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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위하여 ……을 함”
천 영 대
성경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1∼25)」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함’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자들이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분으로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시는 분, 도와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아니하면 주님과 그 주위 사람들을 원망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주인이고 주 예수님은 마땅히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하는, 자신의 하수인 정도로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 주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로서 천지만물을 주관하는 분이시다.(물론, 그는 우리의 구속주이시기도하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하는 의무도 없고, 우리의 하수인도 아니다. 주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와 주인으로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행하신다. 천지만물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전지전능하신 주님,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그의 뜻대로 창조하시고, 또 그의 뜻대로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창조물로서 창조주인 주님의 종으로서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사야 43장 1절에서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자신이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구속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자신의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주님의 것이므로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의 뜻대로 행하신다.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의 뜻대로 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마구 학대하고, 압제하거나, 수탈하지 않으신다. 그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수탈할 필요가 없다. 또, 그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학대하거나, 압제하지 않으신다. 반대로 그가 창조하신 그의 것으로서 사랑하고, 보호하고, 지키며, 또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사 43:4). 주님께서는 아무생각도 없이, 무계획 속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거나, 구속하지 않고 그의 경륜가운데서 그의 놀라운 뜻을 가지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신다. 그가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행하신다. 그는 우리의 하수인으로서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고 그의 뜻대로 주관하신다. 물론, 우리를 도우실 때도 우리의 하수인으로서 돕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주인과 주관자로서 도우신다. 만약, 주님이 각 사람의 하수인으로서 모든 사람을 도우신다면 많은 혼란과 충돌과 무질서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주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도 그의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이사여 43장 7절에서는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창조하지 않고 주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했다. 주님께서는 다른 자를 위해 창조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창조는 참으로 놀랍고 복된 것이다. 다른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그 창조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12절에서는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주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자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다시 오실 때에 그는 믿는 자들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그를 믿는 자들 또한 그 안에서 영광을 얻으신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 안에서 영광을 얻으신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 안에서 영광을 얻으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하고, 존귀한 인격체인 것이다.
‘나를 위해 지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지은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 지었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주님은 참으로 대단한 이기주의자이시네’라고 혹평을 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주님은 타락한 인간들이 이기주의자로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마음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다. 주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그의 경륜 가운데서 그의 뜻대로 행하시는데 그것은 그의 창조물을 억압하고, 학대하고, 수탈함으로 자신의 유익을 취하는 형태가 아니라, 참으로 사랑하고 위하는 가운데서 그렇게 하신다. 곧, 주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 주님께도 우리에게도 유익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 이사야 43장 19∼21절에서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이스라엘을 지었다고 했다.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이스라엘을 지었으니 이스라엘이 그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하랴! 누구든지 자신이 만든 물건은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긴다. 부모는 그가 낳아 기른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위하며 귀중히 여기는고 이사야 49장 14∼16절에서는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버리고 잊어버렸다고 할 때에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그의 경륜 가운데서 지으시고 구속한 이스라엘을 버리거나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여인이 그 젖먹는 자식을 잊을 지라도 주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잊지 아니한다고 했다. 주님께서는 그가 짓고 구속한 믿는 자들 또한 그러한 마음으로 대하신다. 히브리서 13장 5절에서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그가 짓고 구속한 자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가운데서 그들을 결코 버리지도 아니하고, 떠나지도 아니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항상 함께 있어서 지키고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말씀을 들은 자들은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히 13:6)’라고 담대히 외칠수 있다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했다. 만물이 주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했다. 시편 100편 1∼3절에서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했다. 주님은 우리를 지으신 자이며, 우리는 그의 것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그를 섬기며 노래하며 그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우리를 짓지 않고 주님께서 그 자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신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복이 되는지 모른다.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함’
주님은 자신을 위해 우리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 우리의 허물들도 도말하신다. 이사야 43장 25절에서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신다고 했다(물론,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우리 죄들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를 위해 우리 죄들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견고하고 확실하다. 물론, 그럴리는 없겠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 죄들을 용서하셨다면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거나, 우리가 그에게 불순종하고 대적 한다면 용서한 것을 취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자신을 위해 용서를 했다면 취소하거나 변경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 자신을 위해 우리의 죄들을 용서했으므로 환경이나, 조건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 자신을 위해 우리 죄들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를 위해 우리 죄들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견고하고, 확실하고 안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죄들을 기억지 아니한다고 했다. 주님께서는 그 자신을 위해 우리 죄들을 용서하심으로 그가 우리 죄들을 사하신 것을 확실하게 하셨다. 이사야 44장 21, 22절에서는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먼저 자신을 위하여 그가 택한 자의 죄들을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신 후에 그에게 범죄하고 떠난 이스라엘을 향해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고 하시고서는 ‘내가 너의 죄들을 사했으므로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그 자신을 위하여 그가 창조하고 구속하신 자의 죄들을 용서하셨다. 주님이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변화나, 파기나, 불완전함이 없는 것이다. 그 용서는 온전하고도 완전하기 때문에 그 죄들을 기억지 아니한다고 했다. 히브리서 10장 17, 18절에서는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그가 택한 자들의 죄를 사하고 다시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죄를 위하여 죄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그가 택한 자들의 죄들을 사하기 위해 자신을 온전하고도, 완전한 제물로 드리사 그들의 죄들을 사하셨기 때문에 다시는 그들의 죄들을 기억지도 아니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죄들을 위해 또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시편 103편 1∼5절에서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했다.
‘나의 이름을 위함’
주님께서는 그 자신을 위해 우리의 허물과 죄들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위해서도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다. 우리가 우리 이름을 중히 여기는 것처럼 주님 또한 그의 이름을 중히 여긴다. 실제로 이름은 그 자신이다. 우리가 문서에 우리 이름으로 서명을 하는데 그것은 내가 서명을 하는 것이다. 나의 이름과 나는 서로 분리된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다. 그러므로 이름을 중히 여기는 것은 자신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선상에서 사람들은 함부로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하지 않고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우리 주님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중차대한 것이다. 이사야 48장 9절에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주님께서 그 이름을 위하여 노하기를 더디하고 참을 것이라고 했다(물론, 그 이름을 위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시편 23편 1∼3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다. 시편 기자는 목자 되신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한다고 했다.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의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로운 자신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시편 79편 9절에서는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라고 했다. 기자는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했고, 또 죄들을 사해 달라고 했다. 주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돕고, 건지고, 죄들을 사하는 것이 주님의 이름을 위하는 것, 곧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함으로 주님의 어떠함이 나타나고 그것이 또한 그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상기 내용처럼 해 달라고했다. 이것은 주님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러한 간구에 기꺼이 응하신다. 에스겔 36장 22, 23절에서는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다. 주님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아끼는 가운데서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아끼는 분으로서 그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는 가운데서 그의 택한 자들이 더럽힌 그의 거룩한 이름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거룩하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가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더럽힌 그의 거룩한 이름을 위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용하여 그의 더럽혀진 이름을 다시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 방법은 그들이 범죄함으로 타국에 포로가 되게 하셨는데 그들을 그 고토로 데리고 가서 맑은 물로 뿌려서 정결케 하고 새 영을 그들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주며, 또 그의 신을 그들 속에 두어 그들로 그의 율례를 행하게 함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포로가 되어 간 곳에서 주님을 대적하여 그의 율례와 계명을 어김으로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는데,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그들의 죄들을 도말함으로, 그들을 정결케하고, 또 그들 속에 그의 영을 주사 그에게 순종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게 함으로 열국 중에서 더럽혀진 주님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겠다고 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택하시고 지으신 이스라엘과 자신이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인격체가 아니고 서로 유기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택하시고 지으신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그들이 타국에 포로가 되어가고 또 그곳에서도 범죄함으로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주님은 별개의 관계가 아니고 서로 유기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문제이지 주님이 잘못하지 안했는 데도 그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지지 아니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범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들 안에 그의 영을 주셔서(물론, 그들 자신으로는 죄를 범하는 것 밖에 없다.) 주님의 율례를 행하게 함으로 이스라엘로 그들이 더럽힌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주님의 영의 역사로 주님을 대적하는 데서 돌이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 주님을 나타내고 증거함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더럽혀진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방법, 곧 그의 놀라우신 역사로 그가 택한 자들을 주님과 같은 자로 변화시켜 그가 영광을 얻으시고, 그가 택한 자들 또한 영광을 얻게 하신다. 곧, 주님 자신을 위하는 것이 그 택한 자를 위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주님과 그가 택한 자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이 성을 구원함’
주님은 그가 택한 예루살렘 성을 구원하는데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라고 했다. 이사야 37장 33∼35절에서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가라사대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한 살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앗수르 왕이 예루살렘 성을 공격해 올 때에 자신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며 구원할 것이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그가 택한 예루살렘 성을 다른 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보호하며 구원하실 것이라고 했다.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역사하시는데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으랴! 로마서 8장 31절에서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주님께서 원하고 위하는 일인지를 잘 분별해야 한다. 주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온전하고도 완전한 분,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가 목적한 바를 이루지 않으시는 것이 없으며, 또한 그가 약속하신 바를 분명히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시는 것은 그가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곧, 주님 자신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그가 택한 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하는 일에 대해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는 마음에서 이를 기뻐해야 한다. 호세야 2장 23절에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그가 택한 이스라엘을 그 자신을 위해 이스라엘 땅에 심고 긍휼히 여기며 ‘너는 내 백성이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 주님께서 하는 모든 일은 그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고로 천지만물은 주님의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이 만든 것은 다 사랑하고, 아끼고, 귀하게 여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그가 창조하고 구속하신 우리를 그의 것으로 생각하사 사랑하고 존귀하게 하고 지키고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고 유익이 된다. 우리는 주님과 분리된 별개의 관계가 아니고 그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실제로 주님께서 주님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은 다른 누구를 위해 하는 것보다 더 견고하고, 확실하고, 안전하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잘못됨이 없고, 부족함이 없고,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다.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하시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도리어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돌려야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