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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사평론 - 정론직필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산비탈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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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1957년생 '22년 현재 66세) 노동운동가로 91년 사형 구형을 받고 환히 웃던 모습은 지금 껏 우리에게 강렬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는 무기수로 감옥 독방에 갇혀서도 독서와 집필을 이어갔고 김대중대통령 때 7년 6개월만에 석방되어 민주화 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적지않은 국가보상금을 거부한다. 그 후 20여년간 국경을 너머 본쟁과 가난의 땅에서 평화활동을 펼치며 그 현장의 진실을 기록하여 세계 곳곳 현장에서 양심의 북소리가 된다. 현지에 자비로 학교와 도서관을 세워주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혹자들은 그가 말년에 가난한 나라에 가서 찍은 사진들을 국내에 들어와 전시회를 하며 사진을 팔아먹는 장사를 한다며 비난하는데 모든 건 자신의 수준과 안목만큼만 보이는 거니까.
그의 시는 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를 지펴낸 불꽃이 되어 역사 속에 시의 힘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로 남는다. 군사정권의 집요한 표적이 되어 7년간이나 수배로 쫒기면서도 활발한 비밀활동을 하는데 그 때 각 신문사의 기레기들은 그를 '얼굴없는 시인'이란 선정적인 기사로 신나게 도배를 해대고 91년 드디어 군사독재 정보기관에 체포되면서 그의 얼굴이 지상에 들어나게 된다. 그는 24일간의 온갖 참혹한 고문 끝에 '반국가단체 수괴'란 어마어마한 죄목을 받는데 나중에 출옥하여 술회하기를 그때 정보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사람이 심하게 구타하며 말하기를 '나는 씨이저(대졸)는 용납해도 스필타쿠스(고졸)는 용서못한다. 니가 감히 고졸로 대학나온 사람들을 밑에 두고 부려' 라며 무지막하게 구타하더라고. 고졸은 오직 노예로서 자기들 처럼 대학나온 이들을 상전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라면서.
그가 체포되면서 기레기들은 더욱 사명감에 불타 주간지같은 통속기사를 경쟁적으로 써댔는데 체포될 당시 그는 최고급 명품으로 몸을 휘감고 있었으니 최고급 재킷과 니나리찌 목도리 플레이보이 장갑 그리고 찰스주르당 상표의 지갑속에는 현금 46만원과 수표60만원(그들의 상상만큼 큰 액수가 안되어 실망했을 것이다)이나 들어 있었다며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서 쥐어짠 돈을 자신은 그런 소비로 사치하며 다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검소한 노동자복 차림을 하고 있다고 연상을 했을텐데 그 상식을 깨는 것으로 그는 꽤 오래 7년간이나 구속을 피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그를 돕기위해 자신의 지갑을 다 털어내 주었으며 값비싼 명품을 선물하였다. 그의 외모는 타고난 곱상한 미모로 최고급 의상으로 감추면 누가 봐도 대단한 부잣집 도련님으로만 보였으니 그의 작전은 천재급이었다. 그에게 그 귀족차림은 너무나 잘 어울려 평생 부잣집에서 그렇게만 입고자란 고생이란 모르는 부르조아 출신 같았다.
공자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읜 후 그 청상과부인 어머니밑에 '상갓집 개처럼'고생을 하였는데 성인이 되어 만인의 스승이 되어 고상한 위치에 앉아있으면 평생 고귀한 자리에만 있었던 것처럼 보이나 자신은 어려서부터 온갖 고생스런 일을 하여 그럴 때는 그런 험한 일만 평생 할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였고 귀한 위치에 있으면 또한 늘 그런 삶을 산 것같이 보인다고 공자 스스로 말하고 있다. 무릇 사람은 어떤 위치에든 잘 적응하여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누가 헌 노동복 잠바를 그에게 선물할 것인가. 그리고 그 처지에서 가장 무기가 될 것은 돈인데 그 돈으로 방탕한 생활만 했다는 것이 안기부와 언론의 발표이고 어리석은 국민들은 언제나처럼 또 쉽게 넘어간다. 박노해는 그 후 다시는 그런 명품이란 것을 몸에 대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평생 지향하던 삶의 지침과는 상반되는 상징이었으므로.
또한 안기부와 언론에서 조작해 퍼뜨리기 좋아한 것이 여자문제인데 그들의 의도대로 그의 이중적인 여자행각은 사람들의 큰 웃음거리가 된다. 체포되던 90년 당시 그는 서울미대출신의 여성동지와 사귀면서 조직활동을 빙자해 애정행각을 하며 다녔다는 것. 그것은 지극히 개인의 사적인 문제로 실제로 조직활동만을 했는지 단속망을 피해 부부처럼 보이려 의도한 것인지 또는 실지로 연애를 했는지도 모르겠으나 설령 그렇다해도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특히 결혼한 남성들은 내심 그상황을 부러워하지 않은 이들이 과연 있을까. 내가 추측하기론 아마도 뜨거운 피의 젊은이들로서 두가지 다 아니었겠나 추측만할 뿐이다.
허름한 노동복으로 혼자 지방을 돌아다녔다면 금방 모텔주인이 연일 신문을 도배하고 있는 그 수배자아닌가 싶어 직업적 사명의식으로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고 부부인체 다니면서 따로따로 각방에만 든다해도 마찬가지로 의심을 받았을 것이다. 어쨋든 박노해 부부는 지금껏 서로 깊이 사랑하며 잘 살고 있으니 진실은 상상만 할 뿐이다.
또 어떤이는 박노해가 수배중에도 명품만을 입고 여자문제를 일으키는 위선적인 사람이라며 아직도 노동시인으로 추앙받는것이 타당한가 의문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그 문제에서 나는 그를 한번도 실지로 만나본 일이 없지만 그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시집의 시를 보면서 이토록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는 사람이 어찌 진실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그 겨울의 시-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웃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새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후략)
그가 꿈꾸는 세계는 모든 사람이 차별없이 사람답게 살수 있는 세상을 말하는데 그가 말하는 차별속에는 성(性)차별도 들어있었으니 저임금에 장시간의 노동으로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애환과 더불어 성적 억압과 불평등에 대한 각성의 노래도 생생하게 불리워진다.
그의 아내 김진주는 한 약대(藥大)를 졸업한 후 한 병원에서 근무하다 운명적인 남자, 박노해를 만났고 그 후 병원 근무를 그만 두고 구로공단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서울 노동운동연합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82년 그와 결혼한다. 일신이 편안할수도 있던 길을 마다하고 '위장취업'을 하고 고생길이 훤한 박노해를 택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이념을 따지기 앞서 보통 여자들이 따라갈수 없는 대단히 위대한 사람이라고 본다. 생각만으로 수긍하는 것과 실천으로 그 험한 길을 택한다는 건 정말 너무도 큰 차이 아닌가.
그녀는 사노맹(社勞盟) 중앙위원으로 남편과 함께 편집위원회를 맡아 운영하고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주요 필진으로 활동해온 혐의로 수배를 받아 오다 박노해가 구속되던 해 다음 해인 '92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그녀 역시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그로부터 4년간이나 긴 수형생활을 한다. 그것은 그녀가 편한 결혼생활을 보낼수 있는 남자를 택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박노해라는 사람을 선택했던 결과였으니 그 점 애초부터 그런 고초를 각오했던 것 아니겠는가.
박노해는 어떤 고난의 순간에도 '내게는 나를 사랑하는 아내가 있거니'하는 믿음으로 버틸수 있었다 했는데 그들 부부는 아무리 감옥생활로 떨어져 살고 고생을 한다해도 서로 사랑한다는 믿음 하나 만으로도 행복하였다. 고난은 오히려 그들을 항상 극적인 정열로 서로를 타오르게 하였으며 하나로 단단하게 묶어 주었던 것이다.
지금 그 부부는 같이 '나눔 문화'라는 앞장서 만든 NGO 사회단체를 운영하며 동지로서 영원한 애인으로 같은 앞을 바라보며 잘 살아가고 있다.
다음 시는 기업들의 전제적인 짓거리처럼 자신도 아내를 착취하고 있었음을 각성하는 아름답고도 눈물 겨운 시이다. 이불을 꿰맨다는 작업은 상당히 전문적인 일이므로 즉 그는 상당부분 살림을 맡고 있음을 알수 있는데 어쨋든 그는 그의 아내를 진실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아니 마음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이런 시가 나올수 없을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토록 고된 직공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충분히 존경할수 있는 남편이 이 정도 자신을 사랑하기 까지 해 준다면 즐겁게 고생을 감내할 힘이 생겼으리라.
-이불 호청을 꿰매면서-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은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그리고 여기 그들 부부보다 더 위대하다할 수 있는 커플이 있다. '79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철폐를 위한 釜馬민주항쟁으로 구속되어 안기부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고 광주교도소에서 1년여간 복역하다 출옥한 박광호화백, 그는 그 고초를 겪은 결과로 출옥할 때 이미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도로 피폐해 있었고(천상병 김남주 이수병 김근태 한수산 등등 처럼) 박광호는 결국 근이양증이란 병까지 앓게 된다.
그런 그와 결혼하여 끝내 다시 화필을 들게 만든 그녀 신정주. 그녀의 남편 박광호는 물고기뼈의 마디마디에 베어있는 고통을 그려내고 있는 아픔의 남자였다. 물고기뼈라는 생명이 모두 도려내지고 남은 그 잔해를 통해 인간의 가학성 소외문제들을 표현해 보고싶었고 그 생선뼈를 응시하고 있으면 창작 욕구가 솟구친다 했다.
보통여자들은 물론 박노해의 처도 거기까진 감히 생각할 수 없었을, 험난한 앞길이 훤히 보이는 것은 물론 필경 남은 여생이 길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남자 그리고 이미 지병을 앓고 있는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 그녀는 그런 그와 결혼하여 그를 도와 주는 것이 바로 애국행위라 생각했으니 정말 고개가 숙여진다. 이상적인 관념과 실제 실천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큰 것이니.
그녀를 소개했던 주위 인사들도 이미 그녀를 알아보고 감히 박광호와의 결혼을 추천했으니 보통여자들이었다면 그들은 소개할 엄두도 못냈을 것이다.
버리고가기
처음 그이를 만났을 때는요 잘 걷지 못해도 괜찮다 했지요
화가지, 달리기 선수가 아니지않냐고
그렇게 나선 긴삶의 여정 버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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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놈은 등에 업고, 또 한놈은 손을 잡고
내 어깨는 그이의 지팡이가 된 거지요
눈물겨운 그녀의 삶에 숙연해 진다. 처음부터 그런 삶을 예견하고 각오하면서 결혼한다는 건 예수의 희생정신보다 더 강하다. 말년엔 그를 휠체어에 싣고 힘겹게 밀고 다녔던 그녀. 다행히 그는 그녀에게 값지고 아름다운 선물인 두아들을 선사하고 갔다.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고 밖에서 냉이꽃 토끼풀꽃등을 꺾어와 엄마앞에 자랑스레 내밀고 엄마머리에 꽂아주며 '엄마 공주같아'하며 기뻐하던 천사들. 그 두 아들들은 바로 박광호가 그녀에게 남기고 간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들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 결혼 후 나의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셨고 나중에 필시 아버지의 영향으로 잡혀들어가 수개월동안 심한 고초를 겪고 나오신 후 더욱 아버지를 원망하고 그 이념을 공격하기만 하셨다. 특히 '아버지 편' 이라며 내게 쓴소리를 제일 많이 해대셨는데 가장 듣기 싫었던 것은 매번 공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당당한 이론을 내세우며 집안을 이렇게 돌보지 않으면서 무슨 국가고 애국이냐. 그건 다 거짓이다. 수백번 반복되는 그 말씀이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어떻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君君 臣臣.. 이라는 이론으로 여성과 약자들위에 철저하게 기득권층을 옹호한 공자의 사상은 혁명과는 가장 대척점에 있어왔다.
이제 나의 부모 두분이 다 돌아가시고 나서도 나는 항상 그 문제에서 헤어나질 못했는데 몇일 전 드디어 거기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읽을 수 있었다.
"혁명청년들 속에 싸움의 길을 나선 남아대장부는 마땅히 가정쯤을 잊어야한다. 가정생각만 하는 사람은 대사를 치르지 못하니... 가정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는 조국도 혁명도 참되게 사랑할 두 없다. 혁명을 위한 적극적 투신은 가정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가정과 조국의 운명이야말로 뗄수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나라가 편해야 가정도 편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안녕과 행복을 지키자면 나라를 먼저 지켜야한다. 가정에 대한 사랑은 곧 혁명가들의 투쟁과 추동의 원동력이다." (주체사상연구회 중에서)
아아 내가 진작 명쾌한 이 글을 읽었더라면 어머니께 확실하게 이렇게 말을 해드렸을 터인데.. "엄마, 아버지에겐 그 길이 바로 우리 가정과 가족을 위하는 길이었어요. 조국과 가족은 하나의 운명이니까요."라 말씀드렸을 텐데 그리 말했다면 어머니는 이해하셨을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딸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께 큰 슬픔을 드렸고 평생 효도를 못했으니 불효막심의 자식이였을 뿐이다.
결국은 박노해도 박광훈도 조국과 가정을 위해 한몸을 바친 것이었구나.. 두 朴氏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과감히 내던졌으니 진주 정주 두여인은 하늘이 기특하고 장한 아들들을 위해 내려주신 귀한 선물이었구나.
옛날 이집트의 노예들에게 가장 큰 벌을 내릴 땐 '여기있는 돌무더기들을 모두 저쪽으로 옮겨라' 라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다 옮겨놓고나면 '다시 원위치로 모두 옮겨놓아라' 한다고. 노동할 수 있는 육체는 필요했으므로 사형은 안시키고 정신적인 고통만을 주는 교묘한 수법을.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것이 고생한 것이 아무 보람이 없다고 느낄 때 라는데. 세상에 아무 의미없는 고난처럼 허무한것이 있을까. 반대로 아무리 고생을 하더라도 그것이 보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미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 두 여인은 필경 행복했을 것이라 믿으며 같은 여성으로서 나는 그런 그들이 부럽다.
그 두 여성은 그 돌들을 한걸음이라도 더 피라미드 가까이 옮겨두어 그 건설에 보탬이 되었음이니.
우리의 삶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미소를 띄울 수 있는 사람이 천국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그 순간에 우리 내면에 있는 초의식 즉 하나님은 진실하게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판단하게 된다는데 혹자들은 그럼 그 때 자신을 좋은 쪽으로 판단하면 되겠다 하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객관적으로 명료한 의식이 된다고. 자신의 지나온 생을 자신만큼 잘 아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우리는 평소 아무리 속여도 자신의 양심만큼은 못속인다고 말한다.
그 양심이라는 게 바로 하느님이시라. 성경에서도 하느님은 바로 자신의 가슴속에 있다하는데 나는 그 말 만큼은 기독교에서 가장 쓸만한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의 아버지는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으며 '난 괜찮아'라 말했다는 걸 들으시고는 '그 사람 평생 한 말가운데 가장 괜찮은 말을 했군'이라 하시어 나는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그를 괜찮게 말하신 것은 그것이 유일한 것이었다.
우리들 삶의 목적은 결국 마지막에 미소지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우리 선한 이웃들의 기억속에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투쟁해야 할 대상들이 있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