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해동사 안중근 소나무
1905년 러일전쟁이 지나간 뒤다. 이토히로부미가 한 발로 조선 땅을 밟고 또 한 발로 이완용, 권중현, 이근택, 박제순, 이지용 등도 밟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초대 통감이 되었다.
1909년 2월 7일, 러시아 크라스키노 마을이다. 안중근과 김기룡, 강기순, 정원식, 박봉석, 유치홍, 조순응, 황길병, 백남규, 김백춘, 김천화, 강두찬 등 12명이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결의하고 왼손 약손가락 첫 마디를 잘랐다. 펼쳐 놓은 태극기에 솟구치는 선혈로 대한독립을 쓰고 우렁차게 외치는 ‘코레아 우라(대한만세)’ 삼창이 하늘과 땅을 흔들었다.
같은 해 10월 26일, 하얼빈역이다. 이토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회담을 마치고 의장대를 사열할 때였다. 품에서 권총을 꺼낸 안중근은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또 쓰러진 자가 이토가 아닐 경우를 생각해 하얼빈총영사 가와가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까지 저격한 뒤, ‘코레아 우라’를 외치고 체포되었다.
다음 해인 1910년 중국 랴오닝성의 뤼순 감옥이다. 2월 14일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한 일제는 3월 26일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나 주검을 인계하지 않고, 매장도 비밀에 부쳤다. 소나무 관에 안치된 유해가 뤼순 감옥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추정할 뿐이다.
안중근 의사 서거 백 년이 지난 2011년 8월 4일이다. 러시아 크라스키노 추카노프카 마을이다. 두 차례 옮긴 안중근 의사 등 12명의 단지동맹 기념비가 비로소 제 자리를 잡았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고, 어릴 때 이름은 응칠,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그런데 남북이 갈라져 있으니, 안중근 의사의 기념지가 남쪽에는 없는 셈이다. 그러나 남북분단은 잠시이고, 그어진 금은 지도에만 있는 것이기에 결코 우리 마음마저 나누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1961년 광주의 안중근 의사 숭모비, 1971년 서울 남산의 기념관, 또 여러 곳에 동상이 섰다.
1961년 광주공원 일제 신사 터에 세운 안중근 의사 숭모비는 일제 잔재 청산 의미였다. ‘대한의사 안공중근숭모비’ 비명은 진도의 서예가 손재형이 썼다. ‘천하의 의사로서는 안중근보다 더 높은 이가 없고, 남방의 명승지로서는 무등산보다 더 으뜸인 곳은 없다’의 비문은 성균관대학 초대총장 김창숙의 글로 읽는 이의 피를 끓게 하고 가슴을 찢는다. 이 숭모비를 1995년 잃었다가 2019년 어렵사리 되찾았다. 잃음은 인재이고, 다시 찾음은 하늘의 뜻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과 서울 기념관, 광주 숭모비, 장흥 해동사와 정남진의 안중근 의사 동상은 모두 경도 126° 가까이 위치하니 선으로 그으면 일직선이다. 더하여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상지 나주역과 광주역, 장성 상무대와 함평 김철기념관의 안중근 의사 동상도 같은 위치이니 이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장흥 향교의 전교를 지낸 유림 안홍천이 1955년에 세운 장흥 해동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안홍천은 집안의 사당 만수사에 한 칸 사당을 더 짓고, 당시 대통령 이승만에게 현판 글 ‘해동명월’을 받았다.
해동은 우리나라, 명월은 밝은 달이니, 해동명월은 곧 안중근 의사이다. 이 해동사를 2000년 삼 칸으로 다시 짓고 두 그루 소나무를 수문장으로 심었는데 하필이면 왜반송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노예의 삶은 타인의 강압보다 스스로의 굴종이다. 식민의 치욕. 독재 권력의 만행, 그러려니 하는 무능을 어찌 더 볼 것인가? ‘무엇이 두려운가? 떨쳐 일어나라. 단호히 물리쳐라!’ 살아서도 죽어서도 안중근 의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요, 표상이자, 깃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