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대신 쥬스 올리면 안돼?
지난 일요일이 할아버지 할머니 제삿날이었다. 아이들이 왔다. 하나뿐인 손녀도 왔다. 다행히 휴일이라 부담감이 덜했다. 늘 바쁜 아이들이 참석해준 것만 해도 고맙다.
제수를 간소하게 하래도 맏며느리로 몇 십년을 준비해온 습관 때문인지 쉬 줄이지 못하는 마눌님께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기만 하다.
집에서 직접 준비하지 말고 시장에서 만들어 진 거 사서 올리자고 시도했지만 다시 예전 하던대로 되돌아간다. 제사 지내고 제수음식을 먹어보면 확실히 맛 차이가 난다.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생전에 어머닌 생선만은 고향 삼천포 어시장에서 산 것을 젯상에 올렸다.
부산 자갈치 시장이나 다대포 시장에서 산 생선은 맛이 덜하다고 했다. 조상님께 평소 드시던 고향 바다 생선을 맛보시게 한 어머니의 마음을 다 늙어 이해한다.
준비 과정이 힘들어도 따로 사는 가족이 함께 모여 얼굴도 보고 식당이 아닌 집에서 밥도 같이 먹고 조상님께 인사도 드리고 후손 잘 보살펴달라는 부탁도 할 수 있어 어쩌면 기다리는 날이 아닌가 싶다. 나만 그렇겠지.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까지도 가부장적인 탈을 벗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손녀 태어난 후론 절을 하면서도, 독축(讀祝)하면서도 손녀 잘 돌보아주시기를 우선으로 빈다. 내가 손녀바라기다.
음복으로 술을 한잔씩 하자해도 차 운전 때문에 혼술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음복이 뭐냐는 손녀의 질문에 답을 해주니 손녀가 그랬다.
"할비! 술 대신 쥬스 올리면 안돼? 꼭 술이어야 해?"
그러면 자기도 음복주 한잔 할 수 있다고 한다. 70넘은 할아버지가 9살 손녀에게 배운다. 다음부터는 음료수도 따로 올려야겠다. 생각해 보니 우리 할머닌 술 한잔 못 드시는 분이었다.
손녀는 3월이면 초등학교 2학년이 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실감나게 해준 아이다. 유치원 입학 전까지 우리 내외가 돌보았다. 어릴 때 하던 할비 할미라는 말을 아직 그대로 쓴다.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지 애비(우리 아들)가 이제는 학생이니 할아버지 할머니라 부르고 말도 반말 하지 말고 높임말을 하라고 시키니 그러기 싫다고 했다. 할비 할미라 부르고 반말 할 거라고.
할아버지 할머니라 부르고 존댓말 쓰면
할비 할미가 내 할아버지 할머니 같지 않고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서라고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돌이켜보니 나도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할비 할미라 불렀고 반말했다. 눈물이 나도록 보고 싶다.
가끔씩 해운대 자기집으로 이사와서 같이 살자고 떼를 쓰기도 하여 아들 며느리를 당황시키기도 한다.
글을 쓰다보니 손녀 자랑이 되었네.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명절차례 뿐만 아니라 기제사 문제로 고민을 하기도 한다. 없앤 친구, 간소하게 지내는 친구, 모아서 적당한 날에 지내는 친구들도 있다. 우리가 떠나면 어찌 될지... 하지 않아도 될 걱정들을 하기도 한다.
차례, 제사, 성묘, 산소 등 우리 세대가 짊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걱정한다고 걱정이 없어질 것도 아닌데 붙들고 앉아 걱정한다. 우리 세대만의 병인 것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 덕분에 아이들도 손녀도 보면서 제삿밥도 같이 먹고 옛날 이야기도 하니 참 좋다. 몇날며칠을 마음고생 몸고생한 마눌님께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