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死刑)수의 대부가 된 판사 김홍섭을 다시 생각하다
세상이 지금보다 어려웠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우리 사회에 어른이 곳곳에 있었다.그중 한 사람이 법조계의 고 김홍섭 판사다.
그는 1915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에 에이브러햄 링컨 전을 읽고 감동하여 법률가가 되기를 꿈꾼다. 그리고 24세 때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다. 사법연수원생에게 가장 존경하는 법관을 꼽으라고 하니 김병로 대법원장과 김홍섭 판사를 선택했다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는데 이들을 기억하는 건 왜 그럴까?
김병로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 노력했고 김홍섭 판사는 청렴한 자세와 사도 판사로 타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형제도의 폐지를 부르짖었던 김 판사는 남달리 사형수에 깊은 동정을 쏟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법으로써 어쩔 수 없는 사형수에 대하여 종교적인 구원에 진력했다.
그가 바쁜 일과의 틈을 타서 사형수를 옥중으로 찾아다니며 그들의 정신적인 아버지가 되어 왔던 일은 유명하다. 늦은 나이에 천주교에 귀의 했는데 결혼 전에 가톨릭을 알았더라면 수도원에 들어갔을 거라는 부인의 말처럼 재직 시에도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했다.
퇴임 후에는 수도원의 종지기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소원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일찍 운명함으로써 이 소원은 이루지 못한다.
그는 양복을 지어 입는 일이 없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시장에서 중고품을 사 입었으며 오버는 미군 모포지에 물감을 들여서 입었다.
신발도 검정 고무신을 신고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판사였지만 판사 티는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전도하기 위하여 강원도에 다닐 때의 일화다. 버스가 검문소에 정차하여 경찰이 올라와 승객을 검문하였다.
그의 앞에 이르러“무엇 하는 사람이야?”하고 물었다. 그는“판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경찰은“판사는 무슨 판사야? 신분증 내놓아.”하고 소리쳤다. 신분증을 꺼내어 경관에게 공손히 내주면서 “판사를 판사라고 하지 무어라고 하겠습니까?”라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의 신분증에 대법원 판사임을 알아본 경관은 깜짝 놀라 깍듯이 경례하면서 용서를 청한 적이 있다. 몸이 아파 공용차를 타고 병원에 입원하러 간 적이 있다. 부인이 그를 부축하기 위해 차에 올랐다.
그러자 당신은 이 차를 탈 수 없다고 하며 내리라고 해서 부인은 부득이 택시를 타고 뒤따라갔다는 일화도 있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재판에 배석했던 다른 법관이 김 판사를 기억하며 쓴 글이 있다.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끔찍한 사건의 피고인을 앞에 놓고 자식에게 타이르듯 온갖 정성을 다하여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불행히 세계관이 달라서 여러분과 나는 자리를 달리하는 것입니다.”
물을 뿌린 듯 숨을 죽인 법정에 부드럽고 온화한 재판장의 말이 울려 나왔다.
피고인은 눈물을 흘리며 그들이 저지른 사실을 참회하듯 순순히 진술하였다. 선고하는 날“법의 이름으로 누구누구를 ...” 하다가 목이 메 말문이 막힌 재판장은 머리를 숙인 채 한참 동안 묵념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어느 편이 죄인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그 점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하며 형을 선고하였다. 김 판사는 선고를 내린 후 며칠 지난 다음, 교도소로 그들을 찾아갔다. 자기의 직책상 달리할 수 없어 판결을 내리지만 심히 미안한 일이라고 양해를 빌고 나서 가톨릭에 귀의하기를 권했다.
이렇게 하여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성탄 때가 되면 누구에게도 카드를 보내지 않았지만 전국 교도소에 있는 자기 대자에게는 매번 친필로서 뜻깊은 편지를 보냈다.
또한 박봉을 털어서 이들을 보살펴 주었지만 그런 일에 관해선 이야기하지 않아 자세히 알 길은 없다. 최근 뉴스를 보니 타의 모범이 될 법조계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전직 대법원장이 재직 중 소송을 거래했다고 해서 법정에 선다. 젊은 판사가 아버지뻘 되는 피고인에게 막말했다는 기사도 있다.
과연 돈도 없고 배경도 없는 불쌍한 서민의 눈물은 누가 닦아 줄 것인가? 경제의 발전으로 예전보다 먹고 살기가 나아졌다고는 하나 이렇게 마음이 공허한 것은 우리 곁에 있었으면 하는 어른의 부재 때문에도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