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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여행, 삶의 빛깔을 이야기하다 /문창고 교사 ㅡ정지성
Ⅰ.들어서는 말 – 류현진을 아시나요?
야구를 좋아하는 열혈 팬이 아니더라도 2019 메이저리그에서 최고의 활약을 한 류현진 선수를 모를 리가 없을 겁니다.
1987년 3월 생으로 올해 나이 만 32세, 인천 동산고등학교에서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야구 선수로서는
치명적인 토미 존 수술로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2차 2순위로 예상보다 밀려 한화이글스에 입단했던 투수.
하지만 그는 프로무대에서 팀의 성적과 상관없이 뛰어난 활약상을 보여 입단
첫 해 우리나라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신인왕과 최우수 선수상을 석권했고 메이저리그 LA다저스로
이적하고서도 좋은 성적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2014년 8월 14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엉덩이 부상을, 이듬해 시범 경기 도중에는 어깨 관절외순 파열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으며 시즌 아웃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많은 전문가들이나 야구 꽤나 해봤다는 사회인 야구 선수들은 조심스럽게 류현진 선수의 선수 생명이 마감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꾸준한 재활과 노력 덕분에 2019년 전반기 17경기 10승 2패 방어율 1.73, 99 탈삼진이라는 엄청난 성적으로 마무리합니다. 후반기 들어 체력적인 문제로 약간 침체하긴 했지만 2019 시즌을 방어률 2.32로 낮추며 아시아 투수로는 최초로 평균 자책점 1위를 차지하였고,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그 타이틀 홀더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류현진의 화려한 2019 시즌을 이끈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은 바로 다양한 구종입니다. MLB통계 사이트 중 하나인 팬그래프스닷컴은 류현진의 구종을 포심(32.1%), 체인지업(24.5%), 커터(21.1), 싱커(투심, 11.9%), 커브(10%), 슬라이더(0.3%)를 던졌다고 발표했습니다. 참고로 류현진 선수의 동료 커쇼는 포심,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4가지 구종을 던집니다. 구종을 엄밀히 나누어 구분해야 6가지지 패스트볼 구종의 구속 변화나 변화구들의 움직임, 방향이나 낙차를 따지면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볼 배합을 선보였습니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직구만 강점으로 가지고 있는 투수라면 타자들의 눈에 금방 공이 익어 많은 실점을 하게 될 것이 뻔한 것 같습니다. 결국 야구라는 승부의 세계에서 투수가 던지는 구질의 다양성은 팀의 운명을 결정짓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우리 교사와 아이들에게 다양성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Ⅱ. 교사와 학생들에게 다양성의 의미
앞에서 언급한 류현진 선수는 프로가 된 이후에도 다양한 구종을 선배들로부터 익힐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교사와 학생들에게 이 다양성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수업에 있어 다양한 방법들이 연구되고 과정중심평가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획일적인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수업의 방식은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대입을 위한 선발주의적 교육관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육의 본질을 이야기하면서 학생들의 성장을 도모하고 올바른 가치를 지향해야하는 것은 교사들이 지니고 있는 당연한 사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시라는 현실을 완벽히 벗어 던질 수 있는 교사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교육의 이상적인 가치와 현실적인 가치의 접점을 찾는 것을 목표로 두고 무엇이든지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류현진 선수가 프로가 된 이후에도 새로운 구종을 익히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말입니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의 열정적인 모습과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은 제 손을 거치고 아이들의 숨결이 불어 넣어질 때 훨씬
큰 힘을 발휘하고는 했습니다. 다양한 연수와 공부 모임에서 만난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통해
국어교육의 이상적 지향점과 현실적 지향점의 접점을 찾는 방법에 대해 제가 내린 결론은 학생들의
삶의 결을 수업에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육 현장에는 비슷한 아이들은 있어도 완벽히 동일한
아이들이 없는 것처럼 아이들 하나, 하나의 삶은 인생을 더 오래 살았다고 교사가 함부로 단정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빛깔이 존재했습니다. 존재만으로도 반짝이는 아이들의 삶이 현실적인 수업의 테두리
안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Ⅲ. 문학, 삶과 삶의 이야기
‘다양한 개개인의 삶이 모두 반짝이는 별처럼 오롯이 빛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한 끝에 학생들의 삶이 문학과 연결되고 그 연결지점이 다시 학생들의 삶으로 녹아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문학 속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과 연결하면서 자신의 또 다른 경험으로 확장하여 내면화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려고 했습니다. 문학을 통해 다양한 삶의 연결고리를 이어가려고 한 겁니다.
1) 집주인의 삶을 이해하기 – 잔서완석루를 찾아서, 송승훈 선생님과의 만남.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전국에서 가장 작은 도시의 학생들입니다. 수업은 교육과정에서 제시한 성취기준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다루는 것이라 학생들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게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학기행은 제가 발품을 팔고 준비한 만큼 우리 지역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다양한 삶의 빛깔을 아이들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경북교육청 연수원에서 한 학기 한 권 읽기와 관련한 연수를 들을 때였습니다. 제 나름대로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진행하고 있던 터라 궁금한 점을 질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강사로 오신 송승훈 선생님께서는 질문한 선생님들에게 책을 나눠 주셨습니다. 그 책이 바로 송승훈 선생님과 이일훈 건축가가 함께 쓴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이었습니다.
송승훈 선생님께서 본인의 학교 근처에 직접 집을 지으실 때 건축과 관련된 책 100권 정도를 읽고 가장 마음에 드는 건축가였던 이일훈 선생님을 찾아 가셨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일반 가정집 건축 자체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망설이다가 건축주의 철학과 심성에 감복하여 아주 오랜 기간 고민하며 집을 짓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은 건축주 송승훈 선생님과 건축가 이일훈 선생님이 집을 짓기 위해 주고 받은 이메일 88통을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책 자체에 두 분의 삶이 스며있었고 널따란 서재를 배경으로 한 표지사진을 보는 순간 아이들과 이 분들을 만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렵사리 송승훈 선생님께 살고 계신 집을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하시는지 여쭙고 학생들과 함께 가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자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반드시 돌아갈 때 청소를 한다는 조건과 학생들이 모두 책을 읽고 문학기행에 참여한다는 조건만 있었을 뿐 학생들과의 만남에 강의료조차 받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감사한 마음을 갚을 길은 최선을 다해 아이들과 문학기행을 준비해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만남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연구부와 상의하여 학생들에게 책을 한 권씩 구매해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문학기행 참여인원으로 정한 수보다 많은 학생들이 신청을 해서 모두 함께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책은 신청한 학생들에게 모두 제공하고 여름방학 보충 수업 기간에 특별 수업을 개설하여 거의 매일 학생들과 모여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삶과 연결 지을 수 있도록 자신에게 집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모둠별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도 하고 미래에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그려보거나, 로드뷰를 통해서 자신의 현재 집을 친구들에게 소개해 보기도 했습니다. 저 또한 학생들의 대화 내용을 지켜보면서 집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함께 하는 소감을 간략히 기록해서 남겼습니다. 건축가, 건축주, 독자, 교사, 학생의 삶이 어우러지는 현장에서
어느 누군가의 삶이 다른 이의 삶을 통해 풍성해지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드디어, 문학기행 당일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를 출발하여 정약용 유적지를 둘러보고 송승훈 선생님이 살고계신 남양주 장현읍의 ‘잔서완석루’를 찾았습니다. ‘잔서완석루’는 완당 김정희 선생의 서예로 유명하며, ‘낡은 책이 있는 거친 돌집’이라는 의미로 송승훈 선생님이 정성을 들여 꾸민 서재가 있는 이집과 잘 어울리는 당호였습니다. 인천교육청의 강의 일정으로 약속보다 조금 늦게 오신 송승훈 선생님은 저희를 배려하여 먼저 집에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게 해 주셨고 송 선생님의 어머님께 인사드리고 텃밭과 옥상과 서재 등을 여유있게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조금 늦게 시작하긴 했지만 송승훈 선생님과 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된 만남은 이번 문학기행의 백미였습니다. 참여한 모두에게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학생들의 작은 고민에도 진지하게 귀 기울여 주시고 선생님 경험에서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학생들과 교감하셨습니다.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 드시는지 부어 드시는지를 묻는 장난 섞인 질문에도 언짢아하시지 않을까 하는 저의 우려와 달리 거리낌 없이 답해 주시는 모습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학생들의 삶과 교감하기 위한 어른들의 자세는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서재의 2층까지 옹기종기 매달려서 송승훈 선생님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아이들은 정말 별처럼 빛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특별 주문, 집을 보러왔으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집을 느껴라! 선생님께서 직접 주무시는 방까지 선뜻 내어주시면서 직접 누워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송승훈 선생님께서 이메일을 통해 건축가 이일훈 선생님께 전달하고자 했던 삶의 철학인 채나눔과 바람이 잘 통하는 집이 왜 필요한 것인지 경험을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고도 학생들의 개별적인 꿈과 관련하여 고민을 소중히 들어주시고 정리하려고 쌓아두신 책더미에서 학생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골라 선물해주시는 모습과 싸인을 해 주십사 길게 늘어선 아이들의 책을 받아들고 학생이름을 일일이 물어 적으시고는 학생에게 맞는 각기 다른 좋은 말씀을 써 주시는 모습에서 같은 국어교사 이전에 인간적인 존경심마저 생겼습니다. 문학기행 이후 학생들로부터 받은 소감문에서도 학생들이 송승훈 선생님과의 대화가 학생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고 이를 통해 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성장할 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 역사의 속마음, 문학의 행간 읽기 – 서울의 고궁에서 추정경 작가와의 만남
영일고등학교 박민 선생님의 추천으로 김해시에서 실시되는 전국 청소년 인문학 읽기 대회에 참여했었습니다. 학교별로 정해진 도서를 읽고 저자와 함께 대화하며 1박 2일간 질문을 생성하고 거기에 대해 토론하고, 질문에 질문을 더하여 더욱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국내 최대 비경쟁토론대회였습니다.
‘미래를 말하다’라는 올해 대회 주제처럼 아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겠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엄청난 대회였던지라 거기에 참여했던 저와 학생들 모두는 한층 더 성장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학생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작가가 바로 추정경 작가였습니다. 저희 학생들이 배정받아 읽은 책의 작가는 아니지만 저도 추정경 작가의 멘트들이 가슴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특히나 광고를 하지 않고 오로지 글의 내용으로만 독자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굉장히 파격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운명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책이 홍보되고 청소년 문학상을 받게 되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는 말씀은 주어진 길에 충실한 사람이 얻게 되는 복이 무엇인지 이야기 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문학기행을 기획하면서 다른 작가들도 물색 중이었던 제가 학생들에게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 물어보자마자 학생들은 추정경 작가를 이야기했고, 대회 주최 측의 도움을 받아 추정경 작가와 연락이 닿을 수 있었습니다. 차분하고 빈틈없을 것 같은 외모와 달리 털털하고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추정경 작가는 자신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서 선뜻 도전해 보고 싶다는 의견과 함께 창덕궁에서 만날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책은 추정경 작가의 최근 작품인 ‘검은 개’와 ‘야사로 읽는 조선왕들의 속마음(이준원)’ 두 권으로 정했고 두 권 모두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했습니다.
추정경 작가의 ‘검은 개’는 촉망받던 주니어 테니스 선수 ‘임석’이 뜻하지 않게 사고에 휘말리면서 가해자가 되고 옆에서 곁을 지켜주던 친구들도 이 사건에 얽히고 설키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겉과 속마음의 차이를 넌지시 엿볼 수 있는 추리 소설이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추천해준 ‘야사로 읽는 조선왕들의 속마음’은 역사책이면서도 잘 읽히고 태조 이성계부터 순종까지 조선 27대 왕들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야사를 바탕으로 왕권계승과 권력유지의 암투 속에서 왕들이 보였던 인간적인 면모를 잘 그려낸 작품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굉장히 민감한 시기였고 창덕궁 주변으로 정치적인 주제로 시위와 집회가 열리고 있던 오늘날의 서울과 조선시대의 복잡한 권력 암투도 많이 닮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인간들에게 권력이란 무엇일지, 랭킹 1위, 정치적 명예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학생들이 지금과 과거를 연결지어 보기에는 아주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하늘에서 꿀이 떨어질 것 같이 청명하고 아름다웠던 가을 주말 창덕궁에서 추정경 작가와 문창고등학교 학생들이 만나 출발 전 자신이 맡았던 부분을 창덕궁의 여러 곳을 둘러보며 한 페이지씩 읽고 작가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정전 앞에서는 당시의 과거 시험을 재현한 한시 백일장 대회도 열리고 있어서 그 시절을 상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권력인 왕, 왕이 되려는 자와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자의 속마음. 그리고 그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인간의 이중적 면모가 현대인들에게도 그대로 드러나지 않나, 무엇이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게 했을지 많은 생각이 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조선의 역사를 왕조에 따라 살펴보면서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이야기의 배경이라는 느낌이 무척이나 새로웠다고 많은 학생들이 이야기했습니다.
시대와 시대를 뛰어넘는 교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리를 교태전 부근으로 옮겨 추정경 작가의 책인 ‘검은 개’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목의 의미, 테니스를 화제를 삼은 이유, 등장인물의 이름이 상징하는 의미, 현실 세계에서 존재하는 테니스의 비리와 그 예에 대해서 학생들이 진지하게 물어보았고 작가님의 정성어린 답변이 있었습니다. 저조차도 우리 아이들에게 저런 면모가 있었나 싶은 진지한 태도로 질문을 하고 깊이 사색해야 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질문들에 작가님도 학생들이 이 정도까지 읽고 올 줄 몰랐다며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작가님이 학생들의 책에 일일이 사인해주시고 마지막 배웅까지 해주셔서 저희 학생들도 직접 작가를 만났다는 설레는 경험과 잊지 못할 추억을 안고 다음 일정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흥망성쇠를 둘러보고 찾은 종묘와 남산의 일본 총독 관저터, 경복궁을 둘러보는 일정은 학생들에게 교실에서만 전달하려던 교과서의 지식으로는 충분히 전달할 수 없는 것들을 채울 수 있었다는 뿌듯함을 안겨주었습니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삶의 현장에서 학생들의 삶을 통해 작품을 이해시키기 위한 문학기행은 학생에게도 저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을 안겨주었습니다.
3)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이 없다 - 한 학기 한 권 읽기와 수학여행 연결하기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아무래도 ‘한 학기 한 권 읽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교과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고민해서 고른 책을 수업 중에 통으로 읽고 거기에 대해서 대화하거나 서평을 쓰는 활동으로 이어지는 ‘한 학기 한 권 읽기’ 활동은 수업 진행 방식도 파격적이지만 학생들이 책을 읽고 추후에 이루어지는 여러 활동들 또한 학생들의 삶과 내적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굉장히 의미있다고 판단했습니다.
2학년 부장을 맡고 다른 학교의 수학여행 방식을 참고하면서 수학여행을 준비하고 있던 저에게 이서고등학교 백규철 선생님의 수학여행 운영방법은 어마어마하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수학여행 코스며 진행방식뿐만 아니라 자료집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도 이서고등학교의 양식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백규철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희 학년의 수학여행이 획일적인 수학여행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비행기표를 구하는 문제 때문에 작년에 우연히 정해진 일정에 4.3 기념일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제주 4.3 사건’을 중심으로 코스와 일정을 짜봐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보고 즐기는 수학여행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자신들의 삶과 연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주도를 즐기고 느낄 수 있는 수학여행을 만들어 보고자 고민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현기영의 ‘순이삼촌’이었습니다. ‘한 학기 한 권 읽기’ 활동과 연계하여 약 8차시 정도 책을 읽고 활동을 시켰습니다. 단편모음집 전체를 읽히기에는 수학여행까지 일정이 빡빡했습니다. 그래서 단편집 안에서 ‘순이삼촌’을 가장 우선 읽도록 지도하고 읽기 속도에 따라 다 읽은 학생은 ‘도령마루의 까마귀’와 같은 상호텍스트성이 강한 작품 위주로 읽도록 지도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진행하면서 모둠별로 서로 다른 책을 읽도록 했었는데 학년 전체가 움직이는 체험학습과 연결하다 보니 반 전체가 동일한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진로활동 시간이나 반별 자율활동 시간에 담임 선생님들이 ‘알쓸신잡’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나 4.3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등을 꾸준히 보여주어 학생들의 관심도를 끌어 올렸습니다. 책을 충분히 읽은 후에는 모둠 안에서 개인적으로 2개의 질문을 만들고 모둠에서 공유한 뒤 모둠별 3개의 질문을 선정하여 칠판에 칸을 나누고 하나씩 적도록 했습니다. 청소년 전국 인문학 읽기 대회의 토론 주제 선정방식을 참고하여 모든 학생이 나와서 칠판에 적힌 질문들을 살펴보며 투표를 하고 가장 많은 표를 얻은 10개의 질문을 모둠의 기록이가 적어두고 그 가운데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질문 5개를 조에서 선정해서 책 대화하기를 진행하고 녹음, 기록하여 최종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처음 대화를 실시하면서 생각했던 것만큼 풍부한 대화나 보고서가 안 나온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진지하고 깊이 있는 대화가 이어졌고 그 결과는 학생들의 결과물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시작할 때보다 많이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학생들에게 수학여행과 관련하여 자신들이 느낀 바를 코스나 숙소에서 잠들기 직전까지의 일정에 반영해 볼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저와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서고등학교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점 우리 아이들만의 색깔로 수학여행이 채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마저도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4월 3일 당일은 ‘4.3 평화공원’ 주변이 복잡할 것으로 예상되어 수학여행 1일차인 4월 2일에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여러 코스를 돌면서 ‘생각할 시간’으로 하루를 채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SNS를 활용한 크라우드 펀딩을 실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냥 모금만 하기에는 충분한 공감대 형성도 어려울 것 같고 아쉬움이 있다는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수학여행 기간 중 학생들이 직접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공유한 뒤 예쁜 사진 몇 개를 골라 엽서를 만들어 모금에 참여한 분들에게 드리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학교에 홍보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활동 취지와 모금 방법 등을 안내했습니다. 생각보다 뜨거운 반응이 있었습니다. 반티를 제작하고 남은 돈을 그대로 기부한 반도 있었고, 아이의 이름으로 기부한 선생님과 갓 졸업한 학생들의 선배에서부터 학부모님들까지 60만원이 넘는 금액이 모였습니다.
생각보다 큰 금액이 모이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수학여행이 진행되어지자 준비하는 학생들의 사기가 조금 더 고무되었습니다. 모금한 돈은 대표학생들이 수학여행 첫날 ‘4.3 평화재단’을 찾아 직접 기부 했습니다.
‘순이삼촌’의 실제 배경지인 북촌마을에서는 옴팡밭을 둘러보고 너븐숭이 일대에 있는
아기 무덤에서 자신들이 준비한 사탕이며 장난감을 올려두고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문학과 현실, 과거와 현재의 접점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생동감 있게 담아낼 수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야간에 숙소에서는 조별로 희생자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을 포스트잇에 적고 추첨을 통하여 발표한 뒤 식당 한켠에 붙여두고 수학여행 내내 지켜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2일 차는 자연풍광 위주의 볼거리와 미션 수행으로 하루를 보내고 3일 차는 난타와 미로 게임, 바비큐 파티와 레크리에이션으로 이어지는 ‘즐길 거리’ 위주로 일정을 채웠습니다. 주제의 무게감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일정이었고 마지막 밤은 즐겁고 신나는 분위기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준비한 일정이었습니다. 교사와 학생들이 생각과 힘을 모아 프로그램을 짜고 학생들 스스로 진행을 맡으면서 그 어떤 수학여행보다도 의미 있고 즐거웠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Ⅳ. 마무리
모든 과목이 마찬가지겠지만 국어, 특히 문학은 인간의 보편적 삶의 이야기를 주제로 다루고 있고 그 안에서 생산되고 수용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일들과 개개인의 경험을 모두 나열할 수는 없겠지만 유형별로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들을 또 일반화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삶과 문학 속에 그려진 인물들의 삶을 조응시켜 볼 것이고 이런 과정에서 나름의 흥미와 감동 교훈 등을 얻으며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이런 학문적인 과정으로서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학생들은 현재 자신의 삶에서 문학에 녹아있는 인간들의 다양한 삶을 바라보고 새로운 의미를 재구성해 낼 것이며 그렇게 했을 때 이상적인 문학 독자로서 성장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삶의 결을 반영한 교육은 문학과목과 수업 자체에 대한 흥미와 만족도도 동반 상승시켜 학생들이 입시에서 문학을 대하는 자세도 훨씬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교육의 이상 추구에만 매몰되거나 반대로 성공적인 입시 결과라는 현실만 고집할 수 없는 오늘날의 교실 풍경에서 교사가 ‘문학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하는 고민은 굉장히 의미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교사인 우리는 다양한 삶이 공존하는 세상이라는 마운드 위에 학생들을 투수로 내세워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이라는 타자를 향해서 힘껏 공을 뿌려야 하는 우리 제자들에게 직구만 훈련시키는 것이 의미 있을까요?
타인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것만 주문할 것이 아니라 학생들 인생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
성공적인 투수로 학생들을 키우기 위해 문학과 삶 그 다양한 빛깔을 활용한 협주가 꼭 필요하리라 봅니다.
지난 여름 서울에서 있었던 서논술형평가 관련 연수에서 경희고 윤상철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에 묘한 감동을 남겼습니다.
우리 교육은 시대가 변화하고 그 변화에 발 맞추어 변화를 시도했었다고, 다시 말하자면 교육이 시대 변화보다
느리게 대응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구글에서 만든 알파고가 이세돌과 커제를 꺾고 나서야 4차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면서
교육의 변화를 부르짖었지만 이미 4차산업혁명 이후의 시대를 향해 세상은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교육이 늘 시대 변화라는 상차림의 설거지를 담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육이 앞으로 담당해야 하는 것은 설거지가 아니라 상차림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다양한 삶의 경험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그런 교육이야말로 인생이란 마운드
위의 학생들에게 다양한 구종을 장착 시키는 일임과 동시에 시대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상차림이 될 수 있는 일입니다.
Ⅴ. 참고자료 - 학생 소감문 및 교사 관찰일기
1)학생 소감문
잔서완석루로 갔다. 이곳은 국어선생님이신 송승훈 선생님의 집으로, 이곳에 온 이유는, 이번 문학기행의 주제 책이 송승훈 선생님과 이일훈 건축가님이 잔서완석루를 지으신 과정에 대하여 주고받으신 82통의 E-mail을 모아 낸 책 ‘제가살고싶은집은’ 이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집주변을 둘러보는데, 소박한 잔서완석루에 비해 앞집이 너무 화려하고 위압적이라서 살짝 놀랐다.
그러다가, 집에 먼저 들어가 있으라는 송승훈선생님의 연락이 와서, 집을 구경하게 되었다. 소박한 텃밭, 시원한 툇마루,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듯한 집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2층으로 올라가자, 끝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책의 양에 놀랐다. 마치 도서관에 온 것 같았다.
그렇게 책과 함께 집을 구경하는 와중, 송승훈 선생님 께서 일을 마치시고 오셨다.
바로 1,2학년이 모였다. 그러다가, 한명이 쭈뼛쭈뼛 사인을 부탁하자,
모두가 우르르 몰려들어 서로 사인을 받으려 난리 통이 벌어졌다. 결국 한 줄로 서서 사인을 받았는데,
놀라운 것은 아무도 같은 사인을 받지 않았다는 것 이었다. 잠시 본 것 뿐인데도,
선생님께서는 각자의 개성에 맞는 문구를 손수 적어 주셨다.
그 광경을 보며 이 선생님의 지식량 에 한 번 더 감탄을 지어냈다.
그렇게 사인회가 끝나고, Q&A가 시작되었다. 그중 몇 가지만 정리하여 보면,
Q1: 책을 고를 때 어떻게 고르십니까?
A1: 서울로 가면 주인이 추천 하는 책이 있는 도서관이 있습니다. 그런 곳 을 가거나, 도서 잡지에서 추천하는 책을 보거나, 직접 책을 찾을 때는 책을 추천하는 사람이나 저자의 사는 방식이나 살아온 길을 보지요. 지금 추천하는 책은 안재성 선생님이 지으신 경성 트로이카를 추천합니다.
Q2: 집을 다시 짓는다면?
A2: 옥상울타리를 더 높이고 싶어요. 지금 옥상 올라가면 앞집 TV 자막까지 다 보여서.... 그런 종류의 서로서로 불편한 것은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Q3: 앞집이 되게 크잖아요? 그런 앞집과 비교되기 마련인데, 잔서완석루가. 앞집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A3: 음. 저는 저 집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저 집에 사는 사람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읽은 책 중에 알랭드보통의 행복의 건축이라는 책을 보면, 집은 사는 사람의 가치관을 닮는다고 했어요. 이정도면 대답이 충분 했을까요?
이 정도로 Q&A를 정리하고, 약속대로 집을 청소해드리고 있는데, 담임선생님 (정지성 선생님)께서 나를 소개하셨다. 국어선생님이 꿈이라고 소개를 해 주셨는데, 그러자 갑자기 송승훈 선생님께서 책 더미를 뒤지더니, 한 책을 찾아 나에게 선물하시는 것이었다. 정말 감사했다. 거기서 더욱 놀라움을 나에게 더해준 것은, 다른 친구들이 섭섭하지 않게 50명 정도 되는 모든 학생에게 책을 선물해주시는 것이었다. 거기 있는 모든 책이 최저10000원이 될 터인데, 그것을 약 50명한테 선물해주는 그 거대한 정성에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이다.
그렇게 얼얼한 충격과 책을 안고, 수원화성으로 갔다.
- 문창고 2학년, 김종혁 학생의 글 중에서
“국어 선생님들 사이에서 연예인이라 불리는 송승훈 선생님을 만나러 갈 건데, 참가하고 싶은 사람 있어?”. 선생님의 말씀에 잠시의 고민도 없이 바로 손을 들었다. 다신 없을 기회일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여름방학 때 「제가.살고.싶은.집은」이라는 책을 읽고 여러 가지 토론활동을 했다.
건축주 송승훈 선생님이 살고 싶은 집을 건축가 이일훈 선생님에게 의뢰함으로써 집 설계에서부터
완공까지 e 메일을 보낸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글 속에 개인적인 철학까지 담아내
송승훈 선생님의 사는 삶의 방식을 들여다보게 해줬다. 특히 중간중간 채나눔과 툇마루를 많이
강조하셔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주체가 안됐다. 책을 읽을수록 낡은 책과 다듬지 않은 돌로 지은
집이라는 ‘잔서완석루’ 설계도면을 통해 입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모습이 눈 앞에 보였다.
기대만하던 11월3일이 되었다. 문학기행의 첫날이었다. 약 3시간의 버스와 15분 정도의 등산 후 ‘잔서완석루’에 도착했다. 맞은편에 위협적인 어마무시한 집들과는 달리 군더더기와 허세가 전혀 없는 집이었다. 과잉 편리하지도 과잉 화려하지도 과잉 정갈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고 편안한 공간이 여기저기 펼쳐졌다. 아래층은 거실이고 거실의 한 벽은 위가 트인 서재로 이곳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기도 하다. 거기서부터 책의 길이 시작된다. 집의 동서를 가로지르며 비스듬히 걷게 되는 복도는 ‘책의 길’이다. 양쪽으로 서가를 짜 넣어 오가면서 맘에 드는 책을 골라잡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책을 꺼내 한번 누워도 보았다. 확실히 경사가 있어 편안했다.
어떤 곳은 창문 밑에 처마가 있어 햇볕을 가려 어둑하고 편안했다. 덜렁 들린 누마루에 알맞게 경사가 져 여름 한낮 누워서 책 읽기에 제격인 공간이었다. 나도 커서 선생님처럼 원하는 대로 집을 짓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모서리를 꺾어 돌면 본격적인 서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위는 돔형으로 검은 벽돌이 천체처럼 덮였고 양 벽면 가득 책이 꽂혀있었다. 이곳은 책이 워낙 많아 개인 서재라기보다 공공 도서관 같았다. 하긴 책읽기를 원하는 학생과 선생님들에게 개방도 한다니 공공 도서관이래도 과언은 아니겠다 싶었다. 집 내부는 달팽이처럼 나선형으로 휘돈다.
그 이유는 채나눔 때문이라고 했다. 채나눔을 하면 집이 길어지지만 독립성이 강해진다고 했다. 서재를 지나 직각으로 돌아가면 이 집에서 가장 깊숙한 지점이었다. 방문을 닫고 누워 있으면 잠이 솔솔 올 것 같았다. 맞은편으로 방금 지나온 책의 길이 보이고 안마당 위로는 사각 하늘이 뚫려있고 자그만 앞뜰에는 마가목이 심겨 있었다. 집 구경이 끝난 후 선생님께 궁금한 점을 물어 봤다. “집을 다시 짓는다면 고칠 점은요?
글을 쓸 때 주의할 점은? 아이들의 책 읽는 속도가 다 다른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등 열 질문이 있었다. 선생님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하나하나 친절히 답해주셨다.
우리들의 궁금증을 다 해소해주신 후에야 다음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셨다. 3시간 동안 신세 졌기 때문에 각자 맡은 곳을 열심히 청소했다. 끝나고 헤어질 때도 가볍게 인사하시는 선생님에게 마지막까지 느낀 감정은 남들을 청량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문학기행 중 핵심인 송승훈 선생님과의 만남이 그렇게 끝나 버렸다.
- 문창고 2학년, 이건희 학생의 글 중에서
2)교사 관찰 일기
7월 23일
보충수업이 시작되면서 학생들과 함께 계획한 문학기행반 수업이 시작되었다. 아직 여러면에서 서툴긴 하지만 시골아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작가와의 대화를 송승훈 선생님 댁에서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1일차 아이들은 37쪽까지 책을 읽는다. 조용히 책을 읽으며 자신에게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을 요목조목 정리하면서 읽은 부분에서 궁금한 부분을 정리하게 했다. 시간이 조금은 부족했으나 더 나아지리라 생각한다.
책을 통해 아이들이 세상과 집을 바라보는 시각 특히 불편을 바라보는 시간이 개선되길 희망해본다. 지금도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덥다고 연락이 와서 많은 아이들이 자습하는 공간으로 내려갔더니 충분히 견딜만해 보였다. 불편함이 익숙지 않은 아이들과 나… 과연 나는 얼마나 불편할 자신이 있을까 아이들에게도 인내하는 법보다 불편할 수 있는 용기를 알려줘야겠다.
7월 24일
어제에 이어 오늘은 78쪽 7줄까지의 기록이다. 아이들은 졸릴 법도 한데 집중해서 잘 읽는다. 나의 읽기 습관을 참고하자면 빨리 읽은 글은 기억에 오래 남지 않고 천천히 읽는 글은 살에 박히듯 새로운 의미로 남아 있었다. 아이들에게 책을 완벽히 이해하고 의미 있는 활동으로 기억될 수 있는 수업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쉽지가 않다. 때론 식상한 것도 같고 동일한 패턴에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지겨워지기도 한다. 집중해서 읽는 아이들이 모습이 예쁘다. 동우는 졸린데 자면 안 된다고 하니 자기 머리를 배배 꼬면서 잠을 깨운다. 아니 반수면 상태다. 재미있는 모습이다. 모두를 다 데려가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누구를 자르고 누구를 데려가야 하는지… 김영서도 수면 중
7월 25일
책에 글이 많은 부분을 읽어 가면서 학생들의 읽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나름 집중해서 읽는 모습이 예쁘다. 문제는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문학기행을 가는 아이들과 정기적으로 만나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문학기행을 역사 문화 기행과 겸해서 진행하다 보니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신종찬 선생님이 많은 부분을 채워주고 계셔서 감사할 따름이지만 이동 거리나 코스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자는 친구들이 늘어간다. 송유민, 신동우, 류재균, 김종혁, 김영서…
7월 26일
아이들이 힘들어해서 지난 시간 마무리는 ‘잔서완석루’가 나온 tv 프로그램을 보여줬다. 아이들에게는 언론에 나왔다는 자체도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보인다. 연일 폭염이 계속되고 아이들과 책을 읽으면서 내가 왜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히려고 하는지 곰곰이 고민해봤다…
일단 송승훈 선생님의 집에 대한 철학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작가와 직접 만날 수 있는
좋은 경험을 해보게 도와주고 싶었다. 이런 외재적인 요인 말고는 없을까 고민해보니… 문득 할아버지가 지은 흙집을 헐고 다시 슬레이트 지붕을 올려 나름 개량식으로 지었던 학창 시절의 우리 집이 떠올랐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던 집이지만 가마솥에 불을 떼고 물을 끓여 온수로 사용했던 예전의 불편함을 벗어던진 안락한 보금자리였다. 먼 거리를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해 통학했던 나는 유독 땀이 많아 집에 돌아오면 교복 사이로 속살이 비칠 정도로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데도 요즘의 더위보다 아니 에어컨이 늘 돌아가고 있는 지금의 집과 직장보다 어머니가 결혼하실 때 혼수로 가져왔다는 오래된 삼성 선풍기 한 대만으로도 충분히 시원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할머니가 손수 시원하게 타주신 미숫가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집은… 그 구조나 재질이 주는 특유의 환경적 속성 이외에도 심리적으로 제공하는 안락함이 더위와 추위를 달래주기에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서완석루는 그런 집일까? 내가 살고 있는 집은 그런 집일까? 아이들에게 집이란? 아이들에게 학교가 그런 공간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쉽지 않은 질문들이다. 이번 수업을 통해 어떤 집, 학교,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봐야겠다.
자는 놈들이 늘어간다.. 학생들을 선발해야하는데… 이런 태도를 평가의 요소로 집어 넣을 수밖에 없어 안타깝다. 김영서, 김도영, 송유민, 박영주….신동우, 구본무, 방혁진, 권민서
7월 27일
조금 더 편안하고 쉴 수 있는 수업… 집에서 책을 읽는 것 같은 편안함을 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아이들에게 음악과 함께 책상만이 아니라 바닥과 창틀 어디에서 어떤 자세로 읽어도 상관없다고 했더니 의외로 졸거나 자는 학생이 현저히 줄었다. 음악은 물론 내가 임의로 선정하는 것이지만 요즘 즐겨 듣는 이승환의 노래로… 문득 아이들에게 집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궁금했다… 오늘은 아이들이 충분히 읽은 아이들에게 집은 어떤 의미이고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은 어떤 곳일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카페에 기록해 줄 것을 부탁해야겠다. 이미 절반의 시간이 흘렀다. 기록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부족하지만 아이들이 책을 몰입해서 읽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7월 30일
짧은 여름 방학의 절반이 지나가고 보충 수업도 반환점을 돌고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좀 더 효율적으로 책을 읽히고 이해시킬 수 있을지, 이번 문학기행이 삶에 작은 의미로 남을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쉽지는 않다…
오랜 만에 고향 친구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각자 다양한 삶을 살던 친구 녀석들이 이젠 거의 대부분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모임에 나온다. 어린 시절 주고받던 내용들과는 또 많이 다른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지만 예전 마을과 집에 대한 기억은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공통 화제다. 우리 모두의 집은 못사는 것도 아니었지만 부유한 것도 아니어서 시골에 가면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집들이었다. 각자의 집을 열심히도 들락거리던 우리는 집안의 형제자매와 가축들까지도 친근한 불알친구들이다…
친구들의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고향집에 들렀다. 집에 관학 책을 읽고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어서인지 집의 여러 곳들이 새로 보였다. 그 중 우리 고향집의 가장 큰 특징이 대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전북대 어떤 교수님이 치매 걸린 어머니를 기록하는 이야기가 방송된 적이 있는데 치매 걸린 노인은 부단히도 밥을 하고 도둑이 자신의 철 대문을 훔쳐갔었다면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보초를 서듯이 마당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집의 철대문은 치매 걸린 노인에게는 영광의 흔적이었다. 우리집 대문도 그랬다. 어려서 대문은 그 당시 흔히 보이던 그런 대문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많이 녹슬고 부식이 되자 아버지께서 직접 쇠파이프들을 용접으로 이어 붙이고 파란색으로 페인트칠을 한 대문을 우리는 한동안 사용했다. 그러다 어느날 할머니는 자신이 꼬깃꼬깃 모아둔 돈으로 동네에 대문 다시는 분에게 대문 제작을 부탁하셨다. 내가 중학교 정도 됐을 무렵이었나보다 지지대 삼을 벽면 기둥에 콘크리트를 추가로 바르고 몇 번의 용접과 작업 끝에 멋진 대문이 완성되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무궁화 무늬가 철 구조로 붙어있는 멋진 대문… 어쩜 할머니에게 그 대문은 삶의 보람이었고 영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참이나 우리는 그 대문을 사용했고 지금도 사용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차와 경운기가 들락 거려야 했던 탓에 대문이 있어도 활짝 열어젖혀 두고 있지만 스테인레스 손잡이 제외하고는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해 많이 부식되었다. 내가 호주에 가 있는 동안 아버지는 집을 넓히시기 위해 대문과 붙어있던 아래채를 헐었다… 그날 할머니는 술을 많이 드시고 집에 돌아와서 주사를 부리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손수 땀 흘려 지은 집의 마지막 흔적을 함부로 허무는 것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었다고 했다…. 그 당시 이해가기가 어려웠지만, 잔서완석루에 방문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낡은 대문을 마주하자 할머니에게 대문과 할아버지의 흔적은 자신의 삶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곧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계획 중이다. 경제적 능력도 집에 대한 철학적 고찰도 부족해 직접 짓지 못하고 있지만… 내 딸과 내 딸의 아이가 지금의 나처럼 집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어떤 아파트, 몇 평에 산다는 것이 삶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버린 지금의 시대에 집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면 이제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과 삶이 주목되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김영서, 구본무
8월 1일
어느덧 7월도 다 지나고 8월이 되었다. 새해 초 오랜 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기가 올해는 개띠의 해라서 82년생 개띠들에게 기운이 몰리는 한 해가 될 거라고 호기롭게 얘기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새로운 업무도 학년도 거기에서 나름의 결과도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으니 그 친구의 이야기가 틀린 건 또 아니지 싶다. 송승훈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과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요즘. 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건물의 이곳저곳과 동선에 대해서 관찰하게 되었다. 며칠 전에는 어머니께서 겨울에 너무 추우니 집을 내놔 볼까 농담 삼아 말씀하셨다. 우리집은 황토(황토시멘트)와 나무를 사용해서 만들 황토 한옥 2층 집이다.
내가 태어나서부터는 줄 곧 그 주소였는데 그 아버지는 그 이전부터 사셨다고 했고 할아버지가 지은 집을 허는 걸 보고 할머니가 주사도 부리셨다고 했으니 모르긴 해도 1세기 정도는 그 집터에 우리집 사람들이 자리잡고 산 셈이라고 본다. 어머니도 시집 오신 지 38년이 다 되셨는데 그런 양반이 거처를 옮기고 싶다고 말씀하실 정도면 겨울 찬 바람이 어머니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짐작이 간다… 인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머금고 있는 것이 집과 건물이 아닐까 그 자리에서 나와 동생이 태어나고 조부모님들도 세상과 이별하셨다. 다툼도 있었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도 있었고… 그런 사연을 두고 떠나는 것에 대한 고민을 선뜻 내 비추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할 텐데 어느 정도까지 불편함을 참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송승훈 선생님의 책이 떠올랐다… 집에는 건축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이 모두 고민되어야 하는데 그 접점이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나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의 공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김영서, 신동우, 김도영, 박영주, 김종혁, 이충민
8월 2일
내일이 수업의 마지막 일이라 문학기행 우선 참여 대상 학생을 선발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동안 수업시간에 자던 학생들을 따로 불러 주머니 속에 빨간 공과 노란 공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학생을 떨어뜨린 것이다. 책을 열심히 잘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떨어지는 학생이 있어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단편적인 시험이나 운에 의한 것들보다는 지속적인 관찰에 따라 탈락 대상을 선별하고 제비뽑기를 통해 정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하지만 이것조차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다른 학년 학생들 중에서 갑자기 못가는 학생이 생기면 1학년 학생들을 먼저 배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생긴 걸 보면 나만의 문제는 아니니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내일은 마지막 활동으로 이젤 패드에 자신의 집에서 가장 편안하거나 의미있는 공간을 서로 이야기를 통해 공유하고 자신이 집을 짓는다면 어떤 공간을 배치할 것인지 이야기해볼까 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내가 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쩌면 당연한 편견은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살 집이 아닌 집에 거액을 투자하고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일까… 집을 경제적 가치로 보기 시작하면서 집값은 날개를 단 듯 고공행진을 하고 있고 분양 아파트의 경쟁률은 수십, 수백 대 일에 달하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아직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나에게 새로운 아파트 분양에 자금을 투자하고 할 여력이 없기는 하지만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과연 나라고 그걸 피할 재간이 있는가 의심이 된다. 집이 넘쳐나지만서도 부족하다… 누구는 몇 채를 가지고 있고 누구는 평생 자기집을 갖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집을 경제적 잣대가 아니라 진정한 삶의 보금자리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이번 문학기행이 되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얼마나 불편함을 견딜 수 있을까? 되도록이면 편리함을 추구하되, 모두가 행복한 방법… 내 집을 마련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적 본능을 이익창출을 극대화 하는 방법으로 삼는 일이 정리되어야 가능할 듯하다…
아이들이 자신의 집을 갖고자 간절해지는 시간이 온다면 그때에는 개인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돈 많은 사람들이 수익률을 부풀릴 대상으로만 치부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