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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원문보기 글쓴이: 안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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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묘 왕자묘 왕자묘 왕녀묘 왕녀묘 왕자묘 왕녀묘 원자묘 원자묘 왕녀묘 왕자묘 왕녀묘 왕녀묘 왕녀묘 왕녀묘 왕녀묘 왕녀묘 왕녀묘 왕녀묘 왕녀묘 왕자묘 왕녀묘 |
고종 제5남 우(堣) 귀인 정씨 출 고종 제4남 육(堉) 광화당 귀인 이씨 출 고종 제3남 명성황후 출 고종 제1녀 귀인 이씨 출 고종 제1녀 명성황후 출 고종 제4남 명성황후 출 고종 제 2옹주 고종 제1자 명성황후 출 철종 제1남 청인왕후 출 헌종 제1녀 의숙 김씨 출 순조 제2남 순원황후 출 순조 제4녀 숙의 박씨 출 영조 제6녀 선희궁 소유영빈 이씨 출 영조 제1녀 연우궁 온희정빈 이씨 출 영조 제4녀 소유영빈 출 현종 제2녀 명성황후 출 현종 제1녀 명성황후 출 효종 제1녀 인선왕후 출 선조 녀 ? 중종 제5녀 문정왕후 출 예종 제1남 장경왕후 출 세종 제1녀 소헌왕후 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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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경선군(慶善君) 이백(李柏) 묘
소경원 우측 북쪽에 있다. 경선군은 소현세자의 장남으로 1638(인조 16년)에 출생하여 효종 5년(1654) 8월 17일에 사망하였다.
(17) 경완군(慶完君) 이석린(李石磷) 묘
경선군 이백의 묘 옆에 있다. 경완군은 조선 제16대 인조의 손자로 소현세자의 둘째 아들이다.
(18) 완화군(完和君) 이선(李墡) 묘
후궁들의 묘역에 있다. 묘 앞에는 오석(烏石) 비신에 옥개석이 있는 묘표가 있다. 이 묘표는 1910년 세운 것으로 표문은 조영하(趙寧夏)가 짓고 썼다.
완화군은 고종의 서자로 이름은 이선(李墡)이며 후궁 이씨의 소생이다. 비에 책봉된 명성황후는 처음에는 온순하고 예절에 밝아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후궁들을 가까이 하고 그중 이씨가 왕자 이선을 낳은 후로는 질투가 심해졌다고 한다. 게다가 대원군이 첫 왕손인 이선(墡)을 극진히 사랑하니 대원군을 적대시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선(墡)이 어려서 급사한 것도 명성화후의 음모라는 설이 있다. 시호는 효헌(孝憲).
(19) 태실(胎室)
효릉 서쪽에 있다. 이곳의 태실은 전국 여러 곳에 안치되어 있던 조선조 임금 21위와 그 밖의 대군, 세자 및 공주의 태 32위를 한 곳으로 모아 놓은 곳으로 일명 태실․태봉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을 임시로 두어 이를 관장하게 하였으며 태실은 대개 대석․비석․우상석․개첨석 등으로 만들었으며 일반 능과 마찬가지로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이를 묻을 땅을 물색한 후 안태사를 보내어 묻게 하였다.
태실 봉안도는 다음과 같다.
1. 인성대군(仁城大君) 2. 연산군모 윤씨(燕山君母 尹氏) 3. 안양군(安陽君) 4. 완원군(完原君) 5. 왕자 수장(壽長) 6. 견성군(甄城君) 7. 연산군 원자 쇠돌이(金乭伊) 8. 연산군 자 인수(仁壽) 9. 왕녀 영수(靈壽) 10. 연산군 여 복억(福億) 11. 연산군 여 복금(福今) 12.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3. 인성군(仁城君) 14. 인흥군(仁興君) 15. 숙명공주(淑明公主) 16. 숙정공주(淑靜公主) 17. 숙경공주(淑敬公主) 18. 명선공주(明善公主) 19. 연령군(延齡君) 20. 영조 왕녀 21. 영조 왕녀 22. 영조 왕녀 23. 의소세손(懿昭世孫) 24. 문효세자(文孝世子) 25. 철종 왕자 26. 덕혜옹주(德惠翁主) 27. 고종 8남 28. 고종 9남 29. 진전하(晋殿下) 30. 영산군(寧山君) 31. 의혜공주(懿惠公主) 32. 경평군(慶平君)
1. 태조고황제 2. 정종대왕 3. 태종대왕 4. 예종대왕 5. 성종대왕 6. 세종대왕 7. 문종대왕 8. 세조대왕 9. 선조대왕 10. 숙종대왕 11. 중종대왕 12. 인종대왕 13. 명종대왕 14. 정조대왕 15. 순조대왕 16. 헌종대왕 17. 영조대왕 18. 장조의황제 19. 이왕전하 20. 순종 21. 왕세자.
(20) 귀인 김씨(貴人金氏) 묘
봉분 앞 ‘조선왕귀인경주김씨묘(朝鮮王貴人慶州金氏墓)’라 새긴 묘표는 갓형으로, 크기가 폭 2 척, 두께 1 척, 높이 5 척이다.
조선 제19대 숙종의 후궁으로 1690(숙종 16)년 4월 8일에 출생하여 1735(영조 11) 7월에 사망하였다.
(21) 소의 유씨(昭儀劉氏) 묘
1767(영조 43)년 6월에 건립된 오석(烏石)의 묘표는 크기가 폭 2척, 두께 1척, 높이 4척이다.
조선 제19대 숙종의 후궁으로 출생 시기는 불확실하며, 1688(동왕 14)년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강릉.
(22) 숙의 방씨(淑儀方氏) 묘
원래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었으나 1969년 9월 26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숙의온양방씨지묘(淑儀溫陽方氏之墓)’라 새긴 갓형의 묘표는 크기가 폭 2척, 두께 20cm, 높이 5척이다.
조선 제25대 철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온양이며 슬하에 옹주 둘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23) 숙의 김씨(淑儀金氏) 묘
원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었으나 1969년 9월 26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숙의 김해 김씨지묘(淑儀金海金氏之墓)라 새긴 갓형의 묘표는 크기가 폭 2척 두께 20cm, 높이 5척이다.
조선 제25대 철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김해이며 슬하에 옹주 하나를 두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24) 숙의 범씨(淑儀范氏) 묘
원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었으나, 1969년 9월 26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또 ‘숙의 나주 범씨지묘(淑儀羅州范氏之墓)’라 새긴 갓형의 묘표는 크기가 폭 2척, 높이 20cm, 두께 5척이다.
숙의 범씨는 조선 제25대 철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나주이며 슬하에는 영혜옹주(永惠翁主: 금릉위 박영효(朴泳孝)에 출가)를 두었다.
(25) 숙의 박씨(淑儀朴氏) 묘
1854(철종 5)년 윤 7월에 건립된 오석(烏石)의 묘표에는 ‘숙의 밀양 박씨묘(淑儀密陽朴氏墓)’라 새겨져있으며 크기는 폭 25척, 두께 1.5척, 높이 5척이다.
조선 제23대 순조의 후궁으로, 슬하에 영온옹주를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26) 귀인 이씨(貴人李氏) 묘
원래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었으나 최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1928년 6월 3일에 건립된 오석(烏石)의 묘표는 갓형으로 크기가 폭 1.5척, 두께 20cm, 높이 4척이다.
내안당(內安堂) 귀인 이씨는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후궁으로 1847(헌종 13)년 8월 6일에 출생하여 1914년 1월 19일에 사망하였다. 슬하에 왕자 이육(李堉)과 두 옹주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27) 귀인 이씨(貴人李氏) 묘
원래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었으나 최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1929년 5월에 건립된 오석(烏石)의 묘표는 갓형으로 크기가 폭 1.5척, 두께 20cm, 높이 4척이다.
영보당 귀인 이씨는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후궁으로 1843(헌종 9)년 2월 14일에 출생하여 1928년 11월 6일에 사망하였다. 슬하에는 이완(李垸)과 이선(李墡)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28) 귀인 양씨(貴人梁氏) 묘
원래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었으나, 최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1930년 4월에 건립된 묘표는 크기가 폭 1.5척, 두께 20cm, 높이 5척이다.
복녕당 귀인 양씨는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후궁으로, 1882(고종 19)년 9월 27일에 출생하여 1929년 4월 22일에 사망하였다. 슬하에 일본 백작 종무지(宗武志)와 결혼했던 덕혜옹주가 있다.
29) 귀인 장씨(貴人張氏) 묘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후궁으로 1877(고종 14)년 왕 둘째 아들인 의왕 이강(李堈)을 낳았다.
2) 수춘군(壽春君) 이현(李玹) 묘
이 묘는 원당동 왕릉골 고려 공양왕 고릉의 좌측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묘는 영천군부인 영일 정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의 뒤편으로는 길이 30m에 이르는 커다란 사성이 쌓여져 있고 최근에 그 앞쪽의 봉분에 병풍석을 축조하였다. 봉분 앞쪽의 상석은 2기를 서로 맞대어 고석과 향로석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석물로는 상석 2기, 장명등 1기, 문인석 2구가 있고, 구 묘표는 2기가 있으며, 최근 1985년 4월에 건립된 신묘표는 기단과 옥개를 갖추고 있다. 비의 앞면에는 “소덕대부 수춘군 안도공지묘 영천군부인 영일정씨 부좌(昭德大夫壽春君安悼公之墓榮川君夫人迎日鄭氏 祔左)”라 새겨져 있다. 묘의 앞에 2기의 옛 묘비가 있으나 마모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며 앞면에는 화창이 모두 4개인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은 옥개석이 넓고 큰 것이 특징이었으나 최근에 분실되었다. 묘의 좌우에 배치된 문인석은 홀을 쥐고 있는 모습, 정면을 직시하며 험상궂은 표정, 옷고름의 섬세한 조각수법 등에 매우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수춘군은 조선 제 4대 세종의 여섯째 서자로서 1546(세종 25)년에 출생하여 세종 42년(1563)에 사망하였다. 이름은 이현(李玹)이며 시호는 안도(安悼).
3) 정안옹주(貞安翁主) 묘
원당동에 있다. 정안옹주는 조선 제 4대 세종의 딸로 어머니는 후궁 숙원 이씨이다. 청성위 심안의(沈安義)에게 출가했다.
4) 윤신지(尹新之)․정혜옹주(貞惠翁主) 묘
묘는 원당동 왕릉골 입구에서 벽제 방향 좌측에 있는 제청 마을에 있으며 봉분은 단분으로 되어 있다. 봉분 뒤편으로 곡장이 있었으나 1945년에 무너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봉분은 높이 260㎝, 총 둘레 18m의 규모인데 높이 52㎝의 화강석 재료의 병풍석이 돌려 있다. 이 묘비는 1657년 8월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는 “정혜공주 완록대부 해숭위 겸오위도총부도총관 윤공신지지묘(貞惠翁主 緩祿大夫 海嵩慰 兼五衛都摠府都摠管 尹公新之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묘비는 앞으로 혼유석, 상석, 직사각형의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고 그 좌우로는 높이 85㎝의 동자석이 세워져 있다. 이 동자석은 무늬가 화려하고 각부분이 세밀히 조각되 뛰어난 석물이다.
상석 전면에 위치하고 있는 장명등은 총 높이 210㎝, 옥개석 둘레 364㎝, 둘레 202㎝의 규모이다. 화창은 모두 4개인데 전체적으로 기단은 작고 왜소한 것에 비해 옥개석은 매우 크다. 옥개석은 팔작지붕 모양으로 하늘을 향한 반전이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묘소 좌우에는 망주석과 높이 194㎝의 문인석도 배치되어 있는데 문인석도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전체적으로 넉넉한 느낌을 주는 석물이다. 홀은 턱에 완전히 밀착되었고 머리에 쓰고 있는 무늬가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 한편 이곳 골짜기 이름이 제청말이라고 전해오는데 이는 옹주와 해숭위 윤신지(尹新之)의 제사를 받드는 곳이라 하여 이름진 것이라 한다.신도비가 쓰러진 채 방치되어 있는데 커다란 기단석과 옥개석이 한 줄로 흩어져 있다. 오석 비단은 폭 180㎝ 두께 45㎝, 높이 315㎝이다
5) 고려 공양왕 고릉6)김해 김씨 가족 묘
공양 왕릉 동쪽 100m 지점에 새로운 가족묘 형태의 묘역이 조성되고 있다. 약 7~8기의 묘역이 계속 조성되는데 납골 형태의 봉분묘이다. 특이한 점은 망주석이 2002년부터 동물이 용이나 호랑이로 대체되고 장명등도 매우 화려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2005년 6월 현재까지 온양 방씨, 죽산 안씨 등이 자리잡고 있다.
7) 신광한(申光漢) 묘
원당동 왕릉골 공양왕의 고릉 윗쪽 30m 지점에 있다. 정경부인 해주 오씨와 쌍분으로 되어있으며 상석과 장명등, 문인석 2기, 망주석 2기 등 석물이 앞에 배열되어 있다.
봉분의 정면에는 높이 172㎝, 폭 54㎝, 두께 17㎝ 규모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 묘비의 재질은 대리석인데 화강석의 대좌와 2마리의 용두화된 이무기가 조각되어 있다. 이수는 조각 수법이 뛰어나 살아있는 듯이 생동감이 넘친다.
묘비의 앞면에는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사행추성정난위사공신 보국숭록대부 영성부원군 겸영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증시문간공신광한지묘 정경부인 해주오씨지묘(贈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 事行推誠定難衛社功臣 輔國崇祿大夫 靈城府院君 兼領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贈諡文簡公申光漢之墓 貞敬夫人 海州吳氏之墓)”로 표기되어 있으나 음기는 풍우에 마멸되어 확인할 수가 없다.
신광한(1484:성종 15~1555:명종 10)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령, 자는 한지(漢之) 또는 시회(時晦), 호는 낙봉(駱峰)․기재(企齋)․석선재(石仙齋)․청성동주(靑城洞主)이다. 공조참판 신장(申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이며, 아버지는 내자시정 신형(申泂)이다. 어머니는 사포(司圃) 정보(鄭溥)의 딸이다. 1507년(중종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0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받았다. 1513년 승문원박사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 부수찬․교리․정언․공조정랑을 역임하고, 홍문관 전한으로 경연의 시강관을 겸임하였다. 이 때 중종이 학문을 장려하며 유학자를 우대하고 주야로 경연을 열어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고금의 시무(時務)를 논하여 채택되는 바가 매우 많았으며, 1518년 특명으로 대사성에 올랐다. 이듬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 삼척부사로 좌천되고, 이듬해에 파직되었다. 이어서 다시 여주로 추방, 18년 동안 칩거하였다. 1538년 윤인경(尹仁鏡)이 이조판서가 되어 기묘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람들을 서용하자 대사성으로 복직되었다. 대사간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한성부 우윤․병조 참판을 역임하고, 1540년 대사헌이 되어 관리들의 기강을 엄하게 하였다.
1542년 세자시강원의 우부빈객을 겸임하고, 이어 호조 참판을 거쳐 한성부 판윤에 올랐다. 이듬해 형조 판서를 지냈으며 지중추부사를 거쳐, 1544년에는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인종 때 대제학을 거쳐, 명종 즉위와 함께 우참찬이 되었으며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소윤에 가담,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정헌대부에 올라 영성군에 봉해졌으며, 지의금부사․대제학․지성균관사․경연동지사․춘추관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뒤에 영성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이어 좌참찬․예조 판서를 역임하고, 1548년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좌찬성이 되어 지성균관사와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1553년에 기로소에 들어가고 궤장을 하사 받았다. 1554년에 사직하고 그 이듬해에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시문을 많이 지었으며, 학문을 숭상하여 대사성이 되었을 때에는 학도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또한, 청렴하여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인사를 공정히 하고, 유일〔遺逸;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사는 학덕이 높은 선비〕을 많이 등용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맹자(孟子)와 한유(韓愈)를 기준으로 했고, 시문에는 두보를 본받았다. 저서로『기재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
8) 정자제(鄭自齊) 묘
원당동 왕릉골에 있으며 정부인 전주 최씨와 계배 정부인 영천 이씨의 3위 묘가 나란히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1기와 문인석 2구가 서있다. 또 1974년 10월에 건립된 묘비는 갓형으로 폭 2척, 두께 25cm, 높이 5척으로 되어있다.
정자제는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심(仲深)이며 호는 송곡(松谷)이다. 본관은 영일로써 정연(鄭淵)의 아들이며, 딸이 세조의 6째 아들, 수춘군 이현(李玹)에게 출가하여 왕실과 관련이 깊다. 관직은 전주부윤에 이르렀다. 우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9) 정도용(鄭道溶) 숭조(崇祖) 기념비(紀念碑) 공양 왕릉 서쪽 100m 지점에 영일 정씨 묘역에 있다. 1974년 세웠다. 묘역 초입에 연도 불명의 임상원(任相元)이 짓고 유이복(柳以復)이 쓴 정립(鄭岦)의 묘비가 있고 그 위에 통정대부를 지낸 정해(鄭瀣)의 쌍분과 묘비 2기가 있고 그 위에 정유(鄭濡)의 쌍분이 있으며, 그 뒤에 정수(鄭洙)의 쌍분이 있다.
10) 해주 정씨 묘
정자제 묘 동쪽 아래에 있다. “僉正合配淑夫人海州鄭氏之墓”라고 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6․25 때 묘갈이 망가져 다시 세운다”는 내용의 비가 있는데 기미년 3월에 15대 후손 정명택(鄭明澤)이 세웠다.
11) 장의중(張宜中) 묘 및 정려각(旌閭閣)
원당동 다락골에 있다. 1905년 9월에 건립한 오석(烏石) 묘비는 갓형으로 현손인 승교(昇敎)가 썼다. 비문에는 “인동 장공 의중 유인 은진 송씨지묘(仁同張公宜中孺人恩津宋氏之墓)”라 새겨 있으며 비의 크기는 폭 45cm, 두께 25cm, 높이 120cm이다.
장의중은 조선 말기 효자로 1821(순조 21)년 10월 7일에 출생하여 1895(고종 32)년 1월30일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인동이며, 계모에게도 효도를 다했으며 아버지의 병환을 고치기 위하여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헌혈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조정에 전해져, 1904년 9월 고종은 정려와 효자문을 하사하였다.(제7권 자료집 고문서편 참조)
정려는 한옥 형태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일부가 훼손되어 콘크리트로 일부 개축하였다. 정려의 규모는 정면 2칸으로 안에는 우패, 제기 등이 보관되어 있다. 정려에 달려있는 효자문은 땅으로부터 152cm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세로 92cm, 총길이 201cm의 규모이다. 정려에는 ‘효자학생 장의중지려(孝子學生 張宜中之閭)’란 글자가 흰색으로 쓰여져 있다. 정려문의 판은 붉은색으로 홍살은 모두 8개이다. 문의 끝 부분에는 1904(광무 8)년에 정려문을 세우도록 명령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효자문은 정려로부터 연결된 쇠줄로 지탱되고 있다.(제2권 인물편 참조)
12) 율원군 이종(李徖) 묘
이 묘는 고양시청에서 벽제 방면으로 이어진 39번 국도를 따라 약 2㎞를 가면 좌측에 있는 원당동 왕릉골에 무안현부인 동래정씨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 봉분의 주위로는 사성이 둘러 있으며 봉분에는 “중의대부 적개공신 율원군지묘(中義大夫 敵愾功臣 栗元君之墓)”라 표기되어 있다. 묘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높이 172㎝의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은 기단부가 좁고 옥개부분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장명등의 좌우로는 조선조 전기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문인석 2구가 있는데 눈이 부리부리하고 몸채가 넉넉하여 평안함을 주고 있다. 얼굴의 표정은 굳은 채 다물고 있다. 또 볼이 안면에 심하게 돌출되어 있어 매우 인상적인 느낌을 주는 석물이다. 묘 앞 길 옆에는 율원군 사당이 1987년에 세워졌는데 ‘율원군 사당’과 재실인 ‘忠義齋 ’가 들어서 있다. 사당 앞에는 2003년에 세운 근안공(謹按公)의 5기의 신도비가 서 있다.
율원군(1433:세종15~1476:성종 7)의 자는 유안(幼安),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보성군 이습(李拾)이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무예에도 뛰어났다. 1447년(세종 29) 광성대부로 율원령에 봉하여지고, 1457년(세조 3) 보신대부 부정으로 승급하고, 1460년 경서에 통달하여 창선대부로 올랐다. 하루는 세조가 종친 가운데 학식과 무예가 있는 자를 모아 문무의 시험을 보았는데, 그가 양쪽에 모두 뽑혀 총애를 받으니, 열무〔閱武;무인들의 사열〕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장수로 임명하였다. 1463년 평안도 국경지대인 방산진에 야인이 침입하자 세조가 명선대부로 올려 이를 진압하게 하였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정의대부 율원군에 올라 총통대장으로 출정하여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중의대부로 승계하는 동시에 적개공신 3등에 녹훈되고 함경남도 절도사에 특배되었으나 이듬해 병으로 소환되었다. 성품이 심중하여 일을 대하면 정밀하게 관찰하고 사람을 접하면 겸손하고 공경스럽게 대하였다. 시호는 양경(襄頃).
13) 이애(李薆) 사우(祠宇)
원당동 원당골에 있으며, 조선 태조의 부마인 상당부원군 이애(李薆)의 사당이다. 1925년 경에 건립된 이 건물은 정면 2간, 측면 1간의 크기에 목조 건물 조선와가로 되어 있으나 단청은 없다.
이애(李薆)는 본관이 청주이며 초명은 백향(伯鄕)이다. 태조의 첫째 딸 경시공주와 결혼하여 상당부원군에 봉해지고, 정사좌명공신에 녹훈되었다.
14) 이정화(李廷華) 묘
수역이 마을에서 벽제 방향인 원당동 절골 마을로 가면서 우측에 있으며 배 증정경부인 안동 권씨의 묘와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봉분은 커다란 사성 앞에 전․후로 배치되어 있으며, 봉분 앞으로는 화강석의 묘비가 있는데 높이 134cm, 폭 54cm, 두께 17cm의 규모이다. 묘비의 앞면에는 ‘증의정부 영의정 이공정화지묘 증 정경부인 안동 권씨 재후(贈議政府領議政李公廷華之墓贈貞敬夫人安東權氏在後)’라 기록되어 있다. 묘비의 앞으로는 혼유석, 상석, 6각형의 향로석이 있으며 높이 84cm의 동자석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동자상은 보기 드문 뛰어난 작품으로 각 부분이 매우 세밀하고 화려하게 조직되어 있다. 또한 전체적인 균형미도 안정감을 주는 뛰어난 수작이다. 망주석에는 석수가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특이한 모양이다. 문인석은 높이 149cm, 둘레 175cm로 조선조 중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묘 위에는 “土地之神)”이란 제단이 자리잡고 있다.
묘 아래 50m 지점에 있는 신도비는 기단(基壇)에 이수(螭首)를 갖춘 구조인데 이수의 앞면에는 용두(龍頭)화된 이무기가, 뒷면에는 운문(雲紋) 있다. 비에는 앞뒤를 합쳐 ‘증영의정 연성부원군 이공신도비명(贈領議政 延城府院君 李公神道碑)’이라는 전액이 쓰여져 있다. 비문 중 숭정 9년이란 내용을 보아 1636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의 비문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여이징(呂爾徵)이 전(篆)을, 송준길(宋浚吉)이 비문을 썼다. 묘 아래에는 이춘배(李春培), 이현(李鉉)의 묘가 자리잡고 있으며, 묘 옆에도 2기의 묘가 자리답고 있다.
이정화(1520~1558)는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관(子貫), 본관은 연안, 이귀(李貴)의 아버지이며 영의정을 지낸 이시백(李時白)의 조부이다. ‘의정부영의정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추증되었다. 200년에 세운 이정화 행적비가 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그 옆에는 사당인 ‘원모재(元慕齋)가 1997년도에 건립되었으며 표석 뒷면에는 “원모재 봉건기(元慕齋 奉建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정화 묘
15) 원당동 지석묘
한양컨트리클럽과 축협중앙회 가축계량사업소 사이에는 길 골짝이가 있는데 이곳의 상단에 지석묘로 보이는 괴석이 하나 놓여있다. 상면에는 뚜렷한 치성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다만 현재에도 치성을 드렸던 장소로 보이는 초를 피웠던 흔적이 보인다. 상부에는 나무가 자라 원래 한 덩어리였을 지석묘를 갈라놓고 있다. 높이는 160㎝, 장폭축 380㎝, 단폭축 350㎝. 장축 방향은 거의 정남북이다.
고양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319페이지 사진165-1
원당동 지석묘
16) 의친왕(義親王) 묘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둘째아들로 1877(고종 14)년에 출생하여 1955년에 사망하였다. 이름은 이강(李堈)이며 처음 이름은 이평길(李平吉)이며 호는 만오(晩悟)로 어머니는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이다. 비는 찬정 김사준(金恩濬)의 딸 연안 김씨 이름은 덕수(修德), 1881-1964)이다. 1891(고종 28)년 의친왕에 봉해지고 3년 후 보빙대사로 일본에 건너가 청일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고 1895(고종 32)년 6개국 특파대사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순방하였다. 1899(광무 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이 해에 의친왕에 진봉되었다. 1905년 귀국하여 육군부장이 되었으며 이어 적십자 총재에 올랐다. 한일합방 후에는 독립운동가들과 접촉 1919년 대동단의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과 협의한 뒤 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을 기도하여 같은 해 11월 상복차림으로 만주, 안동에 이르렀으나 발각되어 송환당했다. 이 사건은 일본 조야에 큰 물의를 일으켰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정부로부터 도일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배일정신을 고수하였다.
의친왕 묘
17) 정안옹주(貞安翁主) 묘
세종의 딸로 어머니는 후궁 숙빈 이씨이며 청성위 심안의(沈安義)에게 출가하였다.
18) 성귀원(成貴遠) 묘
본관은 창녕. 배위 없이 단분이며 봉분 앞에 높이 90cm, 폭 37cm, 두께 16cm의 묘비가 있음. 이외에 상석, 171cm의 문인석,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가정대부 병조 참판을 지냈다.
19) 정부인(貞夫人) 거창 신씨 묘
본관은 거창으로 단분의 비두, 대좌가 갖추어진 묘비가 있는데 1494년에 세웠다. 재질은 대리석이며 봉분 앞에 상석, 향로석, 혼유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조선조 전기의 특징을 갖춘 문인석이 2구 있는데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며 투박한 모습이다.
20) 이각(李珏) 묘
정자제 묘 서쪽 100m 지점에 2004년 세운 증 통덕랑 이각의 묘가 있다.
21) 이유(李瑜) 묘
이각 묘 윗부분에 있으며, 비는 1999년에 세웠다. 비는 가로 세로 같은 길이로 만들고 한쪽 면에는 후손의 계보도를 도표로 그려 넣었다. 묘 아래에는 이유의 후손 묘가 약 20기 정도 현대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22) 정자양(鄭自洋) 묘
본관은 영일이다. 배 숙부인 평창 이씨와 단분이며 대좌와 비두를 갖춘 묘비와 오석의 묘비, 상석, 향로석, 혼유석, 망주 ,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통정대부, 이조 참의를 지냈다.
23) 정수(鄭洙) 묘
본관은 영일이다. 숙부인 한산 이씨와 쌍분, 옥개, 기단이 있는 묘비, 상석, 220cm의 문인석이 있고 봉열대부 행봉상시 첨정을 지냈다.
24) 신흥해(申興海) 묘
본관은 고령이다. 배 전주 이씨, 의령 남씨와 쌍분으로 되어 있으며 대리석 묘비와 혼유석, 상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효자충의위를 지냈다.
25) 신흥점(申興漸) 묘
본관은 고령이다. 배위 없이 단분이며 높이 163cm의 묘비, 대리석 재질에 대좌를 갖추고 있다. 이외에 상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경연참찬관 행어모장군 세자익위사 익사를 지냈다.
26) 신진(申津) 묘
본관은 고령이다. 대리석 재질의 묘비 규모는 높이 171cm, 폭 53cm, 두께 19cm 묘비 앞으로 상석, 직사각형의 혼유석, 향로석이 배치 봉분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이 있다. 봉훈대부 행황해도 도사 겸춘추관 기주를 지냈다.
27) 권자선(權子善) 묘
본관은 안동이다. 숙인 선산 김씨와 쌍분이며 상석, 향로석, 홍치 10년(1497)에 세워진 묘비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대리석으로 높이 152cm, 봉준 좌․우에는 망주, 문인석이 있으며 비문에는 당시 이곳 지명을 목원리(木遠里)로 기록되어 있다. 통훈대부 행죽천 군수(行竹川郡守)를 지냈다.
28) 효부 권심(權審)의 처 정문지(旌門址)
조선 후기 유학(幼學) 권심(權審)의 처이다. 그가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자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 그의 효행을 기리게 하였다. 옹주골〔낙타고개 군인아파트 앞〕에 있다.
29) 이영빈(李永贇) 묘
청대골 첫입구 오른쪽에 있다. 이영빈의 출생일은 상고할 수 없고 졸년은 1773년으로 전주 이씨 정종대왕 덕천군의 12대 손이다. 새로 세운 비문에는 ‘증 통정대부 공조참판 행 가선대부’라고 표기되어 있다. 구비는 신비 아래에 묻었으나 구비의 글자는 판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모가 심하다.
제3절. 신원동(新院洞)
1) 신원동 느티나무 (제2권 문화유산, 마을지정 느티나무편 참조)
2) 김희성(金喜誠) 묘
청대골로 들어가 좌측에 있다. 김희성은 1723년 6월 1일 태어나 1769년 47세로 사망하였다. 자는 중익(仲益) 호는 불염자(不染子), 불염재(不染齋), 본관은 전주 일명 김희겸(金喜謙)으로 화가로서 산수, 인물, 조충도에 뛰어났다. <오수청천도(午睡聽泉圖)>, <의수조옹도(倚樹釣翁圖)> 등이 알려져 있다. 1748년(영조 24) 어진을 다시 그리고 나서 사천 현감을 지냈다.
3) 파림군(坡林君) 이주(李珘) 묘
신원동 능골 마을 월산대군의 사당인 석광사 뒤편에 있으며 양천현부인 허씨와 합부되어 있다. 봉분은 보기 드문 6각형으로 둘레석이 돌려져 있다. 봉분 정면으로 대좌, 오석의 비신으로 된 묘비가 있으며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이 비치되어 있다. 상석은 2기를 합쳐 놓은 모양으로 고석은 보이지 않는다.
봉분의 좌우로는 망주와 문인석이 있는데 망주석에는 석수가 조각되어 있으며 양쪽에 작은 구멍이 난 특이한 모습이다. 또 228㎝의 문인석은 각부분의 조각 수법이 아주 세밀한 뛰어난 석물이다. 특히 손에 홀 중간까지 턱수염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매우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곡선이 아름답다. 봉분 우측에 높이 241㎝, 두께 21㎝의 신도비는 대리석 재질로 되어 있다. 마모가 심하여 비문의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이수는 매우 화려하다. 또 다른 비에 비하여 대좌가 큰 것이 특징이다. 비는 1563(명종 19)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예조 참판 김주(金澍)가 짓고 한성 부윤 자헌대부 신효중(申孝中)이 썼다.
파림군은 월산대군의 장손으로 정의대부에 올랐으며 파림군에 봉해졌다.
1983년에 세워진 오석의 묘비에는 “유명조선국 종실 정의대부 파림군지묘 양천현부인 허씨(有明朝鮮國 宗室 正義大夫 坡林君之墓 陽川縣夫人 許氏)”라고 기록되어 있다.
4) 전(傳) 흥복사지(興福寺址)
원당 신원에 있었다고 전한다.
5) 월산대군 묘 및 신도비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6) 신원동 회화나무 (제2권 문화유산, 동지정 보호수편 참조)
7) 월산대군 사당 (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문화재자료편 참조)
8) 덕풍군(德豊君) 이이(李恞) 묘
고양시청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이어진 39번 국도를 따라 약 2.5㎞ 거리에 있는 신원동 능골 마을에 위치하고 있는데 파평 현부인 윤씨와 합부되어 있다.
원형의 봉분은 앞으로 높이 173㎝, 폭 51㎝, 두께 20㎝의 대리석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 묘비는 화강석의 대좌에 이수가 갖추어져 있는데 이수에는 2마리의 이무기가 조각되어 있다. 한편 이수의 뒷면에는 꽃무늬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묘비의 앞면에는 “파평현부인 윤씨지묘 승헌대부 덕풍군 증시소도공지묘(坡平懸夫人 尹氏之墓 承憲大夫 德豊君 贈諡昭悼公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묘표 앞의 석물은 상석 2기를 고석 3개가 받치고 있다. 고석은 타원형이며 바람과 비에 의해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향로석 3m 앞에는 높이 153㎝ 규모의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의 화창은 모두 4개인데 다른 것에 비해 화창이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장명등의 화사석과 기단석에는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장명등의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문인석은 조선조 전기의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우람하고 넉넉한 느낌을 주는 석물이다.
봉분 좌측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신도비가 있는데 높이 173㎝, 폭 52㎝, 두께 18㎝의 규모이다. 신도비는 대좌,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는데 1506년에 세워진 것이다. 신도비의 앞과 측면에 날카로운 균열이 나 있으며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정확히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덕풍군(1485~1506)은 월산대군의 아들로 이름은 이이(李恞)이다. 10살 때 승헌대부 덕풍군(承憲大夫 德豊君)에 봉해졌다.
9) 신원동 느티나무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지정보호수편 참조)
10) 덕명교비(德明橋碑 ) (제7권 자료집 금석문편 참조)
이 교량비는 신원동 해방촌 마을의 중소기업은행 축구연습장 안에 있다.
현재 비는 대좌의 거의 전부가 땅에 묻혀 있고 나머지 비신과 옥개석을 합친 총 높이는 282cm의 규모이다. 이 중 비신의 크기는 높이가 231.5cm, 폭 96cm, 두께 25cm인데 비 전체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옥개석의 일부는 마모되어 있는 상태이다.
비의 앞면에는 전자로 ‘경기도 고양군 덕명교(京畿道 高陽郡 德明橋)’라 기록되어 있다. 앞면에는 전(篆) 이외에도 가는 글씨로 된 비문이 가득 새겨져 있다. 비의 뒷면에도 비의 중간부분부터 비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양 신원 덕명교비명(高陽新院德明橋碑銘)’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약 760여 명의 인명(人名)이 한문과 이두문자(吏讀文字)로 기록되어 있다.
이 비의 내용은 한양과 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관서로(關西路) 구간 중 신원동 곡릉천 위에 다리를 놓으면서 그 자세한 사항을 기록으로 표기해 둔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이 비의 건립자는 이한(李瀚)과 당시 고양 군수인 통정대부 유후성(通政大夫 柳後聖), 그리고 정헌대부 윤면지(正憲大夫 尹勉之), 이상식(李尙植), 홍시우(洪時雨)를 대표로 한 760여 명의 주민으로 되어 있다.
앞면은 비의 서문으로 주민 760여 명이 모두 힘을 합쳐 곡릉천 위에 돌다리를 건립한 내용과 그 명단을 자세하게 표기해 두었다. 이 교량비의 건립 연대는 효종 9년(1658)이다. (제7권 자료집 금석문편 참조)
11) 신원동 느티나무3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지정보호수편 참조)
12) 계림군 이류(李瑠) 묘
3위가 나란히 자리잡은 묘이다. 이수에 대리석으로 된 묘표에는 각각 “희덕대부 계림군지묘(喜德大夫 桂林君之墓)”, “정창군부인 안씨지묘(廷昌君夫人 安氏之墓)”, “조천군부인 정씨지묘(鳥川君夫人 鄭氏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상석 2기, 망주석 2기, 문인석 2구의 석물이 있다.
계림군(1545년:인종 1년)의 자는 언진(彦珍), 할아버지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고, 아버지는 성종의 셋째 아들 계양군이며, 어머니는 중종의 첫째 계비인 장경왕후의 아버지 윤여필(尹汝弼)의 딸이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의 외척 대윤의 윤임(尹任) 일파와 소윤의 윤원형(尹元衡) 일파 사이에 정권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윤임을 축출하기 위하여 경기감사 김명윤(金明胤)이 밀계를 올리기를 “인종의 병환이 위중하자 윤임은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껴, 임금의 아우〔명종〕를 추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자신의 생질인 계림군 유를 세우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그 일로 윤임이 제거되자, 계림군은 미리 겁을 먹고 양화도에서 배를 타고 도망쳐 황룡산 기슭에 있는 이웅(李雄)의 집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숨어 있다가, 토산 현감 이감남(李坎男)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거열형을 당하였다.
1577년(선조 10)에 신원되고 종적에 다시 올리게 되었다.
13) 양천 도정(陽川都正) 이성(李誠) 묘
신원동 파림군 묘 아래에 있는데 신부인 광주 김씨와 부좌한 쌍분이다. 앞쪽에 대리석으로 된 묘비에는 “조선국 종실 명선대부 양천도정 성지묘 신부인 광주김씨 부좌(朝鮮國 宗室 明善大夫 陽川都正 誠之墓 愼夫人 光州金氏 祔左)라 기록되어 있는데 1732년 3월에 입석한 것이다. 석물로 상석 1기, 망주석 2기 문인석 2구가 있다.
양천 도정은 월산대군 손자 파림군의 장남이다.
14) 전성부정(全城副正) 이이(李璃) 묘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언규(彦圭)이며, 배 신부인 고령 신씨와 단분으로 사각봉분이다. 대리석 재질의 이수를 갖춘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1506년에 출생 1545년에 사망하였으며 명선대부에 올랐다.
15) 귀인 정씨(貴人鄭氏)
본관은 영일이다. 단분, 화강석 재질의 묘비가 있는데 총 높이는 72cm이며 대좌가 갖추어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유명 조선 귀인 영일 정씨지묘(有明朝鮮貴人迎日鄭氏之墓)’라 새겨져 있다. 상석, 혼유, 향로석, 망주, 문인석도 배치되어 있는데 문인석은 관모가 특이한 조각수법이 뛰어난 작품이다.
16) 정유침(鄭惟沈) 묘
원신동 송강마을에 있다. 본관은 영일이며 송강 정철의 아버지이다. 증 정경부인 죽산 안씨와 쌍분으로 되어 있으며 화강석 재질의 80cm 묘비에 혼유, 상석, 향로석, 망주,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에는 ‘유명조선 증의정부 영의정 영창부원군 행돈령 판관 정공유침지묘’라고 씌어있다. 1493년에 태어나 1570년에 사망했으며 돈녕판관을 지냈다.
사진
17) 김승학(金承學) 묘.
봉분의 높이는 1.2m, 둘레는 10m이고 묘비가 있다. 김승학(1881:고종18~1965)은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희산(希山), 일명 김탁(金鐸)이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24세에 상경해 한성고등사범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탐구하였다. 1907년 정미조약 체결 때 서울 종로에서 반대연설을 하다가 붙잡혀 평리원 구치감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 강무당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뒤에는 의병투쟁에 가담하였다. 1919년 각계각층의 대표 560여 명이 유하현 삼원보에 모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할 때 참여, 독립단 총재부에서 활동하였다.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평북독판부 국내특파원으로 선발되어 백의범(白義範)․백기준(白基俊)과 함께 국내에 잠입, 평안도․황해도 일대에 연통제를 조직하고 88개 소에 달하는 독립단 지단을 설치 운영하였다. 민국독립단의 재무부장 일을 맡아 무장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사의 사장이 되어 민족정기를 앙양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2년 중한호조사 선전부장에 취임해 양국간의 친선을 도모하였고,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대표의원의 일을 맡아보았다.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학무부 차장이 되어 학무부 총장의 직무까지 겸임하였다.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의로 참의부 참의장이 되어 참의부의 재건운동에 힘썼다. 1928년 중국 몽강현에 무관학교를 설치하고 군인 2백명을 육성했으며, 참의부의 기관지 정로도 간행하였다. 또한 길림에서 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삼부통일대표회의에 참의부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 홍진(洪震) 등과 협의 끝에 한국독립당과 군민의회를 조직하였다. 이 회의에서 그는 군민의회의 민사위원과 한국독립당의 최고간부직을 겸하게 되었다.
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중일군 경합동대에게 붙잡혀 신의주․평양 등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중국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광복 후에 귀국해 한때 당정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한국독립사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18)정황(鄭滉:1528~?) 묘
송강 마을 뒷산에 있다. 송강 정철의 중형(仲兄)이다. 벼슬은 군기시 첨정, 통정대부 김제 안악군수, 내섬시 부정,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를 받았다.
19) 정기명(鄭起溟) 묘
원신동 송강마을에 있으며 송강 정철의 장자로 태어나(1559~1589) 1558년 진사에 올랐다.
20) 정운(鄭沄) 묘
원신동 송강마을 뒷산에 있으며, 송강 정철의 장손으로 태어나(1576~1644) 벼슬은 운봉(雲峰) 현감을 지냈다.
21) 강창제(姜昌濟) 묘
봉분의 높이는 1.2m, 둘레 12m로 상석과 묘비가 있다. 강창제(1898-1965)는 독립 운동가로 본관은 진주이다. 일명 정명희(鄭明熙)․강동욱(姜東郁)․여순지(呂順之)․강화조(姜華祖)라고도 불린다. 호는 창산(蒼山)으로 평안북도 창성 출신이며, 아버지는 시홍(時洪)이다.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뒤 상해로 망명하여 1922년에 독립신문사 기자로 활약하였고, 192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회계 검사원과 검사관을 거쳐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3월 독립운동 자금 공급과 위임통치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임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을 결의하였다. 1925년 임시정부 내무부의 참사 겸 경무국장서리에 취임하고, 노병회 이사에 선임되었다. 1926년 나창헌(羅昌憲)․고준택(高俊澤) 등과 협의하여 임시정부의 전위 활동 부대인 병인 의용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산하 단체로 40명 규모의 정위단을 조직한 뒤 총무 겸 전략 참모로 활약하였다. 병인 의용대의 활동으로 상해 한국 동포 사회의 치안은 확보되고 일제의 앞잡이들은 거의 근절되어 임시정부의 권위는 크게 제고되었다. 이때 제3차 개선이 이루어졌다.
1928년에 장쑤성 경찰학교의 교관을 지냈고 이듬해에는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 등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리고 최병선과 같이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 최동윤(崔東允)을 총살하였다. 1930년에는 상해에 있는 프랑스 정보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았고, 1932년에는 상해 둥난대학을 3년 중퇴한 뒤 장쑤성정부 민정청 경무 고문으로 초빙되었다. 1934년 병인의용대장에 선임되고 한국독립당 중앙이사 겸 조사 부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의열단․신한혁명당․대한독립단 등 5개 단체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조직하는데 참여하며, 중앙위원 겸 조사 부장에 피선되었다. 1937년 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지청천(池靑天)․현익철(玄益哲)․최동오(崔東旿) 등과 같이 조선혁명당을 조직하고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임시정부가 일본군의 중국 침입으로 근거지를 상해에서 전장․창사 등지로 이동하던 당시 창사에서 임시정부의 내분으로 야기된 창사사건으로 한 때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뒤 중화민국 군사 위원회 정보부 심사 과장에 취임하고, 1944년 홍진(洪震)․유동열․이연호(李然皓) 등과 같이 신한민주당을 조직하고 그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후 귀국하였다. 1963년 독립장을 받았다
22) 김관오(金冠五) 묘.
봉분의 높이는 1.2m, 둘레는 10m로 상석과 묘비가 있다. 김관오(1901-1965)는 독립운동가로 일명 김관오(金官五)이다. 호는 우당(愚堂)이고 서울 출신이다. 1919년 보성중학교 재학중에 3․1운동에 참가하여 선전문을 비밀리에 배부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경성지방 검사국으로 이송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 뒤 평강에 있는 친척집에 피신해 있다가 1921년 10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2년 중국 윈난무강당(雲南武講堂)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924년 졸업과 동시에 광저우(廣州)로 가서 군사학을 연구하면서 무기원조 획득에 노력하였다. 중국 국민혁명 제43군 및 중앙훈련단에서 장교로 근무하였고, 중국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수료하였다. 1941년 한국독립당 충칭지구당부 위원장이 되었고 이어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창립에 참여하여 고급부관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임시정부 경위대를 조직, 그 대장에 취임하였으며, 1942년에는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 후 귀국, 국군에 입대하여 활동하다가 육군준장으로 예편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3) 김후승(金後承) 묘
봉분의 높이는 1.2m, 둘레는 10m로 상석과 묘비가 있다.
24) 김준승(金俊承) 묘
상석과 묘비가 있다. 독립운동가. 대한통의부 독립결사대에 입대하여 활동.
제4절. 원흥동(元興洞)
1) 김우신(金友臣) 묘
절골마을 연안 김씨 묘역에 있다. 주위에는 최근 세운 장명등 1기, 상석 1기, 망주석 2기가 있다. 한편 두께 17㎝, 폭 52㎝, 높이 96㎝의 국화수 묘비가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김호간공지묘(資憲大夫 知中樞府事 金胡簡公之墓)”라는 비문으로 1511(중종 6)년 2월에 세워졌다. 또 좌의정 신용개(申用漑)가 짓고 신은윤(辛殷尹)이 비문의 글씨와 전자를 썼다. 용수의 신도비가 두께 25㎝, 폭 80㎝, 높이 167㎝로 서 있다. 문인석과 망주석, 장명등은 최근에 조성하였다.
김우신(1424:세종6~1510:중종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대빙(待聘), 밀직제학 김도(金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김자지(金自知)이고, 아버지는 김질(金秩)이며, 어머니는 참판 성개(成槪)의 딸이다. 1453년(단종1)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성종이 세자였을 때 왕자사부로 발탁되어 무반으로 대우받았고, 1472년(성종 2) 사옹원 직장으로 출발하여 한성부참군을 거쳐, 종부시 주부가 되고, 1477년에는 해주 판관이 되었다. 1479년 군기시 주부를 거쳐, 이듬해 통진 현령이 되었다. 그 뒤 1486년에는 단양군수 등을 지냈다. 이후 상호군․대호군 등을 번갈아 10여 년 동안 역임하였다. 이어 성종의 배려로 문반이 되어 호조 참의를 제수받고 첨지중추부사를 거친 뒤 관직을 떠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2) 김전(金詮) 묘 및 신도비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3) 한규설 선생 묘 (제2권 문화유산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4) 선조(宣祖) 귀인(貴人) 묘
송강 마을 뒷산 정황 묘소에 있다. 정황의 딸이다.
5) 청자도요지 (제2권 문화유산경기도, 문화재자료편 참조)
6) 심봉원(沈逢源) 묘
고양시청에서 구파발 방향으로 이어진 310번 지방도로 좌측에 있는 원흥동 구석말 마을에 있으며, 배 증정경부인 경주 김씨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 묘는 이 일대의 청송 심씨 묘역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봉분의 총 둘레는 24m에 이르며 높이는 2.5m이다. 봉분의 뒷편으로는 넓게 사성이 둘러쳐져 있는데 봉분 바로 앞에는 대좌, 옥개석을 갖춘 오석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 앞에는 화강석 재질의 상석과 혼유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상석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이 있는데 문인석의 얼굴 표정이나 각 부분의 윤곽이 뚜렷하다.
묘소 아래 100m 지점에는 흰 대리석 재질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의 규모는 총 높이 204cm, 폭 73cm, 두께 21cm이다. 신도비의 비문은 노수신(盧守愼)이 찬(撰)하고 김현성(金玄成)이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箋)을 썼다. 특히 신도비 윗부분의 이수(螭首)는 그 조각수법이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여 뛰어난 수작으로 여겨진다. 공의 손자인 일송 심희수가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심봉원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1497(연산군 3)년에 태어나 1574(선조 7)년에 사망했다. 자는 희용(希容)이며 호는 효창노인(曉窓老人), 본관은 청송이다. 영의정 심연원(沈蓮源)의 아우로 1537(중종 32)년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學諭) 겸 사록(司祿)이 되고 이듬해 탁영시(擢英試)에 뽑혔으며 1561(명종 16)년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온유한 성품으로 그림, 음율, 의술, 글씨 등에 능하였다.
7) 심희수(沈喜壽) 교지(敎旨) 및 묘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8) 일타홍(一朶紅) 이씨(李氏) 단(壇)
심희수 묘 옆에 작게 세운 단이다. 뒷면에는 심희수와 일타홍이 지는 시가 각각 1수씩 기록되어 있다. (제7권 자료 금석문편 참조)
일타홍 비석 사진
9) 원흥동 느티나무(제2권 문화유산, 마을지정 보호수편 참조)
10) 김제신(金悌臣) 묘
원흥동 절골마을 연안 김씨 묘역에 정부인 노씨를 좌측와 합장되어 있다. 상석과 문인석 2구 및 묘비가 있다. 묘비는 1503(연산군 9)년에 입석한 것으로 증자헌대부 호조 판서 홍유달(洪遺達)이 짓고 고양 군수 신은윤(辛殷尹)이 비문의 글씨와 전자를 썼다. 그 크기는 두께 17㎝, 폭 55㎝, 높이 120㎝이다.
김제신(1438:세종 20~1499:연산군 5)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순경(順卿) 김도(金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김자지(金自知)이고, 아버지는 내자시윤 김질(金秩)이며, 어머니는 동지총제 성개(成槪)의 따님이다.
1462년(세조 8) 식년 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해 승문원 권지정자에 보임되었다. 그러나 곧 병으로 여러 해 동안 은퇴했다가 완쾌된 다음인 1464년에 세조의 호의로 풍수문(風水門)에 선발되었다. 이어서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구성군 이준(李濬)을 따라 군관이 되어 토벌에 참여하였다.
1472년(성종 3) 정언이 되고, 아울러 예문록에 올라 경연에서 활동했으며, 재상 신주(辛柱)의 탐욕하고 거만함을 탄핵하였다. 1477년 지평을 거쳐 장령에 올라, 양성지(梁誠之)․김국광(金國光)․임원준(任元濬) 등을 탄핵해 기강 확립과 풍속 교정에 힘썼다.
김제신 묘 아래에는 김상길(金相吉)과 배 용인 이씨가 합장되어 있고, 그 옆에 별도로 정경부인 진천 송씨 묘가 있다. 다시 그 아래에는 김안수(金安遂) 묘가 증 정경부인 전주이씨 진주 강씨의 묘 3기가 앞 뒤로 있다. 그 아래에 변토사를 지낸 김한영(金翰泳)의 묘가 있다.
1481년 경상도에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파종과 구황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어서 집의로 승진하고 함경도 경흥에 파견되어, 수령과 만호의 불법적인 처사를 적발하였다. 1485년 세자 시강원 보덕이 되어 세자 교육에 힘썼다. 이듬해 다시 함경도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유민 쇄환을 위해 활동을 폈고, 그 이듬해에는 선위사로 일본사절을 접대하였다. 그 동안의 공로로 이조참의에 올랐다. 1489년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좌부승지․좌승지 등을 역임했고, 이듬해 도승지가 되어 국왕을 충실히 시종하였다. 이어서 경기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총괄했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병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 기강 확립에 힘썼다. 특히 왕자와 옹주들의 호사한 저택 풍조를 신랄히 비판하였다. 이듬해 정조사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사행 중 조공품을 도난당해 고신(관리의 관직 임명장)을 환수당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한성부 우윤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1496년 다시 대사헌이 되어 언론 기능의 강화와 기강 확립에 힘썼다. 또한 당시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묘를 세우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1497년 예조 참판으로 전임되었고, 이듬해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金宗直)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1499년 전주 부윤으로 나가 농정과 교육에 힘쓰다가 현지에서 죽자, 사민들이 거리에서 곡하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폐비입묘(폐비의 사묘를 세움)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추형(사후에 추가된 형벌)되었다.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행동이 맑고 근실해 군자의 도를 보였다.
11) 김안근(金安謹) 묘
김당 신도비 안쪽 50m 지점에 있다. 배 양천 허씨와 단분으로 되어 있다. 묘 앞에 구묘표와 상석, 동자석 2기가 있고 2003년에 세운 묘비와 문인석이 있다. 김안근은 김당의 후손으로 선조 9년에 태어나 절충장군을 지냈고, 을미년에 사망하였다. 증 병조판서를 받음.
12) 김당(金璫) 묘
310번 도로에서 구석말 쪽으로 들어간 300m 지점에 있다. 배 정경부인 원주 이씨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1977년 2 월에 건립된 오석의 신도비는 크기가 폭 69cm, 두께 40cm, 높이 200cm이며, 김안국(金安國)이 지은 비문에는 “의정부좌찬성 시공절 경주 김공 휘당 신도비(議政府左贊成諡恭節慶州金公諱璫神道碑)”라 새겨져 있다.
묘에는 구 묘표가 각각 1기씩 있고, 망주석, 문인석 외에 1990년 세운 묘표와 수석, 장명등이 조성되어 있다.
김당(1465:세조 11~1532:중종 2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옥이(玉耳)이다. 김중성(金仲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김신민(金新民)이고, 아버지는 목사 김태경(金泰卿)이며, 어머니는 변균(卞鈞)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합격했고, 1495년(연산군 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학유․의정부 사록․성균관 학록과 예문관 검열․대교․봉교를 거쳐 1504년 예조 좌랑으로 전직되었고, 이듬해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이어 사도시 첨정․성균관 사예․승문원 교감 겸 세자시강원 필선 등을 역임했는데, 봉교 이후 계속해 사직(史職)을 겸임하였다.
1506년 성균관 사성 겸 승문원 참교를 거쳐, 중종반정 후 사간이 되었으나 김세필(金世弼)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봉상시 부정으로 좌천되었다. 다시 장례원정으로 오른 후 이듬해 홍문관전한, 그 이듬해 직제학을 거쳐 우부승지․도승지에 올랐다. 1512년(중종 7)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경직에 들어왔다.
이어 한성부 우윤, 경기도․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와 대사헌 및 공조․형조․병조․호조․예조의 참의 등 요직을 거쳤다. 특히, 1519년 기묘사화 때에는 호조 참의로서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처벌에 참여해 변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명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526년 형조 판서가 되었고, 1531년 한성부 판윤․지중추부사․공조 판서․대사헌 등을 역임한 뒤 좌참찬이 되었으며, 우찬성․판의금부사․오위도총관을 거쳐 좌찬성으로 재임 중 죽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솔직했으나, 일관된 마음가짐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호는 공절(恭節).
13) 김원(金沅) 묘
김당 신도비 위쪽 50m 지점에 배 풍천 노씨와 단분으로 되어 있다. 자는 원일(原一) 본관은 경주이다. 인조 15년에 출생하여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14) 심주관(沈周觀) 묘
심희수 묘 아래에 배 안동 권씨와 합폄되어 있다. 본관은 청송, 벼슬은 병조정랑을 지냈다. 2005년에 세운 작은 묘표와 옛 상석이 있다.
15) 심완(沈浣) 묘
심주관 묘위에 배 정부인 안동 권씨와 합폄되어있다. 본관은 청송이며 증 가선대부, 사헌부 집의 지제교를 지냈다. 묘표와 상석, 망주석, 문인석이 있다.
16) 심욱(沈旭) 묘
심희수 묘역 뒤편에 배 정부인 평양 조씨, 배 정부인 안동 권씨와 3기의 묘로 조성되어 있다. 상석과 망주석, 문인석에 1985년에 세운 묘표와 장명등이 있다. 본관은 청송,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심봉헌의 증손자.
17) 심창수(沈昌壽) 묘
심욱 묘위에 배 증정부인 무송 윤씨 부좌되어 있다. 본관은 청송이며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 통훈대부, 군기시 첨정을 지냈다.
18) 김각(金覺) 묘
김혜손의 아들. 김태경 묘 바로 위에 있다. 1997년에 세운 묘표와 망주석이 서 있다. 김당의 손자로서 호조 참판을 증직 받았다.
19) 김혜손(金惠孫) 묘
김각의 묘위에 배 숙인 원주 변씨와 단분으로 되어있다. 1997년에 세운 묘비와 구비, 망주석, 문인석이 서 있다. 통정대부로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다.
20) 조문신(趙文信) 묘
육골마을 평양 조씨 묘택에 있다. 본관은 평양. 배는 숙인 광산 김씨로서 상석, 향로석, 문인석과 기단만 남은 장명등이 있다. 고려조 공부전서를 지냈다.
21) 조형문(趙亨門) 묘
본관은 평양이다. 배는 숙부인 청풍 김씨로서 오석의 묘비, 상석, 망주,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성종 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통정대부 수강화도호부사(守江華都護府使)를 지냈다.
22) 조수성(趙守誠) 묘
목희리 육골마을 안에 있다. 본관은 평양이다. 배는 숙부인 전주 이씨로서 1986년에 세운 오석의 묘갈이 있으며, 상석, 향로석, 높이 125cm의 문인석이 있다. 정주 판관(定州判官)을 지냈다. 묘 위쪽에 조양문(趙揚門) 묘가 있다.
23) 박열(朴說) 묘
묘는 쌍분으로 묘비, 상석, 장명등, 문인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지경연 춘추관사 홍문관 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24) 유의손(柳義孫) 묘
본관은 전주로 배 정부인 하음 봉씨, 배 정부인 파평 윤씨 재후(再後). 상석, 망주석, 문인석 4구, 향로석과 높이 220cm의 오석 묘비가 있다. 가정대부 예조 참판을 지냈다.
25) 김관(金琯) 묘
본관은 경주로서 배는 숙인 밀양 박씨로서 오석의 묘비,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통훈대부 통문관 판관을 지냈다.
26) 김우성(金禹聲) 묘
본관은 경주, 자는 상보(尙甫). 숙부인 고성 김씨와 쌍분으로 화강석 재질의 171cm 묘비, 상석, 향로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증 통정대부 호조 참의를 지냈다.
27) 김태경(金泰鄕) 묘
김당의 묘소 바로 위에 있다. 본관은 경주, 숙인 변씨와 쌍분, 높이 165cm의 조선조 전기 문인석과 높이 102cm의 문인석등 총 4구의 문인석, 상석, 1999년에 세운 대리석 재질의 묘비와 망주석이 있다. 통훈대부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지냈다.
28) 김상순(金相淳) 묘
본관은 경주로서 배 정부인 삭령 박씨, 배 증정부인 창원 황씨로서 옥개와 비신 대좌를 갖춘 묘비,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숭록대부 행지중추부사를 지냈다.
29) 심건(沈鍵) 묘
심희수 묘 바로 위에 있다. 본관은 청송이며 배 정경부인 광주 이씨와 쌍분, 대리석 묘비 2기와 오석의 묘비, 망주, 문인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춘추 관상감사 세자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행승의랑 승문원 정자를 지냈다.
30) 김지손(金智孫) 사적기(事蹟記)
육골마을 평양 조씨 묘역에 있다. 성균 생원 출신으로서 부인이 평양 조씨이므로 이곳에 묘를 썼다.
31) 정완(鄭浣) 묘
본관은 영일이다. 배 숙인 청주 한씨, 배 숙인 하동 정씨로서 높이 164cm의 묘비, 상석, 고석, 망주,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호는 겸재 선생(謙齋先生)이며, 이조 정랑을 지냈다.
제5절 도내동(道乃洞)
1) 이훈(李塤) 부조지묘(不祧之廟)
은못이 근처에 있다.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李穡)의 아들인 인재(麟齋) 이종학(李種學)과 이훈(李塤)을 봉안한 사당이다. 1858년(철종 9)에 신축되었으나, 그 후 1957년과 1978년 두 차례 중건된 이 사당은 그 규모가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된 조선 기와로 단청을 하였다. 사당 내의 배치는 이훈(李塤)을 주벽으로 하고, 이종학을 추배(追配)하였다. 한편 같은 도내동에는 이종학의 묘가, 또 성사동에는 이훈(李塤)의 묘가 있다. (제2권 문화재, 인물편 참조) 부조지묘 안에는 안서공묘 중수기(1978)를 새긴 비문과, 원래 안서공 묘 앞에 묘갈 두 기가 있다. 이 묘갈은 중국남경의 청옥으로 만든 것으로 도난 방지를 위해 부조지묘 경내로 옮겨온 것이다.
2) 이유청(李惟淸) 묘
고양시청에서 이어진 69번 지방도로 도내동 은못이 마을에 있으며 배 정경부인 경주 이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다. 묘에는 상석, 고석, 혼유석, 향로석, 장명등이 배치되었고 문인석 4구가 세워져 있다. 상석은 원래 두 기였으나 하나로 대치하였다. 장명등은 총 높이 190cm, 옥개석 89cm, 화창은 4개이며 크게 3단계로 되어 있다. 문인석은 봉분 앞쪽에 작은 것을 배치했는데 규모는 높이 173cm, 허리 높이 둘레가 168cm이며 뒤쪽 것은 크기가 232cm, 허리 높이 둘레는 233cm의 규모이다. 화강암으로 된 상석 뒤에는 2기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구비의 크기는 폭 45cm, 두께 20cm, 높이 176cm이며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영경연감 춘추관사 세자부 한원군 이공지묘 배 정경부인 경주이씨부좌(韓原君 李公之墓 配 貞敬夫人 慶州李氏祔左)”라 기록되어 있다. 신비는 1957년 4월에 새로 건립된 것으로 폭 48cm, 두께 23cm, 높이 120cm이다. (제 2권 문화유산, 인물편 참조)
3) 도내동 은지(隱池) 및 이축(李蓄) 선생 묘(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4) 이신의(李愼儀) 선생묘 및 신도비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5) 이석탄 장대(李石灘將臺)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및 제7권 자료집 금석문편 참조)
도내동 흥도초등학교에서 창릉천(昌陵川)으로 연결된 도라산 기슭에 있다. 현재 장대의 주위에는 다른 묘나 비는 보이지 않으며 산을 깎아 터를 만들어 잘 보존하고 있다. 장대는 높이 90㎝, 넓이 50㎝, 두께 20㎝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면에는 ‘이석탄장대’라 표기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선생이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 대를 설치한 후 149년 경신년에 마을 사람이 세움(先生壬辰起義兵設臺後百四十九年庚申洞人立)’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아 이 장대가 세워진 곳이 석탄 이신의(李愼儀)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접전을 벌인 장소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이 장대가 1740년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건립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 1755년 영조 연간의 이석희 편 『고양군지』에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서 왜병을 소탕했으며 그가 살던 곳에 장대가 있다”란 기록이 있다. 장대는 5cm의 기단과 비신이 합쳐진 1기이며 옥개석과 비두는 만들지 않고 윗부분이 아랫부분보다 약간 넓은 모양을 하고 있다.
6) 경은재(景隱齋)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모신 재실이다. 재실은 도내동 은못이 동네에 있다. 한산 이씨 인재공 22대 종손 이세준 등이 1997년 12월에 재건하였다.
7) 망월암공 이축 유적비(望越庵公 李蓄 遺跡碑)
위의 한산 이씨 묘역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다. 유적비는 2002년 10원 13일에 건립되었다.
8) 김호(金灝) 묘 및 신도비
이 묘와 신도비는 옛 화전과 능곡을 연결하던 도로 도내동 서재동(書齋洞) 마을에 배 해평 윤씨와 합부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흰 대리석 재질의 묘비가 있으며 이밖에 상석, 혼유석, 향로석, 망주석 등이 있는데 망주석 윗부분의 석수가 특이하며 조각수법이 뛰어난 문인석도 있다. 또 묘소 앞에는 옥개석, 기단이 갖추어진 화강석 재질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작은 담장 안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는 1726년 8월에 건립한 것으로 정호(鄭澔)가 짓고 이관명(李觀命)이 썼으며 민진원(閔鎭遠)이 전자(篆字)를 썼다.
김호(1651:효종 2~1695:숙종 21)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여습(汝習), 호는 심락재(尋樂齋)이다. 김인개(金仁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연(金涎)이고, 아버지는 부사 김수오(金粹五)이며, 어머니는 유경원(柳慶元)의 딸이다.
1663년(현종 4) 충청도 유생으로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건의하였으며 1678년(숙종 4) 통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지평․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87년 장령이 되어서 지평 이정익(李禎翊)․김만중(金萬重) 등을 구하려는 소(疏)를 올렸으나 거절당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에 장령으로 있다가 울산 군수 재직 중 병사했다. 성격이 강직하여 간관의 풍채를 지니고 있었으며, 대각에서 그 직분에 능한 사람을 추천할 때 반드시 제일로 꼽았다.
9) 이덕형(李德泂) 묘
묘는 도내동에 배 있다. 묘비는 1990년 5월에 신비를 세웠다. 고령 신씨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으며, 봉분의 주위에는 망주석 2기, 상석 1기가 세워져 있고 정두경(鄭斗卿)이 지은 폭 50cm, 두께 12cm, 높이 110cm의 묘표가 있다. 묘비는 1990년 5월에 신비를 세웠다.
이덕형(1566:명종 21-1645:인조 2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竹泉), 관찰사 이언식(李彦湜)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호군 이오(李澳)이며, 어머니는 민원종(閔元宗)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이어 1597년에서 1608년까지 봉교․정언․지평․수찬․부교리․헌납․전적․문학․집의․교리․부응교․사간․사예․사섬시 부정․응교․시강원 보덕․사도시정 등을 거쳤다. 광해군 때에도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 참의․우승지․병조참판․도승지 등의 경관직과 나주 목사․전라 감사․황해 감사 등의 외관직을 지냈다.
특히,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 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세태가 어지럽자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이를 본 능양군[인조]이 충신이라고 판단해 반정 후 인목대비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그를 앞세워 반정을 보고했고, 능양군에게 어보를 내리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인조 때는 한성부 판윤이 되어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품계가 숭정대부로 오르고, 주문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에 호종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환도 후 숭록대부로 품계가 올라 예조 판서․판의금부사․지돈녕부사․우찬성 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죽창한화』․『송도기이』등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
10) 이언홍(李彦洪) 묘
이유청 묘 바로 아래에 있다. 쌍분으로 된 봉분의 주위에는 상석 1 기와 문인석 4구가 있다. 화강암 묘비는 두부가 용두로 되어있고 크기는 폭 60cm, 두께 18cm, 높이 125cm이다. 비문은 박충원(朴忠元)이 지었다.
이언홍(李彦洪)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이며 좌의정 이유청(李惟淸)의 차자(次子)이다.
11) 이계(李洎) 묘
이언홍 묘 아래에 있다.
12) 이덕기(李德沂) 묘
이계 묘 아래에 있다.
13) 이중연(李重淵) 묘
이덕기 묘 아래에 있다.
14) 이회(李澮) 묘
이덕기 묘 아래에 있다.
15) 이충연(李沖淵) 묘
이회 묘 아래에 있다.
16) 정경부인 이천 서씨(貞敬夫人 利川 徐氏) 묘
망월암 이축의 부인이다. 도내동 내 이축의 묘와 떨어진 곳에 따로 자리 잡고 있다. 묘 주위 둘레석은 6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혼유석, 문인석 2기가 있다. 묘비는 1957년에 다시 세웠다.
17) 이축(李蓄) 묘
은지의 서남쪽 200m 부근에 배 이천 서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다. 묘비, 망주 상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소는 조선조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사후 곧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묘비와 문인석은 석물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도내동 은지는 홍도동 사무소에서 화전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상의 은못이 마을 입구에 있다. 이 연못은 약 2500평 정도의 규모로 조선조 초기의 문신이었던 망월암 이축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파 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못은 1456년에 만들어졌으며 지금의 540년 동안 샘물에 의해 유지되어 오고 있는 드문 연못이다.
이축은 이곳에서 계유정란 때 쫓겨난 단종을 그리워하며 그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의를 다짐하였다. 은못[일명 은무시]이라는 이름은 목은 이색의 증손자인 이축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숨어 지내면서 판 연못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제2권 문화유산, 인물편 참조)
18) 김승(金昇) 묘
본관은 연안으로 배 정부인 전주 이씨를 부좌하였다. 3기의 묘비, 상석, 고석, 향로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봉정대부, 성균관 직강, 증자헌대부, 예조 판서를 지냈다.
19) 김석철(金錫哲) 신도비
연산~중종 시대 무장으로 본관은 연안이다. 가선대부, 병조참판, 수지훈련원사(守知訓鍊院事)를 지냈으며, 신도비 구비와 신비가 있다. 그 뒤로는 사당 ‘영모재’와 수십 기의 묘가 집단으로 안치되어 있다.
20) 김수오(金粹五) 묘
본관은 연안이며 정부인 홍양 유씨와 쌍분으로 화강석의 묘비, 상석, 향로석 74cm의 문인석 망주 등이 있다. 증가선대부, 이조 참판, 행통정대부, 종성 부사(鍾城府使)를 지냈다.
21) 심익현(沈益賢)․숙명공주(淑明公主) 묘
심익현(1641:인조 19~1683:숙종 9)은 조선 후기의 문신․서예가로서 본관은 청송이며 자는 가회(可晦), 호는 죽오(竹塢)이다. 순천 부사 심종침(沈宗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율(沈律)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심지원(沈之源)이며, 어머니는 부사 윤종지(尹宗之)의 딸이다.
10세 때 효종의 부마로 뽑혀서 1652년(효종 3)에 효종의 둘째딸 숙명공주에게 장가들어 청평위에 봉해졌다. 그 뒤 궁중에 자주 출입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내섬시 제조를 지냈다.
1666년에 사은사로, 1674년과 1680년 주청사로 세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왔는데 그 때 받은 금과 비단 등의 하사품을 모두 수행원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청렴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서예에 뛰어나서 산릉지․옥책문․교명의 글을 많이 썼는데, 특히 촉체(蜀體)에 능하였다. 서예작품으로는『우의정장유비(右議政張維碑)』,『영의정이경여비(領議政李敬輿碑)』,『경림군이정표(慶林君李淀表)』,『인경왕후익릉표(仁敬王后翼陵表)』,『효종영릉표(孝宗寧陵表)』, 『좌승지송시철비(左承旨宋時喆碑)』등이 있다
숙명공주는 효종의 셋째 딸로 어머니는 인선왕후 장씨이다. 1650년(효종 1) 청평위 심익현(沈益顯)에게 출가하였다.
22) 김상옥(金相玉) 묘
이 묘는 옛 화전과 능곡을 잇는 구도로의 주변인 도내동 서재동 마을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부인 신씨(申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묘는 하나의 봉분으로 병풍석이나 묘비는 보이지 않으며 봉분 앞쪽의 상석에 ‘대사헌 김공묘 정부인 신씨부좌(大司憲 金公墓 貞夫人 申氏祔左)’라 새겨져 있다. 봉분의 정면에는 혼유석, 상석, 고석, 향로석이 있는데 봉분의 좌우측으로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이 중 문인석은 높이 189cm, 폭 142cm의 규모인데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을 갖추고 있다. 관의에 보이는 꽃무늬에는 모두 19개의 원형모양이 조작되어 화려한 모습이다. 또한 관모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고 허리에는 꽃무늬 조각이 새겨 있다. 측면에서 보이는 문인석의 얼굴 모양은 목이 앞쪽으로 나와 있는 모습으로 홀을 쥔 손가락의 모습이 뚜렷하고 신발의 모습 또한 그 윤곽이 완연하게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석물(石物)의 특징으로 보아 조선조 후기 석물 모습의 과도기적 상황을 반영하여 주고 있다.
묘소 입구에는 1765년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는데 높이 212cm, 폭 78cm, 두께 36cm의 규모이며, 비문은 유척기(兪拓基)가 짓고 전(篆)하였으며 윤급(尹汲)이 썼다.
김상옥(1683~1739)은 조선조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언장(彦章) 호(號)는 소와(疎窩)이다. 한성부 우윤,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제8절. 성사동(星沙洞)
1) 기준(奇遵) 선생 묘(제2권 문화유산, 인물편 및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2) 기응세(奇應世) 선생 묘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3) 기건(奇虔) 선생 묘 및 신도비 (제2권 문화유산, 인물편 및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4) 기대항(奇大恒) 묘
원당 전철역 옆에 행주 기씨 도선산 안에 있다. 정부인 조씨와 쌍분으로 된 묘 앞에는 폭60cm, 두께 18cm, 높이 150cm의 대리석으로 된 묘표와 상석 외에 문인석 2기, 망주석 2기 등의 석물이 배열되어 있다.
기대항(1519:중종 14년~1564:명종 1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행주, 자는 가구(可久), 기축(奇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기찬홍(奇禶弘)이고, 아버지는 응교 기준(奇遵)이며, 어머니는 윤금손(尹金孫)의 딸이다. 1546년(명종 1)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청환직을 두루 역임하고, 1551년 평안도 암행어사로 나가 민폐를 살폈다. 이듬해 이조 정랑을 거쳐 1553년 헌납이 되었다. 1554년 사간이 되고 이어 전한․직제학이 되었다. 1556년에는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용양위대호군에 임명되었다. 1559년(명종 13) 춘천 부사로 나가 3년 간 선정을 베푼 뒤 예조․호조 참의, 우부승지, 부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561년 대사간으로서 재변소(災變疏) 6조목을 올려, 경천(敬天)․법조(法祖)․무학(務學)․납간(納諫)․임현(任賢)․애민(愛民)에 힘쓸 것을 건의하였다. 1563년 부제학이 되었는데, 당시 권신이던 이량(李樑)이 사화를 일으켜 사류들을 숙청하려 하자, 심의겸(沈義謙) 등과 함께 이량의 죄상을 폭로하였다. 이때 이량을 옹호하던 사헌부의 죄상도 함께 탄핵하여 이량을 강계로 귀양 보내고 그 일파도 관직을 삭탈하는 한편, 새로 등용된 사림들을 옹호하였다. 이어 대사헌이 되고 이조 참판을 거쳐, 1564년 공조 참판․한성부 판윤에 발탁되었다. 시호는 정견(貞堅).
5) 덕양서원(德陽書院)
원당 전철역 바로 곁에 있는 행주 기씨의 서원. 2002년 6월에 기존의 시설을 대폭적으로 확장함과 동시에 흩어져 있던 각종 비문을 정돈하여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기건(奇虔), 기준(奇遵), 기찬(奇襸), 기대승(奇大升), 기자헌(奇自獻), 기정진(奇正鎭)을 모셨다.
6) 권희(權喜) 묘
7) 익령군(益寧君) 이치(李礻多) 묘
고양시청에서 서오릉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의 성사동 오리골 마을 동쪽 건자산 아래에 배 운봉 박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다.
봉분의 총 규모는 가로 370㎝, 세로 483㎝로 비교적 큰 규모이며 봉분 앞으로 혼유석, 묘표, 상석, 문인석, 장명등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이 중 문인석은 조선조 전기의 특징을 갖춘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봉분 정면의 화강석 묘비는 1466년(세조 12) 3월 13일에 건립된 것으로 총 높이는 131㎝이며 두께 20㎝ 폭 56㎝의 규모이다. 묘비의 앞면에는 “태종공정대왕자 익령군 소강공치지묘(太宗恭定大王子 益寧君 昭剛公礻多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익녕군은 조선 제 3대 태종의 8째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 선빈 안씨이다. 그 아래로 수십 기의 후손 묘가 이장되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1623년 인조반정의 중심인물인 완평부원군 이원익(李元翼)의 조부가 된다. 시호는 소강공.
8) 이숙야(李叔野) 묘
성사동에서 화전 방향으로 이어진 69번 지방도 좌측의 월하능 마을에 숙부인 강화 봉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의 둘레에는 길이 30m의 사성이 둘러쳐져 있는데 두 기의 봉분 사이에 묘비가 세워져 있다. 높이 122㎝, 폭 60㎝의 묘비에는 대좌가 갖추어져 있다. 뒷면 비문은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이외에도 묘소에는 혼유석, 상석, 고석, 향로석 등이 비치되어 있다. 이 중 안쪽의 큰 문인석은 총 높이 172㎝로 얼굴의 눈이 돌출되고 코가 크게 조각된 것이 특징이다. 그 밖의 작은 문인석은 높이 116㎝인데 얼굴이 매우 길고 이와 비례하여 허리 아랫부분은 매우 간소화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얼굴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며 얼굴의 정면은 짧고 측면은 넓게 되어 있다. 두 문인석은 조선조 전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숙야(李叔野)의 본관은 한산으로 목은 이색(李穡)의 손자이다.
9) 이덕연(李德演) 묘
이숙야의 묘위에 있다. 묘비는 1977년 2월에 다시 세웠는데 묘 앞에는 상석, 동자석 2기, 문인석 2기가 있다.
10) 박심문(朴審問) 묘
본관은 밀양. 호는 청재(淸齋). 평안도 판관, 도체찰사 종사관,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사육신의 죽음을 듣고 자결했다. 시호는 충정(忠貞).
11) 박자응(朴自凝) 묘
본관은 밀양. 자는 정길(正吉), 호는 읍백당(挹白堂)이다. 배 숙부인 동래 정씨, 배 숙부인 청송 심씨와 쌍분으로 최근에 세워진 묘갈, 묘비, 망주,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있다. 예전에 세워진 문인석은 보기 드문 형태를 하고 있으며 통정대부 홍문관 응교 겸 경연 춘추관 수찬관 편수관을 지냈다.
12) 기협(奇協) 묘
본관은 행주. 배 남양 홍씨와 합장되어 있는데 묘비와 문인석, 망주석, 상석이 있다. 자는 여인이며, 정언, 교리, 강화부사,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 의정부 좌찬서에 추증되었다.
13) 이훈(李塤) 묘
묘는 성사동 대장골 이언호 묘 우측에 있다. 묘 앞에는 상석, 장명등, 문인석 4구가 있다. 묘갈은 원래 중국 남경의 청옥으로 만든 구비(舊碑)가 있었으나 도난 방지를 위해 부조지묘 안에 옮겨 놓았고, 지금은 1986년 만든 신비가 세워져 있다.
14) 봉유인(奉由仁) 묘
성사동 대장골에 있다. 묘비는 1986년에 새로 새긴 것으로 묘 앞에는 상석, 문인석 4구가 있다.
15) 이언호(李彦浩)
성사동 대장골에 있다. 이언호(1477:성종 8~1519:중종 1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양중(養仲), 이축(李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훈(李塤)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이유청(李惟淸)이며, 어머니는 이령(李聆)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진사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509년 홍문관 저작․부수찬이 되고, 1511년 사간원 헌납, 이듬해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응교, 사헌부 장령을 거쳐 의정부 검상, 사간을 역임하였다. 1515년 경연 시강관․홍문관 직제학을 지내고, 1517년 대사간, 1518년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문묵(文墨)에 재질이 있었으며, 특히 전서(篆書)와 팔분체(八分體)를 잘 썼다. 비석은 없고, 상석, 문인석 2구, 동자석은 1구만 남아 있다.
16) 김신민(金新民) 묘
김당 묘 서쪽에 배 남양 홍씨와 합폄으로 되어 있다. 오래된 묘갈 1기, 문인석 2기와 1999년에 세운 묘비, 망주석, 장명등이 있다. 자는 명지(明之), 본관은 경주로서 김균(金稛)의 손자로서 홍무 무인년 출생하여 집현전 부제학에 이르렀고 세조 을유년에 사망했다.
17) 남양 홍씨 묘
김신민 묘 바로 아래에 있다. 오래된 묘갈에는 “□부인 남양 홍씨지묘”라고 씌어 있으며, 문인석 외에 새로 세운 망주석이 있다.
18) 김봉익(金鳳翼) 묘
남양 홍씨 묘 아래 배 숙인 동래 정씨와 양분으로, 묘는 위 아래 각각 떨어져 있다. 김당의 현손으로 통정대부, 효자,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2000년에 세운 묘표와 망주석, 그리고 오래된 문인석, 상석이 있다. 그 아래로는 “효자 경주 김공 봉익 영세추모비”가 1998년에 길 옆에 별도로 세워져 있다.
제7절. 북한동(北漢洞)
1) 북한산성 (제2권 문화유산 국가사적편 참조)
북한산성은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과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 경계의 북한산 정상 능선을 따라 있는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북한산성에 대한 문헌 기록은 백제 온조왕 때부터 보이는데 삼국사기의 “온조왕 14년(BC5) 7월 한강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들을 분거케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 132년(백제 개루왕 5)에는 처음으로 북한산성 명칭으로 이 성을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북한산성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수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요새로서 북한산성의 명칭이 등장하나 과연 삼국시대의 북한산성이 현재의 북한산성과 같은 곳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북한산성의 역사지리적인 중요성에 대해 동사강목에서는 “북한산성은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는 임진강에 미치고, 동으로는 태산과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를 굽어보아 사방의 거리가 쭉 고르니, 이것은 해동 제일의 요새이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에는 반드시 서로 다투는 땅이 되었다. 고구려가 차지하면 신라와 백제가 싸움에 어렵고 신라가 차지하면 고구려와 백제를 패배시키니 진실로 지리가 좋은 곳이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1232년(고종 19) 몽고군의 2차 침입 시 이 산성에서의 격전 사실과 거란의 침입 시 태조의 재궁을 이곳으로 옮긴 일도 있었으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대에 대대적인 수축 및 증축을 하였다.
이 북한산성의 수축과 증축 사실은 영조 21년 승려 성능(聖能)에 의해서 발간된『북한지』를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이 후 발간된『문화유적총람』과『한국의 성곽과 봉수』에서는 이 성이 삼국시대부터 군사상의 요지로서 중요한 성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1) 지형
북한산은 인수봉에서 시작하여 백운봉으로 이어지고 이 백운봉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서쪽으로 뻗어 영취봉․원효봉이 되고, 남쪽으로는 만경봉이 되며 다시 만경봉에서 서쪽으로는 노적봉이 되고, 남쪽으로 뻗어 보현봉에 이른다. 그리고 이 보현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맥은 북악으로 내려가고, 서쪽으로는 문수봉을 거처 나한봉에서 북서쪽으로 큰 능선을 이루며, 증취봉을 거쳐 미륵봉에서 일단 끝이 나는데, 각 봉우리 능선마다 모두 절경을 이루며 서울과 고양시를 포용하고 있다.
계곡으로는 백운봉 아래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는 계곡과,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를 흐르는 두 갈래의 계곡이 있는데 이 두 계곡은 북한동 마을이 있는 곳에서 합류하여 창릉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또, 북한산성 안에는 국령폭포와 상운폭포가 있다. 국녕폭포는 용혈봉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상운폭포는 백운봉으로 올라가는 중간쯤에 있다.
그리고 그 규모에 있어서 국령폭포는 상운폭포보다 물이 흔하지 않은 계곡이라 여름 우기를 만나야 폭포를 이루게 된다. 상운비폭이라는 말이 설명해 주듯이 그 규모는 별로 크지 않으나 쉬지 않고 나는 듯이 뻗어 내리는 물줄기는 북한산의 절경을 한층 생동감 있게 해 준다.
북한산에는 22개의 봉우리가 있어 그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압도시킬 뿐 아니라, ‘천험지지(天險之地)’의 천연의 요새로서 예로부터 국방상 중요한 군략기지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곳에 있는 봉우리를 대표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인수봉 (2) 백운봉 (3) 만경봉 (4) 노적봉 (5) 용암봉 (6) 일출봉 (7) 월출봉 (8) 장군봉 (9) 반용봉 (10) 시단봉 (11) 덕장봉 (12) 복장봉 (13) 보현봉 (14) 문수봉 (15) 나한봉 (16) 나월봉 (17) 증취봉 (18) 용혈봉 (19) 용출봉 (20) 미륵봉 (21) 원효봉 (22) 영취봉
북한산성 지도 성능의(북한지)에서
(2) 성문(城門)
북한산성에는 여러곳에 5곳의 성문(城門)과 7곳의 암문(暗門)이 있다. 여기서 비변사등록내 북한축성별단에 의거하여 당시 새로 이룩한 북한산성내의 여러 가지 시설을 살펴 규모를 보면 아래와 같다.
훈련도감 유영지
시 대 : 조선 시대
소 재 지 : 덕양구 북한동 산1-1번지
소 유 자 : 국가
규 모 : 약 5천여 평
재 료 : 화강암 및 자연석
이 훈련도감 유영지는 북한산성 내에 노적사 아래에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없으며 총 길이 200m, 높이 7m에 이르는 긴 석축과 각 건물에 사용되었던 주춧돌, 기단석, 대석과 우물, 연못자리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건물 자리는 노적봉과 북장대 사이의 능선 아래에 많이 발견되고 있다. 주추는 4각의 화강암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8개 정도가 남아 있으며 간혹 원형의 주초석도 발견되고 있다. 이 유영지에서는 지금까지 3곳의 우물이 발견되었는데 자연석으로 보조석을 만들어 놓아 지금까지도 물이 고여 있는 상태이다. 건물 주춧돌 우측으로는 가로 7m, 세로 9m 규모의 연못이 현존하고 있는데 화강암 돌을 4각으로 깎아 쌓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배수구는 위쪽에서 들어와 왼쪽 아래로 흘러내려가게 만들어져 있다. 화강암의 긴 석축은 모두 3단계로 쌓여져 있다. 가장 아랫부분의 3m 가량은 화강암의 돌을 투박하게 다듬어 서로 엇갈리게 쌓았고, 그 윗부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장방형의 화강암으로, 그리고 가장 윗부분은 자연석의 잔돌로 쌓은 것이 특징이다.
훈련도감은 조선조 5군영의 하나로 도성(都城)의 수비를 맡았던 관청이다. 이 훈련도감 유영지를 달리 군사훈련을 하였던 곳이라 하여 훈국(訓局)이라 하기도 한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후 오위(五衛)의 군제가 무너지면서 생겼다가 1882년에 폐지되었다.
총거리 21리 60보의 체성 간에는 1개의 수문과 12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당시의 규모 및 위치와 오늘날의 상황을 함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훈련도감의 소관인 수문 북변에서 용암에 이르는 사이에 있는 문은 다음과 같다.
① 수문: 대서문 아래 중흥 수구에는 폭 50척, 높이 16척 규모의 수문이 있었다. 수문의 모양은 폭이 약간 크므로 두 세 개의 연속 홍예를 갖춘 교량형으로 만들어 동대문 옆의 수문이나 홍지문 옆의 오간대 수문과 유사했을 것이다.
현재(2005)는 경국사 아래에 있는데, 큰 바위에는 당시 수구문을 설치할 때 참여했던 사연이 새겨 있다. 내용은 ‘辛卯 六月十三日 始役 九月初十日 完■ 水口牌將 通德郞 徐尙■ 書記 ■■ 片 首 金正交 金■■...’라고 새겨있다. 이 밖에 마모된 글자도 있다.
② 북문: 북문은 원효봉과 영취봉 사이의 해발 430미터 지점의 안부에 홍예 형태의 출구를 갖춘 문으로 축조되었다. 문루는 오래 전에 소멸되었고 육축상단을 마감한 장대석은 전부 무너져 내려 홍예돌 윗부분이 완전히 노출된 채 균열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상부의 초석도 절반은 없어지고 5개만 위험한 상태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1988년 큰 비에 육축을 포함한 성벽 약 15미터가 붕괴되어 성문 자체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③ 서암문: 수문에서 원효봉으로 오르는 해발 180미터 기슭에 있는 서암문은 성내에서 생긴 시신을 내보내던 문이라 하여 주문들은 시구문(尸柩門)이라 부른다. 대부분의 암문 출입구가 네모난 반면 이 문은 안팎이 일종의 홍예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대서문과 같이 홍예돌을 역학적으로 조화롭게 쌓은 것이 아니라 정대석을 둥글게 다듬어 올려놓은 것이다.
④ 백운봉 암문: 위문이라고 불리던 백운봉 암문은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의 안부에 있으며 성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출입구는 네모난 형태이며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문루는 당초부터 없었으나 문짝을 달았던 흔적은 남아 있다.
다음은 금위영 소관인 용암남변에서 보현봉에 이른 사이에 있는 것으로서,
⑤ 용암암문: 용암문 암문 또는 용암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용암봉 기슭 해발 580미터 지점에 있으며, 도선사, 북한산장, 노적봉을 연결하며 옛날에는 중흥사, 태고사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이 문도 백운봉 암문과 같은 구조와 형태를 갖추고 있다.
⑥ 소동문: 높이가 9척 넓이가 10척인 홍예 즉 무지개형의 큰 성문이다. 보국문이라 부르며 대동문 남쪽에 있다.
⑦ 보국문: 사찰 보국사가 아래에 있었기에 보국문이라 부르는 듯한데, 해발 567미터의 높은 지점에 자리 잡고 정릉을 내려다본다. 보국문은 남쪽에 있는 암문으로 당초에는 동암문이라 하였으며, 대동문과 보국문 일대의 옛 지명은 석가령이다.
⑧ 대동문: 대동문은 우이동 진달래 능선이 끝나는 남쪽으로 해발 540미터 지점에 있으며 대서문과 같은 큰 문이다. 복원되기 전에는 1.4미터 높이의 장주형 초석 10개 가운데 7개만 제자리에 있었고 3개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으며 성문 외측은 바짝 붙어 있는 큰 나무의 뿌리 때문에 육축의 상당 부분이 균열되어 있었다.
끝으로, 어영청 소관인 수문남변에서 보현봉에 이르는 사이의 성문을 보면,
⑨ 대서문: 높이 11척 넓이 13척의 무지개형인 큰문이다. 축성 당시 성루가 있었으나 중간에 없어졌는데 이 대서문만 1950년대에 복원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 위치는 서쪽방면에서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의상봉 아래에 있다.
⑩ 청수동 암문: 높이 7척 넓이 7척의 정방형의 작은 문으로 문수봉과 나한봉 사이에 있다. 해발 694미터 지점 승가사 뒷산 능선에 있는 비봉과 연결되어 대남문과 부왕동 암문 방향으로 갈라지는 요충지이다. 이 문도 다른 암문과 마찬가지로 네모난 출입구를 갖추고 있으며 문짝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⑪ 부왕동 암문: 부왕동 암문은 과거 원각사가 있었기에 흔히 원가문이라고도 불리는데,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의 험준한 능선에 잘 감추어져 있다. 암문 가운데에서 제일 규모가 커서 폭에서는 1654센티미터, 높이에서는 5381센티미터 차이를 보여 폭이 2.54미터, 높이가 2.83미터에 이르고 있다.
⑫ 가사당 암문: 기사당 암문은 부왕동 암문에서 증취봉과 용혈봉을 넘어 의상봉을 향하다 보면 급하게 경사진 내리막길 아래 해발 449미터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성안에 국령사가 있기에 흔히 국령문으로 불리는데 아직까지도 고풍스런 맛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보존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나 상부의 여장과 토축한 부분이 무너져 내려 미관을 해치고 있다.
⑬ 소남문: 높이 11척의 큰 성문으로, 원래는 성루가 있었으며 역시 다른 4개의 큰 성문과 마찬가지로 무지개형을 이루고 있다. 따로 대남문이라고도 하며 문수봉 동쪽에 있으므로 문수사로 넘어가는 길목의 역할을 한다.
사진 여러 곳의 암문(정후수 촬영한 곳에 있음)
(3) 성내 시설
① 행궁(行宮)(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기념물 참조)
② 창고
창고 건립은 군량을 저장하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중차대한 문제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 안과 성 밖에 나누어 건립하는 문제도 많은 검토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장차 지구항전을 대비하여 모두 성 안에 건립하는 것이 타당하나 험난한 능선을 넘어 양곡을 반입하는 일에 적지 않은 고초가 따를 것이 분명했고, 평상시 출납의 원활을 위해 성 밖에 나누어 건립할 경우 유사시 성 안으로 옮기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가 검토된 의견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도성의 식량을 모두 적에게 넘겨준 뼈아픈 경험이 있었기에 창고의 위치 선정은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성 안에는 상창(上倉), 중창(中倉), 하창(下倉), 호조창(戶曹倉) 등 4개의 창고를 280여 칸 규모로 웅장하게 건립하였다. 그 후 성 밖 탕춘대에는 평창(平倉)이라는 창고를 건립하였는데 이는 험난한 산을 넘어 양곡을 운반하는 어려움을 줄이고 재난 시 원활한 구호를 도모코자 함이었다고 본다.
이들 창고에는 평소 10만 석의 양곡을 비축하였으며 해마다 일정량을 인근 백성에게 대여, 환수하며 변질을 예방하였다.
그러나 양곡의 대여, 환수 과정에서 양곡을 메고 산을 넘게 하거나 제때 갚지 못하면 문초를 하는 등 많은 민폐를 야기시킨 적도 있었다.
상창과 호조창은 행궁 아래 관성소가 있던 자리에 있었으며, 중창은 중흥사 건너편에, 하창은 지금의 성내 주차장 자리에, 성 밖 평창동에 있던 평창에는 현재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③ 장대(將臺)와 정지(井池)
장대란 장수의 지휘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지휘,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세운 건물을 말한다. 북한산성 안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등 3개소의 장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동장대(東將臺)의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했다.
대동문에서 용암문 방향으로 가다 보면 시단봉 정상에서 근래에 복원한 동장대를 볼 수 있다.
동장대는 1925년 8월의 집중호우 때 무너진 이후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장주형 초석만 있었는데 북한산성 제 모습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서울특별시에 의해 복원이 된 것이다.
남장대는 나한봉의 동북쪽 능선에 있었고, 북장대는 훈련도감 유영의 뒷산인 기린봉에 있었는데 남장대만이 기단석이 일부 남아 있어 그 자취를 알 수 있을 뿐이다.
(4) 관성소(管城所) 삼군문(三軍門) 유영지(留營址)
축성 이후의 당면사항은 책임지고 산성을 관리하고 임무를 수행할 주관부서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도성안에 영의정이 수성대장(守城大將)을 겸하도록 하여 경리청(經理廳)을 신설하고, 북한산성 안에 관성소(管城所)와 삼군문의 유영(留營)을 설치하였다.
관성소는 북한산성의 총본부이고 유영은 그 밑에 있는 기구로 보면 된다.
관성소에는 관성장과 유영감관을 두어 군관, 서원, 고직 등 관원을 감독하고 성 안의 사무를 총괄하였으며 삼군문의 유영은 훈련도감 유영, 금위영 유영, 어영청 유영을 말하는 것으로 책임구역을 지정받아 산성관리와 총포, 자재, 군량을 모으거나 비축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관성소는 위상에 걸맞게 상창, 호조창과 함께 행궁의 옆에 있다.
대남문과 중흥사터를 잇는 성내 계곡에 장대석으로 잘 쌓은 석단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관성소가 있던 산성의 중심지였다.
삼군문의 유영터는 비록 폐허로 변했지만 모두 웅장한 석축을 남겨놓고 있고 넓은 터에는 주춧돌, 장대석 등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훈련도감 유영(혹은 訓局, 訓倉)은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탓에 기단과 주춧돌, 연못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훈련도감 유영지
금위영유영(혹은 禁營, 禁倉)은 보국문을 넘어 만나는 계곡에서 대남문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나온다. 이곳도 모두 폐허가 되었으나 1715년 도제조 이이명이 건립한 금위영이건기비(禁衛營移建記碑)가 남아 있다.
어영청 유영(혹은 御營, 御倉)은 대성문을 넘어 만나게 되는 대성암(大成庵)이 있는 넓은 자리인데 이곳에서도 큰 석축과 많은 주춧돌이 발견되고 있다.
(5) 성랑(城廊)
성랑이란 병사들이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을 말한다.
북한산성 성랑은 모두 143개소에 작은 규모로 건립되었다. 산성을 따라 걷다보면 성 안쪽으로 군데군데 건물이 있었던 흔적과 함께 깨어진 기왓장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자리가 바로 성랑이 있던 자리로 성문 주위나 능선의 높은 곳, 성곽이 돌출된 곳 등 초계하기에 좋은 지형이나 필요한 지역에 건립하였기에 대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하였다. 이와 함께 성안 주요 시설물 주위에서도 성랑터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 외의 시설로서 북한산성 안에는 99개의 우물과 26개의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시사철 병사와 군마에 필요한 물이 부족하면 철옹성도 하나의 무용지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사찰(寺刹)
① 사찰과 주관부서의 설치
행궁과 창고․장대 등의 성내 시설을 갖춘 북한산성에, 보다 내실을 기하고 철저한 수비를 위하여 불사의 대대적인 신축이 뒤따르게 되었다. 원래 북한산성을 수축할 당시 성 안에는 30여 칸의 퇴락한 고찰인 중흥사 하나만 있었을 뿐이었다. 감동당상 김우항(金宇抗)은 왕에게 청하여 북한산성의 방어를 위해 추가로 몇 개의 사찰 신설을 허락받았다. 갑작스런 대규모 사찰의 건설은 막대한 경비를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원래 1,000장 정도의 공명첩을 발행하기로 예상했으나, 그 후 계속 추가되어 결국 2,500장의 공명첩을 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계속적인 지원과 승려․속인들의 열의에 의해 1715년(숙종 41)에 드디어 중흥사가 136칸으로 확충되는 외에 용암․보국․보광․부왕․서암․국녕․상운․태고․진국사 등 10개의 사찰과 봉선․원효암 등 2개의 암자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당시 사찰 건축에 두드러진 열의를 보인 승려 성능이 기록한『북한지』에는 이들 사찰의 위치 및 규모와 창건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 등이 자세히 나와 있다. 그 내용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② 용암사(龍巖寺) : 북한산성 대동문에서 백운봉으로 이어진 등산로 중간의 북한산장 내에 있었던 절이다. 승려 성능의『북한지』에는 일출봉 아래에 용암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창건된 시기는 북한산성 축성 후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사찰의 규모는 87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용암사지 내에는 석탑이 있는데, 완전히 무너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탑의 규모는 지대석이 두께 16㎝, 한변이 159㎝ 크기의 방형석에 2단의 방형좌를 돋을 새김하였다. 현재 기단부의 대부분 석재는 수풀이나 흙에 묻혀 드러나지 않고 탑신부의 부재 중 하나는 등산로 중간에 있어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탑신석의 규모는 한 변 87.5㎝, 높이 90㎝이며 지름 22㎝의 사리공이 있다. 탑신의 층급받침은 무너져 있으나, 그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한 변이 각각 111㎝, 96㎝, 한단 높이 5㎝에 이르는 큰 규모이다. 탑의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전체의 규모로 보아 3m 이상의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조각이나 문양, 문자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다만 등산객의 낙서로 보이는 글씨 등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③ 보국사(輔國寺) : 북한산 능선에 있는 보국문 아래에 있다. 보국사는 조선 제19대 숙종 39년(1713) 북한산성의 수비를 위해 승려 전심(瑑心)과 명조(明照)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는 177칸의 대사찰이었으나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다. 보국사지의 옆 골짜기에는 옛 금위영 주둔지이며 절터 부근에는 돌담장, 주초석, 기와 등이 출토되고 있다.
④ 보광사(普光寺) : 축성 후 승려 운휘(雲輝)가 창건한 71간의 사찰로 대성문 아래 있었으나 현재 절은 전하지 않는다. 보국문에서 대성문 방향으로 산허리에 난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2개의 건물터가 나타난다. 이곳은 대성문 쪽에서 가까우며 금위영 유영터에서 보면 위쪽으로, 꽤 넓은 터에 제법 잘 쌓은 석축이 있는 것을 보아 보광사터로 추정된다.
⑤ 부왕사(扶旺寺) : 축성 후 승려 심운(尋雲)이 창건한 111간의 사찰로 휴암봉 아래 있었으나 지금은(2005) 가건물이 있다. 산영루 터 앞에 있는 계곡을 건너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산기슭 휴암봉의 울창한 숲속에 부왕사 터가 있다. 옛날에는 누문 형태의 법당이 있었지만 법당은 사라진 채 높이 1.7m, 둘레 2.4m나 되는 거대한 초석이 3열로 16개가 도열해 있다. 사찰의 배치가 북향인 점이 특이하나 주위가 아늑하여 무릉도원을 방불케 한다. 위치가 좋아 고려시대부터 절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 백일 동안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한다. 부왕사는 숙종 43년 131칸 규모로 창건된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때 퇴락하여 붕괴되었다. 그런데 ‘부왕사(扶旺寺)’라는 표석의 글씨인 ‘扶’자는 좌우가 뒤집혀 쓰여 있다.
⑥ 원각사(圓覺寺) : 축성 후 승려 신초(信楚)가 창건한 74간의 사찰로 증취봉 근동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원각사터는 부왕동 암문에서 가까운 전방에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이 있었던 자리로 보이는 터에는 많은 기와조각과 함께 무너진 석축이 30m 가량 남아 있다. 원각사는 위치로 보아 부왕동 암문 일대의 수비를 담당한 듯하다
⑦ 국녕사(國寧寺) : 축성 후 승려 청휘(淸徽)․철선(撤禪)이 창건한 86간의 사찰로 의상봉 아래 세워졌으나 지금은 같은 이름의 사찰이 증축되었다. 국녕사는 중성문 조금 못 미쳐 오른쪽으로 의상봉을 바라보며 가사당 암문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거대한 암벽 밑에 자리 잡고 있다. 1991년 10월 화재로 소실된 뒤 지금은 법당터에 가건물을 마련하고 부처를 모시고 있다가 최근(2005)에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 국녕사는 위치로 보아 절 뒤쪽에 있는 가사당 암문(속칭 국녕문) 일대의 수비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⑧ 상운사(祥雲寺) : 승려 회수(懷秀)가 축성 후 창건한 133칸의 대규모 사찰이었으며 그 위치는 영취봉 아래 있는데 보수, 중건으로 지금까지 그 모습이 이어지고 있다. 백운대에서 내려다보면 북문 왼편으로 대웅전 지붕이 웅장하게 보인다. 사찰 주위에는 원효봉․영취봉․백운대․만경봉의 수려한 암릉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상운사는 1722년(경종 2) 133칸 규모로 창건된 이후 1813년(순조 13) 중창되었으며, 고종 원년에 극락전을 중건하는 등 산성 안에서는 큰 절이었다. 상운사는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그 뒤 중건하여 지금의 면모를 갖추었다. 경내에는 부서진 탑과 금당 옆의 수백 년 된 향나무가 상운사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명성황후가 국가의 안녕을 위해 기도를 올리기도 한 곳이다.
⑨ 태고사(太古寺): 북한동에 있는 태고대 아래 중흥사 동쪽 봉우리에 있다. 태고사는 14세기 후반 고려의 고승 원증국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고려 멸망 이래 거의 폐허가 되었다. 그 후 1713년(숙종 39) 북한산성 축성 때 총섭인 성능에 의해 다시 복원, 창건되었다. 그러나 6․25전란으로 소실되어 단지 고려 우왕 때 세운 태고사원증국사탑과 탑비만이 500년 전의 옛 모습을 전해 주고 있다.
태고사를 창건한 원증국사는 고려 말 고승으로 호가 태고(太古), 혹은 보우(普雨)이다. 성은 홍씨로 본관은 홍주(洪州), 1301(충렬왕 27년)년 양근에서 출생하여 13세에 회암사에서 사사받은 후 가지산에서 도를 닦았다. 그 후 1325년 26세의 나이로 승과에 급제했으나 명리를 버리고 양평의 용문산 상원암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감로사에서 고행을 했다. 그 뒤 이곳 북한산 중흥사 동봉에 절을 짓고 태고사라 명명하였다. 충목왕 2년(1346) 중국에 가서 호주 하무산 청홍의 법을 이어받아 임제종의 시조가 되고 2년 뒤 귀국하여 미원(米原:양평)의 소설사(小雪寺)에서 수도하였다. 불교를 독실히 믿던 공민왕이 광명사 원융부를 짓자 왕사가 되었으나 신돈의 횡포를 미워하여 소설사로 돌아가 82세로 입적하였다. 그 후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숭유억불정책 및 몇 차례의 외침은 자연히 거찰 태고사의 운명까지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숙종 39년(1713) 북한산성의 수호를 위해 12개의 사찰과 암자를 중건, 창건할 때 총섭승으로 사찰영건에 참여했던 성능은 원증국사의 태고사가 이미 없어진 것을 애석히 여겨 다시 그 자리에 사옥 131칸을 짓고 전대로 태고사라는 편액을 달아 대사의 뜻을 기리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서삼경,『동감사략』등 서적의 목판 5700판과 주자 11과 및 비상용 흑탄 1600석을 비축하여 태고사의 중요성을 한층 드높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까지도 그 모습을 잃지 않았으나 6․25전란으로 법당은 완전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1964년 이후 사찰보수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총건평 298.5㎡의 사찰 경내에는 172㎡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원증국사탑비와 산신각이 좌우에 있으며 원증국사탑과 요사체가 상하로 자리 잡고 있다. 원증국사탑은 1983년 12월 27일에 보물 제 749호로 지정되었는데, 탑은 보우의 사리탑으로 화강암으로 만든 삼층석탑이다.
⑩ 진국사(鎭國寺) : 축성 후 승 성능(聖能)이 창건한 85간의 사찰로 노적봉 아래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중성문을 지나 왼편 산기슭을 조금만 오르면 노적사(露積寺)라는 절이 보이는데, 주위가 무척 조용하고 정갈하다. 노적사는 1960년대 이후 새로 지은 것이다
⑪ 봉성암(奉聖庵) : 봉성암은 태고사․진국사․원효암과 함께 승 성능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25칸이었고 철종 11년에 중수한 바 있으나 1918년 강제 폐사된 뒤 태고사에 합병되기도 하였다. 봉성암은 한국전쟁 때에 소실되었다고 하며, 지금은(2004) 새로 중축하였다. 초입에는 보연당 부도가 있고 뒤쪽에는 성능의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부도가 서 있다. 뜰에는 네모난 화강암으로 만든 정방형의 우물이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⑫ 원효암(元曉庵) : 승 성능이 창건한 10간의 작은 암자였는데 지금까지도 원효봉 아래에 보수․중건하여 보존되고 있다. 원효암은 서암문과 원효봉 사이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원효대가 부근에 있다. 의상봉과 마주하고 있으며, 절벽 아래로 대서문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터이다. 원효암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로이 건립되어 노거수 밑에 감추어져 있다.
⑬ 중흥사지(重興寺址)(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⑭나암사지(蘿岩寺址)
북한산 응봉(應峯) 서쪽에 있다. 일명 나암사로 불리던 곳이다. 사찰 주위의 경치가 매우 뛰어나며 고양 팔현의 한 분인 행촌 민순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유명하다. 약사불(藥師佛)이 영험이 있다고 하여 조선 후기 오항창(吳恒昌) 집안에서 이 절을 헐고 입장(入葬)하였다. 그 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가문이 몰락하였다. 다시 건너편으로 불사(佛舍)를 옮겨 세웠으나 곧 폐사(廢寺)가 되었으며, 영조 3년(1754)에 어느 승려가 초암(草庵)을 재건하여 흥성암(興聖庵)에 있던 약사불과 기물(器物)을 옮겨왔다.
⑮ 용학사(龍鶴寺)
중흥사 아래 200m 지점에 있는데, 현재 주지 김순남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태고종사찰이다. 경내에는 66㎡의 대웅전 앞에 용왕상과 미륵탑이 세워져 있다. 뒤에는 고려 시대 작으로 보이는 신장(神將)이 바위에 새겨있다.
⑯대동사(大同寺)
동쪽 가까이에는 상운사가 있다. 대동사는 원래 100여 칸에 달하는 옛날의 노적사의 대웅전 자리에 세운 사찰이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 후 1969년에 재건되었다. 현재 주지 황명화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태고종파의 사찰이다. 사찰의 경내 총건평 170.4㎡에 33㎡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칠성각, 산신각, 종각 등 6동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⑰선봉암(先峯庵)
1955년에 창건된 이 사찰은 태고종에 속하며, 현재 주지 김말남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총 건평 82.5㎡의 사찰 경내에는 대웅전, 삼성각 등 3동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7) 산성내 문화재
① 중성(中城)
북산산성은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능선에 의지하여 둥그렇게 축조되었다. 그에 덧붙여 노적봉 기슭의 깊은 계곡에 들어서면 마치 허리띠 모양으로 또 하나의 성곽을 볼 수 있는데 이 성곽이 바로 중성이다.
1712년(숙종 38) 4월 10일 북한산성 시찰 때 현장을 직접 확인한 숙종은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빨리 축조하도록 지시하였다. 따라서 그 해 5월 3일 공역에 착수하여 수문의 홍예 축조, 결성 보축과 함께 1714년 가을까지 차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성곽을 답사해 보면 증봉과 영취봉을 연결하려는 당초의 계획을 크게 수정한 듯 길이가 약 200m에 불과하다.
중성은 성내 백운교 앞 주차장에서 백운대를 정면으로 볼 때, 오른쪽 계곡을 타고 행궁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폭 30m 가량의 좁고 험난한 계곡을 중심으로 양쪽 산기슭에 날개 모양으로 펼쳐져 있으며, 성문으로는 중성문과 시구문, 수문을 두었다. 이 일대의 계곡은 천혜의 방어 지형을 갖추고 있다.
②한월당 부도탑
국녕사 한월당 대선사 부도탑(國寧寺 漢月堂 大禪師 浮屠塔)
국녕사 한월당 대선사의 부도탑은 의상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우측에 있는데 국녕사 경내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돌과 시멘트로 만들어진 계단 위에 넓은 기단(基壇)을 만들고 2단의 화강암 단(壇)과, 사리석(舍利石), 탑신(塔身)을 안치했다.
전체적으로 탑은 가운데의 중간 부분이 가장 넓고 아랫부분과 맨 윗부분은 좁아진다. 꼭대기 부분에는 연(蓮) 봉우리 모양의 꼭지가 달린 종형(鐘形) 모양을 하고 있다.
부도의 정면에는 ‘한월당 대선사(漢月堂 大禪寺)’라는 각자(刻字)가 뚜렷하게 음기되어 있다.
③용학사 암각 신장상(龍鶴寺 巖刻 神將像)
북한산성 용학사 경내에 있는 암각 신장상은 용학사 요사채 뒤편의 화강암석 전면에 걸쳐 음각되어 있다.
화강암 벽의 편편한 면에 새겨진 신장상은 모두 4구로 왼편으로부터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신장상은 거의 비슷한 위치에 배치되어 있으며 두 번째, 네 번째 상은 그보다 1m가량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
4구의 신장상은 모두 옆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부리부리한 눈, 역동적인 자세, 바람에 휘날리는 옷자락 등이 아주 뛰어난 솜씨임을 알게 해 준다. 또 몸이 매우 비대하여 안정감이 드러나며 옷에서 연결되어 나온 옷자락이 길게 이어져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두 번째 신장상에서는 귀면(도깨비의 얼굴)이 허리춤 위에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1991년 당시 이 지역 문화유적 조사를 맡은 서울대 박물관은 이 신장상의 제작 시기를 고려 시대로 추정한 바 있다.
④ 태고사(太古寺) 귀룽나무
태고사 경내에 있다. 이 나무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 옆에 있는데 줄기가 곧게 올라가다가 4,5미터에서 갈라져 고르게 발달하였다. 매년 음력 3월 20일 경이면 하얗게 만개하는 꽃이 나무를 뒤덮어 장관을 이룬다. 나뭇가지를 삶아 먹으면 머리 가려움증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다.
⑤ 태고사 원증국사탑(제2권 문화유산, 국가 보물편 참조)
⑥ 태고사 원증국사탑비(제2권 문화유산, 국가 보물편 참조)
⑦ 봉성암 성능대사 부도탑(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유형문화재편 참조)
⑧ 고양 상운사 목조아미타삼존불(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유형문화재편 참조)
⑨ 승도절목문
이 명문은 북한산 용학사(龍鶴寺) 아래 비석거리 내 화강암 암벽에 새겨져 있다. 명문의 기록을 보아 조선조 1855년(철종 6)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모두 325자로 되어 있는 이 명문의 내용은 19세기 중엽 북한산성 내의 사찰이 피폐하고 승도가 흩어짐이 승병대장인 총섭(總攝)의 책임인 바, 그의 임용 시 폐단을 없애달라는 요구서를 새겨 놓은 것이다.『고양금석문대관』참조.
⑩ 등운각
북한산성 내 백운교 앞 주차장에서 백운대로 가는 초입에 있다.
1957년에 경기도 지사 최헌길(崔獻吉)이 건립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단청을 했고, 겹처마이며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정각의 이름을 “구름 속에 높이 솟아있는 누각(樓閣)”이라는 뜻으로 등운각이라 지었다 하며, 경기도를 방문하는 외빈을 안내 접대하는 데 활용된 건물이다.
⑪ 산영루(山映樓)
용학사 앞 계곡에 자리 잡은 10개의 주추에 3칸 누마루 형식의 정자이다. 이곳에서는 당대의 문인 명필들이 모여 시회를 갖는 등 선비 문화를 볼 수 있다. 추사 김정희도 이곳에서 시를 읊었다. 2004년 산영루 사진이 발견되었다.
⑫ 북한산 3.1운동 암각문(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 참조)
⑬ 북한동 향나무(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지정 보호수 참조)
⑭ 10월 산제터
북한동 마을신앙의 명칭은 ‘산제(山祭)’ 혹은 ‘산고사’라고 하며, 신격은 산신이다. 산제는 음력 8월 초하루와 10월 초하루, 두 번 치러지는데, 만약 마을에 초상이 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달을 넘기거나 무당에게 날을 잡아서 다시 지낸다. 두 번 지내게 된 까닭은 모르며, 선조 대부터 그렇게 해왔다고 한다. 마을 주민 중에는 북한산 산신이 여산신이기에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산제는 음력 8월 초하루에는 의상봉에서 행해지며, 10월 초하루에는 노적봉에서 행해졌다. 당신목이나 당집은 없다. 산제를 지내는 터에는 돌로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의상봉에는 산신이 좌정해 있다고 여긴다. 노적봉의 경우에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지내게 되었고, 원래는 대남문 쪽에 있는 행궁터(주민들은 ‘대궐터’라고 부름)에서 터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행궁터에서는 큰 아름드리 소나무 밑에 제단을 만들고 제를 올렸다. 노적봉으로 옮겨온 까닭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국군 수 천 명이 죽어서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0월 초하루에는 노적봉에서 산제를 지냈다. 그러나 거리도 멀고 힘이 들어서 작년(1998)부터 중성문의 문루에서 노적봉을 바라보고 지낸다. 이렇게 제사 장소를 옮길 경우에는 무당이 지정하여 준 장소로 옮긴다. 제육으로는 통돼지 한 마리를 올린다. 10여 년 전에는 마을 내에서 직접 잡았으나 지금은 밖에서 잡아온다. 10월 달에는 8월에 사용하고 남은 기금으로 비용을 충당한다. 10월엔 대서문에는 지내지 않는다.
고양시의 역사와 문화유산 79(별지로대체)
⑮ 백운동문 명문
즉 노적사 입구를 지나 중흥사지(重興寺址) 쪽으로 오르는 계곡 왼쪽, 화강암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 명문이 새겨진 바위는 하나의 거대한 암석으로 가로 7m, 세로 5m에 이르고 있다. 이 명문은 언제 누가 쓰고 새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745년 성능이 지은『북한지』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어 그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은 해서체로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 새겼는데 한 번에 힘차게 써 내려간 느낌을 준다. 글씨간의 각 간격은 8cm정도이다. 이 암각명문은 이 지역의 지명을 표시하여 주는 표석으로 사용된 듯하다. (제7권 자료집, 금석문편 참조)
⑯ 도당굿터
북한산 부황사 바로 오른쪽에 도당집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산식각에 정성을 드린다. 세 명의 화상이 모셔져 있으며 각각 산신과 부군(府君), 호구아씨를 모셔놓았다. 산신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노인의 모습이고 중앙에 모셔져 있다. 이들 화상은 너무 낡아서 1970년대에 다시 그렸다고 한다.
⑰ 북한산성 선정비 26기(北漢山城 善政碑 26基)
이 선정비군은 노적사에서 태고사(太古寺)에 이르는 중간 지점 용학사(龍鶴寺) 아래에 있다.
현존하고 있는 비의 숫자는 총 26기로 이 중에 옥개석을 모두 갖춘 것은 몇 기 되지 않으며 대부분 훼손된 상태이다. 비분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본 비의 건립 시기는 모두 19세기 이후이다. 이중 대표적인 선정비만 살펴보면 ‘총융사 신공헌 애민선정비(摠戎使 申公櫶 愛民善政碑)’는 1870년(동치(同治) 9) 10월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 159cm, 폭 35cm, 두께 24cm의 규모이다. 총융사 신헌은 호가 위당(威堂)으로 금영대장(禁營大將),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인물이다. 이외에도 ‘조의복 영세불망비(趙義復 永世不忘碑)’ 등이 있다. 비문에 보이는 총융사는 1624년(인조 2)에 설치된 군영으로 수원, 광주(廣州), 양주, 남양, 장단 등 진(鎭)의 군무를 맡아 보던 관청이다. 1747년에는 경리청으로 북한산성에 설치, 산성내의 수비와 모든 직무를 관장하였다. 총융사는 이 총융청의 수장으로서 종2품의 품계이다. 비의 구조를 간단히 보면 대부분 기단은 특별히 축조하지 않고 자연 화강암에 비신을 꽂는 형태로 되어 있다. 비신의 모양으로 보아 본래는 모두 옥개석이 씌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비신과 떨어져 옥개석은 따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제7권 자료집, 금석문편 참조)
18) 암각문
북한산에는 각종 암각문이 산재해 있다. 몇 개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괘궁암(卦弓岩:수구문골)’, ‘칠류암(七流岩:수구문골)’, ‘불자인명(佛者人名:수구문골)’, ‘노역각자(努役刻字:수구문)’, ‘백운동문(白雲洞門:중흥골)’, ‘송자각(宋字刻)’, ‘청하동문(靑霞洞門:부왕골)’, ‘최송설당(崔松雪堂:부왕골)’. (기타 제 7권 자료집, 금석문편 참조)
제6절. 효자동
1) 효자동 태묘(胎墓)
이 태묘는 북한산성에서 의정부 방향의 63번 도로 옆 효자동 태봉(胎峰) 아래에 있다. 현재 비는 태봉의 오른쪽 입구에 세워져 있으나 본래는 산봉우리 정상에 있던 것이다. 비는 화강석으로 되어 특별한 문양이나 조각은 보이지 않으며 일반적인 묘비(墓碑)와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비의 앞면에는 ‘왕녀태실(王女胎室)’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비 뒷면에는 ‘성화 13년 입석’이라 기록되어 이 비가 1477년(성종 8)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비의 규모는 기단(基壇)을 포함한 총 높이가 112cm, 폭 31cm, 두께 9cm이다.
태묘는 조선조 사회에서 매우 중요시되어 일반 능과 같이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만들어졌다. 태묘는 대개 대석, 옥개석(屋蓋石), 비신 등으로 이루어지며 태는 중앙 조정의 안태사(安胎使)를 보내어 묻게 하였다.
태실비에서 북한산 기슭 방면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는 태실의 개첨석(蓋檐石)으로 보이는 화강암 뚜껑이 있는데 전체 지름이 1m에 이르는 큰 규모이다. 또한 태봉 정상에는 뚜껑의 몸체에 해당하는 화강암 석재가 있는데 땅에 묻혀 확인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흔히 태묘에서 발견되는 태호(胎壺)가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 서삼릉(西三陵) 경내에 태묘가 있으나 일제 시대에 새로이 조성된 것으로 이곳 효자동 태묘는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보존 가치가 크다.
2) 박태성(朴泰星) 묘
효자동 효자골 입구에 있다. 좌우에는 배 의인 완산 이씨와 계배 의인 김해 김씨의 묘가 합폄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1기, 망주석 2기, 소동자상 2구의 석물이 있으며, 또 정조 2년(1778) 5월에 건립된 묘표에는 “유명 조선 효자 통덕랑 밀양 박공 태성 자경숙지묘(有明朝鮮孝子通德郞密陽朴公泰星字景淑之墓)”라 새겨 있다 크기는 폭 60cm, 두께 30cm, 높이 145cm이며, 표문은 이성중(李聖中)이 짓고 후손 박홍체(朴弘楴)가 썼다. 그 밖에 1893년(고종 30)에 건립한 잡석의 효자비가 있는데 크기는 폭 40cm, 두께 12cm, 높이 117cm로 비문은 증손 박윤묵(朴允黙)이 지었다.
박태성은 조선 말기의 효자로 자는 경숙(景淑)이며 본관은 밀양이다.(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묘표
3) 육모정지(六模亭址)
효자동 사기막골 군부대 안 차로가 끝나는 지점 바로 오른쪽 계곡과 함께 폭포가 있으며 폭포 위에 있던 정자터이다. 지금도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역력하다.
4) 서산정사지(西山精舍址)
육모정지 옆에 있는 집터로서 건물지 바로 뒤에 바위에 새겨진 자연석을 가로 117㎝, 세로 43㎝ 정도로 반듯하게 다듬은 면에 “독락재 구선생 서산정사 고지(獨樂齋具先生西山精舍故址)”라고 새겨있다. 구선생은 구시경(具時經1637-1699)으로서 조선 중기 문신이며 자는 제백(濟伯) 호는 독락재이며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그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60년 자의대비의 복제(服制)에 대한 예론(禮論)이 일어나자 배천(白川)의 지곡(智谷)에 은거하며 저술에 힘썼다. 이후 1679년 예송(禮訟)에 연루되어 이천(伊川)에 유배되었으나 1683년 순릉참봉에 천거되고 이후 내자사직장, 사직서령(社稷署令), 1696년에 연천현감 등을 지내다가 1699년 임소에서 죽었다.5) 효자동 송시열 시 암각문
서산정사터를 조금 못간 250m지점 왼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글씨이다. 글씨는 다음과 같다.(번역은 편집자)
“만인 앞에 말을 붙잡은 고죽의 절개는 북두성처럼 우뚝하다 이날 서산에 이름은 이미 좋은데 봄 고사리 캐려하니 생각이 숙연해진다.”
相携叩馬萬
人前孤竹高
標斗北懸此
日西山名已
好春薇欲探
意悠然
또 한 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인왕산 삼각산 디에 병풍처럼 둘러 소대이 훌륭한 문장은 해와 달처럼 우뚝하다 봉성에 들어가 나가고 물러난 사이 청산은 은은하고 물은 서늘하다.”
仁王三角後幷
前昭代文章
日月懸☐入
鳳城邊出處
靑山隱隱水
冷然
6) 효자동 요지(窯址)
서산정사 위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있다. 다만 몇 개의 요지(窯址)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판단된다.
7) 효자동 채석유적
효자동 암각문이 있는 일대에 많은 암석이 노출되어 있는데 3m 정도 길게 돌을 떼어내기 위한 쐐기 흔적이 남아 있다. 정확한 시대는 알 수 없지만 6.25 이전에 만들어진 유적으로 생각된다. 떼어낸 석재의 길이는 대략 4-5m 길이에 폭 1-1.5m 두께 30㎝ 정도로 추측된다.
고양의 역사와 문화유적 221 사진 효자동 바위
8) 와룡루지(臥龍樓址)
와룡루는 조선 후기 이조 참판을 지낸 홍석보(洪錫輔)가 건립하였으며, 정자 앞 연못의 반석과 푸른 시내가 근교의 명승지를 형성하여 당대 여러 선비들의 읊은 시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기문에 전해지고 있다.
9) 위패단(位牌壇)
서산정사 바로 옆 왼쪽 능선 쪽에 있다. 사찰 대웅전 뒤에 이 위패단을 설치하고 재(齋)를 지낼 때 위패를 모시는 기단석이다. 높이 1m, 폭 30cm.
위패단
10) 관성사지
효자동에 있다.
제9절. 지축동
1) 황치신(黃致身) 묘
지축동 덕수촌에 있으며 배 정경부인 황씨와 합폄하였다. 이수를 갖춘 신도비는 폭이 85cm, 높이가 150cm이며, 비명은 김종직(金宗直)이 짓고 안심(安堔)이 썼다.
황치신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초명은 동(董)이며 자는 맹충(孟忠)이다. 본관은 장수로써 영의정 황희(黃喜)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음덕으로 공안부부승이 되고, 1415년(태종 15)에 통례문 봉례랑을 거쳐 감찰․호조 좌랑을 지냈다.
1432년(세종 14)에는 판선공감사 및 판통례문사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 올랐다. 그 후 예조 참의, 중추원 부사 한성 부윤을 역임하였으며, 형조와 공조 참판을 거쳐 1444년(세종 26)에는 호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단종이 즉위한 뒤에는 중추원사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세조 연간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와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그러나 1461년(세조 7) 타인의 노비를 빼앗았다하여 삭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5년 뒤 동지중추부사로 복관되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사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호안(胡安).
2) 황치신(黃致身) 재실
이 재실은 조선 초기의 문신 황치신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으로 1983년 8월 22일에 신축되었으며, 규모는 전면이 4칸, 좌측이 3칸인 목조건물로 지붕은 조선기와집의 겹처마이다.
4) 흥국사(興國寺)
(1) 흥국사 창건은 서기 661년(신라문무왕 원년)에 원효스님이 북한산 원효암에서 수행하던 중 북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산을 내려와 이곳에 이르게 되었고, 서기(瑞氣)를 발하고 있는 석조 약사여래(藥師如來)부처님을 보고 인연도량이라 생각하여 본전(本殿)에 약사부처를 모시고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앞으로 많은 성인들이 배출될 것이다' 하며 절 이름을 흥성암(興聖庵)이라 하고 오늘의 흥국사를 창건하였다.(미타전 아미타불 복장 연기문)
그 이후 사찰의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자세한 자취는 알 수 없으나 1686년(숙종 12)에 중창한 사실과 영조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1758년(영조 34)에 미타전 아미타불을 개금 중수하였고 1770년(영조 46)에는 생모 숙빈 최씨의 묘원인 소녕원에 행차하다가 많은 눈을 만나게 되어 이곳에 들르게 된 영조대왕이 하루를 머물고 아침에 일어나 지었던 시가 비문에 전해지는데 [조래유심희(朝來有心喜 :아침 일찍부터 기쁜 마음이 있고)
척설험풍미 (尺雪驗豊微 :수북하게 쌓인 눈에 올해도 풍년이 드는 것을 알겠구나)]라는 시구(詩句)를 편액(扁額)으로 만들어 친히 하사하며 약사전을 중창. 이후 왕실의 원찰이 되어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1785년에 승도대장, 관선, 가선, 법헌스님 등이 중창하였고 특히 1792년(정조 16)에는 관선, 법헌스님이 후불탱을 조성, 봉안하고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개분한 일이 탱기에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1854년(철종 5)에는 황해도 장련군에 있는 학서가로부터 4백 근짜리 대종과 칠성목탱, 삼존불상을 절에 모셨고 1867년(고종 4)에는 화주 곽명스님이 약사전을 중건하였으며, 1876년(고종 13)에는 화주 설허스님이 칠성각을 중건하였다. 1878년(고종 15) 가을에 완해스님이 주선하여 내탕금으로 괘불탱을 조성하였고 1886년(고종 23)에는 화주 뇌응스님이 칠성각을 단청하고 팔상탱과 신중탱을 조성, 봉안하였다고 한다.
(2) 흥국사 극락구품도(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유형문화재 참조)
(3) 흥국사 약사전(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문화재자료편 참조)
(4) 흥국사 약사전 후불탱화(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유형문화재편 참조)
(5) 흥국사 나한전((제2권 문화유산, 향토유적편 참조)
(6) 흥국사 만일회비
흥국사 일주문 옆에 세워진 비석이다. 만일회는 백련사(白蓮社)의 다른 이름으로 30년 간 염불회(念佛會)를 결성한 것이다. 1929년 박한영 스님이 비문을 짓고 김돈희(金敦熙)가 글씨를 썼다. (제7권 자료집, 금석문편 참조)
제10절 오금동(梧琴洞)
1) 오금동 느티나무 (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지정보호수편 참조)
2) 의평군(義平君) 신도비 및 묘역
산막골(山幕洞)에 있다. 1966년에 만들었으며, 16세손 이진기(李鎭基)가 짓고 18세손 이해성(李海性)이 전액을 쓰고, 20세손 이창렬(李昌烈)이 글씨를 썼다. 귀부의 비신은 총 높이가 2m이다. 의평군의 묘는 1990년 10월에 서울 거여동에서 이장하면서 조성하였다. 양식은 고려시대 양식 그대로이며 문인석이 좌우 2쌍, 장명등, 새로 만든 상석과 고석이 있다.
3) 정종대왕 성빈 ․ 충주 지씨 단(定宗大王 誠嬪 忠州 池氏壇)
산막골(山幕洞) 의평군 묘역에 있다. 1980년에 설단기성회(設壇期成會)에서 건립했으며, 블록으로 만든 곡장으로 되어있다.
4) 이효손(李孝孫) 묘비
산막골에 있다. 의평군의 장자인데 묘는 고려시대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문인석이 2기 있다.
5) 이섬(李暹) 묘비
산막골에 있으며, 의평군의 3자(子)이다. 숙부인 광산 김씨와 합부되어 있고, 문인석 2기가 조성되어 있다.
6) 박세영(朴世榮) 묘 및 신도비(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7) 박세무(朴世茂) 묘
배 정부인 안동 권씨와 합부하였다. 묘 앞에는 1941년 5월 건립한 오석에 옥개가 있는 묘갈이 있는데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것을 12대손 박헌순(朴憲淳)이 쓴 것이다.
비신은 폭 60cm, 두께 25cm, 높이가 140cm로 전면에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지경연 의금부사 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통훈대부 군자감정 소요당박공지묘(消遙堂朴公之墓)”라 새겨있다.
박세무는 1493년에 출생하여 1544년에 사망하였다. 조선의 문관으로 자는 경번(景藩), 호는 소요당(消遙堂), 본관은 함양이다. 중종 25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기용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헌납이 되었다. 중종 4년 중추부 경력을 지내고 마전 군수․승문원 참교 등을 역임하고 군자감정에 이르렀다. 글씨가 뛰어났으며『동몽선습』의 저자이기도 하며 죽은 후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8) 박대립(朴大立) 선생 묘 및 신도비(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9) 강지(姜漬) 선생 묘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10) 오금동 은행나무 (제2권 문화유산, 마을지정 보호수편 참조)
11) 의평군 이원생(李元生) 묘
좌측에 배 철원 최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다. 봉분의 석물로는 상석 2기, 장명등 1기, 문인석 4구가 있으며 그밖에 갓 형의 묘비가 있는데, 크기는 폭 60cm, 두께 30cm, 높이 120cm이다. 또, 1976년 4월에 건립된 신도비는 용두와 구단을 갖추고 있으며 비문은 후손 이쇄기(李鎖基)가 짓고 이창열(李昌烈)이 썼으며 이해성(李海性)이 전자(篆字)를 썼다.
의평군은 조선 제 2대 정종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숙의 지씨이다. 자는 회원(晦源) 호는 서하(棲霞)이다. 좌명공신에 녹훈되고 고종 임신년에 영종정경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민간공(敏簡公).
12) 인천 옹주(仁川翁主) 묘
묘는 쌍분이며 묘갈은 묘단실개석이 있는 오석으로 폭 50cm 두께 30cm 높이 120cm이다. 1966년에 입석하였으며 비문은 화산 권순명(權純命)이 짓고 여산 안성용(安成鏞)이 썼다.
인천옹주는 조선 제 2대 정종의 일곱째 딸이며, 어머니는 숙의 윤씨이다. 전의 이씨 부사 이관식(李貫植)에게 출가하였다.
13) 이동익(李東益) 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배 정부인 한산 조씨와 합폄하였다. 화강석의 묘표는 크기가 폭 48cm, 두께 25cm, 높이 150cm인데, 표문은 이성중(李聖中)이 짓고 한호(韓濩)가 썼다.
14) 제주 고씨 전서공파(典書公派) 묘원(墓苑)
오금동 산 141-1번지에 있다. 9기의 묘를 하나의 묘로 통합하여 납골묘처럼 만들었으며, 상석과 묘표는 한군데로 묘 앞에 모아 배열하였다. 9기는 高後弼, 高晦, 高世協, 高應壽, 高景稷, 高在昇, 高在昌, 高鎭豊, 高永周이다. 그 아래에 같은 문중의 묘역에 10여 기의 묘가 있다.
15) 박세옹(朴世蓊) 묘
배 숙부인 남양 홍씨와 합폄하였다. 묘 앞에는 옥개석이 있고 비신 보호석을 양쪽에 붙인 흰 대리석의 묘갈이 있는데 크기는 폭 60cm, 두께 30cm, 높이 150cm이다. 전면에는“통정대부 이조참의 박세옹지묘 (通政大夫 吏曹參議 朴世蓊之墓)”라 쓰여 있다. 비는 강녕군 홍섬(洪暹)이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박세옹(朴世蓊)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호는 경운(景雲) 본관은 함양, 중검(仲儉)의 아들로 1493년에 출생하여, 1525년(중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검열 등을 지냈고 예조 참의 사은사 병조 참의 이조 참의 등을 역임했다. 성실 소박하고 근직하여 대간으로 있을 때 바른 말을 잘한 것으로 유명하다.
16) 박세정(朴世貞) 묘
증 정부인 안동 권씨 묘와 합폄하였다. 주위에는 망주석 2, 상석 1기와 동자상 2구가 있다. 묘의 높이는 2m이고, 둘레는 25m이다. 앞에는 1584년(선조 17) 10월에 입석한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 행적순부위박세정 증 정부인 안동권씨지묘(贈嘉善大夫 吏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 行迪順副尉朴世貞 贈貞夫人安東權氏之墓)”라 쓰인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은 율곡 이이(李珥)가 지었다.
12) 이기표(李基表) 묘
앞에 1968년 12월에 세운 묘비가 있는데 비문은 이경홍(李景弘)이 짓고 손재형(孫在馨)이 썼다.
이기표는 한말 항일투사로서 1894년 5월에 출생하여 1966년 2월 사망하였다. 호는 도재(都齋)이며 본관은 전주로써 신당(愼堂) 이봉진(李奉珍)의 아들이다.
1919년 2월 일본에 의한 고종황제의 암살소식을 듣고 격분,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3) 김대충(金大忠) 묘
본관은 우봉으로 증 정부인 해주 이씨와 부좌, 높이 170cm의 흰 대리석 묘비, 망주, 문인, 상석, 혼유석 등이 배치되었다. 비의 전면과 측면에 문자가 보인다. 증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 행어모장군 행용양위 부사를 지냈다.
14) 김여의(金汝義) 묘
본관은 우봉으로 숙부인 함평 이씨를 부좌하였고 상석, 향로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었다. 자는 방숙(方淑)이며, 통훈대부 행 산여별제란 전자(篆字)가 있는 168cm의 대리석 묘비가 있다.
15) 숙의 윤씨(淑儀尹氏) 묘
조선 제 2대 정종의 후궁으로 슬하에는 정종의 제 7남 수도군 덕생(德生), 제 8남 임언군 이녹생(李祿生), 제 9남 석보군 이복생(李福生)을 두었다.
제10절. 삼송동(三松洞)
해당 없음.
제12절 동산동(東山洞)
1) 삼송동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 일명 밥할머니 석상(石像)
삼송동 숫돌고개 중턱의 통일로 변 도화공원 내에 있는데, 2005년 1월에 동산동 능모탱이로 옮겼다. 이 석상 이외에도 3기(基)의 비석(碑石)이 세워져 있다. 총 4기의 석물 중 밥할머니 석상은 북한산을 바라보며 세워져 있다. 최근에 만들어진 대좌를 포함하여 총 높이 155.5cm의 석상은 현재(2005) 얼굴 부분이 소실된 상태이다. 본래 이 석물들은 동산동(東山洞) 능모탱이에 있었으나 통일로 확장사업으로 1993년 숫돌고개로 옮겼다가 다시 옮겨왔다.
석상의 팔목과 어깨 등은 매우 풍만하여 전체적으로 얇은 곡선들이 몸을 휘감은 듯 보인다. 왼손은 손가락을 폈다. 오른손은 수평으로 손은 좌측을 향하고 있는데 손등이 아랫쪽을 향하고 있다. 석상의 아랫부분은 특별한 조각이나 문양 없이 대좌에 꽂는 형태이며 뒷부분은 자연석에서 볼 수 있는 갈라짐과 굴곡을 발견할 수 있다.
목 부분에는 시멘트가 약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잘려진 머리 부분을 복원하려는 작업이 이루어진 것 같다.
이 석상의 주인공을 고양 지역과 서울시 일부지역에서는 밥 할머니라 부르고 있다. 이 밥 할머니는 임진왜란 당시 아군을 전멸의 위기에서 구한 슬기로운 할머니의 화신(化身)이라 여겨지고 있다.
2) 덕수 자씨 교비명(德水 慈氏 橋碑銘)
본래 동산동(東山洞) 능모탱이에 있었으나 1993년 도로의 확장으로 삼송동과 오금동 사이에 있는 통일로(統一路) 변 숫돌고개에 옮겼다가 2005년 1월에 다시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 현재 비는 화강석 재질의 장방형 대좌 위에 대리석의 비신을 꽂는 형식인데 비신의 윗부분에 화강석의 옥개석이 있다. 이 중 대좌와 옥개석에는 무늬나 문자는 보이지 않으며 비문은 비신의 앞면과 뒷면에만 기록되어 있다.
비의 앞면 윗부분에 ‘고양 덕수자씨 교비명(高陽 德水慈氏 橋碑銘)’이라 새겨진 전(篆)이 있다. 이러한 전은 뒷편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 아래의 비문 내용은 조선조 1660년(현종 1)에 이 비를 세우게 된 배경, 공사의 진행기간, 사용 경비 그리고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인명을 한자(漢字)와 이두문자(吏讀文字)로 기록하였다. 즉 이 비는 한양과 북부 지방을 연결하는 관서로 구간 중 고양 덕수천(德水川 또는 창릉천 昌陵川) 위에 다리를 만들면서 세운 것이다.
한편 이 비와 성격이 비슷한 신원덕명교비(新院德明橋碑)가 신원동(新院洞) 기업은행 연수원 안에 있다.
3) 사계비(沙溪碑)조선 중기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송덕비이다. 김장생이 서오릉 내 창릉(昌陵) 참봉을 지낼 때에 동네에서 나무하던 아이들을 잘 대우했었다. 이에 나무하던 아이들은 왕릉 근처의 나무를 베지 않고 보존하는 동시에 김장생이 참봉을 그만두고 교체되어 떠나자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작은 비갈(碑碣)을 세워주었다. 정조(正祖) 임금이 왕릉 참배를 갔다가 돌아오면서 길 가에 있는 비를 보고 그 연유를 물어서 그런 사연을 알게 되었다. 정조는
“덕분에 우리 왕릉의 나무가 잘 보존 될 수가 있었구나.”
하였다. <<高陽先賢傳>>
비는 동산동(東山洞) 앞뜰에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알 수 없다.
제13절 용두동(龍頭洞)
1) 서오릉(西五陵)
이 능은 고양시청에서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으로 이어진 55번 지방도로 좌측에 있다. 부근에는 1980~1990년대 이후 들어선 많은 식당상가가 자리 잡고 있다.
서오릉은 서울시와 고양시의 경계 부근에 위치해 많은 시민들이 유적지 겸 휴식처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고양시 최대의 면적을 가진 왕릉이기도 하다. 조선조 전기부터 후기까지 역대 왕과 왕비들의 왕릉이 있어 동구릉 다음으로 큰 면적이다. 서오릉의 다섯 왕릉은 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으로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총면적 553,616평이다.
서오릉이 능지로 선택된 계기는 1457년(세조 3) 세자였던 원자 이장(李璋)이 돌아가자 풍수지리설에 따라 능지로서 좋은 터를 찾다가 이곳이 추천되어 부왕인 세조가 친히 답사한 뒤 경릉터로 정하면서 비롯되었다. 그 후 1470년(성종 원년)에 덕종의 아우인 예종의 창릉이 들어섰고, 1681년(숙종 7) 2월 숙종 비 인경왕후의 익릉과, 숙종의 명릉이 1720년(경종 원년) 10월 20일에, 그리고 영조의 진성왕비 홍릉이 1757년(영조 3) 6월에 각각 들어서면서 일대 왕족의 능이 무리를 이루어 서오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밖에 이곳에는 제13대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경내에 있으며 또한 숙종의 후궁으로 많은 역사적 일화를 남기고 있는 희빈 장씨의 묘가 1970년에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서 이장되었다.
(1) 경릉(景陵)
서오릉의 여러 능 중에서 정 중앙에 있다. 능의 북쪽으로는 홍릉이, 동남쪽으로는 익릉이 있다. 서오릉의 능 터에 제일 먼저 조성된 것으로 조선 제 7대 세조의 원자인 덕종과 그의 비 소혜왕후의 능이다.
덕종은 세조의 장자로서 1438년(세종 20) 9월 25일에 출생하여 1456년(세조 2) 9월 2일에 사망했다. 이름은 이장(李璋)이며 처음 이름은 이숭(李崇), 자는 원명(原名)이다. 1445년(세종 27) 도원군에 봉해지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란 때의 공으로 흥록대부에 올랐으며 세조 즉위와 함께 왕세자로 책봉되어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딸을 맞이하여 월산대군과 제 9대 성종, 명숙공주를 낳았다. 그러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춘추 20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왕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세조가 단종을 없애려고 마음먹은 날 밤 세조의 꿈에 뜻밖에 단종의 어머니가 되는 현덕왕후 권씨가 분노한 얼굴로 나타나 세조를 향해 꾸짖기를,
“너는 흉악한 성품과 표독한 심술로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벽지로 내쫓더니, 이제 또 목숨까지 끊으려 하는구나. 네가 나와 무슨 원한이 그리 심하기에 이다지도 악착스러우냐? 너는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는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하며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고 사라졌는데 마침 동궁의 내시가 황급히 달려와서 아뢰기를
“동궁마마께서 낮잠을 주무시다가 몽압이 되셔서 매우 위중하시나이다.”
하므로 세조가 급히 달려가 보니 벌써 동궁은 숨이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덕종의 죽음은 비명에 간 비운의 왕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혼령의 살(煞)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시호는 의경이다.
덕종비 소혜왕후 한씨(韓氏)는 1437년(세종 19)에 출생하여 1504년(연산군 10)에 승하하였다. 본관은 청주로 좌의정 서원부원군 양절공 한확(韓確)의 딸이다.
이 곳 경릉의 모습은 좌강이 왕 우강이 비의 동원이강형식으로 왕우비좌의 일반적인 예와는 반대로 만들어졌다. 왕비는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능의 모습도 왕릉 형식을 갖추었으나 왕은 당초 세자로 돌아갔고 또 부왕 세조의 박장주의에 따라 사대석과 삼면의 곡장 삼채체를 설치하지 말 것을 명하였고 또 추존 후 왕릉의 제도로 바꿀 것을 아뢰자 “신도(神道)가 안치된 지 오래인데 의상잡물을 동요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고 더 이상 가설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대왕대비의 명으로 세자묘제 대로 두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추봉되는 능의 상설제의 전례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우강의 비릉은 능 제도에 따라 의상을 모두 갖추었으나 왕릉은 난간망주와 석수의 호위 없이 능 앞에 혼유석과 장명등이 있고 문인석 일대가 시립하고 있을 뿐이다. 왕릉과 비릉은 모두 무른 화강암을 써서 풍화가 심하여 섬세한 조각 문양은 판별이 어려울 정도이며 비릉의 석난간 주두가 창릉의 법식을 따라 건원릉 등 조선 왕릉의 전형적인 돌난간과 그 모양을 달리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2) 창릉(昌陵)
창릉은 현재 홍릉 북쪽에 있어 서오릉의 여러 능 중에서 가장 먼 북쪽에 있다. 능 주변에 군부대 시설 등이 있어 비공개 유적으로 남아 있다.
창릉은 제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예종은 1441년(세종 23)에 출생하여 1469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재위기간은 불과 1년이었다. 이름은 이황(李晄), 자는 명조(明照)이며 처음 이름은 이평보(李平甫)이다. 세조의 제 2왕자이며 비는 영의정 한명륜(韓明倫)의 딸 장순왕후와 계비 좌의정 한백륜(韓伯倫)의 딸 안순왕후이다. 처음에는 해양대군에 봉해졌으나 1447년(세조 3) 왕세자 도원군 이장(李璋)이 병으로 일찍 죽자 그를 대신하여 8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58년(세조 4) 세조가 위독하므로 12년간의 대리청정을 받았으나, 그 해 세조의 승하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예종 역시 재위 13개월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춘추 20세로 별세하였다. 비록 짧은 재위기간이었으나 세조 때부터 추진되어온『경국대전』을 완성시켜 조선시대 모든 문물제도의 법적 규준을 마련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직전수조법을 제정하고 둔전의 민경을 허락하였다. 한편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의 옥사와 민수(閔粹)의 사옥 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시호는 소효(昭孝).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는 출생시기가 불확실하며 1498년(연산군 4)에 승하하였다. 본관은 청주로 우의정 청주부원군 한백륜(韓伯倫)의 딸이다. 처음 동궁에 선입되어 소훈으로 있다가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 뒤 성종은 인희대비라 진봉했으며 슬하에는 제안대군과 두숙공주가 있다. 연산군 때 다시 명의대비라 존호되었으나 연산군 4년에 별세하므로 창릉에 부장되었다.
창릉의 능제를 보면 왕릉과 왕비릉은 동원이강식을 이루고 있다. 창릉의 석물 배치는『국조오례의』의 전통적인 예를 따르고 있으며 석물의 양식상 특징이 있다면 고석의 문양과 돌난간 대석주 주두양식이다. 석상의 족석을 고석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북 모양을 한데서 연유된 것인데 다른 능도 문고리 모양을 새겨 내서 정말 북과 똑같이 만들어 내고 있음이 특이하다. 또 대석주에 죽석이 닿는 아래 부분은 조선식 석주 모양을 따르고 있으면서 그 주두는 둥그런 원수 아래 환상 받침을 마련하고 사각석주로 변화하는 형식을 이루고 있다. 건원릉, 헌릉 이래의 대석주 주두양식과 다른 양식이 창릉에서 나타남은 혹시 당시 일부에서 쓰이던 고려식 석주 양식의 반영이 아닌가 한다. 고려 왕릉 중 안릉과 동구릉 석주에서 그 취향이 비슷한 예로 볼 수 있다.
(3) 익릉(翼陵)
서오릉의 능역에서 제일 먼저 조성된 경릉의 동쪽 언덕에 있으며, 조선 제19대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다. 능 앞에 재래수종인 적송나무가 큰 숲을 이루고 있다.
숙종비인 인경왕후 김씨는 1661년(현종 2)에 출생하여 1680년(숙종 6)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광주로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1671년(현종 12)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고 숙종 즉위와 함께 왕비에 진봉되었다. 슬하에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어렸을 때 잃어버렸으며 왕비 역시 1680년(숙종 6)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1713년(숙종 39)에 광렬(光烈), 1722년(경종 2)에 효장명현(孝莊明顯), 1753년(영조 29)에 선목(宣穆), 1776년(영조 52)에 혜성(惠聖)의 존호가 각각 주어졌다.
능의 형태는 숙종 연간의 것이면서도 아직 석물을 간소화하라는 명이 이전의 일이어서 기본적으로『오례의』의 제도를 따르면서 부분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왕조실록에 보면 숭릉의 양식을 따라 조성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정자각은 당시 유행하던 익실이 딸려 측면전면으로 한 칸이 늘어난 전면 5칸 측면 5칸의 것으로 세웠고 장명등과 망주의 대석에 꽃무늬를 새긴다든가 망주의 귀에 구멍이 사라지고 상향하는 세호를 새겨 넣은 점은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4) 명릉(明陵)
이 능은 서오릉 관리사무소 동쪽에 있으며 가장 넓은 능역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2005) 비공개지역 내에 있다.
조선 제19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과 제 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단릉을 통틀어 일컫는다. 명릉의 터는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의 능 터로 택정되어 인조의 장릉의 예를 따라 왕비릉 우측을 비워 두면서 비롯되었다. 1720년(경종 즉위년)에 숙종이 승하하여 이곳에 장사하고 능호는 인현왕후 때 것을 그대로 쓰기로 하였다.
숙종은 제18대왕 현종의 적자로서 1661년(동왕 2)에 출생하여 1720년(숙종 46)에 승하하였다. 재위기간은 1674년부터 1720년까지 46년 동안이며, 이름은 이돈(李惇) 자는 명선(明善)이다. 어머니는 명성왕후 김씨이며 비는 영돈령부사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와 계비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 및 제 2계비 경은부원군 김계신(金桂臣)의 딸 인원왕후가 있다. 1667년(현종 8)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에 즉위하였다.
인현왕후 민씨는 1667년(현종 8)에 출생하여 1701년(숙종 27)에 승하하였다. 본관은 여흥,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딸로 1681년(숙종 7) 가례를 올려 계비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희빈 장씨가 왕의 총애를 독점하여 왕비는 왕의 관심 밖에 있어야 했고 더구나 기사환국이 일어나 희빈 장씨의 무고로 폐서인(廢庶人)으로 쫓겨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곧 누명은 벗겨지고 왕의 뉘우침으로 갑술옥사 때 복위되었으나 1701년(숙종 27)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자녀는 없으며 존호는 효경숙성장순이고 휘호는 의열정목이다.
왕비의 성품은 예의가 바르고 정숙한 국모로서 조선의 전형적인 여인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민비를 주인공으로 하여 당시 역사적 사건을 줄거리로 한 궁중 염정애사의 대표적인 내간체 소설인『인현왕후전』(원명:인현성후행록)이 전해지고 있어 그의 훌륭한 덕행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숙종의 제 2 계비 인원왕후 김씨는 1683년(숙종 13)에 출생하여 1757년(영조 33)에 승하하였다.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의 딸로 1702년(숙종 28) 왕비에 책봉되었다. 슬하에는 자녀가 없으며 휘호는 정의장목이다. 능은 명릉(明陵)의 오른쪽에 정함으로써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과 더불어 동원이강을 이루고 있다. 인원왕후는 평소에 숙종의 명릉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였으므로 미리 명릉에서 400보 떨어진 언덕에 자리를 잡아 놓았는데, 따로 정자각을 세우자면 넓은 소나무 숲이 벌채되어야 할 것을 근심하여 영조가 현 위치에 정하여 명릉과 한 정자각에 봉사를 받게 했던 것이다.
명릉은 조선의 능제 상 한 시기를 이루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숙종은 일찍이 재위 24년에 노산군과 그 비의 무덤 장릉, 사릉을 봉함에 간소하고 자그마한 후릉의 능상석물양식을 따를 것을 명하였더니 인현왕후 국상에도 능상석물의 제도를 일체 후릉제를 따라 간략하게 하도록 명하여 차후 법규로 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일체 석물의 척수를 줄여 석인은 등신대, 석수는 실물대에 가깝도록 왜소하게 하였고 부장품도 많이 줄였다. 그리하여 명릉제도는『속오례』의 산릉의 골자가 되었고 조선후기 치장의 근간이 된 상례보편산릉의의 기초를 이루었다.
(5) 홍릉(弘陵)
서오릉의 능 터에 제일 나중에 조성된 것으로 서오릉 내의 위치는 경릉과 창릉 사이에 있으며, 조선 제21대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의 단릉이다. 능은 다른 능의 능역에 비해 매우 높은 곳에 있는 것이 특징이며 정자각, 비각, 또한 규모가 크다.
정성왕후 서씨는 1692년(숙종 18)에 출생하여 1757년(영조 33)에 세상을 떠났다.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딸이다. 1704년(숙종 30)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지고 1720년(경종 1) 세자빈에 책봉된 후 1724년 영조의 즉위와 함께 왕비가 되었다.
영조 33년 춘추 66 세로 별세하였는데 슬하에는 자녀가 없다. 존호는 휘호는 단목장화이다.
영조는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왕비의 행장을 짓는데,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兩殿)을 극진히 모셨으며,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영조 친모 유상궁제적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기록한다.”고 하였다고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왕은 왕후의 능을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려고 허우[오른쪽에 자리를 비워둠]의 제도를 쓰라고 명하여 왕비 능 오른편 정혈에 돌을 ‘+’자로 새겨 묻도록 하였으며 능상석물은 쌍릉을 예상하여 배치하였다. 현재 홍릉 우측의 공간은 바로 이것으로 인해 영조의 능이 동구릉에 자리 잡게 되자 그 자리는 빈 채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능상설의 제도와 양식은 기본적으로 17세기 말 인현왕후 명릉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 한 두 가지 독특한 양식의 변화도 보이고 있어『속오례의』와『국조상례보편』의 제도가 잘 반영되고 있다. 사각의 옥형 옥개식 장명등은 명릉 것에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으며 망주석의 세호는 꼬리가 완연하고『국조상례보편』의 식대로 좌주는 폐형으로 우주는 강형으로 표현하고 있다.
난간석주 주두 양식은 특이하게 원수 아래 부분을 복련엽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석인은 입 양 끝이 추켜져 고졸한 미소를 머금었고 무인의 남바위 같은 투구모양이며 이마에 곡선을 이루고 있는 투구 갓의 선 등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친 무인석의 특징을 잘 따르고 있다.
(6) 희빈 장씨(禧嬪張氏) 묘
경릉 좌측에 있다. 원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있었는데 1970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묘는 단묘의 봉분으로 상석, 묘표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희빈 장씨는 조선 제19대 숙종의 빈이며 제20대 경종의 어머니이다. 출생 시기는 미상이며 1701년(숙종 27)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역관 장현(張炫)의 종질녀로서 어머니의 정부 조사석(趙師錫)과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녀로 입궐하여 왕의 총애를 받아 1686년(숙종 12) 숙원이 되었다. 2년 후 소의로 승격되었으며 왕자 이윤〔경종〕을 낳아 이듬해 이윤(李昀)이 원자로 책봉됨으로써 희빈으로 승격되고, 동시에 상당한 실권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해 기사환국으로 원자의 책봉에 반대한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남인에 의해 패배당함으로써 정권이 남인에게 넘어가자 이들의 지지를 받아 1690년(숙종 16) 드디어 원자가 세자로 책봉됨과 함께 앞서 폐위된 인현왕후 민씨의 뒤를 이어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4 년 뒤 김춘택(金春澤) 등의 서인이 일으킨 민비복위운동으로 갑술옥사가 일어나 남인이 제거되고 민비가 복위됨으로써 희빈으로 격하되었다. 그 후 정세는 희빈을 포함한 남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민비의 폐출에 잘못됨 점이 있었다는 것과 이미 세상을 떠난 민비의 죽음은 희빈 장씨가 궁인, 무녀들과 함께 저주했기 때문이라는 무고의 옥을 희빈 장씨에게 연루시켜 결국 사사하였다.
그런데 10여 년 간 희빈 장씨를 둘러싼 정치적 소용돌이를 겪은 숙종은 그 후 후궁 가운데서 직접 왕비로 승격되는 일을 없애는 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7) 순창원(順昌園)
서오릉 경내의 경릉 왼쪽 언덕에 있다. 조선 제13대 명종의 장남인 순회세자와 배 공회빈 윤씨의 묘가 합장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고 재실을 새롭게 보수하였다. 원래는 순회묘라고 하였던 것을 순창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순회세자는 1551년(명종 6)에 출생하여 1563년(명종 18)에 사망하였다. 이름은 이부(李暊)이며, 처음 이름은 이곤령(李堒齡) 자는 중명(重名)으로 어머니는 인순왕후 심씨이다. 1557년(명종 12) 세자로 봉해지고 참판 윤옥(尹玉)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렸으나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순회(順懷).
(8) 수경원(綬慶園)
조선 제 21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묘이다. 원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에 있었으나 1969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봉분은 단분으로 조선조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오석의 묘비가 대좌 옥개를 갖추고 세워져 있으며 봉분 주위에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영빈 이씨는 영조의 후궁으로서 출생 시기는 불확실하며 1764년(영조 40) 7월에 사망하였다. 1735년(동왕 11)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조를 낳아 빈에 봉해졌으며 그밖에 화평옹주, 화완옹주 등 딸 다섯을 낳았다. 묘호는 의열궁(義烈宮)이라 하여 백운동(白雲洞)에 건립하였으나 1788년(정조 12) 희궁(宣禧宮)으로 개칭하였으며 융희 2년인 1908년에 역대 제왕의 신판을 봉안한 칠궁(七宮)의 하나인 경우궁(景祐宮) 내로 이안하였다.
2) 정인사지(正因寺址)
서오릉 경내 동쪽에 있다. 조선 제7대 1457년(세조 3) 20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뜬 세자 이장(李璋)의 영혼을 위로코자 건립한 사찰이다. 원로대신이며 대학자들에 이해 지어진 5편의 시가 문헌에 전하고 있다.(제7권 자료집, 고양관련문헌자료편 참조)
3) 용두동 회화나무 (제2권 문화유산, 동지정 보호수 참조)
4) 순평군 이군생(李群生) 묘
고양시청에서 서울 은평구 갈현동 방향으로 이어진 55번 도로 서오릉부근인 용두동에 있으며 좌우에 배위 없이 단분으로 되어 있다. 봉분의 앞면은 화강암 재질의 대석이 축조되어 있다. 2단의 대석 높이는 80㎝이며 측면과 후면에는 축조되어 있지 않다. 사다리꼴 모양의 대석 앞으로는 상석이 배치되어 있고 그 전면에는 총 높이 171㎝인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에는 모두 4개의 화창이 만들어져 있다. 기단부와 옥개석이 비율이 알맞아 규모는 작으나 매우 안정감이 돋보인다. 옥개석의 상륜부 부분에는 3줄의 홈이 조각되어 있다. 장명등의 우측으로는 높이 161㎝, 폭 61㎝, 두께 21㎝ 규모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기단과 비두가 갖추어져 있다. 묘비의 전면에는 “순평군 안민공지묘(順平君 安閔公之墓)”라 새겨진 묘비가 있으나 비문의 마모가 심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봉분의 좌우에는 높이 168㎝ 규모의 문인석 2구가 배치되어 있는데 조선조 전기의 투박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문인석의 얼굴 부분은 훼손되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홀을 쥔 관의는 5줄로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순평군은 조선 제 2대 정종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숙의 기씨이다. 시호는 충절공(忠節公).
5) 명숙 공주(明淑公主) 묘
용두동에서 향동동으로 이어진 59번 도로 좌측의 대능골 마을에 있다.
봉분은 원형인데 둘레석이나 호석 등은 보이지 않으며 높이 186㎝, 둘레 22m에 이르는 큰 봉분 우측으로는 대좌와 비신으로 이루어진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의 재질은 화강석인데 총 높이 142㎝, 넓이 53㎝, 두께 22㎝의 규모이다. 앞면에는 “명숙공주지묘(明淑公主之墓”라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음기가 있는데 비문은 대광숭록대부 영의정 겸규장각검교제학 채제공(蔡濟恭)이 짓고 의금부도사 오염(吳琰)이 썼다.
봉분의 앞으로는 대리석 재질의 상석이 있으며 그 앞쪽 1m 지점에는 화창이 모두 2개인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은 넓은 기단위에 화사석, 오개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 196㎝의 규모이다. 장명등의 좌우에는 총 높이 204㎝, 가슴높이 둘레 187㎝ 규모인 문인석 이 2구가 있다.
문인석은 조선조 전기의 양식을 하고 있는데 보기 드문 석물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문인석의 얼굴 부분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특히 양쪽 볼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입부분도 앞으로 돌출되어 있다. 또 코 밑의 수염은 길게 이어져 목 부분까지 이어져 있는데 매우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양손을 모아 쥔 홀은 턱에서 10㎝ 가량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좌우 측면에서부터 시작된 옷의 주름은 모두 7개로 바람에 움직이듯 아래로 흘러내려져 있다.
명숙공주는 추존된 덕종(제 7대 세조의 원자)의 첫째 딸이며 어머니는 소혜왕후 한씨이다. 따라서 제 9대 성종의 누이가 되며, 당양군 홍상(洪常:세조 3~중종 8)에게 출가하였다.
6) 수국사
서오릉 명릉(明陵) 안산(案山)에 있었으나, 지금은 옛 흔적만 남아있다.
제14절. 벽제동(碧蹄洞)
1) 벽제동 느티나무(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지정 보호수 참조)
2) 회원군 이윤(李倫) 묘
벽제동 목암 마을 39번 국도 군부대 입구에 있다. 단분으로 된 봉분의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록석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 문인석이 있다. 이 중 문인석은 높이가 166㎝인데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상석의 오른쪽에 화강석 재질의 묘비가 1기 있는데 그 규모는 높이 142㎝, 두께 21벽㎝, 폭 54㎝의 규모이다. 묘비의 앞면에는 “조선국 왕손 회원군 증시정간공 윤지묘 함풍군부인 이씨 부좌(朝鮮國王孫檜原君贈諡貞簡公倫之墓咸豊君夫人李氏祔左)라 씌어 있다. 묘소 입구에 세워져 있는 묘갈은 옥개석과 기단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 총 높이 225㎝, 두께 21㎝, 폭 59㎝의 규모이다. 이 묘의 비문은 자손인 이홍립(李泓立)이 쓰고 조문명(趙文命)이 지었으며 두전(頭篆)은 이도(李木免)가 썼다.
묘갈의 앞면에는 “숭정기원후 재임자 4월(崇禎紀元後 再壬子 四月)”에 세운 연대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뒤편으로는 “건위인곤위양좌(乾位寅坤位良座)”라 표기되어 있다.
회원군(1636:인조 14~1731:영조 7)의 본관은 전주, 자는 여명(汝明), 할아버지는 선조(宣祖) 임금이고, 아버지는 영성군 이계(李㻑)이며, 어머니는 증우찬성 황이중(黃履中)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1655년(효종 6) 종실시강에서 입격하여 가자(加資)되었고, 오랫동안 사옹원과 종부시를 주관하였다. 1667년(현종 8) 사은 겸진주사로 연경에 다녀온 뒤 1675년(숙종 1)과 1683년 다시 두 차례나 사신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훌륭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였으며, 그 뒤 종친부 유사당상에 올라 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고, 96세까지 장수하였다.
효종․현종․숙종․경종 및 영조에 이르기까지 5대를 섬겨 역대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는데, 효종의 장례 때에는 대존관이 되었고, 1666년 대비가 온양 온천으로 행차할 때 별운검으로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1695년 덕흥대원군의 봉사손으로 지명되었다. 특히, 영조의 총애가 깊어, 그가 죽자 구재(관을 짜는 목재)가 하사되었으며, 예관을 보내 치제하기도 하였다. 회원군에 봉하여졌으며, 시호는 정간(貞簡). 11세 때 죽은 아들 이규령(李奎㱓)을 위해 세운 묘표는 민속학적 가치가 크다.
3) 이규령(李奎㱓) 묘
벽제동 회원군 묘 맞은 편 큰 길 건너 산 아래 자곽에 있다. 회원군의 아들로서 11세 때 죽었다. 특히 묘표는 높이 99㎝로서 묘석 전체가 하나의 돌을 깎아 만든 양주 애석이다. 비문은 회원군이 지었는데, 여기에는 죽은 아들을 위해 제사 지낼 자산인 토지 매입, 사들인 노비, 제사 지낼 날짜, 제수품목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4) 해흥군(海興君) 묘
목암동에 있다. 해흥군은 조선 제 4대 세종의 증손인 영성군 이경(李敬)의 증손으로, 1700년(숙종 26) 1월 5일에 출생하여 1762년(영조 38) 3월 18일에 사망하였다. 자는 백수(伯壽), 현록대부에 올랐으며 연경(燕京)에 사절로 다녀왔다. 시호는 정효(貞孝).
5) 영성군(寧城君) 이계(李王季) 묘
고양동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이어진 39번 국도 우측 벽제동 목암 마을에 있다. 현재 봉분은 단분으로 화강석의 병풍석이 둘러쳐져 있는데 봉분의 총 높이는 192㎝의 규모이다. 봉분의 뒤편에는 성이 둘러쳐져 있으며 상석, 혼유석 향로석이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혼유석 뒤편으로는 높이 190㎝, 두께 24㎝, 폭 67㎝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의 앞면에는 “회산군부인 황씨 부좌, 조선국 왕자 영성군계지묘(檜散郡夫人 黃氏祔左 朝鮮國王子 寧城君王季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향로석의 좌, 우에는 높이 103㎝의 동자상이 세워져 있다. 이 동자상은 전체적으로 조각 수법과 균형미가 빼어난 수작이다. 동자상의 앞쪽으로는 높이 185㎝ 가슴 높이 180㎝의 문인석 2구가 세워져 있다. 문인석 옆으로 망주석도 있어 비교적 많은 수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영성군은 조선 제 14대 선조의 제13자로, 1606년(선조 36) 12월 24일에 출생하여 1649년(인조 즉위년) 9월 19일에 사망하였다. 이름은 이계(李王季)이며, 어머니는 온빈 한씨이다. 증우찬성 황비중(黃泌中)의 딸인 창원 황씨(1644년 6월 8일 사망)와 결혼하였다.
6) 성예원(成禮元) 묘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연산군 4년에 출생하였으나, 그 사망 시기는 불확실하다. 자는 원지(元之),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선조 때 공신인 창산군 성수익(成壽益)의 아버지로서, 장흥고령을 지냈다. 사후인 1572년(선조 5)에 이조 참판 겸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어 창성군에 봉해졌다.
7) 성수익(成壽益) 묘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28년(중종 23)에 출생하여 1598년(선조 31)에 사망하였다. 자는 덕구(德久), 호는 칠봉(七峯)으로 본관은 창녕이며 성예원(成禮元)의 아들이다. 1552년(명종 7) 생원이 되고 경릉 참봉과 돈녕부 봉사를 역임한 뒤, 1559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어천도 찰방, 회양 부사 등을 거쳐 예조 참판이 되었다. 일찍이 개성부 경력으로 있을 때,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옛 집터에 사당을 세우고, 화담 서경덕(徐敬德)을 함께 제향하였다. 또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는 예부를 통해 종계변무를 하여 왕실의 전통성을 강조하였으며, 1590년(선조 23)에 광국원종공신이 되었다. 5년 뒤에 창산군에 봉해져 개성부 유수가 되었으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부총관으로 왕비를 수안까지 호종했는데, 도중에 과로로 병을 얻어 이듬해 해주에서 죽었다.
8) 성진선(成晋善) 묘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66년(명종 21)에 출생하였으나, 사망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자는 칙행(則行), 호는 연강(烟江)이다. 예조․형조․공조․병조의 좌랑을 지낸 뒤 외직으로 나갔다. 해주판관에 제수되었다.
제15절 선유동(仙游洞)
1) 이탕(李宕) 묘
봉분 앞에는 1623년(인조 1)에 건립한 묘갈이 있는데 크기가 폭 58cm, 두께 17cm, 높이 142cm이며 비문에는 “명묘조학행 동몽교관 두직서령 증영의정 오산부원군 이공탕묘(明廟朝學行童蒙敎官杜稷署令贈領議政鰲山府院君李公宕墓)”라 새겨있다.
이탕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07년(중종 2) 10월 5일에 출생하여 1584년(선조 17) 8월 26일에 사망하였다. 자는 방옹(放翁)이며 호는 오재(悟齋), 본관은 경주로 사유재(四留齋) 이정암(李廷馣)과 지퇴당(知退堂) 이정형(李廷馨)의 아버지이다. 1534년(중종 29) 진사가 되고 이어 동몽교관, 사직서령 등을 역임하였다. 두 아들의 공신책록으로 인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2) 이정형(李廷馨) 묘
묘는 증정부인 파평 윤씨와 삼위 각묘이며 앞에 묘표가 있다. 또한 묘아래 10m 지점에 폭 76cm, 두께 44cm, 높이 216cm의 오석으로 된 이수 귀부의 신도비가 있는데, 종후학 이종선(李鍾宣)이 비문을 짓고 이성우(李性雨)가 쓰고 전하였다.
3) 숙원 남양 홍씨(淑媛南陽洪氏) 묘
이 묘는 단분으로 되어 있다. 봉분의 주위로 길이 32m의 긴 사성이 둘러쳐져 있으며 봉분에 병풍석이나 둘레석은 없다.
봉분 앞으로는 높이 142㎝, 폭 44㎝, 두께 15㎝ 규모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 묘비는 대좌, 비신, 이수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비신의 재질은 대리석이다. 비의 앞면에는 숙원남양홍씨지묘(淑媛南陽洪氏之墓)라고 적혀 있다. 비의 뒤편에는 운문이 새겨져 있으며, 비의 앞으로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향로석 3m 앞쪽에는 높이 158㎝의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의 화창은 모두 4개인데 옥개석이 매우 넓고 큰 것이 특징이다. 대좌의 아래 부분에는 연화무늬가 사면에 둘러쳐 있다. 또한 화사석에도 운문 무늬가 새겨져 있다. 봉분 좌, 우에 위치하고 있는 문인석은 손가락의 각 부분에 세밀한 조각수법이 눈에 띈다. 특히 손에 모아 쥔 홀과 턱에서 나온 곡선의 수염이 서로 이어져 합쳐 있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이다.
숙원 남양 홍씨는 묘소 좌측에 있는 해안군 이희(李山希)의 어머니이다.
4) 해안군 이희(李山希)의 묘
이 묘는 선유동 월촌 마을로 오르는 도로 좌측에 진주 유씨 및 계배 거창 신씨의 묘와 3위가 함께 합부되어 있다. 봉분은 화강석의 둘레석이 둘러쳐져 있는데 총 높이는 2.5m에 이른다. 중앙의 해안군 봉분 앞에는 화강석 재질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앞면의 비문에는 “진산군부인 유씨 부좌 군부인 거창신씨 부좌 왕자 해안군 정희공지묘(晋山君夫人 柳氏 祔左 郡夫人 居昌愼氏 祔左 王子 海安君 靖僖公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묘비의 앞으로는 상석, 향로석, 혼유석이 배치되어 있다. 또 상석의 4m 앞쪽에 있는 장명등은 총 높이 178㎝의 규모이다. 장명등의 화창은 모두 4개인데 옥개석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 구조이다. 특히 옥개석의 무늬와 균형미가 뛰어난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 장명등의 좌, 우에 세워져 있는 문인석은 총 높이 193㎝의 규모로 조선조 중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문인석의 얼굴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이 좌우로 올라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양손으로 모아 쥔 홀은 턱에서 0.5㎝정도 떨어져 있으며 손가락도 매우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문인석은 풍만하고 넉넉하여 매우 안정감이 든다. 좌, 우 측면에 부드러운 옷의 곡선 또한 이 문인석의 문화재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묘소 아래 100m 지점에는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신도비가 있는데 총 높이 200㎝의 규모이다. 비문은 홍섬(洪暹)이 지은 것을 이영호(李永鎬)가 쓰고 전(篆)은 이원기(李元基)가 하였다.
해안군 이희는 조선조 중기의 왕손으로 1511년(중종 6) 6월 15일에 출생하여 1574년(선조 7) 8월 4일에 사망하였다. 중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숙의 홍씨이다. 정사공신에 녹훈되고 해안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희(靖僖).
5) 이직(李稷) 묘
정경부인 양천 허씨와 합폄되어 있다. 봉분은 사각묘로서 “영의정 문경공 형재 이선생지묘 배 정경부인 양천허씨부좌(領議政文景公亨齋李先生之墓配貞敬夫人陽川許氏祔左)”라 기록된 묘표는 1975년 4월 개수된 것으로 표문은 김영한(金寗漢)이 짓고 후손 이진락(李晋洛)이 쓴 것이다. 상석 1, 장명등1, 문인석 4구가 있으며 원래 여주 북성산 초장지에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묘아래 20m 지점에 1975년 8월에 입석된 신도비는 오석의 대형으로 이수에 기단을 갖춘 것으로 손자인 이응협이 1688년에 지은 것을 1975년 입석 시에 후손 이진락(李晋洛)이 쓴 것이다.
이직(李稷)은 고려․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1377년(공민왕 11) 16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경순부 주부에 보직되었으며, 밀직사 우부대언을 거쳐 예문관 제학을 지냈다. 1392년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헌하여 지신사에 올라 개국공신 3등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도승지 중추원 학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7년(태조 6) 대사헌을 역임하고 1399년(정종 1)에는 중추원사로 서북면 도순문찰리사를 겸임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 이어 참찬문하부사, 삼사좌사․지의정부사를 역임하였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 대제학을 거쳐 판사평부사로서 왕명에 의해 설치된 주자소를 주관하여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주조하였다. 1405년(태종 5) 6조의 편제가 완성되자 처음으로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그 후 동북면 도순문찰리사 영흥 부윤을 거쳐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임하고, 이듬해 다시 이조 판서 겸판의용순금사사가 되었다. 1410년(태종 10)에는 천릉도감제조로서 덕릉〔목조〕 안릉〔安陵:목조비〕 등을 함흥으로 옮겼으며 2년 뒤 성산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422년(세종 4)에 영의정에 오르고 등극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426년 좌의정에 전직되고 이듬해 사직하였다. 성주의 안봉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景). 저서로는『형재시집(亨齋詩集)』이 있다.
6) 이사원(李師元) 묘
이 묘는 선유동 불미지 마을에 배 정경부인 배천 조씨와 하나의 봉분으로 있다. 커다란 봉분의 앞으로는 가운데가 3단, 그 주변은 2단으로 된 화강석 기단이 있다. 그 앞쪽 좌우에 커다란 봉분의 앞으로는 가운데가 3단, 그 주변은 2단으로 된 화강석 기단이 있다. 그 앞쪽 좌우에는 높이 122cm, 폭 42cm, 두께 18cm의 묘비(墓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의 앞면에는 ‘중추원부사 이공지묘(中樞院副使 李公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우측의 묘비 또한 규격은 비슷한데 마모가 심하여 비문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좌측 묘비 뒤편으로는 비신이 오석으로 된 1983년 최근에 건립한 묘갈이 세워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동지중추부사 이공사원지묘 배 정경부인 백천조씨 합둔(同知中樞府事李公師元之墓配貞敬夫人白川趙氏合窀)’이라 기록되어 있다. 모두 2기의 묘비 앞에는 상석, 혼유석, 고석, 향로석이 나란히 있다. 봉분 정면으로는 높이 156cm의 장명등이 있는데 화창은 2개이다. 다른 장명등에 비하여 화사석이나 기단에 어떠한 무늬도 보이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봉분의 좌․우로는 모두 4구의 문인석이 있는데 앞쪽의 것은 높이 202cm, 뒤쪽의 것은 181cm의 규모이다. 모두 조선조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묘갈의 비문에 의하면 이사원의 본관은 성주이며 세종 조에 사헌부 지평, 장령 등을 지낸 뒤 형조 참의, 이조 참의, 황해도 관찰사, 첨지중추 등을 지냈다. 단종 조에 공조 참판, 중추원부사 등을 역임했다. 묘 바로 아래에는 1982년에 세운 이맹창(李孟昌) 세계위령단(世系慰靈壇)이 있다.
7)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묘
이준(1441:세종 23~1479:성종 10)의 자는 자청(子淸), 아버지는 세종의 4남 임영대군 이곡(李谷)이다. 1458년(세조 4)에 구성정에 봉해지고 이어 구성윤으로 봉해졌다. 1463년에 구성군으로 봉하여졌으며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전했기 때문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나이 27세에 함경․강원․평안․황해의 도병마도총사에 임명되어 이를 토평한 공로로 적개공신 1등에 훈봉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어 일품 종실이 되었다.
1469년(예종1) 5월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2등에 훈봉되었다. 이듬해에 아버지 임영대군의 상을 당하여 영의정직을 내어놓았다. 1470년(성종 1) 정월 나이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정인지(鄭麟趾) 등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하고 경상도 영해로 귀양 갔으나, 왕족이었으므로 가산은 적몰 당하지는 않았으며 나라에서 곡식을 지급하였다. 귀양 간 지 10년 만에 배소에서 죽었다.
성종은 미두 10석, 종이 40권을 하사하고 장례를 영해 현지에서 정중히 치르도록 하였다. 1687년(숙종 13) 6월 김수항(金壽恒)이 구성군이 죄를 입은 것은 권맹희(權孟禧) 등의 난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신원되고 다시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
제16절. 고양동(高陽洞)
1) 고양향교(高陽鄕校)(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문화재자료편 참조)
2) 고양동 은행나무(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지정보호수편 참조)
3) 벽제관지(碧蹄館址)(제2권 문화유산, 국가 사적편 참조)
4) 고양동 송덕비군(頌德碑群) 7기(제7권 자료집, 금석문편 참조)
고양동 동사무소 앞 벽제관지 부근에 특별한 비각이나 보호난간도 없이 도로 옆에 7기가 한 줄로 서있다. 이 비들은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고양군수 및 관찰사 면장들의 치적을 기리기 위한 송덕비이다.
5)노천명 묘
장명산 정상부에 있는데 도로에서 11cm 이상 떨어져 있다. 화강암 재질의 4각 봉분으로 되어있으며, 묘 우측에는 “베로니카 노천명지묘”라는 시비가 있다. 비의 뒷면에는 “눈물어린 얼굴을 돌이키고 나는 이곳을 떠나련다.”라는 1951년의 작품이 새겨져 있다.
제17절. 대자동(大慈洞)
1) 우산군(牛山君) 이종(李踵) 묘
쌍궁말 연산군 금표비 뒤 300m 지점에 있다. 좌측에 배 문성군부인(文城郡 夫人) 문화 유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는데 봉분의 석물은 상석 1기, 문인석 2구, 장명등 1기가 있는데 장명등은 최근에 세웠다. 1964년 6월에 건립한 오석의 묘표는 갓 형으로 크기가 폭 43cm, 두께 20cm, 높이 130cm이다. 동쪽에 1990년대에 세운 대형 비석이 있다.
우산군은 조선 제 3대 태종의 아들인 근령군 이농(李襛)의 둘째 아들이며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2) 영인군(寧仁君) 이순(李揗) 묘
이 묘는 대자동 간촌 마을 삼거리에 배 하동 정씨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의 주위로는 총 30m에 이르는 사성이 둘러쳐져 있으며 봉분 자체의 높이는 180㎝, 둘레는 16㎝이다. 봉분 앞으로는 높이 118㎝, 폭 50㎝, 두께 17㎝의 묘비가 건립되어 있다. 이 묘비는 1529년(중종 24)에 세워진 것으로 비두 부분에 구름무늬와 조류가 조각되어 있다. 대리석 재질의 이 묘비는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큰 훼손 없이 문양이 남아 있어 그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영인군 묘 앞으로는 높이 172㎝ 규모의 문인석이 있는데 조선조 전기 모습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영인군은 1448년(세종 30)에 출생하여 1505년(연산군 11)에 사망하였다. 제3대 태종의 증손으로, 옥산군 이제(李蹄)의 둘째아들이다. 이름은 이순(李揗)이며 자는 예옹(禮翁)이다.
1989년에는 17대손 이종근(李鍾根)이 짓고 종(從) 14대손 이학용(李學庸)이 글씨를 써서 세운‘영인군 묘위석 조성비(寧仁君 墓圍石 助成碑)’가 세워졌다. 이 아래에는 상석과 문인석을 갖춘 묘가 있는데 비가 없어 누군지 알 수 없다. 그 아래에는 야성군(野城君) 이말손(李末孫) 양위와, 창선대부(彰善大夫) 해운정(海雲正) 이 집(李 諿) 양위의 묘가 없는 단(壇)만 2기가 세워져 있다.
3) 무풍군(茂豊君) 이총(李愡) 묘
고양시 대자동 간촌 마을과 고읍 마을 사이 쌍궁말에 있는데, 양쪽에 배 증 현부인 평양조씨와 계배 현부인 의령남씨와 합장되어 있다. 묘소는 둘레석이 쳐진 봉분을 중심으로 묘비, 상석, 향로석, 문인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이 중 묘비 앞쪽에는 가로 171㎝, 세로 101㎝ 규모의 상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다른 묘에서 볼 수 없는 꽃무늬가 3면에 둘러쳐 조각되어 있다. 장명등 우측에는 서호주인의 묘갈이 있다.
이 묘갈은 본래 예전에 세운 것인데 현재 원비는 없고 1964년에 건립된 신비(新碑)만이 남아 있다. 비문은 홍유손이 찬하였다.
무풍군 이총은 조선 중기의 종실이다. 자는 백원(百源),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구로주인(鷗鷺主人)․월창(月銹)으로 태종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근녕군이고, 아버지는 우산군이며, 부인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의 딸이다. 유년에 무풍부정에 제수되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일손(金馹孫)․강경서(姜景敍) 등과 교유하였으며,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아버지를 비롯하여 형인 한산정 이정(李挺), 화원부정 이간(李揀), 청양부정 이건(李岬), 금성부정 이변(李逗), 동생인 이간(李杆) 등과 함께 7부자가 죽임을 당하였다. 남효온․홍유손 등과 함께 청담파의 중심인물로서 시문․음률․서예에 뛰어났으며, 양화진에 집을 짓고 고기잡이로 유유자적하였다. 시조(時調)가 약간이 전한다. 1506년 무풍도정에 추증되었으며, 1705년 정려를 받았고, 1738년 무풍군에 가증,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
무풍군 이총의 묘 아래에 이하(李河)와 이한(李漢)의 실전묘(失傳墓) 설단(設壇)이 있다. 그 아래에는 이영신(李永愼) 묘가 배 의인 순흥 안씨와 합폄되어 있다.
4) 이계(李溪) 묘
쌍궁말 금표 뒤 50m 지점에 무풍군 이총의 묘 아래에 배 평산 신씨, 문화 유씨와 합폄되어 있다.
5) 이호(李湖) 묘
쌍궁말 연산군 금표비 뒤 300m지점 이종(李踵) 묘아래 배 신부인 파평 윤씨와 쌍분으로 되어있다. 묘갈과 상석은 오래되었으며, 둘레석과 망주석은 새로 세웠다.
6) 용성군 이원(李援) 묘
쌍궁말 연산군 금표비 뒤 300m지점 이호 묘 옆에 배 증정경부인 평산 신씨와 합폄해 있는데 문인석 2구는 오래 되었으며, 상석, 혼유석, 향로석, 장명등, 둘레석은 새로 세웠다. 오래된 망주석 대좌 하나가 동편에 방치되어 있다.
7) 시안군(始安君) 이탁(李擢) 묘
대자동 간촌 마을 삼거리에 있으며, 배 선성현부인 파평 윤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의 둘레는 26m이며 석물로는 상석 1기 장명등 1기와 문인석 2구가 있다. 또 중종 26년(1531)에 건립된 묘비는 크기가 폭 50cm, 두께 18cm, 높이 140cm이다.
숭정 기원후 재신미(1751) 2월 이학용이 글을 짓고 쓴 비가 새로 세워져 있다. 그 아래에는 2기의 묘가 있는데 비가 없으며, 그 아래는 명선대부(明善大夫) 비안정(庇安正) 이윤지(李淪之)와 계배 신부인(愼夫人) 장수 황씨의 묘가 합분되어 있다.
시안군은 조선 제 3대 태종의 아들인 근령군의 손자이다. 1446년(세조 28)에 출생하여 1509년(중종 4) 8월 28일에 사망하였다. 이름은 이탁(李擢)이며 자는 계정(季精). 세조 15년에 중의대부가 되고 1481년(성종 12)에 시안군에 봉해졌다. 사서삼경에 능통하여 증강(增講)에 합격하였다.
8) 금천군(錦川君) 이변(李犿) 묘
대자동 쌍궁말 연산군 금표비 뒤 200m 지점에 있으며 좌측에 배 정부인 고령 신씨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봉분의 석물로는 상석 1기와 문인석 2구가 있다. 그리고 건립연대를 알 수 없는 소형의 묘갈은 갓 형으로 크기가 폭 39cm, 두께 14cm, 높이 85cm이며 묘갈의 비신은 중간이 갈라져 시멘트로 이어놓은 흔적이 역력하다. 1969년 2월에 건립된 오석의 묘표는 역시 갓 형으로 크기가 폭 54cm, 두께 24cm, 높이 145cm이다.
금천군은 조선 제 9대 성종의 증손으로 안남군 이수련(李壽鍊)의 아들이다. 이름은 이보(李俌), 시호는 효의(孝毅).
9) 온녕군(溫寧君) 이정(李裎) 묘
1번 국도인 통일로에서 고양동 방향으로 이어진 67번 도로 주변인 간촌 마을에 있으며 배 순천 박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다.
묘는 커다란 사성을 봉분 뒤쪽에 만들어 묘소 전체를 둘러치게 하였다. 봉분에는 최근에 화강석으로 만든 둘레석이 축조되었으며 봉분의 정면 앞쪽으로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우측으로는 화강석 재질의 묘갈이 세워져 있는데, 대좌를 포함하여 총높이 138㎝이다. 묘비의 앞면에는 “온령군 증시양혜공정지묘(溫寧君 贈諡良惠公裎之墓)”라 표기되어 있다. 또 좌측으로도 그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묘비가 있는데 총 높이는 136㎝로 비문에는 “유명조선국 온녕군 박씨지묘(有明朝鮮國 溫寧君 朴氏之墓)”라 표기되어 있다. 이 2기의 묘비 이외에도 오석으로 만든 신묘비가 봉분 우측에 세워져 있다. 문인석은 봉분 앞쪽 좌우에 각각 2구씩 총 4구가 배치되어 있다. 좌측에 있는 2구의 문인석 중 묘소 앞쪽의 것이 조금 작은데 높이는 196㎝이다. 눈동자가 크고 투박하며 조각 수법이 단순한 것으로 보아 조선조 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또 밖의 문인석은 총 높이 203㎝로 안쪽의 문인석에 비해 그 규모가 조금 크다. 두 문인석은 조선조의 대표적인 석물이라는 점에서 비교 연구해야 할 가치가 높은 석물로 여겨진다. 1988년에 세운 묘비와 장명등이 있다.
온녕군은 조선 제 3대 태종의 셋째 서자로 이름은 이정(李裎)이며 어머니는 후궁 신빈 행씨이다. 시호는 양혜(良惠).
10) 이희열(李希說) 묘
간촌마을 삼거리에 있다. 증 호조판서를 받았으며, 본관은 전주. 배 증정부인 파평 윤씨와 쌍분이며, 상석과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2004년에 세웠다. 이희열은 1538년(중종 33) 무술생이며 묘위에 1499년에 세운 묘갈과 문인석, 상석이 있으며 신부인 김씨와 합폄되어 있다.
11)명선대부 진강부정 이찬(明善大夫 鎭江副正 李撰)․창선대부 안산수 이성(彰善大夫李 安山守 李誠) 제단비
대자동 간촌마을 삼거리에 있으며 진강부정 이찬과 안산수 이성이 나란히 있다.
12)이상규(李尙圭) 묘
대자동 쌍궁말에 있으며 손자 이경흥(李慶興) 묘와 이경흥의 손자 이시동(李時東)의 묘, 이수동(李守東) 묘와 이완성(李完成)의 묘가 한 묘역을 이루고 있다. 이완성은 1907년 생으로 고양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묘비는 모두 1999년에 세웠다.
13)이은(李殷) 묘
쌍궁말 입구 온녕군 사당 뒤에 있다. 비문에는 “성균생원 전주이공의 배의인광산김씨지묘”라고 적혀있으며 좌우의 문인석은 모양이 각각 다르다.
14) 정종(鄭悰)․ 경혜(敬惠)공주 묘
대자골 필리핀참전기념비 뒤편에 있는데 봉분은 현재 공주의 것만 있고 그 옆에 정종은 제단만이 남아 있다. 묘역에는 커다란 사성과 혼유석, 둘레석, 묘비, 상석, 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등이 있으며 망주석은 새로 세운 것이다. 봉분 정면의 우측에는 높이 122㎝, 가로 43㎝, 두께 22㎝의 묘갈이 있는데 앞면에는 “조선국 경혜공주지묘(敬惠公主之墓)”라 표기되어 있으나 뒷면은 마모가 심해 문자를 확인할 수 없다. 문인석은 조선조 초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총 높이가 176㎝에 이른다. 특히 홀이 턱으로부터 56㎝ 가량 떨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얼굴 측면의 면적이 넓다. 문인석 2구의 앞쪽에 있는 장명등은 높이 154㎝, 옥개석의 폭 65㎝의 규모인데 화창은 앞 뒤 2개이다.
정종의 제단은 묘가 없이 공주묘의 우측에 위치해 있는데 공주의 봉분 옆에는 1980년에 세운 “영양위 정종제단(寧陽尉 鄭悰祭壇)”이라 새겨진 비석이 있다. 또 이외에 1980년 4월에 건립한 신도비가 묘아래 200m 지점에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정종(鄭悰)의 출생 연도는 미상이며 1461년(세조 7)에 사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문종의 부마로서 본관은 해주이고 참판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이다. 1450년(세종 32) 문종의 첫째 딸 경혜공주와 결혼하여 영양위에 봉해지고, 단종 초 형조 판서로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1455년 수양대군의 제거를 도모한 금성대군(세종의 6째 아들)과 친교가 있었다 하여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해 수양대군이 즉위하고 문종의 유일한 부마라는 점이 참작되어 양주에 옮겨졌으나, 1456년(세조 2) 사육신 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수원을 거쳐 통진, 광주 등지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461년(세조 7) 승려 성담(性擔) 등과 모반을 꾀했다 하여 능지처참되었다. 그러나 영조 때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헌민(獻愍).
15)청양군(靑陽君) 이건(李揵) 묘
대자골 간촌2로에 있으며 청송 심씨와 쌍분이다. 묘 동편으로 묘갈과 묘비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1996년에 세운 신도비가 서 있다. 기타 석물은 모두 새로 세웠다. 그 옆에 이선손(李善孫)의 묘단이 1999년에 건립되었고 그 위로 이위(李渭)의 묘가 있고 그 위에 이간(李揀)의 묘가 있는데 묘갈과 묘표, 문인석 2구는 오래되었고, 둘레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은 최근에 세웠다.
16) 봉안군(鳳安君) 이봉(李熢) 묘
대자동에 있으며, 배 평양 조씨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1기와 문인석 2구가 있으며, 묘비의 크기는 폭 47cm, 두께 16cm, 높이 120cm이다.
봉안군은 성종의 여섯째아들이고 어머니는 귀인 정씨이며, 부인은 평양 조씨 판관 조성기(趙成紀)의 딸이다. 1504년 연산군은 일찍이 모후 윤씨가 폐위, 사사된 것은 후궁 정씨․엄씨의 소행 때문이라 하여 두 후궁을 손수 때려죽이고 봉안군을 옥에 가두었다가 이천(伊川)에 귀양 보냈다. 이듬해 동복 아우 안양군 이항(李襲)과 함께 사사되었다. 중종반정 뒤 관작이 복구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
17) 경양군(景陽君) 이수환(李壽環) 묘
좌측에 배 명원 현부인 김씨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봉분의 석물로는 문인석 2구와 2위의 묘비가 있는데 용모양의 두부로 각각 폭 50cm, 두께 16cm, 높이 100cm이다.
경양군은 조선 제19대 성종의 제 9남인 이성군의 장남이며 승헌대부에 봉해졌다.
18) 구한(具澣)․숙정(淑靜) 옹주 묘
구한(具澣)은 본관이 능성, 자는 태초(太初)이다. 지중추부사 구치홍(具致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구수영(具壽永)이고, 아버지는 춘천부사 구신경(具信璟)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 이균(李鈞)의 딸이다. 1534년(중종 29) 중종의 딸 숙정옹주와 결혼하여 능창위에 봉해졌다. 명종의 즉위에 많은 공이 있어 1545년(명종 즉위년)에 위사원종공신이 되고, 1555년 사옹원 제조가 되었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문인화에도 뛰어났다. 성품이 온화하고 용모가 단아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깊었으나 35세로 요절하였다. 시호는 공도(恭悼).
숙정옹주는 중종의 다섯째 딸로 어머니는 후궁 숙의 김씨이다.
19) 영평군(寧平君) 이구(李耈) 묘
대자동에 있으며 배 동양 현부인 신씨와 합장되어 있다. 봉분의 석물로는 장명등 1기, 상석 1기와 문인석 2구가 세워져 있다. 묘비의 크기는 폭 55cm, 두께 16cm, 높이 140cm이다. 영평군은 조선 제 9대 성종의 제 9자인 이성군의 손자이다.
20) 김천령(金千齡) 묘
김종순 묘 아래에 배 증 숙부인 완산 이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에는 상석 1기가 있으며 그 밖에 2개의 묘갈이 있다. 구묘갈은 1503년(연산군 9) 12월에 건립되었는데 “홍문관 직제학”등의 글씨가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으며 신묘표는 1521년(중종 16) 5월에 세워진 것으로 표문에는 “증승정원 도승지 행홍문관 직제학겸예문관응교 김공천령지묘 증숙부인 완산이씨부좌”라 되어 있으며, 그 크기는 폭 57cm, 두께 24cm, 높이 137cm이다. 옆에는 1999년에 새로 세운 비가 서 있다. 동쪽으로는 김인령(金引齡)의 묘가 있으며 1999년에 세운 묘비가 있다.
김천령은 조선 초의 문신으로, 1489년(예종 1) 진사가 되고 1495(연산군 원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 후 전적․이조 좌랑을 거쳐 1498년 사가독서 하였다. 부응교가 되면서부터 언사가 재상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 또는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교감으로 성절사를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온 후 장령을 거쳐 부제학에 이르러 병사하였다. 그런데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그의 생전 대간으로 있을 때, 정침(鄭沈)의 가자를 주장한 일로 부관참시 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다.
21) 최원직(崔元直) 묘
대자골 최영 장군 묘 뒤편에 있다. 현재 묘 앞에는 상석 1기와 향로석이 있을 뿐이며 봉분은 고려시대, 조선 초에 쉽게 볼 수 있는 사각묘이다. 봉분의 뒤편으로 약 50m 길이의 곡장이 둘러쳐져 있다. 묘비는 팔작 형태의 옥개석과 비신 그리고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립 시기는 1386년(우왕 12) 12월에 세워진 것이다.
이 묘비는 그의 아들인 최영이 직접 쓰고 세운 것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매우 드문 화강석 묘비이다. 최원직은 고려후기 문신으로 상호군, 예문관, 춘추관사를 지낸 뒤 동원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22) 최영(崔瑩) 묘 (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기념물편 참조)
23) 성억(成抑) 묘
필리핀 참전비 뒤편의 대자동 대자골 마을에 있으며 배위 없이 단분으로 되어 있다. 봉분은 고려말, 조선 초기에 보이는 사각묘로 2단의 기단석이 봉분 전체를 두르고 있다. 기단석은 서로의 끝부분이 엇갈리게 쌓아져 봉분의 흘러내림을 막아주고 있다. 봉분은 가로 394㎝, 세로 530㎝, 높이 202㎝의 규모이다. 상석, 장명등, 문인석이 배치되었고 1995년에 세운 비가 있다.
성억(1386:우왕 12~1448:세종 30)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판도사총랑 성군미(成君美)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당문학 성여완(成汝完)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성연(成珚)이다. 음보로 공정고주부(供正庫主簿)가 되고 감찰․공조 정랑․공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14년(태종 14) 군자시부정․대호군을 거쳐 1416년에 동부대언․좌군사지총제 등을 역임하였다.
1414년에 딸이 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녕대군에게 출가하여 경녕옹주로 봉해지고, 1418년에 성녕대군이 홍역으로 14세에 요절하자, 태종이 애통히 여겨 그의 일족을 공신의 예로 대우하게 하였다. 이로써, 성씨 일문은 조선의 명가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421년(세종 3) 집현전 부제학, 이듬해 전라도 도관찰사․공조 참판, 1427년 우군도총제․공조 판서를 거쳐 1431년 중군도총제가 되었다. 이 때 호군 최성(崔成)과 순청에서 큰 소리로 싸운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외척이라 하여 용서받았다. 1439년 우찬성․중추원를 역임하였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24) 김종순(金從舜) 묘
배 정경부인 남양 홍씨와 합폄하였다. 봉분 주위에는 새로 세운 장명등 1기, 옛 망주석 2기와 문인석 2구가 있다. 그 밖에 2좌의 묘비와 신도비가 있는데, 1957년 윤8월에 건립된 오석의 묘비는 갓 형의 두부로 크기가 폭 42cm, 두께 17cm, 높이 114cm이며 1984년 10월 3일에 건립된 또 하나의 묘비 역시 오석으로 갓 형의 두부에 크기가 폭 76cm, 두께 42cm, 높이 175cm이다. 동쪽 비의 비문에는 “자헌대부 한성판윤 증시 공호공 이조판서 역사 세종 후 6조 청백리 경주김공종순지묘 증 정경부인 남양홍씨 부좌(資憲大夫漢城判尹贈諡恭胡公吏曹判書歷事世宗後六朝淸白吏慶州金公從舜之墓)”라 새겨 있는데, 비문은 17대손 김한경(金漢經)이 짓고, 글씨는 16대손 김정국(金正國)이 썼다. 한편 같은 해 1984년 10월 26일에 건립된 서쪽의 오석비의 크기는 폭 85cm, 두께 45cm, 높이 270cm의 거대한 것으로 “조선국 자헌대부 판한성부윤 녹육조청백리(錄六朝淸白吏)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 예문관춘추관 상감사 세자사(世子師) 시공호김공종순증 정경부인 남양홍씨 부좌”라 새겨져 있으며, 이를 역시 후손 김한경(金漢經)이 짓고 글씨는 김정국(金正國)이 썼다.
묘와 상석 사이에 있는 묘갈은 글씨를 알아보기 어렵게 마모되었으며 2구의 문인석은 다른 묘에서 보기 어려운 키가 작은 140cm정도의 크기이다.
김종순은 조선 초의 문신으로 1405년(태종 5)에 출생하여 1483년(성종 14)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경주이며 1437년(세종 19) 음보로 충훈사승이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그 후 경기도관찰사 한성부윤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비문에도 강조되어 있듯이 세종 이후 6조에 걸쳐 청백리로 녹선 되어 명망을 얻었다. 1467년(예종 1) 자헌대부가 되고 경상도관찰사에 이어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공호(恭胡).
25)김치운(金致運)의 단(壇)
아버지 김종순 묘 아래에 있는데 서쪽으로 김치세(金致世)의 묘와 김치강(金致剛)의 단이 나란히 있다. 김치세의 구비(舊碑)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으며, 이 앞에 있는 문인석은 양측의 크기가 서로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각각의 비는 1999년에 세웠다. 서쪽으로 김종연(金
宗衍)의 묘가 있으며 1984년에 세운 묘비가 있다.
26) 김계성(金季誠)의 단(壇)
대자동 김종순 묘 위쪽에 있다. 묘는 없이 1999년에 세운 단만 상석, 문인석, 망주석과 함께 서 있다.
27)김양신(金亮臣) 묘
김계성 묘 아래에 있으며, 김계성의 9대손이다. 증숙부인 전주 최씨와 합폄되었으며 상석과 오래된 비석,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동편에는 1999년 3월에 세운 신비가 있고 서편에 구비가 있다.
28) 김홍집(金弘集) 묘(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29) 이효지(李孝智) 묘
배 정경부인 문화 유씨의 묘와 합폄하였다. 사각묘로서, 1985년 4월에 건립된 묘비는 한갑수(韓甲洙)가 짓고, 한창교(韓昌敎)가 썼다.
이효지는 조선 초의 문신으로 출생 시기는 미상이며, 1463년(세조 9) 12월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인천, 세조 때 돈녕부사 중추원사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30) 한형윤(韓亨允) 묘
배 정부인 전주 최씨와 합부되어 있다. 원래는 양주시 창동에 있었으나, 1971년 3월 이 곳 대자동 산 54-2로 천묘하였다. 한형윤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470년(성종 1)에 출생하여 1532년(중종 27)에 사망하였다. 자는 신경(信卿)이며, 본관은 청주, 서원부원군 한계미(韓繼美)의 손자이며, 사첨사부정(司瞻寺副正) 한절(韓岊)의 아들이다. 1486년(성종 17)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선전관을 겸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에 다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함으로써 응교․전한을 역임하였다. 1503년(연산군 9) 이조 참의와 참판을 지냈으나 이듬해 연산군 생모 윤씨의 복위 문제로 발생한 갑자사화 때 화를 당해 만경에 유배되었다. 유배 중 이에 앞서 있었던 왕의 실정(失政)을 간하는 내용의 홍문관 상소사건의 주창자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동료들은 유배되어 있는 그가 어차피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하여 그를 상소사건의 주동자로 공술하여 배소에서 소환되어 왔다. 그러나 주창자가 아님이 밝혀져 문외 거주의 처벌을 받았다가 이듬해 다시 투옥되고 결국 1506년(연산군 12)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 나와 2년 후인 1508년(중종 3) 첨지중추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한성부 좌윤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외직을 맡았다. 다시 경기도 관찰사와 형조 판서를 역임하고, 1520년(중종 15)에 공조 판서 특진관을 거쳐 한성판윤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는데,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그가 쓴 글씨가 비문에 남아있는 것으로 파주에 있는 ‘영의정 황보인묘비(領議政皇甫仁墓碑)’와 양주(楊州)의 ‘명숙공 성준묘비(明肅公成俊墓碑)’가 있다. 시호는 효헌(孝憲).
31) 강자평(姜子平) 묘
용복원 마을 뒤편에 있으며 증 정경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되어 있다. 봉분은 길이 30m의 사성 안쪽에 단분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봉분의 높이는 2.4m이다. 봉분 앞으로는 상석, 혼유석, 향로석 등이 있는데 모두 옛 모습 그대로이다. 봉분 우측에 있는 오석의 묘비는 후손들에 의해 새로이 건립되었다.
봉분의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조선조 전반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왜소한 느낌을 주는 큰 키와 투박함이 뚜렷하게 보인다. 묘아래 30m 지점에는 높이 230m, 비신 폭 87㎝, 두께 32㎝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은 이산성이 짓고 박문효가 글씨를 썼다.
강자평(1430-1486)은 조선조 문신으로 자는 국균(國鈞)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강회중(姜淮仲)의 증손으로 1457년(세조 2) 문과에 장원하고 형조 참의, 대사간, 우승지를 역임한 후 1485년 전라도 관찰사, 1487년에 공조 참의가 되었다. 후에 좌찬성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32) 한절(韓岊) 묘
대자동 산 54-2에 있으며 조선시대 문신으로 1451년(문종 1)에 출생하여 1504년(연산군 10)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청주로, 서원부원군 한계미(韓繼美)의 둘째 아들이다. 음보로 봉사직장이 되고 강원도사․풍덕군수․사첨시 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자헌대부에 봉해지고 이조 판서 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33) 강홍중(姜弘重) 묘
묘 앞에는 1670년(현종 11) 9월에 세운 오석의 폭 78cm, 두께 26cm, 높이 190cm의 옥개석의 신도비가 있다. “증판서 행관찰사 강공신도비명(贈判書行觀察使姜公神道碑銘)”이라 새겨진 비문은 정두경(鄭斗卿)이 짓고 이정영(李正英)이 비문과 전액(篆額)을 썼다.
강홍중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577년(선조 10)에 출생하여 1642년(인조 20)에 사망하였다. 자는 임보(任甫), 호는 도재(道材), 본관은 진주(晋州)로 승지 강정(姜綎)의 아들이다. 당대 석학이었던 선헌(旋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사마시를 거쳐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삼사의 여러 벼슬을 지내고 육조의 낭관․통례를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문사랑으로 있으면서 광해군 때 권력을 남용했던 대북파를 다스렸다. 승문원 판교를 지낸 뒤 회담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군자감정으로 화포술을 전하였다. 그 후 강원도 관찰사, 연안 부사 도총부총관 청송 부사 동지의금부사 성천 부사 등의 외직에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34) 굴씨(屈氏) 묘
이회(李檜: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의 묘 왼쪽기슭에 있다.
굴씨는 중국 명나라 궁녀로서 남경 사람이다. 명나라의 멸망 이후 1636년 병자호란으로 동생 봉림대군(후의 효종)과 함께 인질로 청나라 심양에 간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같이 와 우리나라 왕실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굴씨가 죽자 경안군의 장남 임창군 이혼(李焜)은 묘지문을 지어 주었는데 후에 이곳을 지나던 녹사(綠事) 김주증(金疇曾)의 시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주위에 펄럭이는 나뭇잎은 그대의 비단치마와 같고, 葉似羅裙花似鈿
방그레 웃고 있는 풀꽃은 그대의 비녀와 같구나. 斷原治玉幾經年
이 언덕에 꽃다운 그대를 묻은 지가 몇 해가 되는고, 가히 슬프도다! 可憐寒食淸明節
한식 청명절에, 오직 그대에게 술 한 잔 전해볼까 惟明宮娥送酒錢
35)김양신(金亮臣) 묘
김계성(金季誠)의 묘 아래에 있으며, 김계성의 9대손이다. 증숙부인 전주 최씨와 합폄되었으며 상석과 고비(古碑),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동편에는 1999년 3월에 세운 신비가 있고 서편에 구비가 있다.
36) 김주신(金柱臣) 묘 (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기념물편 참조)
37) 정창징(鄭昌徵) 묘
고읍 마을에 배 정경부인 남양 홍씨의 묘와 합장해 있다. 봉분의 주위로 사성은 보이지 않는다. 봉분 앞에 있는 화강석 재질의 묘비는 높이 140㎝, 폭 56㎝, 두께 20㎝의 규모이다. 묘표 뒷면의 음기는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그 좌우에 높이 74㎝의 문인석 2구와 154cm의 문인석 2구가 있다. 문인석은 작은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얼굴 부분이 앞으로 돌출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 문인석은 넉넉한 느낌을 주는 석물로서 얼굴과 머리 부분의 조각이 매우 화려하다. 또 머리의 관모는 팔각으로 나뉘어져 관의 각 부분에 세밀한 무늬가 조각되어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문인석 뒤로는 2기의 망주석이 좌우에 1구씩 배치되어 있다.
정창징(1615~1664)은 조선조 문신으로 본관은 영일이며 자는 자휴(子休)이다. 공의 아들인 정제현(鄭齊賢)이 효종의 4째 딸 숙희공주와 혼인하여 인평위 부마가 되었다. 조선조 1639년(인조 17)에 진사가 되고 1662년 고양 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사후에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38)유여림 (兪汝霖) 시비(詩碑) 및 기념각
2003년 9월에 세운 유여림 시비가 두포동 길 91번지에 있다.
39)청풍(淸風) 김씨 묘역
고곡마을 좌측 홍현길에 여러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40) 정지식(鄭志式) 묘
고읍마을 배 증정경부인 여산 송씨와 합폄하였다. 1781년(정조 5) 8월에 건립된 묘표는 크기가 폭 66cm, 두께 30cm, 높이 162cm이며 “증숭정대부(贈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 정릉참봉 정공휘지식지묘(鄭公諱志式之墓) 증 정경부인 여산 송씨 부좌”라 새긴 표문의 음기는 아들 정상인(鄭象仁)이 썼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과 문인석 2구, 망주석 등이 있다. 정지식 묘 아래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묘가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문인석 2구, 망주석 등이 있다.
정지식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695년(숙종 21) 10월 12일에 출생하여 1751년(영조 27) 12월 30일에 사망하였다. 자는 사백(似伯)이며 호는 곡초(谷樵)로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정릉참봉을 지냈으나, 아들 정호인(鄭好仁)이 예조 판서로 숭정대부 품계에 올랐으므로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41) 한영(韓濙) 묘
대자동 산 54-2 일명 용복원에 있으며, 배 밀양박씨와 합폄하였다. 한영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633년(인조 11)에 출생하여 1689년(숙종 15)에 사망하였다. 자는 천일(千一)이며 1673년(현종 14)에 생진과에 합격하고, 1675년(숙종 1)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이 되었다.
42) 김사준(金思濬) 묘
본관은 연안. 배 정부인 창원 황씨 부좌하였고 묘비, 향로, 망주, 상석, 혼유석 등이 배치 되어있다. 자헌대부 의정부 찬정을 지냈다.
43) 김호(金澔) 묘
본관은 연안. 증 정부인 파평 윤씨, 증 정부인 연안 이씨와 합폄. 화강석의 묘비, 상석, 혼유, 향로석, 망주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받았다.
44) 이천추(李天樞) 묘
본관은 전의. 증 정부인 부여 서씨 부좌, 증 정부인 완산 이씨를 부우하였다. 네모난 모양의 묘비는 높이 214cm로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화강석 재질로 4면에 비문이 표기되었으며, 하나의 봉분이며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이 배치되었다. 증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45) 이천우(李天祐) 묘
대자동 쌍궁말 입구에 배 숙부인 언양 김씨와 합폄되었다. 비문은 “통훈대부 행음죽현감 이공천우 배숙부인 언양김씨지묘”라고 되어 있다. 묘는 둘레석이 있으며 묘각의 글씨는 알아볼 수 없고, 상석의 전면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망주석과 문인석이 있는데 옛날 망주석 1기는 없으며 고석과 향로석은 새로 앉힌 것이다. 비문은 1995년에 세웠다.
46) 이유번(李楡蕃) 묘
본관은 전의. 자는 성경(聖慶). 정경부인 상당 한씨 부좌, 정경부인 예천 김씨 부우 등 3위(三位)가 있다. 높이 211cm의 옥개석, 대좌가 갖추어진 오석의 묘비가 있는데 비문은 박명원(朴明源)이 짓고 이요(李橈)가 썼다. 상석, 혼유석, 향로석, 높이 61cm의 문인석 등이 배치되었으며, 증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다.
47)서대근(徐大根) 묘
국사봉 우측에 1973년에 세웠다.
48) 대자암(大慈庵)
대자암은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기는 어렵다. 조선 제3대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총명하여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나, 홍역에 걸려 13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자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원당(願堂)이다. 창건 당시의 화려함은 양주의 회암사와 자웅을 다투었다 하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지금은 당시 대학자 사가정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다음의 시가 전해온다.
산 속에서 여윈 말 채찍질하고 山重策嬴馬
절 안에서 고승(高僧)과 이별한다.寺裏別言僧
빽빽한 수목엔 구름도 어둡고 樹密雲俱暗
명랑한 모래엔 물이 절로 맑다.沙明水自澄
거친 둔덕에 예전 빗돌을 찾고 荒陵尋古碣
저문 해에 능(陵)을 조상한다. 斜日弔前陵
가을을 슬퍼하는 객이라 마소 莫怪悲秋客
다락집에 오르니 한이 많네.登樓恨可憑
그런데 그 후 이 터는 소현세자(제16대 인조의 첫째 아들)의 아들 경안군 이회(李檜)의 묘지로 사용되었으며, 대신 북쪽으로 백여 보 떨어진 곳에 작은 절을 다시 세워 명구암이라고 개명하였는데, 또 이곳은 제19대 숙종 때 학자 성재(誠齋) 민이승(閔以升)이 독서한 곳이기도 하다.
49)국회의원 이정석(李丁錫) 묘
대자골 미타원 입구 좌측 50m지점에 있다.
50)전주 이씨 성령대군 역대 종손 묘역
미타원 입구 좌측에 있으며 제일 위쪽으로는 창선대부 별산정(別山正) 이해(李偕) 묘와 태안(泰安) 이씨 묘가 합폄되어 있으며 봉분 앞에 각각 묘갈 1기씩과 상석, 향로석, 문인석 2구가 있다. 그 아래엔 이감(李瑊)의 묘와 창원 황씨 묘가 나란히 있고 그 옆으로는 이원춘(李元春)의 묘가 있다. 그 아래로는 성령대군 17대 손까지 종손들의 묘가 부부 합묘로 다수가 있다.
51) 백련암지(白蓮庵址)
지금은 주춧돌만이 당시 모습을 지키고 있다. 이곳은 조선 전기의 고양 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조선시대 제17대 효종의 부마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이 평소 재궁 및 원당으로 삼았었으며, 현재는 인평위(寅平尉)와 숙휘공주(淑徽公主)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52) 근령군(謹寧君) 이농(李襛) 묘
통일로 가장동 삼거리에서 67번 도로를 따라 약 1㎞ 가량에 있는 간촌 마을 우측 대자산 기슭에 정서쪽으로 향해 있다. 커다란 봉분 주위로는 사성이 둘러져 있는데 단분으로 되어 있다. 현재 묘소에는 높이 142㎝ 가슴 높이 둘레가 156㎝인 문인석과 옥개석과 특이한 높이 196㎝의 특이한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의 화창은 2개이며 이밖에 상석, 묘표, 혼유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총 높이 120㎝, 두께 18㎝, 폭 44㎝의 규모인데 앞면의 비문은 모두 마모되어 알 수 없으나 뒤편에는 건립연대가 표기되어 있다. 최근(2004)에 호우로 인해 큰 피해를 겪어 대대적인 정화사업을 벌였다.
근령군은 조선 제 3대 태종의 8째 아들이다. 1401년(태종 1)에 출생하여 1461년(세조 7) 11월 25일에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신빈 행씨이다.
1424년 10월에 군에 봉해졌고 세종대왕을 원종한 공으로 익사공신에 녹훈되었다. 1426년(세종 8) 희정대부에 봉해졌고 4년 뒤 군으로 승계되었다. 1455년(단종 3)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선위하는 날 종실 백관이 모여 정난공신에 맹훈(盟勳)할 책에 동맹을 하는데 홀로 서명하지 않고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보름간 음식을 끊고 세상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결국 단식으로 병을 얻어 운명하게 되었는데 한성남부에 있는 궁가[지금의 서울 명동 1가]에서 향년 61세로 사망하였다. 특히 임종이 임박하자 예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현 충청남도 아산군 음봉면 월랑리에 부조묘[不祧廟; 옮기지 않은 묘(廟)]가 세워져 있으며, 자덕사에 봉안되고 또 공주군 계룡산 동학사의 숙모전과, 영광의 덕림사에 배향되어 있다.
53) 옥산군(玉山君) 이제(李躋) 묘
간촌 마을 삼거리 지점에 있으며 배 함안군부인 윤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의 둘레는 각 26m이며, 높이가 3m이다. 석물은 장명등 1기와 문인석 2구가 세워져 있다. 또 화강석 재질의 묘비는 1490년(성종 21)에 건립된 것으로 총 높이 147cm이다. 묘비의 앞면에는 “현록대부 옥산군(顯祿大夫 玉山君)”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그 아래 비문은 마모되어 보이지 않는다. 한편 묘비의 후면에는 1490년(홍치 3) 경술 9월 21일에 장례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부인 윤씨의 봉분 앞에도 거의 같은 모양의 묘비가 있는데, 묘비의 뒷면에는 1497년(홍치 10) 정사 2월 24일에 장례를 지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두 묘비 앞쪽에는 각각 상석과 향로석 등이 세워져 있으며 다시 그 앞쪽에는 높이 236㎝, 둘레 210㎝의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의 화창은 모두 2개인데 옥개석을 갖춘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다. 봉분의 좌우에 세워져 있는 문인석은 총 높이 226㎝로 눈동자가 크고 옆으로 길게 꼬리를 이어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면에 비해 입이 앞으로 돌출되었고 코의 밑선 또한 또렷하게 보인다.
옥산군은 1429년(세종 11)에 출생하여 1490년(성종 21)에 사망하였다. 제3대 태종의 손자이며 근령군 이농(李襛)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관찰사 허지혜(許之惠)의 딸이다. 자는 경보(敬甫)이다. 1449년(세종 31) 정의대부 옥산군에 봉해진 뒤 1461년 승헌대부, 1484년(성종 15)에 소덕대부에 봉해졌고 1489년(성종 20) 문소전 도제조가 되었다. 부인은 첨지중추부사 증찬성 공신(恭信)의 딸 함안 윤씨이다. 증시호는 공간공(共簡公)이며 특히 함안군 부인의『일주야신도(一主夜神圖)』가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54) 이집(李緝) 묘
간촌 마을 옥산군 묘 좌측에 있다. 비문은 “절퉁장군 행몽양위 부사과 이공원집지묘 숙부인청주한씨지묘”라고 씌어 있으며, 뒷면은 마모가 심하여 읽을 수 없다. 묘 앞에 오래된 상석과 망주석이 서 있는데 묘 전체는 2005년 초에 조성하였다.
55) 임성군(臨城君) 이황(李煌) 묘
대자골 경안군 임창군 묘소 우측에 있는데 현재 묘는 배 익성현부인 남양 홍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다.
사성이 둘러쳐진 봉분의 앞쪽에는 화강석 재질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의 규모는 높이 163㎝, 두께 20㎝, 폭 61.5㎝인데 장방형 대좌가 갖추어져 있다. 특히 묘비 뒤편의 비문은 가느다란 글씨로 쓰여 있는데 이 비는 1690년(숙종 16)에 건립되었다.
묘비의 앞쪽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상석의 좌, 우에는 땅속으로 20㎝ 정도 묻힌 망주석이 있는데, 기둥에 조각된 석수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 석수의 꼬리는 아래쪽을 향하고 S자 모양으로 길게 조각되어 있다. 망주석 앞쪽에는 2구의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이 문인석은 조선조 중, 후기의 대표적인 석물로 각 부분에 화려한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그 규모는 총 높이가 185㎝이다.
임성군은 조선 제16대 인조의 증손으로 경안군 이회(李檜)의 셋째아들이다. 1665년(현종 6) 8월 10일에 출생하여 1690년(숙종 16) 9월 18일에 사망하였다.
56)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 묘
봉분의 석물로는 망주석 2기와 동자상 2구가 있다. 밀풍군은 조선 제16대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의 증손으로, 임창군 이혼(李焜)의 장남이다. 1688년(숙종 14) 2월에 출생하여 1729년(영조 5) 3월에 사망하였다. 1723년(경종 3)과 1726년(영조 2)에 사은사 겸동지사(謝恩使兼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나, 2년 후 소론의 이인좌(李麟佐)가 그를 추대하고 무력에 의한 정권쟁탈을 꾀하는 반란을 일으킬 때 이에 연루되자 난이 평정된 후 스스로 자결하였다.
57) 정제현(鄭齊賢)․숙휘공주(淑徽公主) 묘
고읍(古邑) 마을 뒤편 국사봉 기슭에 있다. 봉분은 단분으로 되어 있는데 주위의 석물로는 상석, 망주석, 그리고 문인석 4구가 있다. 이 중 봉분 앞쪽에 있는 높이 108㎝, 둘레 107㎝의 작은 문인석은 관모나 각 띠에 아름다운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뒤편의 큰 문인석은 높이 163㎝, 가슴높이 둘레 178㎝인데 전체적으로 아래쪽이 넓어 안정감이 드는 뛰어난 작품이다. 각 부분 중 특히 머리와 코가 몸체에 비해 큰 편이다. 봉분 바로 앞쪽에 세워져 있는 백 대리석의 묘비는 높이 138.5㎝이며, 폭 57㎝, 두께 21㎝의 규모이다. 1697년(숙종 23)에 건립된 이 묘비의 비분은 정제두(鄭齊斗)가 지었다. 비의 전면에는 “증수록대부 인평위 겸오위도총부 도총관 시효정공 행광덕대부 인평위 겸오위도총부 도총관 정공제현지묘 숙휘공주부좌(贈綏祿大夫 寅平尉 兼五衛都摠府都摠管 諡孝貞公 行光德大夫 寅平尉 兼五衛都摠府都摠管 鄭公齊賢之墓 淑徽公主祔左)”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봉분 좌우의 망주에는 위와 아래로 향하는 석수가 조각되어져 있다.
정제현은 효종의 4째 사위로 1642년(인조 22)에 출생하여, 1662년(현종 3)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연일이며 숙휘공주와 결혼하여 인평위가 되었다.
숙휘공주는 효종의 넷째 딸로 1642년(인조 22) 2월 27일에 출생하여 1696년(숙종 22)에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인선왕후 장씨이다.
숙휘공주 묘 아래에 목사 영일 정씨 정지익(鄭志翼)의 묘[원배(元配) 여종 민씨지묘 합폄]가 있고 그 아래 신원의 알 수 없는 묘 1기가 있다. 묘 앞에 상석과 향로석, 규모가 작은 문인석 2구, 장명등, 망주석 등이 있다.
58) 김일진(金一振) 묘
대자골 마을에 증 정경부인 풍양 조씨의 묘와 쌍분으로 있다. 봉분은 둘레 30m의 사성 앞쪽에 원형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 앞으로는 혼유석, 상석, 고석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우측에는 총 높이 232㎝, 폭 62㎝, 두께 22㎝의 묘비가 건립되어 있는데, 비문은 아들인 김주신이 썼다. 또 봉분의 좌측에는 화강석 재질의 묘비가 있다. 비문은 남구만(南九萬)이 짓고 이염이 썼다. 또 봉분의 좌측에는 화강암 재질의 묘비도 건립되어 있는데 비문은 박세당(朴世堂)이 짓고 신확이 글을 썼다. 묘갈은 1691년(숙종 17)에 세웠는데 높이는 265㎝에 이른다.
김일진(1659:효종 10~1703:숙종 29)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의성이다. 자는 진삼(晉三), 호는 우금당(友琴堂)이며 할아버지는 지평 김지남(金地南)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김팔주(金八柱)이며, 어머니는 평강 채씨로 현감 채시흠(蔡時欽)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숙하였으며, 특히 변려체에 재능이 뛰어났다. 1692년(숙종 18) 상경하여 폐비되어 있던 인현왕후에게 예를 표하고, 과거에서의 부정을 비롯한 폐정들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가, 정권을 담당하고 있던 남인들에 의하여 무산으로 유배당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그 뒤로 교유를 끊고 거문고와 책을 벗하며 살았다.
김일진 묘아래 김시진(金始振) 묘가 정부인 파평 윤씨 묘와 나란히 있고 그 아래에는 김남헌(金南獻) 묘가 신부인 안 동권씨 묘와 같이 있다. 그 주변에 정자지(鄭子芝) 묘갈이 있고 묘는 없다. 작은 묘갈에는“ㅇㅇ大夫 行 掌鄂元僉正ㅇ子芝”라 적혀 있다.
59) 사직단(社稷壇)
고읍에 있었다. 국가시책에 따라 본군의 벽제에도 사직단이 세워져 농산물의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왔으며 위판봉안실은 관청 뒤에 있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재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60) 여단(礪壇)
고읍에 있었다. 전염병을 비롯한 각종 재난을 막기 위하여 불의의 재난으로 죽거나 자식이 없이 죽은 귀신에게 드리는 여제를 지내는 제단이다.
조선 건국 이래, 국가의 소사의 하나로 거행되어 온 여제를 위해 중앙의 예조(禮曹)에서는 석 달 전 기일을 정하여 왕께 보고한 다음 서울과 지방의 관사에 공문을 보내 제삿날을 알려 주었는데, 대체로 청명절과 7월 15일 및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냈다.
61) 관아지(官衙址)
고읍 부락 옛 관아터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제4대 1428년(세종 10) 당시 고양 현감 하부(河傅)의 노력으로 건립된 이 객관은 동 헌․서헌을 비롯하여 문묘․향교 및 남별관 등을 갖춰 웅장한 그 모습을 도 전역에 자랑하였 으나, 지금은 주춧돌과 기와조각만이 남아 있다.
이곳에 지었던 관아는 1625년(인조 3) 군수 심창(沈昶)이 벽제읍 고양리로 옮기고, 이곳을 효종의 부마인 인평위 정제현(鄭齊賢)이 백련암이라 고쳐 부르며 제관 원당으로 사용하던 터다. 그러나 당초 관아의 설립 경위를 적은 “정이오기(鄭以吾記)”가 문헌에 남아 있어 그 역문을 통해 당시 모습을 알 수 있다. (제7권 자료집, 고양관련문헌자료편 참조)
62) 경운사지
대자동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63) 연산군 시대 금표비 (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문화재 자료 참조)
64) 영사정 현판(永思亭 懸板)
세로 54cm, 가로 123cm, 목재로 대자골 경주 김씨의 재실에 있다. 인근에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 증영의정인 김일진(金一振),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등 여러 분묘들이 있다. 영사정은 숙종의 국구(國舅)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이 자신의 아버지인 김일진을 가리기 위해 재사에 걸어놓은 현판이다. 영사정 재실 내의 상량판(上樑板)에는 ‘대자동 재사 세기축 4월 초 일일개기 8월 22일 상량(大慈洞 齋舍 歲己丑 四月 初 一日開基 八月 二十二日 上樑)’이라 기록하고 있어 이 건물과 현판이 숙종 48년(1709)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영사정의 서쪽 20m 지점에 세워진 김주신의 신도비문에도 경은부원군 김주신이 아버지인 김일진을 잊지 못해 묘막을 짓고 영원히 생각한다는 뜻에서 영사(永思)라 쓰고 붙였다는 기록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현재 건물 자체는 전체적으로 ㄷ자 집의 구조이며 현판은 대청 앞쪽 댓돌 정면위에 걸려 있다. 현판은 건물에 비해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현판의 글씨는 해서체로 부드러우면서 세밀한 느낌이 든다. 글씨는 목판에 양각되어 판 자체는 흰색이며 글씨는 검정이다. 현판의 뒷면에는 아무런 문자도 보이지 않으며 얇은 나무판으로만 되어 있다.
영사정 현판은 약 30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존하고 있는 보기 드문 작품이라는 데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2005년 1월에 도난당했다.
65) 최빈(崔嬪) 묘
최상규(催相奎)가 편찬한『고양선현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선 문종 임금의 비(妃). 조선 문종 임금 대 증 영의정 최도일(崔道一)의 딸.
문종의 동궁 시절에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勸氏)가 신미년(1451) 7월 23일 단종(端宗)을 낳고 돌아갔는데 국승(國乘)이나 선원계보(璿源系譜)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그러나『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 또 서거정(徐居正)이 최빈의 묘가 있는 대자사(大慈寺) 앞을 지나다가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황폐한 저 옛 비석 찾아
저문 해에 능 앞에 조문 올린다.
묘갈은 없어지고 귀부(龜趺)만 남았는데 2002년 11월에 새로 건립하였다.
66) 한기(韓紀) 묘
대자동 산54-2에 정혜옹주와 합폄되어 있다. 성종의 부마로 자는 원방(元方), 1490년 청백리 한형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1세에 정혜옹주와 결혼하여 순헌대부 청평위가 되었다. 연산군란때 옹주는 백천(白川)으로 청평위는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때 복위되어 원종일등공신이 되고 통훈대부에 올랐다. 옹주는 평범하기로 이름나 가정범절이 출중하였다고 전한다.
1558년 청평위가 69세에 사망하니 조정에서 부의를 내려 장사하고 신도비문은 여성위 송인(宋寅)이 찬했다. 묘는 원래 양주 창동에 있었으나 1971년 3월에 이곳에 옮겼다.
67) 유관(兪綰) 묘
배 정경부인 의령 남씨와 합부하였다. 봉분의 둘레는 20m, 높이는 2m이며 상석 1기와 문인석 2구가 있다. 앞에는 1969년에 다시 세워진 묘비에 “증보록공신 의정부 영의정(贈補祿功臣議政府領議政) 기계부원군 유공관지묘(杞溪府院君兪公綰之墓)”라 쓰여 있다. 비의 크기는 폭 50cm, 두께 20cm, 높이는 140cm이며 비문은 송인(宋寅)이 짓고 11대손 유치웅(兪致雄)이 썼다. 유관(兪綰)은 1499년(연산군 5)에 출생하여 1508년(중종 23)에 사망하였다.
68) 유대술(兪大述) 묘
배 증정부인 남양 홍씨의 묘와 합부하였다. 봉분의 주위에는 망주석 2, 상석 2기와 무인석 2구가 있다. 비문에는 “유명조선 청풍군수 증병조참판 기천군 유공대술지묘(有明朝鮮淸風郡守贈兵曹參判杞川君兪公大述之墓”라 쓰여 있다.
유대술(兪大述)은 1547년(명종 2)에 출생하여 1668년(광해 즉위년) 3월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기성부원군 충목공 유홍(兪泓)의 아들이다.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청풍군수를 지냈다.
69) 유여림(兪汝霖) 묘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 참조)
70) 유백증(兪伯曾) 묘
봉분 주위에는 대형의 상석 1, 망주석 2기와 문인석 2구가 있다.
유백증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587년(선조 20)에 출생하여, 1646년(인조 24)에 사망하였다. 자는 자선(子先), 호는 취헌(翠軒),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동지중추부사 유대일(兪大逸)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1621년에 이르러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권신에 아부하지 않아 말직에 머물다가 폐모론이 조정에 비등해 지자 사직하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3등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다. 1624년(인조 2) 사간으로 광해군파였던 김신국(金藎國), 조성(趙誠), 박로(朴櫓)등을 탄핵하였으며, 1년 뒤에는 부응교로 남이공(南以恭)이 대제학 김류(金瑬)의 세도를 믿고 불법을 자행한다고 논박하다 오히려 이천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왕을 찾아뵈었으며, 그 후 사도시정에 임명되어 청과의 화의에 잘못이 있음을 소론하였다. 가평 군수를 거쳐 이조 참의가 되어 대신들의 안일한 태도를 비난하여 다시 수원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민정을 베풀었으며, 이어 병조 참지,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갔으며 화의를 주장한 윤방(尹昉). 김류(金瑬) 등의 처형을 상소하다가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된 후, 동지경연사가 되었는데 속하여 윤방(尹昉)과 김류(金瑬)의 실정과 김경징(金慶徵), 이민구(李敏求)의 강화실함의 죄를 논박하였다. 또 대사헌이 된 뒤에 윤방(尹昉)이 신주를 모독한 죄를 탄핵하였으며, 국가자강책 10여 조를 올렸다. 그 후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이처럼 성품이 강직한 척화파로써 누차 직언을 하다가 여러 번 화를 당했으나, 자기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며, 저서는『취헌소차(翠軒疏箚)』가 있다.
제18절. 관산동(官山洞)
1) 정신옹주(貞信翁主) 묘
정신옹주는 조선 제 3대 태종의 딸로 어머니는 후궁 신빈 신씨(信嬪辛氏)이다. 영평군 윤계장(尹季章)에 출가하였다.
2) 윤평(尹泙)․숙순옹주(淑順翁主) 묘
시묘동 마을에 있으며 숙순옹주 전주 이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은 각기 병풍석이 돌려져 있는데 높이 76㎝의 기단석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봉분 아래의 기단은 일정한 규칙 없이 축조되어 있다. 봉분 중앙의 앞쪽으로는 기단 없이 오석의 비신과 화강암 옥개석을 갖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 묘비의 앞면에는 “상태종숙순옹주 전주이씨 안록대부 파원위 강이군 파평윤공 휘평지묘(尙太宗淑順翁主全州李氏綏祿大夫坡原尉康夷君坡平尹公諱泙之墓)”라 표기되어 있다. 이 오석의 묘비 이외에 높이 93㎝, 폭 47㎝, 두께 19㎝에 옛 묘비 2기 세워져 있다.
1481년(성종 12) 5월에 건립된 묘비에는 “봉훈대부 증시경이공윤평묘(奉訓大夫 贈諡庚夷公尹泙墓)”라 새겨져 있다. 또 숙순옹주 묘 앞에도 기단이 땅위에 드러나 있는 묘비가 있는데 비두가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앞면에는 “숙순옹주 이씨묘(淑順翁主 李氏墓)”라 새겨져 있다. 상석, 향로석, 혼유석 등은 각기 봉분 앞에 배치되어 있으며 2기의 묘비 중간에 새로이 만든 상석, 향로석이 있다. 중앙에 있는 상석 앞쪽의 2m 지점에는 예전에 세웠던 장명등이 있는데 화창은 모두 4개이며 옥개석이 뛰어난 작품이다. 장명등의 아래기단 부분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또 봉분 좌, 우에는 총 4구의 문인석이 있는데 모두 조선조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윤평(1420:세종 2~1467:세조 13)의 본관은 파평이며 윤보(尹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밀직사사 윤취(尹就)이고, 아버지는 인수부윤 윤창(尹敞)이며, 어머니는 최영(崔寧)의 딸이다.
16세 때 태종의 딸 숙순옹주와 혼인하여 가선대부에 오르고 파원군에 봉하여지고, 1441년에 가정대부, 1444년에 통헌대부, 1449년에 봉헌대부에 올랐다. 1466년 관제개정에 따라 의빈부승빈에 이르렀다. 시호는 강이(康夷).
숙순옹주는 태종의 13째 딸로 어머니는 궁인 이씨이다.
3) 김만균(金萬鈞) 묘
두포동 마을에서 간촌 마을로 이어진 67번 도로 우측에 있다. 봉분은 배 증정경부인 순흥 안씨의 봉분과 쌍분을 이루고 있는데 이 봉분을 중심으로 인근에 경주 김씨의 선산이 폭넓게 조성되어 있다.
특별한 시설물이 없는 봉분 앞에는 상석 1기, 장명등, 망주석, 동자상 등이 있으며 1644년(인조 24) 8월에 건립된 묘비는 높이 163㎝, 두께 15㎝, 폭 50㎝의 규모이다. 대리석 재질의 묘비가 있는데 증손 김남중(金南重)이 비문을 지었다. 석물 중 장명등은 화창이 총 4개로 높이는 172㎝이며 동자상은 총 높이 91㎝로 규모가 과히 크지 않으나 조각이 화려하고 각 부분별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또 상석 앞면의 향로석은 사각으로 되어 조선조 중기에 보기 드문 양식이다.
4) 강회중(姜淮仲) 묘
시묘동 마을에 있으며 배 군부인 의령 남씨 묘와 배 군부인 전주 최씨의 단 등 3기가 조성되어 있다. 총 둘레는 35m 봉분 주위로는 돌로 쌓아 만든 사성과 같은 축대가 만들어져 있다. 3기의 봉분은 모두 화강석의 둘레석이 둘러쳐져 있다. 봉분의 앞쪽에는 기단과 옥개석을 갖춘 오석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높이 143㎝, 폭 51㎝, 두께 25㎝의 규모이다. 또 이 묘비로부터 우측 2m 지점에도 1기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또 봉분의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이 문인석은 거의 비슷한 규모로 세워졌는데 모두 조선조 전기의 석물 특징이 있다. 묘소 아래 50m 지점에는 최근에 새로 세운 신도비가 있다. 귀부와 이수를 갖춘 이 신도비는 높이 206㎝, 폭 75㎝, 두께 46㎝인데 비문은 김윤동이 짓고 20대 손인 강석윤이 글씨를 썼다.
강회중은 고려 시대의 문인으로 자는 중보(中父)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호는 통계(通溪)이며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5) 한형원(韓亨元) 묘
관산동 산 77-5 시묘동 마을에 있는데 하나의 봉분으로 되어 있고 좌향은 동남향이다. 봉분 앞 석물로는 상석 1기와 문인석 2구가 있으며 중종 39년(1544) 2월에 건립한 대리석 묘비에는 1544년(가정 23) 2월에 건립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대리석 묘갈은 총 높이 176㎝로 비문은 소세양(蘇世讓)이 짓고 김노(金魯)가 썼으며 박영(朴詠)이 두전(頭篆)을 하였다. 비의 규모는 폭 76㎝, 두께 20㎝, 높이 190㎝이며 기단과 두부를 갖추고 있다. 좌우에 세워져 있는 문인석은 높이 176㎝이다.
한형원(1461:세조 7~1510:중종 5)은 조선조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인(子仁)이며 본관은 청주이고 서원부원군 한계미의 손자이며 서양군 한의(韓嶬)의 아들이다.
(6) 한의(韓嶬) 묘
관산동 산 77-5에 있으며 배 정부인 윤씨와 합폄되어 있다. 봉분의 둘레는 22m이며, 높이 4m이다. 상석 2기와 문인석 2구가 있다. 또 ‘서양군 한공도공지묘(西陽君韓恭悼公之墓)’라 쓴 묘비가 있는데, 규모는 폭 45cm, 두께 14cm, 높이 100cm이다.
한의(韓嶬)는 조선 초의 문신으로, 1443년(세종 25)에 출생하여 1485년(성종 16)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청주이며 서원부원군 한계미(韓繼美)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7세에 음보로 전구서록사가 되었다. 이어서 건원릉〔이태조의 능〕과 문소전의 직장을 거쳐 사복시정을 지냈다. 예종 초 병조 참지․병조참판을 역임하고 서원군에 습봉되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4등에 녹훈되고, 형조와 공조의 참판을 거쳐 한성부 좌윤 및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474년(성종 5)에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1483년(성종 14) 세조대왕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가 하세하자 수릉관이 되었고 이어 자헌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시호는 공도(恭悼)이다. 부모상을 당하여 효성으로 3년 시묘를 하였으므로 오늘날 이 마을의 이름을 시묘동이라 부르게 된 것도 이에 기인한다고 한다.
7) 한금(韓嶔) 묘
관산동 77-5에 있으며 배 숙부인 이씨와 합부되었다. 수석의 묘비는 1512년(중종 7) 4월에 건립된 것으로 갓 형이며 크기는 폭 45cm, 두께 13cm, 높이 120cm이다.
한금은 조선 초의 문신으로 1461년(세조 7) 3월에 출생하여 1506년(중종 1) 12월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청주로서 서원부원군 한계미(韓繼美)의 셋째 아들이다. 성종 때 나이 10세에 음보로 충의위 사과가 되어 관계에 나아갔으며, 1479년(성종 10) 직서사섬 직장이 되었다. 그 후 주부, 판관, 사헌부 감찰, 공조와 형조의 정랑을 지낸 뒤 외직을 맡아 강원도사, 안성 군수, 인천부사 군자감, 제용감정을 거쳐 여주 목사가 되었으나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비문은 동부승지 정두경(鄭斗卿)이 지었다.
8) 한형준(韓亨俊) 묘
관산동 산 77-5에 있으며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의 둘레는 각 7m에 높이 2m이다. 건립연대를 알 수 없는 묘비의 크기는 폭 40cm, 두께 15cm, 높이 120cm이나, 비문은 몹시 마멸되어 거의 판독이 불가능하다. 보공장군 충좌위 부사직(保功將軍忠佐衛副司直)을 지냈다.
한형준은 1482년(성종 13)에 출생하였으나 사망한 연대는 미상이다. 본관은 청주이며 서원부원군 한계미의 손자로서 통정대부 여산목사 한금의 아들이다.
9) 한형신(韓亨信) 묘
관산동 산 77-5에 있으며 쌍분이다. 한형신은 1491년(성종 22)에 목사 한흠의 3남으로 태어났다. 늦은 시기에 등과하여 예조좌랑, 정랑을 거쳐 강원도사 재임 시 지방순찰중에 질환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비문은 제학(提學) 정두경(鄭斗卿)이 지었는데 ‘조봉대부 예조정랑 겸춘추관 기사관 한공묘지명 병서(朝奉大夫禮曹正廊兼春秋館記寫官韓公墓誌銘 幷序)’로 되어 있다.
10) 한규(韓珪) 묘
관산동 77-5에 배 전주 이씨와 합폄이다. 1478년(성종 9) 서원군 한형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무에 뛰어나 초, 중시를 거쳐 선전관 도총도사 강령현감, 부령, 종성, 강계, 안산부사, 훈련도정, 전라수사를 끝으로 1537년(중종 32) 60세에 사망하였다. 비문은 대사성 신광한(申光漢)이 지었다.
11) 한기(韓琦) 묘
관산동 산 77-5에 있으며 배 정부인 전주 이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의 둘레는 10m이며 높이가 1.5m이다. 상석 2기와 무인석 2구가 있다. 그리고 명종 5년(1550)에 건립한 수석의 묘비는 폭 52cm, 두께 16cm, 높이가 130cm로 비문은 정유길(鄭惟吉)이 짓고 썼다.
한기는 조선시대 무신으로 성종 15년(1484)에 출생하여 명종 4년(1549) 6월에 66세로 사망하였다. 문무에 출중하여 무과에 초,중시를 형 규(珪)와 동시에 합격하고 선전관, 사헌부감찰, 웅천낙안현감, 호조정랑 벽동임천군수, 구성부사 훈련도정, 전라병사 재임 중 사망했다.
12) 한이칙(韓彛則) 묘
관산동 산92에 배 밀양 손씨와 합폄되어 있다. 1610년(광해 2) 사헌부 집의 한적(韓適)의 차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우의가 두터워 칭송이 높았다. 문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선략장군 충좌위사과에 이르렀으나 사망 연도는 알 수 없다. 시서를 즐겨 문집이 많았으나 6.25병화로 소실되었다.
18) 한전(韓琠) 묘
관산동 산에 있다. 조선조 1627년(인조 5) 7월 5일에 출생하여 1675년(숙종 1) 5월 17일에 사망하였다. 자는 여후(汝厚)이며, 서성군에 피봉 되었다. 사후 가의대부에 봉해지고, 이조 참판 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되었다.
19) 윤취(尹就) 묘
배 풍산 홍씨와 합부되어있다. 봉분의 둘레는 20m이며 높이 1.5m이다. 상석 1기와 문인석 1구가 있다. 묘비는 1967년에 건립한 것으로, “봉익대부 집현전 대제학 파평윤공취묘(坡平尹公就墓)”라 쓰여 있고 갓 형으로 크기는 폭 40cm, 두께 18cm, 높이 110cm이다.
20) 박휘(朴輝) 묘
부인 능성 구씨의 묘와 합부해 있다. 봉분의 주위에는 망주석 2기와 문인석 2구가 있다. 앞에는 1661년(현종 2) 3월에 건립한 묘비가 있는데, “통정대부 안주목사 박휘지묘(安州牧使朴輝之墓)”라 적혀 있다. 비의 두께는 20cm, 폭이 50cm, 높이 120cm이다.
21) 유순(兪洵)
본관은 기계. 오석의 묘비, 상석, 6각형의 향로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자는 노천(老泉), 신계 현령을 지냈으며 증 이조 참판을 받았다.
22) 유진(兪縝)
본관은 기계. 숙인 단양 우씨와 쌍분, 묘비, 대리석의 향로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장명등의 규모는 높이 202cm이다. 그러나 장명등에 화창은 없다. 통훈대부 행 서흥도호부사를 지냈다.
23) 유대우(兪大佑)
본관은 기계. 배 숙부인 평산 신씨를 부좌하였다. 대리석 재질의 묘비 상석, 망주석, 향로석 등이 있다. 증 사복시정을 받았다.
24) 김명원(金命元) 묘 (제2권 인물편,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관산동 통일로 가장도 삼거리에서 고양동 방향으로 이어진 67번 지압도로로 약 500m 거리에 있다. 현재 묘는 두포동 마을에 서향으로 있으며 배 정경부인 청주 한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묘 앞 중앙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그리고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묘 앞의 대리석 묘표는 1634년(숭정 7)에 건립한 것으로 그 규모는 높이 139㎝, 폭 57㎝, 두께 21㎝이다. 특히 장명등은 화창이 모두 네 곳이며 옥개가 크고 넓어 보기 드문 수작으로 여겨진다. 묘 봉분 앞 100m 앞에 있는 신도비는 숙종 21년 을해 5월에 건립한 것으로 이정구가 비문을 짓고 김창협이 전자를 하였다. 현재 신도비의 비신 규모는 높이 208㎝, 폭 87㎝, 두께 33㎝이다.
25) 관산동 산신상(山神像)
안골의 빈집 앞에 있다. 산신상 위에는 유여림의 묘가 있고, 옆에는 유여림의 신도비가 있다. 이 신상은 예전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최근에 누군가 몰래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산신상이며, 백발노인이 호랑이 등에 앉아있다.
26) 김경원(金慶元) 묘
배 정부인 은진 송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1, 장명등 1, 망주석 2기와 문인석 2구가 있으며, “절충장군 공청도병마절도사 김공경원지묘(金公慶元之墓)”라 새긴 묘표가 있는데, 그 크기는 폭 60cm, 두께 24cm, 높이 140cm이다.
김경원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이며, 대사헌 김만균(金萬鈞)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김천령(金千齡), 아버지 김만균(金萬鈞)과 동생인 김명원(金命元)과 본인 등이 모두 과거에 장원급제를 함으로써 세칭 3대 4장원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27) 필리핀군 참전기념비
통일로 길 가에 있는 이 참전기념비는 6.25전란 당시 우리나라를 위하여 1950년 9월 19일 파한되어 5년 뒤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용전분단한 필리핀 지상군1대대의 전력을 두 나라 국민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국방부 주관으로 1974년 10월 2일 건립한 바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휘호하고 남산미술원장 이일영에 의해 제작된 이 기념비의 규모는, 탑신 높이 17m, 탑신 둘레15m, 탑기단 높이 4.5m, 탑기단 둘레 27m, 길이 33m, 투조 0.74×13m, 군상 3m, 부조 2.06×26m이며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양같이 밝고 불타는 정열의 기상을 지닌 삼성좌의 용사들!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피 흘린 488명의 고귀한 영혼 위에 하나님의 가호 영원하리라.“
28) 문양사(文襄祠)
관산동 345번지에 있으며 문양공 한계미(韓繼美)의 사우(祠宇)이다. 건물 규모는 총 12평에 세로 2간, 가로 3간의 단청, 조선와가이다. 원래의 사우와 진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 후 종가에서 모셔왔는데, 1980년 9월 본 사당이 중건됨으로써 안치하였다. 그리고 초상은 1982년 2월 문양공파족보 편찬 당시에『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동국여지승람』 및 『초상대전(肖像大典)』등의 고증을 거쳐 추봉(秋峯) 김진룡(金進龍) 화백이 그려 1983년 7월 이 곳 문양사에 봉헌하였다.
제19절. 내유동(奈游洞)
1) 한전(韓磌) 묘
대내산 산107번지에 평산 신씨 묘와 상하로 조성되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상석을 중심으로 앞에는 좌우로 망주석과 무덤을 수호하기 이하여 세우는 동자석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이 묘역 봉분은 3단 화석으로 둘러져 있고, 묘역은 세종 29년(1447)에 조성되었으나, 시초에는 묘갈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과 병화로 마멸되어 1960년에 다시 조성하였다. 현재 신도비가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통정대부 수황해도 관찰사 청주한공 신도비’라고 되어 있다.
한전은 조선 세종 대의 문신이며,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친정아버지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의 차제(次第)이다. 1419년에 벼슬길에 나가 종조참의, 형조참의, 호조참의를 지냈으며, 1442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옮겨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사망했을 때에는 후한 부의(賻儀)를 내리고 가선대부 호조판서를 증직하였다. 1457년(세조 3)에는 좌익원종공신이등(左翼原從功臣二等)에 녹훈되었다.
2) 한전(韓磌) 영모재
청안부원군 한전(韓磌)의 재실(齋室)이다. 건물 규모는 좌측은 4칸, 우측은 2칸으로 된 양기와지붕의 목조 건물이다. 또 같은 곳에 묘와 묘비가 있다.
3) 조무영(趙武英) 묘
배 정부인 의령 남씨의 묘와 합폄하였다. 앞에는 1476년(성종 6) 12월에 건립된 묘비가 있는데 비문에는 “가선대부 행첨지중추원사 증정헌대부 병조판서 겸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배정부인 의령남씨지묘”라 씌어 있어, 묘비는 의령남씨가 사망한 후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묘비의 크기는 폭 40cm, 두께 20cm, 높이 100cm이다.
조무영은 조선 초의 문신으로 1423년(세종 5)에 출생하여 1479년(성종 10) 6월에 사망하였다. 자는 주성(周聖)이다.
4) 한윤명(韓胤明) 묘
한윤명(韓胤明)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선조의 잠저시(潛邸時) 사부(師傅)였다. 호는 동암(洞庵).
(5) 조대림(趙大臨)․경정공주(慶貞公主) 묘
석물로는 상석, 장명등 및 문인석 2구가 있으며 그밖에 폭 40cm, 두께 20cm, 높이 90cm의 묘비가 있다.
조대림은(1387:우왕 13~1430:세종 12)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겸지(謙之), 문하시중 조인규(趙仁規)의 4세손으로, 아버지는 영의정부사 평양부원군 조준(趙浚)의 아들이며, 태종의 부마이다.
1402년(태종 2) 생원시에 합격, 덕수궁 제공에 보임되었다. 1403년 호군이 되어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와 혼인하여 11월에 평녕군에 봉하여졌다가, 1406년 평양군으로 개봉되었다.
1408년 11월 겸좌군도총제가 되고, 12월 반란자 목인해의 꾐에 빠져 도성에서 군사를 일으키다가 순군사에 감금되었으나, 왕의 부마로서 혐의가 없어 석방되었다.
1409년 병서강토총제가 되었으며, 이듬해 참지의정부사 윤사수(尹思修)와 함께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1년 태조의 어진을 평양부에 봉안시켰으며, 서북면의 농사작황을 보고하였다. 1416년 숭록대부에 오르고, 이듬해 4월 경복궁 북동에서 있은 삼공신회맹제에서 개국․정사․좌명 3공신의 적장을 대표하였다. 세종 즉위와 함께 총제가 되고, 유후사로서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을 접반하였다.
1419년(세종 1) 사은사가 되어 권홍(權泓)․서선(徐選)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오고, 1422년 보국숭록 평양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426년 대광보국에 가자되었다. 시호는 강안(康安).
경정공주의 묘는 내유동 내산마을 안쪽에 있는데 묘소의 전체적인 형태는 조선조 초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사각묘이다.
봉분은 단분으로 봉분 주위에 커다란 사성이 둘러져 있다. 봉분은 화강석의 대석이 길게 이어 만들어져 있는데 규모는 가로 470㎝, 세로 580㎝의 직사각형이다. 봉분의 정면 앞에는 높이 132㎝ 규모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는 크게 옥개석, 비신, 대좌로 구성되어 있다. 상석은 풍화로 마모가 심한데 그 앞쪽에는 장명등이 서 있다. 장명등은 화창이 2개이며 높이는 212㎝로 특히 옥개석 상륜부 부분이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옥개석 아래에도 화강석의 기단이 있어 일반 묘에서는 드물게 3단계로 되어 있다.
봉분의 좌우로는 높이 250㎝가 넘은 거대한 문인석 2구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키가 매우 커 시원한 느낌을 주는 석물이다. 얼굴 안면은 입술이 매우 튀어나와 있고 눈은 정면을 직시하고 있다. 조선초기의 투박한 모습과 옷매무새의 단조로움이 조선전기 문인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경정공주는 1384년(우왕 10)에 출생하여 1455년(단종 3) 6월 6일에 사망하였으며 동년 7월 17일에 예장하였다.
6) 순안군(順安君) 이희(李扌希) 묘
고양시와 파주시가 경계되는 통일로 부근 내유동에 있으며 증고령현부인 고령 박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다. 봉분의 총 둘레는 21m이며 높이는 약 2.5m이다. 봉분 앞의 석물로는 상석 1기, 장명등 1기, 동자상 2구가 있다. 또 계유년 정월에 건립된 화강석의 묘비가 있는데 그 규모는 총 높이 110㎝, 폭 39㎝, 폭 39cm, 두께 19cm이다.
이 묘비 앞에는 상석,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시 그 안쪽으로 장명등이 있다. 이 장명등의 총 높이는 78㎝인데 화창은 모두 2개이며 아름다운 옥개석이 만들어져 있다. 지상으로부터 15㎝ 위에 4각의 홈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장명등과 상석 사이에는 2구의 동자상이 있는데 얼굴의 표정이나 등, 어깨, 허리의 무늬 모양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는 뛰어난 석물이다. 묘소 내에 망주석은 보이지 않으며 봉분 좌우 맨 끝에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순안군은 조선 제 3대 태종의 손자인 옥산군 이제(李蹄)의 일곱째 아들로 1476년(성종 7) 2월 6일에 출생하여 중종 31년 4월 17일에 사망하였다. 정의대부에 오르고 순안군에 추증되었다.
7) 창성군(昌成君) 이요명(李堯命) 묘
현부인 창녕 조씨와 합장되어 있는 쌍분이다. 봉분의 뒤편으로 긴 사성이 둘려져 있으나 병풍석이나 기단석은 보이지 않는다. 두 봉분 사이로 황강석 재질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규모는 폭61cm, 두께 12cm, 높이 120cm이다. 비신은 대좌를 갖추고 세워져 있는데 앞면에는 “유명조선 정의대부 창성군 요명지묘 현부인 창녕조씨 부좌(縣夫人 昌寧曹氏 祔左)”라 표기되어 있다. 비의 뒷면에는 “숭정기원후 삼정유 개립(崇禎紀元後 三丁酉 改立)”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묘비의 중앙 정면에는 혼유석, 상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2m 앞으로는 장명등 1기가 건립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이 장명등은 아래 부분인 기단에 비해 옥개석이 넓고 큰 것이 특징이다. 기단석과 화사석에는 같은 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마치 하늘의 구름무늬같이 보인다. 화사석의 화창은 모두 4개인데 화창은 둥근 원형과 사각으로 되어 있다. 봉분의 좌우에는 바람과 비에 마모된 문인석 2구가 세워져 있다. 특히 코 입 등의 얼굴부분의 마모가 심하다.
이요명(李堯命:1499-1546)은 조선 제 3대 태종의 손자인 옥산군 이제(李蹄)의 일곱째 아들인 순안군 이희의 장남이다. 1499년(연산군 5) 12월 1일에 출생하여 1546년(명종 원년) 7월 17일에 사망하였다. 정의대부에 오르고 창성군에 봉군되었다.
8) 조준(趙浚)의 불천지위(不遷之位) 묘
문충공 조준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건물 규모는 정면이 3칸 측면이 1.5칸 지붕은 조선기와에 모로단청을 하였으나 원래의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후 1943년 1차보수를 하고 1978년에 후손에 의해 재건되었다.
9) 한충인(韓忠仁) 묘
내유동 내산 마을에 있다. 묘는 특이하게도 한충인의 봉분은 앞쪽에 배치하고 뒤쪽으로 증정부인 김씨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봉분 주위의 석물은 합장된 경우와 같이 한충인 봉분에만 설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2기의 묘비가 있는데 높이 136㎝, 두께 21㎝, 폭 35㎝가 된다. 묘비의 재질은 대리석이며 이수에 운문이 양각되어 있다. 묘비의 앞쪽으로 혼유,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조화롭게 위치하고 있는데, 장명등은 총 높이 158㎝로 화창은 모두 4개이다. 171㎝에 이르는 문인석은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동자상에서나 볼 수 있는 양식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한충인(생몰년 미상)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이다. 1467년(세조 13) 구치홍(具致洪)이 총통군․약장(藥匠) 등을 인솔하고 갈 때 함께 참여하였다. 1472년(성종 3)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사헌부에서 일찍이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어느 수령이 한 사족의 집과 혼인을 의논하고 납채까지 한 것을, 그가 꾀하여 빼앗아 아내로 삼은 뒤에 3일 만에 버리고 다시 아내를 얻었다하여 잡아다가 추국하게 하였다.
1473년 사헌부로부터 처가 있으면서 또 처를 취했다하여 탄핵을 받았다. 1475년 행호군을 거쳐 통정대부 행강릉 대도호부사를 지냈으며, 1479년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통정대부 행창원부사가 되었으나 7월 이후 전에 충청도 절도사가 되어 그 도의 수령과 혼인을 다투다가 파직되었다. 성품이 또 망령되어, 백성을 다스리기에 합당치 않는데 전에 강릉부사로 제수했다가 대간이 탄핵하여 체임되었는데, 지금 다시 창원부사로 제수했다며 탄핵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81년에는 행부호군으로 북경에 가서 팔참로에 보와 진을 설치하여 사절의 왕래를 편리하게 한 데 대한 사의를 표하였다.
1482년 북경에서 돌아와 복명하고, 이어『청화집』,『유향신어』,『유향설원』,『주자어류』, 『분류두시』양각서판을 진상하였다.
1487년 절충장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491년 원주목사로 제수되는 것에 대해 많은 논의가 제기되기도 했으나 북방 정벌을 준비할 때 후원장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울지령 남쪽 동구(洞口)에 주둔하여 싸웠다. 1494년 통정대부 행정주목사가 되었다.
4) 한윤명(韓胤明) 묘
한윤명(韓胤明)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선조의 잠저시(潛邸時) 사부(師傅)였다. 호는 동암(洞庵).
10) 전수원류비(傳授源流碑)
오석(烏石)으로 되었으며 갓 형의 옥개석과 기단이 있음. 규모는 높이 108cm, 폭 35cm, 두께18cm. 스승의 얼을 기리기 위해 덕수 이씨 이종설의 제자들이 세운 비이다.
제20절. 토당동(土堂洞)
1) 정수강(丁壽崗) 묘
좌측에는 배 증정경부인 강릉 김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 앞에는 1969년에 개수된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이가원(李家源)이 짓고, 이동용(李東鎔)이 썼다.
정수강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454년(단종 2)에 출생하여 1527년(중종 22)에 사망하였다. 자는 불붕(不崩)이며, 호는 월헌(月軒)이다.
본관은 나주, 소격서령 정급(丁伋)의 아들이다. 1474년(성종 5) 진사가 되고, 1474년(성종 8)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1482년(성종 13)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9년(연산군 5) 장령을 지낸 후 부제학이 되었으나 갑자사화 때 파직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재 등용 되어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판결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중종 7년(1512) 병조 참지를 지낸 후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문장에 뛰어나 한문소설인「포절군절(抱節君節)」을 저술했으며, 그 밖의 저서로는『월간집(月幹集)』이 있다.
2) 정수강(丁壽崗) 영모재
월헌(月軒) 나주 정씨 정수강의 재실이다. 건물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목조 건물로 지붕은 조선와가로 되어 있다. 한편 같은 곳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3) 삼성당산(三星堂山)
성산(城山) 서쪽 등성이 들판 한강 가에 있다. 신라 시대 때에 별이 떨어져 돌이 되었는데 세 개가 한 구릉(邱)을 이루었으므로 삼성당(三星堂)이라고 하였다.
제21절. 내곡동(內谷洞)
1) 김유연(金有淵) 묘
내곡동 안골마을에 있으며 좌우에 배 증정경부인 달성 서씨와 계배 정경부인 전주 이씨의 묘가 합장되어 있다가 최근에 이전하였다. 봉분의 둘레가 26m, 높이가 3m에 이르는 보기 드문 대형인데 봉분 우측에 1965년 5월에 옛 비를 다시 세운 오석 묘비가 있다. 묘비의 규모는 총 높이 187㎝, 폭 49㎝인데 대좌와 옥개석이 갖추어져 있다. 비문의 음기는 아들 김만수(金晩秀)가 짓고 숭정대부 판돈녕부사 윤용구(尹用求)가 썼다. 봉분 앞에는 고석이 받치고 있는 상석이 있으며 4각 모양의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의 정면 앞에 세워져 있는 장명등은 총 높이 20㎝, 옥개석의 넓은 부분이 63㎝에 이르는데 기단부의 꽃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화창은 모두 4개의 줄무늬가 있어 높은 조각솜씨의 장명등임을 알 수 있고 장명등의 좌우에는 화강암 재질의 석양이 배치되어 있다.
김유연(1819:순조 19~1887:고종 24)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원약(元若), 호는 약산(藥山)이다. 할아버지는 김재옥(金載玉)이며, 목사 아버지 김영(金甬)에게 입양되었다.
1844년(헌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에 발탁되었고, 1862년(철종 12) 이조 참의․예방승지․이조 참판을 역임한 뒤 1866년(고종 3)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변경 방비 및 국경통상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처리하였다. 1868년 형조 판서를 거쳐 이듬해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한성부 판윤․대사헌․반송사 등을 거쳐 관북지방 안무사로 나가 많은 폐단을 바로잡는 데 공이 컸다. 1880년에 다시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이후 호조 판서․변리통리 내무아문사무․독판군국사무․판의금부사․공조 판서․이조 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고, 판중추부사로 사망하였다.
그는 관력 42년에 그 자세가 중후, 신중하였고 나라에 대한 충성이 절실하였으며, 특히 관북지방 통치에 업적이 컸다. 시호는 정익(貞翼).
2) 신희(愼憙) 묘
내곡동 뒤꾸지 마을에 있는데 배 숙인 한양 조씨와 숙인 강화 최씨의 묘가 합장되어 있다.
봉분의 높이는 225㎝, 가로는 865㎝에 이른다. 봉분 앞으로는 대좌를 갖춘 높이 148㎝, 52.5㎝ 규모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특히 대좌에 아름다운 연꽃무늬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상석은 모두 3개의 판석이 합쳐져 이루어진 모양으로 고석 대신 4개의 사각 석물이 받치고 있다. 향로석의 총 높이는 60㎝이다. 상석의 전면 좌우로는 높이 97㎝의 작은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이외에도 묘역에는 망주석, 문인석 등이 있는데 큰 문인석은 높이 182㎝로 각 부분의 무늬가 아름답고 세밀한 석물이다.
묘의 입구에 세워진 묘비는 귀부와 옥개석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 총 높이 274㎝이다. 비문은 앞면, 뒷면에 새겨져 있으며 전자도 새겨져 있다.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의 크기는 총 길이 182㎝, 폭 115㎝이다. 귀부의 발가락은 총 4개이며 꼬리는 뒤쪽에서 좌측으로 구부러진 모습이다. 목에는 모두 3줄의 무늬와 줄무늬의 귀갑문이 새겨진 특이한 모습이다. 신희의 본관은 거창이며 신수근(愼守勤)의 5대손이다.
3) 김상석(金相奭) 묘
좌측에는 배 정경부인 풍천 임씨의 묘가 합폄되어 있다. 영조 41년(1765)에 건립된 묘표에는 “유명조선국 증의정행판돈녕부사 증시정간 연안김공상석지묘(有明朝鮮國贈議政行判敦寧府事贈諡貞簡延安金公相奭之墓)”라 새겨있으며, 표문은 아들 김익(金熤)이 짓고 통훈대부 종친부 전부령 황연조(黃連祚)가 썼다.
김상석(金相奭)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690년(숙종 16)에 출생하여 1765년(영조 41)에 사망하였다. 자는 군필(君弼)이며 호는 시은(市隱)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의 후손이다.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정언을 역임하였으나, 1721년(경종 원년) 신임사화 때 삭직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재집권하자 간관으로 등용되어 소론의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등을 탄핵하고 남인 남구만(南九萬) 최석항(崔錫恒) 등의 종묘 배향을 반대하였다. 그 후 교리 부수찬, 의주 부윤, 한성부 우윤을 거쳐 판돈녕부사에 올랐다. 시호는 정간(貞簡).
4) 느티나무 (제2권 문화유산, 동지정 보호수 참조)
제22절 대장동(大壯洞)
1) 대장동 진교비(大壯洞 榛橋碑)
이 비는 대장동과 내곡동(內谷洞)의 입구에 해당하는 갈머리 마을에 있다. 흔히 마을에서 이 비가 서 있는 부근의 다리 명칭을 갠비다리라 부르고 있다.
비는 다리의 난간 옆에 세워져 있는데 건립연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비의 앞면에는 대장리목교(大壯里木橋)까지는 확인되나 그 아래의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확인 할 수 없는 상태이다. 기단이나 옥개석 없이 비신만 세워져 있는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옛 기록인 영조 연간(1755년) 이석희(李錫禧) 편『고양군지』에 이 비석이 있는 다리의 명칭은 ‘진교(榛橋)’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소재지를 정확하게 ‘대장리’라 표기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다리는 적어도 240년 이전부터 있어 왔음이 확인된 것이다. 또 을미년에 강세봉(姜世奉)에 의해 설치되었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 결국 이 비는 지금까지 알려진 의견비(義犬碑)의 의미와는 달리 이곳 진교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교량비(橋梁碑)인 것이다. 이 진교는 본래 나무다리로 한성과 개성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다리이다. 본래의 비는 이곳에 대장교를 건설하면서 땅에 묻고, 새로운 비석을 세워, 진교비는 볼 수가 없다.
2) 남효온(南孝溫) 묘
대장동 산 49에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제2권 문화유산, 인물편 참조)
3) 허이(許邇) 묘
허이(許邇)는 조선시대 문인으로, 1862년(철종 13)에 출생하여 1920년에 사망하였다. 자는 성언(聖言), 호는 매강(梅岡)으로 허척(許倜)의 아들이다. 당시 명유인 성재(成齋) 허전(許傳)의 문인이 되어 수학한 후, 1885년(고종 22)에 문과급제 하여 성균진사가 되었다. 구한말 안팎으로 혼란한 시국에도 불구하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노력하였다.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매진하였으며, 스승인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뒤를 이어『성재문집(性齋文集)』을 완성하였다.
제23절. 화정동(花井洞)
1) 지렁산 지석묘(支石墓)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석묘는 화정동과 성사동 사이의 지렁동산 정상부 7~8부 능선에 있다. 지석묘는 등산길의 좌․우에 2~3기가 흩어져 있는데 상석을 받치고 있는 대석이 일부 보이나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 상석을 받치고 있는 대석과 상석 사이에 파져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정확한 성혈은 보이지 않으나 1991년 서울대 박물관 팀의 유적조사 후 지석묘로 추정한다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2) 화정동 지석묘(花井洞 支石墓)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화정동 지석묘〔고인돌〕는 화정동 찬우물 마을에서 성사동 배라산 마을로 넘어가는 산대골 고개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지석묘의 앞쪽은 다듬어져 있는데 바위의 평평한 부분에는 총 24개의 성혈(CPU-mark)이 발견되었다. 성혈의 크기는 직경이 3~5㎝, 깊이가 1~2㎝ 정도인데 지석묘의 중앙부분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상석의 남쪽에서 70㎝ 정도 되는 지점에는 돌을 채석하기 위한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현재 상석은 비교적 지석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나 하부구조인 기단은 훼손되거나 장소가 옮겨져 찾을 수가 없는 상태이다.
1991년 화정지구 유적조사에서 서울대 박물관 조사팀은 지석묘로 추정된다고 보고한 바 있다.
제24절. 행신동(幸信洞)
1) 유진동(柳辰仝) 묘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2) 유림(柳琳) 묘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3) 유형(柳珩) 묘 (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기념물편 참조)
4) 정응두(丁應斗) 묘
신도비문은 외손 남구만(南九萬)이 지었다.
정응두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08년(중종 3)에 출생하여 1572년(선조 5)에 사망하였다. 자는 추경(樞卿)이며, 본관은 나주로 찬성 정옥형(丁玉亨)의 아들이다. 1521년(중종 16) 14세에 진사가 되고, 1534년(중종 29)의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설서로 벼슬을 시작하여 전적, 정자, 정언 등을 지냈다. 1538년(중종 33) 사가독서하고, 다시 교리, 부응교, 장령을 거쳐 우보덕이 되었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사간, 예조 참의를 지내고, 2년 뒤 대사간에 승진되고, 계속 승진하여 좌․우부승지, 동지중추부사, 장예원 판결사가 되었다. 곧 대사헌에 올랐으나, 부친의 중병을 돌보기 위하여 사직하였다. 1551년(명종 6) 한성부 우윤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그 뒤 병조판서, 우참찬,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그 동안 사은사로 2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67년(명종 22)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忠靖).
5) 유효걸(柳孝傑) 묘
이기양(李基讓)이 지은 묘갈이 있다.
유효걸(柳孝傑)은 조선시대 무신으로 1594년(선조 27)에 출생하여 1627년(인조 5)에 사망하였다. 자는 성백(誠伯)이며 본관은 진주, 판서 유진동(柳辰仝)의 증손으로, 수군통제사 유형(柳珩)의 아들이다. 광해군 10년 무과에 급제한 후 4 년 뒤에 황해도 병마절도사에 오르고 이듬해 황주 목사로 있었는데,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대북파에 의해 폭행을 일삼고 백성에 대한 착취가 심하다는 내용의 탄핵을 받아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후금과 마찰이 심한 북변을 지키기 위해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별장으로 종군하였다. 인조 2년 부원수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좌협장으로 출전하여 안현 싸움에서 반란군을 대파시켜 진무공신 2등으로 진양군에 봉해졌다. 관직은 경기도 수군절도사에 이르렀다.
6) 정옥형(丁玉亨) 묘
봉분 앞에는 1975년에 중건된 신도비가 있으며, 홍섬(洪暹)이 지은 비문에는 “유명조선국 정헌대부 병조판서 겸지춘추관사 동지경연사 증시공안공신도비명(贈諡公安公神道碑銘)”이라 새겨 있다.
정옥형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486년(성종 17)에 출생하여 1549년(명종 4)에 사망하였다. 자는 가중(嘉仲), 호는 월봉(月峯)이다. 본관은 나주로 병조 판서 정수강(丁壽岡)의 아들이다. 1513년(중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검열 이조 정랑, 참의를 거쳐 도승지․호조 참판을 지냈다. 그 뒤 1536년(중종 31)에는 병조참판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헌․대사간에 이르렀으나, 당시 권신인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충청도 전라도의 관찰사로 나갔다. 그러나 곧 형조 판서에 올라 법령 조목의 전후 모순을 조절한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을 저술하였으며, 병조 판서, 예조 판서, 지돈녕부사, 동지경연사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그리고 명종 즉위년에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등을 몰아냄으로써 보익공신 3등에 녹훈되고 금천군에 봉해졌으나, 뒤에 모두 삭탈되었다. 시호는 공안(恭安).
7) 선계철(宣季鐵) 묘
부인의 묘와 합폄하였다. 선계철(宣季鐵)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본관은 보성(寶城), 유성군 선형(宣烱)의 셋째 아들이다. 의성 현감을 지내고 사후에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8) 명인각(명인각)
행신 3동에 있으며, 보산부원군 충경공 유형(柳珩)과 오위도총부 도총관 유진동(柳辰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건물 규모는 전면 3간, 측면 2.5간의 미장 적벽돌 건물로 지붕은 스레트와가이다. 한편 같은 곳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10) 류구(柳玽) 선생 묘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 참조)
11) 류겸(柳謙) 선생 묘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 참조)
12) 진주 유씨 사위(四位) 단소(壇所)
진주시 묘역 상단부에 ①仁庇 ②惠芳 ③惠孫 ④洧의 단소가 있다.
13) 진주 유씨 사위(四位)에 아래 2대(二代)의 단소(壇所)
사위의 단소 아래 ①珦 ②灌 2대(代)의 단소가 있다.
제25절. 강매동(江梅洞)
1) 신효(申曉) 묘
강매동 강구산 마을에 배 증 숙부인 남양 홍씨의 묘와 함께 있다. 둘레 45m의 사성 앞쪽에 있는 봉분은 단분으로 앞면에 2단의 화강암 기단석을 둘렀으며 옆면에는 1단을 뒷면에는 기단석 없이 조성하였다. 봉분 앞 1m 지점에는 2기의 상석을 나란히 높았고 향로석은 배치되어 있지 않다.
봉분의 정면에 있는 화강석 묘비에는 “유명조선국 서호산인 신공효지묘(申公曉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묘비 2m 앞에는 높이 173㎝의 장명등이 있는데 장명등은 6각의 옥개석에 화창은 정면으로 2개, 작은 것 2개가 측면으로 만들어져 있다. 장명등의 아랫부분은 원형의 기둥으로 화사석까지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신효(생몰년 미상)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 호는 서호산인(西湖山人)․효창(曉窓)이다. 신중명(申仲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손(申蓀)이고, 아버지는 고려 봉선고판관 신안(申晏)이며, 어머니는 호조 판사 임세정(任世正)의 딸이고, 좌의정 신심(申愖)의 아우이다.
1402년(태종 2)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404년 사간원 우정언이 되어 노이(盧異)․이양명(李陽明) 등과 궁중의 비밀을 발설하여 탄핵을 받아 연안에 유배되었다. 그 후 2년 만에 풀려났으나 행주에 은거하여 다시는 서울의 도성문을 밟는 일 없이 세조 중기에 81세로 사망했다. 세종 때 형 신개가 재상으로 있으면서 다시 관직에 나올 것을 권하고 천거하였으나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2) 윤금손(尹金孫) 묘
배 정경부인 경주김씨와 합폄하였다. 묘역에는 상석 2, 장명등 1, 망주석 2기, 동자상과 문인석이 각각 2구씩 있으며, 묘표의 크기는 폭 54cm, 두께 20cm, 높이 100cm로 국화무늬의 두부로 되어 있다.
윤금손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이다. 1491년(성종 22)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의 관원이 되었으며,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 녹훈되고 파평군에 봉해졌다. 70세가 넘도록 실직을 맡아 기로소에 들어가 정사를 살폈다. 시호는 헌의(獻懿).
3) 선형(宣炯) 영모재
조선시대 유성군 선형(宣炯)의 사당이다. 건물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1.5칸의 목조 적벽돌 건물로 지붕을 단청으로 한 조선와가이다.
선형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자는 명여(明汝), 본관은 보성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1460년(세조 6) 안주 목사가 되고 경성 부사 회령 부사 등으로 있으면서 변방 경비에 공을 세웠다. 계속 중추원 부사, 한성 부윤, 의주 목사, 황해도 관찰사 등의 외직을 맡고, 1467년(세조 13)에는 형조 참판으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하여 적개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성종이 즉위하자 자헌대부가 되어 유성군에 봉해졌다. 그 후 성종 2년에 다시 좌리공신 4등이 되고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후, 평안북도 병마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야인정벌에 공을 세웠다.
우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평양(平壤). 이 곳 영모재 뿐 아니라 고향인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서도 제향 되고 있다.
4) 매면봉수대(梅面烽燧臺)
강매동에 있는 해발 95m의 봉대산〔일명 江古山 또는 江口山〕 산꼭대기에 있다. 강매동에 있다하여 강매봉수대라고도하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국방상 중요 임무를 띤 속보, 경비, 전신의 역할을 하였으며, 서울 남산 봉수대로 연락하던 곳이다.
5)평창군사(平昌郡事) 봉(奉)공 묘
강고산 3도 강고산 마을회관 뒤편에 있다. 강고산 남하쪽에 배 여흥 민씨와 쌍분으로, 오래된 묘갈, 상석, 문인석, 장명등이 있다. 그 아래 서쪽으로는 신원을 알기 어렵게 마모된 묘표가 있는데 ‘봉공’이라 쓰여있다. 오래된 사각 둘레석에 상석, 문인석 4구가 특이하다. 위씨(魏氏)가 쌍분으로 되어 있어 이 위로 쌍분의 묘가 있는데, 묘표는 없고, 문인석 2기, 상석이 2기가 있다.
6) 강매동 석교(江梅洞石橋)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7) 선호신(宣豪臣) 묘
간뎃말[가운데말] 묘역에 있다. 본관은 보성. 숙부인 안음 박씨와 부좌하였으며, 오석의 묘비, 상석, 향로석, 116cm의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자는 군빈(君彬)이며 중추대부 중추부도사 선전관을 지냈다. 묘역에는 수십 기의 문중 묘가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제26절. 행주동(幸州洞)
1) 행주산성(제2권 문화유산, 국가 사적편 참조)
2) 행주산성 유적 및 명소
1963년 10월 18일 사적 56호로 지정된 이 행주산성에는 현재 3개의 대첩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것은, 1603년(선조 36)의 것으로 비각 내에 남아 있으며 그 왼쪽에는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쓴 친필의 큰 비가 건립되어 있다. 또 선조 때 산봉우리에 처음 세운 비가 풍화로 마멸될 것을 염려하여 똑같은 모양의 대첩중간비를 세웠는데 이 비에는 조인영(趙寅永)의 추기가 첨가되어 있다. 그러나 권율장군의 사당인 기공사가 6․25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그때 불을 받아 화강석 비신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근래 1970년과 1978년 및 1986년에 3 차례에 걸쳐 대보수정화사업을 하였다.
(1) 충장사(忠壯祠)
충장사는 행주 나루터에 있던 권율 장군의 사당인 기공사가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으므로 이름을 고쳐 1970년에 복원한 것이다.
원래 1842년(헌종 8) 왕명에 의해 세운 행주 기공사와 함께 행주 나루터에 있던 이 사당은 한강의 강세가 변하여 홍살문을 세웠던 자리까지 강물이 들어와서 기공사를 허물고 다시 창건한 것이다. 당시 다행히 몇몇 독지가에 의해 복원되었으나 다시 6․25전쟁 때 소실되어 주초만 남게 되었다. 당시 기공사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건평 11.3평 (37.4㎡)이었으며, 그 앞에 9칸의 소규모의 재실을 두고 그 앞 15m 밖에 홍살문이 있었다.
사당을 복원함에 있어서 원래 위치가 한강 물줄기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 곳이었으므로 다시 그 자리에 세울 수도 없었고, 산성과의 거리가 멀어 격전지 순례자의 참배가 불편할 것도 고려하여 오늘날과 같이 산성 안으로 위치를 ‘충장사’라는 이름으로 바꿔 신축하게 된 것이다.
(2) 삼문(三門)
충장사 사당 앞 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평 7평(23.4㎡)의 철근 콘크리트의 맞배 초익공의 집이다. 주초 위에 각주를 세워 주두와 창방을 얹었고 보 위에는 소슬 대공을 얹어 굴도리를 받쳤다.
홑치마 위에 지붕을 얹혔는데 중앙의 칸이 측칸보다 1m 솟아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문을 가로지른 인방 위에 두 짝 대문은 판자로 짜서 달았으며, 모로단청을 하였다.
삼문과 광장은 장대석 계단 13단으로 연결하였는데 특이한 것은 원래의 사당삼문을 모방하여 2계단의 최상단을 기둥 칸 사이로 끝이 나게 한 점이다. 담장 축대 밑의 기초는 성토지역이므로 토관 파일박기의 특수공법으로 시공하였다.
삼문 앞 우측 녹지공간에 있는 행주대첩의 한글판 비는 임창순이 번역하고 김응현(金膺顯)의 글씨를 새겨 1979년에 세운 것이다. 그 규모는 2단 기단 위에 가로 2.4m, 세로 1.4m, 두께 54㎝의 화강석 비신으로, 가로 0.9m, 두께 25㎝의 오석판을 붙였다.
(3) 행주대첩구비(幸州大捷舊碑)와 비각(碑閣) (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유형문화재편 참조)
(4)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
덕양산 정상에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이 대첩비는 1963년 8월 15일 경기도민과 각계 유지들에 의해 건립된 것이다.
건립당시에는 다소 작고 허술한 규모였으나 보수공사를 통하여 기단은 다시 튼튼히 하고 비문도 다시 크게 새겨 넣어, 현재는 전후면 광장과 전면 계단이 신설되어 높이 50척이나 된다. 전면 큰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박정희 글씨 사진
(5) 덕양정(德陽亭)
대첩비로부터 동남방 아래쪽 토성 앞쪽 언덕에 세운 정자이다. 정문에서 정상까지 800m의 경내 경사도로를 걸어 올라가면 힘들기 때문에 전적지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서나 전승에 대한 감회와 산성의 풍광을 감상하게 하기 위하여 이 정자를 신축한 것이다.
사방이 트인 곳에 있는 이 덕양정은, 8모의 3단 평면기단에 건평 13.3평(44㎡)에 삼익공, 화반 받침을 한 8각 집이다.
기둥은 8각의 철근콘크리트로 했으며, 내부 바닥은 인조석으로 깔았고 지붕은 8모 모둠 지붕으로 하였으며 그 위에는 절병통을 설치하였다.
(6) 진강정(鎭江亭)
산 아래쪽 사방이 트인 곳에 있는 이 정자는 덕양정과 마찬가지로 전적지 순례자의 편의를 위해 세운 것이며 그 구조도 덕양정과 거의 같다.
그 구조는 이익공 집으로 원형기둥 위에 굴도리를 받치는 화반과 굴도리아지가 있고 주두 위 첨자를 두었다.
기단은 장대를 놓기 위해 계단이 건물 바닥과 연결되어 있으며 계자 난간과 계자 난간대가 긴 의자를 겸하게 하였다.
규모는 건평 10.9평(36㎡)으로 덕양정보다 다소 작으며 겹처마 사모지붕에 절병통(節甁桶)을 올렸으며 역시 철근콘크리트로 신축하였다.
(7) 휴휴정지(休休亭址)
행주내리 행주산성 남쪽 기슭에 있었다. 원래 고려시대 사찰인 소화사(小華寺)의 터였으나, 지금은 정자도 없고 그 터만 남아있다.
고려 학사(學士) 인빈수사(印份修史)의 땅에 있었다. 학사가 이곳에서 단약(丹藥)을 만들어 먹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8) 애련당지(愛蓮堂址)
내성동에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조선시대 처사 민후철(閔後哲)이 지은 것으로 주위의 수풀과 냇물이 한데 어우러져 승경을 이루었는데, 다시 정자 앞에 작은 연못을 파고 연을 심어 스스로 즐기면서 정자의 이름을 애련당이라 하였다. 그 밖에 이곳을 당시의 문인 참판 안광연(安光淵), 우의정 이숙(李䎘), 판서 남용익(南龍益), 농암 김창협(金昌協), 성재 민이승(閔以升) 등이 지은 시가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여 주고 있다.
(9) 귀래정지(歸來亭址)
외성동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귀래정(歸來亭)은 판서 죽소 김광욱(金光煜)이 세운 것으로 중국 처사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취하여 정자의 이름을 귀래정이라 하였다 한다. 이 귀래정에 관해서는 김광욱(金光煜)의 자제시(自題詩)뿐만 아니라 택당 이식(李植), 양파 정태화(鄭太和), 백헌 이경석(李景奭) 등이 지은 시가 있으며,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당시의 귀래정 산수화한 폭이 전해지고 있다.
(10) 관가정지(觀稼亭址)
내성동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았다.
관가정은 화순 최씨 최로(崔櫓)가 이곳의 현령으로 부임하여 세운 것으로 근교 농민들의 농사짓는 모습을 보기에 가장 적합하다 하여 호를 관가정이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곳의 경치를 읊은 것으로 죽소 김광욱(金光煜)의 시가 있다.
(11) 매학당지(梅鶴堂址)
외성동 귀래정의 동쪽 산기슭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매학당은 김광욱(金光煜)의 손인 목사 김성최(金盛最)가 건립하였다. 한편 같은 곳에 관란정(觀瀾亭)이 있었는데, 이는 죽소의 증손인 의령현감 김시좌(金時佐)가 세운 것이다.
(12) 유사정지(流沙亭址)
외성동 봉정리에 있었으나, 후에는 사옹원 분원이 자리를 잡아 왕께 올리는 웅어를 잡는 위어소로 쓰이면서 기와를 대신하여 초가지붕을 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13) 연체당지(聯棣堂址)
외성동 유사정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연체당은 감역 김현행(金顯行)이 건립한 것으로, 세 형제가 한집에서 화목하게 살았기 때문에『시경』상체의 뜻을 취하여 정자 이름을 연체당이라 하였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당액을 쓰고 강규환(姜奎煥)이 이를 기록하였다고 전한다.
(14) 범허정지(泛虛亭址)
외성동 유사정 북쪽에 있었다.
범허정은 1678년(숙종 4) 이조 판서 안광연(安光淵)이 세운 것으로, ‘학해범허주(學海泛虛舟)’의 뜻을 취하여 정자 이름을 범허정이라 하였다. 정자를 세운 뒤 안광연(安光淵)은 약천 남구만(南九萬)․동강 조상우(趙相愚) 등과 더불어 시주로서 즐기면서, 범허팔경(泛虛八景)을 남겼다.
(15) 장밀헌지(藏密軒址)
외성동에 있었다.
장밀헌은 범허정의 손자인 안인명(安寅明)이 세운 것으로 원래 안하옹(安下翁) 조윤형(曹允亨)이 쓴 현액이 있었다.
16) 육괴정지(六槐亭址)
외성동에 있으며 귀래정 후록에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육괴정은 범허정 안광연(安光淵)의 형인 황간현감 안광준(安光浚)이 건립한 것이다. 일찍이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정자의 터전을 귀래정 주인 김성최(金盛最)에게 청하니, 김성최(金盛最)가 술을 마시고 허락하면서 시한 수를 지어 이르기를, ‘일편강산승삼배(一片江山勝三杯)(한조각의 江山이 석 잔의 술보다 낫다)’라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안광준이 죽고 정자 또한 무너졌다 한다.
(17) 귀락당지(歸樂堂址)
외성동에 있으며 범허정의 서쪽에 있었다.
귀락당은 판서 이만성(李晩成)이 세워 만년의 여가를 즐기던 곳이다. 후에 김재화(金載華)가 거주하게 됨에 따라, 당명을 고쳐 일어정(一漁亭)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뒤 다시 판서 김세균(金世均)의 묘사가 되어 그 이름이 바뀌게 되었는데, ‘춘우로기유(春雨露旣濡)’의 뜻을 취하여「춘우루(春雨樓)」라 하였다.
(18) 낙건정지(樂健亭址)
외성동 용정 위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낙건정(樂健亭)은 조선 숙종 때의 판서 김동필(金東弼)이 세운 것으로, 중국 구양수(歐陽修)의 사영시(思穎詩) “급신건강시위락(及身健康始爲樂), 막득양병회부휴(莫得襄病懷扶携)(몸이 건강할 때라야 비로소 즐거움이 있나니 쇠하고 병들어서 부축임을 기다리지 말라)”의 뜻을 취해 정자의 이름을「낙건정(樂健亭)」이라 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김전신(金戰愼)이 지은 낙건지(樂健誌)와 서당 이덕수(李德壽)가 지은「낙건정기(樂健亭記)」가 있다. 또 원교 이광사(李匡師)가 지은 시「낙건팔경(樂健八景)」에 백하 윤순(尹淳)이 쓰고,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당액이 있었다 한다.
(19) 소쇄루지(瀟灑樓地)
외성동 범허정 서쪽에 있었으나 후에 권율 장군의 사당인 기공사로 쓰이게 되었다.
소쇄루는 낙건정 김동필(金東弼)의 아들인 상고당 김광수(金光遂)가 세운 것으로 일명 망운루(望雲樓)라고도 한다.
(20) 평원정지(平遠亭址)
외성동에 있으며 범허정 남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평원정은 장밀헌 송인명(宋寅明)의 둘째 아들인 참의 송익언(宋翼彦)이 세운 것이다.
(21) 고심정지(古心亭址)
외성동에 있으며 범허정 후록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고심정은 인천부사 김근행(金謹行)이 건립한 것으로 옛날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에게 글을 배우던 곳이라 하여 건물을 새로 지어 기념한 곳이다.
(22) 취백당지(聚白堂址)
외성동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취백당에 관한 문헌으로 서당 이덕수(李德壽)가 지은『낙건정기(樂健亭記)』에 있으나, 누구에 의해 건립된 것인지 알 수 없다.
23) 이가순(李可順) 공덕비
윤원삼, 조익순, 최춘근 등 공덕비건립위원회에 의해 세워졌다. 오석(烏石) 재질이며, 규모는 높이 150cm 폭 75cm, 두께 30cm이다. 현재 수리조합 마당에 세워져 있다.
고양 농지개량조합의 전신인 수리 조합의 모체가 된 관내 토지 천 여 정보를 옥토(沃土)로 전환시켜 수리안전 지구로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이가순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제 7권 자료편, 금석문편 참조)
24) 해병대 행주도강 전적비
6.25 당시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한 여세를 몰아 우리나라와 미국 양국의 해병대가 한강을 건너 서울 진격의 교두보를 확보한 행주도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1958년 해병대 사령관이 세웠으나 1984에 보수하여 다시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도강의 의의와 비 건립의 동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탑의 규모는 8m, 경내의 면적은 24평이다.
25) 은영(殷影) 묘
행주외동 177의 3 덕양산 북쪽 기슭에 있다. 봉분의 석물은 상석과 동자상 2, 문인석 2구가 세워져 있다. 또 1979년 9월 행주 은씨 대종회에서 건립한 오석의 묘비는 크기가 폭 43cm, 두께 18cm, 높이 115cm로, 이현종(李鉉淙)이 지은 비문에는 “신라상대등 고려증태보충숙공 은영지묘(新羅上大等 高麗贈太保忠肅公 殷影之墓)”라 새겨 있다.
26) 행주 서원지(幸州書院址)(경기도 유형문화재편 참조)
27) 사옹원 분사지(司饔院分寺址)
행주외동 용정 서쪽 기슭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옛 유사정 터로 옮겼다.
조선시대 궁중의 음식을 관장한 사옹원 낭관이 매년 4월에 이곳에 와서 50일 동안 머물며 매일 임금께 웅어를 잡아 바쳤다고 한다.
28) 소화사지(小華寺址)
행주산성 가 호숫가에 있었으나, 지금은 다만 고려 인빈(印份)의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파초잎이 발 밖에서 우니 산에 비오는 줄 알겠고蕉鳴箔外知山雨
돛대가 봉우리 위에 나오니 바다에 바람 있는 줄 알겠다. 帆出峯頭見海風
29) 천주교 행주교회
고양시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회로서 정식 명칭은 능곡교회라고 한다. 1905년에 김원영[아우구스띠노] 초대 신부가 부임하였다. 토당동 행신동 행주내외동 대장동 신평동을 관할한다.
행주교회 사진
제27절 신평동(新坪洞)
제28절 화전동(花田洞)
1) 이지신(李之信) 선생 묘(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2) 이구(李絿) 정문
조선 경종 때 정랑 이구(李絿)는 임인옥사로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암혈 속에서 굶어 죽음으로써 권력을 둘러싸고 당쟁을 일삼는 시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1725년(영조 1) 대신을 통해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정문을 내려주고 증직케 하였다.
제29절. 현천동(玄川洞)
1) 송세지(宋世智) 묘
배 숙부인 파평 윤씨의 묘와 합폄하였다. 묘역에는 문인석 2구와, “현릉 참봉 송세지 배 숙부인 파평윤씨지묘(坡平尹氏之墓)”라 적힌 표석이 있는데 크기는 폭 30cm, 두께 15cm, 높이 75cm이다.
송세지(宋世智)는 조선조 제7대 세조 때 권신인 여산군 송익손(宋益孫)의 손자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2) 송초(宋礎) 묘
배 정부인 윤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묘역에는 문인석 2구와, 1579년(선조 12) 8월에 건립된 묘갈이 있는데 대리석으로 규모는 폭 5척, 두께 20cm, 높이 5척이며 묘갈명은 최립(崔岦)이 지었다.
송초(宋礎)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21년(중종 16)에 출생하여 선조 11년에 사망하였다. 자는 지경(支卿)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세조 때 권신인 여산군 송익손(宋益孫)의 증손이며, 현릉 참봉 송세지(宋世智)의 아들이다. 벼슬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3) 민순(閔純) 묘 (제2권 고양시 문화유산, 향토유적 및 제2권 인물편 참조)
4) 이상황(李相璜) 묘
이상황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63년(영조 39)에 출생하여 1841년(헌종 7)년에 사망하였다. 자는 주옥(周玉)이며 호는 동어(桐漁), 또는 현포이다. 본관은 전주로 효령대군의 후손이며, 승지 이득일(李得一)의 아들이다. 1786년(정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열린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로 관직에 나아가 정언, 형조 참의, 황해도와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13년(순조 13)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호조 판서가 되었으며, 2년 후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홍경래의 난으로 그 기능이 마비된 장군위를 폐하고, 새로이 별친기위를 설치케 하였다. 순조 20년 이조 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한때 병으로 인하여 관직을 버리고 판중추부사의 한직을 맡았다가 다시 좌의정에 복직하였다. 순조 30년 세손사부를 겸임하고, 또 영중추부사로 주청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영의정에 올랐다가 1년도 못되어 병으로 사직했으나, 곧 순원왕후〔순조 비〕의 특명을 받고 다시 영의정이 되어 실록청총재관을 겸임하였다. 1838년(헌종 14)에 다시 사직하였다가 이듬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헌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며 저서로는『동어집(桐漁集)』이 있다.
5) 해포 봉수대(醢浦烽燧臺)
덕은동과 현천동 경계에 있는 해발 126m의 대덕산 산봉에 있다. 이 산의 옛 이름이 해산(醢山)이며, 산 주위의 넓은 포구를 해포(醢浦)라고 부른 데서 해포봉수라 하였다.
조선조 봉수강 제4선로의 직봉으로 서쪽의 고봉봉대에서 받아 동쪽의 무악 안현(鞍峴)으로 전달하였다.
6) 송응광(宋應光) 묘
본관은 은진. 배 정부인 윤씨 부좌하였으며, 오석의 묘비는 높이 182cm의 문인석 2구가 있다. 우봉 현령을 지냈으며 증 호조참판을 받았다.
제30절. 덕은동(德隱洞)
1) 김익(金熤) 묘
대덕산 기슭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광중(光仲), 호는 죽하(竹下)․약현(藥峴),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의 5대손, 판돈녕부사 김상석(金相奭)의 아들로 1763년(영조 39)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왕이 인원왕후〔숙종 계비〕의 제삿날을 전후해서 매일같이 불공을 올리는 것을 반대하여 갑산에 유배되었다. 풀려나온 후 응교 등을 거쳐 정조 2년에 대사헌이 되고 1780년 예조 판서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후 1782년 우의정, 1789년 영의정이 되었다. 시호는 문정.
2) 풍수정지(風樹亭址)
대덕산 아래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풍수정은 조선 성종의 4대손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별장으로 정자에서 보이는 긴 강과 넓은 평야가 승경을 이루고 있다.
제31절. 향동동(香洞洞)
1) 이분(李翂) 묘
이분(李翂)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588년(선조 21)에 출생하였으나, 사망 시기는 불확실하다. 호는 우송재(友松齋), 효자 이유항(李有恒)의 아들이며 그도 또한 효자로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즉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외조부모에게서 자랐는데 그 나이 16세 되던 해 할머니의 병을 극진히 간호하여 낫게 함으로써 동리 사람들을 탄복케 했으며 아버지의 병 간호를 위하여 똥까지 맛을 보며 수명을 연장시켰다고 전해온다. 또한 1617년(광해군 9)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대북파에 의해 폐모론이 대두하고, 이듬해 인목대비를 삭호하여 서궁에 유폐시키는 패륜의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24세의 나이로 상소를 올려 세상을 꾸짖었으나 그의 뜻이 상달되지 못하자 산림에 은둔하여 독서로 일관하였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안정되자 산림을 나와 과거에 응시,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2) 효자 이흡(李翕) 정문지
조선 인조 때 효자 이흡(李翕)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어머니가 적의 공격을 받게되자, 형 이핵(李翮)과 함께 어머니를 감싸다가 적이 쏜 화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자 적은 그의 효행에 탄복되어 어머니를 놓아주었다고 한다.
한편 그의 아내 오씨도 남편 이흡(李翕)이 죽자 그의 뒤를 따라 불 속에 뛰어들어 순절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나라에서는 효자문과 열녀문을 함께 하사해 주었다 한다.
3) 일휴정지(逸休亭址)
봉영산 아래 있다. 일휴정지(逸休亭址)는 조선 후기 숙종 때 우의정 이숙(李䎘)이 세웠다. 한편 부근에 이숙의 아우 농재(濃齋) 이익(李翊)이 세운 파호정(把湖亭)이 있었으나, 이것 역시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4) 소헐루지(小歇樓址)
일휴정의 서쪽 기슭에 있었다.
소헐루는 조선 후기 판서 이재(李縡)가 세운 것으로 이 정자를 세운 도정리(陶井里)의 뜻을 취하여 자신의 호를 도암(陶庵)이라 하였다. 또 정자 주위에 청계와 관악이 좌우로 벌려있고, 돛단배와 물새가 한가로이 노닐고 있는 모습을 읊은 시,『도산팔경(陶山八景)』이 있다.
5) 이은(李垠) 묘
본관은 우봉. 증 정부인 문화 유씨와 쌍분되어 있고 화강암 묘비, 상석,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높이 108cm의 묘비가 좌우에 세워져 있다. 사헌부 감찰 증 의정부 좌참찬을 받았다.
6) 봉현(蜂峴)봉수대
용두동 및 화전동 향동동에 걸쳐서 서울 역천, 구산동을 경계로 하는 봉산(일명 鳳嶺山)의 산정(山頂)이다.
조선시대의 봉수대 제4선로의 간봉으로 서쪽의 고봉봉수를 받아 동쪽으로 서울 무악(毋岳)의 안산(鞍山)으로 전하였다.
제2장 일산구(一山區)
제1절. 일산동(一山洞)
1) 정지운(鄭之雲) 선생 묘 및 신도비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2) 장경(張烱) 묘
묘는 일산동 소개울 마을 고봉산(高峰山) 기슭에 있으며 파산 부부인 윤씨(坡山 府夫人 尹氏), 증영주부부인 고씨(贈瀛州府夫人 高氏)의 봉분과 함께 나란히 있다.
본래 이 묘와 신도비는 서울시 서대문구 불광동(佛光洞)에 있었던 것을 1974년 현 위치로 옮다가 다시 산 위로 이장하였다.
장경은 조선조 후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本貫)은 인동(仁同)이며, 옥산부원군에 추증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안헌(安憲).
3) 일산 밤가시 초가(제2권 문화유산, 중요 민속자료편 참조)
4) 장수(張壽) 묘
본관은 인동. 증 정경부인 충주 지씨 외 부좌 쌍분, 동자상, 향로석, 장명동, 상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과산 행가의대부.
5) 장응인(張應仁) 묘
본관은 인동. 배 증 정경부인 남포 박씨와 부좌, 묘비, 상석, 향로석, 문인석 4구, 망주 등이 배치되어 있다. 각 석물의 조형미가 뛰어나다. 증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행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6) 장경인(張敬仁) 묘
본관은 인동. 정부인 영월 신씨와 부좌, 상석, 대리석 재질의 향로석, 문인석, 묘갈, 망주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증 정헌대부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제2절. 식사동
1) 어침사지(御枕寺址)
어침사는 고려시대 사찰이다.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이 불교를 독실히 믿어 항상 제사를 차려놓고 사람들에게 음식을 베풀었는데, 어느 날 궁궐 밖으로 빠져 나와 이 곳 암자에서 하루를 지냈다하여 명하여 어침사라 부르게 하였다. 현재는 자리만 남아 있다. <<최상규 저『고양선현전』>>
2) 학성군(鶴城君) 이연정(李連丁) 묘 및 신도비
식사동 산 30번지 견달산 아래에 배 광주 안씨와 합폄되어 있다. 1564년에 세운 신도비는 광나루에 있었으나 1977년 8월 1일 이곳으로 이장을 하면서 세웠다. 그 아래에는 학성군의 아들 김해(金海) 도정(都正) 이간(李墾)의 묘가 배 한산 이씨와 합폄되어 있고, 그 아래에 이간의 아들 가선대부 증 이조참판 이수남(李壽男)의 묘가 배 정부인 진주 유씨와 합폄되어 있다.
학성군은 정종대왕 10자 덕천군의 아들인 신종군의 4남으로 1470년(성종 1)에 태어났다. 처음 학성에 군수로 임명되었고, 1499년(연산군 5)에 승진하여 정(正)이 되었다. 중종 때에는 원종 1등공신에 녹훈되어 이계가 명선대부에 이르렀으며, 1503년에는 선릉(宣陵)에 번(番)을 드는 반열에 올랐다. 이듬해 정이ㅡ대부로 가자(加資)되어 군(君)으로 봉해졌고, 1544년(중종 38)에 병을 세상을 떠났다.
3) 식사동 느티나무 (제2권 문화유산, 마을지정 보호수편 참조)
4) 신확(申確) 묘
묘는 식사동 능안골 오거리에서 오룡동 마을을 지나 북동쪽 방향인 마을에 있으며 배 정부인 광주 정씨의 봉분 그리고 정부인 상주 김씨의 묘 등 3기의 봉분이 나란히 있다. 봉분의 주위로는 커다란 사성이 둘러쳐져 있다. 중앙에 있는 신확의 봉분 앞에는 1629년(인조 7)에 세워진 대리석 재질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규모는 총 높이 171cm, 가로 63cm, 두께 31cm의 규모이다. 비의 앞면에는 ‘증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지의금부사 평림군 행건공장군 세자익위사익위 신확지묘 정부인 광주정씨지묘, 정부인 상주김씨지묘(贈 純忠補祚功臣 資憲大夫 刑曹判書 兼知義禁府事 平林君 行建功將軍 世子翊衛司翊衛 申確之墓 貞夫人 廣州鄭氏之墓 貞夫人尙州金氏之墓)’라 쓰여져 있다. 비의 뒷면에는 숭정 원년 9월 일 립(崇禎元年 九月 日 立)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묘비는 화강석의 기단(基壇)이 갖추어져 있고 또 매우 뛰어난 수법의 이수(螭首)가 조각되어 있다.
묘비의 앞으로는 상석, 향로석, 문인석, 망주석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특히 망주석에는 두 줄의 가는 선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망주 앞쪽의 문인석은 입이 좌우로 올려지고 눈에는 작은 미소를 띠고 있는 뛰어난 석물(石物)이다.
신확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이며 평림군에 봉해졌다.
5) 이승상(李承常) 묘
본관은 전주. 정부인 여홍 민씨와 합장, 묘비, 혼유석, 상석, 향료, 동자상, 망주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죽산현감 남원부사.
6) 이증(李拯) 묘
본관은 전주. 숙부인 안동 권씨와 합장, 봉분에 병풍석이 있고 묘비, 혼유, 상석, 동자, 망주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통훈대부 동복현감.
7) 강안수(姜安壽) 묘
본관은 진주. 배 증 정경부인 남양 홍씨, 묘비, 상석, 고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증 가정대부 호조참판 행 예빈시 소윤.
8) 신경진(申景珍)
본관은 평산. 상석, 문인석, 묘비 등이 배치되어 있다. 배 정부인 능성 구씨, 어영대장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9) 황종신(黃從愼) 묘
묘 앞에 대리석 재질의 묘비는 1512년(정덕 7)에 세운 것이며 이밖에 상석, 향로석, 문인석 등이 배치 되어있다. 통정대부 행 영흥 대도호부사.
10) 설씨(薛氏) 묘
이 묘는 식사동에 있다.
설씨는 조선 제 2 대 정종의 둘째 아들인 순평군 군생(群生)의 처이며, 아버지는 순창인 판사재감사 설존(薛存)이다. 부(夫) 순평군 군생(群生)의 묘는 용두동에 있다.
11) 숭선군(嵩善君) 이총(李摠) 묘
이 묘는 식사동에 있다. 묘는 배 군부인 진주 강씨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1583년(만력 11) 4월에 묘비를 세웠다. 비는 대리석으로서 폭48cm, 두께 14cm, 높이122cm로 음기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멸되어 1978년 2월 22일에 오석에 기단옥개석의 묘표를 새로 입석하였는데 “숭선군 문헌공 군부인 진주강씨지묘(嵩善君 文憲公 郡夫人晋州姜氏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이 묘갈은 이이(李珥)가 짓고 이홍헌(李弘憲)이 쓴 것으로 비신은 폭 60cm. 두께 28cm, 높이 180cm 이며 석물로는 상석 1기, 동자석 2기, 망주석 2기가 있다.
숭선군은 조선 제 7대 세조대왕의 아들인 덕원군의 넷째 아들로 자는 종(淙)이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시호는 문헌(文憲).
12) 이숙균(李淑均) 묘
이 묘는 식사동에 있다. 봉분 앞 묘비에는 “증가선대부 한성판윤 행통정대부 삭방절도사 광주목사 단양이공휘숙균지묘(丹陽李公諱淑均之墓)”라 새겨져 있다.
이숙균은 조선 초의 문신으로, 1397년(태조 6)에 출생하여 1448년(세종 30)에 사망하였다. 자는 균평(均平), 본관은 단양으로 익평공 우의정 이무(李茂)의 손자이다. 1423년(세종 5) 삭방절도사로 외직을 맡아 많은 공을 세웠는데, 특히 서방을 지키는 방책을 자주 올려 당시 국방정책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1426년(세종 8) 광주 목사로 부임하여 서민을 위한 탁월한 정치를 하였으며, 여가를 이용하여 군민에게 무기와 기술 및 인재양성에 주력하여 고과가 최고였다고 한다. 후에 강릉 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임지에 나가기 전에 세상을 뜨므로 세종은 그의 공을 높이 여겨 가선대부 한성판윤에 증직되고 예장을 하였다. 시호는 회옹(晦翁).
13) 강수남(姜壽男) 묘
이 묘는 식사동 방하현에 있다. 묘 앞에는 폭 44cm, 두께 20cm, 높이 130cm의 옥개, 기단부가 있는 오석의 묘갈이 있는데 음기는 이익(李翼)이 찬했으며 1976년 8월에 권용직(權容稷)이 표문을 지어 세웠다. 상석, 동자석 2기, 문인석 2구, 망주석 2기 등이 배열되어 있다.
강수남(1552:명종 7~1592:선조 2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인수이다. 강효정(姜孝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세응(姜世應)이고, 아버지는 진사 강숙(姜璹)이며, 어머니는 성수근(成守瑾)의 딸이다. 작은아버지인 진사 강서(姜瑞)에 입양되었으며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전적을 거쳐 예조․병조의 좌랑과 정랑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과 평양이 차례로 함락되자 경기도 관찰사 심대(沈岱)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였다.
그는 백면서생으로서 군사에 관하여 배운 일이 없었지만, 오로지 충의의 마음으로 국가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출전하기에 앞서 가족들을 불러놓고 이별을 고하고 죽은 뒤에 시체라도 찾게 하고자 붉은 실을 머리에 얽어매고 옷소매에는 이름을 기록하였다.
그 해 10월 군사를 움직여 한성을 탈환하려던 중 삭녕 전투에서 야습을 받아 군사가 흩어졌으나 가노(家奴) 검산(檢山)과 끝까지 싸우다 함께 죽었다. 출전할 때 신표로 상투에 묶었던 붉은 실을 보고 겨우 머리만을 수습하여 장사지냈다. 뒤에 검산의 자손도 복호되었고 선조가 제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이조참판을 추증하였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가증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
14) 윤덕준(尹德駿) 묘
이 묘는 식사동에 있다. 윤덕준(1658:효종 9~1717:숙종 43)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원, 자는 방서(邦瑞), 호는 일암(逸庵)이다. 윤사(尹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형각(尹衡覺)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윤반(尹攀)이며, 어머니는 이정기(李廷夔)의 딸이다.
1679년(숙종 5)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기거주(起居注)와 정언․지평․교리 등을 차례로 지냈다. 1701년 대사간으로서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관련된 장희재(張希載)의 죄를 다스렸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의 피해와 세자〔뒤의 경종〕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대신들을 극형에 처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 뒤 형조 판서에 승진해 오랫동안 미결로 있던 소송 사건을 신속히 처리해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어서 한성부 판윤․우참찬․예조 판서․공조 판서 겸 종부시 제조․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716년 사건 처리에 공평하지 않다는 탄핵을 받고 한 때 파직되었으나, 뒤에 좌참찬이 되어 다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이 때 과옥사건(科獄事件)이 일어나 이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꺼려 회피할 때, 공평하고 정확하게 조사해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금오(의금부)에서 수사한 일을 잘못 처리했다 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성품이 단정하고 강직해 직간할 때 왕의 뜻에 거슬려 엄한 교지를 받아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한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릴 만큼 영특하고 총명했으며 경서와 문장에 능하였다. 특히, 국조전례(國朝典禮)에 밝았고, 문장은 조리가 있었으며, 시도 간아(簡雅)하였다. 해서․초서․전서․예서에 재주가 있어 한 때 사대부들 사이에 그의 금석지각이 유행했다 한다. 말년에 서사(書史)로서 여생을 보냈으며 뒤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요청으로 복관되었다. 시호는 효정(孝靖).
제3절. 풍동(楓洞)
1) 이춘화(李春和) 묘
풍동 아현에 있으며, 배 죽산 박씨의 묘와 합폄하였다. 이춘화는 조선 초의 문신으로, 1440년(세종 22)에 출생하여 1508년(중종 3) 12월 2일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단양이며, 단산부원군 익평군 이무(李茂)의 증손이다. 벼슬은 공조판서 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를 지냈다.
2) 유사원(柳思瑗) 묘
풍동 식곡에 있으며, 배 철원 최씨와 계배 경주 이씨의 묘와 합폄하였다. 그리고 묘갈문은 백사 이항복(李恒福)이 지었다. 묘 앞에는 폭 2.5척(尺), 두께 8촌(寸), 높이 5척의 대리석으로 된 묘갈이 있는데, 오래되어 기록을 확인할 수 없고 상석 1, 무관석 2, 장명등 1기가 있으며, 지문(誌文)은 백사 이항복이 지었다 하는데 이는 공의 계배가 이항복의 누이였기 때문이라 한다.
유사원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1541년(중종 36)에 출생하여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사망하였다. 처음 이름은 유응룡(柳應龍)이며 자는 경오(景晤)이고, 초자는 운보(雲甫)이다. 본관은 문화(文化)로서 강화부 경력을 지낸 유질(柳秩)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었다. 이어 전적과 병조 좌랑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성천(成川)으로 피란을 떠난 세자를 시종하였다. 그 후 평안도도사 장령․문학 등을 지내고 1596년(선조 29)에는 청병을 위해 급고주문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군사를 영남지방에 인도하는 중임을 맡았다. 1598년(선조 31) 호조참의 여주목사를 거쳐 고성군수를 역임하였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3등으로 문흥군에 봉해지고 한성부우윤 겸부총관이 되었으며, 1606년(선조 39)에 다시 진주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3) 신의경(申義慶) 묘
신의경(申義慶)은 조선시대 학자로 벼슬은 진사에 지나지 않았으나, 사계 김장생(金長生)과 도의를 담론하고,『상례유요』를 찬술하였다. 그러나 자손이 없어 오늘날 그의 묘는 거의 폐총이 되어 있다.
5) 유질(柳秩) 묘
본관은 문화. 배 증 정부인 진주 유씨와 합장, 상석 망주석 무인석 대리석 묘비 등이 있다. 목포 만호를 역임하고 문창군에 봉하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제4절. 사리현동(沙里峴洞)
1) 이정암 정려문(李廷馣 旌閭門)
관산동에서 문봉동~일산 방면으로 이어진 69번 시도로 우측의 벽제초등학교 정문 옆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정려문은 맞배지붕 형태의 정려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원형기둥에 주추를 놓아 지어진 정려각은 단청부연을 했는데 정려문은 북-남쪽으로 길게 세워져 있다. 이 정려문은 1592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무공을 세운 충목공(忠穆公) 이정암의 충군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 정려문은 1598년 전쟁이 끝난 지 25년 후인 1623년 조선조 인조 원년에 하사된 것이다. 문의 규모는 높이 210cm, 폭이 250cm인데 37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문의 정면 상단에는 총 78자의 정려문 목판 글씨가 남아 있다. 그 내용은 ‘충신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황해도 관찰사 병마절도사 도순찰사 증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감 춘추관사 세자사부 월천부원군 시충목공 이정암지려(忠臣資憲大夫 知中樞府事 兼黃海道 觀察使 兵馬節度使 都巡察使 贈効忠杖義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兼領經筵監 春秋館事 世子師傅 月川府院君 諡忠穆公 李廷馣之閭)’라 표되어 있다. 정려문의 문자는 청색 바탕의 목판에 흰 글씨로 쓰여져 있는데 문은 댓돌 위에 오려져 일반적인 홍살문의 모습과 비슷하다.
충목공 이정암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1541년(중종 36)에 출생하여 1600년(선조 33)에 돌아갔다. 본관은 경주로 이탕의 아들이며 지퇴당(知退堂) 이정형의 형이다.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3년 뒤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정자(正字)가 되었다. 선조 11년에 양주 목사로 나아가 향교와 서원을 중수하여 유학 진흥에 힘쓰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임진왜란 대는 이조 참의로서 개성 방위에 공을 세우고 연안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격퇴, 그 공으로 가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병조참판, 전라 감사, 지중추부사, 황해도 순찰사를 역임하고 사망하자,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추록하고, 좌의정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증되었다.
2) 사유재(四留齋) 사우(祠宇)
사리동 122번지에 있으며, 조선시대의 충신 충목공 이정암(李廷馣)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건물 구조는 전면 2칸, 측면 1.5간의 목조건물로 지붕은 단청부연을 한 조선와가이다. 그리고 석장을 두른 경내에는 정려각과 홍문 및 기공비가 세워져 충목공의 위업을 길이 전해주고 있다. 한편 삼한임련방집에는 예조 좌랑 윤민일(尹民逸)이 지은 사제문과 통훈대부 전행수원부사 조정견(趙庭堅)이 지은 재문이 수록되어 있다.
3) 사리현동 느티나무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동지정 보호수편 참조)
4) 김수신(金守信) 묘
배 정경부인 안동 권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 주위의 석물로는 상석 1, 망주석 2기와 문인석 2구가 있다. 1654년(효종 5) 9월에 건립된 대리석의 묘비는 크기가 폭 52cm, 두께 16cm, 높이 120cm이며, “증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 겸판의금부사 행가선대부 영흥대도호부사 김공휘수신지묘(金公諱守信之墓)”라 새긴 비문은 아들 김익(金釴)이 썼다.
김수신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사부(士孚)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5) 정종본(鄭宗本) 묘
신촌〔새말〕에 있으며, 배 증숙부인의 경주 이씨 묘와 합폄하였다. 봉분은 사각묘이며, 주위 석물은 상석 1, 장명등 1, 망주석 2기와 문인석 2구가 있으며, 그 밖에 2개의 묘표가 있다. 세종 25년(1443)에 건립된 화강암의 구비는 정의열(鄭義烈)이 지었으며 크기는 폭 15cm, 두께 17cm, 높이 120cm이다. 후에 건립된 신비는 크기가 폭 48cm, 두께 20cm, 높이 135cm이며, “증통정대부 병조참의 행판전농시사(行判典農寺事) 겸성균관사예(兼成均館司藝) 영일정공휘종본지묘(迎日鄭公諱宗本之墓)”라 새긴 표문은 16세 후손 정인용(鄭仁鎔)이 지었다.
정종본(鄭宗本)은 포은(圃隱) 정몽주의 둘째 아들이며, 조선시대 문신으로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사예를 거쳐 통훈대부 판전농시사를 역임하였으며, 후에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6) 이광(李光) 묘
사리현동 산 93의 634에 있다. 봉분의 높이는 1m, 둘레 6m이다. 이광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써 1887년(고종 24) 충청북도 청주에서 출생하여 1966년에 사망하였다. 1907년(융희 원년) 일본 조도전대학 정경과에서 2년간 수학한 뒤 중국 북경에 가서 북경대학을 졸업하였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부의원이 되고, 1952년에는 중국 하남성 정부 비서실장을 지내고, 동성의 재정청 제4과 주임, 중국 중앙은행 국고국 비서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과 함께 임시정부 특파화화구선무단장과, 이듬해 주화화표단의 동북총변사무처장 등을 지내면서 교포 지도에 힘쓰다가 1948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충청북도지사, 감찰위원장, 체신부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 받았다
7) 김경석(金景錫) 묘
사리현동에 배 정부인 안동 권씨 묘와 쌍분을 이루며, 또한 계배 정부인 평산 한씨의 묘가 부장되어 있다. 봉분 주위의 석물로는 상석 1기와 문인석 2구가 있다. 1584년(선조 17)에 건립된 백 대리석의 묘비는 크기가 폭 48cm, 두께 18cm, 높이 130cm이다.
김경석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석지(錫之)이며,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8) 김봉서(金鳳瑞) 묘
본관은 나주. 숙부인 광주 김씨의 묘와 병장하였다. 비두(碑頭)가 있는 대리석 묘비는 망주, 문인, 혼유,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절충장군 행 의홍위호군을 지냈다.
9) 김경근(金敬近) 묘
본관은 나주. 배 숙부인 전주 이씨 부좌, 묘 앞에는 대리석 재질의 묘표는 상석, 향로,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통정대부 형조 참의를 지냈다.
10) 정적(鄭積) 묘
본관은 하동. 배 숙부인 남양 홍씨 배 숙부인 이씨의 묘와 단분으로 있다. 조선조 전기의 묘표로 문인석,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 되어있다. 통정대부 행 사헌부 장령 이천부사(利川府使)를 지냈다.
11) 심천교
사리현 1동에 있다.
12) 장가점전교
사리현 1동에 있다.
제5절. 산황동(山黃洞)
1) 산황동 느티나무(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지정보호수편 참조)
제6절. 지영동(芝英洞)
1) 양우조(楊宇朝) 묘
지영동 산 93에 있다. 봉분의 높이는 1.2m, 둘레는 7m이다. 묘 앞에는 장대석의 단과 상석 및 묘비가 있다.
양우조는 독립운동가로서 1897년(광무 1)에 출생하여 1964년에 사망하였다. 자는 양묵(楊墨)이며, 호는 소벽(少碧), 1919년 도미하여 1926년 매사추세츠 우벳포오드 공과대학과 1928년 폴리버 공과대학을 졸업하였다. 미국 유학을 끝내고 중국상해로 가서 한국독립당 발기인으로 참여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위한 결의를 굳혔다. 1930년 중국 광동성 정부의 건설청 공업관리위원회 위원과 혁신사 주필을 했으며, 1931년 임시정부 의정의원을 거쳐 임시정부 재무부차장,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장 및 훈련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조국애를 불태웠다. 1946년 귀국하여 3.1 동지회회장, 인천 조선제마방직회사이사장, 방직협회이사를 지냈다. 1952년에 대한여론협회회장, 1955년 한중협회이사를 역임하였다. 1963년에는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제7절. 설문동(雪門洞)
1) 관운암지
유집일(兪集一)의 원당(願堂) 겸 재궁(齋宮)이었던 곳이나 지금은 자리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문신으로 1653년(효종 4)에 출생하여, 1724년(경종 4)에 사망하였다. 자는 대숙(大叔)․본관은 창원(昌原)으로 현감 유근(兪瑾)의 아들이다. 1680년(숙종 6) 진사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장령 등을 역임하였으며, 1694년(숙종 20)에는 위접관으로 대마도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며, 숙종 22년 승지, 부사직․경상도 관찰사, 황해도 관찰사 및 대사간 등을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숙종 말년에 형조․공조 판서를 지내고,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산릉도감 제조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제8절. 문봉동(文峰洞)
1) 문봉서원지(文峰書院址)
문봉서원지는 문봉동 빙석촌(氷石村)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이 터는 목장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지상에 건축물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땅위로 몇 기의 주춧돌과 대석이 있을 뿐이다. 화강암 재질로 된 추춧돌은 원형과 사각형 두 종류가 남아 있다. 이중 둥근 원형의 주추는 그 지름이 61cm, 네모난 사각형의 주춧돌은 한 면의 길이가 61cm이다. 석재의 각 사이사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어 당시 건물의 규모나 형태를 보는데 중요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문봉 서원은 조선조 1688년(숙종 14)에 건립되어 1709년(동왕 35)에 왕명으로 사액(賜額)을 받은 고양 지역 최초의 서원이다. 문봉 서원에는 고양 지역 출신이거나 관련이 있는 현인(賢人)들을 제향, 존모하고 있었는데 이른바 고양 팔현(高陽八賢)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서원에 제향 된 고양 팔현은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1454~1492),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 1485~1541), 행촌 민순(杏村 閔純 1519~1591), 복재 기준(服齋 奇遵 1492~1521), 추만 정지운(秋巒 鄭之雲 1509~1561), 모당 홍이상(慕堂 洪履祥 1549~1615), 석탄 이신의(石灘 李愼儀 1551~1627), 만회 이유겸(晩晦 李有謙 1586~1663) 선생이다.
문봉서원은 고양 지역 내의 행주서원(杏州書院)과 함께 학문연구와 제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1865년(고종 2)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 정책으로 훼철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2) 박안현(朴顔賢) 묘
이 묘는 식사동에서 문봉동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 좌측의 문봉동 뫼골 마을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경부인 여홍 민씨와 부좌되어 있다. 봉분의 주위로 사성이 둘러 있으며 정면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 좌우에 배치된 망주석(望柱石)은 높이 169cm이며 문인석은 183cm이다.
묘아래 150m 지점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는 선성각(仙成閣)이란 비각 내에 건립되어 있다. 신비는 화강암,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갓, 대좌(臺座), 비신이 갖추어진 구조이다. 신도비의 총 높이는 287cm 비신의 폭 84cm 두께 28.5cm의 규모로 비교적 비문이 잘 보존되어 있다.
비의 두전(頭篆)에는 ‘증영의정 행성천부사 박공 신도비명(行成川府使 朴公 神道碑銘)’이라 쓰여 있고 후손 창윤(昌潤)이 썼다. 또 비문은 김신국(金藎國)이 짓고 정형복(鄭亨復)이 썼다.
박안현(1574~1616)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이며 자는 기백(畿伯), 호(號)는 선곡(仙谷)이다. 160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 부수찬 등을 거쳐 성천부사 등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사망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 독산 봉수(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기념물편 참조)
4) 문봉동 느티나무(제2권 문화유산, 동지정 보호수편 참조)
5) 홍봉한(洪鳳漢) 묘
문봉동에서 독산봉수대를 오르는 길 왼쪽100m지점에 있는데 배 증 부부인 한산 이씨의 묘와 합폄하였다. 봉분 앞 석물로는 상석 1기, 망주석 2기, 동물석 2기가 있으며, 1974년 4월 29일에 건립된 오석의 묘표가 있다. 표문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치사봉조하(致仕奉朝賀) 증영조부원군(贈永曹府院君) 풍부홍공봉한지묘(豊府洪公鳳漢之墓)”라 새겨져 있으며, 묘표의 크기는 폭 60cm, 두께 30cm, 높이 167cm이다.
홍봉한(洪鳳漢)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1713년(숙종 39)에 출생하여 1778년(정조 2)에 사망하였다.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이다. 본관은 풍산으로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홍현보(洪玄輔)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참봉을 거쳐 세자익위사의 세마를 지냈다. 1743년(영조 19) 딸이 세자빈〔혜경궁 홍씨. 추증경의왕후〕으로 간택이 되었으며, 이듬해 정시문과의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의 사관이 되었다. 1745년(영조 21) 광주 부윤으로 특진되고 4년 후, 영조 25년 세자가 대리청정케 되면서 누진하여 다음해 어영대장이 되고, 이어 예조 참판으로 연접도감 제조를 지내고, 1752년(영조 28)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이 때 비변사 당상으로『임진절목(臨津節目)』을 지어 바쳤으며, 1775년(영조 31)에는 구관당상과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좌참찬에 승진하고, 세손사를 겸하였다. 1761년(영조 37) 세자가 왕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한 평양원유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인책 당한 이천보(李千輔)와 민백상(閔百祥) 등이 자살함으로써 대신 그가 우의정에 발탁되고 다시 좌의정 판돈녕부사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던 중 이듬해 5월 나경언(羅景彦)은 이러한 세자의 비행 10여 개 조목을 들어 임금께 상소하여 영조는 곧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하고, 친히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굶게 하였다. 이러한 세태를 관망한 그는 세자가 부왕의 미움을 사서 대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방관적인 태도로 나가 세자의 아사를 묵인하고 뒤주에 갇히던 날, 한강에 나가 여러 대신들과 선유를 즐겼다. 그러나 영조가 사도세자의 아사사건을 뉘우치고 시호를 내리자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사도세자의 죽음을 초래케 한 김구주(金龜柱) 일당을 탄핵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수의편(垂義篇)』을 찬술하여 세자 죽음의 전말을 상세히 적어 반대파인 벽파 제거의 구실로 이용하였다. 1763년(영조 39)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그 후 영조의 탕평책에 순응하여 많은 업적을 이룩했으며, 특히 당쟁의 폐해․인재의 발탁 등 시무 6조를 올려 당면정책을 건의, 시행케 하고 당시 커다란 민폐를 낳았던 환곡의 작폐의 엄금 백골징포와 은결의 재조사 등을 단행케 하여 국고의 충실과 백성의 부담을 절감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1771년(영조 47) 벽파의 책동으로 사도세자의 두 아들이 관작을 삭탈 당하고 세손[정조]까지 해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막다가 삭직되어 청주로 부처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홍국영(洪國榮)의 기민한 수습으로 시파가 승리하게 되어 풀려 나와 봉조하가 되었다.
조선후기 문화발전에 많은 업적을 이룩했으며 시호는 익정(翼靖)이다. 저서로『정사휘감(正史彙鑑)』이 있으며,『익익재만록(翼翼齋漫錄)』을 편하고, 뛰어난 글씨로『어정홍익정공주고(御定洪翼靖公奏藁)』를 남기고 있다.
6) 허전(許傳) 묘
견달산 서쪽 기슭에 있다. 원래는 과천에 안치되어 있던 것을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묘는 정경부인 조씨와 합폄하였으며 오석에 옥개석이 있는 묘표가 있는데(폭 55cm, 두께 22cm, 높이 120cm)이다. 전면에 “성재허선생지묘(性齋許先生之墓) 정경부인(貞敬夫人) 조씨부(趙氏祔)”라 기록되었으며, 그 아래쪽에 신도비가 있는데 이는 1970년 한식절에 수입석(竪立石)된 것으로 이수에 귀부를 갖춘 오석으로 비명을 이가원(李家源)이 짓고 족손 허술(許述)이 썼으며 전자는 한욱동(韓旭東)이 썼다. 그 외의 석물로는 상석 1, 장명등 1, 문인석 2, 망주석 2기가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50m 지점에 그의 첩(妾) ■씨의 묘가 있다.
7) 문봉리 지석묘군
문봉동 240번지에 기반식 지석묘 3기가 있다. 길이 60cm, 폭 50cm, 높이 30cm로 비교적 소규모의 지석묘군을 이루고 있으며, 부장품에 대해서도 아직 밝혀진 바 없으나 이곳이 선사시대 이미 청동기문화를 형성해 있던 지역의 하나임을 밝혀주는 단서라 하겠다.
제9절. 성석동(城石洞)
1) 이천우(李天祐) 묘
성석동 산 1415에 있다. 봉분의 넓이는 20평이며 곡담은 길이 50m이다. 석등 1, 상석 1기가 있으며, 앞에 묘비가 있는데 둘레 1m, 높이 1.8m이다.
이천우는 조선 초의 문신으로 출생 시기는 미상이며, 1417년(태종 17)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전주로 태조 이성계의 형인 원계(元桂)의 아들이다. 고려 말, 1369년(공민왕 18) 동녕부의 수령으로 있다가,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수차례 왜구를 물리쳤으며 1392년 태조를 도와 조선건국에 태조 3년 중추원사가 되고, 강원도 조전절제사를 거쳐 1398년(태조 7)에는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이 해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정사공신 2등으로 완산후에 피봉되었다. 2년 뒤인 정종 2년 판중추원사를 지냈으며, 제 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좌명공신 2등이 되고 안주 도절제사가 되었다. 1403년(태종 3) 완산군에 개봉된 후 판사평부사 의정부 찬성사에 올랐다. 1409년(태종 9) 병조판서로서 삼군진무소가 신설되자, 도진무도총제를 겸임하였다. 그 뒤 판의금부사에 이어 찬성사 겸판의용순금사사, 이조판서, 서북면 도체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14년(태조 14) 완산부원군에 진봉되고 의금부 도제조를 지낸 후, 다시 찬성사에 보직되었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영광의 무장영당(畝長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양도(襄度).
2) 고양재(高陽齋)
성석동 황룡산 아래에 있으며, 완산부원군 양도공(襄度公) 이천우(李天祐)의 재실이다. 건물 규모는 가로 4칸, 세로 2칸에 목조 조선와가이다.
3) 최현우(崔玄祐) 묘
배 군부인 청주 경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 주위에는 상석 1기, 망주석 2기, 소문인석 4구와 무인석 2구가 있다. 또 1931년 6월에 건립된 묘비는 갓 형으로 크기는 폭 52cm, 두께 27cm, 높이 120cm이다.
최현우는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이며, 관직은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시호는 화숙(和淑).
4) 장흥(長興) 임씨(任氏) 묘(제2권 문화유산, 인물편 참조)
황룡산 아래 성석동 상감천 용감서원 뒤편 산 중턱에 있다. 묘는 사각묘이고, 옆에 오석으로 된 충민공 박순(朴淳)의 제단석이 있고, 1440년 9월 22일 “증판승추부사 행음성상호군박순처 숙인임씨지묘(贈判承樞府事行陰城上護軍朴淳妻淑人任氏之墓)”라 기록된 구비가 있고, 1982년 10월 8일 건립한 신비에는 증정경부인 장흥임씨지묘라 표기된 오석의 묘표가 있는데, 음기는 1684년 겨울에 송시열(宋時烈)이 추지한 것을 최운혁(崔雲赫)이 쓴 것이다. 기타 석물로는 상석 1, 소문인석 2, 망주석 2기가 주위에 구비되어 있다.
장흥임씨는 충민공 박순(朴淳)의 처인데, 태종 2년 함주에 있는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한양으로 오게 하기 위해 함흥으로 갔다가 끝내 살해당한 남편의 부음 소식을 듣고 자결하여 열녀의 모범이 되었다. 이에 태종은 그녀를 위해 이곳에 묘지를 내렸으며, 그의 고향에 충신․열녀의 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박순(朴淳)은 조선시대 무신으로 본관은 음성이며 박문길(朴文吉)의 아들이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때 이성계의 휘하에서 종군하여 위화도회군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우왕에게 갔으며,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상장군에 올랐다. 태종은 그의 공을 기록하고 관직과 토지를 내리는 한편, 자손을 길이 등용할 것을 명하였다 한다. 시호는 충민(忠愍).
5) 어세공(魚世恭) 묘
성석동 진밭에 배 정부인 경주 김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대리석의 묘표는 갓 형으로 크기는 폭 45cm, 두께 20cm, 높이 65cm이다.
어세공(魚世恭)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432년(세조 14)에 출생하여 1486년(성종 17)에 사망하였다. 자는 자경(子敬)이며 본관은 함종으로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의 아들이다. 1453년(단종 1)에 사마시를 거쳐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가 되었다. 그 후 성균관 박사, 한성부 참군, 공조 좌랑, 병조 좌랑, 성균 사예, 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함길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으로 아성군에 피봉되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0년(성종 1)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뒤, 계속 지중추부사, 병조․형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한 후 우참찬에 이르렀다. 경학에 조예가 깊으며 시호는 양숙(襄肅).
한편 후손들은 공의 500주기 추모 사업으로 1986년 12월에 신도비를 입석하였는데, 이수와 귀부를 갖춘 애석(艾石)으로 규격은 폭 62cm, 두께 36cm, 높이 195cm이며 비문은 송공호(宋貢鎬)가 짓고 김철현(金澈顯)이 썼으며, 17대손 어용(魚溶)이 전자를 썼다.
6) 어맹순(魚孟淳) 묘
성석동 진밭에 배 증정부인 전주 최씨의 묘와 합폄하였다. 어맹순(魚孟淳)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출생 시기는 불확실하며 1514년(중종 9) 4월 24일에 사망하였다. 자는 호연(浩然), 본관은 함종이며, 양숙공(襄肅公) 어세공(魚世恭)의 아들이다. 음보로 벼슬길에 올라 통훈대부로 양양 부사를 지내고, 함종군에 봉해졌으며 가선대부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7) 어숙평(魚叔平) 묘
성석동 진밭에 배 증정부인 순흥 안씨와 합폄하였다. 어숙평(魚叔平)은 1474년(성종 5)에 출생하여 1548년(명종 3) 11월 20일에 사망하였다. 자는 국형(國衡)이며, 본관은 함종으로 양숙공 어세공(魚世恭)의 손이다. 벼슬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아산군에 피봉되었다. 자헌대부, 형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8) 어계선(魚季瑄) 묘
성석동 진밭에 배 정부인 순흥 안씨의 묘와 합폄하였다 봉분은 사각묘로 상석1기, 망주석 2기, 문인석 2구가 있으며, 그 밖에 묘표와 신도비가 있다. 대리석으로 된 묘표는 폭 50cm, 두께 16cm, 높이 120cm이며, 1581년(선조 14) 6월에 건립된 신도비는 대리석으로 되어있으며, 크기는 폭 62cm, 두께 19cm, 높이 167cm이며 비문은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아들 어운해(魚雲海)가 썼으며, 전은 남응운(南應雲)이 하였다
어계선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502년(연산군 8)에 출생하여 1579년(선조 12)에 사망하였다. 자는 선지(瑄之)이며, 본관은 함종으로 양숙공 어세공(魚世恭)의 증손이다.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40년(중종 35)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한을 지냈다. 그 후 직제학을 거쳐 좌참찬을 역임하였으며, 정헌대부로 아선군에 봉해졌다. 이로서 4대에 걸쳐 사봉군가가 되었다. 곧 아버지 아산군 어숙평(魚叔平), 조 함종군 어맹순(魚孟淳), 증조 아성군(牙城君) 어세공(魚世恭)이다.
9) 권벽(權擘) 묘
고봉산에서 서북방면 상감천 마을에 있다. 묘는 정부인 해주정씨, 정부인 경주 정씨가 합부된 쌍분으로 묘 앞에는 서기 1963년에 중건한 조그마한 표가 있는데,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행예조참의 습재권선생벽지묘(習齋權先生擘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상석 1, 문인석 2, 망주석 2기가 구비되어 있고, 묘아래 50m 지점에 폭 72cm, 두께 20cm, 높이 168cm의 대리석 묘갈이 있는데, 1606년 여름에 세운 것으로 전자(篆字)로 “통정대부 예조참의 습재선생 권벽지묘”라 기록하였고 규격은 폭 72cm, 두께 18cm, 높이 168cm이다. 택당 이식(李植)이 짓고 4대 손 권변(權忭)이 쓴 것으로 대명 만력 병오(大明萬曆丙午:1606) 세맹하지길(歲孟夏之吉) 사진사 급제우춘방 우유덕(賜進士及第右春坊右諭德) 사일품복 정사주지번(賜一品服正使朱之蕃)이 제한 것이다.
권벽(權擘)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520년(중종 15) 출생하여 1593년(선조 26)에 사망하였다. 자는 대수(大手), 호는 습재(習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승지 권기(權祺)의 아들, 1543년(중종 38)에 진사가 된 뒤, 바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사관에 기용되었다. 3년 뒤에 예조 정랑으로 춘추관 기주관이 되어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오랫동안 봉상시 정을 지냈다. 1568년(선조 1)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다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 1573년 홍문관에 등용되는 등 여러 청환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578년(선조 11) 외직으로 나가있을 때, 함경도 순무어사 허봉(許篈)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후에 다시 기용되어 선조 13년에 대호군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헌부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가 3년 만에 가승지로 기용되고, 1585년에 오위장이 되었다. 중종․인종․명종 3대(代)에 걸친 실록을 편찬하였다. 저서로는『습재집(習齋集)』이 있다.
10) 권필(權韠) 묘
고봉산 서북쪽 기슭 상감천 마을에 있다. 묘는 숙인 홍주송씨부(淑人洪州宋氏祔)로 된 쌍분이며 앞에 폭 52cm, 두께 20cm, 높이 112cm의 오석 묘표 외에 상석 1기가 있고, 표문 내용은 “사헌부집의 행동몽교관 권공필지묘 숙인홍주송씨부(司憲府執義行童蒙敎官權公韠之墓淑人洪州宋氏祔)”이다. 묘아래 50m 지점에 폭 62cm, 두께 24cm, 높이 148cm의 대리석 묘갈명은 1719년(숙종 45)에 입석한 것으로 전자로 “석주선생 권필묘갈명(石洲先生權韠墓碣銘)”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묘갈명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이건명(李健命)이 썼으며, 전(篆)은 민진원(閔鎭遠)이 하였다.
11) 최형손(崔亨孫) 묘
묘 좌측에는 배 증정부인 영해 박씨의 묘가 있다. 최형손은 조선시대 무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1467년(세조 13) 길주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킬 때 영흥 부사로 있었는데, 군민과 이웃 읍을 잘 진무하여 민고를 덜었기 때문에 참판에 특진되었다. 병조 판서에 추증되어 월은군에 봉해졌다.
12) 최한홍(崔漢洪) 묘
조선시대 무신으로 1473년(성종 4) 8월 5일에 출생하였으나 사망 시기는 미상이다. 자는 언곡(彦谷)이며, 무과에 급제한 뒤에 육도병사를 두루 역임하고 중추부사에 올랐다. 익운정국공신에 녹훈되어 계림군에 봉해졌다.
13) 홍이상(洪履祥) 묘(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및 인물편 참조)
14) 홍난상(洪鸞祥) 묘
고봉산 아래 식사동에서 성석동으로 들어가는 길 풍산 홍씨 묘역에 있다. 조선시대 문신으로, 1553년(명종 8) 3월 23일 출생하였으나 사망 연대는 불확실하다. 자는 중서(仲瑞)이며, 호는 습지(習池), 본관은 풍산으로, 증좌찬성 홍수(洪脩)의 아들로 홍이상(洪履祥)의 아우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형조좌랑이 되었다. 아들 홍운(洪雲)의 책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산부원군에 봉해졌다.
15) 홍방(洪䨦) 묘
풍산 홍씨 묘역에 있는데 배 정부인 전주 이씨와 정부인 여흥 민씨와 합부되어 있다. 원래는 양주에 있었으나 을유년에 이장하였다.
조선시대 문신으로 1573년(선조 26) 11월 4일에 출생하여 1638년(인조 15) 12월 27일에 사망하였다. 자는 경망(景望)이며, 호는 지계(芝溪)이다. 본관은 풍산으로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장자이다. 1599년(선조 32) 음보로 감역을 지낸 후, 선조 38년의 증광문과에 올라 이도관찰사를 지냈다. 그 뒤 가의대부,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지계예설』,『제선의식』,『지계문집』등이 있다.
16) 홍구(洪龜) 묘
풍산 홍씨 묘역에 있는데 배 상산 김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 앞에는 문인석 4구와 묘비가 있는데, 먼저 세운 구비는 잡석으로 크기는 폭 40㎝,두께 16㎝, 높이 102㎝이다. 그리고 1978년 4월에 중수된 오석의 신비는 국화 무늬의 두부로 폭 64㎝, 두께 33㎝, 높이 170㎝이며, 비문은 8대 후손 홍석희가 짓고 이원기(李源箕)가 썼다.
홍구는 고려 말기의 사람으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사로 승의교위와 용기순위사 우령낭장 등을 지냈다. 그러나 장차 고려 왕조가 멸망할 것을 예측하고,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 풍산으로 가는 도중 본 고봉현의 산수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여 거처하게 되어 고양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공의 주택유지가 남아 있으며 그를 받드는 영모재가 건립되어 있다.
17) 홍영(洪霙) 묘
풍산 홍씨 묘역에 배 정경부인 연안 이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의 둘레는 각 13m이며 앞에는 망주석 2, 상석 2기와 문인석 2, 동자상 2구가 있고, 1657년에 입석된 묘표의 규격은 폭 75cm, 두께 20cm, 높이 180cm이다.
홍영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1584년(선조 17)에 출생하여 1645년(인조 23)에 사망하였다. 자는 택방(澤芳)이며, 호는 추만(楸巒)이다. 본관은 풍산으로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아들이다. 1605년(선조 38) 생원시에 합격한 후 음보로 사산감역과 형조좌랑을 지냈으나,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1621년(광해군 13)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공조 참의를 지내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후에 숭정대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 성운(成雲) 묘
묘는 성석동 고봉산 기슭에 있는데 배 정부인 양천허씨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의 뒤편으로 커다란 사성이 둘러쳐져 있으며 앞쪽의 중앙에는 대리석 재질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의 윗부분인 비두(碑頭)에는 운문(雲紋)이 새겨져 있는데 이 비는 1703년(숙종 29)에 세워진 것이다. 비의 앞면에는 ‘자헌대부 병조판서 증시경숙 성공운지묘 정부인 양천허씨 부좌(成公雲之墓 貞夫人 陽川許氏 祔左)’라 쓰여 있다. 비의 총 높이 181cm, 가로 56cm, 두께 21cm의 규모이다. 비문은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혼유석(魂遊石)의 앞으로는 상석,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다. 좌우에 세워져 있는 망주석은 232cm의 규모로 매우 특이한 모습, 독특한 무늬에 대형인 것이 특이하다. 장명등에는 큰 대좌가 만들어져 있으며 곳곳의 꽃무늬 모양이 석물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봉분 중앙 앞쪽에 있는 장명등은 총 높이 159cm로 화창은 모두 4개이다. 다른 장명등과 비교해 옥개석의 비율이 비대하게 큰 것이 특이한 점이다. 팔작지붕과 같이 넒은 옥개석에 화사석, 기단이 갖추어져 있는 구조이다.
성운(?-1528)은 조선조의 문신으로서 자는 치원(致遠)이며 본관은 창녕, 150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후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 공조 판서를 역임하고 병조 판서가 되었다. 시호(諡號)는 경숙(景肅).
19) 김수렴(金粹濂) 묘
배 정부인 풍산 홍씨의 묘와 합폄되어 있다. 봉분 주위의 석물로는 상석 1, 망주석 2, 표석 2기와 동자상 2구가 세워져 있다.
김수렴의 본관은 순천, 조선시대 무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정주목사 정주진관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자헌대부,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20) 용강서원(龍江書院)
성석동 황룡산 상감천 마을에 있다. 1980년에 중건된 이 용강서원에는 고려 고종 때 무신으로, 당시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몽고군을 맞이해 귀주대첩의 공을 세운 충정공 박서(朴犀)와, 조선 태종 때 함흥차사로 갔다가 목숨을 잃은 충민공 박순(朴淳)을 제향하고 있다.
용강서원의 건물현황은 모두 2동의 재실과 태극문으로 되어 있다. 제1동은 전면에 용강서원 현판이 부착되어 있으며, 규모가 전면 3칸, 측면 2칸인 연와조의 겹처마 조선와가이며 역시 연와조의 조선와가로 된 제2동은 전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그리고 3개의 문으로 된 태극문은 전면이 2칸 반, 측면이 1칸이며, 마찬가지로 겹처마의 조선와가이다. 그리고 1982년 청명절에 건립된 “용강서원 중건묘정비(龍江書院重建廟庭碑)”가 있는데, 오석으로 된 이 비의 크기는 폭 60cm, 두께 30cm, 높이 160cm로 이수와 귀단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비문은 성균관부관장 이수원(李壽源)이 짓고, 김충현(金忠顯)과 최운혁(崔雲赫)이 글씨를 썼다
박서(朴犀)는 죽산인으로 고려, 1231년(고종 18)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고 장수 살례탑[Saletai]이 누차․대포차․운제 등의 무기를 가지고 쳐들어와 철주를 함락하고 이어 귀주를 공격하자 삭주분도장군 김중온(金中溫), 정주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 등과 함께 귀주에 모여 몽고군과 한 달 동안이나 격전을 벌인 끝에 그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개성을 함락시켜 고종의 항복을 받고 다시 귀주를 공격하는 몽고군을 다시 대파하였으나, 왕명을 받은 지병마사 최림수(崔林壽)의 항복 종용으로 하는 수없이 항복하였다. 그런데 이 때 귀주성의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몽고군과 격전을 벌였던 그의 기상은 당시 몽고 장수들까지 탄복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후에 문하평장사에 제수되었다.
21) 백성군(栢城君) 이원(李源) 묘
진밭마을 오래골에 동남향으로 있다. 봉분 좌측에 진천현부인 송씨와 합부되어 있다. 원래 이 묘소는 선유동에 있었으나, 1970년 2월 아들인 계원군의 묘역으로 이장된 것이다. 봉분의 총둘레는 21m이며 묘 앞의 석물로는 장명등 1기, 망주석 2기와 문인석 2구, 무인석 2 구가 있다. 이 중 무인석은 각 부분마다 화려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한편 묘소 앞면에는 성세창(成世昌)이 지은 신도비가 있는데, 크기는 높이가 150cm, 폭 50㎝, 두께 20cm이다.
백성군은 1448년(세종 30) 6월 16일에 출생하여 1504년(연산군 10) 2월 3일에 사망하였다. 제 2대 정종의 증손으로 진례군 이형(李衡)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소박하였으며, 친척간의 화목을 중시하며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고 한다.
22) 계원군(桂原君) 이의(李艤) 묘 (제2권 고양시, 문화유산 향토유적편 참조)
23) 진밭 두레패 농악(農樂)놀이
진밭 두레패 농악놀이는 성석동 진밭 마을 일대에서 행해지는 농악놀이로 농사작업기에 농악으로 등장하며 모두 12마당놀이를 갖추고 있다. 농악의 가락은 1채 가락으로부터 12채 가락까지 다양한 변형가락을 갖추고 있다. 이중 1․2․3,채 가락은 춤가락이며 자진모리 가락에서 율동을 하게 된다. 본래 본 농악에서는 소와 농기구를 사용했으나 요즈음은 생략하여 간소화 되었다.
24) 송서재(松西齋)
성석동 진밭마을에 있다. 양숙공 어세공(魚世恭)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건물 규모는 전면이 2간, 측면이 1.5간의 목조 건물로 지붕은 조선와가이다. 한편 같은 곳에 묘와 묘표가 있다.
25) 벽성재(碧城齋)
계림군(鷄林君) 경주 최씨 최한홍(崔漢洪)의 재실이다.
26) 벽오재(碧梧齋)
오야곡(梧野谷)에 있는 조선 정종의 여섯째아들 진남군의 별묘이다. 건물 규모는 전면 4간, 측면 2간의 재실이 있고, 위쪽에 전면 3칸, 측면 1.5칸의 사당이 있는데 목재를 사용하고 벽면은 붉은 벽돌로 마감하였으며, 1973년 중건한 이 건물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한식으로 일문을 위시한 둘레를 붉은 벽돌로 담장을 쳤다.
27) 함종 어씨 묘산비(제7권 자료집, 금석문편 참조)
묘산비의 앞면에는 ‘함종어씨묘산(咸從魚氏墓山)’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아무런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비의 총규모는 높이 97cm, 폭 60cm, 두께 21cm이며 일반적으로 신도비나 묘갈에서 보이는 대좌나 옥개석은 보이지 않는다.
예로부터 묘산비는 가문의 선산입구에 설치해 그 위치를 알려주는 묘역과 같은 역할을 하는 비표이다. 보내 비는 58번 도로 가운데에 있었으나 60년대 중반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예로부터 이 비는 하마비(下馬碑)의 역할을 하였는데 고양시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묘산비이다.『함종 어씨 세보』에 기원공 어유봉(杞園公 魚有鳳 1672-1744)이 썼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250여 년 이전에 이미 이곳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28) 홍주천(洪柱天) 묘
사당골 마을 앞쪽에 있으며 배 증 정부인 안동 김씨, 배 증 정부인 완산 이씨가 하나의 봉분으로 되어 있다. 화강석의 병풍석이 둘러쳐진 봉분은 그 둘레가 28m에 이르며 봉분의 높이 또한 230cm의 대규모이다.
봉분의 정면으로는 상석, 혼유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좋은 화강석을 사용한 석물들은 모두 넉넉하고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봉분의 좌우에 세워져 있는 문인석과 장명등은 매우 뛰어난 석물로 평가된다. 마치 작은 용 모양과 흡사한 석수가 망주석들을 오르내리고 있다. 이 석수는 기둥에 붙어 이빨과 발톱 등이 상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망주 측면에 세워진 문인석은 각 부분의 무늬 조각 수법이 매우 정교하다. 관복에 보이는 여러 수, 무늬 등이 그대로 표현되었고 얼굴 표정에서도 풍요로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봉분 좌측에 세워져 있는 묘비는 높이 280cm, 폭 58cm, 두께 43cm로 매우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비의 재질은 화강석인데 비신의 모양이 직사각형으로 다른 묘비에 비해 두께가 2배 이상 두텁다. 비문은 전면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데 비의 앞면에는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부총관 행통훈대부 양성현감 수원진관병마랑제도위 홍공주천지묘(陽城縣監 水原鎭官兵馬郞制都尉 洪公柱天之墓)’라 표기되어 있다. 이 비는 비문에 숭정 기원 후 66년으로 쓰여 있어 조선조 1693년(숙종 19)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홍주천은 조선조 후기의 인물로 본관은 풍산이며, 자는 정훈(井勳)이다.
29)장군총(將軍塚)
고봉산 동남방향 중턱 만경사의 맞은편에 큰 봉분모양이 있는데 이를 지칭한다.
고봉산 정상은 띠를 두른 것 같으므로 대위(帶圍)라고 하였다. 산 위에 성을 수비하던 옛 유적이 있으며, 그 아래 장군총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옛날에 주민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최상규의『고양선현전』에 간략히 실려 있다.
30) 고봉산성(高峯山城)
고봉산 정상에 있으나 현재는 희미하게 성지만 남아있다. 한편 이곳은 행정구역상으로 벽제와 일산 및 송포의 분기점이 되고 있다.
고봉 산성 사진
31) 고봉봉수(高峰烽燧)
성석동 벽제읍 성석리와 일산읍 일산리의 경계지점의 고봉산〔일명 테미산, 테메산, 태산, 고봉산성〕산정이다.
성석리에 있다 하여 성석리 봉수라고도 하며, 이 산의 별칭인 고봉산성봉수대라고도 불리어 왔다.
이 봉수대 역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봉수강 제4선로의 직봉으로 파주군 교하면의 형제봉에서 받아 동쪽의 해포봉수대에 전하였다.
32) 김훈(金壎) 묘
성동 마을에 있는데 배 정경부인 신천 강씨와 하나의 봉분으로 되어 있다. 봉분의 앞으로는 상석, 혼유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우측으로는 화강석 재질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높이 141cm, 폭 47cm, 두께 16cm 규모의 비는 대좌(臺座)를 갖추고 있다. 비의 앞면에는 ‘증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지의금부사 행통훈대부 성현찰방 호신재 순천김공훈지묘(省峴察訪 號愼齋 順川金公壎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상석 앞 1m 지점에는 2구의 동자상이 세워져 있는데 보기 드문 뛰어난 작품이다. 고개를 지긋이 왼쪽으로 돌려보는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있다. 양손은 서로 모아 쥐고 얼굴까지 올려들고 있다. 입고 있는 옷은 옷고름이 분명하게 부드러운 곡선, 어깨위로 흐르는 선 등이 매우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동자석은 총 107cm의 크기이며 재질은 대리석인데 각 부분별로 일부는 훼손된 상태이다. 동자석의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문인석은 총 높이 224cm이다. 문인석의 홀은 턱에서 떨어져 있는데 홀을 쥐 손가락의 세밀한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김훈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이다. 호는 신재(愼齋)로 사재 김정국으로부터 학문을 익힌 뒤 성현 찰방 등을 역임하였으며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33) 진례군(進禮君) 이형(李衡) 묘
원래 선유동에 있던 것을 1970년 2월 8일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봉분 앞에는 묘갈이 있다.
진례군은 조선 제 2대 정종의 손자로 진남군 이종생(李終生)의 둘째아들이다. 1426년(세종 8) 9월 11일에 출생하여 1498년(연산군 4) 12월 18일에 사망하였다. 정의대부로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사후 춘추관 예문관의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34) 어운해(魚雲海) 묘
성석동 별밭마을에 있다. 본관은 함종. 율곡 이이․우계 성혼과 학문적 교류가 깊었다. 평창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아흥군(牙興君)에 봉해지고 이조 참판에 증직 되었다. 문인, 상석이 있으며 화강석 재질의 묘비가 있으며 배 증 정경부인 전주 이씨와 쌍분되었다.
35) 박흔(朴昕) 묘
본관은 음성. 증 정부인 천안 전씨와 쌍분, 대리석 묘비, 문인, 상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증 가정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36) 성림(成霖) 묘
사당골에 있다. 본관은 창녕. 증 정경부인 이천 서씨와 부좌, 망주, 장명동, 상석, 향로석, 오석의 묘비가 있다. 자는 청지(淸之). 증가선대부 이조 참판을 지냈다.
37) 성담명(成聃命) 묘
성석동 사당골에 있다. 본관은 창녕. 문인석, 묘비,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증정부인 강릉 김씨와 부좌되었다. 증 자헌대부 이조 판서.
38) 민기문(閔起文) 묘 및 묘갈
선조대의 문신. 본관은 여흥. 자는 숙도(叔道), 호는 역암(櫟菴), 정부인 경주 최씨의 묘와 부좌되었다. 상석, 문인석, 향로석, 묘갈 등이 있다. 통정대부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
39) 만경사(萬景寺)
고봉산 산 59번지에 있다. 조선 성종 때 풍산 홍씨가 왕명을 받아 창건하였으나, 6․25전화로 소멸되었다. 그러나 1955년 현(2005) 주지 임준영에 의해 중건․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규모는 21.84㎡의 법당 1동과 97.86㎡, 12.96㎡의 요사체 2동으로 되어 있다. 또 모당 홍이상(洪履祥)의 원당(願堂) 겸 재실로 이용되고 있다.
제10절. 대화동(大化洞)
1) 고토성지(高土城址)
대화동과 법곶동 들판 가운데에 있었는데 남은 터의 흔적마저 도시개발로 찾을 수 없게 됐다.
제11절. 법곶동(法串洞)
1) 고양 멱절산 유적(제2권 문화유산, 경기도 기념물편 참조)
제12절. 가좌동(加佐洞)
1) 경모재(敬慕齋)
가좌동 산 79번지에 있다. 경모재는 원래 조선 후기 정조 때 송포면 음송 부락에 거주하던 이종덕(李宗德)․이종복(李宗復)․이종술(李宗術) 등 여주 이씨 종문들이 선조인 이규보(李奎報)의 학문을 기리며 후학들을 가르치고자 세운 서당인 송산재(松山齋)였다. 이 재실은 일제 강점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500여 명의 학생들을 배출하였으나, 불행히도 6․25사변 때 전화로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근래 1974년 선조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이를 재건하여 경모재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제13절 구산동(九山洞)
1)구봉(龜峯) 서당터
구산동 구봉길에 있으며, 주위에 은행나무 수 그루가 있다. 조선조 문신 구봉 송익필이 이곳에서 태어나 살다가 후배들을 위해 세운 서당 자리이다. 길 맞은 편 파주 경계 안에는 송익필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제14절. 덕이동(德耳洞)
1) 유대정(兪大禎) 묘
덕이 2리에 있으며, 배 정부인 광주 정씨의 묘와 부좌되었다. 봉분 주위에는 상석 1기, 망주석 2기, 문인석 2구가 있으며, 그 밖에 1656년(효종 7)에 건립된 대리석의 묘표는 크기가 폭 54cm, 두께 18cm, 높이 120cm이다.
유대정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52년(명종 7)에 출생하여 1616년(광해군 8)에 사망하였다. 자는 경휴(景休), 본관은 기계(杞溪)로서 예조 판서 유여림(兪汝霖)의 증손이며 유호(兪灝)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대교를 거쳐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에 관련되어 북평사에 파천되어 가던 도중 파직 당하였다. 그러나 2년 후 1591년(선조 24)에 이천 현감으로 등용되어 계속 여러 고을을 다스리고, 1609년(광해군 원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승진, 그 후 동지중추부사로 부총관을 겸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계속하여 조정에서는 도총관 겸비변사 당상 병조참판 등의 벼슬을 주어 정계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2) 토교(土橋)
고봉산 서쪽에서 시작된 삼정천의 하류에 있었는데 현재(2005)는 신도시 개발로 인한 주변 전체의 복개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3) 태극단 반공유적지
덕이동 산 46-2에 있다. 이 반공유적지는 6․25전란 당시 고양․파주지역에서 괴뢰군과 싸우다 전사한 무명용사의 조직체인 태극단원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1957년 9월 20일 조성되어 1961년 유적지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9월, 생존한 50명의 태극단 동지들에 의해 총 4230평의 묘지에 46위의 영령을 합장하였으며, 1971년 5월 이 곳에 본군출신 애국충절 호국영령들의 얼을 추모하고자 현충탑(기단 1.5m, 탑신 7.2m)을 건립한 이래 계속하여 주변 환경 정비에 힘쓰고 있다
사진 태극단 유적지
4) 송포 백송(松浦白松)(제2권 문화유산, 천연기념물편 참조)
사진 백송
제15절. 탄현동(炭峴洞)
해당 없음.
제16절. 마두동(馬頭洞)
1) 최문환(崔文煥) 묘
최문환은 1854년 9월 26일 출생하여 1931년11월 12일 사망하였다. 본관은 해주이며, 유년기부터 영특하여 신동이라는 별호까지 붙었었다. 1895년 단발령이 선포되어 지방 관리들의 머리부터 자르게 되니, 이에 항거 등청을 거부하다가 압력에 못 이겨 통곡하며 삭발하였다. 등과기에 일제의 내정간섭을 개탄하고 후학양성에 전념하다가 1914년 중면장(中面長)에 취임하여 우두 맞기를 기피하는 면민을 계도하여 천연두 퇴치사업에 앞장섰으며, 1919년 기미만세사건으로 면장직을 사임하고 여생을 후학양성에 전념하여 경기성(慶箕盛), 유광열(柳光烈), 최국현(崔國鉉) 같은 인물을 배출시켰다. 묘는 신도시 개발(1992)로 인해 연천군으로 이장됐다.
제17절. 주엽동(注葉洞)
1) 외장리교
일산읍 주엽리에 있다. 외장리교는 사포면과의 경계지로 돌로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한 것이다. 신도시 개발로 인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제18절. 장항동(獐項洞)
1) 연제군(硯堤君) 이작(李碏) 묘
연제군은 조선 제 3대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의 증손으로 봉성군 이항(李恒)의 장남이다. 신도시 개발로 소실됐다.
제19절. 백석동(白石洞)
1) 최립(崔岦) 묘
봉분 앞 묘갈의 갈문은 최석정(崔錫鼎)이 지었고 최창대(崔昌大)가 썼다. 최립(崔岦)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1539년(중종 34)에 출생하여 1612년(광해군 4)에 사망하였다. 현재는 없다.
2) 백석교(白石橋)백석교는 동쪽으로 지도와 접해 있으며, 다리 아래에는 견달산에서 시작하는 공세천의 하류가 흐르고 있다. 신도시 개발에 따른 주변 전체의 복개공사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제20절. 효자 정문지
1) 효자 조경희(趙景禧) 정문지
벽제 사리현동[구 사리대면]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 선조 때의 효자. 경역 조현(趙玹)의 서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등에 업고 피난을 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적을 만나 아버지가 위태롭게 될 것을 걱정하여 자기 몸으로 아버지의 피살을 막고 대신 죽었다.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주고 후에 그의 아들 조벽귀(趙碧貴)에게 판서를 제수하였다.
2) 효자 배철중(裵鐵重) 정문지
행신동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 후기 호군 배형효(裵亨孝)의 아들. 어머니 이씨(李氏)가 악질이 걸려 고통을 받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약으로 써 어머님의 병환을 낫게 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정문을 하사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여 효행을 기리게 하였다. 그 후 그가 사는 마을을 홍문동이라 하게 되었다.
제21절. 열녀 정문지
1) 열녀 서씨(徐氏) 정문지
신도동[구 하도면]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 영조 때 첨정 서시현(徐時賢)의 딸로 유천령(柳千齡)이 병으로 세상을 뜨자 애통해하면서 영결서를 써 시부모님께 바치고 곧 뒤따라 자결하여 정조를 지키고자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이 소식을 조정에 알려 1737년(영조 3) 정문이 하사되었다.
2) 열녀 박씨(朴氏) 정문지
벽제동[구 사리대면 행원리]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시대 사인 정세장(鄭世章)의 처. 어느 날 화적이 뛰어들어 남편 정세장(鄭世章)에게 칼을 들이대자 자기 몸으로 막다가 한쪽 팔뚝이 잘려나간 채 죽었다. 대신 남편은 무사하였다. 이 소식을 군에서 알려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주었다.
3) 열녀 유씨(柳氏) 정문지
벽제동[구 사리대면 내산리]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시대 열녀. 전주 유씨(柳氏) 현감 이소(李簫)의 처인데, 지아비가 죽자 염습을 마치고 곧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이 사실이 나라에 전해져 정문을 세워주었다.
4) 열녀 강씨(姜氏) 정문지
벽제동[구 사리대면]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 인조 때의 열녀. 진주 강씨로서 증 판서 조유헌(趙惟獻)의 처이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남편이 포로로 잡혀 장차 죽게 되자, 강씨는 어린 세 자녀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후에 조정에서 정문을 세워주었다.
5) 열녀 신씨(申氏) 정문지
벽제동[구 사리대면]에 위치해 있었다. 참판 안영(安瑛)의 처로서 남편이 죽자, 그의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조석곡을 극진히 하여 나라에서 열녀문을 세워주었다.
6) 열녀 윤씨(尹氏) 정문지
행신동[구 구지도면]에 있었다. 남편 안후형(安垕亨)이 죽자, 3년 탈상을 하고 나서도 곡식을 먹지 않고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 이에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주었다.
제22절. 효부(孝婦) 정문지
1) 효부 정씨(鄭氏) 정문
벽제동[구 사리대면]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 말 학자인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며, 김현좌(金賢佐)의 처이다. 조선 영조 시대 때 시아버지가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왕께 사은키 위해 상경을 하자, 집에는 시어머니와 정씨 등 여자만 남고 자손들 모두 수행키 위해 집을 떠났다. 이 틈을 탄 도적이 집에 들어왔는데, 80 노구의 시어머니가 놀라 소리를 지르니 적이 화가나 칼을 뽑아 살해하려 하였다. 이에 정씨는 그의 맏동서 이씨(李氏)와 함께 좌우(左右)에서 어머니를 막다가 칼에 찔려 피가 났다. 이에 시어머니는 무사하고 적도 또한 그의 행동을 의롭게 여기고 놓아주었다. 이에 나라에서는 정문을 세워 효성을 빛나게 하였다.
2) 효부 이씨(李氏) 정문
벽제동[구 구이면]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시대 효부 이씨(李氏)는 김창좌(金昌佐)의 처인데 평소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셔 이름이 있었다. 어느 날 화적이 들어 어머니가 위태롭게 되자, 어머니 대신 도둑의 칼에 맞아 죽었다. 이에 나라에서 정문을 내려 그 뜻을 기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