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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
권43. 조세가(趙世家) 효성왕(孝成王)
孝成王元年,1) 秦伐我, 抜三城. 趙王新立, 太后用事, 秦急攻之. 趙氏求救於斉, 斉曰:「必以長安君2)為質, 兵乃出.」太后不肯, 大臣彊諫. 太后明謂左右曰:「复言長安君為質者, 老婦必唾其面.」左師触竜言願見太后, 太后盛気而胥之. 入,3) 徐趨而坐, 自謝曰:「老臣病足, 曾不能疾走, 不得見久矣. 窃自恕, 而恐太后体之有所苦也, 故願望見太后.」太后曰:「老婦恃輦而行耳.」4)曰:「食得毋衰乎?」曰:「恃粥耳.」曰:「老臣閒者殊不欲食, 乃彊歩, 日三四里, 少益嗜食, 和於身也.」太后曰:「老婦不能.」太后不和之色少解. 左師公曰:「老臣賎息舒祺最少, 不肖, 而臣衰, 窃憐愛之, 願得補黒衣之欠以衛王宮, 昧死以聞.」太后曰:「敬諾. 年幾何矣?」対曰:「十五歳矣. 雖少, 願及未填溝壑而託之.」太后曰:「丈夫亦愛憐少子乎?」対曰:「甚於婦人.」太后笑曰:「婦人異甚.」対曰:「老臣窃以為媼之愛燕后賢於長安君.」太后曰:「君過矣, 不若長安君之甚.」左師公曰:「父母愛子則為之計深遠. 媼之送燕后也, 持其踵, 為之泣, 念其遠也, 亦哀之矣. 已行, 非不思也, 祭祀則祝之曰『必勿使反』, 豈非計長久, 為子孫相継為王也哉?」太后曰:「然.」左師公曰:「今三世以前, 至於趙主之子孫為侯者, 其継有在者乎?」曰:「無有.」曰:「微独趙, 諸侯有在者乎?」曰:「老婦不聞也.」曰:「此其近者禍及其身, 遠者及其子孫. 豈人主之子侯則不善哉? 位尊而無功, 奉厚而無勞, 而挟重器多也. 今媼尊長安君之位, 而封之以膏腴之地, 多與之重器, 而不及今令有功於国, 一旦山陵崩, 長安君何以自託於趙? 老臣以媼為長安君之計短也, 故以為愛之不若燕后.」太后曰:「諾, 恣君之所使之.」於是為長安君約車百乗, 質於斉, 斉兵乃出.
효성왕 원년,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세 개의 성을 빼앗았다. 조나라 왕이 막 즉위해 태후(太后)가 정권을 장악하자, 진(秦)나라가 (이 기회를 틈타) 재빨리 공격해온 것이다.
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제나라 왕은 “장안군(長安君)을 인질로 보내주어야만 구원병을 파견할 수 있다.”라 했다. 태후가 이에 응하려고 들지 않자 대신들이 극력 간언했다. 태후는 좌우 사람들에게 명백히 밝히기를 “또다시 장안군을 인질로 삼자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노부(老婦)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야 말겠다.”라 했다.
좌사(左師) 촉룡(觸龍)이 태후를 뵙고 싶다고 말하자, 태후는 노기등등해 그를 기다렸다. 촉룡이 입궁해 천천히 잰걸음으로 걸어와 앉은 후 사죄하기를 “노신이 발에 병이 있어 빨리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노쇠해진 제 몸으로 미루어보니, 태후님의 옥체 또한 불편하지나 않으신지 걱정되어 태후님을 뵙고자 했습니다.”라 했다. 그러자 태후가 “노부는 가마를 타고 다니오.”라고 대답했다. 촉룡이 “식사량은 줄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묻자, 태후가 “죽을 좀 먹을 뿐이오.”라 했다. 촉룡이 “노신은 근래 식욕이 매우 좋지를 않아 하루에 억지로 3-4리를 걸어 다소 식욕을 증진시키고 있는데, 이것이 몸에도 좋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태후가 “노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소.”라고 대답했다. 태후의 불쾌했던 기색이 약간 누그러졌다.
좌사공(左師公)이 “노신의 아들 서기(舒祺)는 나이가 가장 어리고 불초합니다만 신이 이미 노쇠해 마음속으로 그를 매우 사랑하고 있사오니, 원컨대 흑의(黑衣)의 결원을 보충해 왕궁을 지키도록 해주시기를 황공함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라 했다. 태후가 “알았소. 나이가 얼마나 되었소?”라고 묻자, “15세입니다. 아직 어립니다만 제가 죽기 전에 그 애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태후가 “당신네 남자들도 어린 자식을 사랑하오?”라고 묻자, 좌사공은 “부인네들보다 더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태후가 웃으며 “부인네들은 각별히 더하다오.”라고 하니, 좌사공은 “노신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태후께서는 장안군보다 연후(燕后)를 훨씬 더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라 했다. 그러자 태후가 “틀렸소. 장안군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소.”라 했다.
좌사공이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위해 심원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태후께서 연후를 시집보내실 때 그녀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그녀를 위해 우셨는데, 딸이 멀리 떠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도 하셨겠지요. 이미 시집을 가버린 후에도 그리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사를 지낼 때 축원하기를 ‘절대로 연후가 돌아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실 것이니, 그것은 생각을 멀리해 그녀의 자손이 대를 이어 연나라의 왕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묻자, 태후가 “그렇소.”라 했다. 좌사공이 “지금으로부터 3대 이전에 조나라 역대 군주의 자손으로서 후(侯)에 봉해진 사람의 후사(後嗣) 가운데 아직 재위하는 자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태후가 “없소.”라 했다. 좌사공이 “조나라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제후국 자손의 후사 가운데 아직도 재위하는 자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태후가 “노부는 본 적이 없소.”라고 대답했다.
좌사공이 “이는 가까이 있는 화는 자신에게 미치고 멀리 있는 화는 자손에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어찌 군주의 자손으로서 후(侯)에 봉해진 자 모두가 악하겠습니까? 이는 그들이 지위는 존귀하면서도 공훈이 없고, 봉록이 후하면서도 공적이 없으며, 단지 진귀한 보물만을 많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태후께서 장안군의 지위를 올려주시고 비옥한 토지를 봉해 주시며 귀중한 보물을 많이 주셨으나, 지금 그로 하여금 나라를 위해서 공을 세우게 하지 않으신다면 태후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 장안군이 어떻게 조나라에서 몸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노신은 태후께서 장안군을 위해 세운 계획이 너무 짧다고 생각해 그를 사랑하심이 연후만 못하다고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태후가 “알았소. 그대 마음대로 그를 파견하시오.”라 했다. 그리하여 장안군을 위해서 백 대의 마차를 준비해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니 제나라는 비로소 구원군을 보내주었다.
子義聞之,5) 曰:「人主之子, 骨肉之親也, 猶不能持無功之尊, 無勞之奉, 而守金玉之重也, 而況於予乎?」
자의(子義)가 이 일을 듣고 “군주의 아들은 군주와 서로 피를 나눈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공훈 없이 누리는 존귀한 지위나 공로 없이 받는 봉록으로는 자신의 귀중한 보물을 지킬 수 없으니 하물며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겠구나.”라 했다.
斉安平君6)田単将趙師而攻燕中陽,7) 抜之. 又攻韓注人,8) 抜之. 二年, 恵文后卒. 田単為相.
제나라 안평군(安平君) 전단(田單)이 조나라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의 중양(中陽)을 공격해 점령했다. 또한 한(韓)나라의 주인(注人)을 공격해 점령했다. 2년, 혜문후가 죽었다. 전단이 조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四年, 王夢衣偏裻之衣,9) 乗飛竜上天, 不至而墜, 見金玉之積如山. 明日, 王召筮史敢占之, 曰:「夢衣偏裻之衣者, 残也. 乗飛竜上天不至而墜者, 有気而無実也. 見金玉之積如山者, 憂也.」
4년, 왕이 꿈에 좌우 색깔이 다른 옷을 입고 비룡(飛龍)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다가 끝가지 이르지 못하고 떨어졌는데 금과 옥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왕은 서사(筮史) 감(敢)을 불러 점을 치게 하니, 감이 해석하기를 “꿈에 좌우 색깔이 다른 옷을 입은 것은 불완전함을 뜻합니다. 비룡을 타고 날다가 이르지 못하고 떨어진 것은 기세는 있지만 힘이 없음을 상징합니다. 금과 옥이 산처럼 쌓여 있음을 본 것은 우환이 있음을 뜻합니다.”라 했다.
後三日, 韓氏上党守馮亭使者至, 曰:「韓不能守上党, 入之於秦. 其吏民皆安為趙, 不欲為秦. 有城市邑十七, 願再拝入之趙, 財王所以賜吏民.」王大喜, 召平陽君豹告之曰:「馮亭入城市邑十七, 受之何如?」対曰:「聖人甚禍無故之利.」王曰:「人懐吾徳, 何謂無故乎?」対曰:「夫秦蚕食韓氏地, 中絶不令相通, 固自以為坐而受上党之地也. 韓氏所以不入於秦者, 欲嫁其禍於趙也. 秦服其勞而趙受其利, 雖彊大不能得之於小弱, 小弱顧能得之於彊大乎? 豈可謂非無故之利哉! 且夫秦以牛田之10)水通糧11)蚕食, 上乗倍戦者,12) 裂上国之地,13) 其政行, 不可與為難, 必勿受也.」王曰:「今発百萬之軍而攻, 踰年歴歳未得一城也. 今以城市邑十七幣吾国,14) 此大利也.」
그로부터 3일 후, 한나라 상당(上黨)의 태수 풍정(馮亭)의 사자가 와서 “한나라는 상당을 지킬 수가 없어서 진(秦)나라에 편입시키려고 하는데, 상당의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조나라에 귀속되기를 희망하며 진나라에 편입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상당에 성읍 17개가 있는데, 재배(再拜)하며 조나라에 귀속되기를 원하오니 왕께서는 상당의 관리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실지 여부를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라 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평양군(平陽君) 표(豹)를 불러 “풍정이 성읍 17개를 바친다고 하니 받는 게 어떠한가?”라고 묻자, 표는 “성인은 이유 없는 이익을 큰 재앙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그곳 사람들이 내 덕을 사모해 그러는데 왜 이유 없다고 말하는가?”라고 하니, “진(秦)나라가 한나라의 토지를 잠식해 중간에서 도로를 단절하고 양쪽을 서로 통하지 못하게 했는데, 그럼으로써 본래 가만히 앉아서 상당의 토지를 얻겠거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라가 진나라에 편입시키지 않으려는 이유는 화를 조나라에게 뒤집어씌우겠다는 의도입니다. 진나라가 수고를 했는데 조나라가 앉아서 그 이익만 얻다니, 강대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약소국가에서 손쉽게 이익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약소국가로서 강대한 나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을 어찌 이유 없는 이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진나라는 우전(牛田)의 수로를 이용해 양식을 운반하고 한나라를 잠식하며, 가장 좋은 말과 정예 군사로 상국(上國)을 분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정책이 이미 실행되고 있는 마당에 진(秦)나라에 대적해서는 아니 되오니 절대로 받지 마십시오.”라 했다. 왕이 “지금 우리가 백만 대군을 출동시켜 공격해도 여러 해를 넘기도록 성 하나 얻을 수 없었소. 그런데 지금 성읍 17개를 우리나라에 바친다고 하니, 이는 크나큰 이익이오.”라 했다.
趙豹出, 王召平原君與趙禹而告之. 対曰:「発百萬之軍而攻, 踰歳未得一城, 今坐受城市邑十七, 此大利, 不可失也.」王曰:「善.」乃令趙勝受地, 告馮亭曰:「敝国使者臣勝, 敝国君使勝致命, 以萬戸都三封太守,15) 千戸都三封県令, 皆世世為侯, 吏民皆益爵三級, 吏民能相安, 皆賜之六金.」馮亭垂涕不見使者, 曰:「吾不処三不義也:為主守地, 不能死固, 不義一矣;入之秦, 不聴主令, 不義二矣;売主地而食之, 不義三矣.」趙遂発兵取上党.16) 廉頗将軍軍長平.17)
조표가 나가자 왕은 평원군(平原君)과 조우(趙禹)를 불러 이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들은 “백만 대군을 출동시켜 공격해도 여러 해가 지나도록 성 하나 얻을 수 없는데 지금 앉아서 성읍 17개를 얻으니 이렇게 큰 이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왕이 “좋소.” 하며, 곧 평원군 조승(趙勝)을 보내 토지를 받게 했다. 조승이 풍정에게 “저는 폐국(敝國)의 신하 조승이온대, 폐국의 군주께서 명령을 전달하게 저를 파견하셨습니다. 저희 나라 군주께서는 만 호(萬戶)의 성읍 3개를 태수에게 봉하시고 1천호의 성읍 3개를 각 현령에게 봉하시며 모두 대대로 후(侯)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관리와 백성에게는 모두 세 계급씩 작위를 올려주고 그들이 모두 평안하게 지내도록 모두에게 여섯 근의 황금을 하사하셨습니다.”라고 하자, 풍정이 눈물을 흘리며 사자를 보지 않은 채로 “저는 세 가지 불의(不義)를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군주를 위해 토지를 지키는 데 목숨을 바쳐 고수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첫 번째 불의요, 진(秦)나라에 귀속시키라고 했는데 군주의 명령을 듣지 않았으니 이것이 두 번째 불의이며, 군주의 토지를 팔아서 상을 받으니 이것이 세 번째 불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조나라는 마침내 군대를 출동시켜 상당을 점령했다. 염파는 군대를 이끌고 장평(長平)에 주둔했다.
七(年)[月], 廉頗免而趙括代将. 秦人囲趙括, 趙括以軍降, 卒四十余萬皆阬之. 王悔不聴趙豹之計, 故有長平之禍焉.
7월, 염파가 면직당하고 조괄(趙括)이 대신 군대를 지휘했다. 진(秦)나라 군대가 조괄을 포위하자 조괄은 군대를 이끌고 항복했는데, 군사 40만여 명이 모두 생매장당했다. 왕은 조표의 의견을 듣지 않아 장평의 화(禍)가 일어나게 된 것을 후회했다.
王還, 不聴秦, 秦囲邯鄲.18) 武垣令19)傅豹、王容、蘇射率燕衆反燕地.20) 趙以霊丘21)封楚相春申君.
왕이 한단으로 돌아와 진(秦)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진나라는 한단을 포위했다. 무원(武垣)의 현령 부표(傅豹)와 왕용(王容), 소석(蘇射) 등은 연나라 백성을 이끌고 연나라로 되돌아갔다. 조나라는 영구(靈丘)를 초 나라 재상 춘신군(春申君)에게 봉해주었다.
八年, 平原君如楚請救. 還, 楚來救, 及魏公子無忌亦來救,22) 秦囲邯鄲乃解.
8년, 평원군이 초 나라에 가서 구원을 요청했다. 그가 귀국한 뒤 초 나라에서 구원병이 왔고, 위(魏)나라 공자 무기(無忌)도 역시 도와주러 오자 진(秦)나라는 한단의 포위망을 비로소 풀었다.
十年, 燕攻昌壮,23) 五月抜之. 趙将樂乗、慶舎攻秦信梁軍, 破之.24) 太子死.25) 而秦攻西周, 抜之. 徒父祺26)出.27) 十一年, 城元氏,28) 県上原. 武陽君鄭安平死,29) 収其地. 十二年, 邯鄲廥焼.30) 十四年, 平原君趙勝死.31)
10년, 연나라가 창장(昌壯)을 공격해 5월에 점령했다. 조나라 장수 악승(樂乘)과 경사(慶舍)는 진(秦)나라 장수 신량(信梁)의 군대를 공격해 무찔렀다. 태자가 죽었다. 진(秦)나라는 서주(西周)를 공격해 점령했다. 도보기(徒父祺)가 군대를 이끌고 출경(出境)했다. 11년, 원지(元氏)에 성을 쌓고 상원(上原)을 현으로 삼았다. 무양군(武陽君) 정안평(鄭安平)이 죽자 그 봉지를 회수했다. 12년, 한단의 사료(飼料) 창고에 불이 나서 타버렸다. 14년, 평원군 조승이 죽었다.
十五年, 以尉文封相国廉頗為信平君.32) 燕王令丞相栗腹約驩, 以五百金為趙王酒, 還帰, 報燕王曰:「趙氏壮者皆死長平, 其孤未壮, 可伐也.」王召昌国君樂閒而問之. 対曰:「趙, 四戦之国也, 其民習兵, 伐之不可.」王曰:「吾以衆伐寡, 二而伐一, 可乎?」対曰:「不可.」王曰:「吾即以五而伐一, 可乎?」対曰:「不可.」燕王大怒. 群臣皆以為可. 燕卒起二軍, 車二千乗, 栗腹将而攻鄗, 卿秦将而攻代.33) 廉頗為趙将, 破殺栗腹, 虜卿秦、樂閒.34)
15년, 위문(尉文) 지방을 재상 염파에게 봉하고, 그의 봉호를 신평군(信平君)이라 했다. 연왕(燕王)은 승상 율복(栗腹)을 보내 조나라와 우호를 다짐하고 황금 5백 근을 조나라 왕에게 예물로 보냈다. 율복이 돌아가 연나라 왕에게 “조나라의 장정들은 모두 장평에서 죽었고, 그들의 고아들은 아직 크지 않았으니 정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하자, 왕이 창국군(昌國君) 악간(樂間)을 불러 이 일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악간이 “조나라는 사방에서 적과 싸우는 국가이므로 그 백성들은 병법을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니 정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나는 다수의 병사로써 소수의 병졸을 치려고 하는데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대항해 싸우면 되겠는가?”라고 하자, 악간이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그렇다면 내가 다섯 사람으로써 한 사람과 싸우면 되겠는가?”라고 물었으나, 또 역시 “안 됩니다.”라고 대답하자 왕이 매우 노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하자, 연나라 왕은 마침내 상군과 하군 두 부대와 전차 2천승을 출동시키고, 율복은 장수가 되어 호성(鄗城)을 공격했으며, 경진(卿秦)도 장수가 되어 대(代) 지방을 공격했다. 염파는 조나라 장수로서 연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율복을 죽였으며 경진과 악간을 포로로 붙잡았다.
十六年, 廉頗囲燕. 以樂乗為武襄君.35) 十七年, 仮相大将武襄君攻燕, 囲其国. 十八年, 延陵鈞36)率師従相国信平君助魏攻燕. 秦抜我楡次三十七城.37) 十九年, 趙與燕易土:38)以竜兌、39)汾門、40)臨樂41)與燕;燕以葛、武陽、42)平舒43)與趙.
16년, 염파가 연나라를 포위했다. 악승을 무양군(武襄君)으로 봉했다. 17년, 임시 재상인 대장(大將) 무양군이 연나라를 공격해 그 수도를 포위했다. 18년, 연릉(延陵)의 장수 균(鈞)이 군사를 이끌고 재상 신평군을 따라서 위(魏)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했다. 진(秦)나라가 조나라 유차(楡次)의 37성을 빼앗았다. 19년, 조나라와 연나라는 토지를 교환해 용태(龍兌), 분문(汾門), 임락(臨樂)을 연나라에게 주고, 연나라는 갈(葛), 무양(武陽), 평서(平舒)를 조나라에게 주었다.
二十年, 秦王政初立. 秦抜我晉陽.
20년, 진왕(秦王) 정(政)이 처음으로 즉위했다.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진양(晉陽)을 빼앗았다.
二十一年, 孝成王卒. 廉頗将, 攻繁陽,44) 取之. 使樂乗代之, 廉頗攻樂乗, 樂乗走, 廉頗亡入魏. 子偃立, 是為悼襄王.
21년, 효성왕이 죽었다. 염파가 장수가 되어 위(魏)나라의 번양(繁陽)을 공격해 점령했다. 악승을 파견해 염파를 대신하게 했는데, 염파가 악승을 공격하니 악승은 패주하고 염파는 위(魏)나라로 도망했다. 효성왕의 아들 언(偃)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도양왕(悼襄王)이다.
각주
1 集解徐広曰:「平原君相也.」
2 索隠孔衍云:「恵文后之少子也. 趙亦有長安, 今其地闕.」 正義長安君者, 以長安善, 故名也.
3 集解胥猶須也. 谷梁傳曰:「胥其出也.」
4 索隠按:束皙云「趙恵文王子何者, 呉広之甥, 娃嬴之子也」. 如系家計之, 則武霊王十六年夢呉娃而納之, 至二十七年王薨, 及恵文王三十二年卒, 孝成王元年遣長安君質於斉, 若娃年二十入王宮, 至此亦年六十左側, 亦可称老. 而束広微言太后纔三十有奇者, 誤也.
5 索隠子義, 趙之賢人.
6 正義括地志云:「安平城在青州臨淄県東十九里, 古紀之酅邑也.」
7 集解徐広曰:「一作『人』.」 正義燕無中陽. 括地志云:「中山故城一名中人亭, 在定州唐県東北四十一里, 爾時属燕国也.」
8 正義邑名也. 括地志云「注城在汝州梁県西十五里」, 蓋是其地也.
9 正義杜預云:「偏, 左右異色. 裻在中, 左右異, 故曰偏.」按:裻, 衣背縫也.
10 集解徐広曰:「一無此字.」 正義秦蚕食韓氏, 国中断不通. 夫牛耕田種谷, 至秋則収之, 成熟之義也. 言秦伐韓上党, 勝有日矣, 若牛田之必冀収穫矣.
11 正義秦従渭水漕糧東入河、洛, 軍撃韓上党也.
12 正義乗, 承証反. 蚕食桑葉, 漸進必尽也. 司馬法云:「百畝為夫, 夫三為屋, 屋三為井, 井十為通, 通十為成. 成出革車一乗, 七十二人也.」上乗, 天下第一也. 倍戦, 力攻也. 韓国四戦之地, 軍士慣習, 倍於余国.
13 正義上国, 秦地也. 言韓上党之地以列為秦国之地, 其政已行, 趙不可與秦作難, 必莫受馮亭十七邑也.
14 正義馮亭将十七邑入趙, 若幣帛之見遺, 此大利也.
15 正義爾時未合言太守, 至漢景帝始加太守, 此言「太」, 衍字也.
16 集解漢書馮奉世傳曰:「趙封亭為華陵君, 與趙将括距秦, 戦死於長平, 宗族由是分散, 或在趙. 在趙者, 為官師将, 官師将子為代相. 及秦滅六国, 而馮亭之後馮無択、馮去疾、馮劫皆為秦将相焉. 漢興, 馮唐即代相之子也.」上党記云:「馮亭冢在壷関城西五里.」
17 正義括地志云:「長平故城在沢州高平県西二十一里, 即白起敗括於長平処.」
18 集解徐広曰:「在九年.」
19 集解徐広曰:「河閒有武垣県, 本属涿郡.」 正義括地志云:「武垣故城今瀛州城是也.」
20 正義武垣此時属趙, 與燕接境, 故云率燕衆反燕地也.
21 正義括地志云:「霊丘, 蔚州理県也.」
22 正義魏公子傳云「趙王以鄗為公子湯沐邑」. 年表云「九年公子無忌救邯鄲」. 囲在九年, 其文錯誤.
23 集解徐広曰:「一作『社』.」 正義壮字誤, 當作「城」. 括地志云:「昌城故城在冀州信都県西北五里.」此時属趙, 故攻之也.
24 集解徐広曰:「年表云新中軍也.」 索隠信梁, 秦将也. 正義信梁蓋王齕号也. 秦本紀云「昭襄王五十年王齕従唐抜寧新中, 寧新中更名安陽」, 今相州理県也. 年表云「韓、魏、楚救趙新中軍, 秦兵罷」是也.
25 集解徐広曰:「是年周赧王卒, 或者『太子』云『天子』乎?」 索隠趙之太子也, 史失名.
26 索隠趙大夫, 名祺.
27 正義趙見秦抜西周, 故令徒父祺将兵出境也.
28 集解地理志常山有元氏県. 正義元氏, 趙州県也.
29 集解徐広曰:「故秦将降趙也.」
30 集解徐広曰:「廥, 厩之名, 音膾也.」 索隠廥, 積芻稿之処, 為火所焼也.
31 索隠按年表在十五年也.
32 索隠尉文蓋地名. 或曰, 尉, 官;文, 名. 謂以尉文所食之地以封廉頗也. 古文質略, 文省耳. 正義尉文蓋蔚州地也. 信平, 廉頗号也, 言篤信而平和也.
33 索隠二人皆燕将姓名.
34 正義三人皆燕将(姓)也.
35 正義襄, 挙也, 上也. 言樂乗功最高也.
36 集解徐広曰:「代郡有延陵県.」
37 集解徐広曰:「在太原.」
38 索隠音亦. 謂與燕換易県也.
39 正義括地志云:「北新城故城在易州遂城県西南二十里. 按:遂城県西南二十五里有竜山, 邢子励趙記云『竜山有四麓, 各有一穴, 大如車輪, 春風出東, 秋風出西, 夏風出南, 冬風出北, 不相奪倫』. 按蓋謂竜兌也.」
40 集解徐広曰:「在北新城.」 正義括地志云:「易州永樂県有徐水, 出広昌嶺, 三源奇発, 同瀉一澗, 流至北平県東南, 歴石門中, 俗謂之竜門, 水経其閒, 奔激南出, 触石成井.」蓋汾字誤也, 遂城及永樂、[固]安、新城県地也.
41 集解徐広曰:「方城有臨郷.」 正義括地志云:「臨郷故城在幽州固安南十七里也.」
42 集解徐広曰:「葛城在高陽.」 正義括地志云:「故葛城又名西河城, 在瀛州高陽県西北五十里.」
43 集解徐広曰:「平舒在代郡.」 正義括地志云:「平舒故城在蔚州霊丘県北九十三里也.」
44 集解徐広曰:「在頓丘.」 正義括地志云:「繁陽故城在相州内黄県東北二十七里. 應劭云『繁水之北, 故曰繁陽也』.」
권43. 조세가(趙世家) 도양왕(悼襄王)
悼襄王元年, 大備1)魏. 欲通平邑、中牟之道, 不成.2)
도양왕 원년, 성대한 의식을 거행해 위(魏)나라와 친선을 도모했다. 평읍(平邑)과 중모(中牟) 사이의 도로를 개통시키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二年, 李牧将, 攻燕, 抜武遂、方城.3) 秦召春平君, 因而留之. 泄鈞4)為之謂文信侯曰:「春平君者, 趙王甚愛之而郎中妒之, 故相與謀曰『春平君入秦, 秦必留之』, 故相與謀而内之秦也. 今君留之, 是絶趙而郎中之計中也. 君不如遣春平君而留平都.5) 春平君者言行信於王, 王必厚割趙而贖平都.」文信侯曰:「善.」因遣之.6) 城韓皐.
2년, 이목(李牧)이 장수가 되어 연나라를 공격하고 무수(武遂)와 방성(方城)을 탈취했다. 진(秦)나라는 춘평군(春平君)을 불러들여 그를 억류했다. 설균(泄鈞)이 그를 위해서 문신후(文信侯)에게 “춘평군은 조나라 왕이 매우 총애해 낭중(郎中)들이 시기하는 인물이므로, 낭중들이 서로 상의하기를 ‘춘평군이 진(秦)나라로 들어가면 진(秦)나라는 틀림없이 그를 억류할 것이다.’라고 하며 공모해 그를 진나라로 떠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제 당신께서 그를 억류하시면 조나라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낭중들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차라리 춘평군을 돌려보내시고 평도(平都)를 억류하십시오. 춘평군의 언행은 조나라 왕의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왕은 틀림없이 후하게 조나라를 떼어내어 (우리에게 주고) 평도를 되찾아갈 것입니다.”라고 하니, 무신후가 “좋소.”라고 하며 춘평군을 보내주었다. 조나라는 한고(韓皐)에 성을 쌓았다.
三年, 龐煖将, 攻燕, 禽其将劇辛. 四年, 龐煖将趙、楚、魏、燕之鋭師, 攻秦蕞,7) 不抜;移攻斉, 取饒安.8) 五年, 傅抵9)将, 居平邑;慶舎将東陽10)河外師, 守河梁.11) 六年, 封長安君以饒.12) 魏與趙鄴.
3년, 방훤(龐煖)이 장수가 되어 연나라를 공격하고, 연나라 장수 극신(劇辛)을 포로로 잡았다. 4년, 방훤은 조(趙), 초(楚), 위(魏), 연(燕)나라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진(秦)나라의 최(蕞)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사를 이동해 제나라를 공격, 요안(饒安)을 탈취했다. 5년, 부저(傅抵)가 장수가 되어 평읍(平邑)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경사는 동양(東陽)과 황하의 남쪽에 있던 군사를 거느리고 황하의 교량을 지켰다. 6년, 장안군(長安君)에게 요(饒)를 봉해 주었다. 위(魏)나라는 조나라에게 업(鄴)을 주었다.
九年, 趙攻燕, 取貍陽城.13) 兵未罷, 秦攻鄴, 抜之.14) 悼襄王卒, 子幽繆王遷立.
9년,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해 이양성(貍陽城)을 탈취했다. 군대가 아직 철수하기도 전에 진(秦)나라가 업을 공격해 빼앗았다. 도양왕이 죽고 아들 유목왕(幽繆王) 천(遷)이 즉위했다.
각주
1 集解徐広曰:「一作『脩』.」 正義謂行大備之礼也.
2 正義平邑在魏州昌樂県東北三十里. 相州湯陰県西五十八里有牟山. 按:(中)牟山之側, 時二邑皆属魏, 欲渡黄河作道相通, 遂不成也.
3 集解徐広曰:「武遂属安平.」 正義括地志云:「易州遂城, 戦国時武遂城也. 方城故在幽州固安県南十七里.」時二邑属燕, 趙使李牧抜之也.
4 正義人姓名也.
5 正義(輿地理志)[括地志]云:「平都県在今新興郡, 與陽周県相近也.」
6 集解徐広曰:「年表云太子従質秦帰.」 正義按:太子即春平君也.
7 集解徐広曰;「在新豊.」
8 集解徐広曰:「在渤海. 又云饒属北海, 安属平原.」 正義饒安, 滄州県也, 七国時属斉, 戦国時属趙.
9 正義上音付, 下音邸. 趙将姓名.
10 正義属貝州, 在河北岸也.
11 正義河外, 河南岸魏州地也. 河梁, 橋也.
12 正義即饒陽也. 瀛州饒陽県東二十里饒陽故城, 漢県也, 明長安君是号也.
13 正義按:燕無貍陽, 疑「貍」字誤, 當作「漁陽」, 故城在檀州密雲県南十八里, 燕漁陽郡城也. 按趙東界至瀛州, 則檀州在北, 趙攻燕取漁陽城也.
14 集解徐広曰:「今饒陽在河閒. 又年表曰抜閼與、鄴九城.」
권43. 조세가(趙世家) 유목왕(幽繆王)
幽繆王遷元年,1) 城柏人. 二年, 秦攻武城,2)扈輒率師救之, 軍敗, 死焉.
유목왕 조천 원년, 백인(柏人)에 성을 쌓았다. 2년, 진(秦)나라가 무성(武城)을 공격하자, 호첩(扈輒)이 군대를 이끌고 구원했으나 군대는 패하고 호첩은 전사했다.
三年, 秦攻赤麗、宜安,3) 李牧率師與戦肥下,4) 卻之. 封牧為武安君. 四年, 秦攻番吾,5) 李牧與之戦, 卻之.
3년, 진(秦)나라가 적려(赤麗)와 의안(宜安)을 공격하자, 이목이 군대를 이끌고 진(秦)나라 군과 비(肥) 성 아래에서 싸워 그들을 물리치니 그는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4년, 진(秦)나라가 파오(番吾)를 공격했으나 이목이 그들과 싸워 물리쳤다.
五年, 代地大動, 自樂徐以西,6) 北至平陰,7) 台屋牆垣太半壊, 地坼東西百三十歩.8) 六年, 大饑, 民訛言曰:「趙為号, 秦為笑. 以為不信, 視地之生毛.」
5년, 대(代) 땅에 대지진이 일어나 악서(樂徐) 서쪽에서부터 북쪽으로 평음(平陰)에 이르기까지 누대, 가옥, 담벽 등이 대부분 무너지고 땅이 동서로 130보 정도 갈라졌다. 6년, 대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요언(謠言)에 “조나라 사람은 크게 울고 진(秦)나라 사람은 크게 웃네. 믿지 못하겠거든 땅에 난 농작물을 보소.”라는 것이 유행했다.
七年, 秦人攻趙, 趙大将李牧、将軍司馬尚将, 撃之. 李牧誅, 司馬尚免, 趙■及斉将顔聚代之. 趙■軍破, 顔聚亡去. 以王遷降.9)
7년,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했으나 조나라 대장 이목과 장군 사마상(司馬尙)이 장수가 되어 반격했다. 후에 이목은 죽임을 당하고 사마상은 면직당하자, 조총(趙怱)과 제나라 장수 안취(顔聚)가 그들을 대신했다. 조총의 군대가 패배하고 안취는 도망쳐버리니, 조나라 왕 천(遷)은 항복했다.
八年十月, 邯鄲為秦.
8년 10월, 한단은 진(秦)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太史公曰. 吾聞馮王孫曰:「趙王遷, 其母倡也,10) 嬖於悼襄王. 悼襄王廃適子嘉而立遷. 遷素無行, 信讒, 故誅其良将李牧, 用郭開.」豈不繆哉! 秦既虜遷, 趙之亡大夫共立嘉為王, 王代六歳, 秦進兵破嘉, 遂滅趙以為郡.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풍왕손(馮王孫)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조나라 왕 천(遷)의 어머니는 창기(倡妓)로서 도양왕(悼襄王)의 총애를 받았다. 도양왕은 적자 가(嘉)를 폐하고 천을 태자로 세웠다. 천은 원래부터 품행이 단정하지 못했고 참언을 믿어 훌륭한 장수 이목(李牧)을 죽이고 곽개(郭開)를 기용했다’라 했다. 이 어찌 황당한 행동이 아니랴! 진(秦)나라가 이미 천(遷)을 포로로 잡자, 도망쳤던 조나라 대신들이 함께 가(嘉)를 왕으로 옹립해 대(代) 땅에서 6년 동안 칭왕(稱王)했다. 진(秦)나라 군대가 진격해 가(嘉)를 대파하니 마침내 조나라는 멸망해 진(秦)나라의 군(郡)이 되었다.”
각주
1 集解徐広曰:「又云『湣王』. 世本云孝成王丹生悼襄王偃, 偃生今王遷. 年表及史考趙遷皆無謚.」 索隠徐広云王遷無謚, 今惟此独称幽繆王者, 蓋秦滅趙之後, 人臣窃追謚之, 太史公或別有所見而記之也.
2 集解徐広曰:「年表云秦抜我平陽.」
3 正義括地志云:「宜安故城在恆州稿城県西南二十里也.」
4 正義括地志云:「肥纍故城在恆州稿城県西七里, 春秋時肥子国, 白狄別種也.」
5 正義上音婆, 又音盤, 又作「蒲」. 括地志云:「蒲吾城在恆州房山県東二十里也.」
6 集解徐広曰:「徐, 一作『除』.」
7 正義樂徐在晉州, 平陰在汾也.
8 正義其坼溝見在, 亦在晉、汾二州之界也.
9 集解淮南子云:「趙王遷流於房陵, 思故郷, 作為山水之謳, 聞之者莫不流涕.」 正義括地志云:「趙王遷墓在房州房陵県西九里也.」
10 集解徐広曰:「列女傳曰邯鄲之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