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조각하지 못한 까미유 끌로델 / 양일섶
안개가 자욱한 미로 속에 이상형의 연인이 있다.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 넘어져 상처가 나고 수렁에 빠지더라도 임을 향해 달려간다. 마침내 연인에게 손을 내밀며 마음을 고백한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서로 다른 두 마음을 하나로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다.
예술은 길고 사랑은 짧다. 예술가들의 생각은 작품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마음속에 담겨있는 기쁨과 슬픔에 따라 창작물의 느낌은 달라진다. 젊은 나이에 창작 활동을 열심히 하던 중 사랑의 고통을 겪은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을 영화를 통해서 만나보았다. 끌로델은 조각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천재 조각가'라는 별칭은 얻었으나 '로댕'과의 애틋한 사랑은 애달프기 그지없다.
까미유 끌로델은 1864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조각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였고 아버지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여자라는 이유로 예술학교의 입학을 거부당했지만 열아홉의 나이에 당대 최고의 조각가 로댕의 조수로 일을 하게 된다. 그녀의 기발한 착상과 독창적 재능에 조각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눈멀고 말 못하는 아내가 남편을 다시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 <사쿤탈라>를 살롱전에 출품하여 최고상을 받은 것은 그녀의 나이 24세에 불과했다.
끌로델은 로댕의 제자이자 모델로서, 동료이자 연인으로서 뜨거운 사랑을 불태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또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여기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그냥 누워만 있습니다.' 그녀가 로댕에게 보낸 편지 일부분이다. 그녀는 로댕의 대표작 중 하나인 <지옥의 문>을 제작하는 과정에도 참여했다. 아름다운 여성이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모습을 표현한 로댕의 <다나이드>는 그녀를 모델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기쁨의 시작인 동시에 고통의 시작이었다.
로댕에게는 이미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젊은 시기를 함께 보낸 '로즈 뵈레'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이 있었다. 마침내 로댕은 끌로델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헤어진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끌로델은 세 사람 사이의 관계를 빗댄 조각 작품, <중년-성숙의 시대>를 제작한다. 나이 든 여성이 남성을 데리고 앞서가고 그 뒤를 젊은 여성이 애절하게 따라가는 작품에 그녀의 마음이 담겨있다. 로댕은 그녀와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끌로델의 작품 제작과 전시회가 열리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그녀는 로댕에 대한 피해의식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영화 <까미유 끌로델>은 1988년과 2013년 각각 다른 감독에 의해 두 번 제작되었다. 1988년 영화에는 로댕과 끌로델의 복잡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스물네 살이나 연상인 로댕의 아내가 되어 예술적 동반자이길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홀로서기를 하면서 조각에 몰두하여 예술적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피폐해진 정신과 육체는 균형을 잃었고, 마침내 로댕에 대한 피해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로댕이 위대한 조각가로 부와 명예를 누리는 동안 그녀는 정신착란을 일으켜 30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보내다 생을 마감한다는 내용이다.
2013년 영화에는 로댕이 등장하지 않는다. 열렬한 후원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끌로델은 가족들에 의해 49세(1913년)의 나이에 프랑스 남부의 한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7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편지를 주고받을 수 없고 조각을 할 수도 없는 고립 상태가 된다. 메마르고 적막한 환경과 병원 환자들의 절규하는 소리가 자신의 숨을 조이는 것 같은 힘든 생활이 반복되었다. 끌로델의 유난히 쓸쓸했던 1915년 겨울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끌로델은 로댕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잃어버렸고 작품이 지나치게 관능적이라는 이유로 미술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사쿤탈라> <중년-성숙의 시대> <끌로토> <뜬소문> 등 그녀의 대표작품은 로댕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후에도 로댕의 그늘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끌로델과 동시대에 살았던 여류 예술가 '나혜석(1896∼1948)'이 생각났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화 전시회를 연 그녀는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파리를 비롯한 유럽 여행 이후, 1930년 이혼을 하고 대중잡지 《삼천리》에 정조 관념과 가부장제의 모순을 비판하는 <이혼고백장>, <신생활에 들면서>를 발표하여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그녀는 인형이 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길을 나섰다가 어느 추운 겨울날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은 1927년 8개월 동안 파리에 머물면서 자유와 사랑을 만끽했다. 그때 끌로델은 정신병원에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았겠지만 어쩌면 나혜석은 끌로델의 이야기를 듣고 같은 여성으로서 비애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두 여인은 여성의 실력과 활동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비하하고 비난하던 시대의 아픔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나혜석의 삶도 끌로델처럼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끌로델은 뛰어난 조각가였지만 자신의 사랑은 조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구상과 소묘를 열심히 하고 재료를 새기거나 깎아서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 사랑도 상대방의 입장과 환경을 충분히 고려하여 신중하게 시작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 욕심 하나로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없다. 만약 그녀가 로댕의 아내로 살았다면 또 다른 여인이 자신과 같은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젊고 활기찬 그녀의 감성이 이성을 앞서 이별이 예견된 무모한 사랑을 시작했다. 아름다운 사랑을 완성하는 일은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다.
지금은 자유연애 시대다. 끌로델이 현재를 살아간다면 다른 남자와 사랑도 하고, 더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여성들의 사랑과 예술 활동은 알게 모르게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여성들이 소질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시대가 언제쯤 오려는지 모르겠다.
끌로델은 시대에 배척당하고, 가족과 연인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그녀의 사랑과 조각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