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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
▶ 모세가 시내산을 여덟 번 올라갔습니다 (시내산의 높이 약 2,291M)
오늘 말씀은 6차 등정 때 일어난 일입니다. 모세가 40일 주야로 금식하며 십계명을 받는 동안에 산 아래에서는 아론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먹고 마시고 일어나 뛰어노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출 32:1-6) - 전 민족이 전멸을 당할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소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섬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소가 될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건을 두고 “자기의 영광을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다”고 시편 106편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시 106:19-20]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20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 “자기”는 히브리어 원어는 없지만 “영광”이 3인칭 남성 복수형이므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해석됩니다.
우리들이 돼지를 섬기면 돼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돼지의 운명처럼 되는 것입니다.
→ 참고로 우리나라 바른성경, RSV 영어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롬 1:23절에도,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상숭배는 자기가 소처럼 되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소나 짐승의 형상으로 만드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 오늘 말씀을 통해서 ① 오늘날 영적인 시내산과 같이 높은 산, 높은 단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고자 귀를 기울이는 영적인 사람들과 ②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며, 마치 노아의 때 같이, 이방인들이 드리는 제사의 모습과 같이 먹고 마시며 쾌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자들의 두 부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 놀라운 일은,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은 히브리어 “엘로힘”으로 “엘”의 복수형이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포함된 범신적인 단어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베레쉬트 바라 엘로힘,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가나안 땅에서도 “엘”신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출 3:15)입니다 (hw:hy)
→ 금송아지는 출애굽하고는 아무관계가 없습니다. 금송아지는 애굽에서 섬기는 신들 중의 하나입니다 (황소- 아피스, 암소-하토르), 그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생활 할 때에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자칫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정작 우상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①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면 그렇게 됩니다. ②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도 그렇게 됩니다. ③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어기면 그렇게 됩니다.
④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영을 받아도 그렇게 됩니다.
다른 영을 받고 하나님의 영인 성령으로 생각한다면 심각한 일이잖아요
→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으로 분명하게 제2계명으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 20:4)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불상을 만들어 섬기고, 성모 마리아상 앞에 빌고 절하고, 이상한 신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상도 만들면 안됩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 30m / 천안 137m 예수상 건립 계획 – 큰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 4:24). 눈에 보입니까? 그래서 어떤 형상이나 그림으로도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뭔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예수님의 성화도 그것 다 예수님 아닙니다.
→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영시시니 예배도 영적으로 해야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러므로 십자가를 향해서 절해도 안됩니다. 십자가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물며 돼지 머리, 소 머리 갖다 놓고 절한다,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무당처럼 복채를 갖다 놓고 절한다도 아닙니다.
뭔가를 앞에 놓고 주문을 외우거나 절을 하거나 그 마음이 빼앗기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 우리나라 추석명절이 내일 모레인데, 오직 하나님께 예배는 드릴 수는 있지만, 무덤에나 신주 앞에서 무엇을 갖다 놓고 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술도 따라 올려도 안되고, 음식을 차려 놓고 절해도 안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귀신에게 하는 것이고, 귀신과의 교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 보이는 것으로 신을 만들어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면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 물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천사)를 보기도 하고, 음성으로, 환상으로, 꿈으로, 사건 사고로, 기적을 통해서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가 2000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성령으로 육신을 입고 오신 것도 믿어야 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도 믿어야 하고, 부활하신 것도 믿어야 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도 우리들이 믿어야 하는 믿음의 영역입니다.
→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약 600년 전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횃불언약으로 그의 백성에게 주신다는 말씀을 믿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믿지 못하여 불평, 불만, 원망, 대항한 자들은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왜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 오늘 말씀도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에게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요 20:29).
▶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자꾸 보이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고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신명기(申命記, Deuteronomy)를 통하여 다시 그들에게 또 어떤 형상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계명을 다시 주신다는 뜻입니다. 중요하기에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을 또 다시 똑 같이 모압평지에서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4:15]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17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18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19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신명기 4:23]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 호렙산 불 길 속에서 너희와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형상을 보지 못하였은즉 ~ 땅 위의 짐승이나, 하늘을 날으는 새나, 곤충이나 고기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에 관해서는 질투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 오늘날 우상 숭배는 반드시 소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소의 형상 뿐만 아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모든 것을 “우상(偶像)을 숭배한다”라고 말합니다.
→ 우상이라는 것은 한자적으로 소의 형상이 아니라 짝둥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왜, 다들 자꾸 짝둥을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까?
▶ 이런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일이 북이스라엘 초대왕 여로보암 시대에 또 다시 발생합니다.
이들의 금송아지를 만드는 우상숭배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시대에 남북 이스라엘로 나뉘어집니다.
북이스라엘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로 똑 같이 소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은 결국 망하게 되는데, 북이스라엘 편에 선 지파들은 앗수르의 혼혈정책과 이주정책으로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지파가 아니라 사마리아인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게 짝둥이 아닙니까?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의 짝둥입니다.
→ 짝둥 신을 섬기면 그들도 짝둥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는 짝둥은 가짜입니다. 멸망의 대상입니다.
▶ 그 짧은 시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을 섬기는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여로보암 시대의 금송아지 사건은 인간의 부패된 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누룩처럼, 마치 곰팡이처럼, 죄는 순식간에 번지고, 작게 남아 있어도 언젠가는 또 퍼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아온 십계명 돌판을 땅에 내 던지지 않았으면 그들은 십계명의 법대로 다 죽어야 했습니다 (출 32:19)
왜, 그렇까요?
이 사건에 대한 하나님은 평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① 백성이 부패하였다.
이 부패(히,샤하트)로 멸망, 파멸, 부패를 뜻합니다. 반드시 죽게되는 부패인 것입니다. 우리를 대체로 썩은 것에 적용하지만 죽음인 것입니다.
이 단어가 이전에 한번 더 나오는데, 노아의 홍수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부패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홍수로 다 망합니다.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창세기 6:12]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 앞에서 부패한 사람은 노아의 홍수시대와 마찬가지로 죽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패하면 다 죽습니다.
▶ 그래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다 죽어야 할 상황에 놓였습니다.
② 또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출 33:3,5,신 9:6,13)
[출애굽기 32: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뻣뻣함(히, 카셰)은 고집 센, 완고한, 교만한 뜻입니다.
→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완고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완고, 완악했던 바로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듣지 않는 목이 뻣뻣한 것은 교만, 거만인데,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잠 16:18). 선봉이니 제일 먼저 망하는 것입니다. 참 명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목걸이를 해야 합니다.
③ 또 이 백성이 방자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했다고 했습니다. (주석 참조할 것)
[출애굽기 32: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방자(히, 파라)는 하나님의 법과 상관없이 권위자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는 것입니다. 통제가 안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수에게 조롱거리(히, 쉼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끄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치스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니의 법이 있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 (수 5:9), 이제는 가나안 땅에 멸망받을 원수들과 똑 같이 됨에 따라 원수의 조롱거리, 수치거리가 된 것입니다.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개처럼 되어 죽는 것입니다.
▶ 그래서 다 죽게 생긴 것입니다.
[출애굽기 32: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은 모세 외에 출애굽한 모든 백성들을 다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시 3번이나 이런 결정을 내립니다.
너로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① 이런 상황에서 모세의 중보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2:14] 여호와게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모세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중보합니다. 이들의 죄를 사하지 않으시면 자신을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달라고 중보한 것입니다.(출 32:32)
→ 오늘날에도 중보자가 정말 중요합니다. 누군가에게 중보자가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예수님의 중보로 죄가 용서 받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 우리들의 가장 강력한 중보자는 예수님입니다. 할렐루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브리서 8: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히브리서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 12:24)
② 이스라엘 백성이 다 죽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이스라엘 형제 삼천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출 32:29).
여기서 헌신“(히, 말레)는 원어적으로 ”희생제물을 하나님의 손에 가득채운다“는 의미입니다.
레위인들이 여호와의 편에 서서 자기 동족 형제들을 쳐서 그들을 희생제물과 같이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린 것입니다. 3,000명이나!
그러므로 ”헌신“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봉사하는 차원, 작은 헌금을 드리는 차원이 아니라 생명을 드리는 행위가 헌신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최근에 다소 큰 물질을 헌금하신 분이 있는데, 아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헌신의 물질을 드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 이 헌신을 하는 일에 레위인이 동참한 것입니다.
자기의 형제를 치는 일입니다.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3000명 안에는 자기 형제, 자기 친구, 자기 부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죽이면서 자기도 죽는 아픈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32:26] 26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전체를 살리기 위하여 소수가 희생되어야 하는 어쩔 수 없이 헌신인 것입니다.
이런 헌신이 선행되지 않으면 다 죽으니까, 더 많이 죽으니까
우리들의 헌신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그 교훈도 여기서 얻을 수 있습니다.
3. 레위자손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성막에서 봉사하는 지파로 반전되었습니다.
원래, 레위지파 자손은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창 49장 야곱의 유언을 통해서 알수 있듯이 저주에 가까운 유언을 받습니다.
[창세기 49: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한마디로 야곱의 유언은 그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5절~6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야곱이 세겜 땅에 머물 때에, 세검의 추장에 의해 레위와 시므온의 여동생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사건으로 세겜 사람들을 할례를 받게 하고 가장 아파할 때에 남자들을 다 죽이고 세겜 성읍을 다 노략하는 폭력의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운명에 놓인 레위 지파가 여호와이 편에 섬으로 말미암아 그 저주가 벗겨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나아간 것입니다 (출 32:26)
누구든지, 저주에 있던 사람이든지, 죽을 위험에 있던 사람이든지~입니다.
물론 레위지파가 각 지파에 흩어져 살게 되는 유언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모습이기고 합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모압평지에서 각 지파에 대한 유언을 남길 때에 레위지파는 하나님을 섬기는 지파로 유언을 하여 영적 지파가 된 것입니다. 그 중요한 내용을 보면,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신 33:8-11 일부)
①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과 ② 재물의 축복과 ③ 승리의 축복이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야곱의 축복과는 온전히 달라진 거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는 순간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빨리 하나님의 편으로 자리를 옮겨야 합니다. 누구의 편인지 잘 모릅니까? 그렇 수 있습니다. 기도로 분별해야 합니다.
4. 우리들이 누구편에 서 있는냐에 따라서 죽고 살고가 결정되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서면 그 저주가 끝이 나고 축복이 다가오는데, 반대로 반대편에 서면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한번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의 편에 있습니까?
① 우상숭배를 한 다수인 그들의 편에 서 있을 것입니까? ② 하나님의 편, 모세의 편에 서 있을 것입니까?
▶ 이와 유사한 일이 출애굽 과정에서 고라일당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고 일어났을 때에도 있었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온이 반란을 일으켜 모세와 아론을 거스리며 일어났습니다.
”모세를 거스리니라“(민 16:2),※ 거스리다가 ”파님“(입이 달린 얼굴)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여호와께 반역할 때에“(민 26:9)
그때 그들의 장막에서 떠나지 않고 그들 편에 그대로 서 있었던 자들은 땅이 입을 벌려 삼켜버렸습니다. 민수기 16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모세와 아론의 편에 선 자는 살고 그렇지 않는 자는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고라쪽이지만 그 장막에 떠난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살았습니다. 나중에 성막 문을 지키고, 전병을 굽는 일도 맡았습니다 (대상 9:19, 31)
[민수기 26:11]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
▶ 모세가 구스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 때문에, 가장 가까운 아론과 미리암이 대적을 했습니다. 모세의 반대편에 선 것입니다.
구스여인은 흑인 여인으로 생각됩니다.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하는 것 자체가 당연히 비방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백성들도 아마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론과 미리암이 백성의 비난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야하는데, 오히려 비방한 것입니다. 모세의 편에 안 선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민 12:1-15).
이것 외에도 수없이 이런 경우 많습니다.
아브라함의 편, 다윗의 편, 엘리야의 편, 예레미야의 편에 있던 사람들은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 신약시대 예수를 판 유다도 예수님의 편에 있지 않고, 판 자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요 18:5 하반절)
그는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마 27:5)
▶ 오늘날 교회도 이런 저런 문제가 생겨 분열이 일어날 때에, 누구의 편에 서야 합니까?
세운 최고의 리더 편에 서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하나님과 친밀한 자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아론과 미리암에게도 하나님 꿈으로 환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얼굴을 맞대어 대면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대적하는 아론과 미리암의 죄에 빠지시면 안됩니다. 영적 문둥병에 걸려 버릴 수 있습니다.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 오늘날 기름부으신 교회 직분자들이 잘 새겨야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대적하고 견제하라고 세운 것이 아니라 도우라고 세운 것입니다. 나쁜 샘플을 보지 마시고 좋은 샘플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교회 다니면서 망할 일 있습니까?
▶ 어느 한 사건에 있어서도 누구의 편이냐의 따라서 죽고 살고가 결정되는데, 더 크게는 사탄의 편이냐? 하나님의 편이냐?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사탄의 나라의 소속이냐? 하나님의 나라의 소속이냐?입니다.
→ 양쪽 다 편은 안됩니다. 성경은 함께 갈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후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고린도전서 10: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주일에는 교회에 오고, 한번씩 절에도 가고, 명절 때에 제사도 한번드리고 그런 모습이라면 그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가 아닙니다.
→ 이 두편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①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② 빛과 어둠의 차이입니다. ③ 생명과 사망의 차이입니다. ④ 저주와 축복의 차이입니다. ⑤ 지옥과 천국의 차이입니다.
▶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 하나님께 속하게 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그러면 생명을 얻고, 보호를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들어가는 지옥, 유황 불못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는 사람도 지킵니다. 보호합니다. 아낌니다. 그것이 가치가 없는 하찮은 것가지 말입니다. 소유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 생명까지, 재산까지, 자식까지 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맺는 말>
하나님의 소속, 하나님의 편,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가장 큰 복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속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자칫 다수의 사람을 따라가다가 보면, 반대편에 있을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말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나“ (벧전 2:9).
그럼에도 순간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설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짝둥을 섬기거나 내가 짝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신부 사라가 아니라 애굽 여인 하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편, 하나님 나라의 소속, 소유가 되셔서 생명의 길로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