리의 수고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우리 교회의 상태는 이처럼 탄식할 수 밖에 없다.
아무런 공적 행동이 취해지지 않았으나 이 젊은 청교도들에게 설교직을 주기 위해 많은 교구들에 강사직이 생겼다. 그리하여 엘리자베스, 제임스 그리고 찰스 시대에 영국 도처에 복음의 누룩이 퍼져나갔다.
두 세대에 걸친 청교도 서적들의 영향력은 그린햄의 드라이 드레이턴 목회와 박스터의 키더민스터 목회를 비교해 봄으로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린햄은 20년 동안 수고하였으나(1570-1590) 사실상 열매가 없었다. 박스터는 14년 동안(1641-1642,1647-1660) ‘그때까지 생명력있고 진지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사역하여 약 8백 가정과 2천여명의 건강한 성인들이 살고 있는 그 지방의 대부분에서 “나는 얼마나 가치없는 벌레와 같은 존재인가--나의 어린 시절의 존경하는 목회자들이 한 곳에서 50년 동안 수고하고도 자신들의 교구에서 한 두명의 회심자를 얻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풍성하게 나를 격려해 주시다니!”라는 의미심장한 고백을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경우에 있어 사용된 방법은 근본적으로 동일했다. 박스터도 강단에서나 개개인들과의 교제에서 ‘나 자신과 지역 주민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며’ 평생을 보냈다고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세대의 청교도 설교와 경건한 저술들에 발효된 박스터의 영국은 그린햄의 영국과는 다른 곳이었다. 묵은 땅이 파헤쳐져 수십 년 동안 충실하게 씨가 뿌려져서 이제 추수기가 이른 것이었다. 그린햄과 로저스와 같은 사람들을 목회로 인도했던 회심된 공동체라는 박스터의 목회 비전이 결국 그 성취를 보게 된 것이다.
공화국 시기 동안 영국의 많은 지역에 추수의 태양이 밝게 비추었으나 곧 폭풍의 구름이 다시 몰려와 ‘애정깊고 실제적인 영국 작가들’의 역사는 행복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어두운 그림자에 덮혀 끝이 난다. 1640년대에 정권을 잡은 청교도들은 개인적인 신앙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일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일치하지 못했다(이것이 크롬웰이 그 자신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던 바와는 반대로 마음 내키지 않는 독재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였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함에 일치하였으나 교회 종류에 있어서는 일치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괴한 행동들과 광신이 들어와 청교도의 계획을 망쳐 버렸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양심이 지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나 이제 평신도 지도자들은 성경을 인용하여 내적인 빛의 인도들을 확인했다. 목회자들은 영원의 빛 가운데 땅에서 사는 기술을 가르쳐 왔으나 이제 열심파들은 17세기에 영국에 이루어지는 천국을 보는 꿈을 꾸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선포하는 설교자의 직분을 높여 왔으나 이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영감을 받는 대로 자기 생각을 담대하고 무제한적으로 공공연하게 발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설교자들은 성령이 없는 학문은 성경의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고 설명해 왔으나 이제 교육을 통해 부적격자도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 교육을 받고 신학적으로 학문을 갖춘 청교도 목회자들이 이 경향들에 대해 반박하자 퀘이커교도들, 광적인 설교자들, 머글레토니안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자들은 청교도 목회자들이 성령을 소멸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스터는 이 모든 내용을 망라하고 있는 인쇄물들의 활동에 무엇인가 마귀적인 것이 있다고 보았다. 1653년에 “나는 최근 인쇄물의 방종하고 사치한 범람은 전에 사람들에게 읽혔던 분별력있고 경건하고 뛰어난 저술들을 매장시키고 압도해 버리려는 대적의 계획이라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고 하였다.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혼란과 불안이 만연하고 있었다. 청교도 부흥은 스스로의 힘을 소모하고 있었다. 크롬웰이 죽자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같이 보였다. 왕정과 영국 국교회의 복고는 필연적인 반동으로 1660년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목회자들에게 있어 이 결과는 재난이었다. 무시무시한 클래런던법이 그들을 몰아내고 억압하였다. 그들이 영국 국교회 밖에서 지속하던 사역은 불법이 되어 그들을 한꺼번에 감옥으로 밀어넣었다. 존 오웬, 토마스 굳윈, 존 하우이, 리차드 박스터, 스티븐 차녹과 같은 위대한 목회 신학자들은 이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많은 저술을 했고 번연의 훌륭한 우화들도 이 시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영국 교회에 전혀 동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들은 그들과, 또한 그들과 함께 하는 젊은 비국교주의자들에게 문을 잠그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의 동류를 효율적으로 재생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빛을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던 조직화된 비국교주의는 자유가 도래했으나(1689) 그들의 선구자였던 청교도 사상의 장성함에 이르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1705년 마지막 거인인 존 하우이가 죽었을 때 청교도 운동도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