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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 이끼와 흰 포말이 살이 숨쉬는 육백산 이끼계곡
1. 일자: 2016. 7. 23 (토)
2. 장소: 육백산(1244m)
3. 행로 및 시간
[강원대 삼척캠퍼스(05:30) -> 황새터(05:55) -> (임도) -> 육백산(06:54~07:05) -> 큰 참나무(07:47) -> 간벌 임도(08:00) -> 1120봉(08:44) -> 폐가(10:10) -> 이끼계곡 입구(10:27) -> 이끼계곡(10:38~11:02) -> 흙 길/포장도로(11:52) -> 태영EMC공장(12:29) -> 고사리(13:45)]
< 육백산 산행을 준비하며 >
주말 비 예보로 계획했던 산행이 성원 미달로 취소되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만석이라 포기했던 육백산 이끼계곡 산행 좌석이 여럿 남을 걸 확인한다. 수요일이 지나면 환불이 불가하므로 비 예보와 취소율의 상관관계는 절대적이다. 구라청의 못 믿을 예보가 가뜩이나 어렵다는 서민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 비 예보는 사람들의 집 밖 출입에 큰 영향을 주게 마련이고, 따라서 주말 비 예보는 나들이에 쥐약이다. 기상청의 예보를 불신하는 내 감각은‘토요일 비가 산행에 영향을 주기 않는다.’을 직감하고 일찌감치 예약을 했다.
육백산 이끼계곡, 가물가물한 예전 “이끼폭포 거기 참 좋아, 특히 여름에’란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낯선 곳이라 이곳 저곳에서 정보를 얻는다. 트랭글에서 선답자의 궤적을 확인한 결과 거리는 17km 내외, 산행시간은 7시간이면 충분할 듯하다. 무엇보다 들머리 강원대의 고도가 800미터이고 육백산 정상까지는 비고 450미터만 이겨내면 된다. 이후 길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여 오랜만에 나선 무박산행임에도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아 좋다.
지도를 들여다 보면 가야 할 길을 살핀다. 황새터~육백산 정상은 70분 거리로 강원대에서 출발하여 밀림 같은 수목이 우거진 완만한 오름이다. 육백산~이끼폭포는 4시간 거리로 육백산 정상은 고위평탄 지형이 자리잡고 있다. 이 드넓은 낙엽송 고원에서 ‘육백마지기 -> 육백산’란 말이 유래되었다. 낙엽송 군락을 지나면 참나무 숲이 나타나고, 폐가를 지나면 이끼폭포에 이르게 된다. 푸른 이끼가 낀 폭포 길로 멋지지만 로프 구간도 있어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이끼폭포~고사리 구간은 2시간 거리다. 평범한 조금은 지겨운 길이 될 것 같다.
< 희망사항 >
무건리 이끼폭포, 강원도 도계 땅 오랜 기간 출입이 금지되었던 상황골 상류에 계곡에 위치한 오지. 그곳에 비경이 있다. 뒤숭숭한 일상사 속에서 스스로를 뒤돌아 볼 시간을 갖기 위해 길을 나선다. 겉보기엔 ‘대학 교정을 가로질러 정상까지의 그리 힘들지 않은 초입 길, 이후 드넓은 고원에서 긴 아침 트래킹을 즐길 수 있고, 천하제일이라는 이끼 낀 계곡에서 여유롭게 노닐고, 널찍한 임도와 도로를 따라 하산하면 되는 산행’이다. 반대로 ‘어둡고 습한 수풀 우거진 초입, 풍경 없는 정상, 너무 단조로워 쉽게 지쳐 버릴 고원 길, 예기치 않은 오르내림, 멋지지만 위험이 도사린 이끼 낀 계곡,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날머리. 상반된 생각이 교차한다. 실제 산행은 이 둘의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화려한 사진에 속지 말고, 지레 겁 먹지도 말지어다. 모름지기 등산은 산의 길 그 자체를 즐겨야 한다.
목요일 오후 청한님에게서 전화가 온다. 느루님과 함께 2자리 예약 했단다. 동행이 생겼다. 모처럼 보는 반가운 얼굴들을 볼 생각에 금요일 밤이 기다려 진다.
< 삼척 가는 길에 >
삼척행 버스는 12시 정각 사당을 출발한다. 양재에서 탑승한 청한님과 느루님과 눈인사를 하고는 잠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휴게소도 가지 않고 비몽사몽, 잠이 쏟아지는데 오랫동안 한자리에 앉아 있었더니 목이 아파온다. 버스가 멈춘다. 어스름 동이 트는 느낌이 든다. 버스는 멈춰서 있다. 5시가 넘었다. 사당에서 도계읍까지의 거리는 260km 남짓인데 무려 5시간이나 걸렸다. 내가 자는 사이 뭔 일이 있었나 보다. ㅋㅋ
대장이 코스 안내를 한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전 날 길에 내버려 두고 간 그 사람이다. 대장은 날이 훤해 진 후 버스 문을 열겠다 한다. 여름 무박산행의 장점이 희석된다. 좀더 시원할 때 오르막을 오르면 좋으련만….
5시 30분 강원대 삼척캠퍼스 앞에 선다. 구비구비 연결된 도로가 아득히 멀리까지 이어진다. 속된 말로 ‘훨’이다. 학생들은 걸어서는 학교 밖으로 갈 엄두도 못 내겠다.
< 강원대에서 육백산 >
높다랗게 솟은 대학 건물 뒤,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무엇이든 새로 돋아나는 것에는 생명의 기운이 깊게 느껴진다. 삼척 땅에서 바라본 새벽 하늘이 참 곱다. 학교 도로를 따라 들머리 황새터로 올라간다. 교사(校舍)가 깨끗하다. 이 외지고 높은 곳에 새워진 학교에 첫 발을 내딛는 새내기와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청한님이 지인의 말을 빌어 실감나는 느낌을 전한다. 입학식 날 비탈에 서 있는 학교 정문에 붙은 현수막 글귀, ‘걱정 마십시오!’
화장실도 다녀 오고 느루님 보조도 맞추며 천천히 산행 들머리에 선다. 새벽 대학 교정을 걷는 느낌은 그야말로‘느리게’였다. 밤 새 좁은 버스 안에서 뒤척인 몸에겐 확실한 ‘해방공간’이었다. 들머리엔 요염하게 노란 달맞이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다. 상쾌한 기분으로 육백산으로 이어지는 숲으로 들어선다. 예상대로 빽빽한 소나무 숲이 이어진다. 밀림 같다는 말은 과장된 듯하다. 키 큰 소나무가 호위하는 숲은 기품이 있다. 오르막이 길게 이어지지만 큰 부담이 되진 않는다. 다만 바람 없는 습하고 더운 기운이 조금 느껴진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면 금상첨화이건만 숲 내음만으로도 만족하며 걷는다.
< 강원대 삼척캠퍼스의 새벽 >
임도를 지나 한참을 오르니 또 임도 갈림과 만난다. 느루님의 걸음이 뒤쳐진다. 문자를 보내놓고 육백산으로 먼저 오른다. 갈림에서 300미터 거리에 육백산 정상이 있었다. 황새터에서 1시간이 소요되었다. 1244m란 고도가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공터에 커다란 비석이 서 있다. 일행에게 부탁하여 청한님과 사진을 찍고는 이내 자리를 뜬다. 다시 돌아온 삼거리에서 느루님을 기다려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어 간다. 고원의 펼쳐진 울창한 숲의 기운이 도처에서 느껴진다.
< 육백산 소나무 숲 / 육백산에서 >
< 육백산에서 이끼폭포 >
전나무와 낙엽송이 혼재된 숲을 거닌다.‘육백마지기’란 말이 과장이 아님을 확인한다. 이 넓고 평탄한 고스락은 화전민에게는 천하의 길지로 여겨졌을 터. 지금은 온갖 나무와 풀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숲의 아침기운은 명징하다. 풀은 초록을 뽐내고 있고, 나무들은 저마다의 욕심으로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가고 있다. 그 속에 난 누런 흙 길을 부러움 없는 마음으로 걸어간다. 새벽을 달려온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호사다.
육백산 여름 숲에는 보랏빛 야생화가 대세다. 모싯대와 잔대가 보이고, 용담/비비추를 닮은 야생화도 지천이다. 간간이 주홍빛 동자꽃도 보인다. 평탄한 고원지대를 40여분 걷자 길가에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턱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다. 포터존이다. 일행들과 포즈를 취한다. 흩어졌던 산악회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응봉산 갈림인 장군목에서 잠시 길이 헷갈렸으나 이내 등로를 찾아낸다. 원시림 같이 나무가 우거진 숲에 아침 햇살이 들어온다. 성하를 향해 달려가는 숲에는 농밀하고 음침한 기운이 느껴진다. 머지 않아 숲이 끝이 나고 간벌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임도로 내려선다.
< 육백산의 여름 야생화 >
고원 숲 트레킹, 트레킹이 등반과 구별되는 것은 산을 정복하거나 정상을 탐하는 법 없이 산길을 마냥 걷는 내려놓는 마음이다. 고원길을 걸으며 산과 대화한다. 숭숭 간벌로 빈 산기슭에 새로 심은 작은 나무들이 커간다. 이국적 풍경이다. 다시 숲으로 들어선다. 비고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오르내림이 반복되더니, 1120봉으로 향하는 제법 긴 오름이 시작된다. 평지에 익숙해진 다리에 묵직함이 전해온다.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한 숲뿐이다. 변화 없는 등로를 오래 걸으며 ‘이리 긴 길을 홀로 걸었다면 얼마나 지겨웠을까?’하며 새삼 함께 하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진다.
< 이끼계곡을 향해 가며 바라본 풍경 >
지도에 나온 도마재, 방지재 등은 그 존재도 모르고 지나쳤다. 마음 속으로‘소사에 만족하며 현재를 즐기며 살자.’다짐하지만 이내 잡스런 생각들이 고개를 내민다.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산에서만큼은 단순해져야 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 다가올 변화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배가 고파온다. 하산 후 먹고픈 음식들 생각에 걸음에 힘이 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단순하다. 힘겨운 노동에서 해방되고 배 부르면 만족해지니 말이다.
작은 봉우리를 지나면서부터 고도가 급격히 낮아진다. 지그재그로 난 거친 하산로를 따라 한 없이 내리 꽂힌다. 사진에서 본 폐가가 나타나는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중년의 남자가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앞 마당엔 도라지꽃이 지천이다. 더 이상 폐가가 아닌가 보다. 산 도라지는 산삼과 동격이라 했는데, 이리 대규모로 재배해도 약효가 있나 모르겠다.
단조롭던 길에 변화가 생긴다. 하늘도 열린다. 반대편 산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산세가 무척 깊다. 심심산골이란 말이 실감난다. 멀리 앞서가리라 여겼던 일행들과도 만난다. 이끼계곡 입구는 폐가에서 멀지 않음을 알기에 어서 보고픈 마음에 앞장서 걷는다. 10시 30분 무렵 예전 마을이었던 닿는다. 바로 밑이 이끼계곡 입구였다.
< 이끼폭포에서 1 >
이끼계곡까지는 0,5km를 가야 한다. 한낮으로 치닿는 열기가 오른다. 어서 폭포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무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니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 진한 녹색의 이끼와 폭포수의 흰 포말이 시선을 확 끈다. 기대이상이다. 살면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이끼 군락과 폭포의 장관이다. 시원한 물줄기로 주변 공기가 서늘하다. 한동안 넋 나간 듯 이끼에 눈이 가더니 다음엔 여러 갈래로 나뉘어 떨어지는 물 길에 눈이 더 오래간다. 이끼보다 폭포 물줄기가 상수다. 청한님과 느루님의 사진을 찍어주고 우측 지류로 올라간다.
< 이끼폭포 2 >
가까이서 본 이끼폭포는 기대이상이다. 이끼는 살아있는 들짐승 마냥 꿈틀거리고 폭포수는 시끄럽게 포효하고 있다. 분재 위 이끼와 돌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한다. 다시 입구로 내려온다. 산악회 일행들은 밧줄을 따고 폭포 위로 올라간다. 당연히 올라가면 풍경이야 좋겠지만 가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붙어 있고 다리에도 무리가 될 것 같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 한다, (다녀와 산악회에 올라온 사진을 보니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폭포 상류로 올라가 보았으면 좋을뻔했다. 풍경이 너무나 멋졌다.)
더운 기운이 확 가시게 세수를 하고 나니 온몸이 시원하다. 시계를 본다. 잠시 있었는 줄 알았는데 25분이 흘렀다. 길을 나선다. 짧은 계단 오름에 식었던 땀이 다시 흐른다. 좋은 걸 본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 이끼계곡에서 고사리 >
약속된 12시 30분 하산완료 시간을 고려하면 여유가 없다. 속도를 낸다. 다행히 평탄한 황토길이 길게 이어진다. 가벼운 복장으로 이끼폭포 관광에 나선 이들과 자주 만난다. 관광지 조성공사가 진행 중이니 다음에 이곳에 오면 길 사정은 오늘과 같지는 아니리라. 이끼계곡의 비경도 보존하고 많은 이들이 풍광을 즐기는 명소로 거듭나기를 바래본다.
청한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흙 길이 끝나고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구불구불 심한 경사로를 오르는 이들의 얼굴에는 힘겨움이 묻어난다. 청한도 나도 무릎이 좋지 않으니 긴 내리막은 우리에게도 힘에 겨웠다.
바리케이트가 나타나고 작은 주차장이 있다. 택시도 목격된다. 노점에서 꿀물을 사서 마신다. 아주머니 이야기로는 10분 정도만 내려가면 된단다. 택시를 탈까 하는 유혹을 이겨내고 계곡 옆 포장도로를 따라 걷는다. 10분이 지나도 주차장은 나타나지 않고 공장의 기계음이 들린다. 곧이어 태영EMC 공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길은 온통 허연 석회석 가루로 뒤덮여 있다. 먼지 속을 뚫고 나왔어요 아주 한참을 더 걸어내려 갔다. 혹시나 또 나를 뒤고 버스가 가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속보롤 걸어내려 간다. 버스의 붉은 지붕이 보인다. 일단 안심이다. 고사리 가는 포장도로는 멀고 또 길었다.
< 에필로그 >
좋은 경치 보고 잘 놀다 왔는데 힘은 들었다. 계곡물에 서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 입고 나니 드는 생각이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 했는데 마지막 하산 길이 길고 단조롭다 보니 오전의 좋은 기억들이 사그라져 간다.
대학 교정을 가로질러 정상까지의 (조금은 힘에 겨운) 초입 길, 이후 드넓은 고원에서 (생각보다 잦은 오르내림은 있었지만) 긴 아침 트래킹을 즐길 수 있었고, 천하제일이라는 이끼 낀 계곡에서 여유롭게 노닐고, (널찍한 임도와 도로는 맞지만)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날머리. 출발 전 가졌던 상반된 생각은 좋은 쪽으로 좀 더 기울어진 상태로 끝이 났다. 기대대로 이끼폭포의 장관은 오늘 산행의 압권이었고 앞으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산간 오지 평범한 지형에 이리 진귀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자연의 경이에 고개가 숙여진다.
육백산에서 무더운 여름을 이겨낼 폭포의 정기를 얻었다.
< 육백산 산행 궤적 >
첫댓글 보는것만으로도 정말 좋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