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을 배우다
성산포 광치기해안 모래밭 일출봉 배경으로 오리 한 마리 상처 받은 정물처럼 앉아 있다
인기척 있어도 미동하지 않는다 가만히 다가선다
아, 그 곁에 반쯤 해체된 오리 한 마리
죽은 사랑을 껴안은 아픈 사랑의 날갯죽지 위에 아침 햇살이 시리다
♧ 나무의 시
바람붓으로 노랫말을 지으면 나무는 새순 틔워 한 소절 한 소절 받아 적는다
바람 끝이 바뀔 때마다 행을 가르고 계절이 꺾일 때마다 연을 가른다
이른 아침 새가 노래한다는 건 잠에서 깬 나무가 별의 시를 쓴다는 것 지상의 모든 나무는 해마다 한 편의 시를 쓴다
♧ 파문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비는 잊지 않고 원만한 것들을 손수 가지고 오신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사는 게 이런 거라고
지상의 못난 것들에게 비는 한 번도 모난 걸 보여준 적이 없으시다
♧ 쫀쫀한 놈
킬로그램에 십오만 원 하는 갓돔 한 마리 작살내고 단란주점 가서 폭탄주 딸랑딸랑 털고 휘청휘청 편의점 들어가 삼천 원 내고 에쎄라이트 한 갑 사고 라이터 살까 말까 오백 원짜리 동전 만지작거리다 그냥 나와 지나가는 사람에게 불 빌리고
파리바게뜨 쇼윈도에서 어정대다가 뚜레쥬르에서 가격표만 힐끗힐끗 보다가 결국 붕어빵 한 봉지 달랑 들고 허공에 매달린 집으로 간다
비틀비틀 비틀비틀
♧ 마라도에서
다섯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세 통은 축하한다는 거고 나머지는 술 한 잔 사라는 거였다. 고맙다고 했고 지금은 마라도에서 유배 중이라 했다
배가 끊겨 섬이 가벼워지는 날이면 아낙들은 점당 백 원짜리 고스톱을 치고 남정네들은 문어 삶아 술추렴을 한다 바쁘게 섬을 돌던 카트도 모처럼 주무시고 계시다
인터넷도 끊기고 에어컨도 돌아가지 않는다 내일이 백중인데 배가 끊겨 떡이 올 수 없다며 보살이 발을 동동 구른다 이번 부처님은 지지리도 먹을 복이 없나 보다
태풍 무이파가 몰려오던 날 어느 시인은 히말라야 산맥이 달려드는 것 같다 했고 섬이 흔들려 심한 멀미를 느꼈다 했다
오후가 되자 바람 끝이 사나워지고 바다는 하얀 거품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내일도 섬은 가벼워질 것이다
♧ 국데워라 금순아
천 개 의자가 있는 낙천리 아홉굿 마을에서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들을 위해 네 다리 내주는 것들에 앉아도 보고 명찰 달 듯 의자에도 이름이 있어 찬찬히 하나씩 불러보는데
국데워라 금순아?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목 놓아 찾아보고 불러 봤다던 금순이가 초생달만 외로이 뜬 영도다리 난간 위 어디서 무얼 하든 살아만 있어야 할 금순이가 죽지 않고 살아 낙천리 아홉굿마을에서 국을 데우고 있다니
그래, 산다는 게 뭐 별 거냐 국 데우면서라도 굳세게 살아가는 게 사는 게 아니겠느냐 굳세어라 금순아 국데워라 금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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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