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크레디트(microcredit) => 기출
- 영세민의 자활을 돕기 위해 공여되는 무담보 소액 대출.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1976년 방글라데시에 마이크로 크레디트 전담 은행인 그라민은행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아시아·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와 미국·프랑스 등 선진국으로 확대·발전되었다. 한국에는 1999년 사단법인 예은사랑나눔회와 씨티은행이 '신나는 조합'(Joyful Union)을 설립함에 따라 도입되었다. 대출 수익보다는 금융기관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금리 등 각종 대출조건이 채무자에게 유리하게 설정된다.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근로능력과 자활의사가 있는 농촌·도시 지역의 빈민층을 대상으로 한다. 5명의 채무자가 짝을 이루어 대출을 받고 상호협조하며 대출금을 갚아나간다. 보통 첫 대출은 300~500달러 수준의 소액대출로 시작하지만 대출자의 신용이 쌓이면 추가대출, 예금가입 등의 다양한 혜택이 제공된다. 전세계적으로 90%가 넘는 높은 대출금 상환율을 기록하고 있다.
- 관련 기사 : 하나은행 300억 출연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 한겨레 8/25
▷슬리퍼 히트(Sleeper Hit)
- 예상을 깨고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
- 관련 기사 : "진짜 날것 액션 찍고 싶었다", 한겨레 8/25
- 반대말 : 박스 오피스 붐( BOX OFFICE BOMB)
▷한글학회
- 한글의 연구·보급을 위해 조직된 학술단체.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었고, 이때 회장은 김정진, 주시경은 강습소의 강사로 활동했다. 학회 이름을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 몰음'으로, 1913년 3월 주시경이 회장에 오르면서 '한글모'로 바꾸었고, 강습소도 1911년 '조선어강습원'으로, 1914년 '한글 배곧'으로 바꾸었다. 그러다가 1917년부터 활동이 침체되자 1921년 12월 3일 임경재·장지영·이규방·신명균 등이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기존에는 조선어연구학회를 한글학회의 기원으로 보았으나 그 이전의 국어연구학회에 대한 자료가 수집됨에 따라 정정되었다. 학회 이름이 1931년 1월 '조선어학회'로 다시 바뀌었다가 1949년 9월 지금의 명칭인 '한글학회'로 정착했다.
창립 초기부터 단순히 국어학 연구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우리말인 한글을 통해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려 애썼다. 1926년에는 훈민정음 반포 480년을 기념하면서 9월 29일(음력)을 '가갸날'이라 정하고 첫 기념식을 가졌는데 이는 오늘날 한글날의 기초가 된다. 또한 1930년 12월에 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을 선출한 다음 1933년 10월 29일 '한글맞춤법통일안'을 공표하여 국어정서법을 확정했으며, 표준말 정립이 시급함을 깨닫고 1936년 10월 28일 '사정(査定)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공표했다. 이어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때부터 관심을 가져온 외래어 및 외국 사람 이름과 땅 이름 표기를 통일하기 위해 1941년 '외래어표기법통일안'을 내놓았다. 한편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여 <큰사전> 편찬에 힘썼는데 원고가 1/3 정도 완성되어 1942년 봄에 조판에 들어갔으나 그해 가을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나 중단되었다. 이외에도 문맹퇴치운동에 발맞춰 한글보급운동을 널리 전개했으나 탄압이 극도에 달했던 일제 말기에는 한글학회의 활동이 거의 중지되는 위기를 겪었다. 기관지 <한글>은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번번히 휴간되다가 8·15해방 후인 1946년 4월 속간되었고, 6·25전쟁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1954년 4월 속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글학회는 해방이 되자 7년간이나 말살되었던 국어교육이 시급함을 느끼고 1945년 <한글첫걸음>·<초등국어교본>·<중등국어독본> 등 12가지의 국어교과서를 편찬했으며, 그해 10월 <훈민정음> 원본의 기록에 의거하여 한글날을 10월 9일로 바꾸었다. 또한 1946년 한글강습회 사범부 수료자 1,000여 명을 배출한 데 이어 1948년 세종중등국어교사양성소를 열고 국어교사 배출에 힘썼다. 이즈음 일제 말기에 중단되었던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재개하여 1947년 제1권과 1949년 제2권을 펴낸 다음, 1950년 제3권 인쇄와 제4권 조판이 끝날 무렵 6·25전쟁이 일어나 중단했다가 1957년 6권 모두 완성했다. 그런가 하면 1953년 정부의 '한글간소화안'에 대한 반대성명을 낸 이래 여러 차례 건의하여 1955년 한글간소화안을 철회하게 함으로써 한글파동을 끝맺었다. 1958년 <중사전>과 1960년 <소사전>을 펴냈으며, 학회 안에 조사부를 두어 지명 조사에 착수하는 한편 <금강경 삼가해>·<석보상절>의 영인본을 펴냈고 같은 해 '한글타자기통일글자판안'을 문교부에 제출했다. 1962년 한글전용특별심의회와 1968년 한글전용국민실천회를 조직하여 한글전용 운동을 전개했고, 1970년대 이후 국제언어학자대회, 한글기계전시회, 국어학 도서전시회 등을 열어 한글을 널리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1987년 '개정 헌법의 표기 및 표현에 대한 건의서'를 제출했으며, 1990년 이후 북한언어 연구와 국어국문학 관련 논문 데이터베이스화 작업 등 정보화시대의 한글 쓰임새 높이기에 많은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65년 〈중사전〉을 보완한 〈새한글사전〉을 편찬한 후, <쉬운말사전>(1967)·<고치고 더한 쉬운말 사전>(1984)·<한국지명총람>(1986)·<한국 땅이름 큰 사전>(3권, 1991)·<우리말큰사전>(4권, 1992)·<국어학사전>(1995)을 펴냈고, 기관지로 계간 <한글>, 월간 <한글 새소식>, 연간 <문학한글>·<교육한글>·<한힌샘 주시경 연구> 등을 펴내고 있다. 2000년 현재 회장은 허웅이고,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동 58번지 14호에 있다.
- 관련 기사 : 우리말지킴이 '한글학회' 100돌, 한겨레 8/25
- 참고 : 조선어학회 사건(1942년 10월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들에게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해 검거·투옥한 사건)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항상 좋은 정보 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