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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로 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
"Grande Odalisque '보들레르'가 극찬한 그랑 오달리스크"
- 엄청나게 관능적인 기쁨 -
앵그르가 34살에 그린 "Grande Odalisque 그랑오달리스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Jean Auguste Domonique Ingres, 1780~1867)
앵그르가 34살에 그린 "Grande Odalisque 그랑오달리스크"
앵그로가 채택한 밝고 차갑고도 푸르른 새로운 느낌을 표현할 수 있게 한 '코발트 블루' 색감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색 중에 하나이며 이 훌륭한 안료의 발견은 부유함과 신비로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코발트(Cobalt)는 기호 Co, 원자 번호는 27번인 화학 원소로써 코발트는 1735년 스웨덴의 화학자 게오르크 브란트에 의해 발견됐다.
중세 독일의 작센 지역에서 은 생산을 하는 광부들이 은 광석과 비슷하게 생긴 광석을 캐고 제련했는데 은은 얻어지지 않았다. 대신 유독한 증기인 코발트와 같이 포함되어 있던 비소(As)에서 나오는 AsO3로 인해 병이 들게 되었고, 은을 숨기고 쓸모없는 해로운 돌덩어리를 남겨놓은 도깨비 짓이라고 미신처럼 믿기도 했다. 그래서 코발트라는 이름은 '악령', '도깨비'를 의미하는 독일어 'Kobold'에서 유래했다.
19세기 초 전통적으로 선호되었던 푸른색 안료 울트라마린(Ultramarine)은 매우 아름다웠지만 무척 비쌌고 이로 인해 예술가들은 블루 색상 표현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작품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의 매장'에서 오른쪽 하단에 성모 마리아를 그리려는 자리를 비워둔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성모 마리아의 푸른색 옷을 표현할 울트라마린 안료를 구하지 못해서라고 추정될 정도로 울트라마린 푸른 안료는 비싸고 귀한 안료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새로운 푸른색의 개발이 필요했고 프랑스 내무장관은 저명한 화학자 루이자크 테나르에게 울트라마린을 대체할 합성 안료를 의뢰했다. 이에 테나르는 코발트 염으로 만든 도자기의 푸른 글레이즈에 영감을 받아 염화 코발트와 알루미늄을 혼합하는 실험으로 매우 아름다운 푸른색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탄생한 코발트 블루 색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회화에서 르누아르, 모네, 세잔 등 화가들에게 특히 사랑받았고 밝은 색상과 창의성이 부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르누아르, 모네, 세잔 등 화가들에게 특히 사랑받은 코발트블루색을 앵그루는 그의 신비로운 그랑 오달리스크의 배경색으로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고전주의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의
문하로 들어가 회화를 배우고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1824년 파리로 돌아올 때까지 고전주의 회화와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화풍을 연구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던 앵그로에게서 급진적이고 창조적인 이 색을 쓰는데 한치 망설임이 없다. "Grande Odalisque 그랑오달리스크"에 등장하는 여인이 마치 술탄에게 자신의 멋을 송두리째 드러내듯이 그녀는 동작하나 의상을 대신하는 터번과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섬세함이 묻어난다. 심지어 고풍스러운 연무기에서 은은히 아로마 향기 풍겨나는 내실의 분위기를 마치 그녀의 눈동자가 담아내고 있다.
그는 19세기 자크 루이 다비드의 뒤를 이어 정확한 관찰, 완벽한 데생, 우아한 곡선을 강조한 화풍으로 프랑스의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다. 1780년 여름 프랑스 몽토방(Momtanban)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이 되던 1797년 에는 파리로 나와 고전주의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의 문하로 들어가 회화를 배웠다. 1806년에는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1824년 파리로 돌아올 때까지 고전주의 회화와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화풍을 연구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파리로 돌아온 이후에는 고전주의의 전통을 잇는 화가로서 이름을 떨쳤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34년에는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 담당자로 파견되었다. 처음에 이탈리아로 갔다가 귀국한 1824년 이후, 그가 공개한 작품들은 프랑스 미술계에서 크게 환영받았고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가장 대표적인 고전주의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를 중심으로 고전파 세력들은 같은 시대에 들아크루아가 이끄는 신흥 낭만주의 운동과 경쟁하며 발전을 이루었다. 앵그로의 작품은 초상화 역사화 특히 그리스 조각을 연상케하는 우아한 여성의 누드화에서 강점을 드러낸다. 19세기 고전주의 불멸의 명작으로 꼽히는 많은 명작의 산실이 되었다. 앵그르가 남긴 작품 중 <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터키 목욕탕> 등이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후대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드가, 르부아르, 피카소에 이르기 까지 영향을 끼쳤다.
앵그르는 작품을 통해 고상한 정취와 숭고한 정신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화가다. 그의 붓끝을 통해 탄생하는 여인들은 도자기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피부와 매력이 넘치는 우아한 자태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순식간에 잡아끈다. 앵그르의 작품 속 여인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그랑드 오달리스크>로 여기에는 유연하고 아름다운 뒤태를 자랑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공개 당시에 많은 평론가들에게 문제작이라고 비난 받았다. 오달리스트는 오스만 제국이 술탄의 시중을 들며 성적인 욕구를 담당했던 하렘(Harem)의 여인들을 지칭한다.
앵그르가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그릴 당시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의 상류층에서는 오리엔탈 문화를 무척 신비롭게 여기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오리엔탈 문화의 중심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 대한 관심은 더 말할 나위없이 높았다. 프랑스 인들은 특히 그 나라의 궁궐 문화, 특히 궁궐 깊숙이 위치란 금남의 영역인 하렘에 대해 신비로움을 느끼며 강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하렘은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성의 낙원'이라는 편견이 상식처럼 자리 잡았고, 그와 동시에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가 급격히 형성되었다. 이렇나 세태를 반영하듯 이 무렵에는 동양의 신비를 소재로 하는 작품을 그리는 화가들이 속속 등장했다. 앵그르 역시 이 무렵 후원자들이 취향에 맞춰 오스만 제국 궁정의 하렘을 엿보는 것 같은 그림들을 그렸다. 앵그르는 수차례에 걸쳐 오스만 제국의 오달리스크를 소재로 한 그림을 자주 그렸는데, 그림 속 그녀들은 하나같이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들과는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꼽을 수 있으며, 그외에도 <발팽소의 목욕하는 여인>, <터키 목욕탕> 등이 유명하다.
1823년 프랑스이 황제 나폴레오 보나파르트의 누이이자 나폴리의 여왕이었던 카롤린 뮈라(Caroline Murat)가 앵그르에게 오스만 제국의 궁전을 배경으로 하는 오리엔탈 풍의 그림을 한 폭 그려줄 것을 의뢰했다. 그 이듬해 앵그르는 로마에 머물면서 이 작품을 완성했으나 프랑스 내부의 정치적 혼란탓에 의뢰인에게 전달할 방법이없었다. 그림 속 여인은 황금색 태슬(Tasel)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민 이슬람식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으며 값비싼 장신구도 걸고 있다. 그녀는 쿠션에 기대어 S자 형태로 부드럽게 휜 뒷모습을 보이며 침상 위에 누어 있는데, 한 손에은 공작새 꼬리 깃털로 만든 부채를 가법게 쥐고 고개만 살짝 돌려 무심한 표정으로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쿠션이나 커튼 등 배경에는 터키를 연상케 하는 코발트 블루 색채를 많이 사용했다.
터키 목욕탕 (이미지 출처. 구글)
앵그르는 1819년 열린 살롱전에 이 그림을 출품했으나 평론가와 심사위원들은 그에게 인체 비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상식조차도 모른 화가라는 강도 높은 비난을 퍼부었다. 사실적 묘사를 중시해서 화가가 해부학적 지식까지 갖추어야 했던 당시의 예술 환경을 생가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은 아니다. 실제로 이 그림 속 여인의 얼굴과 목의 연결은 매끄럽지 못하며 양 어깨의 기울기가 부자연스럽고, 허리에서 엉덩이까지 지나치게 길며, 유방의 위치와 꼬아 올린 다리의 위치에서 나타나는 어색함 등 앵그르는 이 그림에서 비현실적인 인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실력과 지식이 모자라서 그랬으리라고는 할 수 없다. 당시 살롱전의 심사위원 및 평론가들 대다수는 아직 아카데미 미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색다른 실험적 화풍을 배척하는 경직된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해부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앵그르의 작품 속 여인에 대해 신체적 결함이 있다며 조롱거리로 삼았다. 그중에는 앵그르가 그린 오달리스크의 척추를 해부학적으로 분석해보면, 그녀의 척추 뼈는 일반인에 비해 적어도 새 마디는 더 많다는 등의 학문적 지식에 근거한 비판도 있었다. 그 밖에도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카데미 미술이 고수해온 고전주의 전통을 타파하는 파격적인 시도가 엿보인다. 앵그르의 역사화 작품 대부분이 아카데미 미술의 정통서을 잇는 화풍을 보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당시 유렵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정서가 가장 잘 나타나는 코발트 블루 색상을 많이 사용한 점과, 자신들과는 다른 황색 피부색이 주는 이질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앵그르가 이 작품에서 인체를 길게 표현한 방식은 아마도 르네상스 시대의 매너리즘 회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가 이 작품에서 추구한 것은 여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화된 미의식을 투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과장과 변형을 통해 당시로써는 생소한 도전을 감행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앵그르의 미적 기준을 당시 각광받던 고전주의 회화와는 달리 르네 상스 시대에 더 가깝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앵그르가 여인의 목과 허리를 가늘고 길게 그려서 부드럽고 섬세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화가였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였다. 이러한 면에서 앵그르는 고전주의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고전주의의 선구적 화가로 손꼽힌다.
Grande Odalisque, Une Odalisque, La Grande Odalisque 모두 다 같은 작품을 말한다. 1814년 미친사람 앵그르가 완성한 유화로 오달리스크를 그렸다.
앵그르는 이 작품을 로마에서 작업하고 1819년에 파리에서 발표했으나, 당시에 이 그림은 지나치게 탐미적이었기 때문에 처음 발표했을때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 그림을 앵그르가 신고전주의 시대를 마치고 낭만주의로 집중하게 된 큰 계기가 된 그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ODALISQUE
오달리스크라고 함은,
터키 오스만제국에서 술탄의 시종을 들던 여자 혹은 정부를 뜻한다. 어원학적으로 궁녀, 방을 의미하는 터키어를 프랑스풍으로 재해석한 것이 오달리스크인 것이다. 오달리크라고도 한다. 다른 서양권 국가에서는 court ladies 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당시 터키에서는 남자들이 장인 장모와 같은 결혼으로 인해 신경쓰일 관계가 생길리 없는 여자 노예를 사서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것을 선호하는 관습 또한 있었다. 오달리스크는 또한 비록 시종을 들러 들어왔지만 정부가 될 만약을 경우를 대비(?)하여 춤과 노래 등을 연습했다. 은혜를 입지 않으면 또 그는 그대로 술탄이 아닌 술탄 어머니의 시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