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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예수님의 나자렛 회당 방문, 11세기 뉘른베르크
2011년 1월 6일 주님 공현 후 목요일
1요한4,19-5,4 루카4,14-22ㄱ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4-22ㄱ)
감각에서 초감각으로 /김찬선신부님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선뜻 동의를 하지 못합니다.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안 보면 오히려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볼 때마다 눈에 거슬리고 그래서 한 마디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관계가 갈수록 나빠지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숫제 안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보다
안 보이는 하느님 사랑이 오히려 쉽지 않을까요?
그런가 하면 정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기도하러 가서 오로지 하느님과만 대면하려고 하는데
자꾸 이웃들과 제가 하고 있는 일들에 저의 생각이 머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모든 것 다 두고 떠난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를 생각하며, 아니 그때를 대비하여
모든 것 초월하고 하느님 앞에만 오롯이 있고자 하지만
어느새 제 생각은 이웃에게 가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보여서 사랑하기가 쉽지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아서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꼴 보기 싫어 보는 것을 단념할 때 사랑은 애초에 불성립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그 먼 과정이 첫 단계에서부터 멈추는 것입니다.
왜냐면 사랑의 여정은 여러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부산 한우리 음악회 때입니다.
그때 만났던 피아니스트 중의 한 분이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연주 수준이 올라갈수록 다른 이의 연주에 관대해지고,
누구의 연주를 통해서도 배운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연주론이 아니라 뛰어난 덕론입니다.
덕이란 선과 관련한 능력인데
사랑은 덕 중에서도 이 선을 사랑하고 나누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수준이 있고 단계가 있습니다.
사랑의 수준이 낮을수록 폐쇄되고 축소된 자기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수준이 낮을수록 꼴 보기 싫은 것 투성이고
그 까다로운 자기 기준 때문에 선을 악으로 만듭니다.
사랑의 수준이 낮을수록 선에 대한 요구수준이 높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의 수준이 낮을수록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하느님 수준의 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쓰레기투성이고
쓰레기이니 보기 싫어 외면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자기가 없어지기에
까탈스런 자기 기준으로 선을 사랑하지 않고
그대로의 선을 볼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선을 쓰레기로 만드는 수준 낮은 사랑에 비교하면
수준 높은 사랑은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사람의 선을 보고 사랑하며
하느님에게서는 하느님의 선을 보고 사랑합니다.
보일만큼 작은 인간의 선도 사랑하고
너무 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선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에는
작은 선을 사랑하는 단계에서 큰 선까지 사랑하는 단계가 있고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사랑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을 사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랑에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첫 계단을 밟지 않고 높은 단계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일 ? 감동 /이영선 신부님
2009년 1월 21일 새벽 1시부터 5시. 전세 들어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재개발 때문에
길게는 몇십 년 장사하던 집에서 쫓겨나 길거리로 나앉을 처지에 몰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을 말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막힌 사정을 이야기라도 해보려 옥상으로 모였습니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경찰 특공대가 새벽에 진압작전을 펼쳐 5명을 죽였습니다.
어떻게 죽였는지는 알지만 모릅니다. 이 사람들을 도심 테러범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법정은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이 비참한 사람들에게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자기 나라 사람을 보호하기는커녕 때려죽이는 정부, 놀랍습니다.
감동은 교회가 이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억울함을 함께
풀어가기 위해 오체투지를 합니다. 단식하며 기도합니다. 천막 치고 함께 생활합니다.
전국에서 사제들과 교우들이 이곳으로 성지순례를 옵니다.
수확한 농산물을 보내고 반찬을 보냅니다. 매일 저녁 미사 하러
이 용산으로 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감동합니다.
쌍용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하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소리칩니다.
경찰은 방관하고 회사는 깡패 같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토끼몰이 하듯이 몰아가는 전쟁터입니다.
자기 회사 노동자들을 적으로 내모는 일은 놀라움입니다.
교회가 그곳에 함께 있습니다. 그 전쟁터에 천막을 치고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합니다.
함께 지내며 평화를 중재하는 교회는 감동입니다.
교회인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을 나누어 받으며 함께
머물며 기도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루어진 은총의 해입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그 순간 /이건복 신부님
저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소심해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성당 활동도 뒤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고자 했지만 책임자로는 활동할 엄두를 못 냈습니다.
한번은 중학교 때 학생미사 독서자로 선정되었는데,
독서대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일주일 전부터 하루에 몇 번씩 성경구절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드디어
미사가 시작되고 제가 독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하나도 안 틀리고 무사히 읽고 내려와
안도의 숨을 쉰 후에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너, 숨도 한번 안 쉬고 읽더라.
그리고 너무 빨라서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일주일 동안 하루에 몇 번씩
성경구절을 읽어 다 외워버렸기에 단숨에 읽어 내려 간 것입니다.
이런 성격 탓인지 저의 가족은 제가 사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셨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뒤늦게 사제의 꿈을 갖게 되었지만, 신학생 시절에도
세미나를 한다든지 대표로 발표하는 일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동창들 앞에서 강론 연습을 하는 것도 여전히 힘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제품을 받고 강론대에 서는 순간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울렁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은총의 힘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저에게 내리신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말씀이 바로 그 자리에서 성취되었듯이 저에게도
사제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성사의 은총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짐을 느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길은 열려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구원은 우리 각자가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과 함께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한평생을 마무리 하는
순간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한테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새기신 말씀 /상지종신부님
사제품을 받으려는 사람은 서품을 받기 전에 평생 간직할 자신의
성구(보통 ’서품 성구’ 라고 합니다)를 하나 정합니다. 그 말씀이 자신 안에서 살고,
자신 역시 그 말씀을 따라 그 말씀 안에서 살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품 성구를 정할 때 많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대체적으로 서품 성구와 그것을 정한 사람을 놓고 보면, ’그 신부님에게 맞는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 온 것일 겁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라는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겉으로는 제가 선택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나’, 사제로서 나’를 부르신 하느님께서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들려주신 것입니다. 제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명,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기 전 서품 성구를 정하기 위해 묵상하던 때를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어떠한 심정으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들려져야 했던 말씀 이전에,
아들 예수님께 주어진 아버지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셔야만 할 주님의 길이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과연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도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들의 환호와 경외심보다,
이 말씀을 당신의 입으로 선포하셔야 했던 예수님의 가슴 벅참과
떨림이 제게는 오히려 더욱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봅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면서 앞으로의 삶이 선명하게 지나쳐 갑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그래도 끝까지 가야할 이 길... 떨리는 마음으로,
벅찬 가슴으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제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말씀으로 하느님은 제게 들어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처음에 읽으셨던 그 말씀,
아니 당신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진 하느님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한결같이 한 길을 가셨습니다. 부족한 저이지만, 저 역시 제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며 , 주님의 길을 흐뜨러짐 없이 걸어가려 합니다.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들은 어떠한 말씀을 새기고 사시는지요?
사랑하는 벗님들의 가슴 깊이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은 어떤 것인지요?
사랑하는 벗님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통해 맡겨진 주님의 사명은 어떤 것인지요?
사랑하는 벗님들은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며, 주님의 길을 기쁘고 열심히 걷고 계신지요?
* 모든 말씀이 우리의 생명이지만, 그 중에서 특별히
자신의 온 삶을 담아낼 수 있는 말씀 하나를 정해 자신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사명으로,
자신이 걸어야 할 주님의 길로 삼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벗님들께 감히 제안을 한 번 해 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인간, 종속적인 존재 /전삼용신부님
한 청년이 위대한 항해사가 되는 꿈을 안고 세계를 횡단한 유명한 한 항해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그 항해사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 부었습니다. 특별히
항해를 잘 하기 위한 방법으로 바람의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장님, 저에게 바람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 바람? 잘 모르겠는데?”
“아니, 위대한 선장님께서 어떻게 바람에 대해 잘 모르실 수가 있습니까?
바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은 항해사의 기본이 아닙니까?”
“글쎄, 잘 모르겠네.”
그래도 계속 다그치자 그 항해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바람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어떻게 불게 되고 어느 방향에서 불어올지
전혀 예상도 할 수가 없네.... 다만 불어오는 바람을 보고
언제 닻을 올려야 하고 언제 닻을 내려야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바람과 같아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성령의 이끄심에 어떻게 잘 순종하느냐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다시 돌아오셨고 그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그리고 이사야서에 예언된 당신의 사명을 읽으신 다음
바로 이 자리에서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왜 예수님께서 미리 복음 선포를 하시지 않고 나이가 서른이 되실 때까지 기다리셨을까요?
더 먼저 복음 선포를 시작하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즉,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내리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성령님을 받는다는 것이 곧 어떠한 소명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언제 성령님이 예수님께 내렸을까요?
물론 영원으로부터 성령님과 함께 계셨지만, 특별히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고
또 오늘은 나자렛으로 이끌고 앞으로는 예루살렘 골고타 언덕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기름이 곧 성령님의 상징입니다. 세례 때나 견진 때, 혹은 병자성사 때
기름을 바르는 것은 곧 성령님의 임하심을 상징하는 성사적 행위입니다.
그리스도란 곧 그리스어로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세례와 견진을 받으면서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이니 모두 작은 그리스도들입니다.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지 못해도 그 바람에
잘 순응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항해사라면 우리 또한
성령님의 이끄심에 잘 순응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야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란 성령님을 받는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은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마치 자녀가 아닌 머슴의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결국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를 요구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큰 멍에를
짊어지는 것처럼 생각 됩니다. 이전에 하던 것들도 이제는 맘대로 할 수 없게 되고,
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성령님이 이끄시면 자신을 버리고
그 소명을 따라야합니다. 마치 머슴살이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성자께서도 성령님을 받는 동시에 인류 구원의
소명을 부여받고 오늘 그것을 선포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엇 하나에게는 종속되어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즉, 죄의 노예가 되느냐 하느님의 노예가 되느냐의 갈림길에 있는 것입니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듯이 누구나가
한 주인만을 선택하게 됩니다. 어떤 누구도 이 선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안 믿고 자신은 자유롭게 산다고 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다른 무엇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
독립적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상대가 없이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도 성자와 성령님이 없이는 온전할 수 없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느님 없이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무엇에든 종속되어야 하는데 바로 하느님의 머슴이 되고
그 분이 보내시는 성령님의 이끄심대로 소명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오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종으로서 당신 사명을
성령의 힘으로 수행하게 되어 결국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소명에 동참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는 삶이 무엇인지 누구나가 조금씩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종속되어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힘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신부님께 쌀 한포대씩만 /양승국신부님
어제 한 일간 신문을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파왔습니다.
한국 사람도 아닌 분, 멀고먼 이태리에서 건너온 신부님-한국명 김하종,
이태리 이름 빈첸시오 보르도-께서 성남에서 운영하시는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급식소가 최근 불어 닥친 불황의 여파로
운영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식사를 드시러 오시는 노숙자들은 점점 늘어나는데,
창고에 쌓여있던 쌀은 급격히 줄어들고, 불황의 여파로
도움의 손길은 거의 끊기게 되었답니다. 작년 12월
안나의 집에 전해진 위문품은 쌀 5가마가 전부였답니다.
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지 않은 미인가 시설이다 보니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지원을 기대하기는 힘들고 운영비 전액을
순수한 민간 후원자들로부터 후원받아야 하는데, 꽁꽁 얼어붙은
연말경기로 하루하루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계신답니다.
점점 늘어만 가는 노숙자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상당히 엇갈리기도 합니다. "무료급식소 사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일이다. 아무리 노력해봐야 원점이다.
괜히 노숙자들에게 의존심만 키워주고
안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할 일만도
아닙니다.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었으면 집에서 뛰쳐나왔겠습니까?
나름대로 한번 일어서려고 다들 얼마나 발버둥쳐봤겠습니까?
하다하다 도저히 안 되겠으니 거리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은 굴뚝같을 것입니다.
몇 달 이곳저곳을 전전하다보니 이제 수중에
가진 돈도 다 떨어지고,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게 된 분들이 노숙자들입니다.
그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제공하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일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하더라고 분명히 하셨을 일입니다.
존경하는 노숙자들의 천사 김하종 신부님께서
운영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계신답니다.
내일 당장 쌀 단 한 포대라도 보내드려야겠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감사하다고 인사라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신 김하종 신부님께서는
1987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1990년 한국에 오셨답니다.
외환위기의 한파가 몰아쳤던 1998년에 후원자들의 정성을 모아
"안나의 집"을 설립하셔서 실직자와 노숙자에게
식사,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종"이 되겠다는 결의에서 "하종"이라는
한국 이름을 스스로 지으셨다는 김하종 신부님은 늘
우리나라(한국)에서 봉사하다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말씀하신답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앞으로 수행하실 사명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 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다음의 김하종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들어보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가끔 신선한 야채를 사서, 갓 구운 빵을 가져다가 노숙자들에게 원 없이 퍼주는 꿈을 꿉니다."
"안나의 집은 비록 가건물이지만 이곳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합니다.
노숙자들은 모두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한시적으로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지만
그들은 누구 못지않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생명입니다."
"안나의 집에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일해 주는데 저는 그들에게 정말 성의 있게
이 일에 참여할 것을 부탁합니다.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하는 식단처럼
풍요롭지 않더라도 청결하고 정성스럽게 해야만 한다고 <잔소리>를 합니다.
밥을 먹기 위해서 늘어선 긴 행렬, 그들 중에 내 절친한 친구 예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활동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 성당은 바로 여기 안나의 집이에요.
제가 평생 섬길 사람은 여기 버림받고 가난한 이들이고요."
사랑의 운명 /김찬선신부님
물의 세례.
성령의 세례.
사랑의 세례.
이런 세례를 받으면 큰 축복이겠지요?
하느님께서 나에게 성령을 퍼부어주신다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위에서 듬뿍 내려주신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축복이겠습니까?
성령의 세례, 곧 사랑의 세례를 받게 되면
이는 곧 고통 가운데로 들어감을 의미하고
가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가운데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다시 말해서 공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기 전,
성령의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시어 광야로 내몰리시고,
그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짓눌린 사람들에게로 내몰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성령의 힘을 지니시고 갈릴래아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것이 사랑의 성령을 듬뿍 받은 사람의 운명입니다.
사랑의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전영동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
“이 성경은 오늘 여러분의 귀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라고 직역됩니다.
오늘 우리들 귀 안에서는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험담과 음해, 욕망과 쾌락, 시기와 질투, 탐욕과 욕심.
2천년전 예수님께서는 기쁨과 해방, 은혜와 평등을
그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고 이루셨건만, 정작 오늘 우리들 귀 안에서는
지옥(地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루가 4,14)을 지니고 선포하시고 이루셨습니다.
성령의 힘을 지닌 사람은 하늘나라를 이루어 삽니다.
그러나 험담과 음해, 욕망과 쾌락, 시기와 질투, 탐욕과 욕심,
악령의 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지옥(地獄)을 이루며 살게 됩니다.
오늘 내 귀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성령의 힘으로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누리시는 나날이 기쁜 날 되시길 바랍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의 正體 /강영구 신부님
예수님, 당신은 언제나 감추어진 모습으로 저희에게 다가오십니다.
옛날, 고향 나자렛 마을 사람들 앞에서도 그러했지만,
오늘 저희들에게도 당신은 감추어진 인물입니다.
아스라엘 사람들은 수 백 년 동안 이사야 예언서 61, 1 - 2절을 성취시켜줄 인물,
즉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회당에서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예언자 이사야가 말씀하신 그분이라는 폭탄선언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반신반의(反信反疑) 합니다.
이웃집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목수 예수가
메시아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베들레헴의 동굴에서 보잘 것없는 가난한 아기로 태어났을 때에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에도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도
어부와 세리를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
당신은 감추어진 인물입니다.
더구나 십자가 위에 매달린 당신의 모습은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오늘도 당신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늘 그런 모습으로 역사(役事)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작고 보잘 것없는 것,
힘없고 나약한 것,
어린아이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섭리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성령의 새 시대는 크고 엄청난 인물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인물을 통해서 열립니다.
예수님,
저희가 당신의 신비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당신과 동류(同類)가 되는 수 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저희가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작고 가난한 자가 되면
비로소 당신의 신비를 알아듣게 됩니다.
작고 가난한 마음을 지니게 되면
그 때 눈이 열려 당신이 구세주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저희로 하여금 작고 가난한 사람이 되어
철저히 당신께 귀의(歸依)하게 하소서 (一明)
참된 어부, 영적인 어부 /이중섭 신부님
천주교 신자들은 ‘전교’라는 말만 나오면 주눅부터 듭니다. 30년, 40년
신앙생활을 했어도 예비신자 한 사람 인도하여 영세시키지 못한 이가
수두룩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끌어올리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배에 앉아 낚싯줄을 던집니다. 낚싯줄을 던져놓고 ‘물고기야,
이리 오너라’ 하고 앉아 있으니 눈 먼 물고기 한 마리 못 낚습니다. 그나마
낚시 드리우고 조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전교를 잘 할까요? 첫째,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어부는 물고기가 미끼에 걸릴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릴 줄 압니다. 미끼는 우리의 좋은 모범입니다. 둘째,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부는 풍랑을 이겨내는 강인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한두 번
방문하고 거절당했다 하여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거절하는 것은 더 많은
기도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표시입니다. 셋째,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현명한 어부는 고기잡이할 때를 압니다. 이웃이 어려울 때 말로만 위로할 게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도 주어야 하되,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넷째, 물고기에
맞는 미끼를 써야 합니다. 상대방을 올바로 파악하고 뭐가 좋은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섯째, 자신을 숨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부의 모습이 보이면
물고기는 미끼를 물지 않습니다. 자신의 학식이나 재능을 드러내려 하면
전교는 실패합니다. 자신을 숨기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 사람 /양승국 신부님
언젠가 한 고위관료가 소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전체 아이들이 모두 강당에 모였습니다.
오신 김에 마이크를 잡고 아이들에게 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사람,
둘째,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셋째,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
여러분들께 당부 드립니다.
여러분들,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정말 황당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씀을 드러내놓고 하실 수 있는지요.
저희 사부이신 돈보스코 성인과는 마인드가 어찌 그리도
다른지요. 돈보스코 성인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꼭 필요한 사람, 둘째, 반드시 필요한 사람, 셋째, 정말 필요한 사람.”
아무리 못돼먹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구제불능의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막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가치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냥 무턱대고 보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소중한 이유는 그 누구라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숨 쉬고 있는 한 우리는 하느님께 돌아설 희망이 있습니다.
생명이 아직 붙어있다는 것, 이것 보통 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이것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도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 두 발로 서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중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함부로 대합니다.
단 한번 뿐인 소중한 인생을 물 쓰듯이 탕진합니다.
금쪽같은 순간들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가장 쓸쓸한 얼굴로, 가장 우울한 모습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 사이에 파견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전력투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또 다른 예수님이 됩니다.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분께서 하셨던 일을 우리도 따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셨던 모범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에게 하셨던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세상 속으로 파견하십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야겠습니다.
길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과 노숙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소년원과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시각장애우들의 도우미가 되어드려야겠습니다.
환우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도록 만들어드려야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사랑의 삶을 살아가자 /경규봉 신부님
우리가 행하는 사랑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되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다른 형제들을 사랑한다.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 안에서 표현된다.
하느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구약성서에 이미 예언된 메시야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를 사랑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즉, 신앙인은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 계명은 결코 무겁지 않다(마태 11,30).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4,19)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설사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용서해주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교회를 적대하는 세상과의 투쟁에서 승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고(요한16,33; 19,30),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힘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요한 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이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되, 당신의 모습을 닮게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사랑은 삶의 본질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행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참된 삶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사랑이 없는 듯이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로는 "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5,17)라고 말한다.
인간의 육정이 성령을 거스르기 때문에 사랑을 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육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며, 육정을 채우려고만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기에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그 사랑은 자신의 육정과 이익을 구하는 것일 뿐 결코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듯이 느껴진다. "육정이 빚어내는 일은 명백하다. 곧 음행, 추행,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그와 비슷한 것들이다.”(갈라 5,17.19-21) 이 안에는 사랑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습대로 돌려놓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하신다. 또한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이다.”(갈라 5,22-23)
그러므로 주님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자.
당신 외아들까지 바치는 그 깊은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자. 그리하여
우리 안에 성령께서 머무르시고,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를 가슴에 담아
사랑과 기쁨, 평화와 친절, 진실과 온유의 삶을 살아가자.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주영길 신부님
어느 주일 저녁 옆 본당 동창 신부에게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성당 앞에 막 다다랐는데 맞은편 교회에서 나오는 한 무리의 자매님들과 마주쳤다.
모른 척하고 지나치려는데 나를 불러 세웠다.
“아저씨, 성당 다니면 구원 못 받아요. 우리는 저녁 예배 보고 오는 길인데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우리 목사님 말씀은 은혜가 넘치고 우리는 구원받고 오는 길이랍니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이미’와 ‘아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우리는 복음서 전체에 깔린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이미’ 시작된 심판을 상기시켜 주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3,9)
반면 예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을 예고하신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21,27)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지나친 공포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거나,
반대로 ‘싸구려 구원’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당신의 사명을 밝히고 계신다.
너무도 당당하고 거침없는 선포다. 바로 이사야의 예언대로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바람이 채워지는
‘기적’만을 요구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다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다
(4,42-44 참조). 그들에게 ‘이미’와 ‘아직’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가끔 ‘신부’인 나에게 너무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신자들이나
어려워 말도 못 붙이는 이들을 보면 낯이 더 뜨거워진다. 내 모습은 그게 아닌데
신자들은 너무 ‘완벽한 신부’로 바라봐 주는 것은 아닌가! 태어나면서부터 ‘성직자’는 없다.
성소의 씨앗을 잘 가꾸고 또 사제로서 열심히 살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사제는 수품을 통해 ‘이미’ 되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사제로 남아야 하기 때문에
‘아직’ 완성된 존재는 아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모든 인생도 그러하리라.
일상의 성화 /오상선신부님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루가 4,16)
<일상의 聖化>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기 짝이 없다.
자신이 참으로 좋아하던 일인데도
얼마 지나면 싫증을 내고 하기 싫어하고,
또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하던 것인데도
얼마 지나면 내팽개치고 새로운 무엇을 쫓아간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꾸만 많아지는 것이 물건들인데
그 중에서도 옷 종류가 자꾸만 많아진다.
이런 저런 기회로 얻어 입게된 것들이다.
그런데 정작 내가 즐겨 입는 옷은 단 몇가지 뿐이다.
그 중에서도 수도복이 참으로 편안하다.
몇년을 계속 입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20여년 동안 수도복을 한번 바꾸기는 했지만
정말 아무리 오래 입어도 싫증 나지 않는 옷이 수도복이다.
아니, 오히려 오래된 옷일수록 더 정감이 간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미사하고
청소하고 밥먹고
좀 쉬다가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고
강의를 준비하고
만나야 할 사람 만나고
낮기도하고 점심먹고
또 좀 쉬다가
이런저런 일을 하고
묵상과 저녁기도를 하고
저녁을 먹고
좀 쉬고
형제들과 대화하고
말씀 묵상하고
TV News 보고
때론 <미우나고우나>도 보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삶이 때론 마음에 안들 때가 있다.
가끔 <야, 이렇게 사는 게 수도생활인가?>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
주일이 되면
의례 성당에 가고
월요일이면 아침미사 가고
화요일에는 저녁미사
수요일에는 레지오
목요일에는 주부미사
금요일에는 ... 봉사
토요일에는 구역모임...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의구심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
아침먹고 바쁘게 출근하고
하루종일 열심히 직장생활하고
저녁에 돌아와 씻고
좀 쉬다가 TV 보고
가끔씩은 외식하고
가끔씩은 친구만나 술한잔 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인가 하고 의구심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
우리의 일상
늘 그렇고 그런 일상
이것을 성화시켜야 한다.
이 일상이 나를 성장시키는 길이고
구원의 길임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주일)이 되시자
늘 하시던 대로(매 주일)
회당(성당)에 들어가시지 않았는가?
일상 안에서
때가 온다.
주님의 영이 내리는 때가 온다.
그 때를 기다리라.
그 때가 오면
모든 것이 열리리라.
깨달음의 때가 오리라.
깨달음은
이렇게 일상을 통해서 온다.
오늘은
나에게 그 영이 내리는 <오늘>이길 기도한다. 희망한다.
그리고
나 아닌 너에게도 그 영이 임하시길 축원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휴대폰 번호를 바꾸지 말아야 할 이유 /양승국신부님
오늘도 정들었던 한 아이를 떠나보냈습니다.
한 명 한 명 아이들이 떠나갈 때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하기만 합니다.
물론 오늘 떠나간 아이는 법적 수용기간인 6개월을
잘 지내다가 가는 아이였습니다.
이곳에서 생활을 너무도 잘했던 아이,
매사에 적극적이고 붙임성이 있던 아이,
싱글벙글 잘 웃던 아이였기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아이였습니다.
꼭 붙잡고 싶었지만 올 봄에 중학교 복학을 목표로 가는 아이였고,
연로하신 외할머니가 꼭 곁에 두고 싶었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만 했습니다.
아이를 떠나보내기 직전,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아이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만기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대한 기쁨,
남지 않고 떠나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 감사함이 합쳐져 묘한 표정이었습니다.
저 역시 잘못하다가는 눈물이 나오려는 난감한 분위기였기에
할 수 없이 늘 준비되어 있는 썰렁한 농담 몇 가지를 던졌습니다.
그리고 늘 써먹는 레퍼토리를 꺼냈습니다.
먼저 제 이름과 휴대폰 번호, 이메일 주소가 적힌 명함을 건냈습니다.
"**야, 잘 하리라 믿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연락 하거라.
꼭 경찰서 넘어가서 전화하지 말고 미리미리 연락 하거라.
그리고 내 휴대폰 번호는 절대로 안 바꿀테니,
여자 친구 생기면 꼭 연락해라. 주례는 내가 서줄게"
작별인사를 이미 다 끝냈건만 아이는 떠나가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면서 꾸벅꾸벅 인사를 계속했습니다.
현관 앞에서 두 번, 경비실 앞에서 세 번, 대문 가까이서 두 번...
"그만 어서 가라"고 해도 또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꾸벅꾸벅 인사를 계속하는 아이를
바라볼 수가 없어서 저는 먼저 안으로 들어왔지요.
괜히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런 기도를 간절히 드렸습니다.
"주님, **이가 이제 저희를 떠나갑니다. 저 젊은이의 앞길을 축복해주십시오.
갖은 위험에서 지켜주십시오. 세상의 유혹을 떨치고
가야할 길을 제대로 걸어갈 강건함을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의 본질을 만민 앞에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 한 일생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잉태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세례 때에는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모양을 한 성령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예수님은 비로소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신이 행하신 모든 치유나 구마활동, 기적은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맛있는 햄버거 세트나
시퍼런 세종대왕 한 장의 용돈, PC방 2시간 같은 것들을 기대하지요.
그러나 물질적인 것은 결국 한계가 있더라구요.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신앙을
전수해주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고통, 실패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신앙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 이상,
올바른 신앙교육을 시키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자들부터 먼저 성령 안에 살면서 성화(聖化)되는 일,
아이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일, 아이들에게 하느님과 관련된
좋은 추억거리들을 만들어주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임을 확신합니다.
2010.1.6 주님 공현 후 목요일
1요한4,19-5,4 루카4,14-22ㄱ
승리의 삶 /이수철 신부님
그 누구도 살아있는 동안
세상과의 싸움에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평생 세상과, 자기와
싸워야 하는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하느님께는 저도 세상에는 이겨야 하며,
남한테는 저도 자기에게는 이겨야 합니다.
이래서 하느님의 도움이 필수입니다.
하느님께 힘 받아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아빠스님의 고백의 글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고백 신부가 나에게 ‘당신은 얼마나 당신 성격의 온갖 결점에 거슬러
싸워왔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나의 삶 모두를 다해 싸워왔습니다.’라는 것이
나의 유일하게도 진실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그분은 다음과 같이 나에게 조언하셨다.
‘포기하지 마라. 그러나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라.”
평생 싸움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며,
그렇다 하여 그 싸움에
사로잡히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 속절없이 무너져
세상의, 자기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요,
싸움에 매이는 순간 여유를 잃기 때문입니다.
바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승리를
노래할 때 가능한 평생 싸움입니다. 하여
평생 승리의 삶을 살기위해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아침 성무일도 중 이사야 찬미가 중 마음에 와 닿은 구절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구원자시니,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두려움이 없나이다.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오 나의 노래이시며, 나를 구원하셨나이다.”
아무도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세상을, 나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승리에 참여할 때 비로소 승리의 삶입니다.
사도 요한의 다음 고백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 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바로 믿음의 승리는 하느님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믿을 때
하느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것이며 저절로 세상을,
자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의 승리일 뿐 아니라 또 사랑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에게서 나온 형제사랑이
세상과의 싸움, 나와의 싸움에 승리로 이끌어 줍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를 세상과
자기로부터 초연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잃어버리면
삶은 공허하고 무의미해져
곧 세상의, 자기의 노예가 되고
이어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주님을 믿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비로소
주님의 승리에 참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 이 미사 중
우리가 듣는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과 자기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어
당신의 승리에 참여하여
오늘도 우리 모두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강영구 신부님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4, 18-19. 21)
제2이사야는
위로의 책(이사 4, 1-66, 24)에서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노래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읽으신 대목은
위로의 책 중에서 이사야 60, 1-2의 대목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고 선언했다.
고향 나자렛 사람들 앞에서
목수 출신 예수는 전대미문의 폭탄선언을 했다.
자신이야말로 이사야가 예언한
바로 그 인물이라는 주장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과연 고향 마을 나자렛 사람들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를 배척하고 말았다.
구원의 시대, 성령의 시대, 해방의 시대,
자유의 시대, 주님의 은총의 해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엄청난 사건이나
위대한 인물을 통해서 도래하지 않는다.
사소하고 작은 일상을 통해서,
목수처럼 보잘 것 없는 이웃을 통해서 도래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늘 그랬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났을 때,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치스럽고 허황된 일에 길든 인생들은
눈이 멀어서 가까운 이웃과 작은 일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하지 못하고
엄청난 사건이나 위대한 인물을 찾고 있다.
그러나 크고 엄청나고 화려하고
대단한 것 가운데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一明)
♪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느님 (Sitivit anima mea) - Palestr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