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강화3.1운동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신강화사’를 참고로 요약해봤습니다. 정말이지 그 분들보다 열심히 하늘을 사랑하고 있나 부끄러운 마음 이였습니다.
하늘의 결사대가 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하 문책:
와까즈끼에이꼬)
청일전쟁(淸日戰爭), 러일전쟁(露日戦争)에서 승리를 거둔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해서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국내에서 국권수호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어난 을사의병,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정미의병(丁未義兵)입니다.
강화 진위대(鎭衛隊) 해산도
다른 지역과 같이 일제의 기만(欺瞞)적인 방법으로 해산 되었으나
유명규(劉明圭), 연기우(延基羽),
지홍윤(池弘允) 등 참교(參校 : 조선말기의 하위 무관직)들 이하 병사와 군중들이 봉기(蜂起)하여 파출소를 습격해, 결국 친일군수(親日郡守)를 타살(打殺)합니다. 그러나 월등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위해 황해도와 임진강 방면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주도자 유명규는
체포되어 희생했습니다.
의병투쟁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도 전개되었습니다.
즉 교육, 언론, 종교, 등 문화활동과 산업진흥(産業振興)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하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1896년사이에 개화파 내각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 운동) 이후에
강화에 성내공립보통학교(현 강화초) , 합일학교(현 합일초)가 설립되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식민지로
전락한 후, 민족은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에 의하여
인간의 기본권리마저 박탈한 상황 이였습니다. 그 상황 속에 1914년에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에 끝나자, 미국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민족의식을
지닌 한 집단이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상)를 제시하였습니다. 국제정세 변화로 식민지 국가들에서 민족해방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 되자,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열강에게 민족의 독립 열망을 보여주기 위하여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습니다.
독립만세운동은 종교계와 학생을 중심으로 준비되어
33명의 민족대표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대표들은 1919년 3월1일 태화관(泰和館: 현재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음식점) 에서 독립선언서를 난독하여 만세 삼창한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학생들의 주도로 대규모 시위를 벌여줬습니다. 일제는
헌병 경찰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였지만, 시위는 전국에 전파되었습니다.
서울, 인천에
인접한 강화는 3/10경에 시위소식이 전해왔습니다. 강화
독립만세 계획은 기독교 북감리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습니다. 특히 길상면 길직교회 권사 유봉진 (劉鳳鎭)는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인 애국지사였습니다. 3/5~6경, 유봉진은 서울 시위에 참여한 황도문(黃道文)으로 소식과
문서를 접하자, 감리교 신자인 친족과 상의하여 강화만세 운동을 계획했습니다. 이어서 유봉진은 3/8 강화남부지역을 담당한 길직교회 이진형 목사에게
상황을 전하였습니다. 9일 길직리 교회당에 길직교회, 선두교회
지도급이 모인 가운데, 서울 시위에 참석한 조종환(趙鍾桓)이 시위의
필요성을 연설하였습니다. 이어 강화 만세운동 거사일(擧事日)을 사람이
모인 장날로 할 것을 제의하여 18일(음력 2월17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강화군민에게”라는
문서를 만들고 배부하여, 3/11부터 독립선언서, 독립가, 국민회보, 강화인민에게 등 4종의
인쇄물을 도내 각지에 배부하였습니다.
유봉진은 3/12
온수리를 출발하여 각지를 다니며 시위계획을 알렸습니다. 16일에는 주문도 교회에서 120여명 신도들에게 “파리강화회의(講和會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9년 1월부터 전쟁의 뒤처리를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연린 회의. 연합국 27개국 대표가 모임)에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줘야 함”을 호소하여 “나는 그 운동을 위하여 결사대원이 될 것이니 천명(天命)을 다하지 못할 것이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 천국에서 만나자”라고 자신의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그리고 17일 주문도를 출발해서 삼산면 하리와 내가면 외포리 등지에서도 시위참석을 호소하여 온수리로 돌아왔습니다.
거사일인
3/18(음력2/7)오후2시경 유희철(劉熙哲),
황일남(黃日男) 등 결사대원이
앞장서서 강화읍 장터(관청리와 신문리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음) 돌다리
부근에서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유희철은 “조선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이어서 조상문, 장명순, 황윤실 등 만세를 연창(연창) 하였습니다. 이들은 “조선독립”이라
쓴 큰 깃발을 흔들어 장터를 한 바퀴 돌자 군중들이 곧 합세하였습니다.
유봉진은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온수리에서 백마(白馬)을 타고
강화읍 장터에 나타나 종루(鐘樓: 현재 다문화센터 입구인 것
같아요) 에 올라 종을 쳐서 군중을 모았습니다. 시위대는
시장에서 향교를 거쳐 군청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강화경찰서는 8명의
순사보를 파견하나 오히려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협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군청 앞에 모인 군중의 숫자는 5~6000명이고, 시장에 가득 한 인원은 약 1만여명 이였습니다. 유봉진은 강화군수 이봉종에게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군청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하자 군수는 어쩔 수 없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군중은 3시간
동안 독립연설회와 시위를 감행하고, 5시시경 경찰서를 포위하고 체포된 운동자를 석방시켰습니다. 시위 군중은 밤 8시반에 경찰서 앞에서 일시 해산하였다가 재차 시장에
모여 만세운동을 재개 하여 밤11시경 해산되었습니다. 이
시위는 13면에 전파되어 4월 중순까지 이루어졌으며, 동원수는 전국 최대 규모였습니다.
이 시위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45명이였습니다. 유봉진 부인 조인애 역시 남편을 도와 태극기를 운반하는
한편, 18일 시위 때 부녀자들을 인솔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신편 강화사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