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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직도 내가 예전의 민주당으로 보이니?’
이범재 사회디자인연구소 상임이사
1.
민주당의 이름과 심볼이 또(?) 바뀌었다. ‘열린 우리당’이라는 언뜻 보면 섹시하게도 보이는, 그러나 당이 가져야 할 이념에 대해서는 어떤 역사적 사회적 함의도 구체화하지 않는 시민사회단체 같은 이름 이후로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모를 당명들을 뒤로 하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을 생각나게 하듯이 민주당은 마침내 ‘통합’, ‘새천년’ 등의 꼬리표를 떼내어 버리고 2008년 여의도로 돌아왔다.
그 바뀐 민주당의 이름 앞에 새겨진 소나무 한그루를 보면서 나는 ‘일송정 푸른 솔’을 생각했다. 어떤 이는 선산을 지키는 늙은 소나무가 생각난다고도 했다. 일송정 푸른 솔도, 선산을 지키는 늙은 소나무도 다 아름다운 역사를 가진 이미지들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현재의 민주당에 제기되고 있는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는 어딘가 낡거나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이는 어쩌면 우리의 젊은 정치인 안희정이 ‘김대중과 노무현을 동시에 계승한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이 가지는 지극히 예의 바르고 정답인 듯한 말들의 타성과 나태함에서 이미 시작된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2.
‘기억’의 자의성에 대해서는 많은 탐구들이 있다. ‘기억’의 터전이자 근거인 ‘의식’의 주관성에 대한 논의는 니체가 ‘힘의 긍정’을 말했을 때 철학의 기본적인 과제가 되었으며 우리들의 사소한 기억조차도 사실은 자기애와 합리화의 한 구성일 수 있다는 점을 홍상수는 그의 영화 ‘오 수정’에서 잘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기억하는 ‘민주당’은 어쩌면 나만의 ‘민주당’에 대한 기억일 수 있으며 내 논리의 합리화를 위한 기억의 조작일 수도 있다.
전형적인 386세대인 나에게 남아 있는 최초의 민주당은 소위 민정당 2중대로 공격받던 당을 깨뜨리고 1985년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민주당이다. 비록 의석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집권 민정당에 미치지 못했으나 득표율에서 근소하게 앞섬으로써 전두환 군부정권의 정당성에 돌파구를 냈다. 나는 그 당시 예비 검속에 걸려 관할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과 강원도에서 며칠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검속에서 풀려나 총선당일 아침에 돌아온 서울에서 총선 결과를 마주했다. 어쩌면 우리 민주화 세대가 맛본 최초의 사회적 승리였을지도 모른다.
민주당은 87년 대선에서 DJ와 YS가 분열하면서 압도적이던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노태우에게 대통령의 자리를 내 주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주화 세력은 ‘비판적 지지파’, ‘후보단일화파’, ‘독자후보파’로 나뉘어 그 정치의 최일선에 한 주역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각각의 노선에 대한 평가와 상관없이 그 때의 민주당과 후보들은 바로 우리의 선택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치러진 총선들에서 지금은 관록의 기성정치인이 된 이해찬, 노무현, 김근태, 김민석, 송영길, 김영춘, 임종석, 이인영 등의 이름들이 민주당(DJ와 YS의 민주당을 모두 합하여)을 통해서 정치에 입문했다. 비록 YS의 민주당이 3당 합당을 통해 영남의 보수파에 합류하게 되지만 ‘민주당’의 기억은 노무현과 개혁당, 노사모, 유시민과 함께 그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들이 나에게 남겨진 민주당의 ‘기억’들이다. 물론 내가 그 순간들 속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모든 행보에 완전히 동의한 것도 아니었다. ‘민노당’의 건설과 제도권 진출은 더 복잡한 함수를 만들어 냈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민주당’이 80년대의 어느 순간부터 ‘한국적’ 진보와 개혁의 제도권내 중심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기억과는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의 정당으로 ‘민주당’을 떠올린다. 마치 민주당은 어느날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아주 낯선 얼굴을 하고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너는 내가 아직도 그 오래된 민주당으로 보이니?”
2000년대 초반의 어느 순간에 이렇게 갑자기 민주당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오 수정’의 주인공들처럼 변심한 애인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내 ‘기억’을 변조해 버린 것일까?
3.
확실한 근거를 제기할 수는 없으나 어느 나라의 어떤 진보/개혁 정당(그 나라마다의 상대적인 의미로)이라도 젊은이들의 지지에 의존하지 않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비록 오랜 사민주의적 사회체제 아래에 있었던 나라들에서 사민주의 세대의 기득권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이반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개혁/진보적 정당들은 누구보다 젊은이들에게 지지받고 있으며 지지 받고자 할 것이다.
열린우리당 시절 ‘대학생 아카데미’를 통해 젊은이들을 조직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당시의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이 사업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했던 문제는 우리가 그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비판성’을 하나의 속성으로 하는 대학생들의 입장에서 집권세력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한나라당이 대학생들에게 주었던 ‘친북주의 비판’, ‘박정희 등의 현대사에 대한 재해석’, ‘전교조 등의 노동자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 등과 같은 강렬한 ‘이념적’ 세례에 비한다면 민주당의 후신인 열린우리당이 젊은이들의 이상주의에 호소할 내용이 빈약했음은 분명하다.
그 결과들은 투표를 통해서 그대로 검증되고 있다. 불과 2-3년 전에 정치 개혁을 지지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세력으로서의 한나라당을 심판하며 노무현과 민주당의 후신당에 지지를 몰아주었던 바로 그 젊은이들이 생각을 바꾼 것이다.
16, 17대 대선 출구조사(이 출구조사를 인용하는 이유는 연령별, 지역구별 투표결과가 가장 자세하고 근접하게 나타나는 여론조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맞붙은 16대 대선에서 수도권(서울/경기/인천 세지역)의 유권자들은 노무현에게 51.17%, 이회창에게 44.21%, 그리고 민노당의 권영길에게 4.14%의 지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17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에게 54.55%, 민주당 정동영에게 23.13%, 권영길에게 2.56%,문국현에게 7.35%, 이회창에게 11.33%의 지지를 보냈다.
또한, 수도권에서 노무현과 정동영, 민주당의 두 후보가 얻었던 득표율 차이는 무려 28.04%에 이르렀다. 서울에서는 26.14%가 지지를 철회했고 인천에서는 30.28%가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아닌 사람에게 투표했으며 경기에서는 29.93%의 차이가 났다. 이는 17대 대선을 기준으로 할 때 민주당의 수도권 기반이 급격히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수도권의 20대 및 30대의 유권자들의 두 명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지지율 차이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은 수도권 세 지역에서 20대 투표권자의 63.00%의 지지를 얻었고 30대에서는 62.67%의 지지를 얻었다. 이 때 이회창은 20대에서 30.61%, 30대에서 30.58%를 얻었다. 이 두 연령층에서의 압도적 승리를 배경으로 노무현은 40대의 49대46, 50대 이상의 63대34의 약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7대에서 극적으로 반전되는데 정동영은 수도권에서 총 23.14%의 지지를 얻었으나 20대에서는 18.19%, 30대에서는 29.72%를 얻어 전통적으로 진보/개혁 세력이 가졌던 젊은 층에서의 기반을 거의 상실했다. 반대로 이명박은 20대에서 45.95%, 30대에서 40.75%를 얻어 한나라당을 젊은 정당, 이명박 후보를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후보로 만들었다.
노무현에 비교하여 정동영의 수도권 세 곳의 평균 득표 하락율은 28.04%였다. 그러나 20대에서는 총 44.80%의 지지율 하락을 경험했고 30대에서는 32.95%의 차이를 보였다. 더욱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러한 20대의 지지율 하락이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가 강했다고 생각했던 도봉구에서는 63.17%에 달했고 성동과 성북에서는 54%에 달했으며 안산에서는 55%에 이르렀다.
소위 일부의 좌편향적 분석가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노무현을 지지했다가 민주당 후보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를 철회하거나 새롭게 투표권자가 된 젊은이들인 20대는 민노당을 지지하기보다 문국현에게 16.65%가 지지를 보냈고 30대의 12.69%가 지지를 보냈다. 이회창도 20대의 13.84%, 30대의 10.94%의 지지를 얻었다. 젊은이들은 좌파 후보의 소위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학문적으로 자명한 정책에 지지를 보내기보다는 ‘사람중심 진짜경제’라는 구호와 ‘취직을 위해서는 영혼이라도 팔고 싶다’는 젊은이들의 고통에 동조를 보낸 문국현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지난 17대 대선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올바른 투자자라면 문국현 주식회사에 투자하지 정동영의 민주당이나 민노당의 주식을 사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17대 대선 결과와 연이은 총선의 결과만을 놓고 볼 때 이제 우리의 민주당은 예전과 같이 수도권에 뿌리박고 젊은 층에게 압도적 지지를 받던 정당이 아님을 알 수 있다.
4.
열린우리당에서 지속된 당내 투쟁은 한편으로는 김대중이라는 압도적 리더십의 부재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김대중에 의해 민주당이 대표되던 80년 후반 이후로 상당기간 동안 당내의 민주주의-주로 선출직 공직후보자의 선출을 위한-는 크게 진전된 바가 없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김대중이라는 압도적인 지도력에 의해 후보들의 성격과 각 세력별 균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내의 민주주의는 그리 큰 쟁점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런 압도적인 조정자가 부재하고 또 정당의 민주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젊은 개혁당파의 가세로 인해 열린우리당의 당내 투쟁이 격화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비록 ‘진성당원 논쟁’이라는 복잡한 말로 표현되고 있으나 그 바탕에는 선출직 공직후보자의 선출권에 대해 모든 정당이 가질 수밖에 없는 갈등이 놓여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이 권한은 당원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보여졌고 따라서 당원들의 ‘성분’은 이제 본격적으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우리의 ‘기억’대로, 또는 나의 기대대로 민주당이 수도권의 젊은층, 개혁적 세력들에게 의미 있는 정당이 되고자 한다면, 김대중과 같이 당원들과 정당의 성격간의 일정한 차이를 무화시킬 만큼 강력한 지도력이 배출되지 않는 이상 민주당의 후신당 들은 그 당원의 ‘성분’을 통해서 이를 입증해야 했다.
다음은 2007년 7월 기준, 열린우리당의 서울지역 동북부의 한 지구당의 당원들에 대한 조사결과이다. 비록 서울의 한 지구당에 대한 조사에 불과하고 또 현재의 민주당은 그로부터 대략 1년의 시절동안 많은 변신(?)을 했기 때문에 이 결과가 주는 의미는 제한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의 열린우리당의 구성이 지금의 민주당에서도 별로 변하지 않았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개혁당 진성당원(87명)과 열린우리당 기간당원(97명) 비교 (개혁당-2003년11월, 열린우리당-2007년7월 기준)- (1)직업별
*기타는 의료인(2), 언론인(1), 종교인(1) 외
*열린우리당은 총 97명의 기간당원 중 직업이 파악된 77명에 대한 통계임
*국회의원, 구의원은 자영업으로 분류했으며 의원 보좌관, 비서관 등은 회사원으로 분류
(2)연령별
(3)개혁당 당원 87명 당적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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