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2ㆍ12총선은 전두환 정권에 위기감을 안겼다. 서울의 경우 신생 야당인 신민당의 득표율이 여당인 민정당보다 15%나 높았으며 그러한 현상은 6대 도시에서도 비슷했다. 전국적으로도 야당(신민당과 민한당)의 득표는 민정당보다 14% 앞섰다.
특히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 사형을 선고 받았던 이철씨가 당선(서울 성북구)되는 등 운동권 인사들의 대량 득표는 군사독재 정권으로 하여금 모종의 결단을 구상하게 만들었다. 표면적으로는 ‘민심을 수용하는 유화정책’을 펴면서 민주세력에 대한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987년 1월 살인 고문의 산실로 밝혀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에서 민가협 회원들이 고문 근절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은 삼베로 만든 삼각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가방을 든 ‘어머니 부대’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4월에 들어서면서 대우어패럴 노동자 동맹파업을 중심으로 노동계의 불만은 그대로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으며, 5월(23~26일)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건은 광주 민주항쟁 5주년 관련 대학가의 거센 시위와 맞물려 정권의 정통성을 흔들었다. 정부는 ‘학원안정법’ 제정을 발표했다.
민청련은 즉각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관지인 ‘민주화의 길’을 통해 정권의 저의를 폭로했다. 그 내용은 각 대학의 유인물에 담겨 계속되는 데모ㆍ시위의 자료가 됐다. 5공 정권은 보다 근본적인 ‘처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85년 2ㆍ12총선이후 저항 잇따르자
5共 '근본적 치유'위해 민청련 탄압
김근태 23일간 살인적 고문 당해
당국은 민청련을 최종 목적지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7월초 민청련 상임위원 김병곤(서울 상대 71학번ㆍ민청학련 관련 무기징역 선고ㆍ90년 12월 사망)씨와 기독교청년협의회(EYC) 황인하 총무부장 등이 처음으로 구속됐다. 대학가의 시위를 주동한 ‘삼민투’의 배후라는 이유였다.
그동안 민청련 관련자들은 걸핏하면 경찰에 연행됐으나 ‘29일 이내 구류 처분-정식재판 청구-열흘 정도 지난 뒤 석방’이라는 패턴을 유지해 왔다. 이른바 현장에서의 격리 수준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구속은 모종의 신호탄이었다. 당시 김씨의 부인 박문숙(서울여대 74학번)씨의 설명.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연행됐을 때 용산경찰서에 가서 난리를 치니까 고○○ 검사 방에서 면회를 시켜 주더라. 그이가 자꾸 고무신을 벗었다 신었다 하며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키더라. 내려다 보니 조그만 쪽지 하나가 신발 속에 있었다. 내가 운동화 끈을 매는 척 하며 집어들고 나왔다. ‘조사 방향이 (삼민투 배후 색출이 아니라) 민청련 전체에 대한 탄압으로 가는 것 같으니 김근태 의장이 피신하는 게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민청련 사무실로 가서 전했는데 적극적 방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민청련 20주년 기념집’에서)
8월 10일 민청련은 서울 마포 신촌교회에서 제5차 정기총회를 열고 2년간 의장을 맡았던 김근태씨 대신 한경남(韓慶南ㆍ57ㆍ현 한나라당 당무위원) 당시 부의장을 의장에 선출하고, 구속된 김병곤씨 등을 부의장에 임명했다. 8월 24일 김근태 전의장이 서부경찰서에 연행됐다.
‘민주화의 길’ 10호 논설(8.10자)에서 군사독재정권 퇴진을 강도 높게 주장했으며, 9호 논설(5.13자)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실상을 폭로하고 전두환 정권을 ‘악의 꽃’으로 규정했다는 이유였다. 그것이 민청련 전체를 말살하기 위한 계산된 작전의 시작이었음은 9월 4일 김 전의장이 남영동 대공분실로 옮겨지면서 드러나게 된다.
김 전의장은 당시 민청련 상임위 부위원장으로 운동권 최고의 이론가로 알려진 이을호(서울대 철학과 74학번)씨와 함께 구속돼 23일간 살인적인 고문을 받았다. 김 전의장은 법정에서 자신이 조사를 받았던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능가하는 인간 도살장’에 비유했다.
당국은 이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의 틀을 준비해 놓고 ‘R(revolutionㆍ혁명)’과 ‘폭력’이란 말을 집어 넣었다. 당시 CD(civil democracyㆍ시민민주주의) ND(national democracyㆍ민족민주주의) PD(people democracyㆍ민중민주주의)는 일반화한 개념이었고 민청련 모임 등에서 자주 회자되는 용어였다.
여기에 ‘R’자를 고안해 첨부한 것은 남영동 수사관들이었다. 민청련이 CDR, NDR, PDR을 위해 ‘폭력’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진술되어야 국가보안법 위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남영동 수사관들은 민청련을 ‘혁명을 위한 폭력 단체’로 조작하는데 성공한다. 9월 말 김 전의장이 남영동을 떠나 검찰로 송치된 직후 ‘폭력혁명의 근거지’로 몰린 민청련 사무실이 폐쇄되고 10월 2일을 전후해서 민청련 지도부가 일제히 검거됐다.
5공 정권이 민청련 핵심 인사들을 구속한 것은 그야말로 ‘뱀이 두꺼비를 삼킨 꼴’이 됐다. 김 전의장의 부인 인재근(印在謹ㆍ50ㆍ이화여대 사회학과 72학번)씨를 통해 폭로된 고문과 용공조작 사실은 12월 19일 김 전의장의 첫 공판에서 지극히 자세히 확인된다.
이를 계기로 70년대 이후 모든 ‘고문 및 용공조작’ 사건에 연루된 가족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가 발족된다. 또 민가협 ‘어머니 부대’는 민청련과 재야의 모든 민주화 세력을 연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87년 1월 바로 그 남영동에서 박종철 군이 고문치사했음이 밝혀지면서 6월 항쟁의 불꽃이 타오른다.
정병진편집위원 bjju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