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여행22 - 아라시야마 치쿠린을 보고는 도게쓰교를 건너 강 남쪽에 가다!
2024년 11월 21일 다이도쿠지 (大徳寺) 와 다카미네 겐코안( 鷹峯源光庵) 을 구경하고 히라노 진자
(平野神社) 를 거쳐 기타노 텐만구진자 ( 北野の天満宮 神社 ) 를 보고는 전철로 란덴 사가역
에 내려 도롯코 사가에키 (トロッコ 嵯峨駅) 로 들어가니 열차는 인터넷 사전 예약제라 만석입니다.
걸어서 텐류지 天龍寺( 천룡사) 절과 특별명승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는
소겐치 정원을 구경하는데.... 임제종 텐류지파 대본산으로 1339년에 나라 남부 요시노에서
죽은 고다이고왕(천황)의 보리사 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무소 소세키 를 창시로 건립한 절입니다.
걸어서 북문으로 나가니 여긴 대나무 숲인 아라시야마치쿠린 竹林 の小經(죽림노소경) 이니 일본 竹刀
(죽도) 의 대부분을 만든다는 사가의 죽림 으로 영화와 CF 에도 자주 등장하는 엄청 유명한 곳입니다.
여기에 치쿠린 (竹林ちくりん) 이라고 불리는 대나무 숲은 일본 환경성에서 발표한
"일본의 사운드스케이프 (Soundscape) 100선" 에 포함되어
있으며 주로 모소 대나무로 이루어져 있고 방문객을 위한 산책로가 정비된걸 봅니다.
엄청 큰 대나무 숲을 처천히 거닐다 보니 문득 생각나는게, 일본 사람들은 대나무
라고는 한뿌리도 자라지 않는 "독도를 왜 다케시마(竹島 죽도)" 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는데..... 하지만 모든 말에는 다 그 "연유" 가 있기 마련이지요?
진태하 선생은 '漢字學全書 (한자학전서)' 에서 한 분야에 10년을 전념하면 프로의 세계 에 입문
하게 되고 20년을 하면 강호에 나가서 일방적으로 얻어맞지는 않으니 때리기도
하며 30년을 정진하면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 50년을 하면 접신(接神) 의 경지 에 도달 한답니다?
진 선생의 주장 가운데 "독도(獨島)" 의 이름이 어떻게 해서 독도가 되었나를 밝힌 부분이
흥미로운데... 원래는 '독섬' 으로 불렸다는 것이니, 이 섬을 지나다니는 뱃사람들이
붙인 이름으로 섬에 나무가 없이 바위 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니 "돌섬" 을 의미합니다.
“돌(石)” 의 방언이 "독" 이니 우리나라 중남부 지방의 사투리에서는 '돌' 을 '독' 으로 발음 하는데
독도는 경상도와 전라도 뱃사람 들이 섬을 지나다니다가 붙였던 이름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독섬' 으로 불려오던 이름이 대한제국 시대에 한자 이름으로 바뀌면서 '石島(석도)' 로 되었는데,
그러다가 다시 소리 나는대로 ( 借音表記 ) 바꾸었으니..... '독섬' 이 '獨島 독도' 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대나무 가 있는 것도 아닌 섬에 왜 대나무 竹(죽) 자를 넣었을까요?
독도를竹島(죽도) 로 표기한 경위를 살펴보자면, 대나무 원산지는 동남아시아 인데
점점 북상하여 중국 남방으로 올라왔으니 중국 남방에서는 竹 을 'tek 텍' 으로 발음합니다.
이 'tek 텍' 이 일본에 들어와서는 종성(終聲) 을 분리 하여 발음하는 습관에 의해
'다케' 로 발음이 되었고.... 반면에 한국에 들어와서는 입성(入聲)이
탈락된 뒤 에 들어온지라 '대' 로 발음하게 되었다는 것이 진 선생의 주장 입니다.
우리나라의 뱃사람들이 '독셤' 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일본 사람들이 듣고 전하는
과정에서 '도케시마' 로, 이것이 다시 '다케시마' 로 정착되었으니
다케시마를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竹島 죽도' 가 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독도에는 대나무가 전혀 없으므로 대나무 竹(죽) 자가 전혀 필요가
없는데도, 우리말의 '독섬' 을 들은 일본 사람들이 소리 나는 대로
전하는 과정에서 '다케시마(竹島 죽도)' 로 되었다는 것이... 바로 저 책에 나옵니다.
독셤의 발음을 생각하노라니 예전에 “다방” 과 “찻집” 이 어떻게 다르며 “다도” 와
“차문화” 는 또 무엇이 다른지 궁금했던 적이 있는데.... “茶” 는 복건 閩 (천주)
지방에서는 “다” 로 읽고, 광동 奧 ( 홍콩 과마카오 ) 지방 에서는 “차” 로 발음합니다.
한국(차), 일본(오쨔), 인도와 터키(짜이), 아랍(셰이), 월남(짜), 포르투칼(챠) 은 광동지방의
발음이고...... 영국과 독일(티), 네델란드(데이), 스페인과 이태리(떼), 프랑스(띠) 와
일본의 茶道(다도) 는 복건지방의 발음이 전해진 것이니 결국 “다” 와 “차” 는 같은 것이라?
그럼 우리 섬인 독도에 어떻게 일본 어부들이 온것인지 궁금한데.... 1618년 호키번 태수 마쓰다이라
신타로는 막부에 문의한후 돗토리현 요나고의 오오야가(大谷家) 와 무라카와가(村川家) 에게
“竹島(죽도) 도해봉서” 를 발급하니 어업 면허 로, 독도를 주인 없는 무인도 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동해에 면한 돗토리현의 요나고 어부들은 독도 어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친 김에
서쪽 울릉도에 상륙해서 물고기를 잡고 약초를 캐며 삼림을 벌채해서는 겨울이
되면 돌아갔던 것이니.... 조선이 울릉도에 “공도정책(空島政策)” 을 썼기 때문 입니다.
조선 숙종 때인 1693년 어부 안용복 이 물고기를 잡으러 울릉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어업 중에 섬에 정박한 것을 보고 항의하다가 그만 왜인들에게 잡혀서
오키(隱岐)섬을 거쳐 돗토리현 요나고로 끌려가서 울릉도는 조선땅이라 주장했습니다!
일본 어부들이 궂이 안용복을 잡아간 것은 울릉도가 무인도라 평화롭게(?) 어업과 벌목을 하는데
갑자기 조선인이 쳐들어와서 행패 를 부리니 일본 관청에 신고해서 벌 을 주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잡아가지 않았거나 도중에 바다에 밀어 넣었을 것 입니다.
두번째는 저 일본 어부들이 생각하기로는 일본 정부에서 조선에 공문을 보내 다시는 조선인
들이 울릉도에 나타나지 못하게 금지해 달라는 것인데.... 하지만 정반대로 호키슈 태수는
막부에 문의하고는 "울릉도는 조선땅" 이니 가지 말라고 명하니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라?
울릉도는 고려시대 함경도에 거주한 여진족 들이 해적이 되어 강원도 동해안과 일본 서해안에 규슈까지
약탈 중에 들러는 섬이라 사람이 살수 없었는데... 일본은 도이(島夷) 라 부르니 1019년 3월 도이인
(刀伊人 여진족) 들이 50척의 배를 타고 쓰시마(대마도對馬島) 에 쳐들어 왔다고 기록했는데
저 약탈을 하던중 1018년에 울릉도에서 무자비한 약탈로 우산국 주민들은 궤멸적인 타격 을 받았습니다.
1022년에는 요행히 살아 남았던 우릉성주와 아들 부어잉다랑등 주민 들이 섬을 나와 고려로 귀부 했는데
1420년 조선 태종과 세종 임금 때 먼 섬은 풍랑으로 왕래도 어렵고 세금도 빈약한데 관리를 파견해
다스리는 비용은 높은데다가 왜구까지 준동하니.... 쇄환령 을 내려 울릉도 주민을 육지 로 옮긴 것입니다!
여진족이 함경도에 거주한 것은.... 고려 초기 국경선이 서쪽은 황해도이고 동쪽은 원산 이니 평안도
함경도는 여진족 들이 수백년간 대를 이어 살았는데, 고려 태조 왕건은 사람들을 평양에 보내
목책을 두른후 남쪽 백성들을 옮겼으니... 고구려 멸망후 당나라는 고구려인들을 중국땅으로
잡아간지라, 수백년간 평양 일대는 황무지 로 변해 사람 이라고는 살지않는 황폐한 땅 이었습니다.
그래도 울릉도는 조선땅이니 3년에 한번 순찰선 을 보내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잡아와 감옥에 넣다가
이후 순찰선이 뜸하니 일본인들이 상륙하기도 했는데, 고종은 1882년에 검찰사 이규원 을 보내니,
조선인 140명과 일본인 78명을 적발해 쫓아낸후 466년간 계속된 공도 정책을 포기하고 1883년
4월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선인 16호 54명을 울릉도에 이주 시키니 오늘날 울릉도민의 조상들 입니다.
아라시야마 치쿠린에서 이런저런 옛일을 떠올리고는 나와 관광객들로 붐비는 도로를 10분을
걸어서 드디어 목조로 된 길이 154m 폭 12m 도게츠교 渡月橋 (도월교) 를 건너는데,
이 긴 다리를 건너면 아라시야마코엔 嵐山公園(풍산공원) 오른쪽에 공중 화장실 이 있습니다.
가쓰라강 위에 다리 이름이 도게츠교 渡月橋 (とげつきょう 도월교) 인 것은 헤이안시대에 일왕이
이 강에서 달 구경을 하면서.... 마치 달이 다리를 건너가는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아라시야마 (嵐山 あらしやま) 의 중심부를 흐르는 가쓰라강에 가설되어 있는 도게쓰교 는 여기
아라시야마의 상징이니...... 많은 관광객들이 다리를 거닐며 풍경을 즐기는 모습을 봅니다.
아라시야마 (嵐山) 는 북쪽으로 게이후쿠 전기 철도 를 통해 교토시 중심부에서 접근이
가능하고, 남쪽으로는 한큐 아라시야마선 을 통해 오사카 쪽에서도 접근할수
있으며, 또한 JR 사가 아라시야마역 을 통해 교토역에서 북쪽으로 접근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호즈강 保津川(보진천) 강변에는 관광객들을 태우는 보트(유람선) 들이 정박해 있는데, 이 강은
상류는 오이가와강이라 하고 중류는 호즈가와강이라 부르며 하류는 가쓰라가와강 이라 부른답니다.
오래전 헤이안시대 (794년 1185년)~ 부터 귀족들은 궁중을 벗어나 여기 강의 중류인 한적한 강변에서
보트를 타는 풍습이 있었으니..... 배를 타고 내려가면서 호즈강 협곡의 경치 를 즐겼다고 합니다.
호즈가와강 협곡에는 백명의 시인들이 한편씩 쓴 일본 와카 백편 이 있으니 배경이 되는 산 이름을 따서
오구라 햐쿠닌 이라 부른다고 하며.... 또 와카의 시인 인 "바쇼 (芭蕉 파초)" 도 이 강에 왔었다고 합니다.
하이쿠 시인 바쇼 는 일본 각지를 유랑하며 많은 시를 썼으니 그의 흔적을 여러 곳에서 보았는데
첫번째는 센다이 仙台(선대) 북쪽에 일본 3경 마쓰시마 松島(송도) 이니 1689년에 찾은
시성(詩聖) 마쓰오 바쇼 는 기행문집에 일본에서 경치가 제일 아름다운 곳 이라 예찬했다고 합니다.
시인 바쇼는 이가국 출신으로 하이쿠 에 뜻을 두어 1678년 하이쿠의 스승으로 독립하는데
하이쿠에 높은 문학성을 부여한 쇼풍(蕉風) 을 창시하였으니 여행 체험과 감상을
하이카이(俳諧) 와 하이분(俳文) 으로 엮어 쓴 “오쿠노 호소미치 (奥の細道)” 가 있습니다.
후쿠이현 쓰루가 (敦賀) 의 게히 진구 氣比神宮(기비신궁) 는 일본 3대 목조 오토리이 大鳥居(대조거)
에다가..... 신라에서 망명한 귀족들이 고대 국가 를 설립했다는 내용도 있다고 하며 또
야노 신키치 라는 일본 작가가 봉납한 석등 에 무엇보다도 시인 바쇼芭蕉(파초) 동상 이 서 있습니다.
「달밫 맑은데 휘적 휘적 가노라 모래 위의 길
月清し遊行のもてる砂の上」
「곳곳마다 8경 다시 보는 기비의 달
國々の八景更に氣比の月」
「고목 같은 이름 쓰누가, 그 곳의 가을달을 사랑하노라
ふるき名の角鹿や恋し秋の月」
「비 내리는 기비여, 달도 없고 씨름도 없네
月のみか雨に相撲もなかりけり」
「옷 압은 채 조개잡이 여덟 밫깔의 달
衣着て小貝拾ハんいろの月」
「눈물 난다. 갈 때마다 밟히는 모래벌의 이슬
なみだしくや遊行のもてる砂の露」
바쇼에게 여행 목적은 옛 노래 "와카의 명소" 를 방문해 전란의 격전지를 찾아 죽어간 선인들의
"영혼을 진혼" 하는 것이었는데, 본문에는 자연의 실제 풍경과 와카 속에 읊어진 풍경이
중첩되어 그려지니.... 옛 가인들의 시정(詩情) 과 교감 하면서 자신의 문장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바쇼 하이카이 세계는 세속을 떠나 자연에 칩거하면서 자연에 몰입하여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지만 자연과 합일하는 모습 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바쇼의 하이카이
에는 세속적인 해학성과 함께 또 인간으로서의 고독과 우수 가 깃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이치" 에 더 관심이 있었으니 시간 흐름을 초월해 고인들의 정취에 공감하려는
것이었다는데....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라고 불리는 “하이쿠(俳句)” 는
5· 7· 5 단 열일곱 자로 이뤄진 일본의 정형시이니, 바쇼의 하이쿠 일곱편을 옮겨봅니다.
“유별나구나/ 향기도 없는 풀에/ 머무는 나비”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소금 절인/ 도미 잇몸도 시리다 /생선 가게 좌판”
“방랑에 병들어/ 꿈은 시든 들판을 /헤매고 돈다”
“가진 것 하나/ 나의 생은 /가벼운 조롱박”
“들판의 해골 되리라/ 마음먹으니 몸에/스미는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