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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詩 스크랩 김수열 시집 ‘빙의’에서
김창집 추천 0 조회 214 16.03.15 00: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사랑을 배우다

 

성산포 광치기해안 모래밭

일출봉 배경으로

오리 한 마리

상처 받은 정물처럼 앉아 있다

 

인기척 있어도 미동하지 않는다

가만히 다가선다

 

아,

그 곁에

반쯤 해체된

오리 한 마리

 

죽은 사랑을 껴안은

아픈 사랑의 날갯죽지 위에

아침 햇살이

시리다

   

 

♧ 나무의 시

 

바람붓으로

노랫말을 지으면

나무는 새순 틔워

한 소절 한 소절 받아 적는다

 

바람 끝이 바뀔 때마다

행을 가르고

계절이 꺾일 때마다

연을 가른다

 

이른 아침

새가 노래한다는 건

잠에서 깬 나무가

별의 시를 쓴다는 것

지상의 모든 나무는

해마다 한 편의 시를 쓴다

 

 

♧ 파문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비는

잊지 않고

원만한 것들을 손수 가지고 오신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사는 게 이런 거라고

 

지상의 못난 것들에게

비는

한 번도

모난 걸 보여준 적이 없으시다

   

 

♧ 쫀쫀한 놈

 

킬로그램에 십오만 원 하는 갓돔 한 마리

작살내고 단란주점 가서 폭탄주

딸랑딸랑 털고 휘청휘청 편의점 들어가

삼천 원 내고 에쎄라이트 한 갑 사고

라이터 살까 말까 오백 원짜리 동전 만지작거리다

그냥 나와 지나가는 사람에게 불 빌리고

 

파리바게뜨 쇼윈도에서 어정대다가

뚜레쥬르에서 가격표만 힐끗힐끗 보다가

결국 붕어빵 한 봉지 달랑 들고

허공에 매달린 집으로 간다

 

비틀비틀

비틀비틀

 

 

♧ 마라도에서

 

다섯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세 통은 축하한다는 거고

나머지는 술 한 잔 사라는 거였다.

고맙다고 했고

지금은 마라도에서 유배 중이라 했다

 

배가 끊겨 섬이 가벼워지는 날이면

아낙들은 점당 백 원짜리 고스톱을 치고

남정네들은 문어 삶아 술추렴을 한다

바쁘게 섬을 돌던 카트도 모처럼 주무시고 계시다

 

인터넷도 끊기고 에어컨도 돌아가지 않는다

내일이 백중인데 배가 끊겨 떡이 올 수 없다며

보살이 발을 동동 구른다

이번 부처님은 지지리도 먹을 복이 없나 보다

 

태풍 무이파가 몰려오던 날 어느 시인은

히말라야 산맥이 달려드는 것 같다 했고

섬이 흔들려 심한 멀미를 느꼈다 했다

 

오후가 되자 바람 끝이 사나워지고

바다는 하얀 거품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내일도

섬은 가벼워질 것이다

   

 

♧ 국데워라 금순아

 

천 개 의자가 있는

낙천리 아홉굿 마을에서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들을 위해

네 다리 내주는 것들에 앉아도 보고

명찰 달 듯 의자에도 이름이 있어

찬찬히 하나씩 불러보는데

 

국데워라 금순아?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목 놓아 찾아보고 불러 봤다던 금순이가

초생달만 외로이 뜬 영도다리 난간 위

어디서 무얼 하든 살아만 있어야 할 금순이가

죽지 않고 살아 낙천리 아홉굿마을에서

국을 데우고 있다니

 

그래, 산다는 게 뭐 별 거냐

국 데우면서라도 굳세게 살아가는 게

사는 게 아니겠느냐

굳세어라 금순아

국데워라 금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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