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5일 (엡4 말씀으로 새롭게).hwp
2020년 1월 5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신년주일 * 홍지훈 목사
에베소서 4:21-24
말씀으로 새롭게
교회력에 따르면 1월 1일은 예수께서 탄생한지 꼭 8일되는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 제 8일에 할례를 받기 때문에, 1월 1일은 <주님의 할례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1월 6일을 주현절이라고 부르는데 Epiphany라고 해서 “신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지역과 러시아 지역에 분포한 정교회는 1월 6일이 성탄절입니다. 제가 20 여 년 전에 모스크바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집중강의를 하느라고 19일간 체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이 기간이었습니다. 바깥의 정교회 분위기로는 아직 성탄절이 오지 않았는데, 개신교 신학교 안에서는 12월 25일이 성탄절입니다. 그 전까지는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잘 몰랐습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총회에서는 올해의 주제를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교회>라고 정했고, 관련 성구로는 느헤미야2:17절과 에베소 5:26-27절을 선택했습니다. 저도 이에 맞추어 생각하다가 올 해 평화목교회의 주제를 <말씀으로 새롭게>라고 정했습니다. 관련성구는 주보에 나온 대로 고린도후서 3:6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하지만, 교회가 새로워지기 전에, 저는 사람이 먼저 새로워지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모인 교회가 변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걱정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자는 의미로 <말씀으로 새롭게>라는 주제를 정하게 된 것입니다. 관련성구도 그래서 고린도 후서 3장에 나오는 <영과 문자>의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이 주제 해설은 우리교회 2020년 요람에 서술해두었습니다. 요람이 나오면 한 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새롭게 된다는 말 속에서 중요한 것은 <말씀>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성경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말은 매우 추상적인 표현입니다. “말씀대로 살자”라든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공부하자”라고 하면 구체적인 의미전달이 되는데, “말씀으로 새롭게”라는 말은 조금 더 생각해야할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총회의 주제성구인 에베소서 5장 26-27절을 보면,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티나 주름이나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기 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말씀이라는 단어는 <레마>입니다. 그 의미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거룩해져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성구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 다시 등장한 것은, 이 말이 당연히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이 담긴 것입니다. 즉,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해서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알면서도, 때로는 잘 몰라서 그렇게 왜곡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동일집단이 타락하기 쉽다는 말씀을 늘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민감해야하고, 교회내부에서 비판하는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합니다. 무엇인가 아닌 것 같으면 머리를 맞대고 둘러앉아서 어떤 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신이 맞는 것인지, 좀 묵상하고 숙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라는 말은 성경을 펴놓고 그 문자 찾아내는 것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길을 꾸준히 모색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새로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새롭게>라는 2020년 교회주제를 제안 드리면서 제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에서 표현한 대로 “마음의 영을 새롭게”하는 일이 먼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마음의 영을 새롭게”라고 하면 추상적으로 느껴지지만, “정신을 가다듬고”라고 번역하면 우리가 이해하기 쉽습니다. 21절부터 풀어서 해석하면 이런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의 가르침을 배웠으니, 허망한 일에서 마음을 돌이켜 정신을 다시 한 번 가다듬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봅시다.”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해에는 “정신을 가다듬고” 내 인생의 길을 바르게 하려는 결심을 당연히 해보아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록 우리의 결심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정신을 가다듬는 일, 즉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는 일”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려해야하는 일입니다. 무엇을 할지는 우리 개인이 스스로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을 발견하려면, 발견하는 방법인 <어떻게>가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어떻게 정신을 가다듬어야 할까요?
유럽에 개신교가 등장하면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수도원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 비교하면 개신교 수도원은 아주 적습니다. 그 이유는 개신교는 은둔을 버리고 현실 속으로 신앙을 이끌어내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도사들이 수도원에서 살면서 했던 일 가운데 아주 쓸모 있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덩달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말씀묵상>의 한 가지 방식입니다. <거룩한 독서>라고 번역되는 렉시오 디비나(Letio Divina)입니다.
그런데 이 방식의 핵심은 말씀을 읽는 것을 넘어서서, 읽은 말씀으로 기도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잘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쳐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후에, 성경을 덮고 기도하면서, 읽은 성경의 내용을 다 잊어버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간구하는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는 읽은 말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도가 되고 맙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방금 읽은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펼쳐서 읽은 말씀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듣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에를 들면 오늘처럼 예배 시간에 나와서 주보에 나온 본문을 미리 눈으로 읽습니다. 마음에 담아두는 것입니다. 그리도 낭독자가 그 말씀을 낭독할 때에 눈을 감고 들으면서 그 말씀을 묵상해보는 것입니다. 그때 어느 대목에선가 우리 마음을 울리는 일이 생기면 그 내용이 나의 묵상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정신을 가다듬고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무슨 말을 하시는지 들어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일과에 시달리다보면, 우리는 정신이 혼탁한 상태로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그 상태에서 나오는 기도는 분노와 염려와 절망에서 나오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라도 묵상해본다면, 그리고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던지는 의미를 곱씹어 본다면, 우리의 정신이 저절로 맑아지지 않겠습니까?
수도원이 사라져 버린데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냐고 따지니까, 종교개혁자 루터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수도원을 비판하고 문을 닫게 만든 것은, 온 세상이 다 수도원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루터가 꿈꾸던 신앙의 공평함을 엿보게 하는 대답입니다. 수도원만 특별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도 조금은 후회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루터는 중세 수도원이 사용한 <렉시오 디비나>를 개신교스타일로 변형하여 가르쳤습니다. 중세 수도원에서 <렉시오 디비나>는 말씀묵상 기도가 진행하는 방향이 결국은 하나님과 마음이 같아지는 신비적인 방법인데 반하여, 루터는 말씀을 읽는 기도와 읽은 것에 대한 묵상을 마치면, 이 내용이 자신의 구체적인 삶과 대비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라치오(oratio 기도)- 메디타치오(meditatio 묵상) 다음에 텐타치오(tentatio, 시련)를 두었습니다. 텐타치오는 영어의 템테이션(Temptation)에 해당합니다. 시련 또는 유혹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내가 묵상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엄청난 고민을 하게 되고, 이런 시련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정향되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면서 시련 따위는 제발 하나도 겪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솔직한 우리 심정인데, 루터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것이 내게 시련이나 유혹이 된다고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루터가 말하는 시련과 유혹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의 모습 때문에 겪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갈등하기에 시련이 되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올바른 일을 하려는데 닥쳐오는 엄청난 유혹과 시련을 극복하는데 힘을 주고 위로를 주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말씀으로 기도하고 묵상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겨낼 수 없는 시련과 유혹이지만, 루터는 이것을 극복할 힘을 렉시오 디비나를 통하여 찾았던 것입니다.
누구나 사람은 살면서 기쁘고 즐거운 일도 경험하고, 슬프고 괴로운 일도 경험합니다. 주의해야할 것은 내가 좋게 생각하는 것만 선택하며 살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던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잇닿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아는 사람은, 기쁨에 함몰되어 교만해지거나, 슬픔에 정복당하여 자신을 망치는 잘못을 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모든 일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경험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옳고, 진실하며, 달고, 맛있으며, 힘이 되고, 위로를 주는 것인지”를 느끼는 사람이 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사는 사람입니다.
평화목교회 교우여러분,
올해 주제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 형상대로 살도록 깊이 묵상하는 한 해를 만들어 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살리는 경험을 자주 해보는 한 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