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사회 심장 꿰뚫은 ‘불꽃 인생 ’ / 양반들 떨게 한 강경지도자
한말의 유학자 매천 황현은 이렇게 쓰고 있다."도둑들이 처음 고부에서 봉기할 적에 그 괴수는 태인 사람이 많았기때문에 전라 좌우도에서 태인접이 으뜸이었다. .전봉준과 김기범은 나이가 40쯤되었다. 기범의 일가붙이는 대대로 태인에 살았는데 사람들이도강 김씨라고 불렀다. 김시풍도 그 중의 하나이다. 기범은 사납고무단스러워 난을 일으킬 적에 여러 일가붙이가 모두 따랐기 때문에 도강김씨에 24접주가 있었다."(<오하기문>)<>어린시절 "돼지서리"김개남의 근거지인 태인이 가장 농민군이 치열하게 일어났고 또 그 중에서도 도강 김씨들이 많았는데 이것이 모두 김개남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 이렇게 쓰고 있다. "김기범은 스스로 말하기를 꿈에 신인이 개남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름을 "개남"으로고쳤다고 하였다. 태인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 재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한 집에서 말 네댓 마리를 길렀으며 총통을 가장 적게 가진 집이 10여개였다." 김개남이 "남조선을 개벽한다"는 뜻의 이름으로 바꾼내력과 그의 근거지에 많은 말과 무기를 지니고 있음을 쓰고 있다.
이처럼 김개남은 봉건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열혈에 찬 행동을 보였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타협을 모르고 후퇴가 없는 강경파로 꼽히고 있다.
김개남은 태인 땅 산외면 지금실에서 부잣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들처럼 그도 어릴 적에 서당에 다녔는데 어쩐 일인지 병서 읽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소년들과 어울려 곧잘 장난질을 쳐 말썽꾸러기로 소문이 났다고 전해진다.
예전 어린이들은 곧잘 참외 서리, 닭서리같은 놀이 아닌 놀이를 벌인다. 그런데 영주(개남의 어릴 적 이름)는 통크게도 돼지 서리를 했다는 것이다. 돼지는 한집의 살림 밑천이 되는데 돼지를 훔쳐 잡아먹었다면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었으니 부모의 애간장을 무척 태웠을 것이다.
그는 자라서 상두재를 넘어 전주로 넘나 들었고 이때 일가 붙이인 전주 명장 김시풍과 교분이 두터웠다 한다. 그리고 그가 이때 쯤 사귀던 사람들은 시세에 불평 불만을 가진 사람, 기개가 있고 호걸스러운 사람, 그리고 양반이나 벼슬아치보다 고통에 신음하는 서민들이었다 한다.
이런 그였으니 동학에 입도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적어도 전봉준 보다 먼저 동학에 들었고도강 김씨의 자제들을 여기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1890년초 최시형은 전라도 일대를 자주 순행하며 포덕에 열중했다. 1891년 최시형은 부안을 거쳐 태인 땅에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실 김개남의 집에 찾아갔고이때 김개남은 여름옷 다섯 벌을 지어 올렸다 한다.
그 뒤 김개남은 각종 집회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그럴 적마다 강경파로 부상했다.이런 탓으로 1894년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본격적 봉기가 전개되자,대장 전봉준 다음의 총관령이 되었던 것이다.
전주에서 농민군이 퇴각할 적에 그는 전봉준. 손화중과 길을 달리했다. 그는 전라 좌도 곧 지리산 언저리로 진출했다. 그의 지휘권 아래 든 지역은 남원을 중심으로 임실 장수 무주 등지였다.
<>공포의 천민부대
그가 남원에 웅거하고호령할 적엔 천민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노비, 백정,승려, 장인, 재인을 중심으로 한 천민 부대였던 것이다. 그들은 온갖 차별의 굴레를 벗기기 위해 아니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한번 활개를 친 것이리라.
집강소 시기 갑오개혁에 의해 이들은 일단 제도로는 신분해방을 얻었다. 그러나 양반이나 상전들은 이런 제도를 인정치 않으려했다.
이 때 동몽군들은 양반집에 딸이 있으면 수건을 문에 걸어놓고 "납폐"라고 하여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못가게 하였다. 이에 딸이 있는 집은 귓속말로 혼약을 맺어 물을 떠놓고 화촉을 밝혔다. 이것은 "3일혼"이라 불렀다.
<>청주병영 공격 실패
천민들은 양반이나 사족을 가장 미워하여 길에서 갓을 쓴 사람을 만나면 "네가 양반이냐" 고 윽박지르며 갓을 벗겨 찢어버리기도 하고 제머리에 얹어 쓰고 다니며 횡행했다. 노비로 농민군을 따르던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노비들도 주인을 겁주며 노비문서를 불태웠고 강제로 양인 신분을 얻으려했다. 더러는 그들의 상전을 묶어 주리를 틀기도 하고 곤장을 치기도했다.
이런 일들은 특히 김개남부대에서 크게 일어났다. 김개남은 이들을 끌어안고 스스로 왕이라 자처했다고 한다. 이런 철저한 반봉권 운동 탓으로 지금까지 김개남은 핍박을 받고 있다.
김개남은 흥선 대원군의 밀사를 꽁꽁 묶어 죽이려 했고 현직 수령들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서슴없이 칼로 쳤으며 전라감사 김학진과도 전혀 대화를 끊고 상대하지 않았다.
어쨌든 9월 2차 봉기가 일어날 적에 그는 전봉준의 공주 공격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강력한 직속 농민군을 이끌고 10월에야 장수 금산 진잠을 거쳐 청주 병영의 공격에 나섰다. 그의 청주 병영공격은 실패했으나 청주병영의 관군이 공주 전투에 투입하지 못하게 하는데 한몫했다.
그는 패전의 장수가 되어 회문산의 깊은 산골 종송리(지금의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느티마을 매부집으로 몸을 숨겼다. 이 마을의 아랫마을에는 옛 친구 임병찬이 살고 있었다. 임병찬은 아전출신이나 부호였고 또 선비나 벼슬아치들과 넓은 교유를 트고 있었다.
이런 임병찬에게 김개남은 구명을 부탁했을리 없다는 것이다. 임병찬은 "자네가 숨어있는 곳보다 이 곳이 안전할 터이니 우리 집으로 오게" 라며 안심시켰다 한다. 그리고 재빨리 전주감영에 연락하였는데 감사 이도재는 강화도 수비병의 종군인 황헌주와 포교를 보내왔다.
황헌주가 김개남이 숨어있는 집을 포위하고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이때 마침 김개남은 측간에서 대변을 보고 있다가 "올 줄 알았네. 똥이나 다누고 나가겠네"라고 대꾸했다 한다. 이렇게 해서 기개에 찬 영웅은 잡혔다. 그런데 이곳은 전봉준이 잡힌 피노마을과 불과 20여리 거리에 있다.두 지도자는 서로 만나 재기를 도모하려 각기 이곳으로 왔다고 일부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서로 만나지 못하고 한 사람은 옛 부하, 한 사람은 옛 친구의 밀고로 12월2일 한날에 잡혔던 것이다. 묘한 인연이요, 운명이었다.
<>전주서 즉결처형
아무튼 김개남은 전주로 끌려와이도재의 심문을 받았다. 이도재는 정식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현지 처형을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김개남의 부하들이 드세어 그를 탈출케 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라거나 그가 처형한 남원부사 이용헌의 아들 등이 복수하게 해달라는 요구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도재가 그를 국문해보니 흥선 대원군의 밀지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하여 이런 사정을 숨기려 처형했다는 설이다.
그를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하고 그의 배를 갈라 간을 큰 동이에 담으니 보통 사람의 것보다 컸다 한다. 원수진 사람들이 그 고기를 빼앗아 씹기도 하고 제사지내기도 했다 한다. 그의 머리만 함지박에 담아 서울로 보내져 조리 돌렸다.
그리하여 지금 그의 무덤은 없다. 다만 효수된 사진이 전해져 왔다. 이 사진은 그동안 전봉준의 것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근래 김개남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가 남긴 것은 이 사진 뿐일까?<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장>
<>"할아버지책 태우던 모습 생생"
남의 손 넘어간 집터 되사야 할텐데./ 손자 김환옥씨(인터뷰) 김개남의 손자 환옥(76)씨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인상이었다. 평생을 흙과 살아와 손등은거칠고 얼굴엔 깊게 골이 팼지만 차분하고 편안했다. "참 곱게 늙으신 어른이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할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셨대. 사랑방에서 굵게 말씀하시면 온 마을에 소리가 다 들렸다더군." 환옥씨는 어릴 적 할머니 무릎맡에서 생전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듣고 자랐다. 전쟁이 터지고 남편을 잃은 할머니 전주 이씨는 어렵사리 자식을 키우며 90살까지 살다 세상을 떠났다.
"전쟁 전에 논을 45마지기나 지었다던데 그 많은 곡식을 몰려온 군사들이 며칠 만에 남김 없이 먹어 치웠는데도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시기만 했다더군. 그 재산? 물론 다 남의 손에 넘어갔지." 할아버지와 관련해선 가슴 아프고죄송스런 기억도 많다. 역적의 손자라고 소근거림 당하던 13살 때, 방하나에 가득했던 할아버지 책들을 집안 어른들이 재앙거리라며 마당에 모아놓고 불 태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처럼 대접받을 줄 알았더라면 몇권의 책이라도 건져 놓는건데."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나 하나 더듬어내던 환옥씨는 정작 자신이 살아온 데 대해서는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살고있는 전북 정읍군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의 집 뒤편에 있는 할아버지의 옛집(남의 손에 넘어간 뒤 30년전쯤 밭으로 변했다)을 되살릴 돈이 없다는 것과 내년에 큰 손자 녀석 대학보낼 일이 걱정이라는 말을 꺼냈다.
"김개남 장군 고택"이라는 팻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뒷밭 이야기가 나오자 환옥씨의 눈이금세 붉어졌다.
"작년에 전주에서 대학생들이 찾아왔어. 뒷밭 두렁에서 할아버지를 기념해 만들었다는 노랜지 소린지를 하더구만. 젊은 사람들이 어찌도 구슬프게 불러대든지 목이 메이더군." <정읍=정재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