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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 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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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댁 손자 글방 스크랩 선화공주(善花公主)와 백제왕비 사택(沙宅)씨
오대댁(병연) 추천 0 조회 167 09.01.22 11:4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며칠 전 미륵사 석탑 사리와 봉안기가 발견되어

언론에서 열심히 다루고 있고 대중의 흥미도 상당한 것 같다.

 

그런데 보도 중점(重點)이 선화공주(善花公主)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었다

라는 데 맞추어져 있고, 당연히 일반인의 화제도 그 쪽으로 쏠린 듯 하다.

 

아 선화공주 이야기야 당연히 설화지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새삼 깨달은 것은 일반 대중은 사실(史實)과 설화를

거의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연대사가 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채록한 것은

당시까지 뭔가 전해내려 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백제 무왕부터 일연 대사까지 거의 7-8백 년 차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이야기가 변형되었을 것이다.

 

어쨌던 한낱 민간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제척해 버릴 수는 없다.

또 설화에도 일정한 역사적 배경이 들어 있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다 믿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옛날부터 그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고 하여

옛날에 그런 일이 실재로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서동요(薯童謠)

 

이제 고등학교 때 다들 배웠을 서동요를 다시 한번 본다.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에 선화공주 이야기와 함께

다음과 같은 노래가 실려 있는데 서동요(薯童謠)라고 한다.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이두(吏讀) 문자라 한문 아무리 잘 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서동요에 대한 양주동 박사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善化公主主隱       선화공주(善化公主)니믄                         

他密只嫁良置古     남 그즈지 얼어 두고,                                  

薯童房乙           맛둥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   바뫼 몰 안고 가다.                                      

 

백제 무왕이 총각 때 신라 서라벌에 가서

아이들 시켜 부르게 했다는 노래다.

 

여자가 구중궁궐에 있으면 사랑을 얻기는커녕 근처에 가기도 힘들다.

따라서 먼저 궁궐에서 몰아내야 접근을 하던 말던 할 테니

선화공주가 웬 남자와 밤마다 뭔 짓을 한다고 더러운 소문을 낸 것이다.

 

중국인들이 즐겨 쓰고 삼국지에도 자주 나오는 조호이산(調虎離山),

호랑이를 잡으려면 먼저 깊은 산중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계책의 일종이다.

 

이런 술책을 쓴 무왕의 인간성이 더럽지 않느냐고 평가할 수도 있으련만

신화의 주인공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동명왕이 준마를 얻으려고 왕실 목장의 말에 바늘을 꽂은 것도

따지고 보면 치사한 일이지만 신화에서는 아주 똑똑한 일로 판단한다.

 

요즈음 식으로 따지면 성희롱이라고 여성단체에서 들고 일어나고

검찰도 사이버 테러로 잡아들일 일이지만 신라 때는 그런 거 없었다.

 

서동(薯童)-무왕의 비열한(?) 계책은 먹혀 들어 선화공주는 궁에서 쫓겨나고

귀양 가는 길에 무왕을 만나자마자 (신화니까 당연히) 사랑을 느끼고

두 사람은 백제로 와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고 삼국유사에 나온다.

 

그 선화공주의 부탁으로 남편 무왕이 세웠다는 것이

삼국유사에 실린 미륵사 연기(緣起) 설화다.

 

그 동안 이것을 실화 내지 실화에 가까운 것으로 여겼던 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백제 무왕은 아무래도 백제 정통세력출신이 아닌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전통귀족들의 지지가 엷고 이런 저런 설음을 받다 보니

도읍을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겠느냐?

 

이런 경우 고대에는 도읍을 옮겨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무현이 갑자기 생각난다.

노씨는 우리나라 정치계 엘리트들 중 정통파가 아니었다.

노씨의 행정수도 이전추진도 혹시 그런 무의식적 계산이 있지 않았을까?

 

다시 무왕의 천도론으로 돌아가 그 증거로 미륵사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미륵사 주변 지역 이름이 묘하게 왕궁리(王宮里-익산)고,

왕궁리에서 실재로 백제 왕궁으로 비견될 만한 터전이 나오고 있다.

 

이런 저런 정황이 삼국유사에 실린 선화공주 이야기와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다.

 

그러다가 이번 사리탑 봉안기 발견으로 무왕의 왕비가

실은 백제 대귀족 사택(沙宅) 씨 출신이다 라는 것이 밝혀졌다.

 

재미는 좀 없게 되었지만, 정황증거(Circumstantial Evidence)란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발굴

 

사리 봉안기는 미륵사 석탑 심주(心柱) 해체과정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사진:

(塔) 또는 부도(浮屠)는 기본적으로 무덤이니 사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걸 이번에 발견하고 그 봉안기-탑 조성경위에 대한 문건도 찾은 모양이다.

 

 

사리봉안기

 

아래 사진은 이번에 발견한 봉안기다.

 

 

 

그런데 글 중간에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라는 구절이 있다.

 

그렇다. 백제 무왕(武王)의 왕비(王妃)는 사택 (沙宅) 씨였다.

 

 

사택 (沙宅) 씨와 백제 8대성(姓)

 

 

중국 측 사서인 북사(北史),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백제전에는

백제에 8대성(姓)이 있다고 하였다. 사서마다 약간의 차이,

필사 과정에서 일어난 오기인 듯한 차이가 있지만 다음과 같다.

 

(沙), 연(燕), 협(協에서 왼쪽 변이 없음), 해(解),

(眞), 국(國), 목(木), 백(풀초 밑에 白)의 여덟 성(姓)이다.

 

이 팔대성 위에 부여 왕실의 성 부여(扶餘)씨가 있다.

 

 

 

도표: 백제 8대성,

출처-“다시 찾은 백제문화” 엄기표, 고래실 2005/7/11

 

위 도표에 나온 성씨 중

 

 

부여(扶餘)씨 ;

 

백제 왕실의 출자(出自)가 부여-고구려로서 부여는 왕실의 성씨다.

예를 들어 의자왕의 아들 융, 용, 풍도 각각 부여융, 부여용, 부여풍이었다.

 

백제의 성은 이처럼 복성(複姓)-두 글자로 된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다가 중국과 교섭하면서 중국식 한 글자 성으로 차츰 바꾼다.

대략 첫 글자를 따는데 부여 씨는 뒤쪽을 따서 여씨(餘氏)로 된다.

 

 

(解), 진(眞)씨 :

 

팔대성 중 이 두 성은 온조왕의 한성 백제시대부터 중앙 정계에

있던 가문으로 여기고 있다.

 

‘해’ 씨는 우리 민족이 숭배하던 태양-해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진씨는 원래 진모(眞慕)씨로 두 글자-복성이었다.

그러다가 부여씨처럼 한 글자로 줄이는데 앞을 따서 진씨가 되었다.

 

 

(木), (協에서 왼쪽 변이 없음) ;

 

원래 복성-목협(木협) 씨였는데 목 씨와 협 씨 두 성으로 나뉘었다.

백제 이전 원래 마한의 중심이었던 소국(小國)-목지국(目支國-천안 일대)

출신 집안으로 여기고 있다.

 

 

(沙), 연(燕), 백(풀초 밑에 白)는 백제가 웅진으로 옮긴 후

득세한 그 지역 토착세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沙) 씨는 사택 (沙宅) 복성(複姓)이었는데, 앞 글자를 따서 사씨가 되었다.

이번에 명문이 발견된 무왕비가 바로 이 사택 (沙宅) 씨다.

沙宅 씨는 砂宅 씨로도 쓴다.

 

 

 

이런 성씨는 귀족들 경우고 일반 백성이나 노비는 성도 이름도 없었을 것이다.

백성들은 마치 오늘날 인터넷에 닉네임으로 통하듯 가벼운 호칭이나

별칭으로 불렀을 것이다.

 

 

부여 씨나 백제 팔대성은 오늘 날 흔적도 없다.

대신 신라 지배층인 김씨, 박씨 와 조선 왕조 이씨가 한국인의 다수다.

백제가 망한 뒤 그 귀족들이 통일신라의 지배층에 편입되지 못한 탓일 게다.

가야는 망했지만 김해 김씨-김유신 집안은 신라 진골에 편입된 것,

로마가 피정복국가 엘리트들을 흡수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사택지적(砂宅智積) 비(碑)

 

사택 씨 하니 사택지적비(碑)가 생각난다.

 

1939년 일제는 부여읍 부소산 남쪽에 조선 최대규모의 신궁을 세우려 했다.

이 신궁(神宮) 진입도로를 포장하려고 부여 각지에서 돌을 모아 쌓아 두었다.

그러다가 일본이 전쟁에 지는 바람에 모아 둔 돌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1948년 홍사준 선생이 부여일대를 답사하다가

이 돌더미에서 비석 하나를 발견하고 부여박물관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한 동안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 근년에 와서

그 비석이 백제 의자왕 당시를 말해주는 유일한 금석문임이 드러났다.

 

 

 

사진: 사택지적비, 높이 102cm, 폭 38cm, 두께 29cm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갑인년(65, 의자왕 14년) 정월 9일 내지성(奈祗城)의 사택지적(砂宅智積)

몸은 해가 가듯 가기 쉽고 달이 가듯 돌아오기 어려움을 한탄하고 슬퍼하여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세우고 옥을 깎아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높고 크고 웅장하며 자비로운 모습은 신령한 빛을 토함으로써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높고 웅장하면서 자비로운 모습은 밝음을 머금음으로써..

 

 

남아 있는 비석의 비문은 여기까지로 그 뒤 부분은 찾지 못했다.

사택이 성이고 이름이 지적인데, 일본서기에 대좌평(大佐平)으로 나온다.

대좌평은 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쯤 되겠다.

 

이 사택지적과 무왕비의 친정아버지 사택적덕과는 무슨 관계일까?

무왕의 아들이 의자왕이니 시대는 서로 멀지 않다.

더 이상 알 수 없지만 같은 집안-백제를 대표하는 대귀족일 것이다.

 

 

무왕 당시를 보면 신라와는 거의 원수가 되어 있었으니

무왕이 왕권을 확고히 하는데 신라의 도움을 받기 보다는

대귀족인 사택씨와 손잡는 것이 개연성이 더 있다고 하겠다.

 

 

고대사는 놀라울 정도로 사료가 빈약하다.

더욱이 백제는 패자였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도 지배한다는 역사학의 격언이다.

백제의 역사는 원사료는 다 사라지고 고려인이라지만

신라의 후예라는 의식이 강했던 김부식에 의해 삼국사기로 정리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택지적비 같이 금석문이 나오면 그야말로 보물이다.

이번 미륵사 사리봉안기 발굴로 선화공주야 섭섭하게 되었지만

백제사 연구에 있어서는 큰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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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1.22 21:46

    첫댓글 사(沙), 연(燕), 협(協에서 왼쪽 변이 없음),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백(풀초 밑에 白)의 여덟 성(姓)이다."백제사 연구에대해 귀중한 자료 밝혀질까요?기대해보며 늘 감사합니다,뫼셔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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