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경의 말씀은 역사의 교훈을 그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어쩔 수 없이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 차원의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축적된 삶의 형태가 오늘의 지금 이 시간 현실화되고 있으며, 현재의 틀을 바탕으로 한 내일에 대한 상상력이 미래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의 지금 이 시간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역사적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또한 역사는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계시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많은 깨우침과 의미를 배우기도 합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오늘 제 1독서는 탈출기 3장의 말씀입니다. 모세는 온갖 우여곡절 속에서도 이집트 왕가의 특권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동족에게 폭력과 구타를 일삼는 이집트인을 때려눕혔습니다. 이 일이 파라오에게 알려지자 그는 미디안 땅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주어진 안락함을 버리고 불의에 항거하였던 어려운 시대를 고뇌하며 살아왔던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바로 그에게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직접 드러내시면서 커다란 소명을 맡기셨습니다. 그 하느님은 온갖 불의와 억압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이스라엘의 울음을 듣고 계셨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알려주십니다. 이미 세상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셨던 존재 그 자체, 꼭 존재할 곳에 반드시 언제나 존재하시는 그러한 분이십니다.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 역사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억압과 불의에 시달리는 억울한 자의 울부짖음을 외면치 아니하시는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 3천여 년 전, 모세를 부르시며 그에게 자유와 해방의 소명을 주셨던 하느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임무를 주시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삶
오늘 제2독서 1코린토 10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출애급의 교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영도 하에 무사히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이들은 힘든 사막의 여정 속에서 지난날의 노예생활을 잊고, 먹고 마실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평하였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집트에 있었을 때에는 고깃국이라도 먹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의 이 꼴은 무엇인가? 먹을 것은 고사하고 시원하게 마실 물조차 없지 않는가?” 이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고 불평하는 이들에게 벌을 주십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또 다른 경고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얼마나 잘 먹고 잘 마시고 더 좋은 차량과 얼마나 더 넓은 아파트가 필요해야 잘 산다고 생각합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만 발전된다면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른다 해도 좋다는 식의 생각은 광야에서의 유대인들의 사고와 너무 닮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사도 바오로의 교훈입니다.
해방의 기쁨은 그 의미를 깊이 느끼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세상의 물질적, 세속적 가치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더 커다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
오늘 루카복음은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회개와 보속의 시간입니다. 매주일 열심히 미사 참예를 하는 사람에게 무슨 회개가 필요한가 반문할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평일미사를 거르지 않고 하루에도 묵주기도를 수십 단씩 하는 사람이 무슨 회개를 해야 할까 생각할런지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오늘의 우리 신앙은 오로지 전례 행위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일미사에 참석했으니 우리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입니다. 고해소에서는 거의 대부분 고백이 주일미사를 빠졌다는 것입니다. 단지 주일미사를 참석하고 안하고가 고해성사의 척도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오늘날의 우리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의 성직 계급에 있는 분들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주교와 사제들의 성무활동은 전례 행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많은 신부들이 무척 바쁘다고 합니다. 해서 신자들은 사목자들과 만나고 싶어도 편히 면담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바쁜지 모르겠습니다. 골방에 숨어서 하루 온종일 기도를 해서 바쁜지, 아니면 골프를 비롯한 온갖 놀이에 투신을 해서 바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분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요엘2,12)
2009년 8월 15일자 시사주간지「시사 IN」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사회에서 가장 신뢰하는 종교로 천주교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천주교 66.6%, 불교 59.8%, 개신교 26.9% 순으로 타종교에 비해 교세가 적은 천주교가 국민들에게 가장 높은 신뢰감을 주고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래도 천주교가 이 사회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나름대로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몹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교회의 쥐꼬리만한 권력도 권력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그에 빌붙느라고 올곧은 소리 제대로 하는 사람 하나라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입니다.
소통의 부재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뿐만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기 싫은 소리는 아예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언론은 한낱 기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앵무새가 아무 뜻도 모르고 그냥 종알대듯이 비판 없는 교회의 언론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가난과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은 교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속의 권력에 질세라 교구에서, 본당에서 자기만의 성을 높이 쌓아가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는 이성이 작동되지 않는 야만의 사회입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도, 우리의 이 사회도 너무나도 뻔뻔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자신이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목적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모두가 가치관의 혼돈과 상실 속에서 가야 할 방향을 잊고 있거나 아니면 애써 외면하려는 것 같습니다. 현실을 직시해야만 하는 눈들이 모두들 멀었나 봅니다.
정치에 간섭하는 종교?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해방 직후 올바르고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분단의 비극적 상황과 이로 인한 전쟁과 독재와 지독한 부정부패였습니다. 4․19혁명이 일어나 다시 희망과 기대가 불타올랐지만 뜻한 바와는 반대로 자유민주정부가 군사 쿠테타에 유린되어 급기야는 군부독재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상황이었습니다. 1987년 6월 민중항쟁의 귀결은 대다수 민중의 뜻과는 상치되었습니다. 10년의 민주화 세력의 집권은 절차적 민주화의 여정 중, 빨간 신호등 앞에서 정지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올바로 살려고 노력하고, 이 땅에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 미래 세대에게 자랑스럽게 전하고자 노력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생채기를 냈습니다. 기를 써봐야 크게 나아질 것이 없다는 체념에 익숙하게 하였습니다. 때문에 변화와 개혁은 공연한 헛수고라는 정치적 무력감이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왜 종교가 정치에 간섭하느냐고 큰소리칩니다. 사실 이런 말은 기득권, 집권세력이 자기 권력의 유지 강화를 위한 방편으로 오랫동안 써 왔었던 말입니다. 또한 이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종교와 정치의 분리에 대해 국권을 강탈한 일본인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친일세력이 항상 외쳐왔던 말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 사목헌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치와 종교의 문제에 대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언제나 어디서나 참된 자유를 가지고 신앙을 선포하고, 사회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며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직무를 지장 없이 수행하고,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경우에는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해서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사목헌장 76항).
그렇습니다. 이는 당연한 일이며 당연한 권리행사이자 신자로서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례 때 그리스도의 왕직, 예언직, 사제직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바로 예언직의 소명을 우리 삶의 자리인 사회 환경 속에서 충실하게 수행해 나가는 것, 이것이 사목헌장 76항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사순절, 눈을 뜨는 시기
세상이 하도 어수선합니다. 합리적 사고가 무시당하여 올바른 이성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치를 외치기는 하지만 그것은 기득권자의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음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해서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탄식과 함께 신음으로 뱉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올바른 정신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내용들을 뻔뻔스럽게 마구 내뱉습니다. 어제의 말과 오늘의 말이 달라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습니다. 정의롭게 살기보다는 돈과 권력이 있는 자에게 줄을 서라고 부모들이 가르쳐야할 참담한 오늘입니다. 정의의 외침과 약자들의 울부짖음은 아예 들리지도 않습니다. 마치 종말의 파국을 향해 치닫는 듯한 오늘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회의 엄청난 병리현상에 대한 비판과 올바른 키잡이 역할을 해야 할 주요언론들은 이미 언론이기를 포기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그들 사주의 목적에 따라 교활한 술책과 언어의 유희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분명한 죄의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폭압자를 내리치시는 하느님의 엄청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을 못 본체 하지 않으셨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을 기만하는 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음을 찢으며 하느님께 되돌아가야 합니다.
정치적 무력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은 다음의 내세의 나라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건설해 나가야할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정의와 평화와 자유가 강물처럼 넘실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한 나라의 주춧돌은 바로 깨어있는 우리, 깨어있는 나 자신입니다. 눈을 크게, 똑바로 뜨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다시 태어나 하느님 나라 건설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이번 사순절이 그러한 기회였으면 합니다.
김홍진 (신부, 서울교구 문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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