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엔 필리핀인 4000명 북적…“고향 온듯 후련”, 100m 거리 노점엔 망고-햄 등 필리핀산 가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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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12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혜화동성당 본당 현관. 아기를 업은 필리핀인 존 오반도(John Obando·29)씨는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 틈새를 헤치고 앞으로 나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붉은색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성당 자원봉사자인 산체스(Shanchez·27)씨가 다가와 “조용!”하고 존의 귀에 속삭였다.
“오늘은 (필리핀의) 어머니날 기념 미사입니다. 신(神)은 구름 속에 가려진 연(鳶)과 같습니다. 연은 보이지 않아도 연줄을 만지면 날고 있는 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슴 속의 연줄로 멀리 필리핀에 계신 부모님을 느끼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필리핀인 마즈(Mars·38) 신부의 강론을 듣는 존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같은 말이라도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 위안이 됩니다. 오늘도 속이 후련합니다.” 눈물을 닦은 존은 어머니날 미사를 위해 산 장미 한 송이를 성모상 앞에 봉헌했다.
혜화동 성당에서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지시로 지난 96년부터 매주 일요일에 필리핀 사람들만을 위한 미사가 열리고 있다. 영어와 타갈로그어(필리핀 고유어)로 동시에 진행되는 일요일 미사에는 4000여명의 필리핀인들이 참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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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의 주한 필리핀인들에게 혜화동성당은 미사만 보는 단순한 성당 이상의 존재다. 필리핀 사람들은 혜화동성당을 매개체로 해서 이국(異國)땅에서 힘겨운 삶을 영위해 나가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오후 혜화동성당에서 필리핀 신자를 위한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필리핀인 데이비드(David·33)씨는 성당 본관 앞 베란다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성당 정문에 젊은 필리핀 여성들이 들어올 때마다 커졌다. 서울 쌍문동의 양말공장에서 일한다는 그는 친구들을 만나러 성당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1주일에 한 번 친구들과 만나 우리말(타갈로그어)로 떠들지 못한다면 한국인 직장동료들이 나한테 ‘이새끼 저새끼’ 하면서 욕설을 퍼붓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못 참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안산에서 올라왔다는 노티(Notty·25)씨는 2주 전 이곳에서 만난 동향 사람에게 부탁한 직장문제를 알아 보려고 왔다. “컨테이너에 살면서 찬물로 샤워합니다.
고향 사람이 더 좋은 직장을 소개해 준다고 했으니 만나 봐야죠.” 미사가 끝날 때까지 노티는 본당 주변을 서성이며 오가는 친구들과 웃고 떠들었다. |
▲사진설명 :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성당 입구부터 동성 고등학교앞 100m 거리에 들어선 필리핀 장터 풍경. |
검은색 선글라스와 힙합스타일 옷으로 멋을 낸 레이어스(Reyes·24)씨는 “오늘은 여자친구 생일이라 멋을 냈다”며 “미사가 끝나면 여자친구의 친구들까지 데리고 한턱 쏠 생각”이라고 했다. 레이어스는 경기도 파주 신발공장에서 일한다. 나이보다 훨씬 앳돼 보이는 그는 “이 신발은 내가 만든 것, 이 티셔츠는 여자친구가 만든 것”이라며 웃었다. 경기도 파주의 신발공장에서 일한다는 조엘(Joel·28)씨는 미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혜화동성당 맞은 편의 필리핀식당인 ‘필리핀가게’ 앞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토요일도 밤 10시까지 일했어요. 공장에선 술먹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여기선 마음이 편해요.”
혜화동성당에서 만난 필리핀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불법체류자’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두려워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미사가 있는 날이면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혜화동성당 배광억(裵光億·56) 사무장의 말. “기관원들이 와서 불법 체류자를 색출하겠다고 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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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건 교회 밖의 일이라며 몸싸움까지 했어요.” 배 사무장은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기관원들이 찾아온 적이 없다”며 웃었다.
오후 1시30분부터 시작된 필리핀인 미사가 끝날 무렵인 오후 3시. 성당 부근 혜화동 로터리에는 승합차와 소형트럭 5대가 서 있었다.
종로구청 단속원들이 철수하자마자 필리핀·한국 혼성 노점상들은 차에서 내려 갖가지 물건이 담긴 상자들을 인도 위로 벌여 놓았다.
치즈, 말린 생선, 필리핀산 망고 열매, 햄, 붉고 가는 필리핀 당근은 물론 아스피린류의 의약품까지 차 한 대당 50여개가 넘는 상자가 펼쳐졌다.
거리 곳곳에서 “마까노 바이토? 마까노 바이토(이거 얼마예요)?” 하는 소리가 들렸고, 혜화동 로터리는 타갈로그어 소리로 가득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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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전화카드가 담긴 작은 종이상자 하나씩을 들고 호객을 하는 사람들, 마닐라행 화물회사 전단지를 뿌리는 20대 청년, 바닥에 장판을 깔고 불법 복제 CD를 파는 상인까지 100m도 안 되는 거리엔 100여명의 장사꾼들과 미사를 마치고 나온 수천명이 섞여 발디딜 틈이 없었다.
청바지를 파는 노리엘(Noreal·35)씨는 “이만하면 리틀 마닐라(작은 마닐라)”라고 말했다. 바지 앞에 돈주머니를 차고 목청을 높이며 손님을 부르는 모습은 영락없는 남대문 상인의 모습이다. 종로구청 직원들의 단속을 피하려다 자리를 늦게 잡았다는 알렉산더(Alexander·41)씨는 “아침부터 단속이 떴다”며 “필리핀 사람들도 사고 싶은 게 있고 나도 이걸 팔아야 딸애 학비를 댈 수 있다”며 볼멘소리를 냈다. 그는 “저기 대학로쪽의 한국 노점상은 건드리지도 않아요”라며 불평하다가도 손님을 보자 반색을 하며 “최신판이야, 아이들 스타 ‘로빈’이 나와. 화끈하지. 3장에 만원! 만원!” 하고 소리쳤다. 필리핀산 상품을 수입하는 박요순(朴堯淳·39)씨는 “일부러 돈을 들여서 이런 관광명물을 조성하려고 해도 힘든데 당국에서는 단속을 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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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성당에서 미사를 마친 젊은이들의 상당수는 성당 부근의 종로구민생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에서는 필리핀 가톨릭 공동체가 주최하고 필리핀 아마추어 32개팀이 출전하는 농구대회가 열리고 있다.
농구는 필리핀에서 최고 인기 스포츠다. 이날 오후 4시 종로구민생활관 2층 체육관에서는 “고(Go) 고 바탕기아(농구팀 이름)” 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바탕기아팀과 마닐라팀의 농구경기가 열렸기 때문이다.
노점에서 ‘롱가니스’라는 열대과일 한 꾸러미를 사느라 시간을 지체한 모데라지오(Moderagio·24)씨는 “탈의실 갈 시간도 없다”며 화장실로 들어가 농구복을 입고 나왔다. |
▲사진설명 :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성당 입구부터 동성고등학교앞 100m 거리에 들어선 필리핀 장터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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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170㎝ 정도인 그는 자칭 ‘바탕기아 최고의 가드’. 점수는 12(바탕기아)대10. 상대편인 마닐라팀의 센터가 레이업슛을 성공시켰다.
부랴부랴 뛰어나간 모데라지오는 마닐라팀의 수비수들을 제친 후 멋진 중거리 슛을 날렸다. 골이 들어가자 바탕기아팀을 응원하던 에이린(Arlene·여·27)씨는 “아~악”하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26대18. 경기는 바탕기아팀의 승리로 끝났다. “연습 못 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윗몸일으키기 100번 하는 게 다죠.”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모데라지오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11월 결승까지 올라가야죠. 뛰어야 스트레스도 확 날아가고….” 그는 “요즘 농구 덕분에 산다”고 말했다. 행사를 주관한 글렌 하론(Glenn Jaron·39) 신부는 “작년에는 16개 팀이었지만 올해는 32개 팀으로 배가 늘었다”며 “혜화동성당 덕분에 우리 필리핀 사람들이 미사도 보고 필리핀 장터에서 고향물건도 사고 농구까지 즐기고 있어 다른 외국인들이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