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운에세이] 9월의 상념(想念)
그야말로 세월이 유수(流水)다. 기다리던 추석명절도 지나고 벌써 9월 중순이다.
9월이 오면 무언가 좋은 일이라도 생길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되고 새로운
희망에 가슴이 부푸는 것이 근년(近年) 나의 심리상태다. 그렇다고 지금의 나에게
좋은 일이란 로또 복권에 당첨되거나 주식 시세가 오르는 등의 횡재(橫財)를 기대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평생 동안 복권을 사 본 일이 없다. 그리고 주식(株式)
의 ‘주’ 자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한때 우리 나라에서는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서 목돈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계(契)'라는 사금융 조직이 전염병처럼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런 데도 한 번도 든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이재(理財)와는 거리가 한참이나 먼 사람이다. 또 실재로
도 그렇다. 봉급생활자로 살아왔고 퇴직 후에는 연금을 수령하게 되었기 망정이지
그렇지를 못했더라면 지금껏 어떻게 생활을 꾸려왔을지 내 자신이 생각해봐도 자
못 궁금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 같은 사람이 부자가 되거나 잘 살기는 애당초
글러 먹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했는데도 나는 그런
쪽으로는 젊어서부터 관심도 없고 재주도 없었으니 그것도 내 운명이요 팔자겠
다.
현재 나의 단 한 가지 관심사는 내 일상의 컨디션을 정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다. 예컨대 여기서는 소위 말하는 3쾌(三快) 즉 쾌식, 쾌면, 쾌변의 세 가지를 실천
하기 위한 일이 나의 역점과제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 목표 중에 적어
도 두 가지가 이번 달에는 무난히 달성이 될 것 같은 전망이 선다. 지금까지도 그랬
지만 내가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다. 더위로 그간 다소 소홀했
던 아침운동을 다시 꾸준히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베
인 사람이라 그런지 다른 때는 맞지 않고 아침 이른 시간에 운동을 해야 직성(直星)
이 풀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의 아침운동은 걷기나 가까운 산을 오르는 것이다. 평
지를 걷는 것도 좋은 운동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 그보다는 힘을 들여 땀을 흘리면
서 경사가 있고 고도가 있는 산을 올라야 운동 하는 맛이 난다. 그래서 가능한 한
주로 산을 오른다. 산악회를 따라 원거리 유명 산들을 가는 것이 좋은 거야 말할 나
위가 없다. 그러나 나처럼 나이가 든 사람이 그런 모임에 합류하는 것은 체력에 상
당한 부담이 되고 때로는 무리가 따른다. 등산이 아무리 건강에 좋아도 자기 능력
에 맞게 하는 것이 옳지 뱁새가 된 내가 황새 걸음을 걸을 수는 없는 처지다.
근자 나의 처소는 두 군데다. 요즘은 아직 어린 손자, 손녀가 있는 인천 송도 둘 째
네 집에 주로 머문다. 아마 한 달 3분의 2 또는 그 이상을 그들과 같이 지내는 생활
이 될 것이다. 안양과 인천 송도는 제3 경인고속도로로 30분 거리이고 이수(里數)
로는 30km다. 두 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사는 생활이다. 이렇게 사는 것도 가히 나
쁘지 만은 않다. 오히려 그것이 더 사는 맛이 난다. 늙은이 두 사람이 우두커니 서
로 소 닭 쳐다보듯 지내는 절간 생활보다는 울고불고 법썩을 떨어도 그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 훨씬 더 낫다. 이게 바로 사람 사는 맛이다. 그래서 요즘은 산을 자주
오를 수가 없다. 이곳에도 집에서 30분쯤 걸어가면 근처 사람들이 즐겨 찾는 청량
산이란 이름의 나지막한 좋은 산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오가는 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송도라도 내가 머무는 지역, 경제자유구역, ifez (Incheon Free Economic Zone)는
갯벌을 메워 땅을 돋운 매립지라 아예 산이라곤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미추홀
(彌鄒忽)공원, 해돋이 공원, 센트럴 파크, 달빛공원 등, 체력단련을 위한 자전거 타
기나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공원들이 몇 개 있다. 내 집 가까이에 있는 강변 달빛
(月光)공원이 요즘은 갈대 숲이 장관이다. 게다가 드문드문 군락을 이루어 피어 있
는 청초한 가을 꽃, 코스모스가 산책객들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준다.
송도에서 제일 큰 공원, 센트럴 파크(Central Park : 중앙공원))는 뉴욕 만하탄의 공
원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인천도시개발공사가 마음 먹고 야심작으로 조성하고는
있으나 아직 세월이 더 지나야 공원으로서의 제 모습을 갖출 것 같다. 공원 가운데
로 구불구불하게 나 있는 해수(海水)수로에는 이미도 뱃놀이를 즐길 수 있는 유람
선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손님들을 태우고 운행을 하고는 있다. 선착장 맞은편에
는 세계 최고 수준의 특급호텔과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동북아무역
센터(North East Asia Trade Center)가 우뚝 서 있다. 그러나 NEAT는 아직 제 기
능을 발휘하고 있지는 못하다. 언젠가는 10년 전 9.11 사태로 사라진 만하탄의
WTC보다 더 활발한 경제활동 공간으로 기능하는 건물이 될 날이 머지 않아 도래
하리라 기대를 해본다.
송도 신도시 공원들은 뉴욕 퀸즈(Queens)의 FMCP(Flushing Meadows Corona
Park)보다 못할 것도 없다. 이 공원은 뉴욕시 최대의 자연공원으로 내가 살던 곳
Forest Hills와 우리 동포들의 밀집지역의 하나인 Flushing 사이에 위치한다. 해마
다 추석 무렵이면 이 공원에서는 고국에서 방문하는 연예인단의 동포위문공연이
펼쳐지는 가운데 성대한 한국인들의 잔치가 한바탕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은각종 농수산물을 비롯한 온갖 고국의 신토불이 먹거리가 선을 보이는 가운데 마
치 시골 장터 같은 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나는 이 공원에서 걷기를 자주했다. 두 개의 천연호수에는 새들의 낙원이라 할만
큼 갈매기를 위시해서 각종 새들이 많다. 그러나 그 공원은 위험지역이라 해가 지
고 나면 혼자 걷기가 어렵다. 낮에는 NYPD(New York Police Department)가 순찰
을 하기도 하나 야간에는 치안력이 그런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거기
비하면 우리나라 도시 공원들은 얼마나 안전한가. 서울이 뉴욕보다 못할 것도 없
다. 뉴욕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긴 세월은 아니지만 햇수로 다섯 해에 걸친 뉴
욕 생활을 통해서 나는 터득한 바가 참으로 많다. 나는 관광차 미국을 간 게 아니
고 그곳에서 살아보기 위해서 갔다.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은 서울이 뉴욕보다는 살
기가 더 좋은 도시다. 이는 결코 나 혼자만의 판단은 아니다. 뉴욕과 보스톤을 오가
며 지낸 수 개월 이야기, 100회가 넘는 산행 이야기 등은 앞으로 나의 글에서 언급
이 될 기회가 있을 것이다.
9월 들어서는 어쩌다 보니 오늘 아침까지 벌써 삼성산(477m)을 네 차례나 갔다 왔
다. 이 산도 관악산의 한 갈래다. 왕복 세 시간 안팎으로 걸리는 거리로 나에게는
맞춤형이라 할 정도로 이상적인 운동 코스다. 이 코스는 내 체력을 테스트할 수 있
는 바로미터이다. 내가 이 산길을 어떤 상태로 다니느냐가 나의 컨디션을 말해줄
것이다. 이달에는 내가 목표한 대로 일여덟 번은 거뜬히 삼성산까지 아침 산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벌써 낮이 많이 짦아졌다. 오늘 아침에는 5시 45분경에 집을 나섰기에 괜찮았지만
지난 토요일은 일찍 5시에 집을 나섰더니 주변이 꽤 어두웠다. 비봉산 능선을 넘어
가는 3, 40분 동안은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산길을 오르내리느라 무척 애를 먹었
다. 그래서 당장 간편한 후레시를 하나 준비는 해 두었다. 요즘은 더위가 한풀 꺾
인 터라 아침운동 하기가 한결 더 좋아졌다.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아 말(馬)만 살찌
울 게 아니라 우리 사람들은 각자의 건강 다지는 일에도 마음을 기울여야겠다.
지난 3일에는 내가 옛날 근무했던 영주여자고등학교를 참으로 오랜만에 처음으로
공식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 1972년 초에 졸업
을 한 16기 동기생들이 그들이 주관하는 영주여고총동창회 모임에 옛 선생인 나를
초청해 준 것이다. 그때 나는 예천군 풍양중학교에서 2년 반을 보내고 난 다음 자의
반 타의반으로 두 번째 그 학교로 다시 가게 된 것이었다. 내가 영주여고를 처음 부
임한 때는 1967년 5월 20일 경이었다. 1966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3월 15일 영
덕 강구중학교로 초임 발령을 받아 1년 2개월여를 근무하던 중 중간 발령으로 낯설
고 물설은 경북 최북부지방 영주로 가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 부임한 해 1971학년도에 나는 3학년 1반 담임을 맡았다. 2반은 국어 유
영창 선생님, 3반은 이미 고인이 되셨다는 수학 홍일선 선생님이었다. 3학년생들
앞에는 새로 생긴지 3년째인 대학입학예비고사라는 어려운 관문이 그들을 기다리
고 있었다. 당시 그 제도는 지금과 달리 대학입학자격을 결정하는 그런 성격의 것
이었다. 나는 고삼 담임으로서 그리고 진학담당 책임교사로서 나의 능력을 최초로
검증 받아야 하는 엄중한 시험대에 올려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백의석 교장님은 나와 인연을 맺은 첫날부터 어설픈 나를 믿
고 인정해준 그런 분이셨다. 그 분이 이 지상 과제를 맡기기 위해 나를 다시 그 학
교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그런 목표가 아니었더라면 한때 내가 좌천 당해 떠났던
그 학교로 다시 갈 리는 만무했다. 당시 교감은 서울대 법대를 나오신 서순조 선생
님이었다. 인정이 많으신 분으로 대구만 갔다오시면 "김 선생" 하고 부르시고는 사
탕을 내 손에 꼭 쥐어주시곤 하던 어머니 같은 분이셨다. 나중에 김천간호대학 학
장으로 부임하셨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은 바가 있으나 그 뒤로는 지금까지 소식이
두절된 상태다. 저간의 긴 사연은 거두절미하고 그때 거둔 놀라운 성과는 젊은 사
인 나에게 용기와 커다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을 뿐 아니라 그 뒤로도 내가 꾸
준히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강남 양재역 7번 출구 부근에서 모여 11시에 전세버스로 서울을 출발을 했다. 경부
고속,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제천을 지나
고 죽령터널을 빠져나와 풍기 경유 영주 학교 앞에 도착한 시각이 2시가 덜 된 시각
이었다. 버스를 가득 매운 의젓하고 세련된 영주서울(?) 숙녀들의 모습이 참으로 화
사하고 보기가 좋았다. 마침 내 옆 자리에는 3회 졸업생이라는 나와 동갑내기 할머
니 숙녀가 한 분 앉았다. 유유상종이라 이런저런 공통의 화제로 즐거운 시간을 가
질 수 있었다. 그 버스에 남자라고는 기사와 나 두 사람뿐이었다. 그야말로 꽃밭에
서 황홀한 여행을 즐긴 것이다. 도중 나는 버스 안에서 일장 연설도 했고 못하는 노
래도 불렀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내 젊음을 불살랐던 그 학교 전경을 40년 만에 둘러 본 감회는
참으로 남달랐다. 아름다운 신축건물의 기숙사며 강당 겸 실내체육관, 식당 등 그
옛날과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할 만큼 변모하고 발전이 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졸업생들 말고는 내가 아는 얼굴이라고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산천
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 학교의 상징으로 향교와 본관 건물 사이에 있던 크
고 우람하던 느티나무가 사라진게 유감이었다. 오랜 세월 많은 소녀들의 청운의 꿈
과 낭만을 키워주고 사랑을 받아오던 나무였다.
행사장 가까이로 다가가자 나에게 배웠다는 많은 숙녀들이 진심으로 환영하고 반
갑게 맞아준다. 그러나 그사이 적조(積阻)한 세월이 너무 길었던지 반갑기는 한데
나로서는 일반적인 인사치레 밖에 할 말을 이을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보이지 않
으면마음에도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들과 나는 분명 사제지간이다. 그런데도 그
사이너무 긴 세월이 우리들 사이를 이처럼 어렵고 난처하게 만들어 놓았다. 아무
리 봐도세월은 잔인하다.
그날 그 자리에 초청 받은 그들의 은사로는 나를 포함해서 다섯 사람이었다. 국어
유영창, 체육 박춘식, 지리 이순섭, 영어 이전주 그리고 나. 박 선생님은 멀리 대전
에서 왔단다. 처음에는 누군지 잘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전주 선생님은 예
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데가 없이 젊고 고운 얼굴이었다. 이 선생님의 따발총씩
말투에는 아직도 기운이 실려있다. 점심식사 하는 동안 아득한 옛 이야기들로 꽃
을 피웠다.
당시 동학년 담임을 맡아 함께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유 선생님은 "나이 팔십에"라
는 유머를 장기로 팔팔하던 모습은 온데간데가 없다.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도 비만
상태다. 그로 인해 거동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가파른 계단을 잘 올라가지 못한
다. 조심스런 이야기지만 그런 사람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나를 보는
제자들은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내가 건강해 보인다고들 한다. 그보다 더 듣기 좋
은 소리는 없다. 그것은 최고의 찬사이다. 건강을 잃으면 세상을 다 잃는 거라 했
다.그렇다면 그런 말을 듣는 나는 지금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라는 말
이 아닌가. 그렇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다 그들의 것이다. 나는 진정 부자
요 애국자다. 건강한 노인은 애국자라는 말도 있다.
또 지난 주에는 고등학교 동기생 친구가 사망했다는 비보(悲報)를 접했다. 안영륭
이라는 이름의 친구라는데 오랜만에 이름만 들어서는 누군지 모르겠다. 졸업후 지
금까지 서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다. 나에게는 그런 친구들이 꽤 많다. 졸업
앨범을 보고서야 누군지 알 수 있었다. 3학년 때 7반에 있었던 친군데 얼굴을 보니
당장 알겠다. 서울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사이 벌써 두 사람의 고등학교
동기가 타계했다. 지난해 11월에는 불과 몇 달 동안이나마 같이 한문 공부하러 다
니며 수차례 어울리곤 했던 재주 있고 인정 많은 같은 반 친구 김재무도 고인이 됐
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 빈 말이 아니다.
2010년 지난해 말 경북중.고 41회 동기회 대구 동기생들의 수첩을 새로 받았다. 졸
업 50주년 기념 회원명부다. 그 안에는 최근 사진과 함께 252명의 명단이 실려있
다. 지금 대구지역 회장을 맡고 있는 열성파 김홍걸 친구가 총무를 맡아 있을 때 만
든 노작(勞作)이요 역작이다. 오랜 세월 은둔하다시피 살고 있는 친구들까지 일일
이 소재를 파악해서 원근불문하고 직접 카메라를 메고 방방곡곡 찾아가서 손수 찍
은 최근의 사진이라 얼굴 모습들이 바로 실물 그대로다
.
그런데 이 수첩의 맨 뒤에 보면 작고회원 명단이 나온다. 거기 이름이 실린 친구들
의 수가 물경(勿驚) 160명이다. 1960년 3월 대봉동 교정에서 졸업한 동기들의 수
는 정확히 677명이다. 이것은 졸업앨범을 펴놓고 내가 확인한 바다. 그렇다면 친구
들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앞으로는 이 비율이 얼마
나 빠른 속도로 상승을 할 것인가도 관심사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푸닥거리라도
해서 이 액운을 막아보든지 아니면 친구들 일찍 죽지 말기 캠페인이라도 벌여야겠
다. 이것이 나와 내 친구들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죽음이 이제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제 아무리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치고 큰소
리 쳐봐야 소용없다. 저승사자 귀에는 그런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앞서거니 뒤
서거니 순서야 있겠지만 그게 언제 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더 살고 덜 살고도 도
토리 키 재기다. 5년을 더 살면 어떻고 10년을 더 산들 그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
을까. 모두가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다. 우리는 이미 고희를 넘긴 행운아들로 살
만큼 산 사람들이다. 욕심은 금물이다. 미련도 없고 후회도 없다. 항상 감사하는 마
음으로 선량하게 살다가 바람같이 구름같이 훌훌 떠나는 인생이면 좋겠다. 우리들
이탄 인생열차는 종착역에 가까웠다. 내릴 준비를 서서히 해야 할 때다.
이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고별(告別)도 있고, 석별(惜別)도 있고. 작별(作別)도 있
고,송별(送別)도 있고 결별(訣別)도 있다. 석별이 좋을까 결별이 좋을까. 다 그게 그
거다. 그러나 마지막 이승과의 이별은 영원한 고별이다. 이왕이면 떠나가는 뒷모습
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오래오래 기억되게 마무리를 잘 해야겠다. 그것이 다음 세대
들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처신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일 삼수갑산(三水甲山)을 갈
지언정 떠나는 그날까지 열심히 성실히 정직하게 그리고 바르게 살아야겠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사랑하라 했던가. 그것이 산 자의 바람직한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2011. 09. 14.
林谷齋/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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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청량산 ....청량사 저와 인연이 있는절입니다 ....가봐야하는데 하는마음뿐입니다
선생님은 뵙지는않았지만 성공적인 인생을 사신분같습니다 ...
바람꽃님, 감사합니다. 시답잖은 저의 글, 시시콜콜 늘어놓은 것인데 다 읽어주시고 좋게까지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삶에 있어 성공과 실패를 말할 수 있는 기준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은 결코 못됩니다. 어여부영 이 나이까지 와 놓고 뒤돌아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 읽어보든 않든 그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온 그대로 저의 치부까지도 털어놓고 싶어 서툴은 글로 적어본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의
때가 씻겨지고 시원해질 것만 같습니다. 처음 올렸던 글을 다시 여러 시간에 걸쳐 보완 수정을 한다고 해보았습니다.
그래봐도 결과는 대동소이 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