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3.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경적인 예
우리는 성경 말씀에 기록된 인물들의 사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분별하는지, 또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선택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야곱의 결혼
아브라함의 종이 신부감으로 데려온 리브가와 결혼한 이삭과는 달리 야곱은 자기 스스로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중매 결혼을 했느냐, 연애 결혼을 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방법은 각기 장단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야곱이 배우자를 선택한 판단 기준에 있습니다. 그는 자기 눈에 보기 좋은대로 아름답고 잘 생긴 여자를 선택했습니다(창29:17).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우나 라헬은 아름답고 잘생겼더라(창29:17).
레아를 선택하건 라헬을 선택하건 그것은 야곱이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마음을 보십니다(삼상16:7). 그래서 그분은 얼굴이 예쁜 여자보다 주를 두려워하는 여자를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잠31:30). 눈에 보이는 정보에 따라 행하는 것은 믿음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고후5: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삼상16:7).
호의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주를 두려워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으리라(잠31:30).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고후5:7)
야곱은 라헬을 연애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 동안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잔치를 마치고 신부와 하룻밤을 보낸 후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녀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간교한 외삼촌 라반에게 속은 것입니다. 속아서 결혼한 야곱은 다시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결혼을 무효로 돌리고 다시 라헬을 얻기 위해 일할 것인가, 아니면 레아를 평생 아내로 사랑할 것인가?
이런 경우에 여러분 중 누군가가 야곱에게 다가가 "이것도 다 주님의 뜻이겠지요." 라고 말하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체념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더라도 라헬을 애타게 연모하는 야곱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야곱은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간 더 라반을 위해 일을 하겠다고 자처합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야곱이 레아와 결혼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즉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해 레아를 미리 그의 신부감으로 점찍어 두셨는데, 야곱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라헬에게 마음을 두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라반을 사용하여 야곱에게 속임수를 써서 레아와 억지로 결혼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 중 어느 하나를 야곱을 위해 예정하고 이를 그에게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레아, 라헬이 태어났을 때 보이지 않는 실로 그들을 연결하여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천생연분의 배필로 맺어지게 하는 삼신 할머니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존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라반이 야곱을 속이는 것이나 야곱이 그 속임수에 당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야곱과 레아가 결혼한 것은 라반의 속임수에 의한 것이므로 이 결혼은 무효로 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좋아했지만, 레아 역시 야곱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그녀에게 라헬 대신 신방에 들어갈 것을 제안했을 때 이를 수락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형 에서로 위장을 하고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장자의 축복을 받고 싶었던 것처럼 레아 역시 자기 동생 라헬 행세를 하며 야곱을 속여서라도 그에게 시집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삭이 속아서 야곱에게 축복한 것이 유효했던 것처럼, 야곱이 속아서 레아와 결혼한 것도 유효합니다.
이제 이렇게 야곱이 속아서 레아와 부부가 된 상황 하에서 과연 야곱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야곱은 레아를 원치 않으니까 그녀를 내쫓아야 할까요? 성경 말씀에 의하면 아내가 음행을 한 적이 없다면 그녀를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녀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며 또 누구든지 이혼 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마5:32).
레아가 야곱을 버리고 간음을 한 적이 없으므로 그녀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레아와 부부관계를 유지하면서 라헬을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이 좋을까요? 하나님께서 처음에 결혼 제도를 만드실 때 한 남자(a man)가 한 명의 아내(his wife)와 연합하여 가정을 이루는 일부일처 제도를 만드셨습니다(창2:24). 그러므로 야곱이 레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 처제인 라헬을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
그 상황에서 야곱은 레아를 부인으로 인정하고 자기 아내가 된 그녀를 사랑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비록 레아가 라헬만큼 귀엽고 사랑스럽지는 않았겠지만, 야곱은 그녀를 아내로서 사랑해야 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가슴 설레는 애틋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인 선택이며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의 황홀한 연애 관계를 깨뜨린 레아를 미워하였고(창29:31), 라반에게 7년간 더 일해 주기로 약속하고 라헬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주께서 레아가 미움 받는 것을 보시고 그녀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수태하지 못하였더라(창29:31).
제 생각에는 야곱이 그때 레아라는 한 여자로 만족하고 그녀를 아내로서 사랑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괜히 라헬까지 아내로 맞아들이는 바람에 레아와 라헬 두 자매 사이에는 반목과 질시가 있었고, 서로 아들 낳기 경쟁을 하다가 마침내 야곱은 네 명의 아내를 두고 열두 명의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르우벤과 빌하 사이에는 근친상간이 일어났고, 배다른 형제들은 서로 시기하고 다투다가 마침내 자기 형제 요셉을 노예로 파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만약 야곱이 레아와만 결혼하면 이스라엘 12지파는 어떻게 생기느냐고 반문을 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으나, 저는 하나님께서 꼭 네 명의 아내를 두어야만 이스라엘 12지파를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한 명으로도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백성을 만드셨으니 레아가 낳은 여섯 명의 아들들로도 충분히 크고 강한 민족을 만드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라반이 야곱을 속이는 것이나, 야곱이 속아서 레아와 결혼하는 것이나, 그가 자기 아내 레아를 미워하는 것이나, 그가 또다른 아내들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가 라헬과 결혼하느냐, 레아와 결혼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판단 기준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과 자기 아내가 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가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분명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야곱의 뜻이나 야곱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도 아닙니다. 그것은 야곱을 좀 더 오래 부려먹고 싶은 라반의 뜻이며, 그런 속임수를 써서라도 야곱에게 시집가고 싶은 레아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반과 레아의 자유의지를 가로막지 않고 내버려두셨을 뿐입니다. 제가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야곱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야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야곱의 뜻 이외에 라반의 뜻과 레아의 뜻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앞서 제가 예로 들었던 자매, "결혼을 위해서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형제님을 보여주셨다."라고 하던 그 자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건 순전히 그 자매의 뜻이었지, 제 뜻도 하나님의 뜻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A 자매와 결혼할 것인지, B 자매와 결혼할 것인지에 대해서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내 뜻이다."라고 결정을 내려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들 자기 중심적으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자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끼워맞추다보니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이럴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정말 나를 버리셨는가?",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라고 생각하며 낙심하게 됩니다.
야곱은 한 여인과 결혼하여 그녀를 일평생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처음에 점찍어둔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가 일부일처 제도를 위반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가 다른 아내를 취하는 것을 막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따라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그를 내버려두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란 내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다 치밀한 계획 하에 정해져 있다고 하는 숙명론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곱은 잘못된 선택을 하였고, 그 결과 그의 가정 생활이 엉망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든 상황들을 사용하셔서 그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이 저지른 잘못된 선택과 실수까지도 다 수습하셔서 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최종적으로 선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롬8:28). 숙명론자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12 지파를 만들기로 작정하셨다. 이를 위해서 야곱이 12명의 아들들을 낳을 수 있도록 그가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리도록 예정해 두셨다. 그냥 내버려두면 야곱은 라헬과만 결혼하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은 레아도 야곱과 결혼하도록 라반을 시켜서 야곱이 결혼 사기를 당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자매들이 서로 아들 낳기 경쟁을 벌일 수 있도록 야곱이 레아를 미워하고 그녀를 구박하도록 하셨고, 그 자매들이 자기 하녀들도 남편에게 첩으로 갖다바치게 하셨다."고 하고 싶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해석은 이미 저질러진 야곱의 실수와 라반의 죄, 사람들의 욕망의 산물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으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야곱을 속인 것이 아니며,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여러 아내를 둔 것이 아닙니다.
(2) 요셉의 고난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한 관심과 총애를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통해서 자기가 형제들 가운데서 높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아버지의 총애와 그의 꿈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흉년으로부터 구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풍부한 자원으로 크게 번성하게 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크게 번성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형들의 손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즉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한 도구입니까?
숙명론자들은 창세 전에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그의 형들은 요셉을 노예로 파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고 주장할 겁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에 의한 것이며, 또한 그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도 하나님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에 의해 집행된 것이며 하나님은 그 모든 죄의 배후 세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런 죄를 짓도록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신 적이 없다고 증거합니다(렘19:5).
또한 그들이 바알의 산당들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불로 태워 바알에게 번제 헌물로 바쳤나니 그것은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한 바가 아니니라(렘19:5).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판 것은 그들의 시기심과 탐욕 때문이었지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의 의지로 요셉을 팔 수도 있었고, 팔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노예로 팔려서 이집트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그분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람을 훔쳐다가 상품으로 파는 것을 죄라고 하시며 그에 대해서 벌하시는 분입니다(신24: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훔쳐다가 그를 상품 취급하거나 판 것이 발견되거든 그 도둑을 죽일지니라. 너는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거할지니라(신24:7).
어느 누구도 요셉의 형들이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요셉을 노예로 팔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주장한다면 유다가 며느리와 간음을 한 것도,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한 것도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도록 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업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일등공신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성경 기록을 살펴보면,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동생을 노예로 팔지 않았으며 요셉 역시 팔려가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며 그분을 찬양하지는 않았습니다. 훗날 요셉은 과거 일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이 선이 되도록 계획하사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구원하게 하셨나니(창50:20)
분명히 그 형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셉에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형들이 저지른 악행조차도 사용하셔서 그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크게 일으키는 일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과 같이 그의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노예로 팔리지 않았더라면 이 하나님의 뜻은 실현되지 못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이 팔리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그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의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요셉이 팔려가는 비극적인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그처럼 크고 놀라운 구원을 이루실 수 있었다면, 요셉이 팔려가지 않고 다른 형제들과 화목했더라면 더욱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한 최적화된 마스터플랜이 이미 나와 있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내가 거쳐가야 하는 인생 경로까지도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나의 이런 죄악된 행동과 부정적인 환경도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기 때문이므로 이것은 주의 뜻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죄와 실수를 정당화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3) 모세의 인생 여정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그분의 백성들을 구출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모세가 40세에 살인자가 되고, 80세에 부르심을 받고, 120세에 죽도록 미리 그분의 뜻에 따라 그의 운명을 예정해 놓으셨던 것일까요?
이집트의 왕자로 자란 모세는 40세가 되었을 때 자기 동족들의 고난을 돌아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여러가지 선택가능한 대안들이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자신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방법, 자신이 이집트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 정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방법, 백성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일으키고 탈출하는 법, 동족을 학대하는 이집트의 노예 감독을 몰래 해치우는 방법 등... 모세는 자기 형제를 학대하는 자를 쳐서 죽이고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행7:25).
모세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40세에 이집트 사람 한 명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쳐야 했을까요?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40년간을 광야에서 살 것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대비하여 모세는 광야에서의 생존 전략을 미리 연구하기 위해서 미디안에서 양치기 생활을 했어야 할까요?
만약 모세가 숙명론자였더라면 자기가 저지른 살인죄에 대하여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내가 광야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는 것도 다 하나님께 무슨 뜻이 있어서겠지요."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당시에나 그후에도 결코 자신의 죄에 대해 그와 같이 변명하거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작정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살인자가 되어서 광야로 도망한 후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도록 유도하신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모세가 스스로 판단하여 저지른 일입니다. 비록 모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택하지 않고 죄를 지었지만 그의 죄와 실수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무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저지른 잘못까지도 선을 이루는데 사용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그 길이 평탄하고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실수와 약점 때문에 좀 더 그 과정이 길어지고 시간이 지연되기도 하지만 그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면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지만, 그들이 믿지 않으면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패역한 자들이 다 죽어 소멸된 후 남은 자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쪽을 선택하거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성취하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집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조차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여 자기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거나 혹은 체념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결정하신대로 다 알아서 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무절제와 방탕에 그냥 내버려둡니다. 이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하시며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범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상황을 선하게 사용하여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대충 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분별하며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날마다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만약 현재 처한 상황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깨달았을 때 즉시 거기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4) 사도 바울의 선교
사도 바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분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바울을 이방인들의 빛으로 세워 땅끝까지 이르러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행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이방인들의 빛으로 세웠나니 이것은 네가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을 위한 일꾼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느니라, 하매(행13:47)
그런데 사도행전 21장에서 바울의 선교 방향을 두고 한 가지 선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사도가 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제자들은 성령을 통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행21:4). 바울이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아가보라고 대언자가 찾아와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되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했습니다(행21:10-14).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올라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혹시 사도 바울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동족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고 로마로 이송되어야만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물거품이 되어 버릴까요? 저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행 선택 여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던 제자들은 결코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를 권면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 바울에게 말했으며(행21:4), 성령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행21:11).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당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을 뿐 결코 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거나 올라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도 바울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분의 뜻을 가지고 계셨고, 이미 이를 위해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느냐 마느냐를 신중히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루살렘에서나 혹은 다른 곳에서나 주님의 증인으로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일 주님께 순종하며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사는 한, 주께서는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도 그를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실 수 있고,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더라도 그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떠어떠한 경로를 거쳐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일까?"에 대해서 고민하지 마시고 사도 바울처럼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날마다 순종하며 살면 됩니다.
4.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일반적인 예와 성경적인 예를 통해서 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선택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성경에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짚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몇 가지 대표적인 성경 말씀들을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고후7:10).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라. 너희는 음행을 삼가고(살전4:3)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위에 열거한 구절 이외에도 많은 성경 말씀들이 있겠지만, 죄를 미워하고 슬퍼함으로 회개에 이르는 것, 거룩한 분리와 성별된 생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과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등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일반적인 원리보다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원합니다. 내가 어느 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좋은지, 내가 누구랑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내가 어느 선교지로 가야 하는지 등에 대해 구체적인 인도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구체적인 부분들을 관광코스 안내지도처럼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느 유원지에 들렀다가,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어떤 유적지를 방문했다가 그 다음에는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채로 우리에게 제시해주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지금부터 너희는 강을 따라 올라가서 하란으로 가고 거기서 머물다가 데라가 죽거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라고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지시한 땅"이 아니라 "앞으로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직 아브람에게 가야 할 여정은 고사하고 최종 목적지조차도 가르쳐주지 않으셨다는 겁니다(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훗날 상속 재산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가면서 순종하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으며(히11:8)
그런데 아브람이 어떻게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인줄 알고 거기로 들어갔을까요? 그것은 그가 매일 주님과 교제하면서 그분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눈에 펼쳐진 관광 안내지도가 아니라 매일 조금씩 풀어서 읽어야 하는 두루마리(scroll) 성경과 같습니다. 현재 펼쳐진 부분을 읽고 나야만 그 다음 부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을 통해 가르쳐주신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먼저 순종할 때 그 다음 단계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5.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를 구했고(렘42:3), 그것이 좋든지 나쁘든지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겠다고 했습니다(렘42:6).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걸어갈 길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우리가 당신을 주 우리 하나님께 보내오니 일이 좋든지 나쁘든지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리이다.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면 잘되리이다, 하니라(렘42:3,6).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에게 그 땅에 머무르며 바빌론 왕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시자,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찾고 있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며 예레미야가 전한 주의 말씀을 부정했습니다(렘43:2). 그들은 애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생각이 없었으며 자기 마음속으로 속인 것입니다(렘42:20).
너희가 나를 주 너희 하나님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해 주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대로 우리에게 밝히 알리소서. 우리가 그것을 행하리이다, 하여 너희 마음속으로 속였느니라(렘42:20).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만 하고, 정작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에 순종하지 않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보다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하면서 부지런히 찾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없으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롬12:2)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살전5:16-18; 눅2:14)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맞춤형 설계도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신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하나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을지라도 오직 주의 뜻 그것만이 서리라(잠19:21).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네 행로들을 지도하시리라(잠3:5,6).
* 이 글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기 전에 이미 작성해 두었던 글입니다. 특강 내용은 이 글에 기초하여 작성되었지만, 특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일부 수정된 부분도 있고, 글을 말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진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keepbible.com 자유게시판
김문수 형제님의 글입니다.
첫댓글 수많은 사례들을 많이 공부하셨습니다. 인용되는 구절들이 광범위하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바울의사례와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예레미야의 글등은 매우 필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제가 보는 관점은 구체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이 제가 히브리어 원어문으로 읽고 유대인들과 교제하면서 느껴온 부분들입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처음 정착한 곳은 모레 평원이었습니다. 모레라는 말은 스승, 혹은 가르치신 분의 뜻으로 마치 계시 받은 장소를 생각하게 합니다.(창 12:6)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온 사람의 종착지로 보입니다.
다음으로 야곱에게 일부다처제를 밀어붙인 것은 라반이었고 그것은
이방종교의 관행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음은 분명할 것입니다만 용인되는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살인을 했지만 모세를 살인자로 기술하는 대목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는 이유가 출 2:12-13에서 이집트인 감역자가 히브리인을 죽이려 하는 것(나카 동사)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죽였기(나카 동사) 때문에 정당방위 내지는 긴급구난에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나카동사는 스카랴 13장 7절에서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즉 이집트인이 이스라엘인을 죽이려는 순간 그를 모세가 죽인것입니다. 그냥 이집트인이 히브리인을 때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았더면 어찌 되었을까, 이 문제는 여러가지로생각해볼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동족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그로 하여금 그리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을 이집트인들에게 판 사람들은 요셉의 형들이 아니고 미디안인들이었습니다. 이부분 많은 오해는 히틀러 성경이라 불리우는 키텔의 BHS 의 영향이 큽니다. New King James와 킹제임스가 다른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쓴 영문 글 who sold Joseph 에 상세히 논증되어 있습니다. 긴글을 올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른 분들도 천천히 읽어보시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이글은 제가 쓴것이 아니고 김문수 형제님이 쓴글입니다. ^^;
글머리에 원글 출처와 옮겨왔음을 밝히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아무런 언급이 없어서 keepbible.com의 김문수 형제님과 은혜로말미암아 님께서 동일인물인가?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만, 글쓰는 스타일이 달라 그렇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글은 널리 퍼지고 많은 분들이 읽을 기회가 주어져야만 할 것입니다만, 잘못된 오해는 피하는 것이 좋겠지요...
^^;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용서를 .....
날이 침 더웁 습니다. 건강 한 여름 되시기를 ..... 여기 카페에 도 예정에 관한 글이 있고 오늘 동영상에서도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는 자유로운 의지 측면에서의 말씀해석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정은 그런의미가 아니기에 접근 해석 설명 부분이 너무 빈약합니다. 적어도 예정이 잘못되었다면 칼빈의 기독교 강요 예정론을 읽어보시고 또 에베소서 1: 3-14 절의 말씀을 해석하여 설명할수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마치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룸이 하나님의 예정이죠. 재림과 천년왕국이 예정이고 흰보좌 심판후 새 예루살렘 부분도 예정입니다. 이 예정을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신것을 아무도 부인하
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을 거부한다면 몰라도 성경은 그렇게 말씁합니다. 성경에 예정은 구원 부분에 한정하여 말씀하며 하나님의 입장에서 누가 구원을 얻고하는 것을 다아시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심을 토기장이의 비유에서도 진흙이 선택권을 가진것이 아니고 토기장이가 결정하듯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믿어야지 그 지혜의 부요 함을 인간의 지식으로 그렇치 않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부인하게 된다고 봅니다. 자유로운 의지로 만사 만물의 결정권을 가지고 행사하는 것은 인간에게 달렸으나 교회론의 에베소서에서의 말씀에서 구원은 신령한 복으로 하나님의 창세전 선택과 예정에 의하여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만사만물의 일에관하여 예정이라는 말 자체를 혼돈 부터 정리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속에서 예수로 구속하심과 세상의 심판과 상벌이 하나님이 예정된 일이듯 구원에 관하여 예정을 말함이지 어떤 사람 등의 만사만물의 일에 관하여 예정을 말하는 것이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마시고 성경의 예정을 접근하였으면 합니다.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하나님이 하시는 지혜와 지식을 다는 알지 못하며 믿어야 할 부분 중 하나가 예정으로 보여집니다.
하늘샘님의 코멘트는 참 이해하기가 쉽네요. ^&^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 수용할 수 없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다시금 공부해 보겠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만사만물에 관한 예정과 (인간을 향한)구원의 예정이 다르다는것에 대해 심도있게 찾아보겠습니다.
하토브님의 분석에의한 코멘트는 제게좋은 공부가 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예정은 구원에 관하여만 말씀 함이 칼빈의 예정 론이며 만사 만물에 관하여서는 사람이 예와 아니오와 가와 부 를 순종과 불 순종으로 그것을 결정하는 권 한은 사람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으로 이를 예정이라하지않습니다. 주로 에베소서에 집중적으로 쓰여진 예정[proorivzw 프로오리조]은 모두 구원과 관계되어 있음도 연구해 보시고..흔히 칼빈의 예정을 비판하는 분들이 모든 사람에게 부여진 선택 권마저 결정 [예정]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오해 일 뿐입니다. 이런 구원에 관하여 예정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정확 한 부분으로써 성경이 말씀하는 이 예정 부분을 반론을 제기하는 논리는 아직 보지도 듯지도 읽지도 못 하였습니다.
구원에 관계된 계획은 모두 다 하나님의 주권 적 결정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이 정한 일 입니다. 그를 믿음으로 속죄와 구원이 하나님이 정하신 일입니다. 결국 천년왕국의 보상과 징계도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일 입니다. 누가 이를 부인하겠습니까? 동시에 누구를 구원하실지도 하나님이 그 기쁘신 뜻으로 결정하셨다는 것이 에베소서의 예정입니다(엡1:3-14)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충분이 그런 주권이 있고 그렇게 하실 능력이 충분이 있음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여겨집니다.
간혹 이문제를 가지고 그러면 전도를 할 필요나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전도 자체도 그 분의 방법으로 충분이 그럴 능력도 하나님께는 가능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칭찬과 보상을 얻기에 부족하므로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며 전도에 순종한 사람들에게는 많은 보상을 약속하셨음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복주시기를 원하셔서 그 복을 주시려 전도를 우리에게 맡겼을 뿐이라고 저는 믿고 그렇게 말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