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바르나바 신부는 1980년 원주교구에서 서품을 받고 현재 도계성당 주임신부로 재직 중이다.
5월 19-25일 부활 제5주간
행복은 어디에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행복이라는 소위 파랑새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 이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요구다. 행복하고 싶어 돈을 벌고, 인기와 지위를 탐하며, 결혼도 한다. 그런데 인간이 사는 곳 어느 곳이든, 인간이 취하는 어느 직업이나 지위든, 그곳에 참된 행복이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필자도 행복하리라 생각해서 신부가 됐고, 이 본당에 가면, 또 저 일을 하면 더 행복할까 생각했지만 외적인 일들로 행복 할 수 없다는 것을 어찌 체험하지 않았겠는가?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고, 성공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목표가 성공인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옛말에 말두면 종두고 싶다고, 성공은 끝없는 욕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우선 첫 번째로 만족하라는 것이다. 자기가 현재 있는 자리가 꽃자리요, 최상의 자리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자신을 위하여 자기스스로 외에는 해줄 수가 없다. 아무도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몰라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다. 자기스스로 현재의 자리가 꽃자리임을 알 때 그는 성공한 것이고 행복한 것이며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둘째는 하느님 곁에 있어라. 그래야 행복해진다. 예수님의 행복론은 세상이치와 다르다. 즉 돈이나 명예나 인기 등이 행복의 요소가 아님을 가르친다. 우리 동네에서는 추울 때 연탄을 때는데 따뜻하기 위하여 연탄을 피워도 연탄불 가까이 있어야 더 따뜻함을 느낄 수 있듯 행복도 복 자체이신 분 곁에 있어야 그만큼 복을 느끼고 행복을 체험할 수 있다.
1957년부터 6년간 미국 할리우드 유명배우로서 돈, 명예 인기를 한 몸에 받던 돌로레스 하트는 약혼까지 깨고 1963년 미국 성베네딕도 수녀원에 입회했다. 80세가 넘은 현재도 수녀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는 2011년 죽을 때까지 미혼으로 매년 부활과 성탄 대축일에 수녀원을 방문해 함께 기도한 옛 약혼자 로렌스에게 “나는 지금 만족하며 예수님 곁에 있어 더욱 행복하다”고 했다. 하트 수녀의 의견에 약혼자 로렌스도 축하해주며 “사랑한다고 다 결혼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한다. 사라져가는 것이 행복이려니 착각하고 살다가 실패한 인생들이 가르치는 바를 모른 척 하지 마라.
5월 26일-6월1일 부활 제6주간
상처가 있어 아름다운 꽃
‘오 내 사랑 목련화야’라는 김동진 시인의 글이 해마다 이른 봄이면 떠오르는 것은 성당 사제관 앞에 있는 작은 목련나무 때문이다. 20여 년 전에 떠난 강원도 정선성당 사제관 문 앞에도 꽤 큰 목련나무가 있어 6년 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른 봄, 아기 젖꼭지처럼 나오는 꽃 봉우리에서부터 활짝 필 때까지의 아름답고 황홀함은 나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왠지 나는 목련나무 아래에 서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꽃부터 시작해서 꽃이 지고 난 후 생겨나는 널찍한 잎사귀도 마음에 든다. 모든 꽃이 다 아름답고 예쁘지만 목련화와 목련 잎이 펑퍼짐한 것이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내 마음도 그렇게 넓고 펑퍼짐해졌으면 하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목련은 꽃을 피울 때마다 몇 번의 시련과 고비가 있다. 그것은 바로 꽃샘추위다. 몇 번의 꽃샘추위를 겪을 때마다 아직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가 상처를 입어 검은 점이 생길라 치면 누군가 내게 상처를 준 것 같은 속상한 마음이다.
오늘 아침엔 서울 방배4동성당 의료봉사 선교단 70명이 도착해 의료 사각지대인 탄광촌 도계에서 봉사를 하는 날인데 겨울 같은 추위가 갑자기 왔다. 어제 저녁부터 함박눈이 내리는 등 낌새가 심상치 않더니 오늘 아침엔 영하 3도가 되는 그야말로 꽃샘추위가 되어 강아지 혀 바닥쯤 되는 꽃잎들을 사정없이 추행했다.
나는 이 목련꽃을 보며 생각한다. 들판에 피는 꽃들이 다 그렇듯 목련꽃도 누가 보든 안 보든 피어나고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꽃이다. 석탄 먼지와 연탄가스 날리는 하수도 시궁창 옆에 있을지언정 언제나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꽃샘추위에 깊은 상처를 받아도 오므렸다가는 다시 태어나는 목련꽃, 상처를 입고도 마침내는 피고야 마는 이 꽃을 나는 내 눈의 꽃이 아니라 나를 인도할 내 마음의 꽃으로 다짐하고 있다.
6월 2-8일 주님승천대축일(부활 제7주간)
따뜻한 옷가게
오늘 서울에 있는 한 성당에서 보내준 헌 옷 뭉치들을 차에서 내렸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잘 입지는 않는 옷들을 보내 주십사 몇몇 본당 신부님들에게 서신을 띄운 결과로, 내가 사는 탄광촌에서 꽤 유익하게 사용될 것이다. 오랜 기간 창고로 쓰던 성당 2층을 정리해 옷가게를 차리고 이름을 ‘따뜻한 옷가게’라고 지었다. 굳이 ‘따뜻한’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약 3년 전 ‘따뜻한 연탄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의 가난한 이웃에게 소리 없이 연탄을 주고 있었기에 그 연장선상에서 ‘따뜻한’이란 이름을 지었다. 나는 옷가게 앞에 “이 곳을 드나드는 분들은 ‘나보다 먼저 이웃’을 생각하며 사십시오”라는 글을 써 붙였다.
내가 세 번째 탄광지역에 부임한 이래 내 마음을 두드린 것은 바로 ‘나보다 먼저 이웃’이라는 단어였다. 이제 사제생활 40여년을 바라보며 인생을 잘 정리해야 될 때에 그것도 담낭암과 간 절제 수술로 일주일간 사경을 헤매다 살아나 요양을 하던 시기에 병원도 멀고 공기나 교통도 좋지 않은 지역으로 발령이 났을 때 ‘이거 어떻하나’ 싶은 마음이 컸으나 ‘나보다 먼저 이웃’이라는 말마디가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나보다 먼저 이웃을 생각하고 산다면 편안해지고 따뜻해진다. 세상이 왜 차갑고 냉정하냐고들 하지만 이는 ‘이웃’보다 먼저 ‘나’를 생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따뜻함이란 나보다 먼저 이웃을 생각하고 살 때 이해와 사랑의 폭이 넓어지면서 오는 선물이다. 따뜻한 숭늉은 불타는 가마솥에서 가능한 것이지 우물가에서 기대할 수 없는 이치다. 사슴을 쫓는 이는 숲을 볼 수 없듯이 자기 자신만 쫓는 이 또한 따뜻함을 주는 편안함, 기쁨, 고요함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나보다 먼저 이웃을 생각하는 데 있다.
어린 시절부터 신동소리를 듣고 하버드대학 교수를 했으며, 출간된 20여권의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헨리나윈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적 장애아 시설에서 봉사하면서 한 말, 즉 “나는 나를 찾았을 때 거기 내가 없었고, 하느님을 찾았을 때 거기 하느님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이웃을 찾았을 때 거기 나도 있고, 이웃도 있고, 하느님도 있었다.” 라는 말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부디 따뜻한 옷가게가 ‘나보다 먼저 이웃’을 생각하는 작은 현장이 되길 바란다.
6월9-15일 성령 강림 대축일
소꿉놀이 같은 인생
성당 뒤 뜨락에서 들깻잎 몇 장을 뜯어 간장 종지에 담가 놓고 산보하러 나갔더니 빈 집터 아무렇게나 자란 풀들 속에 봉숭아꽃이 눈에 띄었다. 그 꽃잎을 돌 위에 찌어 새끼손가락에 붙여 보면서 아무리 어릴 때 생각이 나서 그런다고 해도 내가 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깻잎이 간장종지에 들어가니 얼마나 쓰라리겠으며. 봉숭아꽃이 돌멩이 위에서 짓이겨지니 얼마나 아프겠는가. 미안한 생각에 후회를 하면서도 멈추거나 돌아서지 않고 반복해서 저지르는 나약하고 이기적인 내 습성을 발견한다.
사실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깻잎을 간장종지에 담듯 쓰라림을 주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그 예쁜 봉숭아 빛을 새끼손가락에 물들이겠다는 욕심으로 짓이기듯 말과 행동으로 피눈물의 아픔과 정신적 죽음을 주었는지 나는 안다. 내 성급한 성격 때문에, 내 무지로, 그릇된 내 편견으로, 나의 인격적 결함으로 많은 이들이 간장종지에 들어가는 쓰라림과 또 많은 이들이 돌멩이에 짓이겨지는 아픔과 죽음 같은 고통을 느꼈을지 나는 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하루 종일 옆집 친구와 놀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놀 듯 내 삶은 여전히 어린 시절의 놀이를 계속한다. 깨어진 사금파리로 땅 빼앗기를 하던 어린 시절 참 많이도 싸웠고 우겼고 숨겼다. 억지로 또는 살짝 숨겨서 1㎝라도 더 가지려고 했다. 동심의 욕심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니 사제가 되어서도 평생 내 곁을 맴돈다. 나라는 인간이란 그렇게 나약하고 어리석고 부족한 존재이다.
그런 존재와 인류구원 사업을 함께 하시겠다고 하느님은 독생 성자 예수님을 내 곁으로 보내셨다. 그렇게도 나약하고 어리석고 부족한 나의 존재를 하느님은 믿으셨고 희망하셨고 사랑하셨기에 지금도 내 곁을 지키고 계시는 분이시다. 인간을 어떤 눈으로 볼 것인가! 내가 보는 눈으로 볼 것인가! 하느님이 보시는 눈으로 볼 것인가!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인간은 믿을 만한 존재가 되고 희망할 수 있으며 사랑 받을 만한 존재가 될 수 있다.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아웅다웅 했지만 해가 지면 손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고 집으로 돌아가던 모습처럼 인간은 언젠가 자신의 업보를 툭툭 털고 저 세상이라는 집으로 가야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지금 너무 열심히 소꿉놀이를 하느라 해가 지면 돌아가야 하는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린 친구가 바로 지금의 나는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