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1974년 부터 지금까지 대구 비산동, 남산동, 칠성동, 동인동에서 살아왔다.
대구에서는 가장 가난한 동네로, 8.15 해방이후에 해외에서의 귀향인, 6.25전쟁 피난민들이 많았다.
가난한 동네다 보니 집과 화실 임대료가 저렴하고, 주민들의 정이 많아서 타 지역으로 이사가는게 내키지 않았다.
2~30대 젊은 때, 동네 부녀자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다.
1945년 8.15 해방, 일제 강점기에 강제 동원과 이주를 당했던 동포들의 귀향이 시작된다. 만주와 중국에서 기차를 이용하여 대구로 온 귀향인은 약 26만 명(귀향동포를 위한 원호단체인 '재만귀향 전재자동맹'의 집계)이다. 당시 대구의 인구 21만 명 보다도 배 이상이 넘는 인원이다. 잠자리와 먹거리, 생필품의 부족으로 모든 물가가 폭등이 되고 큰 사회문제가 된다. 1946년 6월에는 큰 홍수를 겪으며 열악한 환경으로 콜레라 등 전염병 창궐로 사람들의 이동이 금지된다. (일제의 태평양 전쟁 말기, 조선의 식량수탈은 극에 달하였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식량 증식 노동에 동원되어 하루 한끼로 연명하며 강제노동을 하였다.) 해방이후에는 미군정의 잘못된 식량정책은, 귀향인들의 증가와 겹쳐서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났다. 부녀자들은 식량 투쟁을 시작, 대구역과 대구부 청사 앞으로 가서 '쌀을 달라'고 계속해서 시위를 벌였다. 철도와 전매청, 공장 노조원들도 적은 임금으로는 살 수가 없다면서 파업과 시위를 벌인다. 식량 부족으로 촉발된 투쟁은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경찰, 군인들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급기야 유혈 사태가 일어나며, 경상북도 전역으로 확산된다. 대구 경북 시민 약 8천 명 이상이 구속 수감 되었다. 1947년에 만들어진 대구여자경찰서의 여자경찰들은 특히 부녀자들을 무차별 끌고 갔다(끌려가 사망한 귀향 동포들의 수는 정확한 집계가 안된다).
대구 10월 항쟁은 전국으로 번져간다. 여순항쟁, 제주 4.3항쟁 등 처참하고 아픈 사건으로 남았다.
나는 30년 전 남산동 아미산 중턱에 작은 건물을 임대, 작품과 책, 기타 물건을 보관하였다. 건물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 "인부들과 함께 터파기 공사 도중에 수십 개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시청에 신고를 했고 수습하여 가져갔다. 주변의 건물들 터파기 공사에서도 유골들이 나왔다"고 한다. 6.25전쟁의 사망자인가 10월 항쟁으로 끌려가 죽은 시민들인가 확실치 않다. 나는 교의交椅(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는 나무로 만든 위패位牌 혹은 신주神主를 올려놓는 높은 나무의자)를 구했다. 그들의 영혼을 빌어주는 그리고 기도를 올렸다. 오랫동안 보관하고 밌던 교의를 꺼낸다. 대구 가창골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던 억울한 영혼들, 특히 '쌀을 달라'고 외쳤던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을 위한 '진혼곡鎭魂曲' 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하면서 기도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