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유럽열강은 아시아권에서 많은것을 가져다준다고 여기는 중국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에서 중국으로 건너가기 위한 길은 실크로드길과 과거 징키스칸등 북방민족이 왔던
기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은 그런 기마민족의 체제도 없었거나 그길을 가는데 수많은 시간이
걸리는 길에 대한 안내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해로로 갈수있는 인도양은 우리나라처럼 태풍같은 것이 있었고
풍랑의 영향이 많았지요 그들은 이를 무릎쓰고도 그들은 인도를 거점으로 해서 중국남쪽지역인 마카오를
거쳐서 중국으로 갈려고 했었지요
그를 경로를 거치는 동안 그들은 먼저 일본에 상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험란한 길은 선교사들의 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일본땅에 먼저 도착한 선교사는 프란치스코 하베리오였습니다
그들은조선을 거쳐서 중국땅으로 가려는 그들의 의도는 무산되었고 그들은 일본막부에 의해서
강제추방되는 위기를 갖게됨으로서 그들은일본땅에서 다른 아시아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퍼트리는 계기가 됩니다
창세기에서 성서는 바벨탑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사건은 모든 민족들이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을 여러언어로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언어가 달라져서 여러민족으로 갈라지고 다툼도 생겨났던 것입니다
예수제자중에서 가장 먼저 인도로 온 이는 사도토마였다고 합니다
토마사도는 AD52년경 인도서부 케라릴지역에서 7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 시기에는 터키 그리이스 로마에 이르기까지 선교여행을 떠난이는 바로 사도 바오로였습니다
토마사도는 인도에서 흰두교원리주의자에 의해서 창에 찔려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그리스도신자들을 침략자로 인식하기 때문에 인도에서는 토마사도에 대한 평가는
아주 비관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인도에서 마카오를 거쳐서 중국과 일본에 이르는 아시아복음화의
통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일이 가능한것은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의 덕분이라 여겨집니다
유럽에서 출발한 그는 남미의 끝부분을 돌아서 태평양으로 넘거갔고 한참끝에 발견한 육지는
지금의 필리핀 이었기에 필리핀은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마젤란은 그곳에서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 배는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서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당시 중국은 여러면에서 굉장한 나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일본도 일본은 유럽의 거래단위이기도 한 은의 생산량이 아주 높은나라였기에
유럽의 열강은 일본을 통해서 수많은 은을 가져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중국은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할때에 북경에는 외국의 선진문물이 아무 많이 들어왔고
이에 따라서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교의 문화도 따라 들어왔던 것입니다
중국은 아시아권에서 문명적으로나 여러가지 측면에서 중심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다이묘들이 자신의 기반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서양문물이 필요했기에
그들이 가져온 그리스도교를 형식적으로나마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때 일본은 불교구가였으므로 영지에는 수많은 사찰이 있었고 사찰과 그지역에서 거두어들인
각종 세금으로 영지는 운영되었다. 주로 나카사끼를 중심으로 하는 다이묘는 그리스도를
긍정적으로 많아 들여서 그들지역의 사찰을 내주어서 그곳에서 교회활동을 할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오래내전으로 통일된 막부는 내부적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조선을 거쳐 중국정벌이 필요했고 유럽열감은 여러가지면에서 중국시장이필요했던 것인데
그 두가지 목적이 맞아서 유럽열강은 조총 항해술등 여러가지를 일본에 제공해주는 대신에
그들이 중국으로 진출할수 있게 도와주었지요
청나라와 상거래를 일찍부터 해온 소서행장의 아버지의 영향으로 소서행장과 그의딸이
세례를 받았고 그의 사위가 대마도도주였는데 그도 역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 두세력이 일본의 조선침략 2선봉장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조선으로 침략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낫게되었다.
일본은 먼저 곡창지대인 남쪽지역을 점령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대부분을 점령한후에
중국과 교역을 할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해전에서 이순신장군으로 인해서
호남지역으로 가는데 실패하고 군량미를 위해서 긴 육로를 택할수밖에 없어서
최전방의 군사는 보급품은 고사하고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한다.
조선군은 미리 겁을 먹고 미리 피했기에 일본군이 마을을 들이닥쳤을떄에
그 마을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군도 먹을것도 남아있지않았다고 합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만 가득했다고 합니다
쳐즐어간 일본군이나 그곳에 있는 아이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모습은 아주 처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먹을것이 없어서 죽은 시신을 먹었다고 합니다
소서행장이 이끈 부대는 주로 나까사키출신들이었고 천주교세레를 받은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생각해고 이 전쟁은 아주 비참하다고 여겼는지 포로들에 대해서
모질게 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떠도는 아이들을 위해서 유아세례를 주었다고 하나
그 이후 기록이 남아있지않아서 그들이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알수가 없었지만
그들중에는 몇몇이는 본국으로 가는 배편을 이용해서 조선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내어서
일본에 와있는 예수회를 통해서 선교사로 길러지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나중에 일본박해시절에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경험했는지는 모르지만 전쟁이후 일본에 끌려간 포로중에는 나카사키에서 세례를 받은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지 조선인들만으로도 그곳에서 세운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수많은 천주교인이 있었기에 예수회는 막부에서도 영향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당시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포로들은 일본에 들어와있는 특히 네델란드계상인들을통해서
유럽각지로 노예로 팔려갔는데 이들을 예수회가 세례받은 조선인들을 많이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이후 도꾸가와 막부가 통일하면서 천주교박해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그들은 일본에서 추방령을 받았다. 그로 인해서 그들은 아시아 여러지역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영향인지는 모드지만 조선으로 보내지지 앟았고 오히려 화해한 일본은
조선에 그들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통지를 했다고 한다.
존선의 박해시절은 산악지역에 숨어들곳이 있어서 여러교우촌을 형성할수가 있었지만
중앙집권적인 조선과 달리 지방자치제도가 발달한 일본은 섬지역을 샅샅이 뒤져서라서 색출하였기에
몇년이 지나지 않아서 거의 대부분이 소멸되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는데
겉으로는 불상을 모시는 불교사찰인데 사실적으로 그내용은 예수님과 마리아를 모시는 천주교였던 것이다.
그의 영향인지 일본에는 지금에 와서도 개신교를 포함해서도 인구의 1%가 안되는이들만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한다.
**** 이미 보고계셔서 할수없이 따로 2편을 곧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