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질 물러 딱따구리 둥지 안성맞춤, 최고 보금자리
원앙 소쩍새 등 온갖 새들과 다람쥐도 탐내 쟁탈전
▲까막딱따구리 수컷이 둥지에 와서 둥지를 파내고 있습니다.
강원도의 어느 깊은 산골에는 맑디맑은 계곡이 흐르는 곁으로 은사시나무 숲 하나가 단정하게 앉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 숲은 30년이 넘도록 표고버섯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아가시는 노부부의 손길이 빚어낸 것입니다. 표고버섯을 키우려면 먼저 강한 햇살을 가려야 했기에 두 분은 돌밭을 일궈 은사시나무를 빼곡하게 심으셨습니다.
은사시나무는 버섯과 빛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서 한 줄기 빛이라도 더 많이 만나는 것이 살 길이었습니다. 하여 옆으로 가지를 내는 힘도 아끼며 다투어 각자의 키를 키우기에 분주했습니다. 성장 속도가 빠른 나무의 속성에다 빽빽하게 들어선 환경의 압력이 보태졌고 흘러간 시간까지 쌓였습니다. 따라서 현재 숲에 있는 은사시나무들은 곁가지도 거의 없이 늘씬한 몸매를 뽐내며 하늘에 닿을 듯 서있습니다.
몇 해 전, 두 분도 나이가 드시고 나무도 따라 나이가 들며 숲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표고버섯을 키우는 것이 힘에 부치고 일손을 구하는 것도 마땅치 않아 표고버섯 농사를 접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늘이 주시는 빛을 더 이상 가릴 필요가 없어진데다 은사시나무 중 추운 지역에 오래 살며 입은 냉해로 쓰러질 위험이 있는 나무들을 군데군데 베어내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만 특히 자연에서는 작은 차이가 큰 변화를 일으킬 때가 많습니다. 적당한 굵기로 쭉 뻗은 줄기에는 원래부터 곁가지가 거의 없어 걸림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은사시나무와 은사시나무 사이의 간격까지 넓어지면서 숲에 숨통이 확 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사시나무는 재질 자체가 단단하지 않고 무척 무른 편입니다.
결과적으로 두꺼운 굵기의 무른 나무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띄엄띄엄 서있는 형상이 되어, 딱따구리가 편하게 드나들며 쉽게 나무를 파서 둥지를 짓기에 꼭 알맞은 환경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숲을 이런 식으로 조성하면 우리나라의 딱따구리 모든 종이 한 장소에 다 모이는 건강한 숲이 될 텐데…”하며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던 숲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바로 이 숲은 까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큰오색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쇠딱따구리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딱따구리가 모두 모여드는 딱따구리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온 산을 더듬듯 다니며 온 종일 발품을 팔아도 딱따구리의 둥지 하나 찾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딱따구리가 둥지를 짓는 습성을 익히 알고 찾아다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 자리에 서서 우리나라에 깃들어 사는 모든 종류의 딱따구리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숲이 만들어진 것이니 기적과 다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은사시나무 숲의 축복은 딱따구리의 천국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딱따구리의 둥지는 딱따구리만 사용하는 둥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딱따구리는 나무에 구멍을 파고 아래쪽으로 파내려가 나무속에 빈 공간을 만드는 방식으로 둥지를 짓습니다. 따라서 딱따구리의 둥지는 모진 비바람과 눈보라를 막아주는 아늑함은 기본이고, 천적을 방어하는 데에도 최고인 완벽한 둥지인 셈입니다. 그러니 숲에 기대어 사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이처럼 귀한 보금자리를 탐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나무에 구멍을 뚫고 파내서 둥지를 지을 능력이 없는 많은 새들이 속속 숲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박새, 쇠박새, 진박새, 곤줄박이, 동고비와 같은 작은 크기의 새들로부터 파랑새, 호반새, 소쩍새와 같은 중간 크기의 새를 비롯하여 큰소쩍새와 원앙과 같이 몸집이 큰 새들도 딱따구리의 둥지를 기웃거렸습니다. 딱따구리는 종류에 따라 몸의 크기가 상당히 차이가 나며, 몸의 크기에 따라 둥지의 규모도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다람쥐와 하늘다람쥐도 이처럼 좋은 기회의 땅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둥지의 주인인 딱따구리와 딱따구리의 둥지에 입주하기를 희망하는 다른 친구들 사이에는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딱따구리가 하루 종일 둥지만 지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딱따구리는 아예 새로운 둥지를 다시 만드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며 은사시나무 숲은 딱따구리의 천국에서 다양한 생명체의 천국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에 더 귀함과 덜 귀함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존귀함과는 별도로 생물종 자체의 희소성, 고유성, 특이성, 학술적 가치 등을 고려하여 지정하고 보호하자는 것이 천연기념물입니다. 은사시나무 숲은 까막딱따구리, 원앙, 소쩍새, 큰소쩍새, 하늘다람쥐를 포함한 5종의 천연기념물이 이웃하여 살아가는 아주 특별한 숲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강원도의 은사시나무 숲에서만 펼쳐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은사시나무 숲이라면 어디라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까막딱따구리의 둥지가 잠시 빈 틈을 타 원앙 암컷이 알을 낳고 나옵니다.
▲원앙이 드나드는 것을 까막딱따구리가 눈치를 챕습니다. 둥지를 비우지 않고 지키니 원앙이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까막딱따구리 수컷의 공격을 받은 원앙 암컷이 몸을 돌려 나오고 있습니다.
▲땅 속 보금자리가 천적에게 노출되자 어미 다람쥐가 새끼를 입어물고 딱따구리 둥지로 피신을 합니다. 두 달이 지난 뒤, 딱따구리 둥지에서 건강하게 큰 새끼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딱따구리의 둥지는 하늘다람쥐의 보금자리로도 사용됩니다.
▲원앙 한 쌍이 다른 까막딱따구리의 둥지를 물색해 찾아낸 뒤, 암컷은 열 개의 알을 낳아 한 달을 품었습니다. 부화한 어린 원앙이 둥지에서 뛰어내리고 있습니다. 공기에 대한 저항을 최대로 하기 위하여 몸에 붙어있는 모든 것을 활짝 폅니다.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면 100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셈이며, 열 마리가 하나씩 모두 뛰어내리는데 70초 정도가 걸립니다.
▲동고비가 진흙을 물고 딱따구리의 둥지에 나타났습니다.
▲약 한 달에 걸친 리모델링을 통해 다른 새들은 침입할 수 없을 정도로 입구를 좁혔습니다. 리모델링 기간은 약 30일이며, 알을 낳아 품고, 부화한 어린 새에게 먹이를 날라 키워 어린 새가 둥지를 떠나기까지는 약 50일이 더 걸립니다. 모두 80일의 일정입니다.
▲큰오색딱따구리와 청딱따구리의 둥지는 소쩍새의 보금자리로도 사용됩니다. 소쩍새는 눈이 노란 색입니다.
▲까막딱따구리의 둥지를 차지한 큰소쩍새의 보금자리에서도 어린 큰소쩍새가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어미 큰소쩍새는 보금자리가 잘 보이는 나뭇가지에 앉아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어린 새들을 지킵니다. 큰소쩍새의 눈은 주황색입니다.
▲제멋대로 둥지를 나선 어린 큰소쩍새들을 어미 새가 한 자리에 모아놓았습니다. 관리의 편의 때문입니다.
▲여름 철새인 호반새도 딱따구리의 둥지를 이용하여 어린 새를 잘 키워냈습니다.
▲여름 철새인 파랑새 역시 딱따구리의 둥지에 터를 잡고 열심히 먹이를 날라 어린 새를 잘 키워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다양한 생명체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은사시나무 숲이 현재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은사시나무의 꽃가루와 씨앗 때문에 살기가 힘드니 은사시나무를 베자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베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봄날, 은사시나무는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며 꽃가루를 만듭니다. 은사시나무가 속해있는 사시나무속(Populus)의 나무들은 곤충이 차분하고 확실하게 꽃가루를 날라 수분을 시켜주는 충매화가 아니라, 부는 바람을 따라 꽃가루가 날리다 수분이 일어나는 풍매화입니다. 수분의 확률을 높여야 하는 데다, 기본적으로 나무 자체가 크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꽃가루의 양이 엄청난데 이 꽃가루가 문제입니다. 은사시나무의 꽃가루는 사람에 따라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꽃가루는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다니다 암술을 만나 수분을 하여 씨앗을 맺으며, 씨앗은 보다 멀리 퍼지기 위해 솜털로 둘러싸이게 됩니다. 그러니 솜털로 둘러싸인 씨앗은 이미 꽃가루가 아니기 때문에 꽃가루 알레르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씨앗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귀찮게 합니다.
은사시나무 씨앗이 함박눈처럼 날리는 늦은 봄에는 우선 눈을 뜨기가 힘듭니다. 씨앗이 입과 코로 들어올 때도 있습니다. 밖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은사시나무 숲의 노부부도 숲의 생활 중 가장 힘든 시기가 씨앗이 날릴 때라고 하실 정도입니다.
이처럼 은사시나무의 꽃가루와 씨앗이 사람을 무척 괴롭히고 귀찮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힘들고 귀찮다고 해서 생명을 베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게다가 은사시나무는 헐벗었던 우리의 산이 그나마 푸르러지는데 큰 몫을 감당했던 친구들입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 고통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정 그렇다면 베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의 은사시나무 숲은 어디라도 빽빽하게 나무가 들어서있습니다. 다 베지 말고 듬성듬성이라도 남겨두었으면 합니다. 숲 가까이 계곡 하나쯤 품고 있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차피 우리나라의 은사시나무를 싹 다 벨 수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강원도의 어느 노부부가 빚어낸 것처럼 온갖 생명이 춤을 추는 은사시나무 숲이 남겨졌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 수 있습니다.
김성호/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서남대 생명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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