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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선집 『새벽에 홀로 깨어』를 읽고(2013.10.7)
간행사
지금 세계화의 파도가 높
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는 비단 자본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화와 정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세계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이 걸린 사활적 문제인 것이다. 이 총서는 이런 위기의식에서 기획되었으니, 세계화에 대한 문화적 방면에서의 주체적 대응이랄 수 있다.
생태학적으로 생물다양성의 옹호가 정당한 것처럼, 문화다양성의 옹호 역시 정당한 것이며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문화다양성은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화적 다양성 없이 우리가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동아시아인,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은 인권(人權), 즉 인간권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고전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관심의 확대가 절심히 요망된다.
우리 고전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그것은 비단 문학만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 예술과 사상을 두루 망라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포괄적이며, 문제적이다. -박희병
책머리에
현대인은 고대인보다 훌륭할까? 이미 3백여 년 전에 프랑스 철학계를 달군 바 있는 징문이다. 당시에 이 질문을 처음 던짐으로써 뜨거운 논쟁을 시작한 철학자는, 본래 현대인과 현대 문학의 우수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은 당시 세계 제국이었던 중국 당나라에서도 통용되는 보편성의 높이에 도달한 빼어난 문학가이면서도, 신라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은 작가였다. -김수영
새벽에 홀로 깨어
◯ 새벽 풍경
바람도 산마루 보드라운 구름 차마 못 흩고
햇볕도 언덕머리 푹 쌓인 눈 녹이지 못하네.
홀로 풍경 읊으니 이 마음 아득한데
바닷가 갈매기와 쓸쓸히 벗하네.
(봄날, 새벽녘의 풍경을 노래하던 시인의 마음이 문득 아득해진 까닭은 무얼까.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 가서 생활하던 시기(868~884)에 쓴 시이다)
◯ 봄날, 어느 새벽
동으로 흘러가는 물 못 돌이키나
시상(詩想)을 재촉하니 이리 괴롭네.
정 담뿍한 아침 비는 가늘디가늘고
아리땁고 고운 꽃은 필 듯 말 듯하네.
어지러운 세상이라 좋은 경치에 주인이 없고
뜬 인생이라 명리(名利)를 점점 멀리하네.
한스러워라 옛날 유령(劉伶)의 아내가
남편더러 술잔 멀리하라 한 일.
(유령(劉伶)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술 마시기를 몹시 좋아하였다. 언젠가 그의 아내가 울면서 제발 술을 끊으라고 하자 도리어 귀신에게 빌면서,부디 제가 한꺼번에 한 섬의 술을 마시고, 닷 말의 술로 해장하게 하소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인은 유령의 이 일화를 끌어 와 술에 취하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 새벽
물시계의 물방울 아직 떨어지건만
은하수는 벌써 기울었네.
어렴풋이 산천은 점점 변해 가고
갖가지 물상(物像)이 열리려 하네.
높고 낮은 희미한 경치가 눈에 보이며
구름 사이 궁전을 알아보겠네.
이곳저곳 수레들 일제히 움직이니
길 위에 먼지가 이네.
저 하늘 끝에 먼동이 트고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네.
새벽별은 먼 숲 나무 끝에 반짝이고
묵은 안개는 넓은 교외의 빛깔 감추네.
화정(華亭,지금의 중국 강소성 송강현의 지명)의 바람 속에
끼룩끼룩 우는 학 울음소리 들리는 듯하며
파협(巴峽 중국 사천성의 삼협) 달 밝은 밤에
멀리서 들려오던 원숭이 울음소리 이미 그쳤네.
주막집 푸른 깃발 어슴푸레 보이고
닭 울음소리 아스라한 마을의 초가에서 들리네.
희미하게 보이는 단청 기와집에
새 둥지 텅 비었고 제비는 들보에서 지저귀네.
군영(軍營) 안에서 조두(刁斗옛날 군부대에서 밤에 경계를 설 때 두드리던 물건)소리 그치자
계전(桂殿 대궐의 황후가 거처하는 곳)곁에서 벼슬아치들 옷매무새 고치네.
변방의 성에서 기르는 말 자주 울어 대고
너른 모래밭 아득하기만 하네.
멀리 보이는 강에 외로운 돛단배 다 사라지고
오래된 강 언덕엔 잡초가 무성하네.
어부의 피리 소리 청아하고
쑥 덤불은 이슬에 담뿍 젖었네.
온 산에 푸른 기운 높고 낮게 깔려 있고
사방 들에 안개가 깊고 옅게 펼쳐 있네.
뉘 집의 푸른 난간이런가
꾀꼬리 지저귀건만 비단 장막 아직도 드리워 있네.
화려한 몇몇 집은
사람들 깨어났으련만 발이 아직 안 걷혔네.
밤이 세상을 에워쌌다가
천지가 밝아오네.
천 리 밖까지 푸르고 아득하며
온 사방이 희미하네.
요수(潦水지금의 중국 섬서성 서안 부근의 강)에 붉은 노을 그림자 뜨고
이따금 들리는 종소리 자금성(紫禁城, 전자가 거주하는 궁궐)의 소리를 전하는 듯,
임 그리는 아낙이 자는 깊은 방의
비단 창도 점점 밝아지네.
시름에 겨운 누운 옛집의
어둔 창도 밝아 오네.
잠깐 사이 새벽 빛이 조금 뚜렷해지더니
새벽 햇살이 빛을 발하려 하네.
줄지은 기러기 떼 남쪽으로 날아가고,
한 조각 달은 서편으로 기우네.
장사차 홀로 나선 사람 일어났으나
여관 문은 아직도 닫혀 있네.
외로운 성에 주둔하는 백전(百戰)의 용사들에게
호가(胡笳,오랑캐의 군사가 부는 악기) 소리는 아직 그치지 않네.
다듬이 소리 쓸쓸하고
수풀 그림자 성그네.
사방의 귀뚜라미 소리 끊어지고
먼 언덕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렸네.
단청 화려한 집에는
푸른 눈썹 그린 미인이 있고
잔치 끝난 누각에는
붉은 촛불만 속절없이 깜박이네.
상쾌한 새벽이 되니
내 영혼 푸른 하늘처럼 맑아라.
온 세상에 밝은 해 비치자
어둠이 바위 골짜기로 사라지네.
천 개의 문과 만 개의 창이 비로소 열리고
넓은 천지가 활짝 펼쳐지누나.
(무려 천년 전에 씌여진 이 작품이 시공간을 넘어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무엇보다 새벽이라는 보편적 제재에 대한 서정적 화자의 남다른 시선에 있다. 동 틀 무렵의 짧은 시간 속에서 변해 가는 천태만상(千態萬象)의 만물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두되 일관되게 견지되는 사려 깊은 시선, 다시 말해 단순한 객관적 관찰자의 수준을 넘어 새벽이라는 시간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서정적 화자의 예리하고도 심원한 시선이야말로 이 작품이 주는 감동의 원천이다)
◯ 봄바람
너는 바다 밖에서 새로 불어와
새벽 창가 시 읊는 나를 뒤숭숭하게 하지.
고마워라, 시절 되면 돌아와 서재 휘장 스치며
내 고향 꽃피는 소식을 전하려는 듯하니.
(원제는 동풍(東風)이다. 동(東)은 사계절 중 봄을 의미한다. 그런데 시인의 고국인 신라가 당나라의 동쪽에 위치하였기에, 이 시에서의 동풍은 봄바람 이라는 의미 외에 내 고향에서 불어온 바람 이라는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 접시꽃
적막한 황무지 한 모퉁이에
다복하게 꽃피어 가지 휘었네.
매화비 맞아 향기 그치고
보리바람결에 그림자 비스듬하네.
수레 탄 이 뉘라서 보아 줄까?
벌과 나비 떼만 날아든다네.
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리니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 슬퍼할 만하군.
(최치원의 시 중에는 자신의 외따로운 처지를 꽃이나 바위 같은 사물에 기탁한 작품이 많다. 접시꽃에 자신을 빗댄 이 시에서는, 특히 마지막 두 행에 신라라는 소국 출신 이방인으로서의 시인의 자기 인식이 직접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제3행의 매화비는 매실이 익을 무렵인 6월경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 진달래
돌 틈에 뿌리 내려 잎 쉬 마르고
바람과 서리에 자칫 꺾이고 상하네.
가을 자태 자랑하는 들국화야 바라리오만
추운 날 끄떡 않는 소나무를 부러워하네.
가여워라 고운 빛깔로 바닷가에 서 있건만
어느 누가 좋은 집 난간 아래 옮겨심을까.
뭇 초목과 다른 품격 지녔건만
지나가는 나무꾼이나 한번 봐 줄는지.
(진달래에 시인의 처지를 기탁한 시이다. 우리 민족에게 진달래는 일찍부터 무언가 애처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각별한 꽃이었나 보다. 이 시에서 보듯 시인은 소외된 존재, 내면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거나 정당하게 인정 받지 못하는 존재에게 따뜻하고 자상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 눈길은 자기 자신을 향하는 눈길일지도 모른다.)
◯ 산꼭대기 우뚝한 바위
만고의 자연이 만든 모습 사람이 갈고 닦은 것보다 나아
높디높은 꼭대기에 푸른 소라처럼 서 있네.
계곡 물살 따위야 영영 범접할 수 없고
한가로운 구름만이 자주 스쳐 가네.
높은 그림자 바다에 돋는 해 늘 먼저 맞고
위대로운 모습은 꼭 밀물에 떨어질 듯하네.
아무리 옥을 많이 품은들 누가 돌아볼까
세상 모두 제 몸만 돌볼 뿐 변화(卞和)를 비웃었지.
(변화(卞和)는 초나라 사람으로 좋은 옥을 구별하는 재능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의 재능을 몰라보았다고 한다. 시인은 산꼭대기의 우뚝한 바위에 자기를 투사시키면서 변화의 옛일을 떠올리고 있다. 남다른 재주를 품고 있음에도 세상에 제대로 쓰이거나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 자신을 산꼭대기의 우뚝한 바위에 견주고 있는 것이다.)
◯ 들불
바라보니 깃발이 문득 펄럭거려
변방을 가로지르는 군대인가 했네.
사나운 불꽃 하늘을 살라 지는 해를 무색케 하고
미친 연기 들을 막아 지나는 구름을 끊네.
마소 치는 데 방해된다 탓하지 마오
여우 살쾡이 죄다 흩어지니 기쁘지 않소?
다만 두려운 건 바람이 산 위까지 불어
옥석(玉石)가리지 않고 모두 태울까 하는 것.
(들불이 들판에 퍼져 나가는 것을 깃발 든 군대가 달려가는 데 비유한 첫 두 행은 이미지가 대단히 참신하다. 여우 살쾡이는 간신배나 모리배를 가리킬 터이다. 이 시에서 보듯, 최치원은 소인배나 불의한 사람을 미워했다. 아마 당시에도 그런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 석류
뿌리는 진흙 사랑 성품은 바다 사랑
열매는 진주 같고 껍데기는 게 같아라.
새콤달콤한 고것 언제나 맛볼까
잎 지고 바람 높은 시월이라네.
(짤막한 시에서 석류의 뿌리, 성품, 열매, 껍데기, 맛 등을 인상적으로 포착해 내고 있다. 발랄한 어조가 흡사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같다. 성품은 바다 사랑이라 한 것은 석류 중에 해류라는 것이 있는 바, 이 품종이 바닷가에서 잘 서식하기에 한 말이다)
◯ 단풍나무
흰 구름 떠 있는 바닷가에 선녀가 서 있는 듯
마치 족자 속의 수목화를 보는 듯.
어여쁜 모습은 세상에 많다지만
한가로운 정취는 그대 같은 이 없네.
이슬 머금어 맑은 단장은 눈물을 글썽이는 듯
바람 맞아 흔들리는 저태는 붙들어 주길 바라는 듯.
추운 숲에서 읊조리니 문득 슬퍼져
산중에도 흉망이 있음을 알겠네.
(가을 숲에 서서 정취 있는 단풍나무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다가 이내 서글픔을 느끼는 시인이 또 다른 한 그루의 단풍나무 같다)
◯ 해문사 버드나무
광릉성(廣陵城) 기슭에서 이별했던 아리따운 모습을
이 바닷가에서 다시 만날 줄 어찌 알았으리.
관음보살 아끼시던 일이 두려워
떠날 때 한 가지도 꺾지 못했지.
(버드나무를 참 희한하게 읊었다. 불교에서는 서른셋 관음보살을 일컫는데, 그중 하나로 양류관음이 있는바 중생의 병을 치유해 주는 관음이다. 옛날 인도의 바이샬리라는 지방에 전염병이 유행했는데,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든 관음이 나타나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주문을 가르쳐 병을 없앴다고 한다. 이 시에 나오는 관음보살이 바로 양류관음이다. )
◯ 파도
눈이 휘날리듯 천만번 거듭하고
물때 따라 오가며 옛 자취 반복하네.
그대는 종일토록 신의를 지켰건만
부끄럽게도 나는 시속 좇아 나태하다네.
석벽에 부딪는 굉음 벼락 치는 듯하고
구름 봉우리의 저녁 해는 연꽃을 흔드니
거센 바람 타겠다던 종각(宗慤)의 말 생각나고
장대한 기운 일어나 와룡(臥龍)이 생각나네.
(파도를 잘 형용했다. 특히 파도와 나를 대비시킨 제3,4행에서 시인의 성찰적 관점이 잘 드러난다. 시인은 파도를 보면서도 자신의 삶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종각은 남조 시대 사람으로, 어릴 적에 숙부가 그에게 포부를 묻자 거센 바람을 몰아 만리의 파도를 휘젓겠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와룡(제갈량의 호)은 삼국 시대 촉나라의 재상으로 군대를 이끌고 노수라는 강을 건널 때 거친 파도를 만났는데, 그때 사람의 머리 대신 만두를 빚어 이를 재물로 바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고 한다)
◯ 바위 위를 흐르는 샘
거문고 곡조 제아무리 잘 탄다 해도
저 구름 아래 들려오는 소리만 못해요.
맑고 티 없이 거울보다 낫고요.
때로 가벼운 바람이 옥 소반을 스치는 듯해요.
흐느끼는 건 장량이 석공의 말 좇지 않아서고
졸졸 흐르니 손초의 배개가 차갑지요.
생각하면 애석해요 그 맑은 빛이
바다로 가 모두 한 물결 되니.
(어떤 아름다운 음악 소리도 자연의 소리에는 미칠 수 없다는 생각이 재미있다. 장량은 전국시대사람으로 은자인 황석공의 말을 좇지 않고 공을 이룬 뒤에야 은거하였다. 손초는 동진 때 사람으로 젊어서 은거한 적이 있는데, 돌을 베개 삼는다는 말을 시냇물을 베개 삼는다고 잘못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 바위 위 작은 소나무
쓸모없는 나무가 수(壽)를 누리나니
산골짜기가 어찌 바닷가만 할까.
저물녘 해가 구름을 끌어와 섬의 나무들 가지런하고
밤바람은 솔방울 흔들어 밀물 모래밭에 떨어뜨리네.
반석에 내린 뿌리 깊고 굳세니
구름에 닿기 아득하다 뭘 한탄하리.
키 작은 걸 부끄러워할 것 없네
안영의 집 들보로 삼을 만하니.
(이 시에 나오는 소나무는 바닷가의 바위 위에 서 있는 키 작은 나무다. 시인은 이를 통해 겉만 보고 사물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쓸모없는 나무가 수를 누리나니라는 시행은 장자에 나오는 고사와 관련된다. 장자가 산속을 가다가 아주 큰 나무를 보았는데 곁에 있던 나무꾼이 그 나무를 배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너무 커서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장자는 이 나무는 쓸모없음으로 인하여 수를 누린다는 무용지용에 대해 말했다. 안영은 키가 작고 볼품없는 외모를 지녔지만 공자도 높이 평가했던 춘추 시대 제나라의 재상이다. )
〇 곧은 길 가려거든
어려운 때 정좌(正坐)한 채 장부 못 됨을 한탄하나니
나쁜 세상 만난 걸 어찌하겠소.
모두들 봄 꾀꼬리의 고운 소리만 사랑하고
가을 매 거친 영혼은 싫어들 하오.
세파 속을 헤매면 웃음거리 될 뿐
곧은 길 가려거든 어리석어야 하지요.
장한 뜻 세운들 얻다 말하고
세상 사람 상대해서 무엇 하겠소.
최치원이 25세 때인 881년에 중국인 오첨(吳瞻)에게 보낸 시이다. 제6행의 곧은 길 가려거든 어리석어야 하지요 라는 말이 퍽 인상적이다. 당시 당나라는 지배 세력의 횡포와 극심한 기근으로 어지러웠으며, 마침내 황소(黃巢)난이 일어나 그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이렇듯 불안정한 정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최치원의 상관이었던 고변마저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어, 결국 4년 뒤인 885년, 최치원은 17년 간의 중국 활동을 접고 신라로 돌아오게 된다.
〇 옛 뜻
여우는 미녀로 잘 둔갑하고
살쾡이는 선비로 잘 가장하네.
뉘 알리 짐승들이
사람 몸으로 변신해 홀리는 줄을.
하지만 변신은 외려 쉬운 일이요
양심 지키기가 제일 어렵네.
그러니 참과 거짓 알고 싶다면
마음의 거울 닦아 비춰 보게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요지경 같은데, 이런 속에서 양심을 지키며 참되게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시인은 참과 거짓을 분변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마음부터 닦을 것을 말하고 있다. 최치원의 인간됨됨이를 엿보개 하는 시이다.
〇 윤주 자화사에 오르며
산에 오르니 속세의 먼지 잠시 멀어졌건만
흥망을 생각하니 한(恨)이 더욱 새롭네.
뿔피리 소리에 아침저녁 물결이 일고
청산 그림자엔 고금(古今)의 사람 아른거리네.
서리 맞은 고운 나무에 꽃 주인 따로 없고
바람 따스란 금릉(金陵)은 풀만 절로 봄이네.
사씨(謝氏) 집안의 풍모가 아직 남아 있어
시인의 정신을 즐겁네 하네.
경치와 감회를 결합시킨 솜씨가 빼어나다. 특히 제3.4행은 세월의 무상함을 잘 표현했다. 윤주는 지금의 중국 남경일대이고, 금릉은 남경의 옛 이름이다. 사씨 집안 이란 남조 때 송의 저명한 시인인 사령운과 그 족제 사혜련의 집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〇 요주 파양정에서
석양 아래 읊조리니 생각이 끝없고
만고강산이 한눈에 쏙 들어오네.
태수가 백석 걱정해 잔치 멀리하니
강 가득한 바람과 달은 어옹(漁翁) 차질세.
마지막 행이 좋다. 요주는 지금의 중국 강서성 파양현에 해당한다.
〇 피리 소리를 듣고
인생사란 흥했다 쇠하게 마련이니
부질없는 삶 참으로 슬프구나.
뉘 알았으리, 저 천상의 곡조
이 바닷가에서 연주하게 될 줄을.
물가의 전각(殿閣)에서 꽃구경하실 때 연주했었고
바람 부는 난간에서 달 보실 때 연주했었지.
이제는 선왕(先王)을 뵐 수 없으니
그대 좇아 눈물만 줄줄 흘리네.
시인은 당성을 유람하던 중 우연히 한 약관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돌아가신 선왕의 왕실 음악을 담당하던 악관이었다. 그의 피리 연주를 들으며 무상감과 그리움 속에서 함께 눈물을 흘린 시인은 이 시를 그에게 써 주었다. 제 5.6행은 약관이 선왕 앞에서 연주하던 시절의 회상을 담고 있다.
〇 옛 일을 떠올리다
나그네 수레 멈추고 나루를 물으니
수양제 때 쌓은 제방 흙에 덮여 적막하네.
인심은 늘 어진 군주 따르거늘
버들잎은 전혀 태평한 봄빛 아니네.
탁한 물결은 황제의 노닌 자취 남기지 않고
저문 노을만 괜시리 비단 돛대 같네.
수양제가 나라 망친 일 말한들 무엇 하랴
예나 지금이나 사치하면 망하는 법이거늘.
수양제는 수나라의 제2대 황제이다. 사치와 향락으로 나라를 도탄에 빠뜨려 결국 신하에게 암살당했다. 백성과 아픔을 함께하는 일이야말로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말해 주는 시이다.
〇 강남의 여인
강남은 풍속이 분방하여서
딸아이 애교 있게 키운다나.
꾸미기만 좋아하고 바느질은 부끄러워해
곱게 단장한 채 악기의 줄을 고른다지.
고상한 가락은 배운 일 없어
온통 염정(艶精)에만 이끌린다지.
꽃 같은 자기 얼굴
언제나 그럴 줄 알고,
아웃집 아낙을 비웃네
아침 내내 베틀만 잡고 있다고.
베 짜느라 몸이 고달플테지만
비단옷 너한테 안 돌아갈걸!
강남은 중국의 양자강 이남 지역으로, 기후가 따뜻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곡창 지대로 유명하였다. 이 시는 강남의 부유한 집 여인에 대해 노래하다가 끝에 노동하는 가난한 여인을 등장시킴으로써 빈부(貧富)에 대한 시인의 관점을 살짝 내비치고 있다. 마지막 두 행은 부유한 집 여인의 말인데, 가난한 이름 깔보는 교만한 태도가 느껴진다.
〇 진주 캐는 사람에게
바라건대 이욕(利慾)의 문을 닫아
부모님 주신 몸 상치 말기를.
어찌하여 이익 좇는 사람들
목숨을 가벼이 여겨 바다 속에 뛰어드는지.
몸의 영화는 티끌에 물들기 쉽고
마음의 때 씻기란 참 어렵다오
담박한 맛 그 누구와 이야기할까
세상 사람들 온통 단술만 즐기니.
시인은 사람들이 제 몸 상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바다 속에서 자맥질하며 진주 캐는 일을 하는 까닭이 이욕을 좇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도한 욕심이란 늘 경계해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지만, 당시 목숨을 걸고 진주 캐는 일을 한 사람이 단지 이욕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을까?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을 터이다. 이런 데서 상층 지식인인 시인의 한계가 드러난다 하겠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시는 이익을 추구하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마음의 담박함을 옹호하는 데 주지(主旨)가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〇 다섯가지 옛 놀이
금방울 놀이
빙빙 돌며 팔 저어 금방울을 놀리니
달이 돌고 별이 뜬 듯 눈앞이 아찔.
초나라 의료(宜僚,초나라 사람으로 공돌이를 잘했다고 함)인들 이보다 나을까
큰 바다 물결도 잠재우겠네,
다리꼭지놀이
어깨 툭 튀어나오고 자라목에 머리 높게 묶은
난쟁이들(선비가 아니라 난쟁이) 이 팔을 뽐내며 술잔 다투네.
노랫소리에 사람들 모두 웃으니
초저녁에 올린 깃발 새벽을 재촉하네.
탈춤
황금빛 탈 진짜로 사람 같은데
손으로 채찍 잡고 귀신 내모네(처용무?),
빨리 혹은 천천히 내디디며 춤을 추나니
요순 시절에 봉황이 춤추는 것 같네.
꼭두각시놀이
쑥대머리에 쪽빛 얼굴 사람과 다른데
무리를 놀리며(여러 인형을 조종함) 뜰에서 난새춤을 추이네.
북소리는 둥둥둥 바람은 선들선들
앞으로 껑충 뒤로 훌쩍 종작이 없네.(인형의 춤추는 모습 형용)
사자춤
멀리 사막 건너 만 리를 오느라
털 다 빠지고 먼지 뒤집어썼네.
머리 흔들고 꼬리 치며 순하게 따르지만
웅장한 그 기운 어찌 뭇짐승과 같으랴.
원제는 향악잡영5수로 삼국사기에 전하며, 공연사적 의미가 큰 시이다. 첫 수의 금방울놀이와 둘째 수의 다리꼭지놀이는 전승이 끊긴 놀이들이다. 다만 시 내용으로 보건대, 금방울놀이는 금방울에 끈을 매어 돌리는 놀이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다리꼭지놀이는 무슨 놀이인지 논의가 분분한데, 역자는 난쟁이들이 우스꽝스런 차림을 하고 익살을 부리며 노래를 하는 놀이로 번역해 보았다. 셋째 수의 탈춤과 넷째 수의 꼭두각시놀이, 다섯째 수의 사자춤은 조선 시대에 즐견던 바, 오늘날에도 전통 공연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비오는 가을 밤
〇 비 오는 가을 밤
가을바람에 괴로이 시를 읊건만
세상엔 날 알아주는 벗이 없어라.
창 밖에는 깊은 밤 비 내리는데
등불 앞 내 마음은 만 리 먼 곳에.
쓸쓸한 가을밤, 나를 진정 알아주는 먼 곳의 존재들이 더욱 그립다. 시인의 이런 마음이 제4행, 등불 앞 내 마음은 만 리 먼 곳에의 공간적 격절감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시는 귀국 후 쓸쓸히 지냈던 시인이 중국의 벗들을 그리워하며 쓴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시인은 중국에 있을 때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을 느꼈지만, 정작 고국에 돌아와서도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다시 중국의 벗을 그리워한 건 아닐까?
○ 밤비 내리는 객사에서
객사에 늦가을 비 내리는데
차가운 창가의 등불이 고요하여라.
시름 속에 앉아 스스로 서글퍼하니
참선하는 중이 따로 없어라.
비 내리는 늦가을 밤의 객사라는 시공간적 상황이 한없는 여운을 남긴다. 시인은 어떤 시름을 하고 있을까? 난세에 처해 고민하는 지식인 최치원의 인간적 면모가 약여하게 느껴지는 시이다.
〇 길 위에서
동(東)으로 서(西)로 떠돌며 먼지 나는 길에서
나 홀로 여윈 말 타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돌아감이 좋은 줄 모르지 않네만
돌아간들 내 집은 가난하거늘.
최치원은 열두 살이던 868년, 당나라에 유학 가서 단 6년 만에 빈공과에 급제하였고, 그로부터 2년 뒤에 율수현위라는 관직에 제수되었다. 이는 약관의 외국인에게는 이례적인 대우였으나 보다 큰 포부를 품었던 최치원은 그 이듬해에 벼슬을 내놓고 박학굉사과라는 시험에 응시하고자 장안의 종남산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기 전에 모아놓은 양식과 돈이 떨어져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고달픈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는 이런 상황 속에서 창작된 듯하다.
〇 바닷가에서 봄 경치를 바라보며
갈매기와 해오라기는 제각기 오르락내리락 날고
멀리 물가의 그윽한 풀빛은 더욱 짙어 가네.
천리 밖에서 품는 만 가지 사념(思念)
먼눈으로 해질녘 구름 보니 아득하기만.
최치원의 시 중에서 바닷가에서의 소회를 읊은 시가 많은데, 중국에 있을 때 지은 이 시도 그 중의 하나다. 시인의 눈길을 바닷가의 갈매기, 해오라기, 풀빛을 향해 있지만, 시인의 마음은 온갖 사념으로 착잡하기만 하다. 먼 바다를 바라본 것은 고국 신라를 그리워해서일까? 이 시는 자연의 풍광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최치원의 내면 풍경을 보여 주는 시이다.
〇 바닷가 거닐며
바닷물 빠진 뒤에 모래사장 걷노라리
해 저무는 산마루에 저녁노을 자욱하네.
봄빛도 날 오래 괴롭히지 못하리
머잖아 고향의 꽃향기에 취할 테니까.
머잖아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 지금 여기에 쓸쓸함에 위안이 되고 있다.
〇 모래사장
멀리서 바라보면 눈꽃이 날리는 듯
연약하여 언제나 제 몸 못 가누네.
모이고 흩어짐 조수(潮水)에 맡기고
높아지고 낮아짐 바닷바람에 기대네.
안개가 바다에 자욱할 땐 사람 자취 끊어지고
햇빛이 서리에 비추일 땐 학이 노닐지.
이별의 한 가득하여 시 읊는 이 밤
달마저 밝으니 이를 어쩌나.
모래를 눈꽃에 비유한 발상이 새롭다. 시인은 바닷가의 이 아름다운 풍경을 떠나야 하는 데 대해 몹시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최치원의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시라 할 만하다.
〇 봄 경치를 보고
안개 낀 바다 먼눈으로 바라보니
새벽 까마귀 나는 곳 고향인가 싶어라.
나그네 시름 이제 그만 끝나고
행색도 다못 웃음을 띠게 하겠지.
물결은 모래톱 밀고 꽃은 언덕에 지고
구름은 바위를 단장하고 잎은 산을 덮었네.
장사하러 오가는 사람들에게 말하노라
누가 천금으로 한가함을 살 수 있겠소?
최치원이 귀국을 결심한 884년경에 씌어진 시로 보인다. 머잖아 그리운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기대감 때문일까? 이 시는 최치원의 다른 시들과는 달리 희망에 차 있고 뭔가 설렘으로 가득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 때문이겠지만 제5~6행의 풍경 묘사도 퍽 밝고 낙관적이다.
〇 낙동강 정자에서
안개 낀 봉우리 우뚝하고 물은 넘실거리는데
물속에 비친 인가(人家)는 푸르른 봉우리 마주했네.
바람 따라 가는 저 배는 어느 곳 배일까?
잠깐 사이 새는 날아 종적이 없네.
한 편의 그림을 마주한 듯 아름다운 시이다. 원제에는 강 이름이 황산강으로 되어 있는데, 낙동강의 옛 이름이다. 공간적 배경으로 보아 최치원이 귀국한 뒤에 쓴 시인 듯하다.
〇 고마운 친구에게
외로운 나그네 여기서 그대를 두 번이나 만났거늘
가을바람에 시 읊으며 헤어짐을 슬퍼하네.
문 앞 버드나무에 올해 새로 난 잎은 시들었건만
나그네는 작년 옷 그대로일세.
길은 하늘 끝 아스라한데 시름 속에 늙어 가니
바다 너머 고향집 꿈에나 돌아갈까.
허허. 이 몸은 봄날의 제비런가
단청 그린 높은 집에 다시 와 노나니.
지난해와 금년에, 두 번이나 신세 진 친구의 집을 떠나며 그 소회를 읊은 시이다. 제5.6행을 통해 고국을 그리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마지막 두 행의 표현은 재미있으면서도 처량하다.
〇 장안의 여관에 묵으며 어떤 이웃에게
외국에서 나그네로 오래 지내니
만 리 밖 사람인 게 부끄럽구려.
나는 안회 같은 사람 못 되나
맹자를 이웃으로 삼게 되었지.
도를 지키며 오직 옛글 익힐 뿐이니
벗 사귐에 가난을 꺼릴 게 있소.
타향이라 지기(知己)도 별로 없으니
그대 집에 자주 놀러 가도 싫다 말기를
안회는 공자의 제자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변지 않고 즐겁게 공부하여 공자가 그 어짊을 높이 평가했던 인물이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처지에 흔들림 없이 늘 한결같은 친구가 이웃에 산다면 세상에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
〇 섣달 그믐밤, 친구에게
친구여, 우리 함께 노래하고 시 읊으며
지난해 이루지 못한 포부를 한탄 마세나.
다행히 봄바람이 돌아갈 길 맞아 주면은
꽃피는 좋은 시절 고국에 닿겠지.
최치원이 신라에 귀국하기 전인 이십대 무렵에 쓴 시로 보인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누군들 상념이 없지 않겠지만, 아직 이룬 것보다 이루어야 할 것이 훨씬 많은 청춘에게는 그 시절만의 고민과 회한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도 함께 노래 부르고 시를 나눌 벗이 있어 시인은 행복해 보인다.
〇 봄놀이 약속을 저버린 친구에게
장안에서 고생하던 때 생각해 보면
어찌 고향의 봄날을 헛되어 보내랴.
오늘아침에 산에 놀러가잔 약속 또 저버리니
속세의 명리인(名利人) 알게 된 게 후회스럽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삼십대 초반 무렵에 쓴 시인 듯하다.
명리인 이란 명예와 이익만을 좇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최치원은 친구와의 물놀이 약속을 무척 기대했던 것 같은데 친구가 오지 않아.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을 이 단어에 담았다. 장안은 당나라의 수도를 가리킨다.
◯ 봄날 정자에서 노닐며
늘 시와 술로 평생을 즐기거늘
봄 깊은 양제성을 어이 그냥 보내랴.
한눈에 드는 경치 끝이 없어
칠언시로 이 정취를 쏟아 내누나.
꽃은 비단 펼쳐 나비를 머물게 하고
버들은 명주실로 꾀꼬리를 붙드네.
좋은 벗 서로 불러 술 권하는 자리에
환영(桓榮)보다 나은 그대 학식 부럽기만 하네.
봄날 시골 정자에서 노닐며 벗이 지은 시에 화답한 시이다. 양제성은 지금의 중국 강소성 양주를 이르고, 환영은 후한 때 사람으로 경전에 해박했던 인물이다.
◯ 늦봄
봄바람에 온갖 향기 맡으니
마음이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처럼 낭창대네.
소무(蘇武)의 편지는 변방에서 돌아오고
장주(莊周)의 꿈은 낙화 좇아 바쁘네.
늦봄 경치에 아침마다 취해 좋기는 하다만
헤어지는 마음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네.
때는 바야흐로 기수(沂水)에서 멱 감는 시절
옛날 선향(仙鄕)에서 놀던 일 애달프구려.
최치원이 중국인 친구 고운에게 장안에서 함께 노닐던 일을 생각하며 화답한 시이다. 소무는 한나라 무제때 사신으로, 흉노의 포로로 잡혔는데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편지를 기러기 발에 매어 보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에 보이는소무의 편지는 단지 기러기를 가리키는 뜻이며, 장주의 꿈 역시 단지 나비를 가리키는 뜻이다. 늦봄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 이 둘을 취한 것이다. 기수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늦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이른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한다는 말이 보인다. 선향은 당나라 수도 장안을 가리킨다.
◯ 산양에서 고향 친구와 헤어지며
만나서 잠시 초산(楚山)의 봄 즐기다가
다시 헤어지려니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바람 맞으며 슬피 바라본들 이상타 생각 마오
타향에서 고향 친구 만나기 참 어려우니.
최치원이 중국에 있을 때 신라인을 만나 잠시 함께 봄을 즐기다가 이별에 임해 지은 시로 보인다. 제3.4행에서 타국에서 혼자 살아가는 시인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산양은 강소성 회안을 이른다. 초산은 초주라고도 하는데 산양을 가리킨다.
◯ 여도사와 헤어지며
늘 속세에 벼슬살이 후회했으나
마고(麻姑)와 알고 지낸 몇 년간 참 기뻤어요.
떠나는 길에 진심으로 말하노니
바닷물은 어느 때나 다 마를까요?
마고는 한나라 환제 때 채경이라는 관리의 집에 머물렀다는 전설 속 선녀이다. 시인은 넌지시 자신을 채경에 여도사를 마고선녀에 견주고 있다. 시인은 괴로운 벼슬살이 중에 그나마 이 여도사에게 마음을 붙였던 모양이다. 마지막 행은 상전벽해와 관련된 말이니, 마고 선녀는 하도 오래 살아 바다가 뽕나무 밭이 되는 것을 세 번이나 봤다고 한다.
◯ 슬퍼도 슬퍼 마오
먼 바닷가 산에는 새벽안개 짙게 깔렸고
배 폭 돛은 만리바람에 펼치어 있네.
슬퍼도 슬퍼 마오 아녀자처럼
헤어진다고 너무 슬퍼할 건 없네.
제1행의 새벽안개와 제2행의 만리바람은 대구를 이루며 그 심상을 통해 이별의 정한을 깊게 해 준다. 이 점에서 그 다음 제 3행의 슬퍼도 슬퍼 마오는 얼마나 역설적인 어법인가.
◯ 언제 다시 만날는지
만난 지 며칠 만에 또 헤어지려니
갈림길에 또 갈림길 시름겹도다.
손 안에 계수나무 향기 벌써 다 사라져 가건만
그대와 헤어지면 속마음 나눌 이 하나 없겠지.
소윤 벼슬을 한 김준이라는 친구와 이별하며 쓴 시이다. 김준은 최치원이 귀국 후 교유한 인물 가운데 삼국사기를 통해 유일하게 이름이 전해지는 인물이다.
◯ 헤어지는 오 수재에게
1
아직 벼슬해 부모를 영광스럽게 못했으니
갈림길에서 잠시 몸이 수고로운 걸 서글퍼 마오.
오늘 아침 멀리 헤어지며 무슨 말 하겠나
남에게 부끄러운 일 하지 말라는 말밖에.
2
석양엔 변방 기러기 높이 날고
저녁연기는 먼 데 물가 나무에 어리었네.
고개 돌려 바라보니 그리운 마음 한없는데
하늘가 외로운 배만 물결 헤치며 가네.
제목의 수재는 과거 공부 중인 젊은이를 일컫는 말이다. 첫수 제2행에서 갈림길 운운한 것은 과거에 합격하기까지 험난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참고 견디라는 뜻이다. 제4행은 울림이 깊다. 둘째 수 제1,2행에 이미 이별의 정한이 듬뿍 담겨 그 여운이 한량없는데, 제4행에 이르면 최고조로 고조되어 주체하기 어려운 느낌이다.
◯ 강남으로 돌아오는 오 진사에게
그대와 안 뒤 몇 번 째 이별인가
이번 헤어짐에는 아쉬움 더욱 깊네.
전쟁으로 인해 가는 곳마다 어수선한데
어느 때 다시 만나 시와 술 즐길는지.
멀리 나무들은 강변에 늘어섰고
찬 구름은 말 앞 산등성이에 걸려 있네.
가다가 좋은 경치 만나거든 시 지어 전해 주게
혜강(嵇康)의 게으른 버릇일랑 본받지 말고.
제목의 오 진사는 앞 작품의 오 수재와 동일인이다. 진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과거에 급제해 고향인 강남으로 돌아갔던 모양이다. 제5,6행의 풍경 묘사는 꽤 운치가 있다. 혜강의 게으른 버릇이란 죽림칠현의 일원이었던 혜강이 자신을 관직에 추천한 산거원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관직에 부적합한 이유를 열거하면서 게을러서 편지 잘 안하는 버릇을 그 한 이유로 들었던 데 착안한 표현이다. 간단히 말해, 편지 자주 하라는 말이다.
◯ 우강 역 정자에 적다
모랫벌에 말 세우고 돌아오는 배 기다리나니
한 줄기 물안개 만고의 시름이네.
산이 평지 되고 이 강물 다 마르면
인간 세상 이별도 비로소 그치련만.
이별은 만고의 문학적 주제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별이 그칠 날이 있을까. 우강은 어딘지 미상이다.
은거를 꿈꾸며
◯ 운봉사에 올라
칡덩굴 붙잡고 운봉사에 올라
내려다보니 아래 세상 텅 비었네.
천산(千山)은 손바닥 위에 있듯 분명하고
만물은 가슴을 시원하게 하네.
탑 그림자는 하늘가의 눈(雪)같고
소나무 소리는 높은 하늘 바람일세.
구름이랑 노을은 날 비웃을 테지
발길 돌려 속세로 돌아간다고.
이 시는 기상이 퍽 높다. 운봉사는 신라 진평왕 10년(588)에 운달산 정상 부근의 금선대라는 곳에 창건된 절로,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김룡리에 위치한 김룡사의 전신이다. 높은 곳에 올라 보면 시선이 달라지는 만큼 생각도 달라진다. 하지만 저 아래 세상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시인은 제 7.8행에서 다소 자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 갈매기
물결 따라 이리저리 나부끼다
가벼이 털옷 터니 참으로 물 위의 신선일세.
자유로이 세상 밖 드나들고
거침없이 선계(仙界)를 오고 가네.
맛난 음식 좋은 줄 모르고
풍월(風月)의 참맛 깊이 사랑한다네.
장자(莊子)의 나비 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대를 보다가 잠드는 이유를 알 테지.
장자의 나비 꿈이란,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되어 한참을 자유롭게 노닐다가 문득 내가 정말 나비가 된 것인지, 혹 나비가 내가 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꿈과 현실, 남과 나를 구별 짓는 경계 너머에 대해 깨닫게 된 일을 말한다. 아마도 시인은 물 위의 신선 같은 갈매기를 보며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꿈꾸었던 듯하다.
◯ 겨울날 산사에서 노닐며
잠시 선방(禪房)에 와 쉬니 그리움 아련하고
이렇게 희귀한 산수 사랑스럽기만 하네.
빼어난 경치에 오래 머물지 못함이 슬퍼
한가롭게 시 읊으며 집에 돌아감을 잊네.
스님은 샘을 찾아 먹을 물 길어 내고
학이 솔가지 뜨매 눈이 훅 날리네.
시와 술 즐기던 도연명의 흥취를 일찍 알았더라면
세상 명리(名利) 하마 잊었을 텐데.
겨울 산사의 한가롭고도 아늑한 정경이 잘 그려진 시이다. 제5행과 제6행은 대구에 해당하는데, 스님과 학이 능청스러울 만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학의 최상승이라 할 무심의 경지를 그려 냈다 할 만하다.
◯ 바위 봉우리
저 높은 바위 꼭대기 하늘에 닿을 듯
바다에 해 돋자 한 송이 연꽃으로 피네.
형세 가팔라 뭇 나무 범접을 못하고
격조 높아 오직 구름과 안개만 벗 삼네.
차가운 달은 새로 내린 눈으로 단장하고
옥 굴리는 맑은 소리 작은 샘에서 솟아나네.
생각건대 봉래산도 다만 이와 같으리니
달밤이면 여러 신선 모이리라.
최치원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서, 지금의 중국 청도에 위치한 대주산 아래에 배를 대어 놓고 읊은 시이다. 제2행은 기가 막힌 표현이다. 해가 돋을 때 햇빛에 비친 바위 봉우리를 두고서 한 송이 연꽃이 벌어지는 걸 상상하다니!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기만 하다. 대주산은 기암괴석으로 이름난 산이며, 봉래산은 신선이 산다는 전설의 산이다.
◯ 바다에 배 띄우니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이 만 리에 통하네.
뗏목 탔던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불사약 구하러 간 진나라 동자 떠오르네.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하늘과 땅은 태극 속에 있네.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나 또한 선옹(仙翁)을 찾으리라.
드 넓은 바다에 배를 띄우고 앉아, 시인은 땅에서 잊고 지낸 광활한 세계를 잠시 그려보고 있다. 현재 전하는 최치원의 시 중 제일 스케일이 크고 호방한 작품이다. 제3행의 뗏목 탔던 한나라 사신은 한무제 때 뗏목을 타고 은하에 갔다 왔다는 장건이란 인물을 말한다. 제4행의 진나라 동자는 진시황 때 동방에 있는 불사약을 구하러 보내졌다는 삼천 명의 동자를 말한다.
◯ 천 갈래 길
흰 구름 시냇가에 절을 짓고는
서른 해 동안 이 절에서 주지로 살았네.
웃으며 문 앞의 한 줄기 길 가리키는데
산자락 나서자 천 갈래 길이 되누나.
최치원이 금천사 주지에서 써준 시이다. 깊고 높은 산 속 고즈넉한 절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문밖을 가리키며 다른 한 사람이 그 손끝을 바라보고 있는 정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연상된다. 제3,4행은 함축이 깊어 이른바 언외지언(言外之言)을 담고 있다 할 만하다.
◯ 노승
구름 가에 절간 지어 놓고
선정(禪定)에 든 지 어언 오십 년.
지팡이는 산 밖을 나선 일 없고
붓으론 서울에 보내는 편지 안 쓰네.
대 홈에 샘물 소리 들려오고
소나무 창가엔 해 그림자 성근데
높은 경지라 다 읊지 않고
눈 감은 채 진여(眞如)를 깨치네.
운문난야(雲門蘭若: 난야는 절이라는 뜻)에서 일생을 보낸 노승의 오십 년 삶을 노래한 시이다. 담담히 읊조린 듯하지만, 제3,4행에 보이는 수행자로서의 노승의 깐깐한 결기 때문인지 도무지 가볍지 않다. 제8행의 진여란 불교에서 진리를 일컫는 말이다.
◯ 혼자 사는 중에게
솔바람 소리 빼곤 귀가 시끄럽지 않은
흰 구름 깊은 곳에 띠풀로 지붕을 이었네.
세상사람 여길 알면 한스러우리
돌 위의 이끼가 발자국에 더럽혀질 테니.
재곡난야(梓谷蘭若)에서 혼자 사는 중에게 써 준 시이다. 제1행이 평범한 듯하면서도 싹 빼어나다.
◯ 청 상인에게
바닷가 구름 속의 저 암자 푸른 산에 의지해
속세와 멀리 떨어져 스님 거처로 딱 맞네.
이보게, 파초 비유만 물으려 말고
봄바람에 물결 살랑이는 것도 좀 보게나.
제3,4행이 재미있다. 공연히 현묘한 도리에 사로잡히지 말고, 눈앞의 자연이 연출하는 미묘하면서도 생기에 가득한 진리를 직시하고 음미하라는 뜻이다. 제목의 상인은 승려를 가리키는 말이다. 파초는 바나나 나무를 가리키는데, 그 열매의 껍질을 벗겨 가도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므로 사물에 실체가 없는 것, 즉 공(空)을 뜻한다.
◯ 산에 사는 중에게
이보시오, 청산이 좋다는 말 마오
정말로 산이 좋으면 뭣 하라 나오시오?
두고 보오 훗날 자취를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니.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 십여 년간 조정에 참여하며 신라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신라를 부정한 채 왕건이나 견훤 등의 세력에 동조할 수 없었던 최치원에게 은거란 어쩌면 필연적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이 시는 구전으로 전해진 작품으로 산속에 들어가며(入山詩)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 가야산 독서당에 적다
바위 사이로 콸콸 치달리며 온 산에 소리쳐
지척에 있는 사람 말도 못 알아듣겠네.
시비 다투는 소리 들려올까 늘 걱정되어
짐짓 흐르는 물로 산을 감쌌네.
최치원이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할 때 지은 시로, 세상의 온갖 시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을 읊고 있다. 이 시에는 대비되는 두 가지 소리가 나오는데, 하나는 산에 흐르는 물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시비 다투는 소리이다. 시비 다투는 소리를 피하고자 흐르는 물로 온 산을 에워쌌다는 시상은 한편으로는 호쾌하고, 한편으로는 처연하다. 이 시는 현재 해인사 인근 홍류동 계곡의 높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다.
◯ 가슴속 생각을 적다
세상만사 어지럽게 얽혀 있고
근심과 즐거움 또한 다단(多端)하여라.
부자도 만족하지 않는 듯하니
가난한 자가 어찌 안분지족(安分知足)하리.
통달한 이라야 영예를 버리고
초연히 홀로 올바로 보지.
누가 말했나. 허리 굽히는 일 부끄러워
산수간(山水間)에 일찍 돌아가겠노라고.
힘써 농사지으면 또한 거두는 게 있어
기한(飢寒)은 거의 면할 수 있지.
평지에서도 풍파가 일고
평탄한 길에서도 험난한 일 생기네.
세상과의 사귐 사절했으니
세속 일이 어찌 나를 괴롭히겠나.
농부가 때때로 찾아오나니
농사일 이야기하다 웃기도 하네.
가고 나면 산에지는 해를 요량해
고요히 사립문을 닫네.
지음(知音)이야 세상에 하나 없지만
아서라, 한탄해 무엇 하겠나.
이 시는 명나라 남방위가 엮은 조선시선 이라는 시 선집에 수록되어 전한다. 그 내용으로 보아 은 거 후에 지은 시로 여겨진다. 최치원의 시인지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지만, 최치원의 시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한 수가 아쉬운 실정임을 감안해 일단 여기에 소개해둔다. 제7,8행은 동진의 시인 도연명이 관직에 있을 때 몇 푼의 녹봉을 받기 위해 허리를 굽혀야 함을 부끄러워해 전원으로 돌아간 일을 말한다.
밭 갈고 김매는 마음으로
◯ 계원필경집 서문
비록 부족한 글들이라 오리나 참새에게도 부끄러우나 이미 밭 갈고 김매듯 마음을 파헤친 것들이므로 자그마한 수고나마 버리기에는 아까워 임금님께 보여 드리고자 시와 부와 표장 장(狀) 등 총 28권을 이 글과 함께 삼가 올립니다.
-열두 살 때 홀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던 최치원이 17년 뒤인 스물아홉 살에 귀국하여 그 이듬해인 886년에 신라 헌강왕에게 올린 계원필경집의 서문이다. 뱃머리에 올라 아버지의 훈계를 마음에 새기는 어린 최치원의 모습과 글짓기에 공력을 기울인 청년 최치원의 고뇌가 인상 깊게 그려져 있다.
◯ 역적 황소에게 보낸 격문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하여 성공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치를 거슬러 실패한다. 그러므로 백 년 인생에 죽고 사는 일을 기약하기는 어려우나 모든 일이란 마음에 달려 있어 그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나쁜 사람을 놓아두는 것은 그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흉악함이 더 심해지기를 기다려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춘추전
공공의 적을 토벌하는 일에 사적인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되고, 길을 헤매는 이를 깨우치려면 정녕 바른말이라야 한다.
0당나라 회종 때 반란을 일으킨 황소에게 보낸 격문이다. 이 격문을 받은 황소가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고 싶어 할 뿐만아니라 땅의 귀신들도 너를 죽이고자 의논하였을 터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힘찬 필치와 설득력 있는 논거로 도저하게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상대를 꾸짖는 동시에 회유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 허경에게 보낸 편지
교전할 때에는 반드시 손무를 무색하게 할 것이요, 포위를 풀 때에는 틀림없이 진평처럼 할 터이니 힘써 빼어난 공을 세워 큰 상을 받기 바란다. 이만 줄인다.
-최치원이 상관인 고변을 대신해 지은 글로 위곡이라는 장르에 해당한다. 위곡이란 당나라 때 고관이 아랫사람에게 내린 답신으로 공문서의 성격을 갖는 글이다. 훗날 허경의 아내 유씨는 정말로 빼어난 공을 세워 여성으로서 팽성군군에 봉해지는 큰 상을 받았다.
〇보내 주신 새 차에 감사드리는 글
밝고 담박하면서도 향기로운 맛의 차를 절로 상상하게 만드는 글이다. 차를 정성껏 만드는 이의 노력과, 귀하게 보내는 이의 배려와, 공손히 받는 이의 감사가 짧은 글 안에 따뜻하게 어우러져 있다.
〇한식날 전사한 장병을 애도하며
짤막한 제문(祭文)이지만 먼저 죽은 이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나는 슬퍼하네 그대들 없이 맞이하는 이 좋은 시절을이라는 대목은, 죽은 이들에 대한 깊은 슬픔을 잘 표현하고 있다.
〇난량비(鸞郞碑)서문
이 글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조에 실려 전하는 난랑비 서문의 일부이다. 짧은 대목만이 전해 나머지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유교 도교 불교의 3교를 아우른 신라 고유의 풍류사상, 곧 화랑 사상의 요체를 논하고 있어 주목되는 글이다.
〇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善安住院)의 벽에 쓴 기
동이(東夷)라는 말에는, 중화적(中華的)과점에서 한민족을 동쪽 오랑캐 정도로 낮춰 보는 시선이 짙게 배어 있다. 이에 대해 최치원은 『예기』 『이아』 『서경』등 중국의 문헌을 근거로 동이라는 말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신라에 대한 최치원의 강한 자부심이 주목되는 이 글은 그의 나이 44세(900)때 창작되었다.
〇신라의 윗자리에 있게 해 달라는 발해의 청을 황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데 감사하는 글
최치원이 신라 효공왕을 대신해서 쓴 글이다. 발해의 역사가 잘 요약되어 있을 뿐 아니라. 발해와 고구려의 상관관계가 분명히 밝혀져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큰 글이다.
〇예부상서(禮部尙書)께 드리는 편지
옛날의 고구려가 바로 지금의 발해라는 언급이 주목된다. 한편 이 글에서 보듯 최치원이 고구려와 발해를 민족사적 관점에서 인식하지 않았다 하여, 혹 그의 한게를 비판하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신라인이었던 최치원의 처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오늘날의 입장만을 내세운 다소 무리한 주장이 아닌가 한다.
〇태사시중(太師侍中)께 올리는 글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원류 및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 활동 영역, 그리고 신라의 통일과정및 발행의 건국과정 등 한국 고대사의 주요 장면들이 흥미롭게 서술된 글이다. 아울러 최치원으로 대표되는 당대 지식인의 역사 인식을 살피는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글이다. 특히 최치원이 신라를 낙토(樂土), 즉 낙원으로 부른 점이 주목된다.
신라의 위대한 고승
〇진감 선사(眞鑑禪師) 이야기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최치원 문장의 정수라 할 만한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신라의 위대한 고승의 행적을 기린 3편과 신라 왕가의 능원과 사찰을 기린 1편, 모두 4편의 비명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비명들은 우리나라 금석학(金石學)의 귀중한 보물이다. 이 글은 887년에 완성된 『지리산 쌍계사 진감 선사 대공탑비명』서문의 일부로, 진감 선사 혜소(774~850)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의론을 펼치고 있다. 궁극의 도가 하나이지만 그것을 찾아가는 길의 다양성으로 인해 제기되는 심오한 문제에 대한 최치원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까만 스님, 동방의 성인(聖人)
진감 선사가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한 과정을 서술한 부분이다. 몇 가지 신이한 사적들 역시 흥미롭지만 , 스스로 좁은 세상에 구속되기를 거부한 채 더 높은 진리를 찾아 나선 결단력 있는 삶의 자세야말로 훌륭하게 평가될 만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진감 선사를 까만 스님 이라는 말로 형용함으로써 그 모습을 친근하고도 이채롭게 그린 점이 재미 있다.
-지리산에서 중생과 함께 하다
멀리 중국에까지 가서 불도를 닦은 진감 선사는 마침내 고국에 돌아와 중생을 일깨우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왕을 위해 특별히 발원해 달라는 청을 거침없이 내치되, 중생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헌신하였던 선사의 고귀한 삶이 그려진 부분이다.
-모든 법(法)은 다 공(空)이다
죽음을 앞두고 남긴 진감 선사의 마지막 말은 큰 울림을 준다. 훗날 왕명에 따라 선사의 비평이 씌어진 일은 실상 선사의 본뜻에는 위배된다. 하지만 시속이나 권력, 부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깨달은 눈으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바라보며, 오직 도를 실천하고자 했던 선사의 삶이 최치원의 이 글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에게 알려진 일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진감 선사 대공탑비는 현재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 대웅전 앞에 세워져 있다.
-추모의 노래
〇 낭혜화상(朗慧和尙)이야기
-내 안에서 부처를 찾다
이 글은 『만수산 성주사 낭혜 화상 백월보광탑비명』의 서두이다. 낭혜 화상 무염(801~888)이 일찍이 어려서 불가에 입문할 뜻을 세운 뒤, 부처의 도를 배우고자 갖은 역경을 겪으며 중국에 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져 있다. 그 험난한 여정 끝에, 그토록 찾아 헤맨 부처가 본디 내 안에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스스로 낮은 곳에 서다
낭혜 화상의 30년 행적이 요약적으로 서술된 부분이다. 낮은 곳에 있기를 자처하며, 더욱이 외국에서 수십 년간 남을 위해 헌신하며 살기란 오늘날에도 어려운 일이거늘 당대에 이런 길을 택했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낭혜 화상이 이처럼 위대한 고승이 되기까지는 일찍이 그의 진면목을 알아 본 스승과 그의 선택을 지지해 준 부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왕의 스승이 되다
왕의 스승이 됨으로써 현실에 일정하게 참여하되, 결코 거기에 매이지 않았던 낭혜 화상의 행적이 서술된 부분이다. 낭혜 화상은 신라 헌강왕에게 왕이 예와 의와 충과 신과 성과 실을 지녀야 비로소 백성이 믿고 따른다는 가르침을 주었고, 헌강와에게는 훌륭한 인재를 공평히 등용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여기서 낭혜화상이 유불을 넘나드는 박학함과 높은 식견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낭혜 화상 백월보광탑비는 현재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사지에 세워져 있다.
-추모의 노래
〇지증 대사 이야기
-여섯 가지의 기이한 감응
이 글은 「희양산 봉암사 지증 대사 적조탑비명」의 일부 이다. 지증대사 도헌(801~882)이 보여 준 기이한 감응 여섯 가지를 차례로 서술해 놓고 있다.
-여섯 가지의 높은 행적
나아감과 물러남을 올바로 한 것-첫 번째 행적
은혜에 옳게 보답한 것- 두 번째 행적
재물을 옳게 희사하는 일-세 번째 행적
지세를 옳게 살핀 이로 하여금 의리를 드러내게 하고, 도적이 설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절을 새로 연 것-네 번째 행적
나아가고 물러남을 올바르게 한 것-다섯 번째 행적
취사(取捨)를 자유자재로 한 것-여섯 번째 행적
지증 대사가 일생 동안 이룩한 높은 행적 여섯 가지를 차례로 서술한 부분이다. 지증 대사 적조탑비는 현재 경상북도 문경시 희양산 기슭의 봉암사 경내에 있다.
-추모의 노래
참 이상한 이야기
◯ 신기한 석남 가지
신라 사람 최항의 자는 석남이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몇 달 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항이 갑자기 죽어 버렸다. 죽은 지 8일째 되던 날 한밤중에 항이 여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녀는 항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크게 기뻐하며 그를 맞이했다. 향은 제 머리에 꽂고 있던 석남 가지를 그녀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께서 드디어 우리 같이 사는 걸 허락하셔서 내가 온 거라오.
◯ 알에서 나온 아이
용성국의 왕비가 큰 알을 낳았다. 참 해괴한 일이라 그 알을 작은 궤짝에 넣은 뒤, 배에 노비를 태우고 일곱 가지 보물을 글과 함께 실어 바다로 띄워 보냈다. 배가 아진포에 이르렀을 때, 그 마을 촌장인 아진과 몇몇 사람이 궤짝을 열어보니 알이 나왔다. 어디선가 까치가 날아와 알을 쪼아 깨뜨리자 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스스로를 탈해(脫解)라 하였다. 마을 할미에게 맡겨진 탈해는 경서와 역사를 공부하여 지리에 두루 통달하고 헌걸찬 모습으로 자라났다.
◯ 영오와 세오
동해 바닷가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의 이름은 영오라 하고, 아내의 이름은 세오라 했다. 하루는 영오가 바닷가에서 해초를 따다가 갑자기 바닷물에 휩쓸려 일본의 작은 섬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왕이 되었다. 남편을 찾아 나선 세오 역시 바닷물에 휩쓸려 같은 나라에 이르러 왕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는 해와 달의 빛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천문을 관장하는 신하가 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영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기를 지니고 있는데, 두 사람이 지금 일본으로 가 버려 이런 해괴한 일이 생겼습니다.
◯ 변신하는 노인
강아지로 변해 밖으로 나가 버렸다.
◯ 대나무 통에 사는 두 미녀
◯ 지혜로운 선덕 여왕
◯ 사랑 때문에 타 버린 남자
지귀 심장의 뜨거움이
그 몸 태워 불귀신 되어 버렸네.
푸른 바다 밖으로 가
보이지도 가까이 오지도 말거라.
◯ 호랑이 여인
너희 무리는 여러 생물의 목숨을 해친 일이 매우 많으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행을 징계하리라!
논호림(論虎林)-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에 있는 황성공원 일대의 숲
◯ 원광 법사
◯ 살아 돌아온 보개의 아들
이상은 수이전(殊異傳)에 실린 열 편의 이야기다. 수이전은 신라 시대에 민간에 전해지던 이야기를 모아 최치원이 새롭게 창작한 흥미로운 책이다. 다만 원래의 책은 일실(逸失)되어 전하지 않는바, 여기에 소개한 이야기들은 다른 문헌에 실려 전해 온 작품들이다. 수이전은 고려 시대에 박인량이 증보한 바 있고, 김척명이라는 문인 역시 자기대로 개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설
1
고운 최치원은 한국 문학사의 맨 앞에 우뚝 서 있는 위대한 산이다. 그는 시와 문에 모두 능했을 뿐 아니라 유․불․선에 두루 통달했고, 특히 불교의 오의(심오한 뜻)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당대의 독보적 지성이었다. 컴컴한 밤 같은 신라말기에 시대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선비로서의 양심을 끝까지 견지하다 홀로 빛을 발하며 스러져 간 외로운 존재였다.
최치원은 단지 신라에서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문명(文名)을 떨쳤다.
2
최치원은 열두 살 나이에 해외 유학길에 오른, 이른바 조기 유학생이었다. 당시 중국 당나라에서는 외국인을 상대로 빈공과라는 과거시험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신라인 중에 당의 국자감에 입학하여 빈공과를 준비하는 이가 많았는데, 최치원도 그 경우였다.
최치원이 고변(821~887)을 만나게 된 일은, 이후 중국에서의 그의 입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고변이 제도행영 병마도통에 임명되어 역적 황소의 토벌에 나설 무렵, 고변의 종사관으로서 글 짓는 일을 도맡은 최치원은 역적 황소에게 보낸 격문을 지어 명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렇게 4년간 지은 글이 무려 1만여 편이었다니 그 대단한 필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최치원은 남 보기에 부러움을 살 만한 성공한 유학생이었지만, 실제로는 소국 출신의 주변인이자 이방인으로서 소외감 내지 절망감을 깊이 느꼈던 듯 하다. 그래서인지 남다른 가치를 품고 있음에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거나 세상에서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각별한 눈길을 보냈다.
3
최치원이 이십 대 후반에 엮은 계원필경집을 통해 중국에서의 삶과 그 시기의 작품 세계가 잘 알려진 것에 비해, 귀국 후의 삶과 그 시기의 작품 세게는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그 주된 이유는 최치원이 신라에 돌아와 지은 수십 권의 문집이 하나도 전하지 않는 데 있다.
중앙 정계로 돌아온 최치원은 신라의 최우선 국정 과제 열 가지를 제시한 시무십여조를 진성 여왕에게 올렸다.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자는 고운(孤雲)이다. 어려서 당나라에 유학 가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으며, 이후 당나라에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귀국 후 국정에 참여하여 신라 사회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좌절되자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였다. 시와 문(文)에 모두 능한 대작가이자, 유․불․선에 두루 통달했던 신라 말기 최고의 지성인이었으며,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양심을 끝까지 견지한 올곧은 선비였다. 중국에 있을 때 쓴 글을 엮은 책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 전하며, 후인이 편찬한 책으로 『사산비명』(四山碑銘)과 『고운선생문집』(孤雲先生文集)이 있다.
편역 김수영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한문학과 고전소설을 공부하고 있다. 논문으로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연구」「연암 박지원의(서상수(徐常修)에게 윤회매(輪回梅)사라고 보낸 편지)연구」가 있다.
기획 박희병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사상사와 문학사, 예술사에 두루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의 생태사상』『운화와 근대』『연암을 읽는다』등이 있으며, 『나의 아버지 박지원』등의 역서와 『아사미 케이사이와 홍대용』을 비롯한 논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