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동일하게 시험당하신 뜻은
히브리서 4:14~15,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충을 돕는 일꾼들에게는 종종 먼저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을 직접 경험하도록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직접 체험한 사람만이 그 고충을 알기에 기꺼이 남을 돕고자 하는 동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제를 함께 헤쳐나갈 힘과 지혜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모세는 지극히 존귀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자리에서 온갖 영화를 누렸지만 곧장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로서의 무명의 생활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40년 세월 동안 자기 애착과 자기 명예와 자기 능력을 철저히 부인하는 법을 배웠기에, 훗날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그 시내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종으로서 신실하게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 다윗, 바울,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크게 쓰임받기 이전에 과거 경력에는 실패와 역경과 고생의 흔적들이 짙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아무런 의미없이 그냥 허락하신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풀무불과 같은 혹독한 고난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지도하는 큰 그릇으로 그들을 빚어가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는 일조차 사실은 훗날 복음의 그물을 던져 영혼들을 낚는 일에 크게 쓰임받는 훈련이었습니다. 바울이 변화받기 전에 그토록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핍박했던 일조차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변화받은 후에 그 자신이 예수 이름으로 핍박당할 때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신실하게 복음 전도에 남달리 열심을 다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변화받기전에 그토록 열심히 예수님을 핍박하지 않았더라면 훗날 변화된 그렇게 열심을 내어 예수님을 위하여 일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일이란 결코 우연이 없고, 그 경험들은 미래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과거의 시련과 역경들은 아무런 까닭없이 주어진 것들은 결코 없습니다. 그것들은 미래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작정 안에서 그것들은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돕고 섬기는 섭리적 훈련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내가 자주 참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바로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일입니다. 법학을 공부했으나 내게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되고 그 시간이 소모적인 시간이라고 후회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조차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유익한 어떤 훈련의 의미가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존경하는 김진홍 목사님은 철학을 전공했고 그러기에 기독교 사상가로서 이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셨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인류학을 공부했기에 그는 다양한 민족과 나라들에 드나들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꾼으로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고생을 하고 실패를 하고 시련을 겪는 것들도 소모적인 고생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성경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고 하였습니다. 연단받지 않은 마음을 하나님은 쓰실 수가 없습니다. 연단받지 않은 인물을 하나님은 쓰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연단받은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과거를 돌아볼 일입니다.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면, 미래가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훈련받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앞으로 하나님이 어떤 길로 나를 쓰실 것인지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를 당신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는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난 날을 잘 반추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15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 말씀에,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가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친히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체험하시고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이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생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에 대하여 깊이 공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인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그저 동정할 뿐이지, 깊이 공감하는 것은 심히 어렵습니다. 말로는, 머리로는 그 아픔을 이해한다고 해도, 실상 그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친히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셔서 온 몸으로 직접 온갖 고생을 다 경험하심으로써, 죄인된 우리를 더 불쌍히 여기시고, 연약함을 더욱 공감하고 더 사랑하고, 더 섬기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경제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지금 질병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지금 영적 침체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지금 가정의 환난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어떤 것이든 그것들을 무의미한 일이라고 정말 내게 불필요한 일이라고 말하지 맙시다. 그것들은 우리와 우리 장래에 우리를 통하여 도움을 받을 사람들을 위한 섭리적 훈련임을 깨달읍시다.
야고보 선생이 한 말을 기억합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쓰디쓴 경험을 아무도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잘 견딘 자에게 인생에 다시 없는 보약이 되며 많은 이들을 곤경에서 건져내는 지혜가 됩니다. 이미 우리에게 섭리적으로 허락하신 여러 가지 시험과 역경이 있었지만, 우리가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고난과 역경 중에도 의미가 있음을 알고, 우리 신앙과 인격과 능력이 성장하도록 깨닫는 마음을 가집시다. 그리하여 연단받은 일꾼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일으키고 온전히 세우는 주의 도구가 되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과거의 우리의 삶의 여정과 현재 우리가 겪는 고생과 시련조차 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 주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더욱 겸손과 믿음으로 연단을 잘 받아 주님의 뜻을 이루며, 우리를 통하여 그들을 공감하며 깊이 동정하며, 넘어진 자를 일으키고 시험에 든 자들을 바로 이끌어주는 그릇이 되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