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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의 유래와 자연환경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에 있는 어항.
소래(蘇萊)라는 지명에는 여러 가지 유래가 있다. 먼저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의 관련설이다. 660년(무열왕 7) 나당 연합군을
결성한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장수 소정방을 출격시켰는데,
그때 출발한 곳이 중국 산둥성의 내주(萊州)였고, 도착한 곳이 오늘
날의 소래포구 지역이었다. 그래서 소정방의 소(蘇)와 내주의 래(萊)를
취해 ‘소래’가 되었다는 설이다.그 밖에 과거 이 지역의 냇가에 소나무
숲이 울창해 ‘솔내(松川)’로 불리다가 소래가 되었다는 설, 이 지역의
지형이 소라처럼 생겨 소래가 되었다는 설, 그리고 지형이 좁다는
뜻의 ‘솔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소래포구의 북동쪽에 소래산(299m)이 있다. 이 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인천의 진산’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이 밖에
오봉산(106m), 관모산(162m) 등 야트막한 산지가 소래포구의 북쪽에 분포
하고 있다. 바다에서 육지쪽으로 들어온 곳에 위치한 소래포구는 인천광역시와
경기도 시흥시의 경계를 이루는 뱀내천(신천)의 하구로, 이 하천은 만수천,
장수천, 은행천, 내하천이 합류해 바다로 흘러드는 하구의 명칭이다. 소래포구
일대는 과거 간석지였으나, 인천의 여느 바다와 같이 대부분
매립되어 대규모 공단,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바다 건너 시흥쪽으로 가는 작은 도선장이었던 소래포구 지역은 1930년대
염전이 생기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37년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수원
과 인천 사이에 협궤철도(狹軌鐵道, 수인선)를 부설할 때, 천일염을 수탈
하기 위해 소래역을 만든 이래로, 소래포구는 작업인부와 염분를 실어
나르는 배들이 정박하면서 더욱 활성화됐다.1974년 인천내항 준공 이후,
새우잡이 소형어선이 정박 가능한 소래로 포구를 옮기면서 새우 파시로
발전하여 수도권의 대표적인 재래어항이 되었다. 여기에 지리적 근접성,
수인선 협궤열차와 소래철교 등의 요소가 어우러져 지금은 연평균 300만
명의 소비자와 관광객이 찾는 곳이 되었다. 이에 관할청인 인천광역시
남동구청과 소래포구 축제추진 위원회는 2001년부터 ‘인천 소래포구 축제’를
열고 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문화관광 예비축제로 선정됐고, 2010년
, 2011년에는 유망축제로 선정된 바 있다. 한편 소래포구의 시작이었던
염전은 1996년 폐쇄되어 현재는 소래습지생태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08)
『인천의 땅이름』(이형석, 가천문화재단, 1998)
「소래포구 유역의 역사성과 다큐멘터리 사진적 표현: 수인선
소래철교 1996~2009」(최용백, 경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경계공간으로서의 해안가 특성 분석을 통한 새로운 부둣가 디자인에
관한 연구: 인천 소래포구 어시장 부둣가를 중심으로」(이윤호, 경희대학교
건축조경전문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인천광역시 소래포구 어시장 재개발 계획안」(박순재,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인천광역시 남동구청 소래포구축제(www.namdong.go.kr/soraefestival)
인천광역시 동부공원사업소(grandpark.incheon.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소래포구 [蘇萊浦口]의 겨울풍경
▼소래포구의 6월풍경
↑ 소래철교 아래로 썰물로 바닷물이 빠져 오래된 교각이 그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정박한 배의 꽁무니가 보이는 쪽이고 인천광역시 소래마을이고 반대편
으로아파트가 살짝 보이는 쪽이 경기도 시흥시 월곶포구입니다.
일제는 1937년 경기도 이천·여주 쌀과 소래 등지의 특산품인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반출하기 위해 수원역과 남인천역간 수인선(52.8㎞)을
완공, 협궤열차를 운행했다. 그리고 여주·이천에서 생산되는 최고품질
의 쌀을 본국으로 보내기 위해 수원과 여주간 「수여선」과 함께
「수인선」을 이용한 것이다. 민간이 부설한 철도로, 순전히 경제적
목적의 철도로 처음에는 경동철도라 불리다가 후일 다시 수인선으로
바뀌었으며, 소래포구의 철교도 「경동철교」에서 나중에 「소래철교」
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어쨋거나 소래포구의 정취
뒤엔 이런 수탈의 역사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jongsulim/110080328550 )
수인선 협궤열차는 1996.2.1일 그 기적 소리를 멈췄고 지금은 그때의
소래철교가 시흥 월곶과 인천 소래시장을 건너다니는 추억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근래 소래철교를 두고 양쪽 지자체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철거해버리자는 시흥쪽의 논란이 있었으나 역사적 가치때문에 보존하자는
논리에 의거 지금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공사를 하고
있었서 현재는 통행이 불가하여 입구에서만 구경이 가능합니다.
↑ 소래철교를 건너는 다리목에서 오랫만에 사진 한장 남겨봅니다.
↑ 소래포구 기념광장 주변의 너른 밭에서 자라 누렇게 익은 6월의 보리밭
풍경입니다. 낱알 한개 한개가 참 튼실하게도 영글었습니다.
↑ 소래포구와 소래시장의 옛 정취를 흠씬 느끼게 해주는 부조물 형상입니다.
상 위에는 생선구이와 몇 가지의 해산물이 안주로 놓여 있고, 둘러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옆에 빈자리는 어쩌면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그리운 친구, 아마 당신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 어른들 술 마시는 자리에 제 큰딸 아이가 한자리 잡아서 이런저런 반찬과 안주를 살펴봅니다.
↑ 수인선 소래철교 위에 기적을 울리며 달렸던 수인선 꼬마열차 즉,
협괘열차입니다. 1996년 2월에 퇴역하여 지금은 소래포구
기념광장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수인선 협궤열차에 올라타고 군자역쯤에서 하차하여 오이도로
걸어나가면서 굴을 따먹던 그 당시의 연인들은 모두 장년이 되어
버렸고, 시장을 지키던 아주머니들도 대부분 할머니가 되었다.
수인선 역중 유명한 곳으론 단연 소래역(蘇萊驛)을 꼽을 수 있다.
가끔 소래포구 시장의 음식점에서 나이든 아주머니들로부터
이야기를 듣자면 수인선과 소래포구에 대한
추억이 이렇게 떠돌아 다닌다고 한다.
"꽃게철이면 어머니와 수인선을 타고 소래로 나가 큰 들통에
꽃게를 가득 담아 들고 오곤 했어요. 저녁에 식구들이 둘러
안아서 마파람에 게눈 감추 듯 꽃게찜을 해치우던 추억이 선합니다."
그리고 운행이 중단되기 전까지만 해도 송도역 주변엔 꼬마협궤
열차를 타고가 농수산물을 파는 아낙네들의 『반짝시장』이 유명
했다고 한다. 당시 철도역 주변으로 형성되던 반짝시장, 번개시장
이라는 것인데 소래에서 갓잡아 올린 싱싱한 수산물과 인근 농촌
에서 가꾼 각종 채소들을 꼬마열차에 싣고 올라 송도역 앞에서
장을 벌인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jongsulim/110080328550 )
↑ 언제나 삶의 에너지가 충만한 곳, 소래포구 소래시장 안의 상인들과 싱싱한 해산물들입니다.
↑ 작은 굴비들인데 보통 저렇게 한바구니가 10,000원 아니면
15,000정도 합니다. 가끔 한바구니씩 사가지고 가서 구워서
먹는데 역시 소래포구의 굴비맛입니다. 음식은 맛으로도 먹지만
삶의 정이 듬뿍 담긴 정성으로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 정겨운 맛을 주는 곳이 곳 소래시장입니다.
↑ 소래시장의 새우젓인데 이것이 오젓인지 육젓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때는
수도권의 아낙들께서 김장철이 되면 수인선 꼬마열차를 타고 소래시장
으로 와서 각 가정에 겨울을 날 김장김치를 담그기 위해 이곳의 새우젓을
사갔다고 합니다. 그만큼 서민들과 가까이 있었던
곳이 곧 소래포구요 소래시장이었습니다.
↑ 서해산 참꽃게라고 합니다. 이것 사다가 꽃게 등껍질이 빨갛게 되도록
쩌셔 먹으면 노릇노릇한 알과 게살이 씹히는 고소한 맛이 아주 매력적
이더군요. 가끔 한통씩 퍼덤아 가서 꽃게찜을 해먹기도 하는데 정말 맛
좋습니다.
↑ 소라와 해산을 사다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서로 경쟁을 하면서 파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 집이 그 집이고 그 가격이 그 가격입니다. 인심 후하게
파는 상인들의 모습 정말 정겹고 흥이 넘칩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소래포구 어판장 주변으로 늘어선 고만
고만한 젓갈집, 생선집, 조개구이집들에선 지나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는 사실이다.
'젓갈 좋아요. 갈치가 다섯 마리에 만원입니다. 광어회가 만원,조개 한
무더기에 2만원,싱싱한 새우.....'아, 하나 더 주면 손해인데...자요 ! 하나 더
드릴테니 다음에도 꼭 우리집에 오세요.'
(출처: http://blog.naver.com/jongsulim/110080328550 )
↑ 새우젖을 파는 가게입니다. 마지막에 꼭 한국자 더 담아 줍니다. '아, 조금
더더 주면 손해인데...자요 ! 다음에도 꼭 우리집에 오세요'
↑ 소래포구 수산물 경매장이 있는 곳의 어판장 모습입니다. 경매로 낙찰받은
해산물을 판매하는 곳입니다. 비릿한 생선냄새가 코를 찌르지기도 하지만
역시 사람사는 세상의 활력이 더 넘치는 곳입니다.
↑ 소래포구 어판장 주변의 갈매기떼들인데 손쉽게 먹이를 구하는 방법을 터득한
녀석들이라 버려진 고기와 고기를 손질하고 남은 생선의 내장을 낼름 집어 갑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예리한 눈매가 신기롭지요.
↑ 소래시장과 소래포구의 바닷가 사이로 난 해안통로 입니다. 주변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즉석회를 안주 삼아 약주를 즐기는 관광객과 장을 보러온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소래시장에서 가서 값싸고 싱싱한 회안주로 약주 한잔
하지 않으면 소래포구 다녀왔다고 할 수 없지요.
↑ 소래시장에서 먹었던 우리 가족의 해물찜입니다. 없는 것 빼고는 다 들어가 있는
해물찜인데 매콤하면서 입에 짝 달라붙는 맛에 환장합니다.
↑ 맛있는 해물찜과 소박한 조개칼국수 1인분으로 점심식사를 갈끔하게 해결합니다.
↑ 소래포구에 정박해 있는 어선과 포구와 나란한 소래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빨간색 파라솔이 보이는 곳이 어판장이고 그 뒤의 창이 3개
보이는 건물이 소래시장수산물경매장입니다.
↑ 소래포구의 어선들과 시흥 월곶마을의 모습이 보입니다.
↑ 해당화 붉게 피어있는 소래포구 장도포대지 주변입니다.
색깔 고운 해당화에 매료되어 봅니다.
생선과 새우젓 그리고 고깃배만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소래포구에도 이런
운치있는 풍경이 숨어 있습니다. 해당화가 대체로 서해안의 해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원산지는 우리나라이고 고깃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신랑을
기다리며 연분홍 사랑의 마음을 수놓고 바닷가에 서 있는 섬으로 시집 온
새색시의 수줍음과 같은 ?이라고 했던가. 참으로 곱고 아름다운 자태의 꽃입니다.
↑ 연분홍 해당화
↑ 순백색 해당화
↑ 이것은 무엇이라 부르는 꽃인지, 장도(노루섬)포대지에 있는 꽃입니다.
금낭화 보다는 길쭉한 꽃인데 줄기를 타고 커는 나무에 핀 꽃입니다.
↑ '차마 꿈엔들 잊으리오' 향수(鄕愁)와 같은 추억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뽕나무의 열매 '오디'의 설익은 모습입니다. 흔하지 않은 오디를
소래포구 장도포대지에서 보게 되는군요.
↑ 장도포대지(獐島砲臺地)
적의 포격을 방어하고 아군의 사격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세운 인천 소래포구
인근에 있던 포대로 '댕구산 포대'라고도 한다. 서해안으로 들어오는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인천 연안에는 진(鎭)과 포대를 세웠다.
조선시대인 1877년(고종 14) 일본이 서해안 개항지를 물색하자 고종은 인천을
개항 후보지로 요구할 것에 대비해 인천 연안에 화도진(花島鎭)을 설치하였는데
그 무렵 소래에도 포대를 설치하였다. 소래 장도 포대는 1878년 8월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로 하여금 화도진과 연희진을 착공하게 한 뒤 이듬해인 1879년
7월에 준공하였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일부 발췌)
↑ 장도포대지(獐島砲臺地)에 설치된 포신
↑ 장도포대지(獐島砲臺地) 댕구산(해발 40m)을 오르는 계단입니다. 해발
40미터이나 소래포구를 지키는 요충지입니다.
↑ 장도포대지(獐島砲臺地)에서 본 소래철교 교각입니다. 오래되고 부식정도
가 심해서 보수공사를 거쳐 보존처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는 소래철교
위를 왕래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 장도포대지(獐島砲臺地)에서 소래포구를 벗어나면 곧 시흥의 옥구도요 또
오이도 였다. 하지만 한국 근대사에서 염전이 활발하던 곳이었으나 개발의
붐에 밀려 염전은 사라져 시흥의 시화공단과 시화신도시가 생겨났습니다.
자연히 옥구도와 오이도는 뭍과 연결되어 이제는 더 이상 섬이 아닌 이름만
오이도, 옥구도로 남게 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은 현재 시흥시 옥구공원이 있는 옛 옥구도에 취락을 형성하고
집단적으로 모여 살면서 신사(神社)까지 지었고 그 후, 포동에 신촌이
형성되면서 충청도의 노동력들이 염전을 찾아 대거 몰려들었다고 한다.
시흥의 한적할 것 같던 바닷가가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국내 외지인
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근대의 시작'은
이처럼 바닷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군자염전 터 남쪽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오이도가 있어 이곳 바다 풍경의
끝자락을 펼쳐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석기 패총이 무더기로 발굴된
곳이니, 선사시대 이래 인간이 터를 일구고 살아온 곳이다. 예전의 오이도는
시화호 개발로 사라졌고, 갯벌을 매립한 곳에 계획도시가 들어섰다. 조개
구이집 등 횟집이 즐비한 지금의 오이도에서 수인선의 정취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오이도니 옥구도니 하는 시흥의 작은 섬들도 이젠 사진처럼
펼쳐진 12km나 되는 방조제가 오이도에서 대부도 방아머리까지 연결되어
차량이 쉴새없이 오간다. 말이 오이도지 시화공단과 또 시화방조제 대부도와
연결되어 더 이상 섬이 아니다. 갯벌 가운에 유유자적했었던 오이도는 간데
없고 그 자리는 나들목 같은 분주함과 새롭게 단장된 콘크리트 방파제와
주말을 찾는 많은 손님들과 함께 몰려 다니는 한떼의 갈매기들 뿐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jongsulim/
어부의 아내/박양숙 노래
푸른물결 춤추고 갈매기떼 넘나들던 곳 내 고향집 오막살이가 황혼빛에 물들어간다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위에 올려놓고 고기잡는 아버지를 밤새워 기다리신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푸른물결 춤추는 그 곳 아~ 저 멀리서 어머님이 나를 부른다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위에 올려놓고 고기잡는 아버지를 밤새워 기다리신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푸른물결 춤추는 그 곳 아~ 저 멀리서 어머님이 나를 부른다 ♬ 어부의 노래 - 박양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