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서울역 유실물 센타 강효숙
나이가 들면서 자주 손을 놓게 되고 무언가를 자주 잃어버리곤 한다.
작년6월에 러시아 여행 귀국길에 공항에서 손가방을 잃어버렸다 겨우 찾았었는데, 얼마 전에는 손목시계 원판을 잃어버렸다.
교회학교 고등부교사로 봉사했던 분들과 함께 1박2일 여행을 떠났을 때이다 서울역 KTX를 탔는데 그 먼 거리를 2시간20분 만에 도착되어 아주 편리 했다 포항을 작은 도시로 생각 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문화 관광지라서 볼거리가 많은 도시였다. 특히 구룡포에 있는 일본인 가옥거리가 인상적이였다. 가옥거리는 1883년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일 통상장정` 이후 일본인이 조선으로 와서 살았던 곳으로 현재는 일본인 가옥거리`에 가옥 몇 채만 남아있다. 그중`후로사또야` 일본 가옥은 내부형태 그대로 보존되어 찻집과 음식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또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는 호미곶 상생의 손, 오른손이 있는 바다와 새천년 기념관이 세워져있어 볼거리가 풍부했다.
우리 6명 일행은 우리를 초청해주신 목사님 부부들과 횟집에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25년 전에 중국선교지로 여행했던 일이 생각나기도 했고, 또 목사님 부부께서 그동안 헌신과 희생으로 살아오신 삶의 흔적을 읽을 수 있어 감명 깊었다. 그들은 순수함과 봉사하는 삶의 아름다움으로 그들의 60대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떠나는 길에 포항에 유명한 맛집에 들려 물회, 매운탕, 냉면으로 후하게 대접 받았다 우리 일행은 도시 한가운데에 수로가 있는 아름다운 숙소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는 바다를 보면서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하기 좋았다. 또 강 하구의 물길이 본격적으로 바다와 만나는 길목에 포항운하, 강 하구의 물길이 본격적으로 바다와 만나는 길목에 포항운하관이 높다랍게 서있어 장관이었는데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서울역 도착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왔는데 이때 손목시계 원판이 빠졌나보다. 그 시계는 고희를 맞이해 결혼 후 처음으로 구입한 명품시계였다. 이틀이 지나 동창회 모임을 가기 위해 시계를 꺼내보니 시계 줄만 있고, 구찌시계 알맹이는 없는 것이다! 그 알맹이는 10원짜리 동전만한 크기로 회전되는 시계 알이었다. 서울역 유신물 센터에 전화하면서 제품에 모양과 크기, 색깔을 설명했는데 그런 물건이 맡겨진 적이 없다고 했다. 백화점에 알아보니 그 시계 알맹이는 현재 외국에서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니 암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몇 시간 후에 유신물 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실버색상의 줄이 없는 시계 원판을 찾았다고 한다 서울역 유신물 센터로 달려갔더니 회색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들과 남자직원들이 5명 정도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내 신원을 확인 후에 비닐종이에 쌓여진 시계 원판을 건네주었다. 그들은 나의 간절한 부탁 전화를 받고나서 미화원들과 직원들을 총 동원하여 빗자루로 내가 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 부근을 꼼꼼하게 쓸었다고 한다.
이것은 기적인 것이다! 너무나 감사해서 식사비를 드렸더니 절대로 받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자기네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다.
서울역에 내리면 우리는 고향을 잊는다. 옷깃 스쳐도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 뿐 이고, 저마다 깊은 생각을 안고 가는 힘겨운 도시인들에게는 다가와 위로를 건네주고 무릎을 내어줄 여유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역 유실물 센터의 직원 분들은 그들의 직분 이상의 봉사를 기꺼이 자처했고 이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들의 진심어린 선한 봉사는 나에게 신뢰의 행복을 나눠줬다. 나는 작은 마음이 모여 세상을 바꾸는 선한 영향력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부족하지만,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과 선한 봉사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그 어떤 말보다도 깊은 침묵과 미소로 응원하고 싶다.
수필
“내 친구 순아”
강효숙
시간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가차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자 신의 선물이다. 인생의 뒤안길에 남겨진 것들! 상처, 배신 좌절, 결국 이런 것들은 흘러가고 생의 모든 아픔을 치유하는 데에는 시간이 보약인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 인간은 성장하는 것 같다.
순아는 깔끔하고 단아한 긴 머리에 넓은 이마에 큰 눈을 가진 친구였다. 직장 동료였던 순아는 나와 속마음을 주고받는 친구였는데 내가 먼저 결혼을 한 뒤 휴일에는 순아가 먼 곳에서부터 자주 놀러 왔었다.
내가 살던 옆집에 하숙을 운영하시는 분에게 순아를 소개한 게 인연이되어 순아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랑감은 H 대학을 나온 건설회사 소장으로 당시 그 지역으로 발령받아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키가 크고 편안하면서 과묵한 성격이라 순아와 잘 맞고 좋아했었다. 순아 집은 지방이고, 시댁은 서울이어서 서울에 사시는 외삼촌 집에서 내 친구를 위해 상견례 음식을 장만하여 순아의 시댁 식구를 대접 해드리기도 했다.
그 후에 내가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면서 순아 역시 1년 후에 내 집 근처로 이사 와서 매일 전화하고 자녀들과 같이 오가며 재미있게 지냈다. 순아는 남매를 가졌고, 남편과 화목하게 부족함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너무나 자주 만나 흉허물이 없어서 편안하게만 생각했는데, 어느 날 사소한 오해와 상처로 인하여 서로가 멀어지게 되었다. 믿음이 컸던 만큼 실망과 상처가 내 마음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 내가 순아 곁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순아를 다시 만났는데 그동안 나를 잊지 못했노라고 후회와 미안함을 고백할 때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내가 선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더니 “너 가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같이 가겠다”고 하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동안 순아가 어찌 지냈는지 많은 사연을 들었는데 그중에는 황당하고 가슴이 아픈 일들이 많았었다. 예전의 당당했던 모습은 간 곳 없고 많이 지치고 기가 죽은 듯 보였다.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 후에 시간이 지나서 전화를 했는데... 없는 번호였다! 순아를 만나려고 해도 찾을 길이 없었다. ‘좀 더 빨리 전화했더라면..? 아니면 우리 집에 같이 왔더라면..?’ 내가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가장 후회되는 일이다. 지금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삶을 살며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느덧 20년이 또 흘러서 40년이 지난 고희가 되어버린 나이! 사소한 오해와 상처로 좋은 친구를 잃어버리게 되다니...
인생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시작도 될 수도 있고 끝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절망한 사람에게는 늘 닫혀 있고, 희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늘 열려 있다고 한다. 오늘도 내 친구 순아를 그리면서 그 단아한 모습을 언젠가는 꼭 만나리라는 꿈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