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는 문자 정보 처리에 있어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기기입니다. 휴대폰 터치스크린 자판으로는 빠른 속도로 오래 작업하기 어렵고, 모든 사람이 사무실에서 음성인식으로 작업할 수는 없기에, 키보드는 여전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앞으로도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키보드는 매우 불편한 배열을 갖고 있습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윗글쇠(Shift)가 새끼 손가락 자리에 있고 자주 쓰는 기능키가 모두 멀리 떨어져 있으며, 스페이스 바는 비정상적으로 긴 모습입니다. 또 글쇠끼리의 어긋난 정도가 다르고, 오른손잡이에게는 마우스가 너무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어 텐키리스(숫자판이 없는) 키보드가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불편한 배열이 표준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알아봅니다.
이것은 처음 QWERTY 배열이 적용된 타자기입니다. 프로토타입인데, 글쇠 배치를 보시면 지금의 키보드와 어긋난 정도가 아주 비슷합니다. 1873년도의 타자기부터 이런 배열을 적용했었는데, 여기에는 기계적인 문제가 얽혀있습니다.
이 타자기는 글쇠가 어긋나지 않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글쇠를 활자대와 연결하는 쇠 막대기들을 잘 보시면, 서로 얽히지 않게 하려 막대기들이 휘어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휘는 것보다 직선으로 되어있는게 만들기가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마라톤 10TR 네벌식 타자기의 배열입니다. 지금 키보드와 다를 것이 많이 없는 배열입니다. 2·3열은 어긋난 정도가 크지 않지만 1열과 4열의 어긋남이 큰 것이 같고, 윗글쇠와 윗글 걸쇠(Shift Lock)의 위치도 동일합니다. 백스페이스 역할과 비슷한 키는 TAB 키 위에 있고, 지금은 TAB이 있는 위치에 마진 릴리스(Margin release; 설정한 영역을 넘겨서 치도록 해주는 기능)가 있습니다. 문자열의 배치 방식이 지금 키보드와 완전히 같습니다.
Adler 타자기와 달리 이렇게 계단형으로 설계한 타자기들은 활자대와 연결하는 막대기들을 휠 필요가 없습니다.
전신 타자기도 다를 게 없었습니다. 수직 일자 배열을 적용한 타자기도 있었지만, 결국 지금처럼 계단형 배열을 적용한 타자기가 대세가 되었고, 전신 타자기도 수동 타자기와의 호환성이 필요했기에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단형 배치가 시장을 잠식했고, 당연히 사람들은 이 배치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배치가 아주 오랜 시간 이어지다가, 전동/전자 타자기 및 컴퓨터의 시대를 맞습니다.
위의 사진/그림은 70·80년대를 풍미했던 컴퓨터 Apple II와 Commodore 64의 키보드 배열입니다. 전동 타자기와 컴퓨터의 자판은 수동 타자기의 설계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컴퓨터와 전동 타자기가 나올 때는 이미 사람들이 타자기의 계단형 배치에 너무 익숙해진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전동 타자기는 물론 컴퓨터 키보드까지 계단형 배치를 적용합니다. 컴퓨터는 사무 처리를 아주 효율적으로 해주었고, 게임도 할 수 있게 되며 점점 일반 대중에게 보급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MSX와 같은 컴퓨터들이 팔리기도 했다가, IBM이라는 회사에서 이른바 "PC"를 출시하게 됩니다.
이 키보드는 IBM PC의 키보드입니다. 1981년에 나온 것으로 보아 Model 5150 컴퓨터를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PC XT(Model 5160)는 1983년에 출시). IBM 5150/5160 때 나온 키보드의 배열을 보시면 지금과 유사한 점이 하나 눈에 띕니다. Alt, Ctrl, Caps lock, F1~F10, 그리고 오른쪽의 숫자판까지. IBM PC XT는 인텔의 8088 프로세서를 달고 나온 컴퓨터입니다. 8088은 8086을 조금 바꾼 물건입니다.
이 키보드는 IBM PC AT의 키보드입니다. PC AT는 인텔의 80286 프로세서를 사용하는 컴퓨터입니다. 국내에 이 컴퓨터의 호환 기종이 아주 많이 나왔습니다. 조립으로도 꽤 팔렸고, 대기업에서도 많이 내놓았죠. IBM 키보드의 배치가 지금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과 더 비슷해졌습니다. 숫자판이나 다른 부분이 여전히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Shift, Caps Lock, Tab, Backspace, Enter 키의 위치는 지금과 완전히 같습니다.
이제 지금의 키보드와 완전히 같은 키보드가 나오게 되고, 곧 이 키보드의 배치가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 키보드는 역시 AT 컴퓨터를 위한 키보드인데, 가격을 낮추기 위해 정전용량 좌굴 용수철이 아닌 멤브레인 좌굴 용수철을 적용했습니다. 지금 흔히 멤브레인 키보드라 하면 멤브레인 "러버돔" 키보드를 뜻하는데, 이 키보드는 러버돔이 아닌 좌굴 용수철로 멤브레인 시트를 누릅니다.
이 키보드는 엄청 유명하고 그 명성이 대단해 옛날 Model M을 만들 때와 똑같은 금형으로 Unicomp라는 회사 이름을 달고 생산하고 있을 정도로 끈질기게 팔리고 쓰이는 키보드입니다. 이름도 여전히 Model M 입니다. 101키는 위 사진의 키보드 배열을 말하고, 104키는 101키 배열에 윈도우 키와 메뉴 키를 추가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의 106키 배열은 101키 배열에 윈도우 키, 메뉴 키를 단 104키에 한/영, 한자 키를 덧붙인 것에 불과하니 이 키보드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아실 수 있습니다.
1995년 Windows 95가 출시되기 전까지는 매킨토시가 있기는 했으나, DOS와 DOS 기반 프로그램을 압도적으로 많이 썼기 때문에 마우스보다 키보드가 훨씬 중요했습니다. MDIR같은 프로그램 없이는 무조건 명령줄에 명령어를 쳐넣어서 파일을 찾고, 열고, 프로그램을 실행해야 했던 때입니다. 그래서 자주 쓰이는 프로그램들도 마우스 없이 작업을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명령줄의 사용이 아주 많았고 마우스 없이도 원활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숫자판과 방향키, 기능키들이 오른손에 있는게 오른손잡이에게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Windows 95와 같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대중화되며, 오른손잡이를 배려했던 키보드 배치는 마우스가 중요해진 지금, 원래 의도와는 달리 왼손잡이에게 유리한 배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Scroll Lock과 Pause/Break 키도 DOS 시절에는 꽤나 유용했던 키들입니다. Scroll Lock은 커서를 현재 위치에 고정하고 방향키로 마우스 휠을 돌리는 것처럼 페이지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Pause/Break는 이름대로 명령의 실행을 잠시 멈추는 키입니다. 명령줄에서, 예를 들면 dir 명령 따위를 실행했을 때 화면에 주르륵 나오는 것을 잠시 멈추고 확인하는 등 쓸모가 많은 키입니다. 두 키 모두 지금은 잘 쓰지 않습니다만, Scroll Lock은 액셀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여전히 사용하고 있고, Pause/Break는 디버깅을 멈추는 키나 게임에서 아직 사용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오른손잡이를 위해 텐키를 오른쪽에 넣었더니 마우스가 등장하면서 오히려 왼손잡이에게 유리해진 아이러니한 현실..
키보드 배열은 인체공학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역사적 관습에 따른 것이었어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네요.
인체공학보다 기계 구현의 편의를 더 따지다보니 배열이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나마 Adler 같이 ortholinear 배열이었다면 지금 MS나 로지텍에서 인체공학 자판같이 만들기만 해도 훌륭할탠데, 근본이 저러니 어쩔 수가 없네요. 키보드에 돈 투자할 생각이 그닥 없는 사람들에겐 왼손잡이용 키보드라고 팔리는 거나 텐키리스가 가장 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DS1TPT 인체공학 키보드가 몸에 참 좋긴 한데 그 비싼 가격 때문에 차마 추천은 못하겠더군요 빨리 표준이 바뀌어서 인체공학 키보드가 대량생산되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스태거 배열이 타자기 때문에 나왔다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정리된 글로 보니 직관적이네요 ^^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물건 중 하나가 컴퓨터일텐데 입력기는 타자기 시절 배열이 여태까지 쓰이고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하네요. 심지어 소프트웨어적으로 자유로운 핸드폰에서조차 쿼티 배열이 기본이고요. 요즘은 모아키나 딩굴같은 방식을 시도해보고 있는데 역시 익숙하지 않으니까 자꾸 쿼티로 돌아오게 되네요; 습관이란 참 무섭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습관은 무섭습니다. 휴대폰도 기본 입력기에서는 스태거 배열을 사용하고, 12키 자판이나 일자 배열을 쓰는게 현실이죠. 휴대폰은 공간이 좁으니 계단식 배치보단 일자로 깔끔하게 배치하는게 공간 효율면에서는 더 나아보이는데, 기본 입력기들은 죄다 계단식 배치를 따르는 마당이니... 우리는 계단형 배치라는 유서깊은 전통(?)에 너무 심하게 얽매인 것 같습니다.
모아키 저도 예전에 써보려고 했었는데 이리저리 밀어가며 입력하는게 버거워서 지금은 원래 자판으로 돌아왔습니다. 휴대폰에서는 3-90을 쓰고 있었는데, 지금 쓰는 자판과 헷갈려서 두벌식 표준(양손), 천지인(한 손)으로 돌리고 영문만 드보락을 쓰는 정도입니다. OpenWnn 없었으면 큰일날 뻔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