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에 청자가 널려 있었다. 소나기가 내리다 그치면 사금파리에 반사된 햇살에 눈이 부셨다. 어릴적 소년 이용희는 사금파리를 보며 자랐다. 깨진 조각에 새겨진 꽃무늬가 신기했다. 푸르스름한 빛깔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뭔지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청자가 무덤에서 나왔다며 가까이 하지 않았다. 어쩌다 온전한 그릇이 밭에서 나오면 재떨이로 제격이었다. 담뱃재가 가득차면 그릇채 휙 던저 버렸다.
그러면 마당에서는 ‘쨍그랑’하며 청자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로부터 꼭 반세기가 흘렀다. 청자가 다시 화려하게 꽃피웠다. 고려도공이 살았던 조용한 동네 대구 사당마을은 전국적인 관광지가 됐다. 잘 꾸며진 건물에는 작품성 뛰어난 청자가 판매되고 있고, 도공 수십명이 정교한 청자를 매일같이 만들어 내고 있다.
청자문화제는 5년 연속 전국 최우수축제로 지정받아 치러지고 있고, 청사사업소에서 생산되는 청자재현품은 세계 정상들에게 선물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600년 동안 땅속에 뭍혀 있던 고려청자는 그렇게 되살아 났다. 깨지고, 짖밟히고, 사람의 기억속에서 지워졌던 고려청자가 다시 생명을 얻었다. 그것은 복재생명이 태어난 것처럼 신비스럽고 획기적인 일이였다.
그 중심에 이용희(68) 청자장(그의 현재 공식 직함은 2003년 전남도로부터 지정받은 도무형문화재 청자장 제 36호이다)이 있었다. 캄캄한 땅속에 뭍혀 있던 청자를 발굴해서 재현하는 일에 그는 일평생을 바쳤다.
청년 이용희가 1964년 3월에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 사당마을에 내려왔을 때 가난한 고향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부모님을 모셔야 했다. 고향에서 부모님과 살기위해서는 농사밖에 달리 선택할게 없었다.
고향살이를 준비하던 중 그해 가을에 운명을 바꾼 손님들을 맞았다. 서울 중앙국립박물관에서 온 청자요발굴조사단이었다. 첫째날 조사단원들이 이용희선생의 집(현재 청자사업소내에 있음)에서 발견한 것은 헌소쿠리에 수북히 담겨져 있는 청자파편이었다. 조사단원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중에서 연구원들의 눈길을 첫눈에 사로잡은 것은 청자기와 조각이었다.
당시 학계에서는 고려 18대 왕이었던 의종 11년(1157년) 때 궁전 동쪽에 양의정이라는 정각을 지었다는 고려사 기록이 있었으나 지붕을 청자로 올렸는지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태였다. 청자기와는 조각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즉시 이용희선생의 집주변에 대한 발굴작업이 시작됐다. 첫 번째 구역에서 청자기와편 500여점이 쏟아졌다. 완성품에 거의 가까운 것도 있었다. 사당리는 일약 보물창고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발굴작업은 그렇게 탄력을 받으며 계속됐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사후관리가 제대로 될 때가 아니였다. 발굴단들은 자신들이 없는 동안 가마터를 관리하고 지킬 사람이 필요했다. 가장 적격인 사람이 이용희 선생이었다. 최순우 관장은 틈만나면 이선생을 불러 청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런저런 책을 주며 공부할 것은 권장했다.
1965년도에 이용희 선생은 헌 장농을 하나 구입했다. 장농문짝에는 ‘당전박물관’이란 이름을 붙여졌다. ‘당전박물관’에는 청자편들이 넣어졌다. 괜찮은 청자파편은 담배를 사주며 얻기도 하고, 모내기 해주고 번 일당으로 청자를 구입하기도 했다.
이용희 청자장은 “당전박물관이야 말로 지금의 청자박물관의 전신이라고 봐도 괜찮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당전박물관’에는 청자편들을 보관했다. 괜찮은 청자파편은 담배를 사주며 얻기도 하고, 모내기하고 받은 일당으로 청자를 구입하기도 했다. 최순우 관장은 ‘당전박물관’의 파편 덕분에 고려시대에 이미 청자타이루가 사용됐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얻기도 했다.
이용희 선생은 이때쯤에 청자와 함께 인생을 살아야 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졌다. 그렇다고 어떤 보수가 생기는 일이 아니였다. 농사를 지으며 오직 사명감 하나로 주변의 가마터를 지키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청자의 가치가 알려지면서 이를 주워가거나 돈을 주고 사려는 사람들이 마을에 자주 나타났다. 청자파편도 절대 팔지 말라고 주민들을 설득하는게 이선생의 큰 역할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적지 않은 유물이 사라졌다고 이용희 선생은 안타까워했다.
1977년, 강진에 강진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가 설립됐다. 1964년 사당리에서 첫 발굴이 시작된 이후 14년만의 일이었다. 14년이란 세월 동안 이용희 선생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가마터 지킴이 역할을 묵묵히 해냈다.
청자재현추진위에서 이용희 선생이 맡은 역할은 위원회 간사겸 요지감시원. 광주에서 청자를 연구하던 조기정 선생이 청자재현 작업에 합류하면서 청자재현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첫 가마가 78년 2월에 나왔다. 가마에 들어간 200여점의 청자중에 32점의 재현품이 나왔다. 전국이 떠들썩했다. 600여년 동안 잠들어 있는 고려청자가 재현된 순간이었다.
이 선생은 70년대 초반부터 유약을 연구하고 있었다. 경기도 이천과 여주등을 돌아다니며 유약을 배웠고, 주로 서적을 통해 유약제조기술을 습득했다.
1986년에 청자사업소가 출범하면서 이용희 선생은 오랫동안 달고 있었던 요지감시원이란 명찰을 떼어내고 연구실장이란 직책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청자사업소 탄생과 함께 강진청자는 새로운 전환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청자의 형태와 문양은 나날히 섬세해 졌다. 강진청자는 단순히 재현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하나의 상품으로 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95년부터는 청자문화제가 열리면서 강진청자는 축제의 무대에 데뷔했다. 2001년에는 전국에서 다섯 개만 지정하는 문화관광부 지정 최우수축제가 됐다. 올해까지 내리 5년 동안 최우수축제로 지정되는 저력을 과시했다.
청자의 역사성과 청자의 작품성, 청자의 대중성, 청자의 민속성, 청자의 상품성등이 동시에 인정된 결과였다.
이용희 청자장은 지난해 9월 청자사업소 연구실장자리에서 정년 퇴임을 했다. 청자와 함께 해 온 41년의 세월이었다. 강진의 청자가 가장 밑바닥에 추락해 있을 때부터 강진청자가 가장 화려하게 부활한 순간까지 도공 이용희는 늘 고려청자와 함께 있었다.
이용희 청자장은 자신의 ‘청자인생’에서 가장 보람있는 일은 강진이 ‘청자골’이란 애칭을 갖게 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흙속에 ANE혀있던 고려청자가 발굴되고, 채집되고, 재현되고, 브랜드화되어 청자골이란 애칭까지 받게된 것에 대한 감회였다. 청자문화제가 전국최우수축제에 5회 연속 지정된 것도 보람중의 보람이었다.
자신의 정년퇴임 후 일이지만 지난해 말 APEC정상회담에 강진청자가 제공된 것도 크나 큰 영광이었다. 이용희 청자장은 퇴직 후 아쉬움이 많다. 청자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지만 주변 여건들이 쉽게 그 일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강진의 청자발전을 모색하면서 초창기 강진청자를 발굴하고 전국에 알리는데 큰 일을 했던 학자들이 배제되고 있는 것도 큰 아쉬움이었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까지 강진에서 청자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지금 거의 박물관장급이나 대학총장그룹에 올라있습니다. 그들을 활용해야 돼요. 그분들도 강진의 청자 때문에 학자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강진을 결코 외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 사람들을 너무 소홀히 대접하고 있어요”
이용희 청자장은 앞으로 강진청자 발전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고 싶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강진청자는 물론 지역사회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강진청자는 경기도 이천이나 여주와는 분명히 차별화가 돼 있습니다. 강진청자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무궁무진 합니다”
이용희 청자장의 가슴속에는 청자를 굽는 1천300℃ 가마속 열기가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용희 청자장(靑磁 匠) 약력
-1939년 5월 26일 대구면 사당리 117번지에서 부친 이영택(1950년 작고) 모친 김월엽(83세)씨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출생 -1946년 대구초등학교 입학 -1952년 대구초등학교 졸업 -1961년 입대 -1964년 3월 제대 -1966년 :결혼 -1977년 강진청자사업재현위원회 간사 겸 유물감시원이 됨 -1986년 1월 7일 청자사업소 연구실장이 됨 -1994년 전라남도 신지식인으로 지정 됨 -2003년 12월 전남도 중요무형문화재 제 36호 청자장이 됨 -부인 유영난(66)씨. 자녀 2남 1녀를 두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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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은 글을 복사해서 올리지만 언젠가는 저도 아버지에 대한 긴 글을 쓰게 되는 날이 오겠지요. 아버지,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피노키오]님의 부친이시군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리고향 강진이 진정한 청자의 본고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유지할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신 그 노력과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강진의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청자장인에게 올해의 인물 되심을 축하 드립니다.
청자발전을 위한 외길 인생을 걸어오신 장인 정신에 진심으로 보내드리고 드립니다^^*
좋은 글 싱싱한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