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 보다
김영미
“며느리가 우리 아들보다 나이가 많잖아. 만 나이로 하게 되면 두 살로 줄어들었지.”“난 우리 며느리 그거 하나는 맘에 들어. 애들 영상통화 하는 거. 꼭 그거 하나는 하더라고.”
그렇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지인은 바로 시어머니다. 아들이 30대 초가 되었을 때, 비슷한 수준의 집안과 사돈을 맺으려고 여러모로 수고를 하였다. 인연을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실천하다가 지금의 며느리를 들였다. 자식 혼사로 여러 고심을 하다가 결혼하게 되어 주변에서 많은 축복을 받았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었는데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를 칭찬답게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런 것이 시어머니의 모습인가 싶다. 본인의 아들과 딸에 대해서는 부족한 부분은 감추고 좋은 말을 하면서 내 가족이 아닌 며느리는 칭찬을 빙자한 불편감을 드러낸다. ‘손자는 아들 닮아서 잘 먹고 잘 자고, 손녀는 잘 먹지 않고 잠만 잔다’라고 말한다. 이 말에서도 아들을 닮은 손자와 며느리 닮은 손녀에 대한 마음이 엿보인다.
몇 년 전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60대 초 정도의 아주머니가
“언니, 우리 아들 결혼하잖아. 나 어떻게 해야 해?” 라고 말하니, 머리가 하얀 아주머니가
“오면 어서 옵셔 하고, 가면 가나보다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마!”
굉장히 단호하면서 더 이상의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답을 돌려준다.
남아선호가 팽배하던 과거에, 시집온 여자는 대가족이 함께 사는 집안에서 어린 계집아이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었다. 여자가 자식을 낳고 나이가 들어 시어머니가 되면 유일하게 며느리에 대한 일방적인 힘이 생기는 것 같다. 무엇을 위한 며느리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당신의 몫인지 알 수 없다. 결혼하면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데 결혼한 며느리는 ‘무엇’이었을까.
‘딸은 출가외인’도 옛말이다. 시어머니 자리가 가지고 있던 며느리를 향한 유일한 권력은 약해지고 있다. 며느리에게 엄마와 딸처럼 지내자는 이야기는 동화처럼 치부된다.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효와 결혼에 대한 유교적 분위기는 남아있다. 결혼 상대자의 1순위가 내 부모에게 잘하는 사람이라던가,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권위를 내세워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고 하는 경우이다.
최근에 결혼한 신랑이, 어머니가 며느리와 통화를 하고 싶어 한다는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며느리가 전화로 안부를 물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친해지기 위해서 본인이 며느리와 자주 통화하고 싶다고 한단다. 남보다 조금 가까운 관계이다. 왜 굳이 친해지려고 할까? 상대가 원하는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당연하게 나의 시어머니도 ‘전화를 안 한다고’ 남편을 통해 이야기를 여러 번 전한 적이 있다. 며칠 만에 전화 드리면 ‘아이고 잘 계셨습니까’ 하신다. 그러면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어머니의 심기를 살피게 된다. 목소리는 상냥하나 가시가 느껴진다. 그런가 보다 한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이 크면서 전화도 드문드문하게 되기도 했다.
처음 결혼해서 모든 것이 낯설 때, 아침잠이 많은 나는 시집에 가서도 늦게 일어난다. 시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우리가 깰까 봐 수돗물도 졸졸 흐르게 틀고 칼질도 사부작사부작하셨다. 뒤늦게 일어나 주방에 가보면 냄비에서 국은 끓고 있고 팬에는 고기가 이미 익어가고 있었다. 내가 일어나면 씻어놓았던 쌀을 솥에 안쳐 밥을 하셨다. 그리곤 나물을 무치셨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나물을 새콤달콤, 고소하게 무치시고는 옆에서 보고 있는 내게 맛을 보라고 조금 준다. 어느덧 강산이 두 번 바뀌고 시어머니의 입맛이 예전 같지 않게 되었을 때도 시집에 가면 나물을 무쳐준다. 어느 날에
“너 그 말 왜 안 하니?”
“무슨 말이요?
예전에 나물을 무쳐 맛보라고 주는 것을 한 입 먹고 나면 ‘네, 됐어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듣고 나면 ‘정말 됐구나’ 했는데 요새는 그 말을 안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한 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빈말에 익숙하지 않은 내 입도 얄궂다. 시어머니의 입맛이 변한 건지 내 입맛이 변한 건지 예전의 그 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머니가 무쳐주는 나물이 제일 맛있는데,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한마디 하셨었다. 시어머니 움직이는데 방해될까 봐 한 발 뒤에서 어깨너머로 보고 있던 내 모습을 ‘감독관’이라고. 눈가에 주름을 잡고 건치를 드러내어서 하셨는데 두 분이 비슷한 마음으로 나를 ‘봐’ 주고 계셨나 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떠는 때가 있었다. 하루는 친구가 시어머니가 ‘이런’ 말을 했다고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흉을 본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냥 듣고 흘리면 되지. 뭘 신경을 쓰고 그래’라고 했었다. 친구는 며칠 후에 시어머니가 해 주신 김치를 싱크대 위에 쏟았다고 하며 정말 시금치도 보기 싫다고 한다. 우스개로 떠도는 이야기가 공감을 넘어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시절이었다.
시어머니의 성정은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밝으시다. 그렇지만 나이가 일곱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기어오른다 싶으면 잡도리하신다. 그러면 시이모는 꼼짝하지 못하고 언니가 하는 욕을 듣고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려 한다.
나는 시어머니로부터 특별히 마음에 담아둘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전혀 그런 경우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신 말씀이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가는 듯하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을 보며 ‘아범은 몸이 더 여위었네.’ 하신다. 젊은 시절에 아픈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심정을 헤아려 그런가 보다 한다. 시어머니는 스스로 아들과 며느리에게 조심하면서 하실 말씀은 분을 품지 않고 타이르듯 부드럽게 하신다.
팬데믹 전에 시어머니는 그동안 당신에게 서운한 것이 있으면 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며칠 후 시어머니의 얼굴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얼굴에 표정이 없고 웃는 모습도 예전 같지 않다.
“어머니 슬프세요? 울고 싶어요?”라고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은데. 울고 싶은 건 아냐”라고 하셨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여 년을 무탈하게 교회도 잘 다니고 주변 사람들과도 어울리던 분이다. 무녀독남으로 아들 하나 어렵게 낳아 힘들게 키워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들에게 의지하는 마음도 살짝 보이기도 하던 참이다. 병원에 모시고 가서 증세를 이야기하고 의사의 질문이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항우울증약을 처방받았다. 당시 사는 곳에서 마음으로 많이 의지했던 사람이 변해버린 것에 대해 일부만 이야기하기에 견디시는가 했다.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었다. 조목조목 말씀은 안 했지만 당신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얼마간 복용하던 그 약을 더 들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다.
시어머니는 이때의 이야기를 ‘네가 제일 먼저 알았잖아’하면서 두어 번 정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고마움도 함께 들어있었다. 주변에 여러 지인이 있고, 가까이에서 자주 보는 시이모도 계시지만 아무도 몰랐다.
여든 살을 넘기면서 기력이 더 쇠하고 목소리에 힘도 더 없어졌다. 가끔 심장이 불규칙하게 뛴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에 시이모로부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병원 모셔가”
통화를 하고 남편은 다음 주 일정을 살핀다. ‘지금 가서 응급실로 들어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라며 남편을 시댁으로 보냈다. 시어머니는 심장 검사를 하고 며칠 후에 입원하여 심장박동 이식술을 받았다. 그 후 목소리에 힘이 돌아오고 다시 일상생활에 기운을 차리는 것을 보며 다행이다 싶었다. 검사하고 시술을 받으면 될 것을 당신은 아들 고생할까 하는 마음으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나이 드시더니 시어머니가 이상하다. 당신이 서운한 것이 있으면 몇 번 참으신다. 그리고 나와 단둘이 있을 때에 ‘전에 이랬는데, 다음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한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에는 여러 사람이 있는 때에 활짝 웃으면서 ‘아범 덕분에 잘됐어’라고 말씀한다. 이때도 평소에 없는 말은 안 하는 분이니 그런가 보다 한다.
시어머니가 미우면 남편도 미워진다는데, 나에게 그 둘은 별개다. 오히려 나의 결혼생활에 의지가 된 시어머니의 역할이 반이다. ‘감독관’이던 나에게 싫은 소리 안 하고 좋은 것은 주려고 하셨다. 그런 분이 나이 들어 점점 약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분의 노후가 편안하길 바란다. 오늘도 목소리, 얼굴색, 표정 등을 살피며 안녕한지를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